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정치 상황의 변동


4-1. 근대의 세계


 

 

 

절대왕정

http://w1.hompy.com/bootangas/sijak/2%C7%D0%B3%E2/2-1/%C0%FD%B4%EB%BF%D5%C1%A4/me2.htm

http://www.jjulim.com/tamgu/tam13.htm

http://100.naver.com/100.php?id=135335

http://blog.naver.com/iyell/140017592360


전제군주제·절대왕정(絶對王政)·절대주의라고도 부른다. 루이 14세의 '짐(朕)은 곧 국가이다'라는 말이 보여 주듯이 모든 것은 오로지 군주 한 사람의 전단(專斷)에 맡겨져 있으므로, 국가기관은 다만 군주의 권력집행기관에 지나지 않는다. 오랫동안 동양 여러 나라에서 행해졌던 아시아적 전제, 혹은 17∼18세기 절대주의시대의 유럽 여러 나라에서 행해졌던 군주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권력의 기원과 그 정당화 원리에 따라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군주의 독재적 권능이 신의(神意)에 바탕을 둔다고 하는 신정적(神政的) 군주제, 국가라는 큰 가족의 가장인 지위에 바탕을 둔다고 하는 가부장적(家父長的) 군주제, 영토 및 신민을 자기의 세습재산으로 보는 가산적(家産的) 군주제가 있다. 18세기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아 정치의 합리화, 국가의 개조를 꾀하여 절대왕정을 폈던 계몽전제군주제도 한 형태이다.


 

 

 

산업혁명

http://211.57.209.131/technote/read.cgi?board=oyms105&y_number=545&nnew=2

http://home.ewha.ac.kr/%7Echonglee/hilite/98f/world/9.html

http://www.gwl.cau.ac.kr/Present/newcorp/tsld017.htm


 

 

 

중상주의

http://blog.naver.com/drunkdriver/60014740838

http://blog.naver.com/ramsses00/40004136270


독립과학으로서 체계를 갖춘 경제학, 즉 자본주의의 생산양식과 그것에 조응하는 생산 및 유통의 여러 관계를 객관적, 법칙적 그리고 총체적으로 해명하는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은 Adam Smith에 의해 그 골격을 형성하고 F. Quesnay는 특수한 환경 아래에서 그의 직접적인 선구자이기도 하다. 스미스는 영국에 있어서 산업혁명의 개시를 배경으로 갖고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생산 양식으로서 확립되어지려 하였던 시기를 대표하는 것에 의해 그의 학문체계를 수립할 수가 있었다. 스미스 이전의 근대사회는 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이 지배적으로 되기까지의 시기, 봉건제 말기에 성립한 독립 생산자층이 그들의 생산수단을 상실하여 프롤레탈리아로 되고 이리하여 자본의 성립을 가능하게 하는 시기, 즉 자본의 본원적 축적(=원시적 축적)의 시기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과학으로서 경제학에 있어서도 분석 대상이 그때까지는 아직 성숙해 있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이 시기는 결국 여러 개념의 萌芽的 形成期에 머무르고 있었다. 중상주의란 이 원시적 축적기의 경제 이론이며 소박하고 현상적이기는 하지만 경제과학 발생사의 단계로서 학설사사상에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근세에 있어서 경제학의 역사는 중상주의에서 시작된다고 하는 것이 통상이다. 중상주의를 낳은 시대는 경제사적으로는 근대 자본제사회의 성립기이며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 절대군주국가의 시대이다. 욕구충족을 기초로 하였던 중세 봉건경제사회에 있어서의 생산은 자급자족하기 위하여 또는 봉건영주를 위해 행하여졌고 생산자는 상호의 생산물의 과잉분을 교환하였기 때문에 상품생산을 목적으로 한 조업은 부진한 상태였다.


 

 

 

청교도 혁명

http://210.204.217.1/social/social-2/2/2/22-1/ja14.htm

영국의 절대주의는 튜더왕조 최후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 때에 최고조에 달하였다. 그 치세 중에 이미 청교도의 국교회 비판이나 의회에서의 절대주의 비판 등이 있었지만, 당시의 절대주의는 별다른 파탄을 보이지 않고 다음의 스튜어트왕조로 넘어갔다. 그런데 제1대 왕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출생으로서 영국의 의회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의회 그 자체를 부정하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주창하였다. 한편 국민측에서는 법률가 E.코크가 ‘법의 우월’을 주장함으로써, 왕은 법 위에 선다는 제임스 1세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그리고 의회는 양측의 충돌 장소로 되어 어수선하였다.


다음 왕 찰스 1세는 절대주의를 한층 더 강화하여 의회의 승인도 없이 관세를 징수하고, 선박세를 부과하였으며, 헌금과 공채(公債)를 강제해서, 응하지 않는 자를 투옥하였다. 또한 병사를 민가에 무료 숙박시키고, 군법을 일반인에게까지 적용시켰다. 의회에서는 1628년 코크 등이 중심이 되어 인민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권리청원’을 기초하여 왕에게 제출하였다. 이 때문에 29년 의회가 해산되고, 왕은 40년까지 11년간이나 의회 없는 정치를 하여야만 하였다. 왕은 측근에 W.로드 대주교와 Th.W.스트래퍼드백(伯)을 두고 성실재판소(星室裁判所)와 고등종무관(高等宗務官) 재판소 등을 이용하여 청교도를 탄압하고, 의회 없이 수입을 얻기 위하여 국왕의 대권을 남용하였다. 그런데 왕은 장로파가 우월한 스코틀랜드에 국교를 강요하려 함으로써 전쟁의 위기를 자초하고, 전비를 얻기 위하여 40년 소위 장기의회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명예혁명

http://www2u.x-y.net/cgi-bin/technote/read.cgi?board=cs_73&y_number=100&nnew=2

1. 배경


크롬웰에게 쫓겨 프랑스에서 궁핍한 망명생활을 하던 찰스 왕자는 런던에서 온 사신으로부터 자신이 찰스 2세로 왕위에 추대된다는 소식을 접하자 자못 흥분된 마음을 감추고, 고국에 돌아가면 적당히 의회의 눈을 피하며 향락을 누리겠다는 안락한 생각을 했다.


그의 이러한 생각들은 1660년 5월 25일 도버에 상륙할 때 그의 옆에 있던 망명시절의 의논 상대자인 클래런던 백작(본명은 에드워드 하이드; Edward Hyde)을 통해 펼친 찰스 2세의 정책에서 알 수 있었다.


클래런던 경은 먼저 크롬웰을 따르던 반역자들에게 유화책을 썼는데, 이에 대해 왕정 복고를 바라던 일부 귀족을은 격분했지만 크롬웰을 지지하던 젠트리들이 급속히 군주제로 흡수되어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것이 많았다. 다음으로는 그는 군인들의 밀린 봉급을 완전히 지불하고 이들을 해산시킴으로써 급진적인 파벌 형성을 차단했다. 그리고 1661년 의회를 소집하여 왕은 의회 활동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선포함으로서 의회와의 조심스런 한계를 지켜 나갔다. 이 의회는 18년갠 지속되었고, 그러는 동안 정당도 생겨났다. 도 클래런던 법전을 통해 국교의 신봉을 강행하여 지방 귀족들의 지지도 얻었다.


이렇게 찰스를 잘 보필하던 클래런던 경도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첫째, 자신의 딸을 찰스의 동생인 제임스 왕자와 결혼시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다가 여론의 반대에 부딪친 것과, 둘째 찰스 2세와 포르투갈의 왕녀인 캐서린과 결혼하게 그가 주선했는데 그녀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여인이었기에 이것도 구설수에 오르게 되었다. 셋째로, 런던내의 페스트 확산과 1666년의 런던의 2/3가 타 버린 대화재 사건도 클래런던을 궁지에 몰리게 만들었다. 넷째로, 네덜란드 선박이 템스 강 깊숙한 곳에 있는 채텀 지역까지 들어와 영국 선박에 불을 지른 사건이 있었는데, 비록 1667년 브레다 조약을 통해 네덜란드와 강화 조약을 맺고 아메리카 내 뉴욕, 버지니아, 뉴잉글랜드를 얻었지만 클래런던이 이 땅들을 얻기 위해 고의적으로 네덜란드의 침략을 허락했다는 소문이 나서 국민들을 기만했다는 생각하에 의회는 그의 추방을 요구했다.


이렇게 하여 클래런던이 정계에서 물러나고 찰스 2세는 다음 정치를 이끌어간 사람을 개인이 아닌 여러 명을 추천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름 첫글자를 따서 '카발(CABAL: Clifford, Arlington, Buckingham, Ashley, Lauderdale)이라 불렀다.


한편, 국왕은 비밀리에 조심스럽게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1670년에 도버 조약을 맺고 카톨릭을 재건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유는 루이 14세처럼 전제 군주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왕의 움직임을 심정적으로 파악한 의회가 모종의 태도를 취했다. 특히 샤프츠베리 백작(에슐리, Ashley)이 이끄는 서부 청교도 일파는 비국교도인들과 상인 계층을 이끄로 휘그(Whig)란 의회 내 단체를 만들었다. 이들은 만약 왕이 카톨릭적인 반동 자세를 취할 때에는 그를 하야시키면서라도 영국의 신교를 지켜야 한다는 개혁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지주나 국교도가 중심이 된 아일랜드 해적 이름에서 따 온 토리(Tory)란 단체는 왕권은 어떻게 해서든지 인정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결과, 의회 내에 왕에 대한 의혹으로 인해 2개의 정당이 생겨나게 되었다.


1679년 17년만에 처음으로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이것은 의회 정치가 비로소 그 본모습을 나타내는 사건으로 기록된다. 이때 처음으로 인신 보호율이 개정되어 법에 의하지 않으면 잉글랜드 국민은 누구나 투옥되지 않는다는 원칙을 확고하게 함으로써 의회 정치로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되었다. 이러한 의회의 움직임을 간파한 찰스는 자신의 의지를 표현했다가는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서 최후의 순간까지 의회와 균형있는 자세를 보이면서 호화스런 자신만의 생활을 영위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2. 경과


찰스 2세는 호화스런 생활을 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막상 왕위를 이를 후사가 없어 그의 동생인 제임스에게 왕위가 넘어가게 되었다. 제임스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휘그당은 그가 철저한 카톨릭주의자임을 들어 왕위에 오르는 것에 반대했으나, 토리당은 그래도 정통적인 왕위 계승자이니 어쩔 수 없으며, 의회가 이제 강력한 만큼 그렇게 왕이 자신의 의지대로는 하지 못할 것이라고 휘그당을 설득했다. 그 결과 토리당의 의견이 관철되어 제임스 2세(1685∼1688)가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제임스는 의회의 희망과는 달리 자신의 고집대로 정치를 펴나갔는데, 이것은 그 동안 잉글랜드가 피를 흘리며 만들어 놓은 정치 체제를 완전히 거꾸로 되돌려 놓는 것이었다.


첫째로, 절대 왕권의 표본인 상비군을 2만명이나 모집하여 그 힘으로 스코틀랜드에서 찰스 1세의 서자인 몬머스 공작이 일으킨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했으며, 둘째로 카톨릭주의자들에게 자유롭게 정치에 참여하도록 하는 심사율 폐지를 의회에 제출했다가 이것이 부결되자 왕권마능로 이것의 폐지를 선언했다. 셋째는, 문무의 모든 요직에 카톨릭계 장교나 관리를 임명했다. 넷째로, 주교를 등용하고 관료들도 카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했는데, 이에 신교 자유령을 공표하려던 캔터베리 대주교 및 7명의 종교인들을 런던탑에 투옥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다섯째로, 옥스퍼드의 맥덜렌 칼리지(Magdalen College)에 카톨릭 학장을 임명했고, 여섯째로, 1688년에 재혼한 왕비 마리 모데나(이태리 여인)가 제임스를 낳자 카톨릭계의 세습이 확실시되는 것 같았다. 이 밖에 아일랜드 카톨릭군을 잉글랜드에 끌어들이려는 조짐도 보였고, 프랑스에서 루이 14세에 의한 신교 탄압의 분위기가 잉글랜드에 전해지기까지 했다.



이 모두가 의회에게는 위기의 상황이 되었고, 마침내 토리당과 휘그당이 함께 그를 축출하기로 모의했다. 그 방법은 다행히 신교를 믿고 있는 제임스 2세의 두 딸 중 큰딸인 메리가 신교 국가인 네덜란드의 윌리엄 오렌지 공과 결혼하였음으로 그와 그녀를 제임스 2세 대심에 왕위에 올리자는 것이었다. 몇 차례의 초청장을 보낸 후, 1688년 11월 5일 윌리엄 오렌지 공은 드디어 결심이 서서 '자유로운 의회와 자유로운 신교 보호'란 구호 아래 토베이에 상륙한 후 런던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이때 런던의 어느 누구도 제임스를 옹호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결국 제임스는 프랑스로 망명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엇다. 이로써 역사상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정권이 바뀌게 되었는데, 영국 국민들은 이 사건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마음에서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이라고 한다.



3. 결과


찰스 1세의 외손이자 제임스 2세의 큰 사위인 윌리엄 오렌지 공이 무혈혁명에 성공한 후 외국인이라는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의회가 제안한 대로 그의 부인인 메리 2세(1689∼1694)와 함께 공동 통치를 선언하고 윌리엄 3세(1689∼1702)로 즉위했다. 그는 대륙적인 안목을 가진 인물로 네덜란드 통치 때부터 프랑스와 대립하고 있었는데, 잉글랜드에 들어와서도 대외적으로 세력 균형에 소신있는 정치를 펼쳤으나, 국내문제는 의회에 일임했다.


비록 의회는 윌리엄을 신용했지만 그도 세력이 커지면 전제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의회의 확고한 권리를 확보해 두려고 '권리장전(Bill of Right)'을 요구했다. 그 내용은 이미 헨리 헌장이나 대헌장, 권리 청원 등에서 열거한 바와 유사하다.


첫째, 국왕은 국가의 기본법을 침해하지 못하며, 둘째 모든 예산은 매년 의회 의결을 거칠 것, 셋째 군대에 관련된 봉급 문제, 군법 재판 등도 의회의 의결을 거칠 것, 넷째 3년에 한 번씩 의회가 소집되어야 하며, 소집된 의회는 3년 이상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러한 조항을 성문화하여 법으로서 왕권보다 우위에 둔 것이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왕은 의회안에 있는 자가 되었으며, "국왕은 군림하나 통치할 수 없다."라는 입헌군주제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4. 명예혁명은 진정 민중들에게도 명예로웠는가?


