* 한국 근현대사*

2. 근대사회의 전개

1장 외세의 침략적 접근과 개항(P.38)


1. 흥선대원군

이름 이하응(李昰應). 자 시백(時伯). 호 석파(石坡). 시호 헌의(獻懿). 영조의 5대손(五代孫)이며 고종의 아버지이다. 1843년(헌종 9)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1846년 수릉천장도감(緩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이 된 후 종친부 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 ·도총관(都摠管) 등 한직(閑職)을 지내면서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勢道政治) 밑에서 불우한 생활을 하였다. 왕족에 대한 안동김씨의 감시가 심하자 보신책(保身策)으로 불량배와 어울려, 파락호(破落戶)로서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칭(卑稱)으로까지 불리며 안동김씨의 감시를 피하는 한편, 철종이 후사(後嗣)가 없이 병약해지자 조대비(趙大妃)에 접근하여 둘째 아들 명복(命福:고종의 兒名)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허락받았다.


1863년(철종 14) 철종이 죽고 조대비(趙大妃)에 의해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지고 어린 고종의 섭정이 되었다. 대권을 잡자 안동김씨의 주류(主流)를 숙청하고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부패관리를 적발하여 파직시켰다. 1847개 서원(書院)을 제외한 모든 서원을 철폐하고, 국가재정의 낭비와 당쟁의 요인을 없앴으며, 《육전조례(六典條例)》 《대전회통(大典會通)》 등을 간행하여 법률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정치 기강을 수립하였다.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의정부(議政府)와 삼군부(三軍府)를 두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시켰으며, 관복(官服)과 서민들의 의복제도를 개량하고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는 한편, 세제(稅制)를 개혁하여 귀족과 상민(常民)의 차별 없이 세금을 징수했으며, 조세(租稅)의 운반과정에서 조작되는 지방관들의 부정을 뿌리뽑기 위해 사창(社倉)을 세움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국민들의 생활이 다소 안정되고 국고(國庫)도 충실해졌다.


반면, 경복궁(景福宮)을 중건(重建)하면서 원납전(願納錢)을 발행하여 백성의 생활고가 가중되었으며, 1866년(고종 3) 병인양요에 이어 1871년 신미양요를 일으키고 천주교도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를 가하는 등 쇄국정치를 고집함으로써, 국제관계가 악화되고 외래문명의 흡수가 늦어지게 되었다. 또한, 섭정 10년 동안 반대세력이 형성되어, 며느리인 명성황후가 반대파를 포섭하고 고종이 친정(親政)을 계획하게 되자, 1873년 그의 실정(失政)에 대한 최익현(崔益鉉)의 탄핵을 받았다. 이에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자 운현궁(雲峴宮)으로 은퇴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다시 정권을 잡고 난의 뒷수습에 힘썼으나, 명성황후의 책동으로 청(淸)나라 군사가 출동하고 톈진[天津]에 연행되어 바오딩부[保定府]에 4년간 유폐되었다. 1885년 귀국하여 운현궁에 칩거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던 중 1887년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결탁하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장남 재황(載晃)을 옹립하여 재집권하려다가 실패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나자 일본에 의해 영립되어 친청파(親淸派)인 사대당(事大黨)을 축출하고 갑오개혁이 시작되었으나, 집정(執政)이 어렵게 되자 청나라와 통모(通謀)하다가 쫓겨났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세력이 강성해졌으나, 3국(독일 ·프랑스 ·러시아)의 간섭으로 친러파가 등장하여 민씨 일파가 득세하자, 1895년 일본의 책략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때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시해되어 일본 공사 미우라고로[三浦梧樓]가 본국으로 소환된 후 정권을 내놓고 은퇴하였다. 1907년(광무 11) 대원왕(大院王)에 추봉(追封)되었다.


【참고사이트】 

1. 흥선대원군에 대하여

2. 흥선대원군 사진

3. 흥선대원군 뉴스영상

4. 운현궁 동영상

5. 흥선대원군 참고문서

6. 구한말의 경복궁사진


 

 

2.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 P.38)

 한 ·일수호조약(韓日修好條約)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이라고도 한다. 이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종래의 전통적이고 봉건적인 통문관계(通文關係)가 파괴되고, 국제법적인 토대 위에서 외교관계가 성립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의 강압 아래서 맺어진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라는 데 특징이 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맞서 개화론자들은 부국강병을 위해서 개화사상을 도입하고 문호를 개방하여 대외통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즈음 조선 조정 내에서의 권력투쟁으로 대원군이 하야하게 되자 이러한 국내의 정황을 탐문한 일본은 1875년 통교교섭을 위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해왔으나 교섭은 성립되지 않았다. 이에 일본 정부는 측량을 빙자하여 군함 운요호[雲揚號]를 조선 근해에 파견하여 부산에서 영흥만(永興灣)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의 해로측량과 아울러 함포(艦砲)시위를 벌였다. 또한 운요호를 강화도 앞바다에 재차 출동시켜 초지진(草芝鎭)의 수비병들이 발포하는 사태를 유발하게 하였다. 1876년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던 일본 정부에서는 전권대신(全權大臣) 일행을 조선에 파견하여 운요호의 포격에 대하여 힐문함과 아울러 개항을 강요하였다. 2월에는 일본 사신 일행이 군함 2척, 운송선(運送船) 3척에 약 4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강화도 갑곶(甲串)에 상륙하여 협상을 강요해왔다. 이에 조선 정부는 국제관계의 대세에 따라 수호통상의 관계를 맺기로 결정하고 신헌(申櫶)을 강화도에 파견하여 일본 사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와 협상하게 한 결과, 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의 무력시위 아래 체결된 조약은 모두 12개조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에는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세력을 조선에 침투시키려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제1조에서 조선은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되어 있으나, 이의 목적은 조선에서 청(淸)나라의 종주권을 배격함으로써 청나라의 간섭없이 조선에 대한 침략을 자행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데 있다. 제5조에서 조약이 체결된 후 조선 정부는 20개월 이내에 부산과 그 밖의 2개 항구를 개항할 것을 규정하고, 2개 항구의 선정은 일본의 임의에 맡길 것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동해안에는 원산이, 서해안에는 인천이 각각 선정되었으나, 다만 인천항으로부터의 미곡 수출만은 금지되었다.


