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중세의 경제


2-1. 경제 정책


1) 농업 중심의 산업 발전

 

 

 

의창제

http://211.252.89.97/ban/sa/ex/h6304.htm

농민 구제를 위하여 각 지방에 설치한 창고로 이 제도는 중국 수(隋)나라에서 유래하여 고구려에서는 194년(고국천왕 16)부터 매년 3∼7월에 가구수(家口數)에 따라 관곡(官穀)을 대여하고 10월에 회수하였고, 고려시대에는 태조가 이를 흑창(黑倉)이라 하여 춘궁기에 농민에게 곡식을 대여하고 추수 후에 이를 회수하는 진대법(賑貸法)을 마련하였는데, 986년(성종 5)에는 흑창의 진대곡을 1만 석 더 보충하여 이를 의창이라 하였다. 이것이 최초의 의창이었으며, 의창은 여러 지방으로 확산 설치되었다. 1023년(현종 14)에는 연호미(煙戶米)라 하여 일과 공전 일결(一科公田一結)에서는 조(租) 3두(斗), 이과(二科) 및 사원전(寺院田)·양반전(兩班田)에서는 조 2두, 삼과(三科) 및 군호(軍戶)·기인(其人)으로부터는 조 1두를 거두어 주·현(州縣)의 의창에 충당하였으며, 충렬왕과 우왕 때에도 연호미를 거두어 의창의 재원으로 하였다. 의창은 무신(武臣)의 집권과 몽골의 침략 등으로 쇠퇴하였으나 창왕 때에는 양광도(楊廣道:경기 남부·강원 남서부·충남북의 대부분)의 주현에 다시 의창을 설치, 수재와 한해에 대비하였고, 1391년(공양왕 3)에는 개성의 5부(部)에도 의창을 설치하였다. 조선도 고려의 의창제도를 계승하여 개국년인 1392년 9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건의에 따라 봄에 식량과 종곡(種穀)을 무이식(無利息)으로 대출하고 가을에 회수하도록 하였다. 초기의 의창은 그 범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운영도 활발하였으나 백성의 낭비와 관리의 농간으로 점차 폐단이 생겼으며, 대출되는 환자(還子)도 잘 회수되지 못하였고, 또 진제곡(賑濟穀)이라는 명목으로 무상배급되기도 하여 의창의 원곡은 줄어들었다. 이 때문에 1406년(태종 6)에는 고려와 같은 연호미법(煙戶米法)을 발동, 상호(上戶)·중호(中戶)·하호(下戶)로 구분하여 민간에서 곡식을 거두어 의창미로 충당하였는데, 이러한 조세 외의 수렴(收斂)은 민원이 높아 10년에 폐지되었다. 1423년(세종 5)에는 군자곡(軍資穀) 106만 9615석을 의창에 이관하여 주자사창모미법(朱子社倉耗米法)에 의하여 대여곡 1석(石)에 3승(升)의 모(耗)를 보태어 수납하게 하였으나 일단 대출되면 흉작 등으로 그 곡물의 전량을 회수할 수 없어 새로 발생하는 기민(飢民)의 구제나 빈민에 대한 곡물의 대여가 어려웠다. 의창곡은 이식이 싸서 빈민뿐만 아니라 부호(富戶)도 대출해가는 실정이었으므로 빈민구제라는 본래의 목적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1448년에도 진대(賑貸)한 곡물은 회수되지 않고 진대곡의 청구만 증가하여 군자곡 125만 7048석을 의창에 가급(加給)하여 의창 원곡은 총 242만 2134석에 이르렀지만 해마다 늘어나는 진대곡의 청구에도 회수는 되지 않아 바닥나는 의창곡을 군자곡으로 메우는 악순환은 여전하여 당시 의창 원곡의 90 % 이상은 군자곡이었다. 이러한 군자곡의 감소를 방지하기 위한 개선책으로 사창(社倉)제도로 전환할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의창 제도는 구휼(救恤)사업의 성격 때문에 대여곡의 환수에 강제수단을 쓸 수 없지만, 사창은 민간 주도로 운영하기 때문에 이식도 더 받을 수 있고 대여도 가려서 하므로 환수의 어려움도 없었다.1448년 대구(大邱)에 처음 설치된 사창은 의창곡 200석을 원곡으로 하여 매석의 대출에 3두의 이식을 추가하여 환수하였는데 이식의 저축에 성적이 좋은 사장(社長:사창의 관리자)은 논상(論賞)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경상도의 10현에 시험적으로 사창이 설치되었는데 여기에도 의창곡을 200석씩 지급하여 매석 3두의 이식을 부가하되 흉년에는 이식을 면제하고, 이식의 곡식이 500석에 이르면 의창에서 지급한 200석은 반납하고 사장은 9품 산관(散官)에 임명하여 500석씩 증가할 때마다 1계급씩 승진시킨다고 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의창곡의 부족으로 군자곡으로 대출하였으나 《경국대전》에서 군자곡의 이식을 폐지하여 사창의 원곡을 마련하기 어려워 1470년(성종 1) 사창도 폐지되었다. 그후 의창의 부활이 요구되었으나 원곡의 감소로 규모가 축소되어 1525년(중종 20) 의창을 폐지하고 일체의 구제사업을 구휼청(救恤廳)에서 관장하였다


 

 

 

시전

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minsok/txt/text/4-2-1.html

http://211.253.78.15/%7Esw06/%BD%C3%C0%FC.htm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을 수도로 정하자 고려의 구도(舊都)였던 개경의 어용상인 및 각지로부터의 상인들도 자연히 한양으로 옮겨왔다. 그러나 이 때에는 조정의 신료나 이서(吏胥) · 상인(常人) · 노비 할 것 없이 많은 인구가 급격히 정착하였기 때문에 도성안 곳곳에 장시(場市)들이 들어서서 시가지의 질서를 문란하게 했을 뿐 아니라 상거래 질서 역시 문란하였다.

이에 따라 물화의 원활한 거래를 도모하기 위해 시장의 정비가 필요함을 인식한 조선정부는 먼저 경시서(京市署)를 설치하여 시장점포의 관리 · 도량형기의 취체 · 물가 억제 등의 사무를 담당케 하는 한편 시전(市廛)을 설치할 계획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전 건설계획은 왕자의 난 · 개경 환도 · 한양 재천도 등의 정치적 분규로 말미암아 실현되지 못하다가 태종 때부터 본격화 되었다.

태종 10년(1410) 2월 먼저 시전의 지역적 한계를 정하여 대시(大市)는 장통방(長通坊 관철동 · 장교동 일대), 미곡잡물은 동부 연화동구(蓮花洞口 연지동) · 남부 훈도방(薰陶坊 을지로 2가) · 서부 혜정교(惠政橋 종로 1가) · 북부 안국방(安國坊 안국동) · 중부 광통교 등 지역에서, 그리고 우마는 장통방 하천변에서 각각 매매하도록 하고 여항소시(閭巷小市)는 각각 소거(所居)의 문전에서 교역케 하였다.[註]

또한 감독기관으로서 경시감(京市監)을 설치하여 상업교역에 관한 물가 조절, 사기 방지, 도적 단속, 상세(商稅) 징수 등을 주관하였으며, 청제감(淸齊監)을 설치하여 시가의 청결을 감독케 하였다. 이와 같이 시장의 정돈을 꾀하였으나 아직 완전한 것이 아니었고 본격적인 시장의 정돈은 태종 12년 관설시전이 건립되면서 본격화되었다.

태종 12년 2월부터 제1차 행랑(行廊) 조성공사를 착수하여 동년 4월까지 혜정교에서부터 창덕궁 동구까지 좌우 행랑 800여간을 완성하였다. 이 후 태종 12년 5월부터 7월까지 궐문(돈화문)∼정선방 동구(종로 3가 네거리)까지의 2차 공사를, 12년 7월부터 13년 5월까지 경복궁 남방(세종로 네거리)∼종묘 앞(종로 4가 네거리)까지와 종루∼경복궁, 창덕궁∼종묘전문루, 숭례문∼종루까지의 3차 공사를, 14년 7월에는 종묘전문루∼동대문, 종루∼남대문까지의 4차 공사를 완공하였다.

