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경제구조와 경제생활


1. 고대의 경제


1-1. 삼국의 경제 생활


1) 삼국의 경제 정책

 

 

 

 

 

 

노비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BE%C8%BF%EB%BA%B9&sort=0&c=3&qt=df

http://blog.naver.com/kyjc55/140007982702

양반은 권리가 많은 신분으로 권리만 많았던 양반들의 대척점의 의무만 있는 노비이다.

노비는 천민중 특별 천민이다.

왜냐~~

백정. 광대, 사당.무격,기녀, 악공도 천민이나 이들은 양인이다가

사회적으로 천시된 직업탓에 천민으로 간주되었는데 유일하게

노비는 첨부터 노비였던 천민이었다.


  조선의 법은 자유민과 비자유인의 신분제가 있었다.

노비외 다른 모든 신분은 자유민이다.

더 웃긴것은 조선에선 자유민만 국왕의 신민이고 신민만이 국왕의 보호를 받았다.

하여 노비는 억울한 일을 당해도 당췌 해소할 길이 없다.

조선법에는 노비에 대한 것이 딱~ 한개 언급된다.

상전이 죄를 지어 벌을 받을때 대신받을 수 있다는 노비의 의무...가 바로 그것이다.

노비의 갋은 말 한 필 값도 못 미치는 재물이었던 것이다.


  노비의 기원은 2000년도 넘는다.

정복전쟁이 성행하던때에 전쟁포로들과 범죄자들만이 노비가 될 수 있었는데

전쟁노비가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충족시키기위해 고안해낸 것이

"노비세전법"이라하여 대~~~대로 세습을 시키는 법이다.

당시 중국과 일본에도 노비가 있었으나 세습을 시키지 않았다.

내 대에서 지을 죄를 다음세대에 이어 벌을 하는 것은 억울하다는 이유에서이다.

우리 나라는 '노비종모법'을 실시하여 어머니가 노비이면 자식은 남편의 신분과 상관없이

무조건 노비이다. 이것이 양반들이 만들어 놓은 노비 증가법이다.

노비도 일종의 노비였으므로 여인들이 다른 쪽 남성과 결혼시켜 노비가 아이를 가지면

그 자식은 여자의 상전에 귀속물이 되는 것이다.


  이후 조금 발전하여 글자가 좀 길어진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이 실시 되었다.

말그대로 " 노비남자와 양인여자가 결혼하여 낳은 소생은 어머니의 신분을 갖는다"

서민층의 신분상승으로 양인역을 담당할 인구가 부족해지자 나라에서

노비의 신분적 규제를 완화하여 이들의 일부를 제도적으로 양인화를 위해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奴良妻所生從母從良法)'을 만들었다.

본래 노비는 종모법으로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도록 되어 있었으나,

노비와 양인이 혼인한 경우에는 '일천즉천(一賤則賤)'의 규정에 따라

노비의 신분이 되었었다.

그러나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으로 인해 노와 양녀가 혼인하여 낳은 자손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양인신분으로 바뀌어 이들에게 양역을 부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노비들은 이 법에 따르면 그의 소생을 간단히 면천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영조 이후 노와 양녀사이의 결혼이 성행하게 되었다.

이 법은 본래 양역인구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반드시 양역이 아니더라도 특수지역에 입속할 인구가 부족한 경우에는

입속인구의 확보를 위해 이 법의 규정이 변형되어 운용되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들의 신분은 양인으로 간주되었다.



노비의 종류도 다양해서

-외거노비 : 상전과 별로 거주하면 신공을 내는 노비이라, 그래도 자유스럽게 사는 편이다.

-솔거노비 : 전형적 노비로 같이 거주하는 노비이다.

  1)시종노비 - 상전이 관리로 임명되어 서울로 발령이 가거나

                        군.현지방관으로 부임할때 수행한다.

  2)마름노비 - 집안 대소사와 외지 토지관리를 한다.



  노비은 권리대신 의무를 진다.


