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경제 상황의 변동


4-1. 수취체제의 개편


1) 농촌사회의 동요


2) 전세의 정액화

 

 

 

영정법

http://www.jeri.or.kr/jries/web/go/soc/his/%BF%F64.htm

http://www.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254-yungjungbub.htm


조선 후기에 시행된 전세(田稅) 징수법. 정식명칭은 영정과율법(永定課率法)으로 1635년(인조 13) 에 제정되었다.

제정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15세기에 제정된 전분6등법(田分六等法)과 연분9등법(年分九等法)은 매우 번잡하여 당시에도 제대로 적용되지 못하였고, 16세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무시된 채 최저율의 세 액이 적용되고 있었는데, 왜란과 호란을 겪고 난 뒤 농지가 황폐되고 농민이 날로 궁핍해지는 상황 속에서 이 세 액도 제대로 징수할 수 없게되자, 정부에서는 이러한 관행을 법제화하여 전세를 풍흉에 관계없이 1결당 미곡 4두 로 고정시켰다.

그리고 부족한 세원을 보완하기 위해 종래의 수등이척법(隨等異尺法)을 양척동일법(量尺同一法)으로 고쳐 실시하였다.


 

 

3) 공납의 전세화

 

 

 

대동법

http://www.tutork.com/yh12-1.htm

http://www.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100-dedongbub.htm

http://211.252.89.97/ban/sa/ex/h6357.htm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B4%EB%B5%BF%B9%FD&sort=0&c=1&qt=df


조선 전기 호구(戶口)를 단위로 부과·징수하던 공물과 진상(進上) 등을 전세화(田稅化)하여 토지 1 결 당 쌀 12 두의 대동미를 징수하고, 이를 각 관청에 나누어 주어 필요한 물품을 사도록 한 제도였다. 산간 지방에서는 쌀 대신 베(대동포)나 돈(대동전)으로도 받았다.


  대동법의 시행으로 국가의 수입이 증대되었다. 그리고 토지의 결 수를 기준으로 하여 부과하였기 때문에 농민들의 부담은 줄어 들었고, 양반 지주들의 부담은 늘어났다. 또 국가 수요 물품의 납품을 담당하는 공인(貢人)의 등장으로 유통 경제가 활발해지고 상업 자본이 발달하였으며, 수공업 생산이 활기를 띠는 등 산업 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 왔다. 상공업 발달과 대동미의 현금 납부(금납화)는 상업 도시의 발달과 화폐 유통의 촉진을 가져 오기도 하였다. 한편,  별공과 진상이 남아 있어 현물 징수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대동법은 공납을 전세화한 것으로 토지 소유의 정도에 따라 차등을 두어 과세하였으므로 합리적인 세제라 할 수 있다. 또, 종래의 현물 징수가 쌀·베·돈으로 바뀌게 됨에 따라 조세의 금납화가 이루어졌다는 데에도 의의가 있다. 더욱이 대동법의 실시는 상품 및 화폐 경제의 발달을 가져와, 장기적으로는 원래의 의도와는 반대로 양반 중심 신분 질서와 경제 질서를 붕괴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공인

http://100.naver.com/100.php?id=16674

본래 농민의 부담 가운데는 토산물을 국가에 바치는 것이 있었는데, 조선 전기에도 중간에서 이를 대신 바치는 방납(防納)이 행해져서 이를 담당하는 방납상인이 있었다. 그러다가 대동법(大同法)이 실시되면서 농민은 모든 공물을 대동미(大同米)로 대신 바치게 되고,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은 공인으로 하여금 구매 납품하게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어용청부상인(御用請負商人)이었다.


대동을 담당하는 선혜청(宣惠廳)에서 미를 지급받는 아문(衙門)과 계(契), 주인(主人), 전(廛) 등이 있으며 공인들은 여기에서 공인으로 인정하는 문서를 받는다. 그 속에는 공인이 납품할 공물의 지역과 종류, 수량, 가역미(價役米)가 기재되어 있다.


공인의 명칭은 소속아문이 있는 유속사공인(有屬司貢人)의 경우에는 소속된 아문명, 더 자세히는 소속아문의 공물명에 따라 불리웠다. 그밖에도 소속아문이 없는 무속사공인(無屬司貢人)이 있는데 이들은 상대적으로 독립성이 강하였다. 공인은 일종의 특권상인이었으므로 그들이 지닌 권리는 고가로 매매되었는데, 이를 공인문기(貢人文記)라고 하였다.


공인 가운데는 공가를 받아 공물을 매입 납품하는 상인적 공인과, 공물을 제조 납부하는 수공업자적 공인이 있다. 이들 가운데는 제도적으로 보장된 공가 자체의 이윤에만 만족하지 않고 유통과 제작 과정에 적극 참여하여 성장해나갔다. 또한 공인권의 매매가 늘어나면서 공인권에 마치 소유권과는 별개의 경영권인 분주인권이 성립되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권리가 집중되면서 상인층의 상업자본으로서 기능을 하기도 하였다. 결국 공인은 중세체제에 기생하면서도 중세체제를 해체시켜 나가는 역할을 하였다.




 

 

4) 균역법의 시

 

 

 

균역법

http://blog.naver.com/hesbs/120007633447

조선시대 군역(軍役)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하여 만든 세법이다. 1750년(영조 26) 종래 인정(人丁) 단위로 2필씩 징수하던 군포(軍布)가 여러 폐단을 일으키고, 농민 경제를 크게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자 2필의 군포를 1필로 감하기로 하는 한편, 균역청을 설치, 감포(減布)에 따른 부족재원(不足財源)을 보충하는 대책을 마련하게 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어전세(漁箭稅)·염세(鹽稅)·선세(船稅) 등을 균역청에서 관장하여 보충한다는 등의 균역법이 제정되어 1751년 9월에 공포되었다.


  군역은 처음에 16세부터 60세까지의 양인(良人)에게 부과하여 이를 정군(正軍)과 보인(保人)으로 나누어 번상(番上)하는 정군을 보인이 경제적으로 돕게 하였다. 정군의 번상제가 해이해지면서 중종 때부터는 번상대신 포(布)를 바치게 하는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가 이루어지더니, 임진왜란 후 모병제가 실시되면서 군역은 군포 2필을 바치는 것으로 대신하게 되어 군역으로서의 군포는 국가재정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군정의 문란으로 돈 있고 세력 있는 양인은 관리와 결탁하여 군역을 면제받고, 무력하고 가난한 양인만이 군역을 지게 되었다. 따라서 부족한 군포를 보충하기 위해 이미 사망한 군역 대상자에게도 그 몫을 가족에게서 징수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 16세 미만의 어린아이에게까지 군포를 징수하던 황구첨정(黃口簽丁), 군포 부담자가 도망하면 친척에게서 군포를 징수하던 족징(族徵), 이웃에 연대책임을 지워 군포를 징수하던 인징(隣徵) 등 갖은 비법이 횡행하였다. 후에 균역청 구관당상(句管堂上)으로 임명된 홍계희(洪啓禧)에 의하면 50만이 져야 할 양역(良役)을 10만여 명이 부담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자 곳곳에서 농민의 농촌 유리현상이 두드러진다 하였다.


  군역의 개선책은 효종·인조 이후 계속 강구되어 숙종 때인 1682년(숙종 8)에 병조참판 이사명(李師命)은 군포징수를 인정(人丁) 단위로 하지 않고 가호(家戶) 단위로 하여 양반에게도 징포하자는 호포론(戶布論)제기하였고, 그 외에도 군포를 폐지하고 토지에 부가세를 부과하여 그 비용을 충당하자는 결포론(結布論), 유한양정(有閑良丁)을 적발하고 양반자제 및 유생(儒生)에게도 징포하자는 유포론(游布論:儒布論), 군포를 폐지하고 매인당 전화(錢貨)로 징수하자는 구전론(口錢論)과 군문(軍門)의 축소로 군사비를 감축하자는 등 논의가 분분하여 가호당의 호포제와 가호단위의 호전제(戶錢制)가 유력하였다. 그러나 양반층의 강경한 반대로 실현을 보지 못하고, 군포를 반으로 줄이자는 감필론(減匹論)이 대두하였다.


  1742년(영조 18)에는 양역사정청(良役査正廳)을 두어 양역의 실태파악에 노력하는 한편 양인의 호구조사를 하였으며, 1743년에는 이 조사를 바탕으로 영의정 조현명(趙顯命)에게 양역실총(良役實摠)을 만들게 하여 각 도에 인반(印頒)하도록 명하였다. 1748년 이 작업이 완료되어 전국의 양정수(良丁數)와 군포필수를 조사 수록한 양역실총(처음에는 良役査定冊子)이 반간(頒刊)되어 군포를 감필할 경우의 부족한 군포수를 알게 되자, 영조는 1750년 5월 홍화문(弘化門)에 친림(親臨)하여 재조(在朝) 제신(諸臣) 및 서울 5부(部)의 방민(坊民)에게 양역변통(良役變通)의 의견을 물었다. 영조는 민의에 따라 호전제(戶錢制)를 실시하려 하였으나 반대가 너무 많아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같은해 7월 여러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균역청(원명은 均役節目廳)을 설치하여 군포 2필을 1필로 감필한다는 선포를 하고 이에 따라 각 군문에 부족한 군포를 보충해 주는 급대재정(給代財政)의 마련을 강구하게 하였다.