4차에 걸친 행랑 조성공사를 통하여 동쪽으로는 동대문까지, 남쪽으로는 남대문까지, 서쪽으로는 혜정교까지, 북쪽으로는 광화문까지, 동북쪽으로는 돈화문 앞까지의 3,000간에 달하는 행랑이 조성되어 수도 한성의 심장부는 상가로 장식되었다. 이 때에 가장 번성하였던 거리는 운종가(雲鍾街 종로네거리∼세종로네거리)와 종루(鐘樓 종로네거리)에서 광통교(廣通橋 남대문로 광교 부근)까지였으니 500여년 전 상가의 중심지가 오늘날까지 존속되어온 것이다.

한성의 상업은 태종 때에 건설된 공설시전을 중심으로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대부분 훼손되고 말았는데, 난 후에는 재정의 궁핍과 상민들의 이산으로 말미암아 속히 회복이 되지 못하였다. 더구나 계속된 이괄의 난 · 병자호란 등으로 인해 시전 건설은 여의치 못하였다. 그러나 양란 후의 복구작업과 정국 및 시민 생활의 안정에 따라 종로 기타 여러 곳의 시전이 점진적으로 회복을 보임에 따라 수도 상가로서의 면모를 찾게 되었다.

이러한 시전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확고한 기반을 차지하는 전(廛)과 그렇지 못한 전(廛)의 구별이 생기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이들 전의 이익 정도를 헤아려 자기 응분의 국역을 부담하도록 하였다. 국역은 최고 10분(分)에서부터 최하 1분까지 였으며 국역을 부담하는 전은 모두 30개소 이상이었는데 이들을 유분각전(有分各廛)이라 하고 국역을 지지 않는 전을 무분각전(無分各廛)이라 칭하였다. 유분각전 가운데 국역을 가장 많이 부담하는 시전 6개를 추려서 육의전(六矣廛)이라 하였다.

국역을 처음으로 부담시킨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체로 대동법 실시의 논의가 일어난 선조말에서 인조조에 걸친 전후로 추측되며, 특히 육의전의 발생 시기는 인조 15년 중국에 보내는 방자물(方者物)과 세폐(歲幣)를 분담케 한 때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육의전의 의미는 어떤 특정한 시전의 특정한 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다만 시전 중에서 최대의 국역을 부담할 수 있거나 때에 따라 정부의 필요에 의해 물품을 조달하고 그 대가로 상업상의 특권을 부여 받음으로써 다른 시전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상업단체로서의 근본적 성질이 다른 것은 아니었다.

육의전은 종로 큰 거리에 있는 주단 · 포목 및 지물 · 어물전이었는데 속칭 육주비전(六注比廛)이라고도 하였다. 여기서의 ‘주비(注比)’는 수(首) · 장(長) 또는 부(部)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한성 시전 중 6개의 수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육의전을 『한경지략(漢京識略)』과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선전(線廛) : 전의감동구, 즉 종로 북쪽에 있는데 주로 중국산의 유단(油緞) · 견직물 등을 파는 곳으로서 42방(房)이 있다. 선전(픢廛) 또는 입전(立廛)이라고도 하는데 서서 물건을 판다고 입전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한다.

면포전(綿布廛) : 종로 서쪽에 있는데 백목(白木)과 은자(銀子)를 판다. 백목전(白木廛) 또는 은목전(銀木廛)으로도 불렀다.

면주전(綿紬廛) : 면포전 뒤 전옥서 앞에 있는데 국산 면주를 팔았다.

포전(布廛) : 면포전 건너편에 있는데 국산 마포(麻布)를 팔았다.

저포전(苧布廛) : 진사전(眞絲廛) 동쪽에 있는데 저포(苧布) · 황저포(黃苧布)를 팔았다. 지전(紙廛) : 동 · 서 두 전이 있는데 동전은 포전(布廛) 남쪽에 있고, 서전은 면포전 남쪽에 있다. 각종 지물을 파는 곳이다.

어물전(魚物廛) : 이문동 서쪽에 있는데 각종 건어(乾魚)를 팔았다. 이곳을 내어물전이라 하고 따로이 서소문 밖에 외어물전이 있었다.

청포전(靑布廛) : 종루 동쪽에 있는데 중국 삼승포(三升布)와 양모(羊毛) · 모자(帽子)를 팔았다.」


그리고 육의전 이외의 유분각전(有分各廛) 즉, 어느 정도 수입이 좋아서 국역을 일부 부담하던 시전의 분포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연초전(煙草廛) : 도가(都家)가 하양교(수표교 동쪽) 남쪽에 있는데 각종 담배를 팔았다. 속칭 절초전(切草廛)이라고도 하였다.

생선전(生鮮廛) : 종루 서쪽, 생선전 병문(屛門) 동남쪽에 있었는데 각종 생선을 팔았다.

유기전(鍮器廛) : 내어물전 서쪽 행랑에 있었는데 각종 유기그릇을 팔았다. 속칭 바리(鉢里)전이라고도 하였다.

상전(床廛) : 13처가 있는데, 피물(皮物) · 마미(馬尾) · 촉물(燭物) · 향사(鄕絲) · 서책(書冊) · 휴지(休紙) 등 잡물을 상 위에 벌여놓고 팔았기 대문에 그렇게 불렀다. 속칭 ‘상자리전’이라고도 하였다.

상전 중에는 의금부 망문(望門) 앞 상전이 가장 흥성하여 3분역(分役)을 부담하고, 안국동에 있는 신상전(新床廛)과 묘상전(廟床廛)은 2분역, 종루 남쪽의 동상전(東床廛)과 수진방 상전은 1분역을 부담하였으며, 포전 앞 상전과 철물교 상전, 필동 상전, 남대문 상전, 이전(履廛) 동쪽의 염상전(鹽床廛), 병문(屛門) 상전, 정동(貞洞) 상전, 동현(銅峴) 상전, 지상전(紙床廛)은 국역 부담이 없었다. 침자(針子) 즉 바늘은 동상전에서 팔았다.

미전(米廛) : 5처가 있는데 의금부 서쪽의 상미전(上米廛)과 이현(梨峴)의 하미전(下米廛)은 3분역, 서소문 밖 문외미전(門外米廛)은 2분역이며, 서강미전과 마포미전은 국역이 없었다.

잡곡전(雜穀廛) : 철물교(鐵物橋) 서쪽과 남북쪽에 나뉘어 있었다.

의전(衣廛) : 잡곡전 서쪽에 있었다.

면화전(棉花廛) : 광통교 북쪽에 동서로 나뉘어 있는데 씨를 뺀 목면(木綿)을 팔았다. 면자전(棉子廛)이라고도 하였다.

이전(履廛) : 각 곳에 있는데 유정혜(油釘鞋)만은 종루전에서 팔았다.

은국전(銀麴廛) : 전의감 동구 동쪽 가에 있는데 술 제조하는 누룩을 팔았다. 누룩 빛이 희기 때문에 은국(銀麴)이라 불렀다.

화피전(樺皮廛) : 종가(鐘街) 동쪽에 있는데 각종 염료 및 중국 과일을 팔았다. 물건을 화피(樺皮)로 꾸려주기 때문에 이렇게 불리었다.

진사전(眞絲廛) : 의금부 문 밖 동쪽에 있었는데 각 색 당(唐) · 향사 및 갓끈 · 실띠 등을 팔았다.

인석전(茵席廛) : 수진방 동구 서쪽에 있었는데 용수석(龍鬚席) · 안식(案息) 등을 팔았다.

체고전(??廛) : 내전(內廛)은 광통교에 있고 외전은 서소문 밖에 있었는데 다리를 팔았다. 속칭 월자전(月子廛) · 월내전(月乃廛 다리전)이라 하였다.

청밀전(淸密廛) : 이현에 있었는데 봉밀(蜂蜜)을 속칭 ‘청(淸)’이라 하기 때문에 호칭되었다.

