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중세의 문화

 

 

* 무28조


982년(성종 1)에 “중앙관 5품 이상은 모두 봉사(封事)를 올려 현재 정치의 옳고 그름에 대해 논하라”는 성종의 명령이 있자, 당시 최승로는 정광 행선관어사 상주국(正匡行選官御事上柱國)의 관직으로 인사권을 담당한 중견 관료로서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문의 내용은 크게 태조 이래 경종까지 고려 왕의 정치를 평가한 <오조치적평(五祖治績評)>과 <시무이십팔조>로 구분된다. 그 중에서 <시무이십팔조>는 현재 22개조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없어졌다. 상소의 내용을 보면, 불교에 대한 비판이 매우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광종 때 공덕제를 실시하기 위해 백성의 고혈을 짜냈다는 사실을 들어 이를 없애자고 건의한 것(2)에서 시작하여, 과다한 보시 행위의 제한(4)과, 승려가 궁궐에 마음대로 출입하여 총애 얻는 것을 금지하고(8), 왕실의 지나친 숭불을 비판했으며(20), 불보(佛寶)의 전곡(錢穀)을 고리대로 이용하는 것(6)과, 승려가 객관(客館)이나 역사(驛舍)에 유숙하면서 행패부리는 것을 금지하고(10), 사찰의 남설(16)과 금 ·은을 사용하여 불상을 제작하는 행위를 비판하는 등 불교의 사회적 폐단을 지적하였다. 물론 이는 6두품 출신의 유학자로서 유교정치사상에 입각한 정치형태를 추구한 최승로의 입장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불교의 폐단을 비판했을 뿐이지 불교 자체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불교를 믿는 것은 몸을 닦는 근본이요,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라 하여 불교의 개인 종교적 차원을 인정하였다. 반면에 토속신앙과 관련해서는 팔관회 ·연등회의 축소(13)와 음사의 제한 등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듯이 유교사상에 입각하여 이를 제한하려는 입장을 보였다(21).

다음으로 지방관을 파견하고(7), 토호의 가옥 규모를 제한하거나(17), 신민(臣民)의 공복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와 귀족 중심의 신분질서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다만 국왕권의 전제화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여 시위군의 숫자를 감소하거나(3), 궁궐의 노비와 말의 숫자를 축소하고자 했으며(15), 국왕이 신하를 예로써 대우해야 함(14)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점은 삼한공신과 세가 자손의 예우를 주장하고(19), 노비 문제에서 광종과 같은 급진적인 해결을 비판한 점(22)에서도 잘 나타난다.

한편, 최승로는 유학자이기는 했지만 중국 문물의 맹목적인 도입을 삼가고 우리 실정에 맞도록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5,11). 이는 광종 때의 지나친 모화(慕華) 태도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나온 것이지만 고려 초기 유학자에게 자주적인 의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북방의 오랑캐에 대해서는 그들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사적으로 방비해야 함을 지적하는 안목을 지니기도 하였다(1). 결국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통해 유교사상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귀족정치를 지향하였고, 그것이 성종에 의해 수용되어 고려 전기 사회를 정비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이 점이 <시무이십팔조>가 갖는 역사적 의의라고 할 수 있다.

 

 

 

* 국자감


607년 중국 수(隋)나라에서 창시되어 고려에서는 992년(성종 11) 태조 이후 교육기관이던 경학(京學)을 국자감으로 개칭하여 설치하였다. 1275년(충렬왕 1)에는 국학(國學), 1298년에는 성균감(成均監), 1308년(충선왕 즉위)에는 성균관(成均館), 1356년(공민왕 5)에는 다시 국자감, 1362년에는 또다시 성균관으로 고쳐 조선으로 계승되었다. 국자감은 성종이 중앙과 지방관제를 정비하여 관리의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관리양성기관의 기능도 가지게 되었는데, 여기에 국자학(國子學) ·태학(太學)·사문학(四門學) 등 유학(儒學) 전공의 3학과, 율학(律學)·서학(書學) ·산학(算學) 등 실무직 기술을 습득하는 3학을 두어 이들을 경사육학(京師六學)이라 하였다. 이 중 앞의 3학은 모두 유교의 경전(經典)과 문학을 전공하는 기관으로, 학과의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신분에 따른 구별이었으며, 지배계급의 자제로서 장래 고급관원으로 출세하려는 자들이 입학하였다. 한편 율학 등 3학은 일종의 직업학으로 전문직으로 나갈 계급이 낮은 신분의 자제들이 들어갔다. 국자감의 정원은 국자·태학·사문학이 각각 300명으로 모두 900명이었고, 율학 등 3학은 미상(未詳)이며, 각 학과마다 박사·조교가 교수하였다.