  또한 제4조에서는 개항장 내에 조계(租界)를 설정하여 그곳에서의 일본 상인의 자유로운 무역과 가옥의 조영(造營) 등 거주의 편의를 제공할 것을 규정하였다. 제7조에서는 일본이 조선의 연해(沿海) ·도서(島嶼) ·암초(岩礁) 등을 자유로이 측량하고 해도(海圖)를 작성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제8조와 제10조에는 개항장에서의 일본인 범죄자들에 대해 현지에 파견된 일본영사가 재판한다는 치외법권의 조항이 명시되었다. 이 조약에 규정되어 있는 바와 같이 일본은 개항장을 통해서 일본인을 조선에 침투시키고, 여기에 조차지(租借地)를 확보하여 일본세력의 전초지로 삼고자 하였다. 아울러 치외법권을 설정하여 일본인 상인들의 불법적이고 방자스런 행동에 대해서 조선의 사법권(司法權)이 미칠 수 없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불평등한 조약으로 하여 조선은 서양 여러 나라와 통상을 시작하게 되고,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서양의 신문명을 수입하는 반면에 열강의 침략을 받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1)〈강화도조약 전문 - 한글해석〉

* 수호조규(修好條規)

대일본국과 대조선국은 원래부터 우의를 두터이 하여온 지가 여러 해 되었으나 지금 두 나라의 우의가 미흡한 것을 고려하여 다시 옛날의 좋은 관계를 회복하여 친목을 공고히 한다. 이는 일본국 정부가 선발한 특명 전권 변리 대신인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 흑전청륭(구로다 기요타카)과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인 의관 정상형(이노우에 가오루)이 조선국 강화부에 와서 조선국 정부가 선발한 판중추부사 신헌과 부총관 윤자승과 함께 각기 지시를 받들고 조항을 토의 결정한 것으로써 아래에 열거한다.


제1조.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써 일본국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이제부터 양국은 화친한 사실을 표시하려면 모름지기 서로 동등한 예의로 대우하여야 하고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권리를 침범하거나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이전부터 사귀어온 정의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여러 가지 규례들을 일체 없애고 되도록 너그러우며 융통성있는 규정을 만들어서 영구히 서로 편안하도록 한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에 가서 직접 예조판서를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당 사신이 주재하는 기간은 다 그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조선국 정부도 또한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국 동경에 가서 직접 외무경을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당 조선국 사신이 주재하는 기간도 역시 그 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제3조.

이제부터 두 나라 사이에 오고가는 공문은 일본은 자기 나라 글을 쓰되 지금부터 10년 동안은 따로 한문으로 번역한 것 한 본을 첨부하며 조선은 한문을 쓴다.


제4조.

조선국 부산 초량항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 공관이 세워져있어 양국 백성들의 통상 지구로 되어왔다. 지금은 응당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 등의 일은 없애버리고 새로 만든 조약에 준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한다. 조선국 정부는 제5조에 실린 두 곳의 항구를 개항하여 일본국 백성들이 오가면서 통상하게 하며 해당 지방에서 세를 내고 이용하는 땅에 집을 짓거나 혹은 임시로 거주하는 사람들의 집을 짓는 것은 각기 편리대로 하게 한다.


제5조.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 중에서 연해의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두 곳을 골라서 지명을 지정한다. 개항 기간은 일본 역서로는 명치 9년 2월, 조선 역서로서는 병자년 2월부터 계산하여 모두 20개월 안으로 한다.


제6조.

이제부터 일본국의 배가 조선국 연해에서 혹 큰 바람을 만나거나 혹 땔 나무와 식량이 떨어져서 지정된 항구까지 갈 수 없을 때에는 즉시 가닿은 곳의 연안 항구에 들어가서 위험을 피하고 부족되는 것을 보충할 수 있으며 배의 기구를 수리하고 땔나무를 사는 일 등은 그 지방에서 공급하며 그에 대한 비용은 반드시 선주가 배상해야 한다.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지방의 관리와 백성들은 특별히 진심으로 돌보아서 구원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도록 하며 보충해 주는 데서 아낌이 없어야 한다. 혹시 양국의 배가 바다에서 파괴되어 배에 탔던 사람들이 표류되어 와닿았을 경우에는 그들이 가닿은 곳의 지방 사람들이 즉시 구원하여 생명을 건져주고 지방관에 보고하며 해당 관청에서는 본국으로 호송하거나 가까이에 주재하는 본국 관리에게 넘겨준다.


제7조.

조선국 연해의 섬과 암초를 이전에 자세히 조사한 것이 없어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들이 수시로 해안을 측량하여 위치와 깊이를 재고 도면을 만들어서 양국의 배와 사람들이 위험한 곳을 피하고 안전한 데로 다닐 수 있도록 한다.


제8조.

이제부터 일본국의 정부는 조선에서 지정한 각 항구에 일본 상인을 관리하는 관청을 수시로 설치하고 양국에 관계되는 안건이 제기되면 소재지의 지방 장관과 만나서 토의처리한다.


제9조.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은 이상 피차 백성들은 각기 마음대로 무역하며 양국관리들은 조금도 간섭할 수 없고 또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도 없다. 만일 양국 상인들이 값을 속여서 팔거나 대차료를 물지 않는 등의 일이 있으면 양국 관리들이 빚진 상인들을 엄히 잡아서 빚을 갚게 한다. 단 양국 정부가 대신 갚아줄 수는 없다.


제10조.