경염전(京鹽廛) : 이현과 남대문 밖에 있었다. 서해에서 구운 소금을 팔았는데 소금 굽는 곳이 경도(京都)에 가깝기 때문에 경염(京鹽)이라 호칭했다.

장목전(長木廛) : 성 내외 각 곳에 있는데 집 재목을 팔았다.

연죽전(煙竹廛) : 각종 물을 들인 연죽(煙竹) · 연배(煙杯)를 팔았는데 도가가 군기사 앞과 약현에 있었다.

시저전(匙箸廛) : 내외 2전이 있는데 내전은 종가(鍾街)에 있고 외전은 서소문 밖에 있었다.

철물전(鐵物廛) : 각 곳에 있었다.

우(牛) · 마전(馬廛) : 두 전이 모두 동대문 안 태평교(太平橋) 남안(南岸)에 있었다.」


이상의 41전 가운데 무분각전(無分各廛)이 10처이고 유분각전(有分各廛), 즉 국역을 부담하는 전이 31처로서 전술한 6의전과 합하면 37처가 되는 것이다.

육의전은 도중(都中)이라는 일종의 조합을 가지고 도령위(都領位), 대행수(大行首), 상공원(上公員), 하공원(下公員) 등의 직원을 두었다. 국가에서 육의전으로부터 물화를 조달할 때는 각 관부에서 경시서(京市署)를 통하여 육의전으로 하여금 상납시킬 물품의 품목과 수량을 각 시전의 도가(都家)에 명을 내리면 도가는 각 시전의 부담 능력에 따라 유분각전의 비율을 정하고 총괄하여 상납하였다. 이 때 세액의 비중은 외국상품 및 수요가 많은 물품 등에 두었으며 공물(貢物)로는 세폐(歲幣)와 방물(方物) 및 관청의 수요에 부과되는 임시 부담금 등이 대표적이었다.

한편 정부에서는 육의전으로부터 국역으로서 필요한 물품의 공납을 받는 대신에 그 보상으로 강력한 특권을 부여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자금의 대여, 외부압력으로부터의 보호, 금난전권(禁亂廛權) 등이 있었다. 금난전권은 육의전에서 취급하는 물품은 다른 사람들이 판매할 수 없다는 전매특권으로서 육의전의 자위적인 행위인 동시에 관부의 육의전에 대한 보호였으며 육의전으로 하여금 상권을 완전 독점하고 길드(Guild)적인 권한을 갖게 하였다.

육의전의 이 같은 상품독점판매는 한편으로는 관리의 부정 부패를 조장할 소지를 마련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신흥기업의 발생을 저해하여 결국 상 · 공업의 발전을 근본적으로 위축시키게 하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금난전권은 점차 동요되기에 이르렀다. 즉 한성 내의 호노(豪奴) 및 지방도시의 부상(富商)들과 각 영문(營門) 소속의 군병들에 의한 도성 내에서의 상공업적 활동이 종래의 특권적 상인의 상권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더우기 개항 이후부터는 외국상품이 쏟아져 들어오게 되어 육의전의 타격은 더욱 심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종 31년(1894) 갑오개혁 때에 개혁이 추진되는 상황에서 국역 부담과 금난전권을 특징으로 삼는 어용 길드인 육의전은 그 명맥이 유지될 수 없어 붕괴되고 말았다.


 

 

2) 국가 재정의 운영

 

 

 

양안

http://www.dgedu.net/student/tfokuk/html/text/jo1067.html

조선시대의 토지대장(土地臺帳). 전안(田案)이라고도 한다. 전답(田畓)의 소재·위치, 전품(田 品)의 등급·형상, 결부수(結負數:면적), 자호(字號) 등을 기록한 것으로, 양전(量田:토지 측 량)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 농민의 경작면적, 소득 등을 추정하는 데 편리한 자료이다. 《경 국대전》에 따르면 20년마다 한 번씩 양전을 실시, 새로 양안을 3부 작성하여 호조(戶曹)와 토지 소재의 도(道)·군(郡)에 각각 보관하도록 되었다. 그러나 인력·경비 등의 소요가 막 대하여, 규정대로 실시되지 않아 수십 년 혹은 100여 년이 지난 뒤, 그것도 지방에 따라 부 분적으로 실시되어 실제의 토지 경작상황과 거리가 먼 내용이거나 관리가 부정 수단으로 기 록하기도 하였으며, 아예 양안에 알리지 않은 은결(隱結)의 전지가 상당수였기 때문에 양안 이 전 경작지를 다 포함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조선시대의 양안은 대부분 없어지고 지금 남은 것으로는, 규장각(奎章閣)도서로 임실(任實)양안 11책, 순천(順天)양안 15책, 해남(海南) 양안 15책, 고산(高山)양안 18책, 남원(南原)양안 5책, 전주(全州)양안 28책, 일신(一新)양안 4책, 남해(南海)양안 5책, 의성(義城)양안 24책, 비안(比安)양안 5책 등이 있고, 국사편찬위원 회 소장인 회인(懷仁)양안,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인 여주(驪州)양안 등뿐이다. 양안에는 군· 현(郡縣) 단위의 것이면 ∥∥군 ∥∥현 양안, 면(面) 단위이면 ∥∥면 양안, 동리 단위이면 ∥∥동리 양안, 개인 단위이면 ∥∥댁(宅) 양안 등으로 구별하였다. 기재 양식과 내용은 모 두 같았으며, 개인 양안만이 두락(斗落)·도조(賭租) 관계를 덧붙여 좀더 상세하고 구체적이 다. 양안에는 일반 전답(田畓)은 물론, 노전(蘆田:갈대밭)·저전(楮田:닥나무밭)·죽전(竹 田)·송전(松田)·저전(苧田:모시밭)·과전(果田) 등과 가옥에 딸린 대지(垈地)까지도 채전 (菜田)으로서 포함되어 기록되었다. 조선시대의 농촌경제를 연구함에 있어 농민의 경작면적, 소득 관계 등의 윤곽을 대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숫자적인 자료를 제시하는 객관적인 사료(史料)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


 

 

 

호적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C8%A3%C0%FB&sort=0&c=2&qt=df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C8%A3%C0%FB&c=3&sort=0&qt=df&fr_res=0&to_res=0


 

 

 

3) 수취제도

 

 

 

조창

http://blog.naver.com/theos1/60013934247

조창이 설치됐던 때는 조선 중기인 1628년.

강 연안의 여러 고을에서 거두어들인 곡식을 보관한다 .1878년에 편찬된 양산군 읍지 에 구포 조창을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당시에는 남쪽 창고 3간,서쪽 창고 4간,그리고 창고를 관할하는 좌기청 3간으로 이뤄져 있었다고 한다.


 

 

 

http://dns.csc.ac.kr/plus/board.php3?table=account2&query=view&l=32&p=1&go=9


고려시대의 조세는 밭으로 나누고 비옥한 정도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생산량의 10분의 1을 거두었다. 거둬들인 세곡은 각 군현의 농민을 동원하여 조창까지 옮긴 다음 조운을 통해서 개경의 좌·우창으로 운반하여 보관하였다.


중앙관청에서 필요한 공물의 종류와 액수를 나누어 주현에 부과하고 주현은 속현과 함께 향·부곡·소에 이를 할당하면 각 고을에서는 향리들이 집집마다 공물을 거두었다.


역은 나라에서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를 정남이라 하여 의무를 지게 하였다. 이 밖에도 어민에게 어염세를 걷거나 상인에게 상세를 거두어 재정에 사용하였다.