  1751년 9월 반포된 균역법의 내용은 군포감필에 따른 급대재정으로,


  ① 군문을 합치고 군사비를 절약하는 감혁(減革)으로 얻는 재원이 약 10만 냥,


  ② 선혜청(宣惠廳)과 지방관청 경비의 일부를 균역청 재원으로 이획(移劃:移越)하여 얻는 재원 약 7만 냥,


  ③ 놀고 있는 한정(閑丁)을 수괄(搜括)하여 매인당 선무군관포(宣 武軍官布) 1필씩을 부과하여 얻는 재원 5만 냥,


  ④ 어장(漁場) 및 어전세(漁箭稅)·염세(鹽稅)·선세(船稅)의 수세(收稅)로 얻는 10만 냥,


  ⑤ 결작(結作)이라는 이름으로 토지 매결당(每結當) 쌀 2말 혹은 5전(錢)씩을 전세(田稅)에 부과하여 얻는 40만 냥,


  ⑥ 지방관의 사용(私用)으로 쓰던 은결(隱結)과 여결(餘結)을 국가수입으로 전용(轉用)하여 얻는 5만 냥


  등 모두 80만 냥으로 군포의 감필에 따른 부족재원을 마련하였다. 여기에서 감혁은 군문의 지출을 줄인 것이고 이획은 경상재정이 아니므로, 이것을 뺀 60여만 냥을 각 아문(衙門)·군문 및 각 도에 지급하였다.


  이렇게 하여 군포 1필이 감해졌으나, 군포의 근본적인 성격에는 변동이 없었으므로 군역대상자의 도망은 여전하였으며, 도망자·사망자의 군포가 면제되지 않아 이를 다른 양인이 2중·3중으로 부담함으로써 군포감필 정책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양인들은 계속되는 무거운 군역에 불만을 품고, 철종(哲宗) 때는 농민반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선무군관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11&dir_id=110101&eid=HzNWQOIsMmv0%2BJQwKkmE5i2FwUZP74wF

http://blog.naver.com/soojinfan/100014618772


선 : 선발하다

무 : 무술

군관 : 군인을 지휘하는 사람


균역법 시행 이후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지방의 부유한 평민이나 토호들을 조직하여 포(베)를 징수하고 유사시에는 소집하여 군졸을 지휘하게 했는데 이들을 선무군관이라 한다.


이 당시 지방의 유력자나 부유한 평민들은 각종 편법으로 군역을 피해가는 현상이 점점 증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에게 가중되는 군포의 부담을 경감시키고 부족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이들에게 선무군관포의 명목으로 매년 1필의 포를 징수하고 실제 군역의 부담은 면제시켜주었다.


선무군관이 되면 매년 면포 1필을 납부하게 된다.


 

 

4-2. 서민 경제의 발전


1) 양반 지주의 경영 변화


2) 농민 경제의 변화


 

 

광작

http://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60-goangjag.htm

http://chungdong.or.kr/highroom/history/dictionary/%B1%A4%C0%DB%B3%F3%BE%F7.html


조선 후기에 농민들이 경작지를 늘려서 넓은 토지를 경작하려던 현상이다. 벼농사에 이앙법(移秧法:모내기)이 널리 보급되면서 같은 양의 노동력으로 더 넓은 토지를 경작할 수 있게 되자 경작지를 늘려 농사짓기를 하려는 농민들이 점차 늘기 시작하였다. 이앙법은 조선 초기부터 행해지고 있었지만, 이 경작방법이 재래식 직파법(直播法)을 밀어내고 지배적인 경작방법으로 자리를 잡아간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였다. 이때부터 광작도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는데, 광작 농업이 확대되면서 조선사회는 사회·경제적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광작은 대개 부농층(富農層)인 지주들에 의해 추진되었고, 이에 따라 토지가 없는 농민들은 소작할 땅조차 얻기가 어렵게 되었다. 할 일이 없어진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나가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임금 노동자가 되었고, 심지어 노비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제가 자주 일어나자 이에 대한 대책론으로 한 사람 소유의 대토지를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경작하게 하자는 분경론(分耕論) 등이 제안되기도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광작하는 농민은 자급자족을 위하여 생산하는 단계를 넘어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농업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광작으로 더욱 부를 축적한 부농들은 가난한 농민들이 가을에 수확물을 싼값에 팔 때 이를 사들여 두었다가 곡가가 오를 때를 기다려 다시 판매함으로써 곡물의 상품화를 촉진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소농의 몰락을 기반으로 하여 성장한 지주형·부농형 광작은 조선 후기 농촌사회의 분화(分化)를 촉진한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광작, 상업적 농업 등 농업 경영방식의 변화는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소작료 지불 형태에도 변화를 가져왔고, 이는 소작인으로 하여금 지주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농업을 경영할 수 있게 하였다. 즉, 이전까지의 지주가 농지를 대여해 주고 그 대가로서 추수기에 수확량의 절반을 징수하던 소작제도인 타조법(打租法) 대신 소작료를 미리 협정하고 매년의 수확량에 관계없이 일정의 소작료를 징수하는 방법으로, 풍흉(佯凶)에따라 소작료가 변하지 않는 것이 특징인 도조법(賭租法)으로 많이 바뀐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사회적 예속 관계에 있던 종래의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관계를 대립 관계로 바꾸어 놓았고, 마침내는 지주제를 타도하고 사회·경제적인 불평등을 체제적으로 해결하려는 민란(民亂)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타조법

http://www.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360-tajobub.htm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536&no=1920


지주가 농지를 대여해 주고 그 대가로서 추수기에 수확량의 절반을 징수하던 소작제도를 말하는데 타작법(打作法)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부터 행하여진 병작반수(竝作半收) 계통의 지대(地代)로서 조선 후기에는 타작법(打作法)이라 불렀다. 타조는 그 액수를 미리 정하지 않고 지주와 작인(作人)이 수확량의 분배율만 정하여 두었다가 매년 생산물의 양을 보아서 그 비율에 따라서 분배하였는데, 그 비율은 대체로 분반타작(分半打作)이라 하였듯이 수확물의 1/2이 지배적이었다.

  타조법은 논[畓]에서도 도조(賭租)가 관행인 곳이 많았으나, 조선 후기 숙종 ·영조 연간에 수전농업(水田農業)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논에서도 병작반수의 타조법이 관행으로서 전국 각지에서 보편화되었다. 대체로 조선 전기에는 종자와 전세(田稅)는 지주 부담이 원칙이었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면 중부 이남 지방에서는 소작인이, 북부지방에서는 지주가 부담하였고, 일제감정기에는 양자가 반분하든지 지주가 전담하였다.


  한편 18~19세기 지대징수의 어려움과 관련하여 논에서도 도조제로 전환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당시 농법의 전환으로 농업생산력이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따라서 도조제는 지주층에게 불리했으므로 지주층은 다시 타조제를 강요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지주수입이 증대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작인층에게 수입의 감소를 강요하는 일이었다. 이에 경작농민들은 타조제 아래에서의 지주측의 반타작에 항거하여, 도조제로의 전환을 진행시켰다. 그러나 지주측은 도조제 아래에서 도량형을 적절히 이용하거나 흉작시의 수도(收賭) 문제나 작미시의 후봉(厚捧) 문제를 중심으로 도조액을 증가시키거나 병작제로의 재역전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속에서 소작농민들은 일반적으로 병작제에 비하여 작인에게 유리한 도조제를 추구했으며 괄목할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과정은 일본제국주의 권력이 한국 농업을 일인지주 중심의 수탈적 농업체계로 짜넣으면서 전면적으로 재조정되었다. 이 과정은 소작료 수납방식인 타조·도조·집조(執租)의 여하를 막론하고 지대액의 상승강화로 나타났다. 이는 곧 한국인 소작농민을 수탈하는 것이며, 몰락을 의미했다


 

 

 

도조법

http://www.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112-dojobub.htm


조선시대의 소작제도에서 소작료를 정하던 제도이다. 도지법(賭地法) ·도작법(賭作法)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이래 소작제도는 소작료 징수방법에 따라 크게 병작법(竝作法:打作法·折半法)과 도조법의 2종류가 관행적으로 시행되어왔다. 소작료를 미리 협정하고 매년의 수확량에 관계없이 일정의 소작료를 징수하는 방법으로, 풍흉(佯凶)에따라 소작료가 변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는 집조법(執租法)과 정조법(定租法)이 있는데, 전자는 매년 수확하기 전에 지주가 간평인(看評人)을 보내 소작인과 함께 작황을 파악, 소작료를 정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에 따르면 대체적으로 소작료율은 일정하나 소작료액은 흉풍에 따라 달랐다. 후자는 미리 일정의 소작료를 정하여 징수하는 방법이다. 이때 소작료를 정하는 방법에는 평년작을 표준으로 장기간(長期間)에 걸쳐 매년 일정 불변의 소작료를 징수하는 방법, 매년 토지가격을 표준으로 하는 방법, 토지의 면적을 표준으로 하는 방법 등이 있었다. 그중에서 평년작을 표준으로 하는 방법이 가장 지배적이었으며, 이때 지주들은 추수기(秋收記)에 기록된 해마다의 수확량·소작미를 참작하여 결정했다. 또한 이러한 경우에도 장기간에 걸쳐 매년 일정 불변의 소작료를 징수하는 방법과 매년 경작하기 전에 전년까지의 평년작을 표준으로 하여 결정하는 방법의 2종류가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각각 정액법(定額法)· 정조법(定租法)으로 일반화되었다.