인간이라기 보다 물건과 가축 같은 재물로 주인에게 철저한 지배를 받는다.

국가에서도 인권보호를 하지 않고 형전에만 기록된다.

주인 마음대로 매매.상속.증여가 된다.

노비가 죄를 지으면 참혹한 형벌이나 직접 죽일 수도 있었다.

노비가 주인의 반역행위를 고하는 것 외에 관청에 고발하면 노비가 사형을 당한다.

주인을 구타할 경우 : 무조건 참형

주인의 친족이나 외조부모 구타시 : 교수형

주인이게 욕설을 할경우 : 교수형

노비과실로 주인에게 상처를 입혔을 경우 : 장형 100대, 유형 3.000리 중형


  이 지경이 되니 노비가 한을 품고 상전에게 화풀이를 하게되면

그때는 요즘 말하는 가족몰살도 불사하는 일대 피바람이 부는 것이다.

어차피 죽을 거 확~~~~저지르고 죽자는 것이다...

사실 나라도 그럴 것이다.



- 상전집 식구 몰살 사건.(당시 뱃속아이까지 죽였다 함)

- 방에 가두고 7명을 태워죽인 사건

- 상전의 일가족을 살해한 후 칼로 난자한 사건

- 조직적 살인계 등장(상전죽이는 노비들의 계)

-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3대 몰살사건.


이에 대한 국가의 대응 : 무조건 극형에 처하고 사건지역 수령을 파면하고 읍격을 낮춤.


 

 

 

우경

http://100.naver.com/100.php?id=749981

신석기시대에 농사가 시작된 이래 농사짓는 방법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춘추시대 철기를 농사에 이용한 것은 가장 중요한 변화였다. 춘추시대에 사용한 철기는 전국시대에는 생산도구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철제농기구의 전국적인 보급과 함께 이 시기에 도입한 것이 소를 이용한 농사, 즉 우경이었다.


중국에서 우경이 언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단지 소를 농사에 이용하기 위해서는 소의 코를 뚫어 고삐를 매야 한다. 이는 청동제기의 장식에 보인다. 그리고 갑골문에서도 우경 비슷한 문자가 보이고 있지만, 우경이 문헌상 나타나는 것은 전국시대이다.


소로 경지를 갈면서 쟁기의 모양도 달라졌다. 그간 사람이 사용하던 쟁기, 즉 뇌사는 소가 끄는 쟁기, 즉 여로 발전하였다. 이 당시의 여는 개인용 뇌(쟁깃술)와 사(보습)에 나무로 된 원(轅)을 붙여 소가 끄는 형태로 바뀌었다. 사람의 힘이 아닌 소의 힘을 이용함에 따라 황토지대인 미개척지의 넓은 평원을 경지로 활용할 수 있게 되어 농업생산력이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소의 유무에 따라 농업경영 규모가 달라짐에 따라 사유재산의 확대와 계급분화가 시작되었다. 이처럼 인력 대신 우력(牛力)의 사용은 전국시대 농업혁명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우경은 한나라 때 널리 보급되었다. 한대에 우경이 널리 보급된 것은 전한시대에 쟁기의 발달 때문이었다. 전한시대에는 쟁기도 그 종류와 형태가 다양하였으며, 땅을 깊이 갈 수 있는 쟁기 제작기술도 높은 수준이었다. 이러한 소를 이용한 농사는 농업생산력 증대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기 때문에 이 시대 호족(豪族)의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은 소를 소유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소의 소유 유무는 한나라 이후에도 빈부 격차의 주요 요인이었다. 이 현상은 청나라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진대법

http://mtcha.com.ne.kr/korea-term/goguryo/term42-jindaibub.htm

http://211.252.89.97/ban/sa/ex/h6316.htm

http://yeosu.hs.kr/tcnt/read.cgi?board=inmun&y_number=487&nnew=2

http://www.jeri.or.kr/jries/web/go/soc/his/%BF%F616.htm

http://cont111.edunet4u.net/2002/yjsgun11/Mm/Module/jindae.htm

http://dugok.x-y.net/kor-his/sys/jindebup.htm


진은 흉년에 기아민(飢餓民)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는 것을 뜻하고, 대는 봄에 양곡을 대여하고 가을에 추수 후 거두어 들인다는 뜻이다.