수학내용은 국자학·태학·사문학이 모두 동일하여 《효경(孝經)》·《논어(論語)》를 공통 필수과목으로 하고, 《주역(周易)》·《상서(尙書)》·《주례(周禮)》·《예기(禮記)》·《모시(毛詩)》·《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공양전(公羊傳)》·《곡량전(穀梁傳)》 등은 전공교과로 하였다. 수학연한은 국자감시에 응시하는 데 필요한 6년과 국자감시에 합격한 후 3년이 지나야 최종시험인 예부시(禮部試)에 응시할 수 있어 9년이 소요되었으며, 율학·서학·산학은 6년이 소요되었다.

1063년(문종 17) 문종은 사학(私學)이 융성하고 관학(官學:국자감)이 부진하자 교관의 책임이라 책망하고 국자감의 질적 향상을 꾀하여 직제를 제정하였다. 즉 제거(提擧:종2품) ·동제거(同提擧:종2품) ·관구(管句:정3품) ·판사(判事:정3품) 각 2명, 좨주(祭酒:종3품)·사업(司業:종4품)·승(:종6품) 각 1명,국자박사(정7품)·대학박사(종7품)·주부(注簿:종7품)·사문박사(종8품)·학정(學正:정9품)·학록(學錄:정9품) 각 2명, 학유(學諭:종9품) 4명, 직학(直學:종9품)·서학박사(종9품)·산학박사(종9품) 각 2명과 이속(吏屬)으로 서사(書史)·기관(記官) 각 2명을 두었고, 그 후에도 대사성(大司成:정3품)·명경박사(明經博士:정8품)·율학박사(종8품)·명경학유(明經學諭:종9품)·율학조교 등을 두었다.

1109년(예종 4)에는 과거 합격자를 십이도(十二徒)에 많이 빼앗기자 과거응시자를 위하여 국자감에 여택재(麗澤齋:周易)·대빙재(待聘齋:尙書)·경덕재(經德齋:毛詩)·구인재(求仁齋:周禮)·복응재(服膺齋:戴禮)·양정재(養正齋:春秋)·강예재(講藝齋:武學)의 7재를 두고 전공별 강의를 하였다. 1101년(숙종 6) 국자감에 서적포(書籍鋪)라는 국립도서관을 설치하고, 1562년 성균관으로 개칭된 뒤에는 강예재가 없는 6재를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전문적으로 강의하는 9재로 바꾸어 성리학 중심의 교육으로 전환하였다.

 

 

 

* 해동고승전

동영상

1215년(고종 2) 고승 각훈(覺訓)이 왕명을 받고 편찬한 고승들의 전기이다. 2권 1책 구성으로 필사본이다 한국 최고의 승전(僧傳)이다. 원본은 전하지 않으나 20세기초에 필사본의 발견으로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현재 3종의 필사본과 5종의 간본이 있다. 현재는 유통편(流通篇) 2권만 전하지만 원본은 5권 이상이었을 것으로 알려진다.

〈해동고승전〉은 중국의 양(梁)·당(唐)·송(宋) 세 고승전의 체제를 참조하여 찬술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세 고승전은 역경편으로 시작되고 10편으로 나누어져 있으므로, 〈해동고승전〉은 여기에 준해서 가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전하는 2권은 삼국시대의 고승들을 다루고 있지만 원본에서는 찬술 연대인 고려 고종대까지의 고승도 망라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권에서는 머리말에서 불교발생의 유래와 불교가 삼국에 전래된 연원을 개설하고, 고구려·백제·신라·외국의 전래승(傳來僧) 등 모두 11명의 기사가 실려 있다. 2권에는 구법(求法)을 목적으로 중국 및 인도에 유학한 22명의 승려들의 행적이 실려 있다. 중요한 전기의 말미에는 '찬왈'(贊曰)이라 하여 전기의 주인공에 대한 예찬을 싣고 있는데, 특히 각훈의 찬술 의도가 엿보인다.


