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

      

 

* 골품제도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골품제도라는 독특한 신분제도를 마련하고 통치 기반을 정비하였습니다.  6세기 초 법흥왕 때 골품제도를 정비했다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의 시기부터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 고구려의 통치 질서

  ㆍ 고구려의 통치조직

  ㆍ 고구려의 통치체제

 

 

 

* 고구려의 시행된 형법

  ㆍ 반역자, 전쟁에서 패한 자, 살인자, 강간범 등은 사형제도

  ㆍ 도둑질한 자는 도둑한 양의 12배로 배상해야 함

  ㆍ 빚을 갚지 못할 시 그 자녀를 노비로 삼음

 

 

 

* 진대법

 

 진은 흉년에 기아민(飢餓民)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는 것을 뜻하고, 대는 봄에 양곡을 대여하고 가을에 추수 후 거두어 들인다는 뜻이다. 이러한 제도는 고구려 때 194년 10월 고국천왕이 왕권강화를 위해 국상(國相) 을파소(乙巴素)의 건의에 따라, 매년 3~7월에 관가의 곡식을 가구(家口)수에 따라 차등을 두어 대여하였다가 10월에 환납(還納)하는 것을 상식(常式)으로 시행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에서의 진대법 실시의 최초의 기록이다. 고려시대에는 초기부터 국가적 차원에서의 진휼사업(賑恤事業)이 행하여졌다. 고려시대는 진휼기관인 의창(義倉)을 설치하고 은면지제(恩免之制)·재면지제(災免之制)·환과고독진대지제(鰥寡孤獨賑貸之制)·수한역려진대지제(水旱疫賑貸之制) 등의 방법으로 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상평(常平)·환곡(還穀)의 제도로 그 범위가 확대, 정비되어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전근대 사회에서 시행된 이러한 진대법은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계급적 대립을 완화시켜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 화랑도

 

 화랑도는 청소년들을 모아 집단적으로 훈련하는 원시 사회의 풍습이 발전한 것으로, 한명의 화랑을 우두머리로 하고 수백 명의 낭도가 함께 모여 자연을 배경으로 노래와 음악을 즐기며 심신을 수련하고 도를 닦던 신라 시대 청소년 수련 단체이다. 처음에는 원화 제도에서 시작되었는데, 남모와 준정이라는 아름다운 두 여인을 원화로 삼아 그녀들을 중심으로 300여 명의 무리를 모았다. 그러나 서로 시기하 여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에 초대하여 술을 마시게 한 후 강물에 밀어 죽게 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 결과 준정도 처형당해 곧 모임은 흩어지게 되었다. 원화 제도가 실패하자 귀족 출신으로 잘생긴 남자를  뽑아 화랑으로 삼아 받들게 하니 많은 무리가 모였다.

진흥왕 37년 화랑도가 국가 조직으로 양성되기 시작하면서 조직의 지도자를 국선, 화랑, 화주, 풍월주라고 불렀으나, 화랑이 일반적인 이름이었다. 화랑 밑에 는 문호가 있었고 그들은 낭도를 거느렸다. 화랑도는 집단 생활을 통하여 서로 도를 닦는 것, 노래와 음악을 즐기는 것, 이름난 산과 강을 찾아다니며 즐기는 것 등 도교적인 학습을 주로 하였다.

이러한 단체 생활을 통해 몸과 마음을 수련하여 젊고 건강한 많은 인재를 배출하게 되었다. 또,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을 때에는 전쟁터에 나아가 싸웠으며 이들은 삼국 통일의 발판이 되었다.

 세속 오계는 화랑도의 정신으로, 화랑 취항과 귀산이 원광법사를 찾아가서 일생동안 살아가는 데 꼭 지켜야 할 가르침으로 받은 다섯 가지의 계율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사군이충 : 나라에 충성한다.

    ② 사친이효 : 부모에 효도한다. 

    ③ 교우이신 : 친구를 믿음으로 사귄다.