 

 

 

4) 전시과 제도와 토지소유

 

 

 

 

역분전

http://mtcha.com.ne.kr/korea-term/goryo/term106-yugbunjun.htm

940년(태조 23) 후삼국(後三國) 통일에 공을 세운 조신(朝臣) ·군사(軍士) 등에게 관계(官階)의 고하에 관계없이, 인품과 공로에 기준을 두어 지급한 수조지(收租地)를 말한다. 지급액은 얼마였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평주 출신의 공신 박수경(朴守卿)에게 토지 200결(結)을 주었다는 것이 역분전 지급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다. 전시과(田柴科) 제도가 마련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전시과

http://mtcha.com.ne.kr/korea-term/goryo/term119-junsigoa.htm

http://cyberschool.co.kr/html/text/khis/khis333.htm


고려시대의 토지제도로서 문무백관에서 한인(閑人)에 이르기까지 국가 관직에 복무하거나 또는 직역(職役)을 부담하는 자들에 대하여 그 지위에 따라 응분의 전토(田土)와 시지(柴地)를 지급하던 제도이다.  이 때 토지지급은 실제의 토지지급이 아니라 그 토지에서 조세를 수취하는 권리, 즉 수조권(收租權)의 분급을 의미했다. 즉 고려시대 때에는 정부가 관료·관청에 일률적으로 조세를 수취하여 나누어 주는것이 아니라 토지에 대한 수조권 자체를 위임했다. 이때 수조권을 분급받은 자는 수조권을 위해 수반되는 권리, 즉 답험, 조세운반을 위한 사역, 경작자 교체 등 민에 대한 일정한 지배권까지 함께 보유할 수 있다. 이같은 수조권분급제도는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독특한 제도이다


  고려의 토지분급제도는 940년(태조 23)건국에 공을 세운 조신(朝臣)과 군사에게 역분전(役分田)을 분급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의 지급기준은 이들의 선악과 공로를 대소했다. 976년(경종 1) 직산관전시과(職散官田柴科)를 설치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라고도 한다. 이때는 관품(官品)·인품(人品)을 병용한 급전제(給田制)였으며 이 제도를 998년(목종 1) 양반급 군인전시과로 개편하고 개정전시과(改定田柴科)라고 불렀다.


  그 내용은 전시과 수급자(受給者)의 과등(科等)을 18과(科)로 나누어 제1과는 중서령(中書令)·상서령(尙書令)·문하시중(門下侍中) 등으로, 전 100결과 시지 50결을 지급한 것을 비롯하여 점차 줄어들어 제18과 한인·잡류(雜類)는 전 17결만을 지급하였다. 이 개정전시과는 처음 시정전시과에 있었던 인품(人品)이라는 막연한 요소를 제거하고 위계(位階)의 고하만을 표준으로 삼은 점, 처음에는 없었던 군인에 대한 수급을 명시한 점 등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제도의 실시는 이미 지배체제가 확립되고 계층의 구별이 확실해졌음을 뜻하기도 하였다. 그후 1034년(덕종 3) 다시 개정했으나 그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고 1076년(문종 30) 양반전시과로 전면 개정하여 이것을 경정전시과(更定田柴科)라 하였다. 여기에서 고려 전기(前期)의 토지제도는 일단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경정전시과가 개정전시과와 다른 점은 전시의 지급액이 전반적으로 감소된 점과 무관에 대한 대우를 현저하게 개선시켰고, 종전까지 전시가 지급되던 산관(散官:관계만 있고 직책이 없는 자)의 일부를 대상에서 탈락시킨 점, 종전까지 병설되었던 한외과(限外科)가 소멸된 점 등이다. 이로써 제도상으로는 일원화가 이루어졌다.


  전시과 체제에서 전국의 토지는 공전과 사전으로 나누어진다. 국가나 관청에서 수조권을 보유한 토지를 공전, 개인이나 사원 등이 수조권을 보유한 토지를 사전(私田)이라고 했다. 사전은 다시 수조권자에 따라 양반전·군인전·기인전·한인전·향리전·공음전 등으로 불렸다. 공전은 그 토지의 수조권을 국가나 관청이 보유한 토지이고, 사전은 수조권을 개인이 받아 행사하는 토지이다. 공전은 다시 1·2·3과 공전으로 나누어진다. 1과 공전은 국유지·공유지, 2와 공전은 관청의 경비조달을 위한 토지인 공해전, 3과 공전은 국가가 직접 수조하는 일반 민전으로 추정된다. 과전의 수조율은 일반적으로 1/10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토지의 경영방식과 수조율에 대해서는 양반전·군인전·공해전 등 토지의 성격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는 견해도 있으며, 실제로는 수조권이 아니라 자신의 토지에 수조율에 해당하는 면조권을 지급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이견들은 고려시대 농업 수준이 상경농법 단계까지 발전했는지, 휴한농법 단계에 머물고 있었는지의 문제와 보편적인 토지경영방식, 지주전호제의 발달 정도, 사회분화 정도 등에 관한 이해와도 관련된 것들로, 고려시대의 시대 성격 규명에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과전은 역 부담이 끝나거나 죄를 지으면 국가가 환수하는 토지였다. 그러나 실제로 역은 세전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를 통해 토지도 세습되었다. 또 과전과 별도로 5품 이상의 관리에게 지급하는 공음전이 있는데, 공음전은 상속을 허용하며, 모반·대역죄가 아니면 아들이 죄가 있어도 손자가 죄가 없으면 손자에게 1/3의 상속을 허용했다. 직계자손이 없으면 사위·조카·양자·의자(義子)의 순서로 상속을 허용했다. 1076년에 완성된 전시과는 인종대에 일어난 이자겸의 난을 전후로 하여 운영상의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즉 전시과의 운영원리인 수조권 분급방식은 관료층의 불법적인 수조지 침탈과 소유지 확대를 가능하게 했다. 따라서 불법적인 수조현상과 토지소유의 불균형은 농민의 저항을 야기했고, 고려 후기 농장의 확대는 전시과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공음전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536&no=19

고려시대 5품 이상의 관리에게 지급한 토지.


977년(경종 2)에 지급하였던 훈전(勳田)에서 비롯되었으며, 1049년(문종 3)에 완성되어 실시되었다. 양반 전시와는 달리 자손에게 세습할 수 있는 토지로 음서제(蔭敍制)와 함께 고려 귀족 사회의 성격을 대표하고 있다. 공음전을 받은 자손으로 특별히 모반·대역죄를 짓거나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등의 죄를 제외하고는 상속받을 수 있었다.


일부에서는 공음전이 5품 이상의 관리만이 아니라 모든 관리를 대상으로 하여 그 가운데 특별히 공훈을 세운 사람에게 지급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한인전

http://www.mtcha.com.ne.kr/korea-term/goryo/term149-haninjun.htm

고려시대 한인에게 지급한 토지를 말한다.  전시과를 기본으로 한 고려 초기의 토지제도는 1076년(문종 30) 양반전시과인 경정전시과(更定田柴科)의 실시로 완성되어 공음전·별사전·무산계전시 등이 지급되었는데, 이때 한인에게 지급된 토지이다. 경정전시과의 지급기준에 따르면 한인은 제18과에 속해 있으며, 이들에게는 시지(柴地) 없이 전(田) 17결(結)만이 지급되었다.


  한인전의 대상은 과거에 합격하고도 보직을 받지 못한 준관리와 공음전시(功蔭田柴)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6품 이하의 하급관리 자제들이었다. 그러나 한인의 신분에 관해서는 몇 가지 이견이 있으며, 한인전의 성격 또한 그 신분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어 규정이 명확하지 않다.


 

 

 

내장전

http://www.mtcha.com.ne.kr/korea-term/goryo/term42-nejangjun.htm

고려 왕실의 직할 토지로서 장처전(庄處田) ·장택전(庄宅田)이라고도 한다. 좀더 자세하게 구분하면 장처전은 당시 행정조직인 군현제도의 일환을 이루는 단위로서 이속층(吏屬層)이 있었으며, 왕실은 여기서 수조권을 행사했다. 반면 내장전은 왕실의 직할 토지로서 고려 왕실재산의 기본이 되었으며, 그 수효는 전국적으로 약 360개소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토지를 관할한 기관을 내장택(內庄宅), 이를 경작한 민호(民戶)를 장호(庄戶)라 한다.