  이러한 제도는 고구려 때 194년 10월 고국천왕이 왕권강화를 위해 국상(國相) 을파소(乙巴素)의 건의에 따라, 매년 3~7월에 관가의 곡식을 가구(家口)수에 따라 차등을 두어 대여하였다가 10월에 환납(還納)하는 것을 상식(常式)으로 시행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에서의 진대법 실시의 최초의 기록이다.


  고려시대에는 초기부터 국가적 차원에서의 진휼사업(賑恤事業)이 행하여졌다. 고려시대는 건국 초기부터 흑창(黑倉)을 설치하였으며 986년(성종 5)에는 흑창의 진대곡을 1만 석 더 보충하여 이를 의창이라 하고 은면지제(恩免之制)·재면지제(災免之制)·환과고독진대지제(鰥寡孤獨賑貸之制)·수한역려진대지제(水旱疫쟨賑貸之制) 등의 방법으로 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상평(常平)·환곡(還穀)의 제도로 그 범위가 확대, 정비되어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전근대 사회에서 시행된 이러한 진대법은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계급적 대립을 완화시켜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동시전

http://www.mtcha.com.ne.kr/korea-term/sinra/term24-dongsijun.htm


509년(신라 지증왕 10) 경주 동시(東市)의 업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청이다. 그 업무는 시장을 열고 닫는 시간, 도량형의 사용, 상인들 사이의 분쟁 해결, 왕궁에서 사용하는 물품의 조달, 잉여 생산물의 판매 등의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 관원으로는 감(監) 2명, 대사(大舍) 2명, 서생(書生) 2명, 사(史) 4명을 두었다. 695년(효소왕 4)년에 서시(西市)와  남시(南市)가 개설되면서 경주는 상업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당항성

http://buddhasite.net/dharmadhatu/bang.php?table=off&query=view&l=12&p=29&go=421


처음에는 백제가 축성하였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백제후기의 전형적 축성방식

을 보이고 있다. 신라가 점유한 후에는 당항성이라 하여 중국과의 교역의 관문이었으

며, 신라 말기에는 이곳에 당성진을 설치하여 강화의 혈구진, 완도의 청해진과 더불어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중요시되었던 곳이다. 성의 둘레는 내성 1150m, 외성 300m,높

이 3m로 외벽은 석축, 내벽은 토축이었는데 지금은 성지만 남아있고 성내의 망해루도

초석만 남아 있다.

당항성은 661년 의상과 다시 유학길을 떠났던 원효 대사가 당항성(唐項城:南陽)에 이

르러 한 고총(古塚)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목이 말라 마신 물이, 날이 새어서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부정(不淨)도 없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

음을 대오(大悟)하고 그냥 돌아온 곳이며, 원효는 그 후 분황사(芬皇寺)에서 독자적으로

통불교를 제창,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또한, 당항성은 고구려 영류왕 때 덕과 예술과 문학을 겸비한 선비를 보내 달라는 고구

려의 요구에 의하여 당나라에서 팔학사를 보내어 그중 홍학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중국

문물을 받아들인 곳으로 남양 홍씨의 발상지라고 한다.


