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대의 문화

 

 

 

* 강수선생


 강수(?∼692) 선생은 신라의 뛰어난 문장가로 중원경(지금의 충주) 사람이다. 그는 자라면서 혼자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고,

의리를 중히 여겼다. 그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부모가 집안 좋은 다른 처녀와 결혼시키려 하였다. 그는 "아내를 두 번 얻지 않겠다."고 거절하였고, 부모는 "나라 안에서 너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그런 보잘 것 없는 사람과 결혼하면 부끄럽지 않겠느냐"고 나무랐다. 그러나 강수 선생은 "가난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학문을 배워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것이 참말로 부끄러운 것입니다. 어려울 때부터 사귀어 온 정과 의리를 잊을 수 없습니다."고 하며 뜻을 굽히지 않자 부모님도 이를 받아들였다.
태종무열왕 때에 당나라에서 사신이 문서를 가져왔는데, 그 중에 뜻을 알 수 없는 곳이 있었다. 그가 한번보고 뜻을 풀어 설명하니, 왕이 이름을 묻고 "그대의 두골을 보니 강수(强首) 선생이라 부르는 것이 좋겠다."하며 크게 기뻐하였다. 왕은 강수 선생으로 하여금 당나라에 보낼 답장을 쓰게 하고 이후 당나라 등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도맡았다. 문무왕 때에는 당나라에 가 잡혀 있던 김인문을 석방해 달라는 글을 지어 보냈더니, 당나라 황제가 글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김인문을 풀어 주었다. 문무왕은 삼국 통일 후 "태종무열왕이 고구려와 백제를 물리친 것은 군사의 힘도 있었으나, 강수가 뛰어난 문장으로 다른 나라에 우리의 뜻을 잘 나타내 준 도움도 크니, 그의 공로를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느냐?"하며 그에게 높은 벼슬을 내렸다.
    강수 선생은 생활하면서 조금도 재산을 모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가난하였고, 태종무열왕이 이를 알고 해마다 곡식을 보내주도록 하였다. 그가 죽었을 때, 나라에서 많은 물건을 보내주었으나, 그의 가족들은 하나도 갖지 않고 절에 받쳐, 그의 아내는 먹을 것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다. 신문왕이 이 사실을 알고 다시 곡식을 보냈으나, 그의 아내는 "저는 보잘 것 없는 몸으로 남편에게 의지하여 이미 나라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이제 이미 혼자가 되었는데, 감히 또 무엇을 바라겠습니까?"하고 남편의 뜻을 따라 끝내 받지 않고 돌아갔다

 

 

 

 

* 김대문

 

 통일신라시대의 유학자 ·저술가로 주요저서는 《계림잡전》 《고승전》 《화랑세기》 《한산기》 《악본》 등이 있다.

ㆍ화랑세기

 신라 성덕왕 때의 학자 김대문(金大問)이 화랑의 유래에 관해 적은 책.

이제까지 기록으로만 전하다가 1980년대 후반 김해에서 조선 순조 때의 필사본이 발견되어 화랑제도 연구에 획기적인 사료가 되고 있다. 이에 의하면, 화랑제도는 540년(진흥왕 원년)에 창시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전기에 소개된 화랑은 그들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졌던 진흥왕대까지의 화랑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전기를 참고하였을 《삼국사기》 열전에 오른 대부분의 화랑이 삼국 및 통일기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랑의 본래의 모습을 가장 잘 전하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 계원필경

  《계원필경》은 신라의 문인이자 학자인 최치원의 "시문집(詩文集)"으로, 다양한 문장과 시가 수록되어 있다. (시가자료 다운로드)

<시한편>

외로운 나그네 다시 여기서 신세를 지니

가을바람에 읊조리며 헤어질 일 한스럽네

문 앞의 버들잎은 벌써 시들었건만

나그네는 아직도 작년 옷 그대로일세

하늘같이 아득한 길 시름 속에 늙어 가는데

바다 건너 고향집엔 꿈에나 돌아갈까.

우스워라 이네 몸은 봄에 돌아온 제비런가

화려하고 높은 집에 올해 또 다시 찾아왔네


 

 

 

* 십문화쟁론

  

 신라 승려 원효(元曉:617~686)가 불교의 여러 이론(異論)을 10문(門)으로 분류·정리한 책이며, 2권 1책 목판본이다.


