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근세의 사회

 

 

 

 

* 양천제도


 양천제(良賤制)는 민(民)을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하는 것을 말합니다. 경국대전에 기록되어있고, 제도적인 구분이 됩니다. 갑오개혁이 일어나기 이전까지 기본적인 신분제이다. 여기서 양인은 과거 응시가 가능하며, 조세와 공납, 그리고 역 등의 의무를 지닙니다. 천인은 비자유민으로 개인이나 국가에 소속되어있고 천역을 담당하게 된다. 따라서, 법제적인 양천제(良賤制)는 양인에 양반과 중인과 상민이 들어가며 천인은 천민이 소속됩니다.

 그러나 양천제(良賤制)와는 다른 성격을 가진 것이 바로 반상제(班常制)입니다. 이 반상제는 양반과 중인, 상민 그리고 천민이 포함된 4신분제로 구분되고, 이 반상제(班常制)는 양반이 상민과의 구별을 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이들이 대표적이어서 반상이라 불립니다. 이 반상제(班常制)로 양반의 지위는 상승하였고, 상민의 지위는 하락하였지요. 또 양반은 사족으로서 신분이 고정되었고, 국역 면제 특권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반상제(班常制)는 관습적이라 보시면 되겠습니다. 양천제(良賤制)와 반상제(班常制)의 차이, 그것은 법제적인 제도와 관습적인 제도라 보시면 될 듯 싶네요.


 

 

 

* 환곡제


 조선은 고려와 마찬가지로 농민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국초부터 의창과 상평창 제도를 정비하였다. 환곡(還穀)이란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평시에 양곡을 저장하였다가 흉년이나 춘궁기에 대여하고 추수 후에 회수하는 것인데, 이는 의창의 소관이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오면서 의창은 원곡(元穀)이 부족하여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물가조절기관인 상평창이 이를 대신하였다. 그런데 환곡을 회수할 때 모곡(耗穀)이라 하여 10%의 이자를 함께 받았는데, 이것이 점차 고리대(高利貸)로 변하여 갔고 전세수입이 감소되자 환곡이 국가재정의 주요한 기반이 되어 갔다.

조선 후기의 탐관오리들은 이를 기화로 허위장부를 작성하는 번질[反作], 저축해야 할 양곡을 사사로이 대여한 가분(加分), 겨나 돌을 섞어서 한 섬을 두 섬으로 불리는 분석(分石), 창고에 없는데 실물이 있는 듯이 보고하는 허류(虛留) 등 작폐가 매우 심하여 민란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환곡은 오늘날 농업협동조합에서 실시하는 양곡방출제도의 기원이다.


 

 

* 사창제도


 사창은 조선시대 각 지방 군현의 촌락에 설치된 곡물 대여 기관으로, 촌락을 기반으로 한 민간 자치적 구호 기관의 성격을 띤 구항 시설의 하나였다. 우리 나라에서 사창은 세종 30년(1448)에 대구 지방에서 처음 시행하였고, 문종 1년(1451)에 경상도의 10개 현에서 사창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는데, 의창의 곡식 200석씩을 분배하였다. 이 때, 사창의 이식이 1년에 20%였으며, 사창의 원곡을 민간에서 염출하지 않고, 관청의 곡식을 배당 받아, 관청의 감독을 받는 조건하에서의 민간 운영의 방법을 택하고 있었다.

사창제 실시 배경은 의창 원곡의 부족과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군량미의 감소를 막으려는 데 있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설치되어 시행된 사창은 원곡을 대여하여 이식을 취함으로써 처음에는 어느 정도 원곡의 감소를 막았을 수 있었으나, 취식에 중점이 두어짐으로써 점차 진휼 기관이 아닌 고리대 기관으로 그 성격이 전락되고 말았다. 이에 사창제는 실시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폐지론이 대두되어 성종 1년(1470)에 폐지되고 말았다.


 

 

 

* 유향소


지방 양반의 자치 기관이었다. 부·군·현 단위로 구성되었는데, 그 우두머리를 좌수(座首)라 하였으며, 그 밑에 약간 명의 별감(別監)을 두었다. 유향소의 임무는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를 규찰하며, 풍속을 교정하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향청(鄕廳)이라 하였다


 

 

 

* 향약


조선 시대 양반 지배층이 유교 사상에 기초하여 만든 지방 행정의 자치적 말단 조직 또는 그 규약이다. 당시 향약의 모체는 중국의 여씨 향약이었는데, 주자가 이를 완비하여 <주자대전>에 실었으므로, 우리나라에는 주자학의 전래와 더불어 들어왔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향약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15세기말 ~16세기 초 지방 중소 지주 출신의 사림이 등장하면서부터로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향약을 실시한 것으로 보고 있다. 향약의 내용은 발기자에 따라 약간씩 다르나 대체로 여씨 향약의 내용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황과 이이의 향약이 유명하며 이후 영, 정조에 이르기까지 주로 이이의 향약이 영향을 끼쳤다. 향약의 임원인 약정, 부약정, 직월 등은 향청의 좌수, 별감, 유사 등이 겸임하기 마련이어서 그 조직 체계를 거의 같이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향약은 본질적으로 피지배 계급을 엄격한 봉건적 질서와 사회 신분 질서로 억압하는 조직이었으며, 경제적으로 착취를 보장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반면에 유교적 도덕을 함양하고, 지방 자치 정신을 일깨우는 데 크게 이바지한 점도 있었다.


 

 

 

* 오가작통제


 1485년(성종 16) 한명회의 발의에 따라 채택되어 <경국대전>에 올랐는데, 이에 의하면 한성부에서는 방(坊) 밑에 5가작통의 조직을 두어 다섯 집을 1통으로 하여 통주(統主)를 두고, 방에 관령(管領)을 두었다. 지방은 역시 다섯 집을 1통으로 하고 5통을 1리(里)로 해서 약간의 이(里)로써 면(面)을 형성하여 면에 권농관을 두었다. 주로 호구를 밝히고 범죄자의 색출, 세금징수, 부역의 동원, 인보(隣保)의 자치조직을 꾀하여 만들었으나, 시대에 따라 운영실적이 한결같지 않아 1675년(숙종 1)에는 '오가작통법 21조'를 작성하여 조직을 강화하였다. 후기에 이르러 호패(戶牌)와 더불어 호적의 보조수단이 되어 역(役)을 피하여 호구의 등록 없이 이사 ·유리(流離)하는 등의 만성화된 유민(流民)과 도적의 은닉을 방지하는 데 이용하였고, 현종 때에는 통의 연대책임을 강화하여 가톨릭교도를 적발하는 데 크게 이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