18세기 초반의 영국은 이제 산업혁명이 폭발적 분출을 눈앞에 두고 사회 도처에서 변화의 조짐이 꿈틀대던 시기이다. 그리고 그 변화를 주동하는 힘은 이미 상공업을 통해 재산을 축적한 신흥계층들로부터 나오고 있었고 자연히 전통적 기득권자들은 그들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하려고 했다. 종교적으로 보면 신흥상공업자들은 종교개혁의 세례를 받아 이른바 프로테스탄트를 형성하고 있었고, 구세력은 주로 전통적인 지주층으로 처음에는 카톨릭을 옹호했으나 국왕과 결탁하면서 영국 국교회를 지지해 왔다. 신흥세력은 의회를 세력기반으로 삼아 사사건건 국왕의 행태에 제동을 걸었다. 이 두 파의 파쟁은 급기야 1642년부터 1648년까지 피비린내 나는 내란을 초래하게 된다. 의회파는 크롬웰이라는 뛰어난 지도자의 통솔력에 힘입어 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한다. 이러한 정국변동을 통해 영국 정계는 영국 국교회를 지지하며 지주층을 기반으로 하는 보수파가 토리당으로, 프로테스탄트를 지지하며 의회정치를 주장하는 신흥세력이 휘그당으로 양분되었다.


한편 크롬웰의 내란 이후 국왕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는 어리석게도 영국 상황에서는 시대착오적인 카톨릭을 복구시키려고 시도했다가 양파로부터 공격당하는 처치에 몰리고 만다. 이렇게 해서 제임스 2세는 쫓겨나고 양 파는 네덜란드에서 윌리엄을 초빙하여 자기들 말을 잘 듣는 왕으로 옹립한다. 이것 이 1688년의 명예혁명이다. 의회에서 다수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휘그당은 다시는 국왕의 독재가 불가능하도록 문서로서 "국왕은 법의 집행을 정지시키지 못하며, 의회의 동의없는 조세 징수는 안된다."는 <권리장전>을 발표한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의회의 입법권, 의원의 면책특권, 언론의 자유 등이 모두 이때 영국의 의회가 국왕과의 투쟁속에서 만들어 낸 것들이다. 그러나 휘그당이 주도하는 정치개혁은 국민일반의 이해를 대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당시 신흥 상공업자들은 이미 경제적으로는 지배층의 지위에 오른 자들로 오로지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할 뿐이었다. 이를테면 국왕의 임의적인 세금징수를 가장 크게 문제삼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돈많은 자신들의 이해와 직결되는 문제였던 것이다. 당시 농촌에서 쫓겨난 몰락 농민들, 도시의 하층민들의 눈으로 보면 휘그당이나 토리당이나 다 가진 자들의 정파이고 서로 자기 몫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데 불과했다. 구두굽 높이 2mm의 차이 정도의 의미밖에는 없었던 것이다.(자료 출처 : http://www.kyoyon.co.kr/year/77.htm)



 

 

명예혁명(名譽革命, Glorious Revolution)


명예혁명은 1688년에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혁명이다. 이 혁명으로 제임스 2세가 물러나고,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가 공동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의회가 왕위 계승을 통제하고 왕권을 통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의회는 1689년에 로마가톨릭교도의 왕위 계승, 왕이 법률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권한, 평화시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과 의회의 동의 없는 세금 징수 등을 불법으로 명시했다.


1685년에 로마가톨릭교도인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제임스 2세는 공직 임명과 정책 결정에 가톨릭교도를 선호했다. 또 중도적이었던 찰스 2세와는 달리, 국민과 의회를 무시하고 밖으로는 굴욕적인 친프랑스 정책을 추구했다.


하지만 영국국민들은 꾹 참고 있었다. 그 이유는 제임스 2세의 딸이지만, 신교도인 메리 2세가 왕위를 계승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688년 6월에 왕비가 아들을 낳아 계속 가톨릭교도의  통치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지자, 의회의 주요 인사들이 메리 2세의 남편이며 네덜란드 총독인 오라네공 빌렘(윌리엄 3세)에게 잉글랜드를 침공할 것을 요청했다.


잉글랜드인은 오라네공이 자유를 회복하는 것을 도와주기를 원했다. 오라내공은 11월에 잉글랜드를 침공했고, 제임스2세는 프랑스로 도망쳤다. 의회는 오라네공과 메리 2세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공동 군주임을 선언했다.


이 두 사람은 몇 달 후에 스코틀랜드의 왕권도 가졌다. 잉글랜드에서는 혁명에 대해 거의 저항이 없었으나,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는 저항이 있어 진압해야만 했다.


국왕은 의회가 제출한 권리 장전(1689)을 승인하고, 의회의 입법권과 과세권을 승인하였다.

청교도혁명으로부터 시작된 국왕의 절대주의와 의회의 입헌주의 간의 장기간에 걸친 투쟁이 입헌주의 승리로 끝나고, 국가의 주권이 사실상 의회-곧 국민에게 귀속된 것이다.


이로써 민권과 왕권의 조화에 입각한 영국의 독자적인  입헌 군주제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청교도 혁명처럼 유혈을 수반하지 않고 수행되어, 이를 명예 혁명이라고 한다.


한편 영국은 다른 나라보다 일찍 정치적인 혁명을 끝내, 식민지 개척과 경제 발전에 힘쓰게 하여 산업혁명을 일으키게 하였다


 

 

 

미국의 독립혁명

http://www2u.x-y.net/cgi-bin/technote/read.cgi?board=cs_73&y_number=102&nnew=2

영국 본국의 가혹한 지배와 중상주의정책(重商主義政策)에 반항하여 미국 13주(州) 식민지가 합력하여 독립을 달성한 전쟁과 식민지 내부의 사회개혁을 포함한 혁명. 이 혁명은 영국 본국으로부터 분리 독립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며, 사회개혁은 그에 따라 행하여진 것으로, 후의 프랑스혁명 등과는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보수적인 정치형태를 타도하고 보다 민주적인 정치형태를 수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혁명은 식민지의 본국에 대한 반란이며, 또한 같은 영국인 사이의 싸움으로서 내란으로 볼 수도 있다.



1. 원인


1760년 조지 3세가 국왕이 되기까지는 영국 본토와 식민지 사이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과거 1세기 이상 식민지는 각각 식민지의회를 가지고 있었고, 자치도 허용되어 있어 식민지의 영국인은 본국의 영국인과 거의 동등한 권리를 행사하였다. 그러나 조지 3세의 식민지 정책은 매우 가혹한 것이었고, 따라서 식민지인의 본국에 대한 항쟁은 종래의 권리·자유·특권을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63년 7년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나고 파리조약에 의하여 미국 대륙에서 프랑스 식민지가 소멸한 것을 계기로, 영국은 캐나다를 포함한 미국 식민지 전체를 본국의 통제하에 두고자 하였다. 그 첫번째 시도가 63년에 발표된 국왕선언(國王宣言)이었다. 이 선언에 따르면 식민지인은 인디언과 통상을 할 수 없으며 동부의 앨레게니 대지(臺地) 서쪽으로 이주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으나 이것은 매우 비현실적인 정책이었다. 치안유지와 법률 시행 감시를 위하여 영국군이 상주하고, 그것을 위한 경비분담이 강요되었다.


영국 본토의 다음 정책은 중상주의 강화 겸 세입증가를 위한 정책으로서 이것도 식민지인의 이해와 대립되고, 종래의 관행(慣行)을 깨뜨리는 처사였다. 그렌빌 내각은 지금까지 묵과해온 밀무역(密貿易)의 단속을 강화하고 관세징수를 엄중히 시행하고자 64년 설탕조례(條例)를 시행하였다. 다시 65년에는 인지조례(印紙條例)를 제정하였는데, 미국의 상인·저널리스트·변호사·목사 등 모든 계층이 ‘대표(代表) 없는 곳에 과세(課稅) 없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그것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66년 인지조례는 철폐되었으나 타운젠드 제법(諸法)이 이에 대신하게 되자 식민지인들은 본국의 모든 과세에 반대하였다. 65년에 제정된 군대숙영법(軍隊宿營法)에 대한 식민지인의 반감은 70년의 보스턴학살사건을 불러일으켰다. 72년 청원에 의하여 어려움을 제거하려는 방법이 효과도 거둘 수 없음을 알게 되자, 식민지인들은 각지에 통신위원회를 설치하고 연락을 취하면서 비합법의 반항운동에 들어갔다.


74년의 보스턴 차사건(茶事件)에 대하여 본국이 보스턴항(港) 봉쇄, 매사추세츠 식민지의 자치권 정지 등을 포함하는 징벌적인 여러 법을 부과하게 되자 식민지 쪽은 그것을 ‘참을 수 없는 법(法)’으로 규정, 버지니아의 제창으로 제1회 대륙회의가 소집되었다. 여기서 ‘권리와 호소(呼訴)의 선언’이 채택되고, 국왕에게 63년 이후 취하여진 탄압조치의 철회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 해 영국의회는 퀘벡조례를 제정하고, 캐나다 서쪽 지역을 확대, 이 지역의 프랑스인을 위하여 가톨릭교를 승인하였다. 식민지인들에게 이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영국국왕이나 의회는 식민지에 새로운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였다. 식민지에는 자치가 행하여지고, 자유가 대폭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인은 자기들의 자유가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 경과


1775년 4월 보스턴의 서쪽 교외 렉싱턴과 콩코드 부근에서 최초로 영국군과 급진파 사이에 무력충돌이 있었는데, 이것으로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5월에 제2회 대륙회의가 서둘러 소집되고, 식민지인의 권위 아래 하나의 정부를 수립하며 워싱턴을 식민지군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군사적으로 약세인 식민지군이 승리를 했는지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다. 최초에는 해군은 전혀 없었고 대부분의 병사가 훈련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장기전(長期戰)에 견뎌낼 수 있는 군대로 만들기 위해 워싱턴은 어려운 전투를 계속하였다. 7년 동안에 식민지군의 병력은 대체로 40만에 가까워졌으나 워싱턴은 한꺼번에 2만 1000 이상의 병력을 가져보지 못하였다.


혁명전쟁 당시 식민지인의 1/3은 본국 지지파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76년 1월 T.페인의 팜플렛 《커먼센스》가 나왔는데, 그는 여기서 국왕과 군주제(君主制)를 공격하고, 식민지인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이 팜플렛은 식민지인의 독립에 대한 결의를 굳게 하였다. 이처럼 식민지인의 높아가는 여론을 배경으로 하여 76년 7월 4일 제퍼슨이 기초(起草)한 독립선언이 대륙회의에서 채택되었다. 그는 생명·자유·행복을 추구할 자유권을 지키기 위하여 계약에 의해 정부를 세우며, 그 정부가 기본 인권을 범할 때 국민은 그 정부를 전복할 권리를 보유한다고 혁명권(革命權)을 주장하고, 국왕의 폭정을 열거하였다.


독립선언은 독립 달성에 필요한 군사적 원조를 얻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었다. 특히 프랑스는 영국과의 식민지 쟁탈전에 패하여 식민지 제국(帝國) 부활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므로, 혁명 원조의 정당화를 위하여서도 독립을 권고하였다. 전쟁 중 식민지측은 재정의 곤란으로 통화를 증발(增發)하고, 공채(公債)를 발행할 수밖에 없었으나 B.프랭클린, J.애덤스의 활약으로 프랑스·에스파냐·네덜란드 등지로부터 돈을 빌려올 수 있었다.


영국의 작전은 허드슨강에서 식민지를 양단하는 것이었으나, 식민지군은 77년 새러토가전투에서 영국군을 격파하였다. 이 승리는 독립전쟁의 대세를 일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는 새러토가전투를 계기로 식민지측의 승리를 예상하고, 78년 미국·프랑스 동맹을 맺었다. 다른 유럽 제국도 80년에는 무장중립동맹을 조직하여 영국을 견제하였다. 무력하였던 식민지군 해군도 80년 이후에는 프랑스 군함의 응원으로 영국군과 대항하게 되었다.


식민지군은 자체의 과감한 전투력과 함께 외국의 원조로 영국군을 추격, 81년 육·해군이 요크타운을 포위하여 10월 영국군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사실상 독립전쟁은 끝났다. 영국측은 전쟁에 지쳐 82년 평화를 원하게 되었으며, 교전 각국의 의도가 일치하지 않아 강화조약은 시간이 걸렸으나 83년 파리조약이 성립되었다. 영국은 이 조약에서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서쪽은 미시시피강, 남쪽은 동·서 플로리다, 북쪽은 오대호(五大湖)까지 이르는 광대한 미국영토가 확정되었다.



3. 결과와 의의


혁명전쟁을 치르는 동안 영국국왕을 지지하던 많은 식민지인이 추방되어 영국 본토, 캐나다 또는 서인도 제도로 도피하였다. 그들의 재산은 몰수, 재분배되었다. 또 이것을 계기로 북부 여러 주는 노예를 해방하고, 장자상속제(長子相續制) 등의 봉건적 잔재를 폐지하고, 많은 주에서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게 되었다.


독립혁명군에 의하여 공화제(共和制)가 실시되었으며, 사람들은 보다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혁명에 의한 사회개혁은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으며, 그 뒤에도 계속되어 19세기 전반에는 남자보통선거도 일반적으로 시행되고 잭소니언 데모크라시 시대를 맞아 독립혁명·사회혁명의 이상(理想)도 달성되었다.


 

 

 

프랑스 혁명

http://blog.naver.com/noxknoker/11542908

머리말

우리는 흔히 프랑스 혁명을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중시한 사회 혁명으로 알고 있다. 많은 역사학자들도 프랑스 혁명을 근대사회 성립과정의 분수령이 된 혁명, 자유와 평등을 실현시키려던 반봉건적이고 반귀족적인 혁명으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생각들이 프랑스 혁명의 단편적인 부분이라 생각된다.

역사란 그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듯이 프랑스 혁명 또한 자유와 평등을 중시한 혁명이 아닌 다른 측면에서 재해석 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먼저 프랑스 혁명의 원인과 전개 과정 결과를 살펴보고 프랑스 혁명에 대한 재해석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Ⅰ.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배경

프랑스 혁명은 위대한 이념적 배경에 의해서 발생하였다. 혁명은 사회계층 그 자체보다는 이념에 기반을 두었던 인간적인 요소가 혁명을 일으킨 근본적인 힘 이였다.

18세기 프랑스에서는 개혁의 기운이 고조되었고, 시민들은 계몽 절대 군주에 반대하여 이성, 행복, 관용을 열망하였다. 이때 전파된 사상이 계몽사상 이었다.

“프랑스 혁명은 계몽사상에 기반을 둔 한 세기 동안의 꿈 이었다”라고도 평가가 될 정도로 계몽사상에서 제시된 이념을 현실에 적용했던 것이 프랑스 혁명이다.

계몽사상은 18c세기의 동유럽 쪽에서 일어났던 사상인데 동유럽인 들이 서유럽을 본 받자라는 사상에서 비롯된다. 거기서 동유럽들의 왕들은 계몽사상을 펼치는 정치를 하게 된다.

계몽사상의 시초는 계몽군주로 부터 시작된다. 나라를 개혁하자는 뜻에서 백성들의 교육을 보급시키고, 법과 제도를 정비하였다. 이처럼 계몽사상의 뜻은 백성들의 교육을 보급시키고, 법과 제도를 정비하여 옳바르고 나라에 힘쓸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자는 사상이다.