일본국 사람들이 조선국의 지정한 항구에서 죄를 저질렀을 경우 만일 조선과 관계되면 모두 일본국에 돌려보내어 조사 판결하게 하며 조선 사람이 죄를 저질렀을 경우 일본과 관계되면 모두 조선 관청에 넘겨서 조사 판결하게 하되 각기 자기 나라의 법조문에 근거하며 조금이라도 감싸주거나 비호함이 없이 되도록 공평하고 정당하게 처리한다.


제11조.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은 이상 따로 통상 규정을 작성하여 양국 상인들의 편리를 도모한다. 그리고 지금 토의하여 작성한 각 조항 중에서 다시 보충해야 할 세칙은 조목에 따라 지금부터 1개월 안에 양국에서 따로 위원을 파견하여 조선국의 경성이나 혹은 강화부에서 만나 토의결정한다.


제12조.

이상의 11개 조항을 조약으로 토의 결정한 이날부터 양국은 성실히 준수시행하며 양국 정부는 다시 조항을 고칠 수 없으며 영구히 성실하게 준수함으로써 우의를 두텁게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조약 2본을 작성하여 양국에서 위임된 대신들이 각기 날인하고 서로 교환하여 증거로 삼는다.


대조선국 개국 485년 병자년 2월 2일


대관 판중추부사 신헌

부관 도총부 부총관 윤자승

대일본 기원 2536년 명치 9년 2월 6일

대일본국 특명 전권 변리 대신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 흑전청륭(구로다 기요타카)

대일본국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 의관 정상형(이노우에 가오루)


【참고 사이트】

1) 강화도 조약 소개

2) 강화도 조약문 사진

3) 운요호사건 방송영상(명성황후)

4) 강화도 조약 방송영상(명성황후中)

5) 강화도 조약 현장사진

6) 강화도 조약 전문 확대사진


 

 

 

3.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개항(P. 40)

 

1) 제국주의의 역사적 개념

제국주의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적 경제사적 관점에서 자주 거론하게 되는데, 역사적인 관점에서의 제국주의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제국주의는 그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제국' 과 '-주의' 의 말이 합치된 말이다. 원래의 제국의 의미는 국내의 (통치)권력을 나타내기 위하여 쓰여 졌으나 역사적으로 로마제국, 페르시아제국, 알렉산더제국, 나폴레옹제국 등등 한 민족의 타 지역, 민족을 지배하는 개념으로서 통용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산업의 발달과 함께 유럽의 여러 선진산업자본국가 들이 소비시장, 원료, 영토의 확장 등을 목표로 19C 전 세계를 식민지화 하였다. 이의 대표적인 것이 '삼각무역'으로 식민지에서 원료를 획득 후, 가공 처리하여 다시 식민지에 되팔면서 다량의 이득을 획득하였다. 이와 함께 무임금을 위한 노예매매(노예시장)도 성행하였다. 이러한 배경 하에 제국주의는 19C 에 나타난 선진 자본 국가들의 침략적 성향으로 볼 수 있으며, 이와 같은 제국주의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꿔놓는 영향력을 끼쳤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 19세기 초.중반 열강의 한반도 정책

19C는 동아시아가 서양제국들에 의해 영토와 주권을 유린당했던 시기였다. 중국의 경우 영국과의 1,2차 아편전쟁으로 인해 일부 영토를 할양하고, 특정 지역에 불평등 조약을 맺었으며, 일본은 미국의 통상압력에 굴복하여 문호를 개방하였고, 조선의 경우 대원군이 집권하던 시기 에 이르러 외국의 통상압력이 거세어 졌고,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이 발생하였다.


* 19C 초ㆍ중반 열강의 조선침략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프랑스 : 프랑스의 경우 통상보다 포교에 더 큰 비중을 둠.

 영국: 신교 전파와 교역을 목적에 둠.

 러시아 : 통상과 영토를 목적에 둠.

 미국 : 통상조약체결을 위함.


이 가운데, 프랑스와의 병인양요, 미국과의 신미양요가 발생했고, 독일상인 오페르트에 의해 대원군 아버지의 묘인 남연군묘 도굴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의해 당시의 집권자였던 대원군은 척화를 주장하였고, 문호를 개방하려 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매천야록에 대부분 수록됨.) 19C 중반에 이르러 열강은 각국의 문제로 인하여 조선에 대한 관심이 약화되게 된다. 그리고.. 조선을 넘보는 열강으로는 일본이 새롭게 대두되게 된다.


영국-일본 : 1874년, 주중 영국공사가 북경을 방문한 일본의 오오구보에게 전신하기를... 일본이 조               선을 침략하면 묵인해 주겠다. 당시, 영국은 중국에 대해 집중. 일본은 대만정벌

 

미국-일본 : 1875년, 미국공사 Bingham은 이노우에 副全權에게 일본원정 小史를 기증. 『일본원정               小史』는 미국이 일본의 문호를 개방시킨 과정이 적혀있는 책으로 일본은 그 책을 바탕              으로 후에 조선을 개방시킴.


일본 : 1854~56년, 征韓論(조선정벌론) 대두. 56년,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 74년, 대만점령.


이와 함께 당시의 조선의 정세를 살펴보도록 하자. 당시의 정권은 대원군이 잡고 있었으며, 권력구조가 안동 김씨세력의 약화→종친부의 기능 강화 로 변모하고, 준파인, 남인, 북인을 등용하던 때이다. 대원군은 왕권을 견실히 하기 위해, 경복궁 중건, 군비증강, 재정확충, 서원 철폐령 등의 정책을 펴고 있었다. <국내적> 이후 1873년 대원군이 하야하고 민씨 정권이 수립되게 되면서 조선에 불리한 상황이 전개된다.


 3) 조약의 불평등성의 내용

ㆍ조일수호조규 -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지만 조선에 불리한 점이 많이 적용되었다. 이는 사법, 영토,영해에 이르는 정치 군사부분에서 관세주권 침탈, 종속적 무관세 무역, 자유무역의 강제와 해운의 독점, 연안무역 특권 등의 경제 통상부분에 이르기 까지 일방적으로 조선에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이는 일본의 조선침략의 시작으로 볼 수 있으며, 특히, 경제관련 부분의 불평등 조항을 통해 조선의 상권을 장악하려는 속셈을 엿 볼 수 있다.