  특히 내속노비가 경작할 경우 이들 노비는 외거노비(外居奴婢)로서, 그 경영형태는 노예제적인 직접 경영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의 전호제(佃戶制) 경영이었다. 이와 함께 양민(良民) 전호를 지배하는 전호제 경영도 있었을 것인데, 이 경우 당시 지대(地代) 수취의 일반 관행에 따라 1/2 지대율이 시행되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직영제가 우세했다가 점차 전호제가 보급되어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공해전

http://www.mtcha.com.ne.kr/korea-term/goryo/term22-gonghejun.htm

고려 이후 국가기관의 관청 및 왕실 ·궁원(宮院)의 경비조달을 위해 지급된 토지이다.  고려시대에는 중앙의 일반 관청을 비롯하여 능침(陵寢) ·창고(倉庫) ·궁사(宮司) 등에 공해전이 지급되었고, 983년(성종 2) 주(州) ·부(府) ·군(郡) ·현(縣) ·관(館) ·역(驛) ·향 ·부곡에 공해전을 정하였는데, 그 종류는 지방관의 봉급과 기타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공수전(公須田), 지방관청의 소모품인 종이 ·붓 ·먹 등의 잡비에 충당하는 지전(紙田)과 관역장(館驛長)의 공비(公費)에 충당하는 장전(長田)이 있었다. 그리고 왕실재정의 경비지출을 위하여 지급된 내장전(內莊田:田庄)도 일종의 공해전이라 할 수 있는데, 내장전은 왕실에 소속된 장원(莊園)이었으므로 내장택(內莊宅)이라는 기관을 두어 관리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였는데, 중앙 공해전의 구체적 규모는 알 수 없으나, 단편적인 기록에 의하면 군기감(軍器監) 590결에서부터 혜민국(惠民局) 20결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각사 공해전은 분급수조지의 혁거(革去) 추세에 따라 혁파되어갔다. 본래 공해전은 국가가 세입세출을 일원적으로 관리하기 어려운 현실 때문에 마련한 제도였으므로, 재정관리 능력이 향상되면 혁파되어야 할 것이었다. 우선 1403년(태종 3)에 각사 공해전의 수입과 매월의 지출 상황을 사평부에 보고하도록 하는 통제조치를 취한 데 이어, 1409년(태종 9)에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군자 비축을 이유로 긴요하지 않은 각사 공해전을 혁파했다. 이듬해부터 사헌부·사간원을 비롯하여 업무가 바쁜 관아에 개별적으로 다시 지급했지만, 1434년(세종 16)에는 군자곡 확보를 이유로 중추원 공해전을 필두로 여러 관청의 것 총 1,405결이 풍저창(豊儲倉)으로 이속되었고, 1445년(세종 27) 국용전제(國用田制)의 실시에 따라 대부분이 혁파되었다. 1464년(세조 10)에는 내수소(內需所)의 공해전만 남게 되었고, 그나마 2년 후에 혁파되어 각사 공해전은 소멸되었다. 지방관아 공해전에는 지방관 녹봉의 재원인 아록전(衙祿田)이 생겼는데, 이는 공해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는 꾸준한 지방제도의 정비에 따른 현상이다. 1445년(세종 27) 국용전제 시행시 공해전은 표2와 같이 정비되었다.


  그러나 《경국대전(經國大典)》 규정에는 액수가 감소되어 아록전은 부·목·대도호부·도호부는 50결, 군현은 40결을 지급하되 판관이 있는 곳은 40결을 더하여 주고, 가족을 데리고 가지 않는 곳은 반감했다. 공수전은 주현의 등급을 나누지 않고 대로 25결, 중로 20결, 소로 15결을 지급하였다. 또한 역(驛) 공해전은 공수전이 대·중·소로에 따라 각기 20결, 15결, 5결씩 지급되는 외에 인위전(人位田)으로 장전(長田)·부장전(副長田)·급주전(急走田)·마위전(馬位田)이 지급되었다.


  공해전은 토지의 성격상 공전이었고,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각자수세(各自收稅)로 표현된 수조지였다. 수조율은 고려 전기에 1/4이었을 것이나 고려 후기에는 1/10 수조지로 변화되어, 조선 전기에도 그대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공해전 소출의 사용처는 중앙 각사의 경우 주로 각사 좌기일(坐起日)의 점심과 종이·먹·붓의 조달비용이었다. 지방의 경우 공수전은 사객(使客)의 접대비와 관청건물의 수리비를 비롯한 일반경비, 아록전은 지방관의 녹봉, 지전은 종이마련 비용으로 주로 쓰였다.


  공해전에 해당하는 종류로는 지전, 제사(諸司)의 채전(菜田) ·내수사전(內需司田) ·국행수륙전(國行水陸田), 혜민서(惠民署)의 종약전(種藥田), 진상(進上)의 청죽전(靑竹田) ·관죽전(官竹田) ·저전(楮田), 지방관청의 아록전(衙祿田) ·원전(院田) ·도전(渡田) 등이 있었다.


 

 

 

사원전

http://kr.dic.yahoo.com/search/enc/result.html?pk=14476000

사원에 소속된 전장(田莊) 및 토지. 사전(寺田)·사위전(寺位田)·사사전(寺社田)이라고도 한다. 사원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왕족·귀족들의 지원 아래 국가로부터 대토지를 지급받고 대지주로 성장·발전하였다. 불교의 세속적·물질적 위력의 기반인 사원경제에서 그 비중이 가장 큰 것이 사원전이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의하면 451년(눌지마립간 35) 왕후사(王后寺)에 10결(結)의 토지를 지급한 것이 사원전의 효시로 보인다. 그리고 법흥왕 이래로 불교가 공인되고 점차 융성하여감에 따라 사원은 국가로부터의 사급(賜給)과 귀족 및 부호들의 시납(施納)으로 광대한 토지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신라통일기 이후 불교의 종교적·세속적 위력이 더욱 강성해짐에 따라 사원경제의 토대가 되는 사원전의 면적도 날로 증가하여 사찰은 거대한 재산을 축적하였다. 면세의 특권이 부여된 사원전의 지나친 확대는 국가의 재정수입을 감소시켰으므로, 664년(문무왕 4) 사원에 대한 토지의 기증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전시과(田柴科) 제도에 따라 사원에 토지가 분급되었으며, 왕족·귀족들의 기진(寄進)과 대덕(大德)·대통(大通) 등에 대한 별사전(別賜田)의 지급 등으로 인해 대토지를 소유하였다. 게다가 매득(買得)·개간·강탈 등의 여러 수단과 방법으로 확대시켰다. 심지어 사원전에서의 수입으로 고리대업을 전개함으로써 고려사회의 문란과 멸망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391년(공양왕 3) 전국 토지 실전결수의 1/6 정도에 해당하였던 사원전은 전제개혁으로 토지의 일부를 국가에 반납하면서 약간 정리되었다. 그러나 사원전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그 기반이 강대하여 태조 때에는 뚜렷한 조처를 취하지 못하다가 태종·세종 때 도첩제(度牒制;승려 면허제)와 사찰 정리 등을 통하여 막대한 사원전이 국가의 공전(公田)으로 되었고, 얼마간의 남은 사찰의 전지(田地)는 다른 전지와 마찬가지로 규정된 조세를 납부하게 됨으로써 특권을 상실하였다. 세조 이후부터 대체로 사원전의 수조지(收祖地)는 1만 결 정도의 선에서 유지되었는데, 수조지로서의 사원전의 규모는 그 이후에도 큰 변동이 없었다. 이것은 《세종실록》 <지리지>에 수록된 전국의 토지 총결수 163만 여결에 비하면 1/160에도 미치지 못하는 셈이다. 고려 말기에 비해서 경작지 총결수에서 차지하는 사원전의 수조지의 비중은 엄청나게 저하된 것이다. 성종 때 이후 왕실, 특히 후비(后妃)들의 불교 혹신(惑信)과 그 요청에 따라 점차 가급(加給)되는 경향을 보였으며, 연산군·중종 때에는 다시 감소되었다가 명종 때 왕실의 복을 비는 내원당(內願堂)이라는 이름의 사원이 남설(濫設)되고 사원전 또한 급증하였다. 그러나 사림파의 정치적 비중이 커감에 따라 1566년(명종 22) 마침내 불교가 대탄압을 받고 사원전 또한 능침사(陵寢寺) 이외의 것은 대체로 내수사(內需司) 소관으로 이속되었다.