Ⅱ.프랑스 혁명의 원인

ⅰ) 구제도의 모순

프랑스 대혁명은 대표적인 시민 혁명으로서 그 원인은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 즉 혁명 전의 프랑스 사회인 구제도의 모순에 있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3개의 신분이 존재하였다.

당시 소수의 특권층인 제1신분 성직자의 수는 총인구 2700만명 중에서 극소수인 10만명 정도였지만, 전국토의 1/10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영주로서 봉건지대를 받고 십일조를 징수하는 특권과 면세의 혜택을 누렸다. 제2신분인 귀족은 40만명 정도로서 전 국토 1/5 정도의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농민으로부터 지대를 받았고, 교회·군대·행정의 고위직에 앉아 연금을 받았으며, 지세인 타이유(taille)와 도로부역에서 면제되는 등의 실질적인 특권을 누렸다. 그리고 칼을 찬다든지 하는 형식적인 명예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자본주의

http://user.chollian.net/~hd73401/philo/liberty.htm


자본주의의 발전 자체는 부분적으로 일찍이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럽' 농업의 장기간에 걸친 변화의 결과다. 이러한 변화는 부분적으로 습지관개와 개간에 기인했다. 그리하여 농업지역이 확대되었고 무역에 필요한 잉여가 지속적으로 창출되었다. 이와 연관된 것이 원거리 무역로의 형성인데, 처음에는 지중해 북부해안이 대표적이었다. 경제적 연결망은 유럽 지역을 가로지르는 '남북 교통로'를 만들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 연결망은 북서지역이 점점 더 역동적으로 되었다. 농업 기회와 항해 기회의 결합은 유럽 경제의 역동성과 자워, 영토, 무역을 위한 지속적인 경쟁을 부추겼다.(6)


중세 농노로부터 초기 도시의 시민이 생겨났으며, 이 시민으로부터 부르조아지의 최초 분자들이 발전해 나왔다. 아메리카의 발견, 케이프 항로의 발견 등 지리상의 발견은 떠오르는 부르조아지를 위한 신선한 발판을 만들어주었다. 동인도와 중국의 시장, 아메리카의 식민지화, 식민지와의 무역, 교환수단과 상품의 전반적인 증가는 상업과 해운업 및 공업에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충격을 가하였으며, 또 그럼으로써 비틀거리는 봉건사회 내의 혁명적 요소에게는 급속한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폐쇄적 길드가 산업생산을 독점하고 있던 봉건적 산업체계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시장의 늘어나는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를 대신한 것이 곧 매뉴팩춰 체계였다. 길드장인은 매뉴팩처 중간계급에 의해 밀려났으며, 서로 다른 자치적 길드들 간의 분업은 사라지고 각 공장 내에서의 분업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시장은 꾸준히 성장했으며, 수요 또한 계속 상승하고 있었다. 그래서 매뉴팩처조차도 이제 불충분한 것이 되었다. 또한 증기와 기계가산업생산을 혁명적으로 발전시켰다. 매뉴팩처의 위치는 거대한 현대산업으로 대체되고 산업 중간계급의 위치는 산업 백만장자, 전체 산업부대의 지휘관, 현대 부르조아지가 차지하게 되었다.

산업은 아케리카의 발견으로 길이 트인 세계 시장을 확립했다. 세계시장은 상업, 해운업, 육상교통의 엄청난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발전은 거꾸로 산업의 확장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즉 공업, 상업, 해운업, 철도가 확장되는 것과 똑같은 비율로 부르조아지는 발전했으며, 자신의 자본을 증가시켰고, 중세시대로부터 이어내려온 모든 계급을 뒷전으로 밀어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현대 부르조아지 자체가 긴 발전과정의 산물이며, 생산양식과 교환양식에서의 일련의 혁명이 낳은 산물임을 알 수 있다.(7)



분업의 발달은 생산력을 증가시켜 더 많은 잉여생산물을 만들었다. 잉여생산물을 시장에 내다 팜으로써 자본은 축적이 이루어진다. 자본은 확대재생산을 목적으로 하기때문에 더 많은 생산과 생산된 것을 팔 시장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한다. 신항로의 발견, 교통의 발달 등은 시장확대노력의 결과였다. 생산력의 확대, 수요시장의 확대 등을 통해 부르조아계급은 성장하게 되었다. 성장한 자본들은 자기들끼리의 경쟁을 통해 거대자본들을 중심으로 모이게 된다. 독점자본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들은 근대 민족국가와 손잡고 다른 나라 자본들과 경쟁하게 된다. 관세 등을 통해

자국의 시장은 보호하고 무력을 앞세운 식민지 개척을 통해 시장을 확대해 나간다. 드디어 세계는 몇몇 강대국에 의해 분할되게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이제 그들에겐 확대할 시장이 없어졌다. 결국 시장 쟁탈을 위해 강대국들 간의 싸움은 필연적이다. 1,2 차 세계대전은 그 결

과라 할 수 있다. 양 세계대전은 엄청난 파괴를 가져왔으며, 자본은 엄청난 시장을 갖게 되었다.

이후 30년 동안 자본주의는 지속적인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그 호황은 지속될 수 없었다. 1970년대 이후 세계자본주의는 불황의 늪에 들어선 것이다. 아직도 그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태평천국운동

http://www.kyungnam.ac.kr/yujang/kndae/kndae2.htm

1850년 이후 농민에 기반을 둔 반란들이 약 20년이 넘도록 거의 모 든 중국지역을 소란에 빠지게 하였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소한 형 태의 지역봉기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반란의 일반적인 원인은 중 국 자체가 안고 있는 환경에서 비롯되었지만, 외국의 영향도 적지 않 게 작용하였다. 1850년에 시작되어 1864년에 종결된 태평천국운동은 양측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근대의 민중운동이었다. 사회의 아래로 부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운동의 원인으로서는 여러가지를 들 수 있다. 인구는 1840년대에 4억으로 증가하였으나, 토지증가는 그에 따르지 못하였으며, 행정조 직도 인구나 통치 영역이 팽창한 만큼 확대되지 못하였고, 그에 따라 재정수입도 만족할 정도로 증대되지 않았던 것이다. 또 아편전쟁은 광 동을 중심으로 전개된 내륙 무역로에 변화를 가져와, 이곳에서 운수업 에 종사하던 노동자의 실업을 낳았다. 전쟁 이후 광동연해가 영해군의 관할하에 들어 가므로써 이곳에서 종래부터 활동하던 해적들은 내하의 수로로 쫓겨 들어 갔고, 이로 인해 광동과 광서지방은 점차 혼란에 빠 지게 되었다. 더구나 전쟁은 이 지역 주민들에게 말세가 다가올 것이 란 위기감을 심어 주었고, 이렇게 생겨난 혼란과 권력의 공백 속에서 비밀결사들이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이것들은 대체로 상호부조나 종교 적인 목적을 위해 사회의 하층민들이나 빈농, 이동상인, 운수노동자, 하급관리, 밀수업자, 그리고 향촌의 소지식인이나 이단적 종교인 등이 주동이 되어 조직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화남 지방의 대표적인 비밀결 사로는 18세기 말부터 존속해 온 천지회가 있었으나, 1840년 대에는 전통적 민중종교와 기독교의 교리를 접합시킨 배상제회(拜上帝會)라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적 비밀결사가 출현하였다.


배상제회는 주로 객가인(客家人)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오랜 시기에 걸쳐 화북에서 화남으로 이동하였으나,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 를 유지한 채 본지인(本地人)에게 차별을 받으면서 때로는 그들과 전 투를 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배상제회를 주동한 대표적 인물인 홍수전 (洪秀全, 1814-1864)도 몇차례의 과거응시 경력이 있었고,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광동의 객가출신이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중병이 들자 환상에 빠지면서, 자신의 역할이 여호와를 대신하여 인류를 구제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1850년에 중국남부의 광서성에서 일어난 태평천국운동은 배상제회가주동한 반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반란지는 이 결사가 성장한 광서성 이었지만, 곧이어 주변의 하층민들을 끌어모으면서 세력이 확장되었 고, 지역상으로도 호남을 거쳐 1853년에는 화중의 중요도시인 남경을 점령하면서 이 운동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들은 공식 국호인 '태 평천국'에서 보이듯이 종교와 사회, 경제, 정치면에서 중국인이 이상 으로 여겨온 대동 세계를 기독교적 이념과 절충하는 방식으로 건설하 려고 시도하였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형제자매이며, 토지는 균등하게 분배될 뿐만 아니라, 생산물도 독점될 수 없는 공산 적 사회체제를 규범으로 정하였다. 이 모든 원칙들은 그들이 남경에서 발표한 천조전무제도(天朝田畝制度) 속에 들어 있다.


그러나 왕의 지위에 오른 운동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증대시 키는데 힘을 쏟았고 그 결과 지도자들 사이에는 갈등이 증폭되었으며, 종교와 현실 정치의 구분도 모호해져 갔다. 정책의 중요 기반인 점령 지내의 농촌 지배도 원할치 않았다. 지방의 신사들이 향촌을 방어하기 위해 조직한 향용(鄕勇)과 청군의 공격도 태평천국 운동을 더 이상 지 속할 수 없게 만들었다.


태평천국 이외에도, 당시의 중국사회에는 대체로 비밀결사나 반기독 교운동, 반지주 투쟁, 또는 한족지배에 대한 소수 민족의 저항 등으로 민중들이 자신의 권익을 향상시키거나 외국의 침략에 대응하려고 노력 하였다. 1854년에는 광동성에서 청조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왕국을 세 우기 위해, 진개(陳開)를 중심으로 한 천지회 집단이 반란을 일으켰으 며, 이 반란은 곧이어 전성에 있던 천지회의 호응을 얻으면서 큰 세력 을 떨쳤다. 또 태평천국이 남경에 도읍을 정하자, 상해 부근에 있던 천지회 계통의 소도회(小刀會) 집단도 1853년에 이에 호응하는 반란을 일으키면서 상해 부근의 현성들을 일시 점령하였다.


이에 비해 염(捻)집단은 황하와 양자강의 중간지대인 회하유역에서 활동한 빈농 중심의 백련교계 비밀결사로서, 태평천국의 영향을 받아 1853년부터 1868년까지 지속된 반란을 주도하였다. 이 지역은 농업에 불리한데다 행정 력보다는 부호에 의한 지배가 압도적이었고, 대운하 를 통한 소금밀매가 성행한 곳이었다. 또아리를 뜻하는 염들은 부상, 부농, 관청 등을 공격하면서 이에서 얻은 재물을 수호전 방식으로 빈 민에게 나누어 주던 향촌사회에 뿌리를 박은 조직이었다.


이상의 비밀결사적 민중운동이 중국사회 자체가 안고 있는 사회 경 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억압 등의 문제에서 발단된 것이라고 한다면, 변경지역에 있던 소수민족의 반란은 대체로 한인과의 갈등 속에서 성 장하였고, 1860년 이후 중국 사회에 만연하게 된 반기독교 사건들, 즉 교안(敎案)은 서구 침략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1854년에 중국 남서부의 운남에서 일어난 회족의 반란은 회족과 한 족과의 은광 쟁탈을 둘러싸고 일어난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뒤이 은 56년의 반란에서 회족 전사 두문수는 운남의 성도인 대리를 새로운 회교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1854년에는 운남접경의 귀주에서 또 다른 소수민족인 묘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1862년에는 중국서북부의 섬서와 감숙지방에서는 과중한 세금부과와 자연재해 및 한족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과 태평천국군의 섬서 진입 등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하여 회교도 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런 반란들은 대체로 한족지배에 대한 소수 민족의 저항이라는 특색이 있다.


이에 반해 반기독교 운동은 주로 한인 지식인들과 민중들이 외국인 선교사 및 중국인 기독교도를 공격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천진조약과 북경조약에서 기독교의 포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음은 이미 기술하 였지만, 서양인 선교사에 대한 반감은 그들이 중국의 전통문화와 질서 를 이해하기 보다는, 파괴하려고 한다는데 있었다. 확실히 명대의 마 테오 리치에 비교한다면, 근대의 서양 기독교는 중국문화를 멸시하고, 서양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기독 교가 제국주의적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인 사대부들 이 이에 반발한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반기독교 운동은 1860년대부터 시작되어 1890년대에 절정에 이르렀 고, 의화단 운동을 통해 대규모로 폭발되었다. 그 내용은 서양 선교사 의 살해와 교회의 방화, 중국인 기독교도의 공격 등 다양한 형태로 나 타났다. 사건이 발생하면, 해당 국가들은 무력으로 청정부에 책임자 처벌과 배상을 요구하였고, 청정부는 이에 응하였다. 종교의 다원화, 서양 문물 소개, 사회사업 등에 부분적으로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기독교가 중국을 이롭게 한다기 보다는 침략의 선봉으로 대부분 의 중국인들에게 인식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은, 양자에게 모두 불행 스러운 일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19세기 중엽 이후의 민중운동은 사회 경제적 모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이를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한 편으로, 소수민족의 한족에 대한, 또 한인의 서구열강에 대한 원초적 민족주의를 발효시켰다고 볼 수 있다.


 

 

 

양무운동

http://mahan.wonkwang.ac.kr/nonmun/00/9747.htm

http://www.kyungnam.ac.kr/yujang/kndae/kndae3.htm

http://chungbuk.ms.kr/social/social-2/3/1/31-2/312.htm


태평천국운동이 한참 진행중일 때 일어난 제2차 중영전쟁에서 영불 연합군이 북경을 침입하자, 청조의 황제는 이제 더 이상 만천하를 지배하는 천자가 될 수 없었다. 그와 동일한 위상을 가진 외국의 군주도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여야만 했던 것이다. 또 이 침입은 황제를 둘 러싸고 있던 강경위주의 배외파가 더 이상 존립할 수 없도록 만들었 다. 한편 장기간에 걸친 태평천국 운동은 왕조의 존망을 위협하였지만 청의 군사력은 이를 쉽게 제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증국번과 이홍장을 비롯한 한인들이 지휘하는 향용에게 태평천국의 진압을 위임할 수 밖 에 없었다. 또한 이 한인 관료들은 상해에서 있었던 태평천국과의 전 쟁에서 외국무기의 우수성을 직접 체험하기도 하였다.


위와 같은 사정들이 1860년 이후 청조로 하여금 자강운동을 시작하 도록 한 계기가 된다. 이 자강운동은 대체로 두가지 방향에서 시작되 었다. 하나는 군사 과학기술을 받아 들이는 초보적인 자강이며, 다른 하나는 이것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의회 개설 같은 제도개혁을 실시 하여 강력한 주권국가 건설로까지 나아가는 자강으로서, 전자를 보통 양무운동이라고 하며, 후자는 변법운동이라고 한다. 두 운동 모두 국 가와 엘리트들에 의해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시작되었으며, 중흥의 이념은 중체서용(中體西用)에 두고 있었다.