ㆍ조미통상조약(1882) - 청의 권유로 인하여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당시의 목적은 미국을 통해 타국가의 조선침략을 방어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일본과 동등한 최혜국대우를 받기 위한 일환이었다는 점에서 일본과 다를 바 없는 불평등 조약이라 할 수 있다.


 ㆍ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1882) - 종래의 종속 관계로 부터  상병정책에 의한 실질적인 조선 지배를 꾀함, 군사적 목적 하에 전선부설권 획득, 한성개잔, 내지채판권,육로 통상권, 저율관세, 연안어업권, 감시단 파견 등등의 주로 경제적 부분에 있어서의 불평등 조항


ㆍ조영수호통상조약(1883) - 기존의 조영통상조약에다가 청나라의 선례를 들어 한성개잔, 내지통상권을 덧붙여 맺은 조약.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한반도 주변국들과 맺은 조약은 대부분 불평등 조약이었음을 알 수 있고, 일본과의 조약의 경우, 이후 식민의 지배를 위한 先작업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참고사이트】

1. 구한말의 세계정세

2. 서양인의 눈으로본 100년전 조선의 모습

3. 대한제국주재 해외대사들 사진


 

 

 

4. 세도정치 (勢道政治)(P.42)

조선 후기 총신(寵臣) 또는 척신(戚臣)이 국왕의 신임을 받아 국정을 장악하였던 일종의 신임정치. 원 래는 세도인심(世道人心)을 바로잡는다는 의미에서 <세도>라고 하였으나, 사림정치가 지향하던 세도의 전 형(典型)과 다른 변질된 형태의 독재정치였기 때문에 세도(勢道) 또는 세도(勢塗)라고 하였다. 세도정치는 조선 정조 때 홍국영(洪國滎)이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국정을 천단(擅斷)했던 것을 그 효시로 삼고 있다.


홍 국영은 정조 가 세손으로 있을 때 정후겸(鄭厚謙)·흥인한(洪麟漢) 등의 위협에서 그를 보호하여 무사히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한 공으로 도승지(都承旨) 겸 금위대장(禁衛大將)에 임명되어, 정사가 그에 의해 상주(上奏)되고 그를 통하여 하 달되는 등 정치창구의 막강한 권한이 위임되었다. 또한 정치기반을 굳히기 위해 누이동생을 정조 에게 바쳐 원빈(元嬪)으로 삼았고, 궁중의 숙위소(宿衛所)에 머물면서 관리의 임면(任免), 왕명의 출납, 군기국무(軍機國務)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사를 좌우함으로써 <세도재상>이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그의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왕 의 친정(親政)을 바라는 사림의 여론으로 4년 만에 추방되어 일단 세도정치가 종식되었다. 그러나 정조가 죽고 12세의 순조가 즉위하자, 정조의 유탁(遺託)을 받은 김조순(金祖淳)이 정권을 잡게 되었고, 이듬해 그의 딸을 왕 비로 삼으면서 다시 외척 안동김씨에 의한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철종 때까지 약60년 동 안 계속되었다. 헌종 때에 는 모후(母后)인 신정왕후(神貞王后)의 친정세력에 의해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세도 정치가 잠깐 성립하기도 하였으나, 안동김씨 세력은 여전히 꺾이지 않았다.


세도정치 기간 중에는 비록 왕족이라 하더라도 김씨의 세도에 억눌려 살아야 하였으며 심한 경우에는 역모로 몰려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 에 따라 삼정이 문란해지고 정치 의 기강도 허물어져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되고 각처에서 크고 작은 민란이 일어났다. 이어 고종이 즉위한 뒤 생부인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게 되자, 안동김씨의 세력을 꺾고 한때 독자적인 세도정치를 이룩하여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의 폐단이 없어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흥선 대원군이 명성황후 세력에 의해 10년 만에 권좌에서 밀려난 이후부터 을미사변 때까지 민씨 일족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가 계속되었다. 조선말기 1세기 동안 계속되었던 세도 정치의 특색은 외척에 의한 국정의 천단이라는 점에 있었고, 그 주요원인은 영조 때부터 싹튼 당파싸움과 국왕 이 유약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참고사이트】

1. 세도정치에 대해서


 

 

 

5. 이양선(異樣船)의 출몰(P. 43)

이양선이란, 우리나라 연해에 나타난 외국 선박으로서, 모양이 종래 우리나라의 배와 다르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이단선(異團船), 황당선(荒唐船)이라고도 하였다. 우리나라 기록에 의하면, 1735년(영조 11) 황해도 초도에, 1780년(정조 4) 전라도 흑산도에, 1797년(정조 21) 경상도 동래에 이양선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 후, 1832년 영국의 로드 암허스트 호가 비로소 공공연히 무역을 요구해 왔고, 1845년(현종 11)에는 영국의 사마찰 호가 연해를 측량하고 돌아갔다. 이를 전후하여, 헤아릴 수 없는 이양선이 연해안에 나타났는데, 이 같은 움직임은 천주교의 유포와 더불어 불안해하고 있던 당시의 민심을 더욱 불안하게 하였다.


【참고사이트】

1. 이양선 출몰 지도

2. 이양선 사진

3. 쇄국과 개항에 대한 방송영상


 

 

 

6. 비변사(P.44)

비국(備局)·주사(籌司)라고도 한다. 조선의 군사행정은 국방부격인 병조에서 관장하였는데, 외적의 침입 등 변방에 국가적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병조 단독으로 군사 문제를 처결할 수 없어, 의정부와 육조(六曹)의 대신, 그리고 변방의 일을 잘 아는 지변사재상(知邊司宰相:경상도·전라도·평안도·함경도의 관찰사와 병사(兵使)·수사(水使)를 지낸 종2품 이상의 관원)으로 구성한 회의에서 협의,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는 대개 적의 침입이 있다는 보고를 받은 연후에 소집되어 즉각 대처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남쪽 해안과 북쪽 국경지대에 대한 국방대책을 사전에 마련하기 위해, 1517년(중종 12) 6월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초기에는 1524년의 여연(閭延)·무창(茂昌)에 침입한 야인(野人)을 격퇴할 때, 1544년 사량왜변(蛇梁倭變)이 일어났을 때,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이 일어났을 때와, 기타 변방에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만 활동하였다.