 

 

 

2) 귀족의 경제 생활

 

 

 

 


녹읍과 식읍


http://skji.hihome.com/%B1%B9%BB%E7%B1%B3%C0%B0/2%B0%E6%C1%A6-%C1%BE%C7%D5/041%C5%EB%C0%CF%BD%C5%B6%F3%B0%E6%C1%A6.hwp


녹읍과 식읍에 대하여는 일찍부터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둘러싼

학설도 매우 다양하여, 일방적으로 어느 한 쪽의 견해를 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학

계의 일반적인 이해에 기초하여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식읍이 녹읍에 비하여 귀족의 지배권

이 더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첫째, 녹읍은 신라 귀족(주로 진골귀족)들에게 관위에 대한 대가로 지급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관등을 잃게 되면(대체로 사망의 경우), 다시 국가에 반환하여야 하였습니다. 말하자

면 녹읍은 세습이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식읍은 전공을 세웠다든지 하는 특

수한 경우에 지급한 것으로, 죽은 후에도 그 자손에게 세습이 이루어졌습니다. 자연히 식읍

의 주인은 녹읍주에 비하여 더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 녹읍이나 식읍에 대한 지배의 내용은 양자 모두 원칙적으로는 그 지역에서 '租'(세

금)를 거두어들일 수 있는 권한(수조권) 뿐이었습니다. 그 지역의 사람들로부터 '役力'(노동

력 수취)이나, '貢賦'(특산물) 등을 수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국가의 권한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녹읍주나 식읍주는 대부분이 진골귀족들이었고,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권한을 이

용하여 수조권뿐만 아니라 역역과 공부에 대한 수취권도 잠식해 들어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대체로 자신의 연고지에 지역을 할당받고, 또한 세습이 가능한 식읍쪽이 훨씬 더 유리한 위

치에 있었을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통일신라시대'의 녹읍과 식읍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해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첫째, 신라시대 식읍을 하사한 예는, 법흥왕 19년(532년) 금관국(가야)의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해오자 그 나라를 식읍으로 내린 것과, 삼국통일 직후 김유신과 김인문에게 식읍을 내

려 준 정도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식읍이 통일신라의 전체 경제구조상에서 지니는 비중은

크지 않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둘째, 녹읍은 통일신라기에 일정 기간 동안 존속하지 않았습니다. 즉, 신문왕 9년(689년)에

폐지되어 경덕왕 16년(755년)에 부활될 때까지의 기간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통일신라시대의

녹읍이라고 하면 대체로 경덕왕 이후의 녹읍('후기녹읍')을 가리키는 셈이 되는데,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식읍과 녹읍을 비교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 녹읍과 식읍, 특히 녹읍은 단순히 그것만을 별개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전체의 경제

구조 속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관료전이나 녹봉(세조, 월봉 등) 등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

할 때 녹읍에 대한 이해는 훨씬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 위원회 홈페이지

의 <한국사연구휘보>에서 관련 논문들을 검색하여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각저총

http://toshop.or.kr/kogooryu/9.htm


 

 

 

고구려고분벽화(안악 3호분)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B0%ED%B1%B8%B7%C1%20%B0%ED%BA%D0%20%BA%AE%C8%AD&sort=0&c=1&qt=df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B0%ED%B1%B8%B7%C1%20%B0%ED%BA%D0%20%BA%AE%C8%AD&c=4&sort=0&qt=df&fr_res=0&to_res=0

http://www.goguryeo.org/murals/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龍順面) 유순리(兪順里)에 있는 고구려시대 벽화고분. 북한 국보 제28호.

북한의 지정 명칭은 ‘하무덤’이다. 1949년에 발굴 조사

357년(고국원왕 27)

널방[玄室] 안에 진(晉)나라 때 사경체(寫經體)로 쓴 묵서(墨書)가 있어 이 고분이 357년(고국원왕 27)에 조성된 한국 최고(最古)의 벽화고분임이 밝혀졌으며 고구려 미술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벽화이다.

앞방 서쪽 벽에는 앞서 말한 묵서가 있고, 남쪽에는 ‘전리(戰吏)’라는 붉은 글씨와 깃발을 든 7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으며, 서쪽 옆방의 좌우 벽에는 각각 칼을 짚고 서 있는 한 사람씩의 그림과 그 위에 붉은 글씨로 ‘장하독(帳下督)’ 이라고 쓰여 있다. 남쪽 옆방 벽에는 이 무덤의 주인인 동수와 동수 부인이 시녀들을 거느리고 각각 가마 위에 앉아 있는 호화로운 그림이 있으며, 또한 이 동수묘에서는 절대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이 발견되었다.

