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중세의 사회

 

 

 

* 문벌귀족


 문벌귀족은 무신난에 의해서 정권에서 축출되지만,고려말 금의 사대요구가 있었을때 무신정권은 이를 반대했지만, 사대요구를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면서 정권을 다시 잡게 됩니다.

그래서 고려말에는 몽고침입기때 원세력에 아부해서 대농장을 확보한 권문세족과 문신세력이 공존했으며, 이들의 부패와 농장확대문제에 실무와 문과적 소양을 갖춘 온건 신진사대부 계층과 잇다른 전쟁으로 실력을 쌓은 신흥 무인세력이 반발하였는데요, 후에 이 신흥 무인세력이 조선을 건국하게되고, 신진사대부를 기용하여 토지제도를 개혁으로 권문세족과 문벌귀족은 사라지게 됩니다.


 

 

 

* 향리


 향리는 신라시대에는 호족과 뿌리를 같이 합니다

쉽게 말해 예전에는 지방의 유력가 였다는 겁니다. 하지만 조선까지의 역사는 중앙집권 왕권 강화의 역사입니다. 신라시대에는 왕권이 약해서 향리들이 판을 치고 마음 것 힘을 발휘 할 수 있었지만 조선에 와서는 왕권이 강해서 왕이 파견한 관리의 보자관 역활이나 하고 있는 신분계층을 으로 전락합니다. 향리는 주로 육방의 일을 맞았는데요, 그중에서도 인사권을 지고 있던 이방이 우리에겐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반면 양반은 고려시대에 성장한 신진사대부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들은 지방의 유력가가아니라 성리학에 기초를 둔 지식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들은 조선건국과 함께 일부는 정치로 또 일부는 시골의 재야로 묻혀 후세들을 끊임없이 재생산했는데 이들을 사림이라 부르는 겁니다


 

 

 

* 무신정변


고려시대 무신들에 의해 일어난 정변. 이는 좁은 뜻으로 볼 때 1170년(의종 24)의 정중부(鄭仲夫)의 난을 말한다. 고려의 지배층을 구성한 것은 문신과 무신이 모두 해당되나, 과거제도와 함께 유교주의가 채택됨으로써 문치(文治)를 지향하는 사회가 되어 문신의 지위가 무신에 비해 높아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성종(成宗) 이후 거란(契丹)·여진(女眞) 등 북방민족이 침입했을 때도 그 최고지휘관은 문신이 되었고, 무신은 그 아래에서 지휘를 받으며 많은 희생을 감수하였다. 또한 경제적 배경이 되는 전시과(田柴科)체제에 있어서 998년(목종 1)의 <문무양반전시과(文武兩班田柴科)> 개정 때는 무관이 문관에 비해 낮은 품계(品階)를 받음으로써 무신의 불평은 높아지고 갈등이 깊어지게 되었다. 그 불평과 갈등은 마침내 실력행사로 나타나게 되었고, 그것은 세력의 기반을 다지지 않고서는 성공하기 힘든 것이었다. 1014년(현종 5) 급증한 백관의 녹봉(祿俸)을 지급하기 위해 당시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몰수하자, 이에 격분한 무신 최질(崔質)·김훈(金訓) 등은 병사들을 충동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정치상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 정권은 1년도 못되어 실패하는 바람에 더욱 더 문신이 득세하는 결과를 낳았다. 계속된 숭문억무(崇文抑武)정책은 의종(毅宗) 때까지 이어져 명승지에 이궁(離宮)과 정자를 지으면서 군졸들을 동원하였고 급기야 문신 김돈중(金敦中)이 견룡대정(牽龍隊正)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워 희롱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였다. 결국 이러한 고려 귀족사회가 지닌 모순들은 마침내 무신정변을 일으키게 하였다. 1170년 의종이 문신들을 거느리고 장단(長湍) 보현원(普賢院)에 행차할 때 왕을 호종하던 정중부와 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 등은 반란을 일으켜 왕을 수행하던 문신들을 학살하고, 다시 개성으로 돌아와서 요직에 있던 문신들을 대량 학살하였다. 그들은 곧이어 의종을 폐위시키고 그 아우 익양공(翼陽公) 호(皓)를 왕으로 옹립하여 실권을 장악, 문신귀족정치를 무너뜨리고 새로이 무신정권의 성립을 보게 하였다.