양무운동은 일차적으로 서양의 군사기술이 우수하다는 것을 인식하 고 이를 받아들이자는데서 출발하였다. 그 결과 상해나 복주와 같은 지역에 조선소나 병기공장이 들어 섰으며, 신식의 군대가 만들어졌다. 양무운동은 외형상으로 유럽식의 직포공장이나 기선회사 설립 등으로 확대되어 갔고, 내용상으로는 기술의 기초가 되는 유럽의 학문과 언어 를 습득하자는 데에도 미쳤다. 광산도 종래처럼 단순히 귀금속을 개발 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유럽식의 기술이 도입되어 산업화에 필요한 광 물들을 채굴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공업화는 통신과 운수 부분의 발 전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상선회사와 전보총국이 설립되었고, 철로 가 건설되었다. 군사 공업을 중심으로 근대의 산업화가 시작된 것이 다.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과 총세무사서(總稅務司署)라는 중요기관도 양무운동 시기에 설립되었다. 전자는 서양 각국을 종래처 럼 화이 관계에서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에서 다루기 위해 중앙정부에 설립한 외교기구였고(1861), 후자는 총리아문의 설립에 따라 전국의 세무를 통일하기 위해, 종래 개항장에 설립된 세관을 근대적으로 확대 발전시킨 기구로서, 세관 수입의 합리화에 기여하였다.


양무운동의 추진 결과, 개항장을 중심으로 상해와 같은 근대도시들 이 성장하였다. 상해는 서양의 영향을 받은 공장, 은행, 상점, 문화 시설들이 개항이래 들어서기 시작하였고, 인구증가도 급격히 이루어진 대표적인 근대도시였다. 또 1870년대에 이르면 신식 기업의 영향을 받 으면서, 민족 자본을 소유한 일부의 관료와 상인, 매판, 지주 등은 선 박수리, 제사업, 방직업, 제지업 등 경공업을 중심으로 산업화를 진전 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양무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데에는 내외적으로 많은 장 애물이 놓여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농업과 수공업을 중심으로 한 전통 적인 경제체제가 여전히 강력하게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 업화는 아주 더딘 속도로 진전될 수 밖에 없었다. 운동 초기의 정치적 불안도 제약요소였다. 태평천국은 1864년에 진압되었으나, 서북지방의 회민과 회하지역의 염반란은 1870년대 초반까지 진행되었다. 또 양무 운동이 적극적으로 추진되던 시기는 반기독교운동이 각 지역에서 전개 되었기 때문에 중앙 정부는 이 문제의 해결에도 정력을 쏟아야 했다.


열강의 잇따른 침략은 청정부의 자강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 러시아 는 신강지역의 회민 반란을 틈타, 1871년에 일리(伊犁)지방을 점령하 였고, 일본도 자국어민이 대만원주민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을 이유로 1874년에 대만에 출병하면서, 중국의 조공국이었던 유구를 일본령으로 만들었다. 같은 해 영국공사관원인 마가리(a.r. margary)가 운남과 버 마의 교통로를 탐색하던 중, 현지인에게 피살되자 영국도 이를 기회로 운남의 구리채광권, 남부의 탐사권 등 많은 이권을 획득하였다. 이런 상황하에서 청이 월남과 조선의 종주권을 둘러싸고 각각 프랑스와 일 본과의 사이에 벌어진 청불전쟁(1884)과 청일전쟁(1894)에서 패배한 결과, 군사공업 위주의 양무운동은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었고, 이는 결국 새로운 차원의 자강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중국의 엘리트들 에게 심어 주었다.


정치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청불전쟁에서 청군이 패배하 고 난 뒤부터 이미 조금씩 제기되고 있었다. 특히 하계(何啓)나 호례 원(胡禮垣) 등은 서민의 마음과 군주의 마음을 일치시키는 것이 치국 의 근본이며, 강병보다는 내정의 개혁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 을 하였고, 진규(陳규) 역시 의회 제도에 주목하였는데, 이러한 것들 에서 제도 개혁의 원칙과 방향을 볼 수 있다.


제도 개혁은 청일전쟁에서 청군이 다시 패배하고 난 뒤, 젊은 개혁 사상가인 강유위(康有爲)와 그의 제자 양계초(梁啓超)를 비롯한 일부 급진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더욱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강과 양은 모두 광동 출신으로서, 특히 강의 개혁 사상은 기본적으로 유교에 두고 있 었으나, 변화를 추구하는 공양학계통이었다. 서양이 강하게 된 이유 를 도(道)와 기(氣)가 합일되었기 때문이라고 본 그는 제도 개혁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국가로 일본을 꼽았다. 개혁을 주장하는 지식인들은 많은 학회를 조직하거나 신문을 발행하여 여론을 조성하였다. 특히 호 남성은 적지 않은 개혁가들이 활동했던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1897년에 독일이 자국의 선교사가 피살된 것을 계기로 교주만과 청 도를 점령하자, 개혁을 통한 자강은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특 히 젊은 광서제(光緖帝)가 개혁에 동의하였기 때문에, 1898년 무술년 에 강유위 등을 등용하면서 일련의 칙령을 내려 전통적인 제도를 근대 적인 것으로 개혁하는 데 착수하였다. 그 내용은 유교 중심의 과거제 도를 고쳐 실용적인 학문을 시험하며, 민간주도의 상공업을 진흥하고, 관제와 법제를 효율적으로 개혁하며, 신사층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의회제도를 개설하고, 상주제도와 군제를 개혁하는 등, 거의 모든 제 도에 걸쳐 있었다.


그러나 개혁으로 권력을 잃을 것을 두려워 한 보수파의 반격과 개혁 파의 엷은 지지 기반은 황제의 명령조차도 제대로 실행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황제의 개혁 칙령이 제대로 실행된 곳은 호남성 정도였다. 만주족 출신들은 더 불안하였는데, 이는 개혁주의자들이 황제를 제외 하고는 모두 한인들인데다가, 개혁가들이 폐지하려는 한직(閑職)의 거 의 대부분은 만주인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상공업의 부흥에 힘쓰면서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던 장지동(張之洞)과 같은 대표적인 자강주의자도 강의 개혁이 지나치게 급진적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하는 등, 무술변법은 여러가지 악조건 속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결국 1백일 동안 진행되던 무술개혁은 서태후를 중심으로한 반대파 의 쿠테타로 종결되었다. 강유위와 양계초는 일본으로 망명한 반면, 담사동을 비롯한 일부 인사는 처형되었으며, 황제조차도 강제로 격리 되었다. 황제권을 인정한다는 전제하에서 실시된 개혁이었지만, 그것 마져 여의치 않을 정도로 청왕조의 지배 집단은 전통질서에 집착하였 던 것이다. 비록 서태후를 비롯한 집권세력이 20세기 초에 들어 오면 서, 무술년에 실시되었다 중단된 제도 개혁을 부분적으로 실천에 옮기 기는 하였지만, 이 때는 이미 만주족이 지배하는 전제체제 하에서는 더 이상 중화의 보존과 부강이 어렵다는 전제하에 손문(孫文)과 같은 혁명파가 청조 타도 운동을 진행 중이었다.


 

 

 

메이지유신

http://myhome.naver.com/sw016/or/o-j-maji.htm

● 개 요 ( 槪 要 )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은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를 붕괴시키고 천황 친정 형태의 통일국가를 형성시킨 근대 일본의 정치·사회적 변혁이다. 근대 아시아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한,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인 메이지 유신에 대해 간략하게 나마 총체적으로 다루어 보고자 한다. 먼저 메이지 유신의 과정을 살펴보면 크게 개국(開國), 도쿠가와 바쿠후의 붕괴, 천황 중심 통일국가의 형성과 그에 따른 신정책의 실시로 나누어볼 수 있을 것이다.


● 개 국 ( 開 國 )


19세기 중반에 접어들어 일본의 개국이 현실적인 문제로 부각되면서 미국은 동인도 함대의 매튜 페리 제독을 일본에 보내 개국을 요구했다. 페리의 내항으로 구체화된 자본주의 열강에 의한 외압은 정통적·비정치적인 천황을 정치화시켰으며, 덴포 개혁(天保改革:1841∼43) 이후 대두한 유한〔雄藩:도쿠가와 바쿠후 말기에 등장한 사쓰마·조슈 등의 세력이 큰 藩〕 세력이 점차 이와 연결되면서 도쿠가와 체제는 분열화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에 바쿠후 측에서도 체제 개선을 위해 조정, 즉 천황의 권위와 손을 잡고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그러나 1858년 다이로〔大老〕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强〕가 천황의 칙령을 받지않고 미·일 수호조약을 조인한 것을 시작으로 소위 5개국 조약을 위칙조인함에 따라 바쿠후와 조정은 정치적으로 충돌하게 되었으며,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德川家定〕의 계승문제를 둘러싼 도쿠가와 요시토미파와 히토쓰바시 요시노부파의 암투, 그리고 이와 관련해 조정과 바쿠후의 제휴에 의한 정국안정을 꾀하려는 공무합체론(公武合體論)이 격렬해지면서 점차 바쿠후와 유한의 대립이 첨예해졌다. 이러한 상황아래서 바쿠후 체제의 모순을 민감하게 받아들인 하층 무사계급을 중심으로 바쿠후의 위칙조인에 대해서는 "존왕"(尊王)을, 개국정책에 대해서는 "양이"(孃夷)를 외치는 존왕양이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 도쿠가와 바쿠후의 붕괴


그러나 사쓰마 한, 아이즈 한 등의 공무합체파가 1863년 조슈 한을 주체로 하는 급진적인 존왕양이파를 교토〔京都〕에서 추방하는 "8월 8일의 정변"이 일어나자 존왕양이운동은 일시에 좌절되었다. 또한 존왕양이운동의 거점인 조슈 한은 제1차 조슈 정벌, 4국 연합함대의 시모노세키 포격이라는 어려운 국면에 부딪히지만 다카스키 신사쿠 등을 중심으로 한의 주도권을 잡고 바쿠후에 대항할 태세를 취했다. 한편 공무합체운동의 거점인 사쓰마 한은 사쓰에이 전쟁〔1863〕을 계기로 점차 바쿠후에서 멀어져 1866년에는 삿초 동맹을 맺고 바쿠후 타도운동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867년 10월에는 도사 한, 아키 한이 쇼군 요시노부에게 대정봉환(大政奉還)을 건백해 이것이 수락됨으로써 봉환의 상표(上表)가 조정에 제출됨과 동시에 바쿠후 타도의 밀칙(密勅)이 내려졌다. 12월 9일에는 이와쿠라 도모미 등의 왕정복고파가 은밀히 사쓰마 한의 바쿠후 타도파와 결합하여 왕정복고 쿠데타를 단행했으며, 같은 날 "왕정복고의 대호령(大號令)"이 발표됨으로써 조정을 중심으로 사쓰마 한, 도사 한, 에치젠 한 등이 연합한 메이지 신정권이 수립되었다. 이후 도호쿠〔東北〕지방을 중심으로 바쿠후 측의 산발적인 저항이 있었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 천황 중심 통일국가의 형성과 그에 따른 신정책의 실시


왕정복고 후 메이지 신정부는 외국에 대해 천황정부의 성립을 알려 승인을 받음과 함께 중앙관제 정비에 착수하였다. 신정부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도쿠가와 바쿠후에 적대적이었던 藩 출신의 젊은 무사들로서 주로 내정문제와 서구 열강의 침략 위협에 자극을 받았다. 이들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표어 아래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민족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1868년 공포된 "5개조 서문"(五個條誓文)에도 나타나 있듯이 에도〔江戶:지금의 도쿄〕로 천도한 신정부의 제1의 목표는 구 봉건체제를 해체하는 것이었다. 이 목표는 1871년 폐번치현(廢藩置縣:종래의 한〔藩〕을 폐지하고 중앙정부가 관료를 파견하여 통치하는 현을 설치한 것)에 의해서 대부분 달성되었으며 아울러 봉건계금의 특권들도 철폐되었다. 같은 해 정부군이 구성되었고 1873년에는 징병제도를 실시하였다. 또한 통일적인 조세·화폐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1873년의 지조개정(地組改正)으로 주요수입원을 확보했다.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들에 의해 천황의 이름으로 수행되던 혁명적 조치들은 1870년대 중반이 되면서 점차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신정부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무사계급들이 반란을 자주 일으켰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끈 반란(세이난 전쟁〔西南戰爭〕)이었다. 이들 반란군은 새로 구성된 신정부군에 의해 가까스로 진압되었다. 한편 신정부를 불신하고 농업정책에 불만을 품었던 농민들도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는 1880년대에 절정에 달하였다. 동시에 서구 자유주의 사조의 도입으로 고양된 자유민권운동은 점차 헌정(憲政)의 창출과 민선의회를 통한 폭넓은 정치참여를 요구하였다. 정부는 이러한 압력에 대응해 1890년까지 헌법을 제정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1881). 이어 1885년에 내각제도를 창설했으며 1886년부터 헌법의 제정작업을 시작했다. 결국 1889년 천황이 국민에게 하사하는 형식으로 헌법이 공포되었고 제한선거에 의해 양원제 의회가 설립되었으며, 1890년 첫 의회가 소집되었다.


메이지 시대에는 정치적 변혁과 더불어 경제적·사회적 변화도 이루어 졌다. 아직 일본의 경제는 농업의존적이었지만 정부는 "산업화"라는 목표아래 전략산업과 교통·통신 산업등을 발전시켰다. 1872년 최초로 철도가 개설된 이래 1890년까지 2,250km의 철도가 부설되었으며 전국 주요도시에 전신선이 가설되었다. 정부의 재정지원과 1882년 도입된 유럽식 은행제도에 힘입어 사기업의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러한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구의 과학기술이 필요했는데, 이에 따라 "문명개화"의 기치 아래 사상에서 복식·건축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문화가 널리 장려되었다. 그러나 1880년대에는 일본의 전통적 가치가 재평가되면서 대대적인 서구화정책은 다소 주춤해졌다. 이러한 양상은 근대적 교육제도의 발전에서 엿볼 수 있으며 서구의 이론과 양식에 영향을 받기는 했으나 무사들의 충성심과 사회적 조화라는 전통적 가치도 중요시되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예술과 문학에서도 두드러져서 초기에는 서구의 양식들이 모방되었지만 점차로 서구 양식과 일본적 취향을 조화 있게 유합해 나가기 시작했다.


메이지 유신의 목표는 20세기초가 되면서 대부분 달성되어 일본은 근대 산업국가로 가는 길을 순조롭게 걸어 나갈 수 있었다. 서구 열강에 치외법권을 인정했던 종래의 불평등한 조약들은 1894년에 개정되었다. 영·일동맹(1902)및 청일전쟁(1894∼95)과러일전쟁(1904∼05)을 통해 주요열강으로 세계 무대에 등장했다. 이러한 변혁의 시대는 1912년 메이지 천황의 죽음으로 일단락되었다.