 

 

 

무신정변

http://myhome.shinbiro.com/~hyun7301/sagun/7.htm

http://chungdong.or.kr/middroom/syshim/한국사/한국사25.htm


고려시대 무신들에 의해 일어난 정변. 이는 좁은 뜻으로 볼 때 1170년(의종 24)의 정중부(鄭仲夫)의 난을 말한다. 고려의 지배층을 구성한 것은 문신과 무신이 모두 해당되나, 과거제도와 함께 유교주의가 채택됨으로써 문치(文治)를 지향하는 사회가 되어 문신의 지위가 무신에 비해 높아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성종(成宗) 이후 거란(契丹)·여진(女眞) 등 북방민족이 침입했을 때도 그 최고지휘관은 문신이 되었고, 무신은 그 아래에서 지휘를 받으며 많은 희생을 감수하였다. 또한 경제적 배경이 되는 전시과(田柴科)체제에 있어서 998년(목종 1)의 <문무양반전시과(文武兩班田柴科)> 개정 때는 무관이 문관에 비해 낮은 품계(品階)를 받음으로써 무신의 불평은 높아지고 갈등이 깊어지게 되었다. 그 불평과 갈등은 마침내 실력행사로 나타나게 되었고, 그것은 세력의 기반을 다지지 않고서는 성공하기 힘든 것이었다. 1014년(현종 5) 급증한 백관의 녹봉(祿俸)을 지급하기 위해 당시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몰수하자, 이에 격분한 무신 최질(崔質)·김훈(金訓) 등은 병사들을 충동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정치상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 정권은 1년도 못되어 실패하는 바람에 더욱 더 문신이 득세하는 결과를 낳았다. 계속된 숭문억무(崇文抑武)정책은 의종(毅宗) 때까지 이어져 명승지에 이궁(離宮)과 정자를 지으면서 군졸들을 동원하였고 급기야 문신 김돈중(金敦中)이 견룡대정(牽龍隊正)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워 희롱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였다. 결국 이러한 고려 귀족사회가 지닌 모순들은 마침내 무신정변을 일으키게 하였다. 1170년 의종이 문신들을 거느리고 장단(長湍) 보현원(普賢院)에 행차할 때 왕을 호종하던 정중부와 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 등은 반란을 일으켜 왕을 수행하던 문신들을 학살하고, 다시 개성으로 돌아와서 요직에 있던 문신들을 대량 학살하였다. 그들은 곧이어 의종을 폐위시키고 그 아우 익양공(翼陽公) 호(皓)를 왕으로 옹립하여 실권을 장악, 문신귀족정치를 무너뜨리고 새로이 무신정권의 성립을 보게 하였다.


 

 

 

녹과전

http://blog.naver.com/tonypride6/120002142153

http://blog.naver.com/kkoneng/60017868910


고려는 12세기에 들어 경제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전시과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자 전시과체제는 제기능을 할 수 없게되어 토지분급은 마비되었고, 국가의 재정과 관리의 생활에 지장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려 정부는 겸병된 토지와 백성을 推刷하여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田民辨整事業의 추진과 새로운 토지제도의 마련을 강구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토지제도인 祿科田이 성립되게 된다.


고려의 祿科田은 관리들의 祿俸이 부족하게 되자, 이를 보충하기 위해 지급된 것으로써 녹봉을 대신해서 녹과전이 지급된 것이 아니라, 고려 전기의 토지제도인 전시과체제가 붕괴되어 전시과을 지급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주로 녹봉에 의존하고 있던 관리들의 생활을 보충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급된 土地分給 규정이었다. 이러한 녹과전 分給理論이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강화도 피난기였던 高宗 44年(1257)이었고, 이것이 확대 실시된 것은 還都 이후 元宗 13年(1272)이었다.


이러한 녹과전은 京畿 8縣의 토지를 양반관료들에게 지급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급여대상자가 대부분 중앙의 관리이므로 경기의 땅을 주어 예우하고 편리를 제공한다는 뜻과 토지겸병에 따른 농장발달의 추세 속에서 녹과전을 보호한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리고 녹과전 설치 당시의 고려는 북방에서 반란이 일어나 그 지역이 몽고에 편입되고, 남방에는 삼별초의 영향력이 미치는 형편에 놓여 있었으므로 그 통치력의 작용범위도 실제로 제약받고 있었던 것이다.


녹과전제를 설치한 목적은 전술한 바대로 부족한 녹봉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녹과전의 설치로 인하여 녹봉의 지급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 명종조부터는 재정난으로 인해 녹봉이 감축되어 지급되었고, 강화도에서 대몽항쟁을 하고 있을 때에도 물론이고, 개경으로 환도한 직후 일본원정에 따른 전비부담의 격증으로 국가와 왕실의 재정은 거의 파산상태에 이르게 되어 녹봉을 제대로 지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녹봉을 관장하는 左倉의 기능과 반록의 명맥은 미약하나마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의 대몽항쟁과 일본원정이 종식되고 난 후부터는 국가재정이 호전되었다. 그래서 녹봉지급이 재개되었다. 하지만 충분하지 못한 재정 때문에 이전처럼 완전하게 지급된 것은 아니었다. 공민왕의 즉위 후부터 祿制 자체의 개혁이라기 보다는 불급한 관원의 도태, 토지겸병의 금지, 식읍에서의 수취를 녹봉의 재원으로 환속시키는 등 문란해진 녹제를 쇄신해 보려고 하였으나, 토지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재정상태의 문란은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국가재정상태와 직결되어 있던 녹봉의 지급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던 것이었고, 이에 녹과전이 녹봉을 보충해주며 고려말까지 관료들의 생활을 보장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2-2. 경제활동


1) 귀족의 경제 생활

 

 

 

신공

http://www.dgedu.net/student/tfokuk/html/text/jo2099.html


 

 

2) 농민의 경제 생활

 

 

 

시비법

http://cafe.naver.com/kkd1044.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946

http://100.naver.com/100.php?id=784133


농사를 지으면서 토양에 비료를 주는 시비는 옛날부터 시행되어 오던 농법이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들어와 시비의 방법이 더욱 발전되면서 농업기술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2세기 이후에는 수리시설의 발전, 다양한 볍씨의 도입과 관련된 종자개량과 더불어 두엄 등을 거름으로 사용하는 시비법이 개발되어 농업생산력이 향상되었다. 두엄 외의 전통적인 거름의 종류로는 생초분(生草糞)·구비분(廐肥糞)·잠사분(蠶沙糞)·인분 등이 있다.


시비법에는 기비법(基肥法)과 추비법(追肥法)이 있고, 추비법에는 다시 경비(莖肥)·수비(穗肥)·지비(止肥)가 있다. 밑거름이라고도 하는 기비법은 파종 전후 시기에 비료를 주는 것이고, 웃거름(중거름)이라고도 하는 추비법은 파종 후 작물이 자라는 동안에 비료를 주는 방법이다.


경비는 화곡류의 줄기 성장을 위해서 주는 비료이고, 이삭거름이라고도 하는 수비는 이삭의 충실한 결실을 위해 주는 비료이며, 지비는 추수를 하기 전 마지막으로 주는 비료이다.


 

 

 

윤작법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11&dir_id=110211&eid=HRxwzmTDm85UZsW8ZfLOyRWAPR89%2FWMY


윤작법은 

한 작물을 계속하여 연작하면 땅의 힘이 떨어지고 병과 충이 많아져

작물의 피해가 나타나는 것을 최소화 하기 위하여

작물을 돌려짖기하는 것을 말한다.