    ④ 임전무퇴 : 싸움터에 나가서는 물러서지 않는다.

    ⑤ 살생유택 : 생명이 있는 것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화랑들은 원광법사가 내려준 세속 오계를 지키며 국가에 충성하여 삼국 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


 

 

 

* 진골(眞骨) 귀족


 골품제도는 혈통의 존비(尊卑)에 따라 정치활동에서 사회생활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특권과 제약이 주어지는 제도로서 성골(聖骨)·진골 및 6~1두품(頭品)까지 모두 8개의 신분층으로 구성되었다. 진골은 성골 다음의 계급으로, 성골이 부모 모두 왕족이었던 데 비해 진골은 부계(父系)와 모계(母系) 가운데 한쪽만 왕족이고 한쪽은 귀족일 때 성립한다. 진골도 성골과 마찬가지로 왕족이었으나 처음에는 왕이 될 자격이 없었다고 하며, 진덕여왕을 끝으로 성골이 사라지자 태종무열왕(김춘추)이 즉위하면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처럼 같은 왕족이면서도 양자를 구별한 이유는 뚜렷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진평왕을 전후하여 진흥왕의 직계 자손들이 자신들을 방계와 구분하여 가문의 순수성과 정통성을 강조하려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한편, 진골 품계는 김씨 왕족 외에 전(前) 왕족이자 중·고시대의 왕비족으로도 추정되는 박씨족(朴氏族)이나 신라에 병합된 비교적 큰 국가의 왕족들에게도 주어졌다. 예를 들어 본가야의 왕족이나 고구려의 왕족 출신인 보덕국왕(報德國王) 안승(安勝)은 모두 김씨 성을 받고 진골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이들은 비록 '신김씨(新金氏)'라 하여 본래의 신라 왕족과는 구별되었으나, 진골 대우를 받음으로써 김씨 왕족과 혼인할 수 있었다. 진골은 제5관등인 대아찬 이상의 최고 관등에 오를 수 있으며, 각 중앙관서의 장관직을 독점하였다. 또 국가로부터 식읍(食邑)이나 녹읍(祿邑)을 받았으며 사병(私兵)을 양성하고 사원을 경영하여 재산을 빼돌리는 등 호사스런 생활을 하였다. 이처럼 진골귀족의 세력이 점차 비대해짐에 따라 상대적으로 왕권은 약해졌으며, 이후 진골귀족 간의 왕위쟁탈은 사회에 혼란을 가져와 후삼국으로 분열되는 계기가 되었다


 

 

 

 

* 성골(聖骨)


 부계(父系)와 모계(母系)가 모두 순수한 왕족(朴·昔·金)으로 신라에서 가장 으뜸으로 치는 신분층이었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 따르면 성골은 처음의 박씨 7왕, 석씨 8왕, 김씨 13왕으로 진덕여왕(眞德女王) 때까지 서로 혈족 결혼을 하며 순수한 성골을 지켜 왕위를 독점하였으나,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때부터는 성골 출신의 왕은 없어지고 마지막 경순왕(敬順王)까지 진골(眞骨) 출신의 왕으로 세습(世襲)되었다.


 

 

 

* 구서당(九誓幢)


 구서당이라는 9개 군단(軍團)의 설치로 군사조직이 강화되는 등 본격적인 국가체제가 확립되게 하는 기구.


 

 

 

* 6두품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김씨 왕족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김씨 왕족은 왕권을 강화하면서 폐홰적인 신분 제도인 골품 제도를 마련하여 통치 기반을 구축하였다. 골품 제도는 각 세력의 크기에 따라 4,5,6두품의 신분을 주었다.