● 맺 는 말


이상으로 "미국의 개항 요구 → 개항 → 존왕파의 대두 → 왕정 복고와 메이지 유신 → 개혁"으로 이어지는 일본 근대화로의 전개 과정을 살펴 보았다.


그 개혁의 특성을 세가지로 요약해 본다면 우선 권위주의적 성격을 말할 수 있겠다. 능률 위주로 위로부터의 근대화였으므로 국민 개개인의 자유보다는 국가적 부강을 앞세웠다. 두번째로 국수주의적 성격이다. 메이지 정부는 국와의 신성 불가침을 내세우고 신도(神道)를 국교로 하는 등 이른바 "일본 정신"을 강조하였다. 마지막으로 군국주의적 성격이다. 유신과 개혁의 중심 세력이 무사 출신이었으므로 당연한 결과라 보여진다.


메이지 유신은 상인·자본가 등의 민족 자본을 배경으로 하고, 서양 열강의 외적 자주 속에서, 위로부터 시도된 정치·경제·사회상의 적극적인 서구화·근대화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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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지 정부의 개혁 정책 분 야

 내 용

 

정 치

 중앙 집권제 확립 ( 봉건제 폐지, 행정구역 개편:전국 274藩 → 3부72현 )

 

경 제

 토지·조세 제도 개혁 ( 다이묘의 토지를 몰수하고, 중앙에 수조권을 귀속시킴 ), 근대 공업 육성

 

사 회

 4민 평등화, 봉건적 특권의 폐지

 

군 사

 징병제 실시, 군수 공장 건립

 

교 육

 신식 교육의 실시, 유학생 파견, 서양 문물 도입

 

기 타

 교통·통신·화폐 제도 개혁, 국립 은행 설치

 


 

 

 

세포이의 항쟁

http://blog.naver.com/parkkh87/20011140129


인도의 병사 및 농민에 의해서 일어난 민족적 대 반란.

세포이란 페르시아어로 군대란 뜻이며, 여기에서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편성한 이슬람교도, 또는 힌두교도로 구성된 벵골 지방의 동인도 회사 소속의 용병을 가리킨다.

세포이는 이들은 영국인의 인종 차별, 특권의 폐지 등에 누적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동인도 회사는 1848년부터 정복 전쟁과 토후국 병합 정책에 의하여 인도 정복을 거의 완성하였으나, 강경 정책으로 인도 민중의 반영 감정이 고조되자 동인도 회사는 세포이에게 신식총으로 무장을 시켰다.

신식총의 탄약은 돼지와 소의 기름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런데 이슬람교도에게는 돼지가 금기였고, 힌두교도에게는 소가 신성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반발을 기화로 항쟁을 전개하여 1857년 5월 수도 델리를 점령하였다.

이는 단순한 군대 반란이 아니라, 인도 각 지방의 토후의 후원, 농민·도시 수공업 자들의 후원을 얻으면서 인도 전역으로 확대되어 갔으며 4개월 뒤에는 전인도의 약 3분의 2가 반란에 휩쓸리었다.

반란은 처음 무굴 제국의 부흥 선언에도 나타난 것처럼 본질적으로 인도 구지배층의 권력 구조와 민중의 소박한 배외 감정에 바탕을 두고 점점 고조되어 갔다.

자민다르(토지 소유권을 갖는 지방 호족) 제도가 행해졌던 북인도의 태반 및 남인도의 일부에서는 농민은 지주나 고리대에 의해 압박되고, 도시 수공업자는 영국 상품과의 경쟁에서 타격이 컸으므로 반항이 끈질겼으나 라이야트바리 제도(농민에게 경작 토지 소유권이 있는 제도)가 행해지고 있던 데칸이나 남인도에서는 농민들이 자작농인데다 지조 경감의 특전을 받았으므로 소극적이었다.

한편 펀잡의 시크교도, 애프간의 이슬람교도, 네팔의 그르카 병들은 적극적으로 영국군을 도왔다.

영국은 본국에서 군대를 증파하여 1859년 4월까지 겨우 주요한 반란을 억압하는 한편 동인도 회사를 폐하고 인도를 본국 정부의 직접 지배하에 두었다.

이 반란에서는 인도의 봉건 세력이 지도권을 잡았기 때문에 통일된 조직을 가지지 못해서 실패하였지만, 인도 역사상 최초의 민족적 단결에 의한 반영 운동으로서, 그 역사적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스와라지 운동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11&dir_id=110107&eid=ejEqzad3dDwxb1FATAayjaHhwY4QFttd

힌디어로 자치를 뜻하는 말로, 영국의 지배를 벗어나서 독립을 획득하려는 목적으로 일으켰던 운동이다. 인도 총독 G.N.커즌이 선포한 벵골분할법은 인도인들의 민족주의 운동을 불러일으켰으며, 경제적으로는 영국제품의 배척으로 전개되었다. 국민회의 캘커타대회에서도 4대 목표 중의 하나로 결의하여 이 운동의 지도에 앞장섰다. 영국 정부의 억압에 의해 한때 쇠퇴하였으나, 1920년에 와서는 인도 국민회의파의 지도자 간디에 의하여 한층 더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간디주의는 간디가 반영(反英)항쟁 때 주장한 불복종 ·비협력 ·비폭력주의적 무저항주의를 뜻한다. 간디는 독특한 철학으로 사티아그라하(saty希graha:진리파악), 브라흐마차랴(brahmacharya:자기정화), 아힌사(ahi涵s嚆:無傷害)의 3가지를 내세우고, 나아가 이것에 스와라지(swaraj:자치)를 결부시켜 비폭력 ·비협력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베옷을 입고 염소젖을 마시며, 직접 물레를 돌려 실을 잣고 천을 짜면서 민중을 지도한 간디의 모습은 이와 같은 독특한 사상의 실천이었다.



 

 

 

일본의 근대화 정책

http://chungbuk.ms.kr/social/social-2/3/1/31-3/313.htm


 

 

4-2. 통치 체제의 변화


1) 정치 구조의 변화

 

 

 

비변사

http://www.tutork.com/yh12-1.htm


처음 중종 때 삼포왜란(三浦倭亂)을 계기로 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이때는 지변사 재상(知邊事宰相 - 변방의 사정에 밝은 고위 무관)을 중심으로 하는 임시 기구였다. 그러다가 명종 때 을묘왜변(乙卯倭變)을 계기로 상설 기구가 되었다. 그러나 구성은 여전히 지변사 재상 중심이었고, 따라서 기능도 군무 협의에 국한되었다.


   그러다가 선조 때 임진왜란을 계기로 그 구성과 기능이 크게 강화되었다. 즉, 구성을 보면 3 정승으로부터 공조(工曹)를 제외한 5 조 판서, 군영의 대장들, 유수, 대제학, 군무(軍務)에 밝은 현직·전직 고관 등 당상관(堂上官) 이상의 문·무 고관이 대거 참여하였고, 이에 따라 기능도 강화되어 군무뿐만 아니라 정치·외교 및 일반 정무까지 처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비변사는 임란 후에도 존속되었다.


   이렇게 비변사의 구성과 기능이 확대, 강화됨으로써 최고 정무 기관이었던 의정부는 사실상 유명 무실해졌고, 왕권도 약화되었다. 조선 후기 왕권의 약화를 초래한 정치 기구가 비변사였다. 비변사는 나중 고종 때 흥선 대원군이 왕권 강화 차원에서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부활함으로써 사실상 폐지되었다.


 

 

 

의정부

http://211.252.89.97/ban/sa/ex/h5338.htm

http://comgangsa.com.ne.kr/data/1.htm


백관(百官)을 통솔하고 서정(庶政)을 총리하던 조선시대 최고의 행정기관으로 도당(都堂)·황각(黃閣)이라고도 한다. 국초에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국가최고회의기관으로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하는 문하부(門下府), 왕궁의 숙위(宿衛)와 군기(軍機) 및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중추원(中樞院), 국가 재정을 담당한 삼사(三司), 그리고 서정을 분장(分掌)한 육조(六曹) 등을 설치하여 도평의사사를 문하부·삼사·중추원의 고관으로 구성하는 합의체(合議體)로 하여 정치·군사를 총할하는 최고회의기관으로 하였다. 그러나 개국 이듬해인 1393년 중추원의 군무(軍務)를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에 넘기게 됨에 따라 중추원이 허구화(虛構化)됨으로써 도평의사사의 재추(宰樞)는 군무를 알지 못하게 되어 1400년(정종 2)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치고 중추원을 삼군부(三軍府)로 개칭하여 정무(政務)와 군무를 완전히 분리하였다. 또 무관(武官)은 정무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의정부는 주로 문하부와 삼사 문관의 합의체가 되는 한편 따로 승정원(承政院)을 설치하여 중추원의 도승지(都承旨) 이하 승지(承旨) 및 당후관(堂後官:뒤에 注書)을 소속하게 하여 왕명의 출납을 맡겨 관제를 정비하였다. 1401년 즉위한 태종은 7월에 다시 관제를 개혁하여 문하부를 없애고 문하부의 좌·우정승을 의정부 좌·우정승으로, 문하부 시랑찬성사(侍郞贊成事)를 의정부 시랑찬성사로,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참찬의정부사로, 문하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의정부 정당문학으로 개칭하여 비로소 의정부가 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하는 최고행정기관이 되었다. 이와 함께 문하부의 낭사(郞舍)를 독립시켜 사간원(司諫院)을 신설하고 삼사를 사평부(司平府)로, 의흥삼군부를 승추부(承樞府)라 하여 개국 후 처음으로 고려의 관제에서 벗어나 의정부·육조·승정원·사헌부·사간원을 중심으로 한 조선시대의 독자적인 정치기구를 대략 갖추었다. 그 당시 의정부의 기능은 막강하여 전곡(錢穀)을 관장하던 사평부, 병권(兵權)을 장악하던 승추원(丞樞院), 문무관의 인사임명권을 장악하던 상서사(尙瑞司)의 장관인 판사(判事)를 의정부의 좌·우정승이 겸임하였다. 이 때문에 육조는 조정(朝政)에 참여하지 못하여 1405년(태종 5) 관제를 다시 개혁하여 육조의 전서(典書)를 판서(判書)로 개칭하고 정3품에서 정2품으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사평부의 전곡 회계권을 호조(戶曹)로, 승추부의 병권을 병조(兵曹)로, 상서사의 문관 인사권을 이조(吏曹)로, 무관 인사권을 병조로 이관하고, 의정부 소속의 각사(各司)를 6조에 분속(分屬)시켰다. 이로써 6조의 직무는 강화되었으나 의정부에는 서사(署事)라는 것이 있어 6조에서는 모든 일을 단독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반드시 의정부에 보고하게 되어 있었으며, 의정부에서는 좌·우정승이 주가 되어 협의한 후 임금에게 계달(啓達)하고, 임금의 전지(傳旨:결재)를 받아서 이를 6조에 회송하여 정무를 집행하였다. 그러나 모든 국사(國事)가 의정부에 집중됨으로써 그 권한이 강대하여 14년에는 의정부의 기구를 대폭 축소, 그 직무를 6조에 나누어주고 소관 사무를 왕에게 직계(直啓) 시행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의정부는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좌·우의정 각 1명, 의정부동판사(議政府同判事) 2명 등 5명의 원로대신이 합좌(合坐)하여 외교문서나 검토하고 사형수를 복심(覆審)하는 실권(實權) 없는 명목상의 최고행정기관이 되었다. 1436년(세종 18)에 이르러 의정부 서사 제도를 다시 실시하게 되면서 의정부 직제(職制)를 개편·강화하였는데, 이때의 관원으로는 정1품의 영의정부사, 좌·우의정, 종1품의 좌·우찬성(左右贊成), 정2품의 좌·우참찬(左右參贊) 각 1명, 사인(舍人:정4품) 2명, 검상(檢詳:정5품) 1명이었다. 또한 이제까지 좌·우의정(좌·우정승)이 수상(首相)으로서 모든 국사를 총괄하고 영의정부사는 다만 명예직으로 의정부 서사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이때부터 서사에 참여하여 비로소 영의정이 수상이 되어 이로부터 3의정을 삼공(三公) 또는 삼정승(三政丞)이라 하였고, 좌석에 따라 좌·우찬성을 동벽(東壁), 좌·우참찬을 서벽(西壁)이라 하였다. 의정부의 관원은 세종대에 이르러 더욱 증강되어 가각고(架閣庫) 녹사(錄事)가 대폭 편입되고 서리(書吏)를 두고 사록(司祿:정8품) 2명을 더 두었다. 또한 의정부 서사가 재개된 후에도 이조·병조의 관원 임명, 병조의 용군(用軍), 형조에서의 사형 이외의 판결은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직계(直啓)할 수 있게 되었으나, 단종이 즉위한 후부터는 6조 직계의 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공사(公事)는 의정부를 통하게 하였다. 그러나 1455년(세조 1) 세조는 형조의 사형수 복심(覆審)을 제외한 6조의 모든 공사(公事)는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바로 계달할 것을 명함으로써 의정부 서사는 다시 폐지되었다. 이로써 세조대에서 성종대에 걸쳐 완성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의정부의 기능을 '총백관(總百官)·평서정(平庶政)·이음양(理陰陽)·경방국(經邦國)'이라고만 하였을 뿐 구체적 직능이나 6조와의 사무적 관계는 모호한 점이 많았다. 세조가 의정부를 경시하게 된 것은 이미 수양대군 때 정적(政敵)인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端) 등을 죽이고 귀양보낸 때부터이다. 그뒤 성종이 13세에 즉위하여 윤대비(尹大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왕실비서실인 승정원에 신숙주(申叔舟) 등 역대의 중신이 '원상(院相)'이라 하여 어린 왕을 보좌하는 동시에 6조를 통할하는 변칙이 생겼다. 그후 명종 초와 선조 초, 어린 왕을 대비가 섭정할 때 이 일은 되풀이되었다. 의정부의 서사는 1516년(중종 11) 부활되었지만 얼마 후 비변사(備邊司)가 생김에 따라 중신들이 여기에 모여 국가의 중대문제 및 일반행정이나 제반 시책의 결정이 이를 통해 이루어져 최고 의결기구로서의 기능이 확대되자 의정부의 기능과 실권은 비변사로 거의 옮겨졌다. 이와 같이 쇠퇴한 의정부이지만 국가의 최고행정기관으로서의 지위는 조금도 변함 없이 지켜져오다가 1864년(고종 1) 비변사는 외교·국방 및 문부(文簿)의 거행을 맡고 의정부는 기타의 정무를 관장하게 하였다가 1884년에는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을 의정부에 합병하였다. 1894년 7월 일본의 배후 조종하에 이루어진 갑오개혁은 조선왕조 500년의 정치제도를 크게 변혁시켰는데, 전문(全文) 9장(章) 84조로 공포된 의정부 관제에 따라 의정부의 영의정, 좌·우의정을 없애는 대신 총리대신(總理大臣)·좌찬성·우찬성 각 1원(員), 도헌(都憲:司憲) 5원, 참의 5원, 주사(主事) 33원을 두게 되어 500년 동안 백관 위의 재상(宰相)으로 군림하여 오던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라는 이름은 이때 사라지고 대신 생소한 총리대신이라는 재상의 이름이 등장하였다. 또한 의정부에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도찰원(都察院)·중추원(中樞院)·기공국(紀功局)·기록국(記錄局)·전고국(銓考局)·관보국(官報局)·편사국(編史局)·회계국(會計局)·기로소(耆老所)를 두고, 6조를 8아문으로 개칭·개편하여 내무(內務)·외무(外務)·탁지(度支)·군무(軍務)·법무(法務)·학무(學務)·공무(工務)·농상무(農商務) 아문을 두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에는 의정부를 내각(內閣)으로 개칭하고 좌찬성·우찬성이란 관직도 없앴다. 1896년(건양 1) 다시 내각을 의정부로 고쳐 총리대신을 없애고 의정 및 참정(參政)대신과 내부(內部)·외부(外部)·탁지부(度支部)·군부(軍部)·법부(法部)·학부(學部)·농상공부(農商工部) 등의 7부대신을 두었다가 1907년 내각체제로 환원되어 10년의 국권피탈까지 존속하였다.