윤작 작부체계에는

화본과 작물 - 두과 작물 - 녹비작물

엽채류 - 두과작물 - 근채류

벼 - 보리(밀)

엽채류 작물 - 화본과 작물 - 두과 작물

등이 있는데

두과작물은 공중의 질소를 고정하는 근류균이 있어 토양의 질소성분을 높여주고

녹비작물은 자운영, 호밀, 헤어리베치 등을 농한기에 경작하여 경운하여

유기질 함량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고

여채류 작물을 경작하여 염류가 집적된 토양에 벼를 재배하여 염류장애를 해소하여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윤작법과 비슷한 것에는 혼작법이 있어 윤작의 효과를 거둘수 있습니다.

혼작법은 두가지 이상의 작물을 섞어 재배하는 방법으로

충해 방제법으로도 활용 합니다.


 

 

 

고려도경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bknu=05031398&query=%B0%ED%B7%C1%B5%B5%B0%E6&cpname=booktopia&menu=sview&encrt=3Oj9Wa9QA4MTGgDZNCZwZ3NpemU9#middle_tab

http://blog.naver.com/khwup1004/140016666861


 

 

3) 수공업자의 활동

 

 

소수공업

http://blog.naver.com/leejh6612.do?Redirect=Log&logNo=140017650512

http://corea1.hihome.com/econo/ec_2_2.html


전문적 제품을 생산 → 공물로 납부


 

 

 

관청수공업

http://blog.naver.com/leejh6612.do?Redirect=Log&logNo=140017650512

http://corea1.hihome.com/econo/ec_2_2.html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서 기술자를 공장안에 등록 →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품 생산


 

 

사원수공업

http://blog.naver.com/leejh6612.do?Redirect=Log&logNo=140017650512

http://corea1.hihome.com/econo/ec_2_2.html


승려와 노비가 베ㆍ모시ㆍ기와ㆍ술ㆍ소금 등을 생산


 

 

민간수공업

http://corea1.hihome.com/econo/ec_2_2.html

http://blog.naver.com/leejh6612.do?Redirect=Log&logNo=140017650512

농촌의 가내 수공업 중심, 자급ㆍ공물ㆍ매매를 위해 삼베ㆍ모시ㆍ명주 등 생산


 

 

 

공장안

http://100.naver.com/100.php?id=16752

공조와 그 소속관청 및 도 ·읍에 보관하였다. 공장들에게 공장세(工匠稅)를 부과하기 위해 호조 ·공조 ·본도(本道) ·본읍(本邑) 등의 관에 소속된 공장을 등록한 직업적인 수공업자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공장은 종류에 따라 등록하는 관청이 달랐다.


공조에는 초립장(草笠匠) ·사모장(沙帽匠) ·다회장(多繪匠) 등 54개, 군기시(軍器寺)에는 칠장(漆匠) ·마조장(磨造匠) ·현장(弦匠) 등 14개, 봉상시(奉常寺)에는 옹장(甕匠) ·화장(花匠) 등 34개, 상의원(尙衣院)에는 능라장(綾羅匠) ·초립장 ·모자장(帽子匠) 등 68개, 교서관(校書館)에는 야장(冶匠) ·균자장(均字匠) ·인출장(印出匠) 등 8개, 내자시(內資寺)와 내섬시(內贍寺)에는 모두 옹장 ·방직장(紡織匠) 등 3개, 선공감(繕工監)에는 마조장 ·조각장(彫刻匠) 등 21개, 제용감(濟用監)에는 숙피장(熟皮匠) ·모관장(毛冠匠) ·하엽록장(荷葉綠匠) 등 13개, 장악원(掌樂院)에는 풍물장(風物匠) 등 2개, 내의원(內醫院)에는 분장(粉匠) ·향장(香匠), 사옹원(司饔院)에는 사기장(沙器匠), 사도시(司導寺)에는 옹장, 소격서(昭格署) ·사온서(司醞署) ·장원서(掌苑署) ·사포서(司圃署) ·양현고(養賢庫)에 각각 하나의 공장이 있고, 예빈시(禮賓寺)에는 옹장 ·화장, 관상감(觀象監)에 자격장(自擊匠), 전함사(典艦司)에 선장(船匠), 도화서(圖畵署)에 배첩장(褙帖匠), 조지서(造紙署)에 목장(木匠) ·지장(紙匠) 등 3개, 와서(瓦署)에 2개, 귀후서(歸厚署)에 3개, 전설사(典設司)에 침장(針匠) ·다회장(多繪匠) 등이 있었다.


연산군 때는 공장등록을 강조하여 모든 공장은 한성부의 오부에 명하여 거주지를 기록하여 관부에서 필요한 역사(役事)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였다.


 

 

 

4) 상업활동

 

 

 

행상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C7%E0%BB%F3&sort=0&c=1&qt=df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C7%E0%BB%F3&c=2&sort=0&qt=df&fr_res=0&to_res=0

 

 

 

전매제도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6&dir_id=601&eid=r%2FlxgpdHE1CvxzkMsoxUkHHVE6AiG5kf


전매제도란 중국 전한시대때에 국가의 수입을 늘리기 위하여


소금과 철을 국가에서 판매하여 국가의 수입을 늘리는 제도입니다.


쉽게말해서 국가에서 소금과 철을 집중적으로 사들여서


백성에게 팔면 국가의 수입을 늘릴수 있다는 말입니다^^




 

 

 

5) 화폐주조와 고리대의 유행

 

 

 

삼한통보

http://yushin.or.kr:8080/bbs1/read.cgi?board=c_relic4&y_number=42

http://www.mtcha.com.ne.kr/korea-term/goryo/term81-samhantongbo.htm

1102년(숙종 7)  의천의 건의로 세워진 주전도감(鑄錢都監)에서 해동통보(海東通寶)·삼한통보·삼한중보(三韓重寶) 등을 만들었는데, 이 중 삼한통보가 처음으로 주조된 듯하다. 모양은 둥글고 가운데 정사각형 구멍이 뚫렸으며, 상하좌우에 '삼한통보(三韓通寶)'라는 글자가 각각 한 글자씩 새겨져 있다. 이것의 가치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예종 때 용전(用錢)의 불편을 이유로 통용이 중지되었다.


 

 

 

해동통보

http://www.mtcha.com.ne.kr/korea-term/goryo/term153-hedongtongbo.htm

http://museum.kmu.ac.kr/kor/mone/doc/hetong.html


1102년(숙종 7) 의천의 건의로  만든 동전(銅錢)으로, 한국에서 처음 사용한 엽전이다. 송나라와 거란(契丹)이 전폐(錢幣)를 사용한 것을 참고하여 1102년 12월 1만 5000관(貫)을 만들어 재상(宰相) ·문무양반(文武兩班) ·군인에게 나누어 주고 유통을 장려하였다. 또한 1104년에는 주화가 통용된 지 3년이 흘렀지만 백성들이 가난하여 활발하게 통용되지 않아 각 주(州)·현(縣)에 명하여 미곡(米穀)을 방출해서 주점(酒店)과 식점(食店)을 열어 동전으로 술과 음식을 사 먹도록 하는 등 주화유통의 확대를 위해 노력했다. 해동통보 외에 삼한통보(三韓通寶) ·동국통보(東國通寶) ·해동중보(海東重寶) 등의 동전도 함께 사용하였다.


 

 

 

해동중보

http://www.mtcha.com.ne.kr/korea-term/goryo/term151-hedongjungbo.htm

http://www.hyangto.pe.kr/L8-I46.htm

http://w3.seoul-gchs.seoul.kr/%7Esh022001/mm2.htm


고려시대의 화폐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계림유사(鷄林類事)》에 따르면,  1103(순종 8년)년에 주조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대략 1102년 만들어진 ‘해동통보(海東通寶)’ 이후일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철전(鐵錢)의 하나로, 모양은 둥근 바탕에 중앙에 정사각형의 구멍이 하나 뚫려 있고, 상하 좌우에 ‘海東重寶’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다.


 

 

 

http://100.naver.com/100.php?id=75744

1464년(세조 10)에 실시한 보법(保法)에서는 인정(人丁) 2명과 토지 10결(結)을 각각 1보라고 하였다.