또, 청사가 설치되고 관원이 임명된 것도 1555년이었다. 이때에는 변방의 군무 외에도 전국의 군무를 모두 처리하였기 때문에, 주무대신인 병조판서와 국가 최고행정기관인 의정대신(議政大臣)도 군사기밀·군무를 알지 못하는 폐단이 생겨, 행정체계가 무너진다는 비판이 일어 폐지론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국가의 모든 행정이 전쟁 수행에 직결되자, 비변사의 기구가 강화되고 권한도 크게 확대되었다. 따라서 의정(議政)·판서·오군문(五軍門)의 장, 사도유수(四都留守) 등 국가 주요기관의 장이 모두 도제조(都提調) ·제조(提調)가 되어 이에 참여하였으며, 국방문제뿐만 아니라 외교·산업·교통·통신 등 주요 국정(國政) 전반을 비변사회의에서 토의·결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국가 최고행정기관인 의정부와 육조는 실권이 없어 제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관원으로는 도제조·제조·부제조·낭청(郞廳)을 두었는데, 도제조는 시임(時任:現任) 삼의정(三議政)과 과거에 의정을 지낸 사람이 자동적으로 겸임하게 하였다. 제조는 처음엔 지변사 재상, 이(吏)·호(戶)·예(禮)·병(兵)의 4판서, 강화유수(江華留守)가 겸임하였으며, 부제조는 정3품 당상관의 문관 중에서 병사에 능한 사람을 뽑아 임명하였다. 이들 도제조 ·제조 ·부제조를 비변사 당상이라 하였다. 또한 이중에서 병무에 통달한 사람 3명을 뽑아 유사당상(有司堂上:常任委員)으로 임명하여, 매일 비변사에 나가 군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그 뒤 훈련도감·대제학·형조판서·개성유수(開城留守)·어영대장(御營大將)·수어사(守禦使)·총융사(摠戎使)·금위대장(禁衛大將)·수원유수·광주유수(廣州留守) 등도 제조를 겸직하게 하여, 비변사 당상의 수는 수십 명에 이르렀다. 1713년(숙종 39)에는 8도구관당상제(八道勾管堂上制)를 두어 각 도에 1명의 구관당상관이 군무를 분담하여 그 도의 장계(狀啓)와 문부(文簿)를 처리하고, 다시 4명의 읍사당을 두어 각기 2도의 군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또한, 낭청은 종6품으로 12명을 두었는데, 1명은 병조의 무비사(武備司) 낭청이 겸직하고, 3명은 문관, 8명은 무관 중에서 임명하였다. 이 밖에도 잡무를 맡아본 서리(書吏) 16명, 서사(書寫) 1명을 두었고, 잡역을 맡아본 고직(庫直) 2명, 사령(使令) 16명, 청직(廳直) 1명, 문서직(文書直), 수직군사(守直軍士) 3명, 발군(撥軍) 3명 등을 두었다.


여기에서 토의 ·결정된 중요사항을 기록하여 1년에 1권씩(사건이 많을 때는 2∼3권)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을 엮어냈다. 현존하는 것으로는 임진왜란 이전의 것은 없고, 1617년(광해군 9)부터 1892년(고종 29)까지 등록 273권이 있다. 행정상의 질서, 기능상의 중복, 그리고 권한의 한계성 등 때문에 폐지론이 여러 차례 제기되었으나 후기까지 존속하다가, 1865년 대원군이 집정하면서 의정부와 비변사의 한계를 규정, 국정 의결권을 의정부에 이관하면서 그 기능이 약화되었다. 이후 3군부(三軍府) 제도를 부활시켜 군무를 처리하게 함으로써 폐지되었다.


【참고사이트】

1. 조선후기 비변사문서 동영상

2. 비변사에 대하여


 

 

 

7. 병인양요와 신미양요(P.48)

 

1) 병인양요

병인박해 때 페롱·리델·깔래  등 3명의 프랑스 신부는 용케도 지방에서 몸을 숨겨 살아날 수 있었다. 이들은 서로 상의한 끝에 이 사실을 중국에 있는 자기 나라 관리에게 알리기로 하였다. 이에 리델 신부는 톈진에 있는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조선에서의 천주교도 박해 사실을 알리고, 살아 있는 두 신부를 구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전부터 조선과의 통상을 바라던 프랑스는 선교사 살해의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로 무력을 앞세워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려 하였다. 로즈 제독의 함대는 강화도를 침입하는 한편,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는 침략 전을 벌였다(1896년). 이때 프랑스 군대가 강화성을 점령하고 40여 일 간이나 한강 입구를 차단하여 쌀이 서울로 들어올 수 없었다. 서울의 백성들은 공포감에 휩싸여 있기도 했지만, 생활에도 큰 고통을 당하였다.


그러나 흥선 대원군의 굳은 의지와 이항로등 유학자들의 적극적인 주전론(척사론), 그리고 한성근·양헌수가 이끄는 부대의 용감한 전투로 문수 산성과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흥선 대원군은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화친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고 강경한 자세를 보였고, 양헌수가 이끄는 포수 부대는 프랑스군대로 하여금 무기를 버리고 도망가게 하였다. 그러나 정족산성에서 패배하여 물러가게 된 프랑스 군대는 강화읍을 파괴하고 불을 질렀으며, 우리나라 서적과 무기, 금괴·은괴 등을 마구 가져갔기 때문에 우리의 손실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를 병인양요(1866년)라 한다.