신라 중대에는 왕권이 전제화되었으며, 왕위는 원래 성골이 차지하였으나, 진덕 여왕을 끝으로 진골에게로 넘어갔다. 진골 귀족은 지배층의 핵심을 혁성하고 있었지만, 같은 진골 안에서도 김씨가 정치 권력을 거의 독점하였다. 6두품 귀족은 진골 귀족에 대항하여 왕권과 결탁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6두품 귀족은 신분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학문적 또는 종교적 식견에 의하여 국왕의 정치적 조언자가 되었고, 실제로 집사부 시랑 등의 관직을 맡으면서 정치적 진출을 활발히 하였다. 그러나 신라하대에 이르러 6두품 귀족은 중앙 권력에서 점차 배제되어 호족과 연결되었다. 그들은 합리적인 유교 이념을 내세우면서 국가 체제내에서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그것이 거부되자 점차 반신라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중세 사회가 성립된 이후에 6두품 계열의 유학자들과 지방에서 성장한 호족 세력들이 정치에 참여하면서 골품제의 조직원리와는 다른 유교적 정치 이념을 정립시켰다.


 

 

 

* 말갈인


 고대에 북방으로 부터 이주하여 간도 만주 연해주 등지에 살던 민족으로 주로 부족생활을 했다.

발해가 건국되던 시기에 발해의 영토 안에 흩어져 살던 부족들을 고구려인들이 통합하여 발해의 피지배층을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이중적인 구조가 훗날 발해의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아무튼 이후 고려시대에는 여진족으로 불리우고, 금나라를 세워 송나라를 남쪽으로 몰아내어 중국 본토를 차지하기도 합니다. 다시 원나라에 의해 무너지고 흩어져 살다가 명 말기에는 만주족으로 불리우고, 누르하치에 의해 통합되어 청나라를 세워 대륙의 지배자가 되기도 합니다. 여진족은 수렵을 주로 하던 민족이어서 말을 어려서부터 잘타고, 소수의 인원이 살다보니 개개인의 전투력이 대단하여 말을 타고 활을 쏘는데 능하며, 창을 잘쏘기도 하여 기마전에서는 당할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우리역사의 국가들에 귀화하여 산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심복중에 퉁두란이란 사람도 이씨성을 받아 조선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 5소경


 지방 행정 조직은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하여 중앙 집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군사·행정상의 요지에는 5소경을 설치하여, 수도인 금성(경주)이 지역적으로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고, 각 지방의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하였다. 또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주의 장관을 군주에서 총관(뒤에 도독)으로 바뀌어 군사적 기능을 약화시키는 대신 행정적 기능을 강화하였다.

주 밑에는 군이나 현을 두어 지방관을 파견하였고, 그 아래의 촌은 토착 세력인 촌주가 지방관의 통제를 받으면서 다스렸다.  또 향, 부곡이라 불리는 특수 행정 구역도 있었다.

 한편, 지방관의 감찰을 위하여 외사정을 파견하였고,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상수리 제도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 고리대업


  막대한 대토지 소유로 수입이 많이 생겨 서민을 상대로 돈을 빌려주고 높은 이자로 원금과 함께 받는 업.


 

 

 

* 호족


신라 하대의 혼란은 지방세력가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하여 새로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재지지배세력을 우리는 흔히들 호족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호족의 등장에 따라 이제 신라의 역사무대는 중앙에서부터 지방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 애노의 난


 서기 889년(진성여왕3)에 통일 신라의 사벌주(현재 경북 상주)에서 일어난 대규모 농민 반란.

이전에도 농민들이 세금을 내지 못하여 도망가거나 부역 징발을 피해 도망가는 경우가 있다. 흉년이 들거나 나라가 어지러워 농민을 가혹하게 수탈할 때는 그런 일이 더욱 많았다. 그러나 원종, 애노의 난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정부군을 파견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보잘것 없는 농민 저향과는 규모부터가 달랐다. 이 난은 지도자의 이름이 알려질 정도로 규모가 컸으며, (신라 말기에는 지도자의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봉기가 각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곤 했다.)

지도자를 중심으로 어느정도 조직을 가진 농민 반란이었다. 이름으로 보아 원종은 당시 골품제 사회에 불만을 품은 승려나 지식인, 곧 6두품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애노는 이름에 남자 노예를 뜻하는 '노'가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노예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