 

 

* 안향


본관 순흥(順興). 초명 유(裕). 자 사온(士蘊). 호 회헌(晦軒). 시호 문성(文成).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江華)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한 뒤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상주판관(尙州判官) 때 미신타파에 힘썼고, 판도사좌랑(版圖司佐郞)·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원외랑(員外郞)을 거쳐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고, 그해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들어가 연경(燕京)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하여, 돌아와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

1294년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로서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겸해 합포진(合浦鎭)에 부임하였고, 밀직사사(密直司使)를 거쳐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첨의참리세자이사(僉議參理世子貳師)를 지냈다. 1299년 수국사(修國史), 1304년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僉議侍郞贊成事判版圖司事)에 이르렀다. 한편, 섬학전(贍學錢)이란 육영재단(育英財團)을 설치하고, 국학대성전(國學大成殿)을 낙성하여 공자의 초상화를 비치하고, 제기(祭器)·악기(樂器)·육경(六經)·제자(諸子)·사(史) 등의 책을 구입하여 유학진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죽은 뒤인 1318년(충숙왕 5)에 충숙왕은 원나라 화가에게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 초상화는 이제현(李齊賢)의 초상화와 더불어 고려시대의 가장 오래된 초상화로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白雲洞)에 그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서원을 만들었는데,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 영주의 소수서원에 제향되었다.

 

 

 

* 훈요10조

신서 10조(信書十條) ·십훈(十訓)이라고도 한다. 태조가 총애하던 중신(重臣)인 박술희(朴述熙)를 내전(內殿)으로 불러들여 그에게 주었다고 하며, 《고려사》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전한다. 주요 내용을 보면 ① 국가의 대업이 제불(諸佛)의 호위와 지덕(地德)에 힘입었으니 불교를 잘 위할 것, ② 사사(寺社)의 쟁탈 ·남조(濫造)를 금할 것, ③ 왕위계승은 적자적손(嫡者嫡孫)을 원칙으로 하되 장자가 불초(不肖)할 때에는 인망 있는 자가 대통을 이을 것, ④ 거란과 같은 야만국의 풍속을 배격할 것, ⑤ 서경(西京)을 중시할 것, ⑥ 연등회(燃燈會) ·팔관회(八關會) 등의 중요한 행사를 소홀히 다루지 말 것, ⑦ 왕이 된 자는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여 민심을 얻을 것, ⑧ 차현(車峴) 이남 금강(錦江) 이외의 산형지세(山形地勢)는 배역(背逆)하니 그 지방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 것, ⑨ 백관의 기록을 공평히 정해줄 것, ⑩ 널리 경사(經史)를 보아 지금을 경계할 것 등이다.

《훈요 10조》는 태조의 사상 배경과 정책의 요체(要諦)가 집약된 것으로, 왕권강화를 위한 견해가 천명되었고, 불교숭상과 풍수지리설의 혹신(惑信)을 통해 집권을 정당화하고 후사(後嗣)에 의한 계속적인 집권을 확고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사상은 호국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당시 성행한 풍수 ·도참사상이 반영되어 있는데, 태조는 이를 그의 실생활에서 얻은 경험을 통해 정책면에 적응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 《훈요 10조》는 왕실 가전(家傳)의 심법(心法)으로서 태조가 그의 후손에게만 전하기로 되어 있었고, 신민에게 공개될 유훈은 아니었다. 그 내용이 사서(史書)에 실린 뒤로는 식자간에 널리 알려져 후일 흔히 군왕을 간하는 신하들의 전거(典據)가 되었다.