 

 

 

경세유표

http://www.seelotus.com/gojeon/gojeon/su-pil-bi-pyeong/kyeong-se-u-pyo.htm

http://211.252.89.97/ban/sa/ex/h6333.htm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B0%E6%BC%BC%C0%AF%C7%A5&sort=0&c=1&qt=df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의 전지(田地)는 10경(頃)이고 그 아들은 10명이라고 하자. 그 들 중 한 아들은 전지 3경을 얻고, 두 아들은 2경을 얻고, 나머지 네 아들은 전지를 얻지 못하여 울면서 길거리에서 뒹굴다가 굶어죽게 된다면 그 사람을 부모 노릇 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늘이 백성을 내릴 적에 먼저 전지를 마련하여 그들로 하여금 먹고 살게 하였고, 또 한 백성을 위하여 군주(君主)와 목민관(牧民官)을 세워 그들의 부모가 되게 하였으며, 백성의 재산을 균등하게 하여 다 함께 잘 살도록 하였다.


 그런데도 군주와 목민관이 팔장만 끼고 앉아 아무 일도 안 한다면, 그 아들이 서로 싸워서 재산을 빼앗고 자기에게 합치는 일을 못하게 막을 자는 누구란 말인가? 힘센 자 는 더 많이 얻게 되고 약한 자는 떠밀리어 땅에 넘어져 죽게 된다면, 그 군주와 목민관된 자는 남의 군주와 목민관 노릇을 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백성들의 재산을 균등하게 하여 다 함께 살 수 있도록 한 사람은 군주와 목민관 노릇을 잘 한 사람이요, 백성들의 재산을 균등하게 하지 못하여 다같이 살 수 있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군주와 목민관의 직무를 저버린 사람이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전지를 갖게 하고,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은 전지를 갖지 못하게 하며, 농사를 짓는 사람은 곡식을 분배받게 되고,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은 곡식을 분배받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공장(工匠)은 그들이 만든 기구로써 곡식을 바꾸게 되고 상인은 화물(貨物)로써 양곡을 사게 되면 아무 지장이 없게 된다.


선비는 열 손가락이 유약하여 힘든 작업을 감당하지 못하니 밭을 갈겠는가, 김을 매겠는가, 거름을 주겠는가? 그들의 이름이 노동 기록 장부에 기록되지 못하면 가을에 곡식 분배를 받지 못할 것이다. 아아, 내가 여전법(閭田法)을 시행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대체 선비란 무엇하는 사람인가? 어찌하여 선비는 손발도 놀리지 아니하고 땅에 생산된 것을 빼앗아 먹으며 남이 노동한 것을 삼켜 먹는가?


대저 선비가 놀고 먹기 때문에 땅에서 나는 이(利)가 다 개척되고 있다. 놀고서는 곡식을 분배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또한 장차 직업을 옮겨 농사를 지을 것이다. 선비 가 직업을 바꾸어 농사꾼이 되면 땅에서는 이(利)도 개척되고 선비가 직업을 바꾸어 농사꾼이 되면 난민(難民)도 없어질 것이다.


 선비 중에는 반드시 직업을 바꾸어서 농사꾼으로 되지 못하는 자도 있을 것이니, 이런 경우에는 장차 어찌할 것인가? 공장(工匠)과 상인으로 변하는 자도 있을 것이며, 아침에는 들에 나가 농사를 짓고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 옛 사람의 서적을 읽는 자도 있을 것이며, 부유한 사람의 자제를 가르치는 것으로 살 길을 구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또 한 실리(實利)를 강구(講究)하여 토지에 적합한 농작물을 분별하고 수리(水利)를 일으키며 기구를 제작하여 인력을 덜어주기도 하고 농사 기술과 목축업을 가르쳐서 농민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자는 그 공을 어찌 육체 노동하는 사람과 견줄 수 있겠는가? 하루의 일을 열흘로 기록하고 열흘 동안 한 일을 백일로 기록하여 그에 따라 곡식(穀食)을 분배받아야 옳을 것이다. 선비에게 어찌 분배(分配)가 없겠는가? 



 

 

3) 민영 수공업의 발달


4) 민영 광산의 증가

 

 

 

잠채

http://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299-jamche.htm


조선 후기 정부의 단속·금지를 피해 비밀리에 광산을 경영하던 현상이다. 본래 조선 정부는 광업에 있어서 부역노동으로 운영하는 관영광업 이외에 개인경영을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국가재정의 파탄으로 직접 광산을 경영할 수 없게 되었고 또한 청나라와의 무역확대로 은의 수요는 증대되었으므로 부득이 광업정책을 수정하게 되었다. 결국 1651년부터 정부의 일정한 통제 아래 은점(銀店)이나 금점의 경영을 허가하고 그들로부터 세금을 수탈하는 제도인 설점수세제(設店收稅制)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 금·은 광산의 수가 급증하여 정부의 통제가 어려워지고 광세수입도 급격히 줄어들자, 정부는 필요에 따라 단천(端川)·성천(成川) 등 몇 개 지역의 은점만을 남겨두고 기타 은광들은 모두 금지하는 등 광업금지정책을 완강하게 고집했다. 이로 인해 이 시기를 전후하여 개인들이 몰래 광산을 경영하는 잠채현상이 성행하게 되었으며 특히 금점에서 성행했다. 그것은 금을 얻는 방법이 은·동에 비해 간단할 뿐만 아니라 19세기 이후 금시장이 확대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시기 은·동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고 광업이 전반적으로 발전하면서 은광·동광에서도 잠채현상은 이미 막을 수 없는 추세로 되었다. 이와 같은 광산개발의 증가와 잠채의 성행은 이후 상업자본이 광산경영으로 진출하고, 토지에서 이탈한 농민들이 광산노동자로 진출함으로써 광산에서의 자본주의적 관계가 발생하게 되었다.



 

 

4-3.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1) 사상의 대두

 

 

 

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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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은 고려의 수도였던 송도(松都) 즉 개성의 상인이다. 고려를 창건한 왕건의 조상은 대대로 당(唐)나라와의 무역에 종사하면서 부(富)를 축적한 송악(松嶽)지방의 신흥귀족이었는데 그의 해상세력은 고려개국 후 송(宋), 아라비아, 왜(倭)와의 무역에 크게 일조 했다. 송악근처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는 국제 무역항 구실을 하였으며 송악도 외국사신을 통한 공무역(公貿易)과 외국상인에 의한 사무역(私貿易)이 번창한 상업도시가 되었다. 송도에 개국 초부터 설치한 시전(市廛)은 국내 상거래와 외국과의 교역도 활발했는데 이러한 무역과 국내 각지와의 상업활동은 주로 규모가 크고 상술이 앞선 개성상인이 맡아하였다.

 이후 왕조가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어지면서 이씨 정권에 반대한 개성출신 사대부(士大夫)들은 관료로 진출하는 것을 포기하고 상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들은 국내의 어느 상인 계층보다 지식을 갖춘 높은 수준의 상인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상술이 뛰어났고 상인으로써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개성상인은 상업에 있어서 기회의 포착에 영민하고 신용을 무엇보다 중시하며, 이익에 철두철미 하였으며 근검절약을 생활화하였다. 송상이 발행한 어음표는 산골의 객주와 여각에서도 탈 없이 통용되었다고 하며 그들이 개발해서 사용했다는 사개송도치부법(四介松都治簿法)은 서양보다 200년 앞선 복식부기장부였다고 한다.

 조선왕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후는 민간상인에 의한 무역이 금지되고 서울의 시전상인들이 관수품과 무역상품의 조달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선전( 廛), 백목전(白木廛), 청포전(靑布廛)등 4대 시전과 전국 상업계를 연결하는 행상(行商) -개성은 입지조건이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좌상보다 행상에 더 주력했다.- 조직으로 이를 극복하고 조선초기부터 기반을 확고히 다져나갔다. 여기에 근면, 성실과 높은 지식수준에 의한 상술의 개발로 서울의 상인군과 쌍벽을 이루었다.

 조선 중기 이후 상품 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라 개성은 전국 제일의 상업도시로 발전하였다. 지방에 객주(客主)와 여각(旅閣)이 생기면서 상권을 전국적으로 확대, 조직화하여 송방(松房)이라는 지점(支店)을 전국 주요 상업 중심지에 설치했다. 송방을 통하여 약 1만 명으로 추정되는 송상이 전국에 분산되어 행상하다가 추석이나 연말에는 귀가하게 되는데 송방은 정보교환과 상품 공급 및 보관소로도 이용되었다. 송방 또는 개성상인이라는 특수한 명칭은 이때부터 전국적으로 알려졌으며 특히 양태를 산지까지 까서 매점 하여 직접 판매하여 시전의 양태전에 큰 타격을 주는 등 도고상업을 통해서도 상업자본을 축적하였다.

 18세기에 이르러 송상은 중국 사신일행 속에 잠입 청상(淸商), 은, 인삼 등을 직접 수출하는 밀무역도 했다. 또한 피혁, 지물 등도 매점하여 중국에 직접수출하고 중국에서 바늘, 모자, 말총, 채련피(당나귀 가죽), 백삼승(흰 무명), 궤자(가마테) 등을 수입했다. 개성상인은 가삼(家蔘)이 재배되기 이전부터 산삼을 선매하여 일본에 수출하고, 일본으로부터 은을 들여와서 다시 중국에 수출하여 큰 이익을 얻었다. 개성상인은 이렇게 해서 축적한 자본을 바탕으로 인삼의 재배와 가공, 광산개발 등에 투자하여 자본을 축적하게 된다.