 

 

 

탕평정치

http://leekcp.new21.org/b%20kh/a%20kb/7c/3/4/3432.htm

붕당 정치가 변질되면서 정치 집단 간의 세력 균형이 무너지고 왕권 자체도 불안하게 되었다. 이에 강력한 왕권을 토대로 국왕이 정치의 중심에 서서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이 제기 되었다.


숙종은 정치적 균형 관계를 재정립 할 목적으로 인사 관리를 통하여 세력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편론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군왕과 신하가 한마음으로 절의와 덕행을 숭상 하면서 인사 관리를 공정하게 한다면 붕당 사이의 갈등은 자연히 해소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숙종의 탕평책은 명목상의 탕평론에 지나지 않아 균형의 원리가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상대 당파에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인 인사 관리로 일관하여 환국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고하기도 하였다.


이 때의 잦은 환국은 숙종 말에서 경종에 이르는 동안에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 싸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는 지경까지 발전하였고, 경종 때에는 왕세제(영조)의 대리청정 문제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 되었다.


 


 

 

탕평(탕평)의 의미


탕평이란 서경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정치가 한쪽을 편들지 않고 사심이 없으며, 당을 이루지도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2) 군사 제도의 변화

 

 

 

훈련도감

http://stmail.chosun.ac.kr/%7Emueter/trean.htm

오군영(五軍營) 가운데 가장 먼저 설치된 것으로, 임진왜란(1592)을 계기로 그 이전의 오위제(五衛制)가 붕괴되고 새로운 군사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1593년(선조 26) 유성룡(柳成龍)의 주장과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의 권유에 따라 명나라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참고로 하고, 역시 명나라 군대 절강병(浙江兵)의 훈련법을 습득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처음에는 낙상지의 지휘 아래 절강병으로부터 창 ·검 ·낭선 등의 기술을 배우게 하다가 뒤에 훈련도감을 설치하였다.


이 군대는 병사를 포수(砲手) ·사수(射手) ·살수(殺手)의 삼수병(三手兵)으로 분류하여 전문기술을 가진 특수부대를 형성한 데에 그 특색이 있다. 그 인원은 약 4,500명으로, 이들은 초기의 군대와는 달리 삼수량(三手糧)에 의하여 고용된 급료병(給料兵)으로, 장기 근속병이었다. 관원으로는 도제조(都提調:정1품) 1명, 제조(提調:정2품) 5명, 대장(大將:종2품) ·중군(中軍:종2품) 각 1명, 별장(別將:정3품) ·천총(千摠:정3품) 각 2명, 국별장(局別將:정3품) 3명, 파총(把摠:종4품) 6명, 종사관(從事官:종6품) 4명, 초관(哨官:종9품) 34명과 지구관 10명, 기패관(旗牌官) 20명, 별무사(別武士) 68명, 군관 17명, 별군관 10명, 권무군관(勸武軍官) 150명, 국출신(局出身) 150명 등이 있었다. 이후 약간의 변화는 있었으나, 1882년(고종 19)까지 존속하였다.


 

 

 

 

이괄의 난

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munwhasa/txt/text/11-4-3.html

이괄의 난은 인조 2년(1624) 정월에 평안병사 겸 부원수인 이괄이 일으킨 반란으로서 이 난을 평정하는 계기가 된 것이 같은 해 2월 11일에 서대문 밖 안현(길마재)에서의 전투인 것이다.

이괄은 선조 때 형조좌랑 태안군수를 역임한 인물로서 광해군 14년(1622)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부임하기 직전에 서인들이 광해군을 폐위시키기 위한 ‘인조반정(仁祖反正)’의 밀모에 가담하였으며, 이듬해 거사 당일에는 홍제원에서 회군하였을 때 대장으로 뽑히기도 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에 ‘정사공신(靖社功臣)’의 등급을 정할 때 함께 행동했던 김자점(金自點), 심기원(沈器遠) 등은 1등공신이 되었으나 이괄은 처음부터 가담한 것이 아니고 나중에야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2등공신으로 떨어졌으며 훈련대장 이수일(李守一)은 내응의 공으로 공조판서가 되었는데도 이괄은 그보다 못한 한성판윤(漢城判尹)으로 임명되어 논공행상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었던 것 같다. 게다가 그의 아들 전(캳)도 반정에 참가하였으나 논공에서 제외되었고 그의 아우 수(邃)도 등용되지 못한 점은 그의 불만을 더욱 크게 하였다.

그러던 중 당시 북방에서 흥기하고 있던 후금(後金, 후의 청)과의 마찰로 관서지방에 변란의 징조가 있게 되자 조정에서는 인조 원년(1623) 5월 이괄을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삼아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영변에 출진케 하니 그의 불만은 더욱 커져 마침내 딴 뜻을 품기에 이르렀다.

인조 2년(1624) 정월에 그의 아들 전이 일부 지식층과 교유하며 공신들의 횡포와 당시 정치의 문란을 개탄한 사실이 과장되어 전교수(前敎授) 문회(文晦) 등이 ‘이괄과 그의 아들 이전 및 순변사 한명연(韓明璉) 등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고변을 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그의 아들 전을 잡아 사실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선전관 및 의금부 도사를 영변의 군영으로 보냈다. 이에 공신들에 대한 적개심이 폭발하여 이괄은 부하인 이수백(李守白) · 기익헌(奇益獻) · 최덕건(崔德虔) · 이정배(李廷培) 등과 모의하여 군사를 일으킬 것을 결의하고 조정에서 보낸 사신들을 살해한 다음 ‘임금 주변의 악한 공신들을 제거한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때에 같은 반역 음모에 관련된 혐의로 서울로 압송당하던 귀성부사 한명연을 구출하여 서로 제휴하고 군대를 합하여 군사 1만 2,000명과 임진왜란 당시의 항왜(降倭) 130명을 선봉으로 삼아 정월 22일 영변을 떠나 서울을 향해 진격하였다.

24일에 도원수 장만의 장계에 접한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을 도체찰사로, 형조판서 이시발(李時發)과 대사간 정엽(鄭葉8을 부체찰사로 삼고 이수일을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하여 반군을 토벌케 하였다. 그러나 장만의 군사가 황주 서쪽 신교(薪橋)와 평산 동쪽 저탄(猪灘)에서 크게 패하였고 이 보고에 접한 조정에서는 중신들 중에 적과 내응할 우려가 있다 하여 기자헌 · 김원호 등 40여 인을 처형하였으며 이귀(李貴)에게 임진강의 수비를 튼튼히 하도록 명하였다. 이귀는 반군이 개성을 지나 파주목사 박효립(朴孝立)의 군대를 물리치고 임진강을 향해 진격해 오자 서울로 도망쳐 와 인조에게 남쪽으로 피신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2월 8일 반군이 서울 근교 벽제관에 이르자 인조는 남행을 결정하여 9일 새벽에 서울을 떠나 한강을 건너 과천 · 수원 · 천안을 거쳐 13일에 충청도 공주로 피난하였다.

이괄은 마침내 한명연과 함께 서울에 입성하여 선조의 열째 아들인 흥안군(興安君) 제(컾)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고 자신은 경복궁의 옛터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한편 장만은 파주에서 인조가 남쪽으로 피난하고 이괄의 반군이 한성에 입성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처음에는 이를 포위하고 지구전을 폄으로써 적을 피곤케 하려 하였으나 정충신(鄭忠信)과 남이흥(南以興)의 의견을 따라 한밤중에 한성 북쪽 서대문 밖의 안현에 진을 치고 이괄의 군대를 유인해 산 위에서 격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안 이괄은 ‘적을 무찌른 후에 아침밥을 들겠으니 도성 사람들은 나와 싸움을 구경하라’고 장담하고 다음날인 11일 아침에 이괄의 군대는 성을 나와 지금의 적십자병원 근방에서 군대를 좌우로 나누어서 한 패는 마포 방면으로 또 한 패는 금화초등학교 부근에서 올라가게 하여 공격을 시작하였으나 험한 곳을 우러러보고 쏘는 활이나 총포가 제대로 명중되지 않는데다가 관군의 여러 장수들은 반군을 입성하도록 내버려 둔 자신들의 죄를 자책하여 힘을 다해 싸우니 전세는 관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게다가 교전이 시작된 직후에 바람의 방향마저 반군쪽으로 바뀌니 관군은 사기가 배로 올라 반군 400여 명을 죽이고 300여 명을 사로잡는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싸움을 ‘안현전투’라 하며 이 안현 남쪽 봉우리를 ‘승전봉’이라 하고 또는 변하여 ‘신정봉’이라고도 한다.

이 안현전투에서 대패한 이괄은 남은 수백기를 거느리고 수구문(水口門, 光熙門)을 빠져 나와 탈출하였고 다음날 삼전도(三田渡)를 거쳐 광주에 이르러 목사 임회(林檜)를 살해하고 그날 밤 이천 묵방리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곳에서 이괄의 부장 기익헌 · 이수백 등은 이괄 · 한명연 등 괴수 9명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하니 그 잔당은 모두 흩어지고 마침내 이괄의 난은 평정되었다. 이괄 등의 수급이 공주의 행재소에 이른 뒤에 인조는 22일 환도하였다.

이괄의 난은 반란군이 왕도까지 침입하여 국왕이 남천(南遷)하는 사태에까지 이른 조선왕조 초유의 반란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이 난은 국내적으로는 민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국외적으로는 후금과의 관계에도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게 되었다. 즉 한명연의 아들인 윤(潤) 등이 후금으로 도망하여 인조반정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조선의 병력이 약하다는 것을 말하여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조선에 대해 주전론의 입장에 있던 후금 태종에게 좋은 구실이 되어 인조 5년(1627) 정월 14일 후금군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조선을 침입하였다. 결국 파죽지세로 남침하는 후금군에 놀란 인조 이하 대신들은 강화도로 피신하였으며 형제의 맹약을 맺는다는 등의 조건으로 화약을 맺고서야 후금군은 철수하였으니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제승방략 체제

http://nhs1970.new21.org/highhis1/data/3-jinguan.htm

http://www.chungdong.or.kr/highroom/history/dictionary/%C1%A6%BD%C2%B9%E6%B7%AB%C3%BC%C1%A6.html

조선시대 북방의 경계를 위한 병서(兵書). 2권 1책. 인본. 김종서(金宗瑞)가 처음 서술하고, 이일(李鎰)이 증보한 것으로, 1670년(현종 11) 간행되었다. 북방의 팔성진(八城鎭)을 중심으로 한 변방의 경비책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을 통해 조선시대의 비변책, 두만강 주변의 야인, 연산군 이래의 주요 고사 등을 알 수 있어 여진관계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3) 수취제도의 개편

 

 

 

영정법

http://www.jeri.or.kr/jries/web/go/soc/his/%BF%F64.htm

http://www.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254-yungjungbub.htm


조선 후기에 시행된 전세(田稅) 징수법. 정식명칭은 영정과율법(永定課率法)으로 1635년(인조 13) 에 제정되었다.

제정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15세기에 제정된 전분6등법(田分六等法)과 연분9등법(年分九等法)은 매우 번잡하여 당시에도 제대로 적용되지 못하였고, 16세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무시된 채 최저율의 세 액이 적용되고 있었는데, 왜란과 호란을 겪고 난 뒤 농지가 황폐되고 농민이 날로 궁핍해지는 상황 속에서 이 세 액도 제대로 징수할 수 없게되자, 정부에서는 이러한 관행을 법제화하여 전세를 풍흉에 관계없이 1결당 미곡 4두 로 고정시켰다.

그리고 부족한 세원을 보완하기 위해 종래의 수등이척법(隨等異尺法)을 양척동일법(量尺同一法)으로 고쳐 실시하였다.


 

 

 

대동법

http://211.252.89.97/ban/sa/ex/h6357.htm

http://www.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100-dedongbub.htm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B4%EB%B5%BF%B9%FD&sort=0&c=1&qt=df


조선시대 선조 이후 공물(貢物:특산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제도로 조선시대 공물제도는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게 하였는데, 부담이 불공평하고 수송과 저장에 불편이 많았다. 또 방납(防納:代納), 생산되지 않는 공물의 배정, 공안(貢案)의 증가 등 관리들의 모리 행위 등의 폐단은 농민부담을 가중시켰고 국가수입을 감소시켰다. 이에 대한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조광조(趙光祖) ·이이(李珥) ·유성룡(柳成龍) 등은 공물의 세목을 쌀로 통일하여 납부하도록 주장하였다. 특히 이이는 1569년(선조 2) 저서 《동호문답(東湖問答)》에서 대공수미법(貸貢收米法)을 건의하였으나 실시하지 못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전국의 토지가 황폐해지고 국가수입이 감소되자 1608년(선조 41) 영의정 이원익(李元翼)과 한백겸(韓百謙)의 건의에 따라 방납의 폐단이 가장 심한 경기도부터 실시되었다. 중앙에 선혜청(宣惠廳)과 지방에 대동청(大同廳)을 두고 이를 관장하였는데, 경기도에서는 세율을 춘추(春秋) 2기로 나누어 토지 1결(結)에 8말씩, 도합 16말을 징수하여 그 중 10말은 선혜청으로 보내고 6말은 경기도의 수요에 충당하였다. 24년(인조 2) 조익(趙翼)의 건의로 강원도에서도 실시되었는데, 연해(沿海)지방은 경기도의 예에 따랐고, 산군(山郡)에서는 쌀 5말을 베[麻布] 1필로 환산하여 바치게 하였다. 51년(효종 2) 김육(金堉)의 건의로 충청도에서 실시, 춘추 2기로 나누어 토지 1결에 5말씩 도합 10말을 징수하다가 뒤에 2말을 추가 징수하여 12말을 바치게 하였다. 산군지대에서는 쌀 5말을 무명[木綿] 1필로 환산하여 바치게 하였다. 전라도에서는 58년(효종 9) 정태화(鄭太和)의 건의로 절목(節目)을 만들어 토지 1결에 13말을 징수, 연해지방에서부터 실시하였다. 산군 26읍에서는 62년(현종 3)부터 실시하였는데, 부호들의 농간이 적지 않아 현종 6년에 폐지되었다가 다음해에 복구되었고, 뒤에 13말에서 1말을 감하여 12말을 징수하였다. 경상도는 77년(숙종 3)부터 실시하여 1결에 13말을 징수하였는데, 다른 지방과 같이 1말을 감하여 12말을 징수하였다. 변두리 22읍은 쌀을, 산군 54읍은 돈[錢] ·무명을 반반씩, 그 외 4읍은 돈과 베로 반반씩 바치게 하였다. 1708년(숙종 34) 황해도에 대동법을 모방한 상정법(詳定法)을 실시하였는데, 1결당 쌀 12말을 징수하는 외에 별수미(別收米)라 하여 3말을 더 받았다. 대동법이 전국적으로(함경도와 평안도는 제외) 실시된 뒤 세액도 12말로 통일하였다. 산간지방이나 불가피한 경우에는 쌀 대신 베 ·무명 ·돈[大同錢]으로 대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동법 실시 후에도 별공(別貢)과 진상(進上)은 그대로 존속하였다. 따라서 백성에게 이중 부담을 지우는 경우가 생겼으며, 호(戶)당 징수가 결(結)당 징수로 되었기 때문에 부호의 부담은 늘고 가난한 농민의 부담은 줄었으며, 국가는 전세수입의 부족을 메웠다. 대동법 실시 뒤 등장한 공인(貢人)은 공납 청부업자인 어용상인으로서 산업자본가로 성장하여 수공업과 상업발달을 촉진시켰다. 대동미는 1894년(고종 31) 모든 세납(稅納)을 병합하여 결가(結價)를 결정했을 때 지세(地稅)에 병합되었다.