 

 

 

* 혜심       참고


속성 최(崔). 자 영을(永乙). 호 무의자(無衣子). 법호 혜심(慧諶). 시호 진각(眞覺). 탑호 원소(圓炤). 1201년(신종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조계사(曹溪寺)의 지눌(知訥)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 1210년 지눌이 죽자 왕명으로 수선사(修禪寺)에 들어가 그 뒤를 이어 조계종 2세가 되었고, 고종이 즉위하자 선사(禪師), 뒤에 대선사(大禪師)가 되었다. 1219년(고종 6) 수선사에 있으면서 단속사(斷俗寺)의 주지를 겸임하다가 월등사(月燈寺)에서 죽었다. 송광사(松廣寺)에 비가 있다. 저서에 《선문염송(禪門拈頌)》 《선문강요(禪門綱要)》 등이 있다

 

 

 

* 초조대장경

 

성종 10년(991) 한언공(韓彦恭)이 북송판 대장경을 들여온 이후 불안한 시기에 즉위한 현종이 군신과 백성의 결속과 왕권, 국가 체제 강화를 위해 조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2년에 걸친 조성으로 완성된 초조대장경은 계속적인 보완작업으로 선종 4년(1087)년에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6000여권에 이르는 초조대장경은 대구 동화사의 말사인 부인사에 보관 되었으나 고종 19년 몽고군의 침략으로 불타 없어지고 초조대장경 인쇄본은 일본 교토[京都] 난젠사[南禪寺]에 1,715권이 남아 있으며 국내에는 7권이 남아 국보(265∼269)로 지정되어 있다.

 

 

 

* 모아속장경

'대장경'을 결집(結集)할 때 빠진 것을 모아 간행한 불경입니다. '의천의 속장경'이라고도 합니다. 고려시대의 대각국사 의천이 널리 송ㆍ거란ㆍ일본 등지에서 불서와 경전을 구하여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두고 1096년에 완성, 대구 부인사에 두었던 것이 고려 말 몽고의 침입으로 타버리고 그 속장경의 인본 일부와 목록인 '신편제정교장총록'이 순천의 송광사와 일본의 나라 동대사에 전합니다.


* 팔만대장경          참고


해인사 장경각에 봉안된 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때 대장도감에서 만든 대장경판으로 81,258매의 목판이다.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판'이라 하며, 판수(板數)가 8만여판에 이르고 8만 4천번뇌에 대치하는 법문을 수록하였다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이 몽고군에 의해 불타버린 후 두 번째로 새긴 것이므로 '재조대장경'(再造大藏經)이라 일컫는다.

나무로 새긴 대장경이 오늘날까지 좋은 보존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선조들의 과학적인 지혜가 숨어 있다. 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은 동편의 가야산 자락과는 대략 20°정도, 서쪽의 비봉산 자락과는 10°의 경사각을 갖고 있다. 그런 까닭에 맑은 날 햇빛을 받는 시각이 여름철에는 12시간, 봄, 가을에는 9시간, 겨울에는 7시간으로 정해져 있으며, 연간 계절풍은 여름에는 남동, 겨울에는 북서로 분다. 이런 지형적인 요인 때문에 장경각은 해인사 경내에서도 가장 낮은 온도와 다습한 상태에 놓여 있으며, 수다라장과 법보전의 내부 공간 기온은 온도차가 2℃를 넘지 않는다. 상대습도는 통상 80% 정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건조할 때에도 40%이하로 내려가는 일이 극히 드물다. 이는 건조에 의한 경판의 변형을 방지하기 위한 의도가 건축조영에 반영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판가(板袈)에 수직으로 조밀하게 배열된 경판과 경판의 틈새가 일종의 굴뚝 작용을 함에 따라 상승통기(上昇通氣) 작용을 촉진시키고 있다. 이 작용은 경판 표면의 온도, 습도가 항온, 항습에 가까운 완충(緩衝) 조절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며, 이것이 경판 보존에 중요한 핵심으로 작용한다.

몽고군의 침입을 격퇴하려는 민족적인 염원에서 한자 한자 정성을 다하여 판각한 팔만대장경은 가장 완벽한 대장경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대장경판을 통하여 초조대장경인 북송의 관판대장경과 거란판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세계 문화사에서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과시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 팔관회

 

태조의 십훈요(十訓要) 제6항에 의하면 팔관회의 대상은 천령(天靈:하느님)과 용신(龍神:山川神靈)이었다. 고려의 역대 왕은 모두 이 팔관회을 열었으며, 이 고려민의 하느님 관념은 고려가 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중경(中京)에서는 음력 11월에, 서경(西京)에서는 10월에 각각 팔관회를 열었으며, 이날은 등불을 밝히고 술과 다과 등을 베풀며 음악과 가무 등으로 군신이 같이 즐겼으며 천신(天神)을 위무하고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아울러 기원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예식에는 소회일(小會日)과 대회일(大會日)이 있는데, 대회 전날인 소회에는 왕이 법왕사(法王寺)에 가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었고 궁중 등에서는 하례를 받고 군신의 헌수(獻壽), 지방관의 축하 선물 봉정 및 가무백희(歌舞百戱)가 행해졌다고 한다. 이 의식은 고려 500년을 통하여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으나 고려 말기까지 국가의 최고 의식으로 계속되었다.