2) 신미양요

1866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우기(雨期)를 이용하여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 군민과 충돌하여 선원과 배가 타 버리는, 이른바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그 뒤 리델 신부에 의해 각국에 알려졌다. 미국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여 통상 조약을 맺으려고 5척의 군함과 1,230명의 병력으로 강화도를 공격하여 왔다(1871년).


조선 정부에서는 어재연이 이끄는 중앙군과 강화 수비군이 합세하여 뒤떨어지는 무기에도 불구하고 용감히 싸웠으며, 광성진과 갑곶 등지에서는 처절하게 저항하였다. 특히 광성진 싸움에 참여했던 미군의 한 지휘관은 "그렇게도 좁은 장소에서, 그렇게도 짧은 시간 동안에, 그처럼 많은 불꽃과 납덩이·쇠붙이가 오가고, 화약 연기 속에 휩쓸린 전투를 본 일이 없었다."고 회상할 정도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화의를 말하면 매국의 죄로 다스리겠다."는 강한 자세로 백성들의 단합을 외치면서 항전 태세를 더욱 굳게 하자, 미군도 할 수 없이 물러가고 말았다. 이를 신미년에 있었던 서양 오랑캐의 난리라고 하여 신미양요라 부른다. 이 싸움에 대해 우리나라와 미국은 각기 다른 견해를 가진다. 우리는 미군의 강화도 철수는 곧 우리의 승리라고 보는 데 반해, 미국은 이 싸움으로 미국의 위신이 높아졌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미국이 무력으로 일본을 개항시켰던 것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실패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3) 제너럴셔먼호 사건

고종 3년(1866년)7월에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물건을 팔기 위해 청나라 톈진을 떠나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 가까이에 불법으로 침입하였다. 이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이를 거부하고 곧 물러갈 것을 요구했으나 응하지 않고 오히려 약탈을 하였다. 그러자 평양 군민이 합세하여 배를 불살라 버렸다


【참고사이트】

1. 신미양요 사진

2. 병인양요 지도

3. 병인양요 그림

4. 신미양요 당시의 조선군 전사자사진

5. 양요에 대한 방송대특강

6. 신미양요 동영상

7. 병인/신미양요 진행지도


 

 

8. 척화비(P.48)

길이 4자 5치, 너비 1자 5치, 두께 8치 5푼. 재료 화강석. 1871년 건립. 비석 표면에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주문(主文)을 큰 글자로 새기고, “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우리들의 만대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라고 작은 글자로 새겼다. 이 비는 1866년(고종 3)의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치른 뒤 대원군이 쇄국의 결의를 굳히고 온 국민에게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1871년 4월을 기해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의 요소에 세운 것이다. 그러나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되어가고, 개국을 하게 되자 철거하거나 파묻어버렸다.


(1) 척화비를 세운 목적

흥선대원군은 병인년(병인양요)과 신미년(신미양요)에 각각 프랑스와 미국의 침입을 물리치자, 더욱 자신감을 갖고 단호한 쇄국정책을 시행하였다.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한편, 전국 각지에 \'서양 오랑캐의 침입을 맞아 싸우지 않는 자는 화친을 주장하는 자요, 화친을 주장하는 자는 나라를 파는 자이다.\'라는 내용의 척화비를 세우고, 서양 세력에 대한 경계의식을 늦추지 않았다. 척화비는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강화하고 쇄국정책을 펼치고자하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2) 척화비를 제작한 시기

고종 4년(1866)에 조성하여 고종 9년에 세운 것으로 비신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높이는 135cm, 폭 45cm, 두께 25.5cm이며 귀부와 이수를 갖추지 않은 통비(通碑)이다. 조선왕조는 1860년대를 맞이하여 서구 열강의 침투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이러한 외세의 침투로 인한 자구책으로 마련된 것이 대원군의 쇄국정책(鎖國政策)이었으며 이것의 산물로 나타난 것이 전국의 주요 지점에 세워진 척화비라 하겠다. 이러한 척사론(斥邪論)은 조선 말기에 활발히 전개되었던 민족사상의 큰 줄기註였던 바 19세기 중엽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여 조선왕조가 종말을 고하게 되는 20세기 초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던 것이다. 이러한 열강에 대한 위기의식 속에서 조선왕조의 유지를 위하여 나타난 것이 대원군의 쇄국정책이었다.1860년대를 필두로 하여 밀려온 열강들의 통상 요구는 서양문명이라는 이질적인 요소에 대하여는 문외한이었으며, 더구나 봉건적 전제체제에 익숙한 조선왕조에게는 커다란 도전이었으며 무거운 짐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라는 대혼란을 겪은 결과, 세계정세에 어두운 대원군은 더욱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어 급기야는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이라는 척화비문을 반포(頒布)註하고 더욱더 쇄국양이정책을 고집하였던 것이다.


【참고사이트】

1. 척화비 사진


 

 

9. 정한론(征韓論)(P.48)