이 명문에서 보인 “永和十三年”은 동진의 연호로서 서기 357년이며 낙랑 옛땅의 중국계 주민들이 해상교통을 통하여 강남의 동진과 연락을 가지고 동진의 연호를 쓰고 있음을 말하여주고 있다. 동수묘의 주인공인 동수는 326년(미천왕 27) 에 랴오둥에서 고구려로 귀투한 무장이며, 357년(고국원왕 27)에 죽어서 안악 유순리에 묻힌 것이다.

결국, 연대가 확실한 가장 오래된 고구려의 고분벽화인 동수묘는 랴오둥지방에서 넘어온 동수의 무덤이며 그것은 중국의 한.위진대의 벽화고분의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고구려 영토 안에 세워진 최초의 중국계 벽화고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묘실 평면·모줄임천장·돌기둥·벽화내용 등 여러 면에서 그뒤 고구려 벽화고분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것이며 고구려 벽화고분의 발생과정에서 중국벽화고분과 고구려벽화고분을 연결하는 과도기적 존재라 할 수 있다.


 

 

3) 농민의 경제 생활


 

 

 

하호

http://100.naver.com/100.php?id=185355

본래 중국에서 일반민 가운데 소작을 위주로 하는 가난한 농민을 뜻하는 용어였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삼국의 국가체제가 정비되기 이전인 1~3세기 무렵 한반도의 상황을 서술하면서, 읍락사회 일반구성원들을 자신들의 하호와 비슷한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당시 읍락사회는 지배자인 수장(首長)과 호민(豪民)들이 지배계층을 이루었고, 일반민인 하호와 천민인 노비가 피지배계층을 이루었다. 하호는 독립된 자기경영을 유지하지 못한 채 경제적으로 읍락사회에 예속되었고, 국가의 공민(公民)으로 인식되지도 않았다. 그 결과 호민층의 인신적 지배와 가혹한 수탈로 인해 중국인들이 보기에 마치 노비와 같은 존재로 인식될 정도였다. 만약 외적이 침입하면 읍락사회가 독자적으로 싸웠는데, 이때 하호는 병사들에게 음식물을 제공하고 물자를 운반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하호는 자신이 속한 읍락사회가 처한 위치에 따라 다양한 존재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고구려나 부여와 같이 상대적으로 선진적인 지역의 하호는 발달된 생산조건과 정치체제의 진전으로 비교적 나은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옥저나 동예와 같이 다른 집단의 지배를 받고 있는 지역에서는 호민층에게 당하는 수탈 이외에도 인근의 종주국에 보낼 공물 부담까지 모두 하호에게 전가시킴으로써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었다. 생산도구의 발전에 따른 생산력의 증가로 개별가호 단위의 경영능력이 진전되면서 공동체적인 읍락사회는 급속히 해체되었다. 호민층은 빈번한 전쟁 과정에서 몰락하거나 일부는 새로이 등장하는 국가에 포섭되어 지방세력으로 전화되었다. 반면에 하호는 개별적인 생산능력의 증대로 읍락사회에 얽매이지 않은 채 점차 독립적인 농업경영이 가능해짐에 따라, 삼국시대에는 조세, 요역, 공물의 의무를 담당하는 공민(公民)으로 전화되어 정치적 지위가 향상되었다.