 인삼재배는 18세기 후반에 전라도 동복지역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송상이 동복지방을 행상하다가, 인삼재배를 목격하고 개성에서 재배하기 시작하고 양질의 인삼을 홍삼으로 가공하여 유리한 조건으로 중국에 수출했다. 특히 개성상인이 자본축적도를 높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홍삼의 밀조와 밀수출이었다. 정부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선박을 이용하여 밀수출했으며 이를 위한 홍삼제조창은 다른 지방에도 두었다.

 송상의 자본은 개항 전 국내 최대의 토착 민간자본으로 성장했으며 개항 후 외국자본에 저항하는 가장 강한 민간자본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송상의 자본은 외국자본 특히 일본에 의해 철저히 봉쇄 당하게 된다.



 

 

 

2) 장시의 발달

 

 

 

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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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아(都兒) ·외목(外目)장수라고도 하였다. 본래 특권상인이던 공인(貢人)들이 공납품을 미리 사서 쌓아두던 창고를 뜻하였는데, 조선 후기 이후 대규모 자본을 동원한 매점상업이 등장하면서 이런 뜻으로 사용되었다.


18세기 이후 상품화폐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도시를 중심으로 난전(亂廛)이 발달하면서 보다 큰 자본력과 상술을 갖춘 비특권 상인인 사상(私商)이 등장, 상품유통과정에서 매점매석과 독점을 배경으로 성장하였으며, 초기에는 자유로운 상행위 때문에 난전을 벌여 특권상인의 독점권과 대립하던 직접생산자 ·소상인 등과 이해를 같이 하였으나 그들의 우세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독점하게 되면서부터 권력과 결탁하기도 하여 그들과 충돌하기도 하였다.


이후 이들은 보다 발전된 형태로서 대리인을 통해 본격적으로 생산지까지 진출하여 상품을 매점하거나 또는 일부 상품의 경우 생산자에게 원료와 생산비를 미리 주고 생산과정을 지배, 장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생산지까지 확대된 원격지 교역은 소상품생산자의 상품유통을 가로막고 소비자에게도 큰 피해를 입혔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도고끼리 유통망과 자본을 연결한 연합형태로서, 지방에서 도고를 하는 여각(旅閣) ·객주(客主) ·선주인(船主人) 등을 통해 지방 상품을 매점하기도 하였다. 정부는 1791년(정조 15) 신해통공(辛亥通共) 이후 여러 차례 도고혁파령을 내렸지만, 이들은 상당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한성부와 같은 정부기관이나 궁방(宮房) 및 양반권세가 등과 결탁하여 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근절되지 않았다.


1833년 서울의 하층소비자들이 일으킨 ‘쌀소동’은, 서울의 미전상인과 여객주인 및 경강 무곡(貿穀)상인이 연합하여 쌀값을 올리려고 매점매석함으로써 서울 싸전들이 문을 닫았고, 이 때문에 쌀을 구하지 못한 빈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주로 개성 ·동래 ·의주와 같이 대외무역이 활발한 지역이나 지방의 상품 집산지, 특히 금난전권이 미치지 못하던 서울 성밖의 경강(京江) ·송파(松坡) ·누원점(樓院店)과 같은 상업요충지는 도고들의 주요 활동지였다. 이들은 소비자의 생계에 없어서는 안 될 쌀 ·소금 그 밖의 여러 가지 일용품까지 매점매석을 일삼았기 때문에 상품공급의 부족과 물가상승을 야기하여 도시소비자의 생활을 압박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전상인과 경쟁함으로써 이들을 통해 국역을 부과하고 징세하던 국가재정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와 같이 이들은 대자본과 전국적 유통망을 기반으로 하면서 한편으로는 봉건권력과의 결탁을 유지의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에 대부분은 특권적 정상(政商)이었다.


또한 이들은 상업독점으로 축적한 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하기보다 토지에 투자하여 봉건적 토지소유관계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하여, 이를 극복하지 않는 한 근대적인 상업과 상업자본으로 발전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보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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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의 넓은 의미의 정의는 고대사회이래 상품집산지에서 구입한 일용 잡화물을 지방의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소비자에게 판 행상인(行商人) 정도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당시 돌아다니는 모든 상인이 보부상은 아니었고 일정을 단위로 자율적으로 조직된 행상조합 형태의 단체를 가진 상단에 소속된 상인을 보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단체 개념으로 보부상의 생성시기는 조선초기라고 생각된다. 이유는 당시 조선왕조가 성립되어 사회가 안정됨에 따라 행상의 활동이 활발해졌고 이들 사이에 결사의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태조 이성계가 각 고을에 임방(任房)을 설치해 주었기 때문에 보부상단은 국가의 공인을 받는 상업집단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이라는 용어도 생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보부상은 이 두 상인의 복합명사이다. 보부상은 판매방식과 취급물종 등의 차이에 의해 보상과 부상 두 개의 상단(商團)으로 구분되었다. 보상은 비교적 값비싼 필묵, 금·은·동 제품 등과 같은 정밀한 세공품(細工品)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판매하였다. 그래서 '봇짐장수' 라고도 한다. 이에 비해 부상은 나무그릇, 토기 등과 같은 비교적 조잡한 일용품을 상품으로 하여, 지게에 지고 다니면서 판매하였다. 그래서 '등짐장수'라고도 한다. 보부상이 되는 경우는 농민 중 생활고로 토지에서 이탈된 자, 몰락한 양만, 수공업 종사자 등으로 양반에서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을 아우르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조선 후기이래 신분제 빛 지주제의 모순에 의해 형성된 계층이다.

 보부상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조선 후기이다. 조선후기에 보부상이 크게 보급된 것은 향시(鄕市)망이 전국적으로 형성되어 보부상의 활동무대가 커졌기 때문이다. 보부상은 상단을 결성함으로써 보상과 부상간의 거래 독점권을 유지하고 상호부조를 긴밀히 할 수 있었다. 또한 정부가 보부상의 단결력과 조직망을 이용하여 비상시에 통신(通信)과 물자운반 등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기 때문에 보부상은 국가의 비호를 받으며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그들은 사발통문(沙鉢通文)이라는 고유의 통신수단이 있어서 빠르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었는데 이 사발통문은 관계자의 이름을 삥 둘러서 적었기 때문에 주모자가 드러나지도 않는 장점이 있었다. 보부상의 조직은 시기와 지방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보상의 경우 1인의 대표 인 접장(接長)과 1명의 고문인 영위(嶺位)를 선출했으며 부상은 상무사의 중앙임원 35명, 지방 임원으로 반수(班首)와 부반수(副班首)가 각각 1명씩 있었다. 보부상은 이러한 전국적인 조직망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조선 후기의 보부상은 정치적 세력을 가진 집단으로 더욱 정권과 유착하게 되었다.

 보부상은 조선후기 상품유통의 공간확대에 기여하는데 19세기 중엽이래 지역별로 분업적으로 생산된 상품은 보부상에 의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보상과 부상은 서로 업무가 분담되어 있어 충돌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어떤 지역에서 보상이나 부상 한쪽만의 활동이 지배적인 경우 상대방 고유의 물종을 관할하는 경우도 있어서 때로는 판매영역을 둘러싸고 갈등을 겪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보부상은 영세성을 면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상업자본으로 성장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하지만 어느 정도 재력을 갖춘 상태에서 보부상 조직에 참여하여 조직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려고 했던 사람들의 경우 자본의 축적이 가능했다. 이들은 시전상인으로 발전하거나 보부상에 의한 상회(商會)와 회사를 설립하거나 금전대출자로 성장했다.


 

 

3) 포구에서의 상업활동

 

 

 

포구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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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구상업의 발달 배경

  1) 사상인의 등장과 장시(場市)의 번성

조선왕조는 건국부터 수취체제에 대한 대단한 관심과 적극적인 시책으로 전국적인 조운제를 정비해 갔다. 특히 낙동강을 이용한 조운(漕運)을 확립하여 경상도 지역의 수취에 심혈을 기울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조운선을 건조하는 과정에 목재구입, 기술자 고용문제와 조졸(漕卒)의 선정을 비롯한 인적관리 문제, 운항에 따른 항해술, 자연 재해의 극복문제로 인하여 존폐여부가 논의되기도 했다. 임진, 병자호란이후에 조운제는 거이 파괴되었다가 영, 정조조에 강력한 복원정책으로 경상조운이 재개되었다. 좌, 우, 후조창의 3조창이 복원되었고, 부족한 관선(官船)인 조운선 대신에 지방민이 소유하고 있던 사선(私船)인 지토선(地土船)이 임선(賃船)으로 대처되었다. 지토선의 영업행위는 수취체제에 많은 이득을 가져다 주었으나, 지토선의 확보, 지방관과 중앙관리들과의 연계, 자본문제 등에서 새로운 경쟁관계에 있던 경강선인(京江船人)에게 밀려나 새로운 모색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수취체제면에서 사선의 등장은 사상인의 활동과 이익을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18세기는 농민층의 분해가 심화되면서 농민이 이농하여 상업, 수공업, 광업 등에 종사하는 현상이 두드려졌다. 17세기까지 지방시장인 장시는 주로 중부이남 지역에서 발달했지만 18세기에는 전국적으로 1,000 여 개의 장시로 성장하여 주도면밀한 장시망까지 형성되었다. 이것은 17세기 말이래 생산력의 현저한 발전을 통해 사회적 분업과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이 가져온 결과이다. 상업인구의 증가, 유통구조의 변화, 판로개척 등으로 일부 장시는 상설시장화 하면서 유수한 상업도시 및 상업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2) 선박교역의 이점