 

 

 

* 권문세족


고려 중기 때 우리나라는 중국 당시는 원나라 였습니다. 원나라의 고려침입으로 인해 우리나라는

원나라와 손을 잡은 상태였는데 이 때, 원의 세력을 등에 업은 군인이나 벼슬아치, 그 친척들이 권력을 휘두르며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했습니다. 바로 이게 권문세족 입니다. 권문세족은 죄없는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아 농장을 경영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노비로 만들어 농장을 경영하면서 자신들은 이익만 챙겨먹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세를 내야 할 백성들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결국은 국가의 조세수입도 감소하여 나라 재정이 매우 궁핍해졌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충선왕, 충목왕 등 몇몇 왕들이 권문세족을 없애려고 했으나 개혁추진세력이 미약했기 때문에 실패로만 끝났습니다. 나중에 개혁정치에 동참하면서 고려의 현실에 눈을 뜨고, 비판의식을 가진 세력이 들고 일어났는데 이 세력을 신진사대부라 합니다.

 마지막엔 결국 원나라가 쇠퇴하면서 저절로 권문세족도 쇠퇴하게 되고 신진사대부가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 권농 정책


 가난한 농민들의 생활을 보호하여 안정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보장제도의 형태로서는 고구려의 '진대법'을 시작으로 하여 고려 성종 때는 '의창'이란 기구로 운용하였으며, 조선시대까지는 '의창'이 '환곡'으로 바뀌고 지방 단체에 의한 '사창'제도까지 생겨났다. 무엇보다도 조선시대의 권농정책에서 획기적인 일은 '권농판'의 파견과 농업기술의 전국적 보급을 위한 '농사직설'의 편찬 보급을 들 수 가 있다.

 

 

 

 

*망이ㆍ망소이 봉기


 무신정권기 였던 그 당시  최고 권력자가 되기 위해선 세력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백성들을 심하게 수탈하고 무거운 조세를 내게 했습니다. 그 당시 왕은 고려 제19대왕 명종으로 최고 집권자는 정중부이다.

 지방에서는 차츰 무신정권에 대한 반항이 일어났다. 특히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은 무신정권에 대한 지방관료들의 반항이었지만 주목할 것은 이 반란에는 일반 농민도 많이 가담했다는 사실이다. 즉 명종 6년(1176) 정월에 공주명학소의 천민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우두머리리가 망이(亡伊), 망소이(亡所伊)였다. 결국 망이(亡伊), 망소이(亡所伊)의 반란은 대전을 근거지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망이·망소이는 자칭 영병마사(嶺兵馬使)라 하고 많은 무리를 모은 후 봉기하여 곧 군사상 요지인 공주를 함락하였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정월 22일에 그들을 달랬으나 듣지 않으므로, 2월에 3천인의 병사를 소집하여 대전부근과 공주의 반란군 토벌을 시작했다. 그러나 정부군은 교전끝에 대패하고 많은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다시 정부에서는 무력에 의한 토벌을 일시 중지하고 명학소를 승격시켜 충순현(忠順縣)이라 하고 관리를 보내어 주민을 달래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에 순응치 않고 9월에는 다시 예산을 점령하고 수령을 죽였다. 다시 정부는 회유책이 실패하였음을 깨닫고 무력토벌을 결행하였다. 즉 12월에 대장군 정세유, 이부(李夫) 등을 보내 정예부대로 하여금 그들을 진압케 하니, 종국에는 효과가 있어 다음해 정월에 망이·망소이가 투항했다.그러나 다음해 2월에 망이 등은 다시 반란을 일으켜 세력을 확장하였으니 청주목내(淸州牧內)의 여러 군현 중 겨우 청주만이 무사할 뿐이었다. 형세가 이같이 되자 정부에서는 다시 토벌군을 출동시켜 망이·망소이를 체포하였다. 이리하여 명종 6년 정월 이래 충청지역을 시끄럽게 하던 망이·망소이의 난은 약 1년만에 비로소 진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