 

 

 

1-2. 남북국 시대의 경제적 변화


1) 통일 신라의 경제 정책

 

 

 

민정문서

http://myhome.naver.com/gulliber/%C5%EB%C0%CF%BD%C5%B6%F3%B9%CE%C1%A4%B9%AE%BC%AD.htm

http://mtcha.com.ne.kr/korean-photo/sinra/photo7-minjungmunsu.htm

http://rose0.kyungpook.ac.kr/%7Ez981018/kohis/sinra.htm

http://dugok.x-y.net/kor-his/pw/sinrajangjuk.htm


※ 통일 신라 민정문서 - 1933년 일본 동대사 정창원(東大寺 正倉院)에서 발견된 것으로 신라 장적, 또는 촌락문서라고도 부른다.  西原京(지금의 청주) 부근의 4개 촌락에 대해 기록한 것이 남아 있는데, 통일신라시대 촌락의 구체적인 상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로 고대 사회, 경제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고을의 사해점촌(沙害漸村)을 조사해 보니, 지형은 산과 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을의 둘레는 5,725보(步), 공연(孔烟 :戶)의 수는 합하여 11호가 된다.  계연(計烟)은 4, 나머지 3이다.  이 가운데 중하연(仲下烟) 4호, 하상연(下上烟)2호, 하하연(下下烟) 5호이다.  마을의 모든 사람을 합치면 147명이며, 이 중 3년 전부터 살아온 사람과 3년 간에 태어난 자를 합하면 145명이 된다.  정(丁) 29명(노예 1명 포함), 조자(助子 : 15 ∼ 19세) 7명(노예 1명 포함), 추자(追子 : 10 ∼ 14세) 12명, 소자(小子 : 1 ∼ 9세) 10명, 3년 간에 태어난 소자 5명, 제공(除公 : 60 ∼ 69세) 1명이다.  여자는 정녀 42명(노비 5명 포함), 조여자 9명, 소여자 8명, 3년 간에 태어난 소여자 8명(노비 1명 포함), 제모 2명, 노모(老母 : 70세 이상)1명 등이다.  3년 간에 이사온 사람은 둘인데, 추자 1명, 소자 1명이었다.

  가축으로는 말 25마리가 있으며, 전부터 있던 것 22마리, 3년 간에 보충된 말이 3마리이다.  소는 22마리인데, 전부터 있던 것 17마리, 3년 간에 보충된 소 5마리이다

  논(畓)은 전부 102결(結) 2부(負) 4속(束)인데, 관모전(官謨田)이 4결, 내시령답(內視令畓)이 4결, 연수유답(烟受有畓)이 94결 2부 4속이며 그 중 촌주가 그 직위로 받은 논이 19결 70부가 포함되어 있다.  밭은 전부 62결 10부 5속인데 모두 연(烟)이 받은 것이다.  마전(麻田 : 삼베밭)은 전부 1결 9부이다.

  뽕나무는 1004그루인데, 3년 간에 심은 것이 90그루, 전부터 있던 것이 914그루이다.  잣나무는 모두 120그루이고, 3년 간에 심은 것이 34그루, 전부터 있던 것이 86그루이다.  호도나무는 모두 112그루이고, 3년 간에 심은 것이 38그루, 전부터 있던 것이 74그루이다


 



* 민정 문서를 통해 알 수 있는 당시의 상황을 정리해 보자.

  작성 : 촌주가 3년마다 작성, 3년 동안의 변동 사항을 상세히 기록

  목적 : 노동력과 생산 자원을 파악하여 조세 수취와 부역 징발의 근거 자료로 삼음

  파악한 내용 : 촌의 면적, 호수, 인구수, 가축수, 토지 결수

  호의 편성 : 노동력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9등급으로 파악

              토지보다는 노동력을 조세 수취의 기준으로 중요시 함

  인구의 파악 : 남녀, 연령에 따라 6등급으로 파악

                노비는 존재하지만 노비의 수가 많지 않아 노예제 사회로 볼 수 없음

  토지 : 각 촌락의 인구수와 토지 결수가 비례하지 않음

         (국가에서 농민들에게 정전을 지급한 사실이 확인되지 않음)


 

 

 

왕토사상

http://blog.naver.com/janges92.do?Redirect=Log&logNo=6946600

http://yuksa.new21.org/data/6kuk33.html


신라에서는 ‘모든 토지는 왕토(王土) 아닌 것이 없고, 모든 국민은 왕의 신하 아닌 것이 없다’라고 하여, 모든 국토는 왕의 토지이고, 모든 국민은 왕의 신하라는 전제적인 왕토 사상이 있었다.