1870년대를 전후하여 일본 정계에서 강력하게 대두된 한국에 대한 공략론(攻略論). 1868년(고종 5) 일본정부는 그들의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조선정부에 통고하고 양국의 국교회복을 청하는 사신을 보내 왔으나, 척왜정책(斥倭政策)으로 기운 대원군 집정의 조선정부는 서계(書契:外交文書)의 격식이 종전과 같지 않고 도서(圖書:符印)도 조선정부가 인각(印刻)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사신의 접견조차 거부하였다. 이로부터 양국은 외교문서의 수리를 놓고 1년을 논박으로 보내다가 일본은 대조선(對朝鮮) 외교를 전담하여 온 쓰시마도주[對馬島主] 소오씨[宗氏]로부터 그 직임을 회수하고 1869년과 1870년 외무성 관리를 파견하였으나, 조선측의 완강한 거부에 부닥쳐 타결을 보지 못하였다. 1872년에는 외무대승(外務大丞)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군함을 이끌고 부산에 내도하였으나, 조선측은 '왜사(倭使)가 군함을 타고 오다니 상대해 줄 수 없다'고 냉대하여 수개월 동안 체류하다가 돌아갔다.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일본의 조야에서는 정한론이 세차게 일고, 1873년에는 이것이 정치 문제화하여 삿슈[薩州] 군벌의 거두이자 메이지[明治] 신정부의 참의(參議)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및 이다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외무경(外務卿)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 등 강경정한론자들은 우대신(右大臣)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등이 해외시찰차 나가 있는 사이에 사이고가 스스로 견한대사(遣韓大使)가 되어 외교적 타결을 시도하고, 여의치 않으면 조선에 파병하여 무력행사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9월에 귀국한 이와쿠라 등 많은 각료들은 국력(國力)의 배양(培養), 내치(內治)의 선결을 들어 정한론에 반대하여 1개월여를 두고 논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태정대신(太政大臣:首相)의 대행이 된 이와쿠라는 그해 10월 24일 정한(征韓) 반대를 결정하고 이를 상주(上奏)해서 견한사절건(遣韓使節件)은 무기 연기되었다. 이로써 사이고를 비롯한 정한파의 다섯 참의는 각료직을 사퇴하여 일본정계는 둘로 갈라지고 정한론의 후유증은 곧이어 이른바 '서남(西南)의 역(役)' 이라는 사족(士族)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 당시 일본정부 내에서 정한론에 맞섰던 이와쿠라 등 비정한파(非征韓派)가 본질적인 비정한파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이들이 주도한 정권이 1875년 운요호[雲揚號]를 보내 강화도를 침공하여 강압적으로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한 예로써 증명이 된다.


【참고사이트】

1. 정한론을 주장한 대신들의 묘사도


 

 

10. 불평등 조약(不平等條約, unequal treaties)(P.52)

강대국이 약소국에 대하여 종속에 가까운 지위를 강제하는 조약으로 주요내용은 외국인의 조차지(租借地), 조계(租界), 영사재판권, 외국인의 관세관리권, 철도부속지의 설정 등이다. 근세 초기 이래로 터키가 서유럽제국과 체결한 영사재판조약, 아편전쟁 결과로 영국이 중국에 강요한 난징[南京]조약 등이 있다. 한국은 1876년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 이래 일본의 강압으로 불평등조약이 여러 번 체결되었다.


【참고사이트】

1. 열강들과 맺은 불평등조약 계보


 

 

11. 조ㆍ미 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P.52)

1882년(고종 19) 조선과 미국 간에 체결된 통상협정조약. 미국은 1844년 미청망하조약(美淸望廈條約)으로 청나라의 문호를 개방하고, 1854년 페리(Perry, M.C.) 제독의 일본원정 결과 체결된 미일조약으로 일본의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러나 청일 양국 사이에 있는 조선의 문호는 굳게 잠겨 있었다. 1866년 8월에 일어난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사건 이후 미국은 조선을 개항하는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다. 이에 1867년 슈펠트(Shufeldt, R.W., 薛斐爾)는 탐문항행을 단행, 거문도(巨文島)의 해군기지건설과 조선개항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1871년 5월 포함외교(砲艦外交)로써 조선의 개항을 강제로 성취하려고 조선원정을 단행하였으나, 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정책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자, 1878년 상원의원 사전트(Sargent, A.A.)가 조선개항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즉, 조선을 개항하면 경제적으로는 대(對)아시아 무역팽창정책을 구현할 수 있고, 정치적으로는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저지할 수 있으며, 문화적으로는 조선의 개화운동을 도와줄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로써 미국 정부는 대한포함외교정책을 지양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교섭을 벌이되, 일본의 중재로써 조선개항을 성취하려고 하였다. 1880년 5월 슈펠트는 일본 외상 이노우에(井上馨)의 소개장을 가지고 부산을 방문, 교섭하였다. 그러나 동래부사 심동신(沈東臣)은 조선은 미국과 마음과 뜻이 통하지 않으므로 통교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일본의 중재에 의한 교섭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며 교섭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이 슈펠트를 톈진(天津)으로 초청하였다. 슈펠트는 한중 간의 전통적인 조공 관계로 보아 청나라의 거중조정(居中調停, good offices)만 있으면 조선개항은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초청을 수락하고 그 해 8월 톈진을 방문, 이홍장과 조선개항 문제를 협상하게 되었다. 대한정책의 최고 책임자였던 이홍장은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직후부터 조선개항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을 조약 체제(treaty system)에 편입시켜 북으로는 러시아의 남침을, 남으로는 일본의 대한침략을 저지해 보려고 이른바 연미론(聯美論)을 제창하였다.

연미론의 기본노선은 조선에 미국 세력만을 끌어들여 러시아와 일본 세력을 견제, 대한종주권(對韓宗主權)을 계속 유지하려는 속셈이었다. 주일청국공사 허루장(何如璋)은 〈삼책 三策〉·〈주지조선외교의 主持朝鮮外交議〉등을 이홍장에게 보내면서, 조약문에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임을 명문화할 것을 촉구하였다.