 

 

* 사천대

고려시대에는 천문(天文)·역수(曆數)·측후(測候)·각루(刻漏)의 일을 맡아보았다. 국초에는 업무가 태복감(太卜監)과 태사국(太史局)으로 분리되어 태복감을 1023년(현종 14) 사천대(司天臺), 1116년(예종 11) 사천감(司天監), 1275년(충렬왕 1) 관후서(觀候署)로 개칭하였다가 다시 사천감이라 하였는데, 1308년(충렬왕 34) 태사국을 병합하여 서운관이라 하였다.

1356년(공민왕 5) 다시 사천감과 태사국으로 분리, 이후 병합·분리를 거듭하다 1372년 다시 병합하여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처음 설치할 때의 관원으로는 제점(提點:정3품 겸관)·영(:정3품)·정(:종3품)·부정(副正:종4품)·승(:종5품) 각 1명, 주부(注簿:종6품) 2명, 장루(掌漏:종7품) 2명, 시일(視日:정8품) 3명, 사력(司曆:종8품) 3명, 감후(監候:정9품) 3명, 사신(司辰:종9품) 2명을 두었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1392년(태조 1) 설치한 것으로 천문·재상(災祥)·역일(曆日)·추택(推擇)의 일을 맡았다. 관원으로는 판관(判官:정3품)을 비롯하여 정()·부정(副正)·승()·겸승(兼丞)·주부·겸주부(兼注簿)·장루·시일·사력·감후·사신 등을 두었다. 국초의 서운관은 한양(漢陽)으로의 천도(遷都) 작업에 큰 몫을 하였는데, 세종 때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되었다.

 

 


*상정고금예문

  고려시대에 고금의 예문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 《고금상정예문》이라고도 한다. 고려 인종(仁宗) 때의 학자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최윤의(崔允儀)가 왕명을 받아 고금(古今)의 예문을 모아 편찬하였다. 모두 50권으로 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려 고종 때의 문신·문인 이규보(李奎報)가 엮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이 책을 1234년(고종 21)에 금속활자로 찍어냈다는 기록이 있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추정된다.


* 직지심체요절


* 박인량 (시)

  작가 박인량은 1075년(문종 29) 요(遼)나라가 압록강 동쪽을 국경선으로 요구하자, 그 부당성을 지적한 글을 올려 압록강을 경계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요나라 왕이 문장의 훌륭함에 감탄하여, 그들의 주장을 철회하였다는 유명한 일화를 가진 문장가다. 이러한 그의 활약으로 중국과의 외교 문서를 전담하였고 그의 글들은 <소화집(小華集)>이란 이름으로 중국에서 간행되기도 하였다. 신라 시대의 설화를 모은 <수이전(殊異傳)>은 유명하다.


* 균여


* 죽계별곡(시)


* 상감법

상감법은 우리나라에서 독창적으로 개발한 기법으로 무늬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문양을 도려내고 그 자리를 다른 색깔의 흙으로 매꾸는 방식이다. 또한 유약을 두껍게 발라 투박하게 표현하는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유약을 얇게 발라 날렵한 자태를 표현한 것도 있다.


* 은입사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한 은을 박아 장식(은입사)하는 기법.

그림.1 그림.2 그림.3


* 천산대렵도

고려 제31대 공민왕이 그린 것으로 사냥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들에서 말을 타고 짐승을 쫓고 활을 쏘면서 달리는 장면을 비단에다원인화풍으로 채색한 2폭의 작품이다. 필치가 정묘하고 치밀한 현존고려 회화의 대표적 작품이다.


* 도화원

도화원과 도화서 모두 그림그리는 화가들을 양성하는 국가 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