그렇지만 실제로 이러한 왕토 사상은 어디까지나 관념적인 소산물로서 나온 것이지, 모든 토지와 국민이 국왕에게 예속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자기 스스로의 토지를 소유하고 경작하여, 국가에 대하여 조세(租稅), 공부(貢賦),역역(力役)을 부담하였다.


 

 

 

2) 통일신라의 경제 활동

 

 

 

청해진

http://211.43.16.1/Cy_edu_source/6/1/%C0%E7%B9%CC%C0%D6%B4%C2%20%B0%ED%B4%EB%BB%E7%20%C0%CC%BE%DF%B1%E2/menu1-5-3.htm

http://www.mtcha.com.ne.kr/korea-term/sinra/term61-chunghejin.htm

통일신라 흥덕왕 때의 장군 장보고(張保皐)가 해상권을 장악하고 중국 ·일본과 무역하던 곳이다.  장보고는 일찍이 당(唐)나라의 쉬저우[徐州]에 건너가 무령군소장(武寧軍小將)이 되었으나, 신라에서 잡혀와 노비가 된 동포들의 참상을 보고 분개, 벼슬을 버리고 귀국하여 해적들의 인신매매 행위를 근절시키기 위하여 청해(淸海:莞島)에 군영(軍營)을 설치할 것을 왕에게 요청하였다. 이에 왕은 쾌히 승락하고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大使)에 임명하였다(828).


  장보고는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중국과 일본 해로의 요해처인 청해에 진(鎭)을 설치하고 가리포에 성(城)을 쌓아 항만을 보수, 전략적 거점을 마련하였다. 일본의 승려 엔닌[円仁: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최훈(崔薰)이라는 인물이 청해진 병마사(兵馬使)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 서남 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한 그는 당시에 성행하던 중국의 해적을 소탕하는 한편,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들어 동방무역의 패권을 잡게 되었다.


   결국 청해진은 중국에는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 일본에는 회역사(廻易使)를 보내는 등 중계무역장으로서 서남 해로의 요해처 구실을 하였다.


  장보고는 중앙정부의 권력전에도 관여하여 왕위계승전에 패한 김우징(金祐徵)과 김양(金陽)을 받아들인 뒤 지원군을 보내어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즉위시켰다. 그라하여 신무왕은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봉했으며 신무왕의 아들로서 뒤를 이어 즉위한 문성왕에 의해 진해장군(鎭海將軍)에 봉해지는 등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즉, 당시 흥덕왕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희강왕은 삼촌인 균정(均貞)과 왕위 다툼을 하다가  시중(侍中) 김명(金明:민애왕), 아찬(阿粥) 이홍(利弘) 등의 도움으로 삼촌을 받든  아찬 우징(祐徵)과 조카인 예징, 김양 등을 궁궐에서 다투었는데,김양은 화살에 맞아 우징(祐徵)과 함께 도망하고, 균정은 살해되었다. 우징은 장보고에 몸을 의탁하였다. 그리하여 김명을 상대등(上大等), 이홍을 시중에 임명하여 정권을 맡겼으나, 838년 김명과 이홍이 반란을 일으켜 측근자를 살해하자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그리하여 민애왕이 즉위하자 김양(金陽)은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와서 먼저 와 있던 김우징을 만나 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했다. 장보고는 김양, 염장(閻長), 장변(張弁), 정년(鄭年), 낙금(駱金), 장건영(張建榮), 이순행(李順行)으로 하여금 군사 5,000명을 이끌고 김양과 함께 경주로 진격하게 했다. 이들은 중앙군을 물리치고 경주에 침입하여 민애왕을 살해하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딸을 문성왕의 차비(次妃)로 들이려고 한 시도가 진골귀족의 반대로 무산되자 그는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가, 846년(문성왕 8) 중앙정부에서 보낸 자객 염장(閻長)에게 살해당했다. 그뒤 이창진(李昌珍) 등의 잔여세력에 의해 일본에 무역선을 보내는 등 활동을 계속했으나 851년에 청해진을 파하고 그 주민을 벽골군(碧骨郡:지금의 김제)으로 이주시키면서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청해진이 설치된 곳은 완도 본도에서 170m 정도 떨어진 장도(將島)인데 섬 둘레를 외성과 내성으로 축성한 흔적과 경사가 완만한 섬의 남서쪽에는 목책(木冊)을 설치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현재 사적 제308호 '장도청해진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방