 

 

 

균역법

http://blog.naver.com/hesbs/120007633447

조선시대 군역(軍役)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하여 만든 세법이다. 1750년(영조 26) 종래 인정(人丁) 단위로 2필씩 징수하던 군포(軍布)가 여러 폐단을 일으키고, 농민 경제를 크게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자 2필의 군포를 1필로 감하기로 하는 한편, 균역청을 설치, 감포(減布)에 따른 부족재원(不足財源)을 보충하는 대책을 마련하게 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어전세(漁箭稅)·염세(鹽稅)·선세(船稅) 등을 균역청에서 관장하여 보충한다는 등의 균역법이 제정되어 1751년 9월에 공포되었다.


  군역은 처음에 16세부터 60세까지의 양인(良人)에게 부과하여 이를 정군(正軍)과 보인(保人)으로 나누어 번상(番上)하는 정군을 보인이 경제적으로 돕게 하였다. 정군의 번상제가 해이해지면서 중종 때부터는 번상대신 포(布)를 바치게 하는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가 이루어지더니, 임진왜란 후 모병제가 실시되면서 군역은 군포 2필을 바치는 것으로 대신하게 되어 군역으로서의 군포는 국가재정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군정의 문란으로 돈 있고 세력 있는 양인은 관리와 결탁하여 군역을 면제받고, 무력하고 가난한 양인만이 군역을 지게 되었다. 따라서 부족한 군포를 보충하기 위해 이미 사망한 군역 대상자에게도 그 몫을 가족에게서 징수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 16세 미만의 어린아이에게까지 군포를 징수하던 황구첨정(黃口簽丁), 군포 부담자가 도망하면 친척에게서 군포를 징수하던 족징(族徵), 이웃에 연대책임을 지워 군포를 징수하던 인징(隣徵) 등 갖은 비법이 횡행하였다. 후에 균역청 구관당상(句管堂上)으로 임명된 홍계희(洪啓禧)에 의하면 50만이 져야 할 양역(良役)을 10만여 명이 부담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자 곳곳에서 농민의 농촌 유리현상이 두드러진다 하였다.


  군역의 개선책은 효종·인조 이후 계속 강구되어 숙종 때인 1682년(숙종 8)에 병조참판 이사명(李師命)은 군포징수를 인정(人丁) 단위로 하지 않고 가호(家戶) 단위로 하여 양반에게도 징포하자는 호포론(戶布論)제기하였고, 그 외에도 군포를 폐지하고 토지에 부가세를 부과하여 그 비용을 충당하자는 결포론(結布論), 유한양정(有閑良丁)을 적발하고 양반자제 및 유생(儒生)에게도 징포하자는 유포론(游布論:儒布論), 군포를 폐지하고 매인당 전화(錢貨)로 징수하자는 구전론(口錢論)과 군문(軍門)의 축소로 군사비를 감축하자는 등 논의가 분분하여 가호당의 호포제와 가호단위의 호전제(戶錢制)가 유력하였다. 그러나 양반층의 강경한 반대로 실현을 보지 못하고, 군포를 반으로 줄이자는 감필론(減匹論)이 대두하였다.


  1742년(영조 18)에는 양역사정청(良役査正廳)을 두어 양역의 실태파악에 노력하는 한편 양인의 호구조사를 하였으며, 1743년에는 이 조사를 바탕으로 영의정 조현명(趙顯命)에게 양역실총(良役實摠)을 만들게 하여 각 도에 인반(印頒)하도록 명하였다. 1748년 이 작업이 완료되어 전국의 양정수(良丁數)와 군포필수를 조사 수록한 양역실총(처음에는 良役査定冊子)이 반간(頒刊)되어 군포를 감필할 경우의 부족한 군포수를 알게 되자, 영조는 1750년 5월 홍화문(弘化門)에 친림(親臨)하여 재조(在朝) 제신(諸臣) 및 서울 5부(部)의 방민(坊民)에게 양역변통(良役變通)의 의견을 물었다. 영조는 민의에 따라 호전제(戶錢制)를 실시하려 하였으나 반대가 너무 많아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같은해 7월 여러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균역청(원명은 均役節目廳)을 설치하여 군포 2필을 1필로 감필한다는 선포를 하고 이에 따라 각 군문에 부족한 군포를 보충해 주는 급대재정(給代財政)의 마련을 강구하게 하였다.


  1751년 9월 반포된 균역법의 내용은 군포감필에 따른 급대재정으로,


  ① 군문을 합치고 군사비를 절약하는 감혁(減革)으로 얻는 재원이 약 10만 냥,


  ② 선혜청(宣惠廳)과 지방관청 경비의 일부를 균역청 재원으로 이획(移劃:移越)하여 얻는 재원 약 7만 냥,


  ③ 놀고 있는 한정(閑丁)을 수괄(搜括)하여 매인당 선무군관포(宣 武軍官布) 1필씩을 부과하여 얻는 재원 5만 냥,


  ④ 어장(漁場) 및 어전세(漁箭稅)·염세(鹽稅)·선세(船稅)의 수세(收稅)로 얻는 10만 냥,


  ⑤ 결작(結作)이라는 이름으로 토지 매결당(每結當) 쌀 2말 혹은 5전(錢)씩을 전세(田稅)에 부과하여 얻는 40만 냥,


  ⑥ 지방관의 사용(私用)으로 쓰던 은결(隱結)과 여결(餘結)을 국가수입으로 전용(轉用)하여 얻는 5만 냥


  등 모두 80만 냥으로 군포의 감필에 따른 부족재원을 마련하였다. 여기에서 감혁은 군문의 지출을 줄인 것이고 이획은 경상재정이 아니므로, 이것을 뺀 60여만 냥을 각 아문(衙門)·군문 및 각 도에 지급하였다.


  이렇게 하여 군포 1필이 감해졌으나, 군포의 근본적인 성격에는 변동이 없었으므로 군역대상자의 도망은 여전하였으며, 도망자·사망자의 군포가 면제되지 않아 이를 다른 양인이 2중·3중으로 부담함으로써 군포감필 정책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양인들은 계속되는 무거운 군역에 불만을 품고, 철종(哲宗) 때는 농민반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오가작통제

http://cont111.edunet4u.net/2002/yjsgun11/Mm/Module/ogazaktong.htm


1485년(성종 16) 한명회의 발의에 따라 채택되어 <경국대전>에 올랐는데, 이에 의하면 한성부에서는 방(坊) 밑에 5가작통의 조직을 두어 다섯 집을 1통으로 하여 통주(統主)를 두고, 방에 관령(管領)을 두었다. 지방은 역시 다섯 집을 1통으로 하고 5통을 1리(里)로 해서 약간의 이(里)로써 면(面)을 형성하여 면에 권농관을 두었다. 주로 호구를 밝히고 범죄자의 색출, 세금징수, 부역의 동원, 인보(隣保)의 자치조직을 꾀하여 만들었으나, 시대에 따라 운영실적이 한결같지 않아 1675년(숙종 1)에는 '오가작통법 21조'를 작성하여 조직을 강화하였다. 후기에 이르러 호패(戶牌)와 더불어 호적의 보조수단이 되어 역(役)을 피하여 호구의 등록 없이 이사 ·유리(流離)하는 등의 만성화된 유민(流民)과 도적의 은닉을 방지하는 데 이용하였고, 현종 때에는 통의 연대책임을 강화하여 가톨릭교도를 적발하는 데 크게 이용하였다


 

 

4-3. 정쟁의 격화와 탕평정치


1) 붕당정치의 변질

 

 

 

택리지

http://www.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364-tegriji.htm

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sidaesa/txt/4-8-5-5-1.html

http://geopusan.com.ne.kr/이중환.htm

http://kjw2.ms98.net/geo/read/leejh.htm


조선시대 1751년(영조 27)에 실학자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1690~1756)이 저술한 지리서이다. 《박종지(博綜誌)》라고도 한다. 필사본이며 1책으로 구성된다.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저술 당시에는 책의 이름이 정해지지 않았으며 뒤에 이긍익(李肯翊)이 이를 《팔역복거지(八域卜居志)》라 하였는데, 약칭하여 《팔역지(八域志)》라는 이명(異名)이 생겼다. 《택리지》라는 이름도 후인들이 그 내용을 보고 붙인 이름인 듯하다.

  저자 이중환은 1690년(숙종 16년) 당대의 명문인 여주 이씨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5대조가 병조판서를 역임한 이래 고조부, 조부 모두 관직에 진출하였고, 아버지 이진휴도 도승지, 예조참판 등을 역임한 가문이었다. 처가 역시 장인 목임일(睦林一)을 비롯하여 직계 4대가 모두 문과에 급제한 명문이었다. 또한 성호 이익과는 가까운 친척간(재종손)이면서, 연령 차이도 그다지 많지 않아 성호의 학풍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이중환은 당시 사회에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여건 속에서 성장하여, 24세 되던 해(1713년)에 증광시의 병과에 급제하면서 공직에 진출하였고, 이후 비교적 순탄한 관직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이중환이 34세 되던 해에 엄청난 시련이 닥쳐 왔으며, 이후 그의 인생 행로는 완전히 바뀌게 된다. 병조 정랑으로 있던 1723년(경종 3년), 그는 목호룡 사건, 즉 신임사화의 주범이라는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다. 그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였고, 노론측에서도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여, 결국 사형은 면하게 되고 1726년 12월 외딴 섬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1727년(영조 3년) 소론이 다시 집권하면서 10월 유배지에서 풀려나지만, 그해 12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다시 먼 지역으로 유배되는 신세가 되고, 자신의 사건에 연루된 처남은 결국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38세 되던 해였다. 이상이 그에 관한 공식 기록의 전부이다.


  그 후 1756년 타계할 때까지의 삶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려진 바 없다.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순탄하게 성장하였던 이중환은 30대의 꿈많은 시절에 크나큰 좌절과 고통을 당하면서 엄청난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이중환의 생애를 생각함에 있어 우리는 그에게 가해졌던 고통과 좌절의 깊이를 고려해야만 그 생애 마지막 순간에 저술된 택리지(擇里志)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남긴 유일한 저작 택리지는 1751년(62세) 첫여름 상순에 탈고되었으니, 사망하기 다섯 해 전쯤 된다. 이 글 속에 담긴 이중환의 해박한 지리적 지식은 그의 성장과정, 관직 경력, 유배 생활, 그 후의 방랑 생활을 통하여 축적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이 그에게는 자서전과도 같다고 하겠다. 그의 고향인 공주(장기면)는 삼남대로상의 교통의 요지로서 한양, 내포, 전주, 청주 방면의 육로와 금강수로가 만나는 결절지로서, 충청감영이 입지하여 있던 도회였다. 그는 이 곳에서의 성장 과정에서 서남부 지방의 지리적 정보에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찍이 소년 시절 부친을 따라 강릉까지 여행하면서 여러 지방의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문과 급제 후에는 경상 우도와 충청도 동남부 지역의 교통로가 수렴되는 교통, 상업의 요지였던 김천역의 김천도 찰방을 지냈는데, 여기서 인근 지역의 주요한 정보를 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배 생활과 그 후의 방랑 생활을 통하여 전국 각지의 산천과 풍물에 접할 수 있었기에 그의 지리적 안목은 경험을 통하여 축적된 귀중한 지식이었다. 그러나 전라도와 평안도는 가 보지 못하여 간접적으로 정보에 접하였다고 한다. 그가 택리지를 탈고한 팔괘정이 강경 부근에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공주시 장기면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어서 아마도 배 타고 금강을 따라 내려와 강경에서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강경은 상업, 교통의 요지로서 충청도와 전라도의 접경지역이었으므로 전라도에 관한 정보는 바로 이곳 장터와 객주집에서 접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중환은 무엇 때문에 30년 세월을 방랑하였던가? 택리지라는 책 제목이 말하듯이 사대부가 진정 살 만한 곳(可居地)을 찾아 헤매었던 것이다. 즉 몰락한 사대부로서 유토피아를 찾고자 한 것이다.


  내용은 사민총론(四民總論)·팔도총론(八道總論)·복거총론(卜居總論)·총론(總論)의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민총론에서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유래, 사대부의 역할과 사명 등 국가를 구성하는 백성들의 역할, 그리고 살 만한 곳에 관한 내용을 기록했다. <팔도총론>에서는 전국을 8도로 나누어 그 지리를 논하고 그 지방의 지역성을 출신인물과 결부시켜서 밝혔고(地人相關), <복거총론>에서는 살기 좋은 곳을 택하여 그 입지조건을 들어 타당성을 설명하였다.


  <팔도총론>은 지방지(地方誌)에, <복거총론>은 인문지리적 총설에 해당된다. 사람이 살 만한 곳의 입지조건으로서 지리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 등 4가지를 들었으며, 여기에도 여러 가지로 구별하여 가거지류(可居地類) ·피병지(避兵地) ·복지(福地) ·은둔지(隱遁地) ·일시유람지(一時遊覽地) 등으로 분류하였다.