 

 

* 화엄일승법계도

 《화엄일승법계도》는 《법계도》·《화엄일승법계도장(法界圖章)》·《화엄법계도》·《일승법계도》·《법계도장》·《법성도(法性圖)》·《해인도(海印圖)》라고도 불리는데, 당나라 유학중에 지상사(至相寺)에서 《화엄경》종요를 개시한 것으로, 7언 30구 210자의 게(偈)를 54각인도(角印圖)모양으로 지은 것이다


 

 

* 혜초

  혜초는 723년에서 729년에 걸친 7년 동안 5천축국(인도)을 순례하며 불법 공부와 함께 인도에 대한 공부를 한 신라의 스님이다. 그는 인도차이나를 거쳐 인도 동해안에 도착하여 부다가야를 비롯한 불교의 유적을 찾아 순례 여행을 계속하였으며후 북쪽의 파미르고원을 넘어 727년경 당나라의 안서 도호부가 있는 쿠차를 거쳐, 729년 당나라에 다시 도착하였다. 당나라로 돌아온 혜초는 금강지라는 고승으로부터 성대한 환영을 받고 장안에 살면서 불경을 번역하였다. 오늘날의 세계는 '지구촌'이라 하여 어느 곳이나 가까운 이웃처럼 드나들지만 당시는 먼 옛날 지구가 둥근 것인지도 모르고 인도가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확실히 몰랐던 시대였으므로 인도을 여행하기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그가 남긴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인도 여행기는 인도에 대한 자세한 모습을 재미있게 적어 놓았는데 이는 서양의 '동방견문록'보다 더 가치있는 고전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 참고 자료 >


 

 

* 9산선문

신라불교는 열반종 율종 법성종 화엄종 법상종의 다섯 종파로 나뉘어져 각기 그 교리를 연구하게 되었는데 이를 5교라고 합니다. 또한 삼국통일 후 성행하던 선종이 들어오자 다시 활발한 양상을 띄게 되었고 교학 위주였던 신라교단에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교외별전의 선지가 풍미하게 되는데. 침체되어가던 불교계로서는 충격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고려초기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9개의 선문이 개창되어 이를 일컬어 9산선문이라 합니다.


 

 

* 무구정광대다나리경

다라니경이란 탑을 조성한 다음 불경을 염송함으로써 성불한다는 뜻에서 이루어진 경전(기도문)으로서, 탑속에 이를 수납하는 것이 풍습으로 되어왔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다라니경의 전문을 인쇄한 것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국보 126호로 지정·복원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참 고 자 료 >


 

* 안학궁(평양)

 

 안학궁성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직후인 427년 무렵에 대성산성과 함께 건설되어 지금 평양시에 해당하는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긴 586년까지 고구려 후기

의 왕궁이 있었던 곳이다. 장수왕은 평양 천도 뒤, 줄곧 이 궁에 거처하였고, 국내성과는 달리 주변에 강력한 군사시설들을 갖추고 있었다. 안학궁성은 성벽 한 변의 길이가 622미터, 넓이 약 38만 평방미터나 되는 웅장한 토성으로 돌과 흙을 섞어서 벽을 쌓았고 성벽 안에는 성벽을 따라 약 2미터너비로 포장된 순환도로를 냈다. 또 성벽의 문들을 연결한 도로, 궁정과 화랑, 못, 조산등 규모가 크고 화려한 건축물과 시설물이 있었다.  < 안학궁의 모형 >


 

 

* 팔각원당형

 

팔각원당형 부도는 전체 평면이 팔각형인 부도를 말하는데 우리 나라에서 가장 흔한 형태이며 대부분 화강암으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신라 시대의 부도는 대부분 팔각원당형이었다고 합니다.    < 참 고 자 료 >


 

 

* 삼대목

 

신라 진성 여왕 2년(888)에 왕명으로 각간 위흥과 대구 화상이 편찬한 향가집으로 '삼국유사'에 책명만 전해진다. (향가검색)


 

 

* 칠현금

칠현금에 관한 기록은 최초 기원전 5세기좌우의 시가총집인 <시경>에서 찾아볼수 있습니다. 중국 호북<湖北)성 증후을묘에서 출토된 칠현금실물은 지금까지 2천 4백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칠현금은 제일 처음에는 5현으로 되여있었는데 기원전 3세기와서 칠현으로 발전하여 지금까지 유전되여왔습니다.  < 참 고 자 료 >

 

 

* 아스카 문화(일)

 

   - < 아스카 문화 참고 자료 >

   - < 아스카 문화 참고 그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