강이나 해안을 낀 포구는 물화의 집산이나 교역에 있어서 선박을 이용할 수 있는 장점을 갖추고 있었다. 택리지의 저자인 이중환(李重煥)은 많은 물자를 수송함에 있어 수레보다는 선박이 더 우수하다는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들이 적어서 수레가 다니기에는 불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나라의 장사치는 모두 말에다 화물을 싣는다. 그러나 목적한 곳까지의 길이 멀면 노자만 많이 허비하면서 소득이 적다. 이런 연유로 선박에다 물자를 실어 옮겨서 교역하는 이익보다 못하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3면이 모두 바다이므로 배가 통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면서 운송수단으로서 선박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선박을 이용한 물자수송은 대체로 강을 따라서 오르내리는 강상운수와 해안을 따라서 교역하는 해상운수가 있다. 강상운수로 이용된 강은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대동강 등 주로 남, 서해로 흐르는 강이다. 해상운수는 대체로 17세기까지는 남해안과 서해안을 자유롭게 왕래하였으나, 동해안은 18세기가 되어야 개통되었다. 낙동강의 강상운수는 하류에서 안동, 상주 등지로 운행되었다. 이로서 낙동강을 연안을 따라 내방포구가 발달하게 되었다. 반면에 해상운수는 제법 다양한 항로가 존재했는데, 해안선을 따라서 부산-- 여수 항로, 여수-- 목포 항로, 부산--원산 항로가 있다. 그리고 남해안의 각 도서를 연결해 주는 목포, 우이도, 흑산도, 매가도, 태도, 임자도, 마안도, 고군산도의 항로가 있다. 연안항로를 벗어나서 부산, 거제도, 여수, 거문도, 우도, 제주도, 추자도를 잇는 목포항로와 부산--울릉도를 잇는 항로가 있다. 이러한 항로개설로 인하여 외방포구의 발달을 가져 왔다.


2. 낙동강 포구상업의 중심지 구포


내방포구와 외방포구는 상당히 성격을 달리 하였다. 먼저 교역물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 강을 따라 형성된 내방포구는 내륙지방에 생산되는 곡물, 목재, 시탄(柴炭), 약재 등인 반면에, 외방포구는 주로 해산물이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물산을 운송하는 선박도 강상운수에는 광선(廣船)이, 해상운수에는 삼선(衫船), 통선(桶船) 등이 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강과 바다를 왕래할 수 있었던 노선(櫓船)인 농토선(農土船)이 있다. 그래서 해산물과 육지산물과의 교역은 많은 이윤을 챙길 수 있기 때문에 상인들은 물산이 집산되는 곳이나 판매의 거점이 되는 내외포구를 중심으로 상업적 조직망을 갖고자 했다. 강상교역의 시발지인 강의 하류지역은 각 외방포구의 해산물이 강상운수을 이용하기 위해 강으로 들어오는 입구이기도 하다. 조선후기 상업의 발달은 교통의 요지와 물산 집산지를 중심으로 새로운 상업도회지로 성장해 갔으며, 선박을 이용한 교역은 강상과 해상의 접합점인 강의 하구지역이 지리적 여건에 의해 주로 신흥 상업도회지로 발달해 갔다. 18세기 중반 이중환(李重煥)은 낙동강 하구의 칠성포(七星浦), 영산강 하구의 법성포(法聖浦)와 사진포(沙津浦), 전주의 사탄(沙灘), 금강의 강경포(江景浦)를 발달한 상품유통의 중심 포구로 들고 있다. 낙동강 하구에 있었던 칠성포의 번성이 어떠했는지 자료가 부족하여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낙동강의 각 포구를 대표할 만 포구상업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칠성포의 번성에 대한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고, 그 후 구포장이 이 지역 최대의 장시가 되었던 것으로 보아 구포가 포구상업의 중심이 되었다.

구포가 포구상업의 중심지로 번성하게 된 원인은 먼저 구포가 위치한 것이 낙동강 하류에 위치하여 강상과 해상교역의 접합점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낙동강 본류에 위치하면서 바다와 가장 단거리로 연결되고 또한 수심이 깊어 곡식 300 여 석을 실은 대형 선박을 접안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원래 낙동강 하류의 중심 교역통로는 불암창(佛巖倉)--산산창(蒜山倉)--조전(漕轉)--김해로 이어지는 현재의 서낙동강이 유역이었다. 그러나 상류에 흘러온 토사가 칠점산(七点山)과 명지도(鳴旨島)에 퇴적되면서 서낙동강 유역이 지류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구포에 감동창(甘同倉 혹은 南倉)이 설치되어 많은 조운선이 출입하게 됨으로 관리나 역부(役夫)들이 자주 왕래하게 되었다. 이것은 숙박업과 교역물자에 대한 상업행위가 발생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감동창을 중심으로 장시가 열리게 되었다. 또한 왜관무역의 관장과 주변 일대의 행정 중심인 동래부와 왜관무역을 담당했던 동래상인과도 연결이 용이하였다. 바다와 큰 강물이 만나는 낙동강 하류지역은 선박이 통과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육로로서 내륙물산을 만덕고개를 넘어 최단거리로 짧은 시간에 공급할 수 있는 위치에 구포가 있어 포구상업의 번성을 이루었다고 본다. 따라서 구포장은 낙동강유역에서 가장 큰 장시가 되었으며, 경상도 상권의 중심지가 되었다.

구포장에서 교역된 물산은 다양했으며, 유통지역이 상당히 광범했다. 구포장의 교역지역에 대하여 그 일면을 각설패가 불렀던 구포장 타령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구포장 타령에서 나오는 장시명에서 대구, 양산, 밀양, 수산, 김해, 덕두, 하단장은 모두 낙동강을 끼고 있는 포구장시들이다. 그리고 자갈치, 구례, 흥해장은 남해안과 동해안에 위치한 외방포구에 위치한 장시들이다. 실제 구포에서 삼랑진까지는 강상운수에 별다른 제약이 없으나 왜관, 안동, 상주로 이어지는 중, 상류지역은 강수량의 변화에 따라 제약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량수송과 먼거리 운반 등의 장점을 갖고 있는 선박운수였기에 낙동강을 따라 이어지는 각 포구가 점차 번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구포장은 구포장타령에서 보았듯이 교역지역이 낙동강과 해상교역의 접합점으로서 장점을 충분히 살린 경상도 최대의 포구상업 도회지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를 보면 구포장에서 교역된 대표적인 물품은 곡물, 목재, 시탄(柴炭), 생선, 소금 등이다. 특히 경상도 지역의 최대 소금 교역지 이었다고 본다. 조선후기 낙동강 하류인 명지도와 녹두도(菉豆島)에서는 공염(公鹽)을 생산하였다. 당시 경상감영은 산산창(蒜山倉)의 염본미(鹽本米) 1,500석의 대금 4,500량을 두 섬의 염민(鹽民)에게 주고 생산된 소금 3,000석을 매 석에 7량으로 내어 팔아 염본미 대금을 갚도록 하였다. 공염 3,000석은 판매하는 기간이 일정할 뿐만 아니라 그 대금은 항상 선금으로 감영에 납입되어야 했다. 공염제도 하에서도 한정액 3,000석이상의 소금이 생산되었으며, 이 것은 사염으로서 사염상(私鹽商)들에게 우선 외상으로 주고 수금은 분할하여 일년 내내 판매되었다. 공염제도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생하여 순조 19년(1819)에 폐지되었고, 이 후에는 사염제도 하에서 염세를 받게 되었다. 소금 생산과 판매가 사염화 됨으로 더욱 많은 이윤을 취하기 위해 염전이 확대되었다. 따라서 명지도의 소금생산량은 더욱 증가되어 1935년까지 매년 60kg 들이로 10만 가마를 생산하였다.

생산된 소금은 처음에는 지토선과 광선을 소유하고 있던 선주인(船主人)에 의하여 경상지역 70여 고을에 공급되었다. 하지만 상품유통업에 참가하는 사람이 증가하고 물동량의 증대 및 다양화는 기존의 유통조직에도 변화를 가져 왔다. 기존의 상품유통구조는 시전상인이 정점으로 사상(私商)---선주인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19세기가 되면 포구주인(浦口主人)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이들은 처음에 상품유통의 보조자로서 상업담당세력의 성격을 지녔다기 보다는 상품유통의 기생자에 불과 하였다. 그러나 포구주인은 서울에서 시전을 배제시키고, 외방포구에서도 상품유통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구포지역도 선주인을 배재시킨 포구주인에 의해 장악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소금산지와 인접해 있고 선박을 이용하여 대량으로 낙동강과 동해안을 연결하는 접합점에 위치한 구포가 소금유통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포구주인에 대한 자료가 전해져 오지 않고 있는 실정이 안타깝다.      