http://www.topianet.co.kr/topia/6/6sh/6sh010402-3-1.htm

http://mtcha.com.ne.kr/korea-term/sinra/term43-sinrabang.htm

통일신라시대에 당(唐)나라에 있던 신라인의 집단 거류지이다. 삼국통일 후 신라의 공(公) ·사(私) 무역이 발달하면서 신라인의 해상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신라인들은 당나라의 해안지대인 등주(登州) ·양주(楊州) ·초주(楚州) 지방에 이주하여 집단거류지를 이루었는데 이를 신라방이라 하였다.


  즉, 그들은 신라와 해상교통이 빈번했던 산둥[山東] 반도 남쪽의 해안 일대와 화이허 강[淮河] 하류에 이르는 지역에 주로 거주하면서 신라인 촌락을 형성했다. 이 가운데 상공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은 주로 추저우[楚州]와 롄수이[漣水] 등의 도시에 모여 살았는데, 당에서는 그들이 거주하던 지역을 '신라방'이라 하여 자치를 허용해주었다. 이곳에는 '구당신라소'(勾當新羅所)라는 관청이 있었으며, 그곳의 장(長)인 총관(總管)이 행정을 관장했다. 그 아래에 교섭업무를 주관하는 역어와 전지관(專知官)이라는 관리가 있어 신라인과 관련된 사무를 전담했다. 한편 산둥 성[山東省] 원덩 현[文登縣] 칭닝 향[淸寧鄕] 츠산 촌[赤山村]의 신라인 통할 관청인 구당신라소의 장은 압아(押衙)라 하여 추저우와 롄수이에 있는 신라소(新羅所)의 장을 총관이라 한 것과는 다르게 불렀다. 그러나 압아가 총관과 거의 대등한 위계(位階)를 가졌으므로 그들은 같은 지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곳에는 장보고(張保皐)가 세운 신라 사원인 법화원(法花院)이 있었다. 이 사원에는 승려 42명과 비구니 3명, 노파(老婆) 2명이 항상 거주하고 있었고, 신라인 신도가 250명에 이르렀다. 신라방에 거주하던 신라인들은 주로 상공업에 종사했고, 일부는 그와 관계된 수부(水夫)나 공인(工人)으로 생활했으며,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특히 뛰어난 항해술을 바탕으로 국제무역을 활발히 전개했는데, 양저우[揚州]·밍저우[明州]·쑤저우[蘇州] 등지를 중심으로 아랍·폐르시아 상인들과도 교역했고, 일본과 신라 본국을 왕래하면서 해상무역을 주도했다.


 


 

 

 

5) 발해의 경제 발달

 

 

 

발해관

http://100.naver.com/100.php?id=703258

발해에서 외국으로 통하던 주요 교통로는 5개가 있었다. 이 중 두 개가 당과의 교통로였는데 하나는 육로였고, 다른 하나는 압록강을 거쳐 당의 등주부(登州府)로 통하던 압록조공도였다. 발해관은 압록조공도의 중간기착지였던 등주부 안에 있었다.

838년 당나라로 건너갔던 일본 승려 엔닌[圓仁]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보면 발해관은 등주부의 성 남쪽에 있는 길의 동편에 신라 사신의 숙소인 신라관과 나란히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