보법의 성립 경위는 다음과 같다. 조선 전기에 군역부담자는 무기와 군장(軍裝) ·말(馬) 등과 함께 번상(番上)이나 유방(留防) 근무에 소요되는 경비 ·식량 등을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이러한 것들은 경제적 부담을 요구하는 것이어서 가난한 군인이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가에서는 정군(正軍:戶首)에게 그 재정을 보조해 주는 봉족(奉足)을 지급하였는데, 보통 5∼6결 이상의 토지와 5∼6명 이상의 노비를 소유한 부유한 정군에게는 지급하지 않았고, 그 이하의 재산을 가진 정군에게만 지급되었다. 그리고 봉족은 2,3결 이하의 토지를 가진 자만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봉족 지급원칙을 무시하고 부유한 정군들이 군역 담당 관리들과 결탁하여 봉족을 지급받는 경우가 많았고, 봉족을 노비처럼 사역하기도 하였다. 또한 세력 있는 양반들은 불법으로 수많은 양민들을 호적에 기재하지 않고 자신의 농장에 거주시키면서 사역하거나 긴 울타리를 쳐서 수십 가(家)를 1호라고 사칭하면서 국가의 부세를 회피하였다. 그 위에 지주제(地主制)의 발달로 정군 대상자인 5~6결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자영농은 줄어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타난 것이 세조대의 보법이었다.


세조는 즉위 직후부터 군역 부과의 불평등과 군액 감소에 대하여 단호한 조치를 취하여 군역의 평준화와 군액 증가를 위한 일련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래서 1459년(세조 5)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여 군역에서 누락된 은정(隱丁)을 철저히 색출해내려 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래 봉족제에서와 같이 토지와 인정을 함께 고려하는 군역 행정을 비판하고, 토지와 인정을 분리하여 군역을 부과하는 보법을 고안하였다.


중요한 내용은 첫째, 2정(丁)을 1보(保)로 한다. 둘째, 토지 5결은 1정에 준하도록 한다. 셋째, 노자(奴子)도 봉족수로 계산한다. 넷째, 각 병종별 급보(給保) 단위는 갑사(甲士) 4보, 기정병(騎正兵) ·취라치(吹螺赤) 3보, 보정병(步正兵) ·평로위(平虜衛) ·파적위(破敵衛) ·근장(近仗) ·별군(別軍) ·대평소(大平簫) ·기선군(騎船軍) 2보, 봉수군(烽燧軍) ·방패(防牌) ·섭육십(攝六十) 1보이다. 다섯째, 군역에 누락된 인정이나 가호는 벌칙을 강화한다 등이었다. 특징은 첫째 ·둘째 항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정은 인정대로 철저히 파악하여 2정을 묶어 1보로 편성하고, 토지는 토지대로 5결을 1정에 준하는 방식에 있었다. 따라서 군역부과 단위인 1보(保)는 인정 2명과 토지 10결에 해당하였다.


보법의 실시에 따라 종래 대토지 소유자와 수많은 양민을 거느린 사람들은 자신의 ‘보’에 해당하는 만큼의 군역을 부담하여야 했다. 이것은 군역의 평준화와 군액의 증가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가져와 군액은 종전의 두 배가 되는 60만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또한 정군을 구성하는 군호(軍戶)의 경제적 사정도 향상되었다. 보법에 의해 갑사는 4보, 기정병은 3보, 보정병 ·기선군은 2보로 구성되었으니, 이것을 토지와 인정을 똑같은 비율로 놓고 고려한다면 갑사는 인정 4명, 토지 20결에 해당하는 군호에서 배출하는 것이고, 기정병은 인정 3∼4명, 토지 10∼15결에서, 보정병 ·기선군은 인정 2명, 토지 10결 정도에서 나오게 된 셈이다. 이것은 이전에 양인 농민의 자율적인 경제적 상태에 따라 정군과 봉족을 지정하던 상태에서 국가에서 획일적으로 군역 부과단위를 설정하고 이를 기반으로 군역을 평준하게 부과하는 형태로 전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법은 시행과정에서 많은 폐단과 부작용을 일으켜 농민들에게 과중한 부담만 지우게 되었다. 즉 보법의 특징인 토지 5결은 1정에 준한다는 원칙은 많은 토지를 가진 부호에만 해당하는 사항이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말단 관리들은 영세한 농민들의 토지를 합쳐서 5결을 만들어 1정으로 계산하여 군역을 부과하였다. 그래서 보법 실시 직후 양성지(梁誠之)는 “군액은 비록 옛날보다 배가 되었으나 정강(精强)하기는 옛날에 미칠 수 없다”라고 비판하였다.


사실 이렇게 토지와 인정 모두에 군역을 부과하는 보법은 영세한 농민보다는 대토지 소유자인 양반 등 지배계층의 이익과 크게 어긋났다. 따라서 양반 지배층들은 보법에 대한 많은 반론을 전개하면서 집요하게 수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성종 대에 이르러 이러한 반대주장이 받아들여져서 보법 내용은 수정되었다. 1470년(성종 1) 토지 5결은 1정에 준한다는 내용이 삭제되고 노자(奴子)도 반정으로 감액되었다. 이것이 《경국대전》에 그대로 오르게 되었다. 대규모의 토지 소유자나 노비를 많이 소유한 계층에게 유리한 조치가 취해졌던 것이다.


이로써 조선 전기에 토지와 인정을 함께 묶어 파악하던 군역 편제 방식은 오로지 인정만을 기준으로 파악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보에서 토지가 빠져버리자 보인(保人)이란 명칭이 등장하게 되고, 이것은 종래의 봉족과 동의어(同義語)로 사용되었다. 군역이 인정에만 부과된 결과 토지가 없는 농민들의 군역 부담이 가중되었으므로 그들은 군역을 피하려고 하였고, 이러한 경향은 조선 전기 군역제의 동요 ·붕괴로 나타났다.


 

 

 

은병

http://museum.kmu.ac.kr/kor/mone/doc/ybuing.html

은병은 『高麗史』「食貨志」에 의하면 숙종 6년(1101)에 만들어져 유통된 것으로 보인다. 은 1근을 소재로 한반도(韓半島) 모양을 본따 만든 은병은 그 주둥이가 넓어 민간에서는 활구(闊口)라고 불렸는데 표인(標印)을 찍은 후 유통되었다. 은병의 유통은 당시의 국제무역이나 국내상업에서 대규모 거래의 매개수단으로 사용되어 상품유통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은병 1개의 교환가치는 일정하지 않으나 최하 쌀 10섬에서 최고 쌀 50섬에 해당하였으며, 은병 하나의 값이 포 100여 필에 이르는 때도 있었다. 이러한 교환가치는 대규모 거래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보조화폐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되어 해동통보(海東通寶)·해동중보(海東重寶)·삼한중보(三韓重寶)·삼한통보(三韓通寶) 등이 주조·유통되었다.


한편 은의 조달이 어렵게 되고 동을 혼합한 모조품 등 불법주조가 성행하자 충혜왕 1년(1331)에는 구은병의 유통을 금지하고 새로 소은병(小銀甁)을 만들어 폐단을 막고자 하였으나 화폐로서의 기능은 점차 사라져 갔고, 일부 지방에서만 조선 초기까지 유통되다가 태종 8년(1408)에 완전히 유통을 금지시켰다.


6) 무역활동


 

 

 

벽란도

http://blog.naver.com/jjang_jmh/140017742717

고려시대 예성강 하구에 있는 무역의 중심지는 벽란도라는 섬(?)입니다..


벽란도에서 고려는 송나라와  무역을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그외 일본과 아라비아에서도 주로 무역을 했고요...


(이때 아라비아인이 고려를 코리아라는 발음으로 했기때문에 코리아라고 하죠^^)


*수출품  :  금,은,구리,인삼,종이,나전칠기,돗자리,부채,옷감 등.

 

 

고려의 대외무역

http://cafe.naver.com/dolnoja.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3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