이렇게 조선후기에 포구상업의 중심지로서 번성을 누려왔던 구포는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쇠퇴의 길로 걸었다. 철도개통은 영남지방의 다량 상품유통에 변화를 일으켰다. 철도를 이용한 상품운송은 기존의 선박보다도 편리하고, 한편으로 민족상업자본 형성을 저지하기 위한 일제 식민정책으로 새로운 상권형성정책이 추진되어 더욱 발전하였다. 따라서 철도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도회지 형성과 이를 기점으로 다시 소단위 상업루트가 형성되었다. 즉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었고, 철로를 장악하고 있던 조선총독부가 영남경제를 통제할 수 있었다. 구포에서 출발되었던 강상운수의 대표적인 물품인 소금이 철로를 통해서 수송됨에 구포의 포구주인이 많은 이윤을 잃게 되자 아울러 구포장시도 쇄퇴하게 되었다.


 

 

 

객주와 여각

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minsok/txt/text/4-2-3.html

조선시대의 지방상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객주(客主)와 여각(旅閣)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지방도시의 화물 집산지에 존재하여 각 지방에서 몰려 들어오는 객상(客商)들을 위하여 화물의 도매나 보관, 창고업, 위탁판매업, 운송업, 대부 및 예금, 수형(手形) 발행 등의 금융업을 담당했다. 또한 때로는 여숙업(旅宿業)을 겸하는 등 상업기관의 역할을 하던 것으로서 대체적으로 보아 자본이 많은 것이 여각, 적은 것이 객주로 불리었다.

객주와 여각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취급화물에 관한 차이, 설비에 관한 차이, 소재에 관한 차이 등으로 구별되지만 숙박의 업무에 있어서는 양자를 동일시하여 구별없이 통용하는 경우가 많다. 즉,


「객주는 이를 여각이라고 하며, 아국(주 : 일본)의 간옥영업[間屋營業(주 : 위탁도매업)]에 상당하는 것이다[註]」


라고 양자를 동일시하고 있으며, 양자의 영업에 관하여서도,


「객주라 함은 객상(客商)의 주인의 의미로서…객상을 숙박시키고…여각은 여상(旅商)으로서 여각 즉, 여관의 뜻인데 그 영업은 객주와 대동소이하지만 다른 점은 가옥이 크고 창고를 가지고 마방우방(馬房牛房)까지 가지고 있음이 보통이다[註]」


라고 하여 양자가 같이 숙박업을 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특히 보부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즉, 객주는 보부상들이 취급하는 상품의 원활한 유통을 위하여 주인의 입장에서 보부상들을 보호, 육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같은 역할은 객주가 보부상을 건전하게 육성함으로써 원활한 상품 유통을 도모함으로써 자신들의 판로 개척과 영업의 육성을 꾀하고자 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대소 상인들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고자 함이었다.

따라서 일정한 장소에서 거주하는 대상(大商)인 객주는 떠돌아 다니는 소상(小商)인 보부상의 활동 여하에 따라 영업의 성패가 좌우될 만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상임사(上任事)인 객주는 상업상으로는 보부상의 주인격이었으며, 신분상으로도 도접장이 될 수 있었다.

객주를 이용자측에서 본다면 만상객주(灣商客主)와 보부상객주, 여각(旅閣)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만상객주는 의주에서 중국상품을 위탁 판매하던 객주를 말한다. 옛날 중국 상품은 국경의 관문인 의주항의 상인을 경유하여 국내에 들어올 수 있었는데, 만상객주는 의주에서 수입된 상품의 위탁판매를 본업으로 하고 여관 및 금융업을 겸하였다.

이에 반해 보부상객주는 보부상들의 행상 활동이 왕성해짐에 따라 나타난 것으로서 그 취급품목에 있어서 전문화가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충남 한산의 객주는 저포(苧布)를, 전남 구례 · 곡성의 객주는 마포, 나주 · 남평 · 광주의 객주는 목면을 전문적으로 취급하였다.

한편 여각은 주로 한강 연안의 각포(各浦)에 존재하였다. 취급상품은 주로 곡물 · 소금 · 어류 · 기타 해산물이었는데 이들은 규모가 큰 창고와 많은 자금을 보유하여 널리 상업활동을 한 대상인들이었다.

객주란 객상주인(客商主人)이라는 뜻이며, 주인이란 주선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다. 객주를 그 기능면에서 본다면 보행객주(步行客主)와 물상객주(物商客主)의 두 종류가 있다. 보행객주는 여숙업을 주로 하는 것으로 주막보다는 여러모로 고급이며 객실과 대우가 좋아서 중류 이상의 양반계급이 숙박하였다. 이에 대해 물상객주는 일종의 상업 · 금융기관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던 객주이다.

객주의 업무는 위탁판매업과 창고업 · 대부금업 · 예금업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위탁판매업은 상품생산자나 상인들이 보내는 화물을 받아들이고 혹은 그 위탁에 응하여 화물의 매매를 주선해주고 구전(口錢)을 받는 것이었다. 화물의 매매는 거간(居間)을 통하여 행하였는데, 거간에는 객주에 소속되어 있는 내거간(內居間)과 자기 집에서 다니며 활동하는 외거간(外居間)으로 구별된다. 거간에 대한 수수료는 곡물의 경우 1섬에 2∼4전이었고, 잡화물의 경우 1∼5%선이었다. 그리고 객주는 구전으로서 내구(內口), 외구(外口) 2구의 구전을 받았다. 내구는 매주(賣主)에게서 받는 것이며 외구는 매주(買主)에게서 받는 구전을 말한다.

둘째, 창고업으로서 객주는 화물의 보관을 맡았으나 창고세는 받지 않았다. 그러나 아주 오래 팔리지 않거나 팔리기 전에 화물의 주인이 다른 곳으로 옮길 경우에는 ‘과구(過口)’란 명목으로 창고세를 받기도 하였다.

세째, 대부금업으로서 객주는 화물을 담보로 하여 화물주인이나 살 사람에 대하여 대금의 입체(立替)와 자금의 융통을 해주었다. 특수한 경우에는 토지나 가옥 등의 부동산으로 이에 충당시키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 신용대부였다. 이 경우 흔히 오늘날 수표와 비슷한 어음을 발행하거나 인수하고 또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간의 금전 및 재화의 결재를 대행하였으며, 오늘날 환(換)과 비슷한 환표[換標 환간(換簡)]을 발행하거나 인수하여 교통이 불편하던 당시에 많은 편의를 주었다.

네째, 예금업으로서 객주는 화물주인의 자금이나 왕실 · 고관 · 양반 등을 위한 예금업무도 취급하였다.

이외에도 객주는 지방에서 중앙 각 관청에 바치는 물품이나 금전 등을 취급함으로써 정부의 각별한 보호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관리들의 엽관운동을 위한 자금을 대여해 주기도 하여 그 보수로 특정화물을 독점취급하는 특권을 얻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객주는 봉건적 경제체제 하에서 나름대로 활발한 활동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여 개항과 동시에 초기 외국무역의 담당자가 됨으로써 새로운 자본계급을 형성하게 되었다. 즉, 고종 13년(1876) 병자조약 체결 후 외국상품이 개항장을 통해 들어오면서부터 객주들은 객주회(客主會) 혹은 박물회(博物會)를 조직하여 길드(Guild)적인 동업조합의 기능을 발휘하였으며, 이들은 개항장에서 외국인과 절충하여 외국상품 판매의 중개역할을 담당하였다.



 

 

 

4) 중계무역의 발달

 

 

 

개시무역

http://www.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27-gaisimuyug.htm

조선 후기 중국·일본 등을 상대로 열었던 대외 교역시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임진왜란 이전의 우리 나라 대외교역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하사품을 받는 형식의 관무역 또는 공무역 형태의 물물교환이 있을 뿐이었다. 이밖에는 고려 정종 때 여진과의 교린정책상 열었던 호시(互市)에서의 교역이 있었고, 조선 세종 때에 일본과의 소규모 공무역이 있었으나 이것은 중종 때 철폐되었다. 임진왜란 후 도요토미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장악한 일본의 도쿠가와 바쿠후(幕府)는 외교사절을 빈번히 보내어 적극적으로 통교(通交)를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1603년(선조 36) 왜관개시(倭館開市)를 시행해서 일본과의 교역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개시의 시초가 되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에 정부는 영의정 유성룡의 건의를 받아들여 랴오둥[遼東]의 미곡을 구입해서 기민을 구제하고,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명에 개시를 요청했다. 명이 이러한 제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중강개시는 1593년부터 시작되었다. 조선은 은을 주요한 지불수단으로 하여 구리·수철(水鐵)·면포 등을 가지고 가서 미곡과 군마(軍馬) 등을 구입했다. 시일이 흐르면서 개시에서 서로 물건을 약탈하려는 현상이 벌어지는 등 많은 폐단이 야기되자, 1601년에 혁파되었다. 이듬해 명과 조선정부가 중강개시의 수세(收稅)를 통하여 국가경비를 충당하려는 목적에서 다시 열렸다. 그러나 무역상의 불리함과 잠상(潛商)의 인삼교역 등으로 폐단이 발생하여, 1609년(광해군 1) 다시 폐지했다.