한편, 조선은 ≪조선책략 朝鮮策略≫에 의해 개항정책을 수립하였으나 척사파(斥邪派)의 반대가 완강해 대청교섭을 비밀외교로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영선사(領選使) 김윤식(金允植)은 이홍장을 만나 조미수호통상조약 교섭의 전권을 이홍장에게 위임하는 동시에 조약문에 속국조항 삽입을 인정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교섭 전권을 위임받은 이홍장은, “조선은 본래부터 청나라의 속국이다.”는 속국조항을 명문화할 것을 고집하였다. 그러나 슈펠트는 조선은 비록 청나라의 조공국이기는 하나 정교금령(政敎禁令)은 자주자행(自主自行)하고 있는 엄연한 자주독립국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속국조항 명문화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결국 별도조회문(別途照會文)에서 속국론을 밝히기로 하고 조약은 타결되었다. 이리하여 1882년 5월 22일 제물포 화도진(花島鎭)에서 조선 전권대신 신헌(申櫶), 부대신 김홍집(金弘集)과 미국 전권공사 슈펠트 사이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전문 14조로 된 조약의 주요 내용을 보면, “조선이 제3국으로부터 부당한 침략을 받을 경우 조약국인 미국은 즉각 이에 개입, 거중조정을 행사함으로써 조선의 안보를 보장한다. 미국은 조선을 독립국의 한 개체로 인정하고 공사급 외교관을 상호 교환한다. 치외법권은 잠정적이다. 관세자주권을 존중한다. 조미 양국 국민은 상대국에서의 상업활동 및 토지의 구입, 임차(賃借)의 자유를 보장할 뿐만 아니라 영토권을 인정한다. 조미 양국간에 문화학술의 교류를 최대한 보장한다.” 등이다. 이 조약은 다른 조약에 비해 무엇보다 불평등이 배제된 주권 독립국가간의 최초의 쌍무적 협약이었다. 조선은 이 조약 체결로 수백 년간 유지해 왔던 조중 간의 종속 관계를 청산, 자주독립국가의 일원으로 국제사회에서 주권국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구미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 조약은 무엇보다, 장차 다른 구미 열강과의 입약(立約)의 본보기가 되어 국제외교의 다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참고사이트】

1. 조미수호통상조약전문

2.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대해서

3. 조미수호통상조약문 사진

4. 황준헌의 조선책략사진


 

 

 

12. 치외법권(治外法權)(P.52)

타국 영토 안에 있으면서도 그 나라 통치권의 지배를 받지 않는 국제법상의 권리. 형사·민사의 재판권 및 경찰권에서의 면제, 과세의 면제, 사회보장가입에서의 면제와 더불어 편의 제공, 여행의 자유, 통신의 자유 등이 있다. 또 치외법권은 불가침권을 포함하는 뜻으로도 쓰인다. 외국의 원수·정부고관·외교관·영사·군대·군함 등은 국제관습법에 따라 당연히 치외법권이 부여되지만 각각에 인정되는 치외법권 범위는 동일하지 않다. 또한 국제기관의 상급 직원과 그들 가족에게도 한정된 범위에서 치외법권이 인정되는 것이 통례이다.

외교관의 치외법권은 1961년 외교관계에 관한 빈조약으로 명확해졌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재판권에서의 면제: 외교관은 접수국(주재국)의 법령을 존중해야 하지만 범죄를 저질러도 소추·처벌되는 일은 없고, 원칙적으로 민사재판에 회부되는 일도 없으며 증언의 의무도 지지 않는다.

② 행정권에서의 면제: 외교관은 접수국의 경찰에 의한 강제처분을 받지 않으며 간접세와 상속세 등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납세의 의무도 없고, 연금·보험 등 사회보장상의 의무도 면제된다. 그 밖의 유자격자는 외교관과 동등 또는 그 이하의 치외법권을 갖는다.


치외법권은 처음에는 국가의 위엄을 상징하는 의미가 짙었으나, 점차 기밀의 보호유지와 직무의 원활한 수행이라는 기능을 중시하게 되었다.


〔조ㆍ미 수호통상조약문中..〕

제2조 ... 양국 정부의 외교대표 및 영사는 같은 지위를 갖는 최혜국대표에게 허여되는 모든 특권 권리 및 면제를 차별 없이 상호 향수할 것이고, 영사는 그가 파견된 상대방 정부로부터 인가장을 받은 후에 비로서 그 임무를 수향할 수 있다.


제4조 ..... 조선 국왕이 그 왕국의 법령과 재판절차를 수정 및 개혁한 결과 그것이 미합중국의 법령 및 재판절차와 일치된다고 미합중국이 판단할 때는 언제든지 조선에 있는 미합중국 공민에 대한 치외법권은 철폐될 것이며, 그 후에 이는 미합중국 공민이 조선왕국의 경내에 있을 때는 현지 당국의 법권에 복종할 것을 양 체약국간에 사호합의 약정한다.


제5조 무역을 목적으로 조선국에 오는 미국 상인 및 상선은 모든 수출입 상품에 대하여 관세를 지불해야한다. 관세 부과권은 응당 조선국 정부에 속한다. ...... 그러나 우선 대강 다음과 같이 약정.... 일용품류의 수입품에 대한 관세정율은 종가세 10%를 초과하지 않으며 사치품 예컨대 외국주, 외국연초, 시계류의 수입품에 대한 관세정률은 종가세 30%를 초과하지 않는다.......


제6조 조선국 신민으로서 미합중국에 가는 자는 해당국 전역에서 대지를 임차하거나 토지를 매수하여 주택이나 창고를 건축할 수 있다.


제 14조 양 체약국은 조선국이 어느 때든지 어느 국가나 어느 나라 상인 또는 공민에게 항해, 정치, 기타 언던 통교에 연관된 것임을 막론하고 본 조약에 의하여 부여되지 않는 어떤 권리 특권 또는 특혜를 허가 할 때는 이와 같은 권리 특권 및 특혜는 미합중국의 관민과 상인 및 공민에게도 무조건 균점된다.


 

 

 

13. 보빙사(報聘使)(P.53)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1년 후인 조선은 1883년 7월 8일 전관대신 민영익(1860-1914) 일행을 보빙사로 파견하였다.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조선은 저율이긴 하지만 관세권을 인정받았으나 미국에게 '최혜국 조관'을 인정하였다. 그 뒤 1882년 9월에는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인정하고 치외법권 확대, 서울 양화진 개시와 내지통상권 허용, 연안 무역권 허용, 홍삼수출에 대한 고율관세(30%) 부과 등 불평등한 내용으로 이루어진 '조청수륙무역장정'을 조인하였다. 조선정부는 1886년까지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구미열강과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체결하여 구미 자본주의 국가에 문호를 열어 세계 자본주의 질서에 깊숙이 들어앉게 되었다.


【참고사이트】

1. 보빙사 사진자료

2. 보빙사 연구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