  그러다가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이 끝난 후 후금(後金)에 대하여 많은 물품을 바쳐야 했던 조선과, 직물 등의 수요를 충족시켜야 했던 후금은 개시를 실시하여 교역을 시작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정묘호란 다음해인 1628년 2월에는 압록강 하류의 난자도(蘭子島=중강)에서 열리는 중강개시(中江開市)가 시작되었고, 같은 해 10월부터는 북관개시(北關開市) 또는 쌍시(雙市)라고 불리는 함경도 회령(會寧)과 경원(慶源)의 두 개시가 열렸다. 후금은 중강에서 연 3차의 교역을 요구하였으나 2차로 결정되었다. 교역이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만주 상인들에 의한 약탈 무역이나 다름이 없는 조선에 극히 불리한 거래였기 때문에 이마저 규정대로 열리지 않거나 개시 자체가 회피되었다. 중강개시에서는 미역·해삼·소·면포·백자 등을 청포(靑布)와 교환하였고, 회령과 경원개시에서는 소금·소· 솥·보습 등을 양피·청포와 바꾸었다. 또한 개시 때에는 밀무역의 형태인 후시무역(後市貿易)도 함께 열렸다.


  회령개시는 매년 10월에 열렸으나, 경원개시는 격년제로 열렸다. 개시 때는 두 나라의 관리들이 입회한 가운데 공무역(公貿易)으로 시작되었다. 회령·경원이 모두 개시되었을 경우를 쌍개시(雙開市), 회령만이 개시되었을 경우 단개시(單開市)라 했는데, 해가 거듭할수록 번창했다.


  회령개시는 병자호란 직후 1638년(인조 16) 청나라의 영고탑(寧古塔)·오라(烏喇) 등지의 사람들이 호부(戶部)의 공문을 가지고 와서 소·농기구·소금 등을 무역해간 데서 비롯되었다. <만기요람>에 의하면 1번의 교역에 소 114마리, 보습 2,600개, 소금 855섬이 팔렸으며, 주로 회령·경흥·경원·종성·온성·무산·길주 등지의 상인들이 참가했다. 청나라에서는 양구(羊 : 양의 가죽으로 지은 옷)와 소청포(小靑布)를 가져와서 교환해갔다. 교환비율은 1등 소 1마리에 양구 1벌과 소청포 2필이었고, 보습은 5개에 소청포 1필, 소금은 1섬에 소청포 1필이었다. 뒤에는 봉천·북경 등에서도 참가하면서 공무역이 아닌 사무역의 형태로까지 번창하게 되었다. 경원개시는 1645년(인조 23) 여진족의 암구뢰달호호(巖丘賴達湖戶)인들이 소·보습·솥 등을 교역해가면서 시작되었다. 1번의 교역에 소 50마리, 보습 48개, 솥 55개가 교역되었고, 교환비율은 1등 소 1마리에 대록피(大鹿皮) 3장(중록피는 4장, 소록피는 10장), 보습 1개에 소록피 1장, 솥 1개에 소록피 2장이었다.


 

 

 

후시무역

http://www.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403-husimuyug.htm

 조선시대 후기에 성행하던 사상(私商)의 밀무역을 말한다. 뒷장[後市]에서 나온 말로, 공무역인 개시무역(開市貿易)에 대칭되는 말이다. 조선의 사신 일행이 중국에 파송될 때 중국의 회동관(會同館)에서 이루어진 회동관 후시, 압록강 의주(義州)의 중강(中江)에서 이루어진 중강 후시, 압록강 의주 맞은 편의 책문(柵門)에서 이루어진 책문 후시가 대표적이다. 또 함경도 경원(慶源) 등 북관(北關)에서 야인(野人)들을 상대로 행하여진 북관 후시, 부산 등의 왜관(倭館)에서 왜인들과 행하여진 왜관 후시가 있다.

  이 중 특히 알려진 중강 후시는, 1593년(선조 26) 이후 공무역인 중강 개시의 이름으로 시작되어 의주부윤의 엄격한 감시하에 사상(私商)의 출입을 일체 금했고, 교역횟수·개시시기·교역기간·교역품목 등이 엄격히 통제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규제가 점차 해이해지고, 사상의 활동이 활발해짐으로써 대청교역은 자유무역처럼 되었는데 이것을 중강 후시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50년간 성행하였다. 중강 후시는 일단 폐지되었다가 현종 초에 장소를 옮겨 책문 후시라는 이름으로 행하여졌다.


  책문은 압록강 건너 만주의 주롄청[九連城]과 봉황성(鳳凰城)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이곳에서는 1660년(현종 1)부터 사무역(私貿易)이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과 청나라의 사신들이 왕래하는 기회를 이용해 상인들이 마부(馬夫)로 변장하여 은과 인삼을 가지고 강을 건너가 책문에서 밀무역을 했기 때문에 책문후시란 명칭이 생기게 되었다. 1700년(숙종 26) 중강개시가 페지된 뒤에 책문후시는 더욱 번창하여 무역시장으로 중요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정부에서는 이를 금하였으나, 단속기관인 단련사(團練使)까지 이에 가담하여 단련사 후시라는 이름까지 생기자, 1755년 공인하였다. 1808년의〈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에 따르면 책문후시는 1년에 4, 5차례에 걸쳐 열리고 한 번에 은 10만 냥이 거래되었다고 한다. 이 시장을 통해 청나라의 보석류·비단·약재류를 들여오는 데 따른 비용으로 조선의 은이 연간 50~60만 냥이 소요되었다. 정조 때에는 후시를 일체 금지하려 하였으나 효과가 없었으며, 책문 후시는  청국 세폐사(歲幣使)의 파견중지 조치가 있은 개항 때까지 계속되었다.


 

 

 

만상

http://100.naver.com/100.php?id=59666

유만(柳灣) ·만고(灣賈)라고도 한다. 조선정부의 철저한 쇄국주의 정책 때문에 민간상인에 의한 외국무역이 엄격히 통제되어, 중국과의 무역은 사신(使臣)무역 특히 역관(譯官)무역이 중심을 이루다가, 임진왜란 중 식량을 확보하려고 중국과의 사이에 처음으로 중강(中江)을 중심으로 개시(開市)가 이루어지면서부터 민간무역이 열렸다.


개시무역은 두 나라의 사정에 따라 폐지된 적도 있지만 중강 이외에 회령 ·경원 등에서도 열렸고, 참가하는 상인과 교역상품도 많아졌다. 그러나 두 나라 정부의 통제를 받는 개시무역은 제약성이 많아, 점차 두 나라 상인 사이에 공식적인 교역량을 넘는 사무역(私貿易)이 성행하면서 이른바 후시무역(後市貿易), 즉 청나라와 조선의 사신이 왕래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의주상인인 만상은 사행원, 특히 역관과 감독관 등과 결탁, 몰래 사신 일행에 끼어서 책문(柵門:九連城과 鳳凰城 사이)에서 청국상인인 요동의 차호(車戶)와 밀무역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책문후시라 하였다.


책문후시를 통해 대청밀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국경도시이자 중국의 관문인 의주가 대청무역의 중심도시가 되고, 만상은 이 대청무역의 최대 상인이 되었다. 그들은 금 ·은 ·인삼 ·우피(牛皮) 등을 청국상인의 비단 ·당목(唐木) ·약재(藥材) ·기타 보석류와 거래하였다. 이러한 밀무역이 성행하게 된 것은, 사행원이 개인비용을 스스로 충당할 만큼 경제력이 없고, 사행의 실무 담당자인 역관의 경제적 대우가 박약한 점 등 때문이었다. 또한 18세기에는 개성상인이 중심이 되어 동래상인과 의주상인으로 연결되는 일종의 국제 중계무역이 발달했다. 국내의 인삼을 매점한 개성상인이 동래상인을 통해 일본의 은과 바꾸고, 그 은을 가지고 만상을 통해 중국무역으로 연결하였다.


한편, 정부는 밀무역을 단속하려고 만상의 대청무역을 금지시키려 하였지만, 만상의 반발과 감독관의 부패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정부는 1754년(영조 30) 절충책으로 만상에게만 책문무역을 허용하였다. 정조 말에는 사행정사(使行正使)가 의주에 도착하면 의주부윤과 상의, 연행상금절목(燕行商禁節目)을 작성하고 이를 기준으로 만상의 무역을 감독하는 일종의 정액무역권[灣包]을 설정하였다. 당시 정부가 만상의 사무역을 인정한 것은 이를 통해 출입물품에 대한 세를 징수함으로써 국가의 수입을 늘리려는 목적에서였다. 이들의 대청무역은 개항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내상

http://blog.naver.com/ilsutory/100011455721

http://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90-nesang.htm


내상을 사전적으로 정의하면 왜(倭)와 교역하던 동래 지역의 상인이라고 말 할 수 있으나, 사실 내상은 성격을 규정하기가 모호한 상인집단이다. 왜냐하면 내상은 대표적인 사상도고로 대일무역을 통해 상업자본을 축적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나, 사실 내상은 개시무역을 담당한 전형적 관허특권상인인 공상(公商)이었으며 그들의 무역 독점권은 육의전의 금난전권과 같이 인식되었다.

 그러나 내상의 범주에는 개시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특권무역상인 외에 밀무역을 담당했던 사상(잠상)도 포함해야 하며, 동래와 경상도지역을 연결하는 국내 유통구조가 동래왜관과 직결되는 구조는 아니었기 때문에 내상에는 대외무역에는 종사하지 않고 국내 유통구조만을 담당하고 있던 동래지역 상인들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내상은 송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개시무역 대상자로 송상의 사람이 선정되기도 했기 때문에 내상은 동래 출신 상인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개시무역은 일반적으로 왜관의 개시대청에서 한 달에 6번(3, 8, 13, 18, 23, 28일) 이루어지는 대청개시(大廳開市)를 말한다. 개시무역에는 호조나 각도 감사의 행장(行狀)을 가진 상인만이 참가할 수 있었다. 17세기 이후 내상의 주도로 전개된 개시무역은 중국산 백사(白絲)와, 조선산 인삼을 일본에 수출하고 일본산 은(銀)을 수입하는 이중구조로 유지되고 있었다. 생산시장이 중국과 평안도인 백사와 인삼은 중간 집하지이며 최대 소비시장인 서울을 거친 후, 왜관을 통해 최종 소비시장인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그런데 조선을 중심으로 한 이런 중계무역 구조는 대체로 1720년대 이후 쇠퇴되어 갔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17세기말~18세기 초에 중국과 일본간에 직교역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동래왜관의 개시무역구조는 18세기 중엽을 계기로 변하여 인삼, 백사↔은 무역구조에서 우피↔구리 무역구조로 바뀌었다.

 또한 19세기가 되면 마른 해삼(煎海鼠)의 대일 수출이 증가하게 되는데 마른 해삼의 일본 수출은 경상도 연해안이 절대적으로 유리하였다. 사실 18세기 이전 백사와 인삼 수출 중심의 유통구조에서는 내상이 생산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개성, 서울, 평안도상인보다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른 해삼은 왜관의 소비시장에서 근거리에 있을수록 유리하였다. 따라서 19세기가 되면 내상이 대일무역에 종사하는 폭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그런데 18세기 중반 이후 사무역이 침체되어 무역활동만으로는 생계가 어려워지자, 19세기 중엽에는 내상들 중 다수가 동래부의 각종 무임직이나 향리직을 겸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내상들이 대일무역을 통해 축적한 상업자본을 기반으로 무임직, 향리직을 매입한 것인지, 동래의 대표적인 무임층, 향리층이 본래 대일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동래상인이었는지, 양자의 선후 관계는 분명하지 않으나, 동래의 무임층, 향리층이 그들의 직분이 보장하는 특권을 담보로 동래왜관의 사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5) 화폐 유통


 

 

 

상평통보

http://www.kojeonsa.co.kr/html/coin/coin01.htm

http://blog.naver.com/knightblack/13999091

http://210.217.234.140/shingari/cho/cho.htm

http://www.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197-1-sangpyungtongbo.htm

http://www.stampcoin.co.kr/coin/coin-c.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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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8년 숙종은 화폐 발행을 결정하고 종묘에 그 사실을 고했다. 그 해 4월에 나라의 살림을 담당하는 호조와 곡식 공급을 담당하는 상평청, 그리고 자연 재해로 피해를 입은 민생을 구제하던 통어청을 비롯하여 정초청, 어영청, 사복시, 훈련도감 등에서 일제히 화폐 만들기에 착수했다. 또한 평안도와 전라도를 비롯하여 개성, 황해, 충청, 경상, 강원 감영 등 전국의 주요 관청에서도 상평통보를 만들어 사용하게 했다. 그러나 그 후 일 년 동안 상평통보는 백섣들의 화폐에 대한 인식 부족과 불신으로 인해 전혀 유통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정은 비상 사태를 대비해 저축해 두었던 면포를 상평통보와 교환해 주어 유통되는 화폐의 일부를 거둬들이는 한편, 1679년부터는 호조에서만 상평통보를 발행하게 함으로써 시중의 통화량을 줄였다. 그러자 2년 후에는 시중의 통화량이 부족해져서 오히려 돈이 희귀해지는 "전황" 현상이 나타났다. 조정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1681년부터는 다시 어영청과 공조에서도 상평통보를 만들도록 함으로써 시중의 통화량을 늘려 나갔다. 그러나 그즈음에는 각 지방에서도 화폐 사용이 늘어나서 화폐가 부족한 현상이 계속되자 조정은 전라도와 평안도 감영에서 일시적으로 상평통보를 발행하여 사용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상평통보의 유통 범위는 단계적으로 전국에 확산되었다.


그러나 조정이 상평통보를 발행하는 관청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한 탓에 화폐가 남발되어 동전의 가치가 떨어지자, 조정은 1689년에 상평통보 발행을 일시 중단했다. 그러나 화폐의 기능을 인식하게 된 국민들과 조정 대신들의 요구에 따라 1691년 훈련도감과 총융청에서 다시 상평통보를 발행했다.


마침내 조선 조정의 노력으로 상평통보는 화폐로선 최초로 전국에서 유통되었으며 조선 말기부터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던 유일한 화폐였다. 실록은 이 때의 상황을 "시장의 노파나 행상까지도 곡물보다는 화폐로 물건값을 받고자 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유통된 최초의 화폐, 상평통보


상평통보는 구리와 납을 7대 3의 비율로 섞어 만든 것으로 주전틀이 나뭇잎처럼 생겼다고 해서 흔히 나뭇잎 엽(葉)자를 사용해서 엽전이라고 불렀다. 비교적 단순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이 작은 동전 속에는 우주와 나라와 백성을 구제한다는 큰 뜻이 담겨 있었다.


상평통보의 주조 과정이 비교적 단순해서 화폐 위조 사건이 자주 일어났으며 그 규모도 매우 컸다. 당시 각종 범죄의 심문 내용을 적어 놓은 <추관지>에 의하면, 숙종의 재위 기간 동안 주전소 관리들이 거액의 돈을 황령하거나 불법으로 주조해서 유통시킨 사건이 8건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태연이라는 한 관리는 실제로는 43만 냥을 주조하고도 25만냥을 주조한 것으로 보고한 후, 나머지 18만 냥을 개인적으로 빚을 갚거나 다른 곳에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상평통보 발행과 유통을 어렵게 만들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상평통보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구리가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당시 조선은 경제 구조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두 번의 호란으로 농토가 황폐해지자 백성들이 점차 도시로 몰려들었고, 그에 따라 자연히 상업 규모도 커져 갔다. 사람들은 그 이전에 화폐로 쓰이던 쌀이나 면포보다는 운반과 보관이 편리한 동전을 더 많이 사용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상평통보의 수요는 더욱 커져갔지만 숙종 23년에는 구리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상평통보의 주조가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왕위에 오른 영조는 몇 가지 문제점을 이유로 상평통보를 폐지하려고 했다. 즉 상평통보의 등장으로 조선의 중심 산업인 농업이 쇠퇴하고, 천시해 오던 상업이 활발해짐으로써 국가 경제의 기본틀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과 동전이 가치 저장 수단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이자가 비싼 돈을 빌려 주는 고리 대금업이 성행하여 부자는 점점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더 가난해지는 이른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또한 화폐 경제의 발달로 절약과 검소함을 미덕으로 여겨 오던 백성들 사이에 소비와 사치 성향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그러나 이미 조선의 시장 경제는 운반과 보관이 편리한 화폐가 없으면 불가능한 단계에 접어들었다. 시장 경제가 활성화됨에 따라 전국 각 지방에서는 시장이 늘어나고, 상설 시장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결국 영조는 상평통보를 교환 수단으로 하는 새로운 시장 질서 속에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화폐를 발행하는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조정의 판단에 동의하였다.


마침내 영조 7년 10월, 호조와 진흉청에 동전의 주조를 허락했다. 발행이 중단된 지 36년 만인 1731년 10월에 다시 발행된 상평통보는 그 후 조선 말기까지 200년 동안 조선의 대표적인 화폐로 널리 사용되었다.


화폐의 유통 문제는 조선 초부터 역대 왕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음에도 실패를 거듭해 온 어려운 숙제였다. 그러나 조선은 마침내 숙종 때에 이르러 전문 경제 관료를 등용하고 20년 동안 일관성 있게 정책을 추진하여 상평통보를 뿌리내림으로써 낙후된 경제를 일으키고 경제를 발전시키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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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금을 의뢰하는 것을 송금환(순환), 추심을 의뢰하는 것을 추심환(역환)이라 하며, 상대방이 국내에 있는 것을 내국환, 외국인 경우를 외국환이라고 한다.


유럽에서의 환은 12∼13세기경에 십자군의 원정을 계기로 하여, 특히 이탈리아 및 지중해 연안도시에서 급속히 발달하였다. 한국의 환업무에 있어서는 그 기원에 관한 확실한 고증이 없으나 금전지급을 약속하는 표권(票券)으로서의 어음이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왔음은 확실하며, 특히 조선시대 개성상인(開城商人)을 중심으로 활용되었다. 첫머리에 당문(當文) 또는 당전(當錢)이라 썼는데 이는 ‘마땅히 지불하겠다’라는 뜻이었으며, 그 아래에 지급할 돈의 액수와 인수한 물건의 수량을 적고, 또한 발행한 사람이나 상점의 도장이나 수결(手決)을 두었다. 이를테면 환어음의 형태로 지급기일은 1시간(一市間:보통 5일간) 또는 2시간이 원칙이었으며, 길어도 1개월을 넘기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에 어음은 화폐와 똑같은 통용력을 가진 것으로서 유통되었다. 이 어음은 형식의 간편함과 양도·양수의 용이성(배서 같은 것은 없었고, 누구든 소지인에게 지급하였음) 때문에 상계상(相計上) 애용되었으며 1905년(고종 42) 수형조합조례(手形組合條例)·약속어음조례 등의 공포로 차츰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