  내용 여러 곳에 풍수지리설이 인용되었으며 이 책의 특징으로는 ① 한국 사람이 저술한 현대적 의미의 지리서라는 점, ② 실생활에서 참고와 이익을 주도록 저술된 점, ③ 근대 한국의 지리학과 사회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유통경제의 증진에 따라 사회적·경제적인 변화가 진행되고, 이에 따라 지역적 특화와 변모가 일어나고 있었던 18세기 중엽의 조선의 국토와 사회를 거시적이고 종합적으로 조망하여 오늘날까지도 당시 사회를 파악하는 자료로 가장 많이 이용되는 책이다. 또한 기존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했던 지리서들과 달리 생활권 또는 지역권이라고 하는 새로운 시각으로 서술한 점 등을 들어 근대지리학의 맹아를 제시한 책으로 꼽기도 한다. 이것은 오늘날 외국에서도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1910년 고서간행회, 1912년 광문회(光文會)에서 각각 인쇄 ·간행하였다.


 

 

 

2) 탕평론의 대두

 

 

 


대리청정

http://blog.naver.com/jin10040401/60016770303

역대왕조에서 행해진 대리청정을 말하는데..


공식적으로 여성은 정치를 하지 않는 바, 수렴(=발)을 내려 가리고 청정을 했다 해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이라고 합니다.. 여성이 하면 수렴청정, 남성이 하면 섭정이 됩니다..


나이 어린 왕이 즉위했을때, 성인이 될 일정기간 동안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국정을 대리로


처리하는걸 말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수렴청정은 고구려 6대 태조왕(53~146)으로서,


7세로 등극했을때, 태후가 수렴청정을 했다는 기록이 전해져 옵니다..


 

 

 

이인좌의 난

http://www.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287-iinjoa%20nan.htm

조선 후기인 1728년(영조 4년) 이인좌 등의 소론(少論)이 주도한 반란을 말한다. 일어난 해의 간지를 따서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한다. 소론은 경종 연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노론과의 대립에서 일단 승리하였으나, 노론이 지지한 영조가 즉위하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박필현(朴弼顯) 등 소론의 과격파들은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의 죽음에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 탄(密豊君坦)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남인들도 일부 가담하였다.


  즉, 1720년에는 왕세자(뒤의 경종)를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뒤의 영조)을 지지하는 노론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는데, 그해 경종의 즉위로 소론이 집권하게 되었다. 그러자 노론은 연잉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고 이어 세제청정(世弟聽政)까지 실현하려다가 축출당했으며, 잇달은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철저히 축출되었다. 이때 소론 내에는 노론에 대한 처벌방법을 두고 과격파인 준소(峻少)와 온건파인 완소(緩少)로 분열되었다. 1724년 경종의 죽음으로 영조가 즉위하여 김일경(金一鏡) 등이 제거되고 노론정권이 성립하자 김일경파의 박필현(朴弼顯)·이유익(李有翼) 등은 비밀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하여, 궁중에서는 이하(李河)·민관효(閔觀孝)·윤덕유(尹德裕) 등이, 지방에서는 정준유(鄭遵儒)·나만치(羅晩致)·조덕규(趙德奎)·조상(趙)·임서호(任瑞虎)·정세윤(鄭世胤)·권서린(權瑞麟)·이호(李)·민원보(閔元普)·민백효(閔百孝)·김홍수(金弘壽)·이일좌(李日佐) 등이, 그리고 평안병사 이사성(李思晟)과 중군별장 남태징(南泰徵)이 가담했다. 이들은 김홍수·정세윤 등 재지사족층을 제외하고는 거의 세가명족의 후예이지만 현실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으므로, 영조와 노론의 제거를 통해 정치에 진출하고자 했다. 따라서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며, 경종을 독살했다는 등 영조의 왕위계승부당성을 선전하며 명분을 확보함으로써 밀풍군 탄을 추대하기로 하고, 정변의 기본전략을 외방(外方)에서 먼저 일으키면 경중(京中)에서 이에 내응하는 외기내응(外起內應)으로 확정했다.


  그리하여 경중내응은 준소·탁남·소북계 세력이, 외방기병은 정세윤·이인좌의 지도 아래 외방토호와 재지사족층이 하기로 했다. 외방기병의 지휘권을 맡게 된 이인좌는 감사를 지낸 이운징(李雲徵)의 손자로 남인명가의 출신이었지만 관직으로 진출할 수 없었다. 그는 경기·호서·영남 세력의 중개역할을 하는 한편 남인명가의 후광을 업고 영남의 사족과 접촉했다. 또한 정세윤은 정인지(鄭麟祉)의 후손이지만 몰락양반으로 600~700명의 세력을 포섭했다. 그런데 이때 영조와 탕평파는 정미환국(丁未換局)을 일으켜, 노론의 일부를 후퇴시키고 청남(淸南)과 완소를 정계에 기용함으로써 소론·남인을 무마하여, 삼남흉황과 유민의 속출, 노론의 민정실패에 따른 외방의 동요에 대처하고자 했다. 이로써 반남인·반소론적인 영조와 노론을 제거한다는 명분이 약화됨에 따라 일단 서울의 주도층은 거사준비를 중지하고 사태추이를 관망했으나, 이인좌·정세윤·한세홍(韓世弘) 등의 재지사족들은 준비를 계속했다. 이인좌는 영남기병을 정희량(鄭希亮)·김홍수에게 맡기고, 호남기병은 태인현감 박필현(朴弼顯)에 맡겼으며, 자신은 정세윤과 경기기병을 추진하여 중도에서 영남병·호남병과 합세하기로 했다. 한편 정세윤은 호남사족층에게 협조를 요청하고, 금영(禁營)의 조총을 사들여 무장하고, 평안병사 이사성에게 군자금을 요구했다. 이때 경중주도층은 한세홍을 통하여 거사강행의 소식을 전달받고 군사·자금을 모집했으나, 실천의지가 약했다. 한편 정미환국으로 재기용된 온건소론에 의해 정변모의가 노출되어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 등이 각지의 취군상황에 대해 고변하자, 영조는 친국을 설치하고 삼군문에 호위를 명했다.


  한편 이들의 거병에는 유민(流民)의 증가, 도적의 치성, 기층 민중의 저항적 분위기가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그리하여 반군은, 지방의 사족과 토호가 지도하고 중간계층이 호응하며, 일반 군사는 점령지의 관군을 동원하거나 임금을 주어 동원하는 형태로 구성되었다. 이인좌는 1728년(영조 4) 3월 15일 청주성을 함락하고 경종의 원수를 갚는다는 점을 널리 선전하면서 서울로 북상하였으나 24일에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 격파되었고, 청주성에 남은 세력도 상당성에서 박민웅(朴敏雄) 등의 창의군에 의해 무너졌다. 영남에서는 정희량(鄭希亮)이 거병하여 안음·거창·합천·함양을 점령하였으나 경상도관찰사가 지휘하는 관군에 토벌당했다. 호남에서는 거병 전에 박필현 등의 가담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즉, 1728년 3월초 이인좌를 대원수로 한 반란군은 안성·양성에서 거병하여, 3월 15일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 영장 남연년(南延年), 군관 홍림(洪霖)을 죽이고 청주성을 함락했다. 반군은 각 창고의 전곡·미·포를 민간에 분급하고 '불살인 불약민재'(不殺人 不掠民財) 및 '제역감역'(除役減役)의 민정강령을 내세움으로써 민의 참여를 유도하여, 청주의 군관·향임층·일반행려·상인 등으로 반군세력이 확대되었다. 반군은 황간·회인·청안·목천·진천 등지를 점령하고, 수령을 파견하여 환곡을 분급하며 관노비에게 상급을 주고, 장정을 선발했다. 그런데 영남병·호남병의 합세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남에서는 이인좌의 동생 이웅보(李熊輔)가 3월 20일 안음·거창·합천·함양을 점거했으나, 안동·상주입거에 실패하고 결국은 관군에게 패했다. 호남에서는 박필몽과 박필현이 각각 괘서를 살포하는 등 취병을 했으나 태인거병이 좌절당한 뒤 잡혀 처형당했다. 한편 정부는 관문·성문의 파수를 강화하고, 금위영·어영청의 군사를 각 진에 파견하여 내성유입을 통제하는 한편, 탁남세력과 윤휴(尹)·이의징(李義徵) 등의 자손, 김일경·목호룡의 가속(家屬)을 체포했다. 또한 민심동요를 막고자 강창세곡(江倉稅穀)을 성내로 운반했고, 체불했던 공가(貢價)와 삭료(朔料)를 지급했으며, 아울러 도성사수론을 내리고 황해·강원의 향병징발과 한강수비령을 하달했다. 경중내응을 효과적으로 저지한 뒤 오명항(吳命恒) 지휘의 도순무군(都巡撫軍)을 남파했다. 이에 반군은 경중내응과 영남병·호남병 북상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각 처의 유민·소상인·화전민을 포섭하면서 도성을 향해 진천을 지나 안성·죽산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3월 24일 안성·죽산에서 관군에게 격파되어 이인좌·권서봉·목함경(睦涵敬)이 잡혔으며, 청주에 남아 있던 반군세력인 신천영과 이기좌(李騏佐)는 창의사인 박민웅(朴敏雄)에게 체포되었다. 이 소식은 영남·호남 지방에도 알려져 잔존했던 반군세력은 소멸되었다.


  난의 진압에는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 등 소론 인물들이 적극 참여하였으나, 이후 노론의 권력장악이 가속화하였고 소론은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정부에서는 지방세력을 억누르는 정책을 강화하였고 토착세력에 대한 수령들의 권한이 커져갔다. 또한 이때 반군이 군사를 동원한 여러 방식은 뒤의 홍경래의 난으로 이어졌다


 

 

 

3) 영조의 탕평정치

 

 

 

삼심제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11&dir_id=110101&eid=3TIlvxyUbMUYuPDatk7dUjw1J%2B2cPrRy


사수삼복계법(死囚三覆啓法)이라고도 하며, 1047년(문종 1)에 실시한 사형수 판결의 삼심제입니다. 고려의 일반범죄 재판은 단심이나, 이 해에 문종왕이 이르기를 <인명지중 사자불가재생(人命至重死者不可再生)(해석: 임녕은 지극히 소중한 것으로 죽은 자는 다시 살릴 수 없다)>이라 하여 사형에 한하여 삼복제, 즉 삼심제를 실시하였다고 합니다.


어떠한 기관이 각 심급을 담당하였는지는 불명확나 제1심은 지방관, 제2심은 형부가 담당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며, 제3심은 왕 스스로 친국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죠. 이 제도는 조선시대에도 계속되어 1397년(태조 6) 《경제육전》 형전에 법제화되었습니다.


 

 

 

속대전

http://211.252.89.97/ban/sa/ex/h6289.htm

http://web.cnei.or.kr/jries/web/jung/sa/history/wo94.htm


조선 영조 때의 문신 김재로(金在魯) 등이 왕명을 받아 1746년(영조 22) 편찬한 법전으로 6권 4책. 조선 초기에 편찬한 《경국대전》의 속전(續典)이다. 경국대전 이후에 반포된 수교(受敎) ·조례(條例) 등이 번잡하게 되어 그 해석과 시행에 어려움이 많아 44년에 영의정 김재로 등이 왕명을 받아 대전속록(大典續錄)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수교집록(受敎輯錄) ·전록통고(典錄通考) 등을 검교(檢校)하여 선택 ·유합하고, 여기에 다시 누락된 수교 ·조례 중 시세(時勢)에 맞는 것을 새로이 보충한 것이다. 책의 편제(編制)는 《경국대전》의 예에 따라 이(吏) ·호(戶) ·예(禮) ·병(兵) ·형(刑) ·공(工)의 6전(六典)으로 분류하고 있다. 특징은 관형주의(寬刑主義)를 시도한 점이다. 영조는 당쟁탕평(黨爭蕩平)에도 힘쓴 군주로, 속대전의 편찬에도 특히 형전(刑典)에 주안을 두고 신중과 관용을 베풀었다. 그리고 조선 전기부터 형법은 대명률(大明律)을 따른 탓으로 행형상(行刑上)의 모순이 많았는데 이 대전에서는 그러한 모순을 시정, 우리 실정에 맞는 새로운 형률(刑律)을 증설하고 형량(刑量)도 가볍게 하였다. 1935년 조선총독부에서 활자로 간행한 바 있다.


 

 

 

4) 정조의 탕평정치


 

 

 

시파와 벽파

http://www.sonaki.pe.kr/cgi-bin/technote/read.cgi?board=kmy_libray&y_number=102&nnew=1

정쟁이란 정말 나라의 앞길을 가로막기도 하고 열어놓기도 한다. 대부분 전자의 결과를 낳지만 말이다. 이 정쟁을 보며 우리들은 왜 왕들이 그 정쟁을 그치게 하지 못하는지 의문을 품는다. 하지만 그 것이 그렇게 쉽겠는가? 군주정치에서도 왕에게 모든 권한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쟁을 하는 신하들이 왕을 파탄시키기는 쉽다. 조선의 역사에서도 정쟁에 의해 희생된 왕들이 몇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경종.

 요화 장희빈의 아들로 태어난 까닭에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하던 경종은 사실 본성은 착하고 순하였다. 하지만 장희빈의 악한 성격 때문에 서서히 정신에 충격을 받게 되었고 장희빈이 사약을 먹기 전에 한 발악의 희생자가 된 뒤 더욱 정신적 충격이 커졌다. 그 때문에 인종보다는 오래 재위했지만 결국 짧은 생을 마치고 이복동생인 연잉군(영조)에게 보위를 물려주었다.

 영조는 처음부터 참으로 대단하게 출발하였다. 정쟁을 타파하기 위해 일명 탕평책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세월은 사람도 바꾸어 놓는 것일까? 조선의 왕들 중 가장 오래 재위하였던 까닭에 재위 50년이 넘자 서서히 노망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영조의 세자인 사도세자를 싫어하던 정파는 왕실 인물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하여 일을 꾸미기 시작한다. 영조에게 극비리에 사도세자의 단점을 말해주기 시작하였다. 그 때문에 사도세자가 관서지방으로 여행을 떠나고 온양에 휴식 삼아 갔을 때조차 영조에게는 왜곡되어 전해졌다.

 그 때문에 안타깝게도 처음으로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폐서인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사도세자는 울고 불며 빌었지만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었고 며칠 뒤 꺼내어 보자 사도세자는 죽어있었다. 결국 끔찍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하지만 이 일로 정신을 차리게 된 영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를 더욱 아끼고 사랑한다. 정조는 정말로 조선 후기의 전성기 르네상스를 이끌어갈 뛰어난 왕이었다.


 

 

 

통공정책

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sidaesa/txt/4-5-2-2.html

17세기의 서울시전상업계에 가장 큰 변화의 하나가 금난전권(禁亂廛權)의 강화현상이었고 그것은 또 시전상인(市廛商人) 이외의 사상인층(私商人層) 즉 난전상인 세력이 성장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체로 18세기경에 있어서의 서울시전상업계에 일어난 특징적인 현상은 시전의 수가 대폭 증가되었다는 일이다. 이 시기에 와서 서울시전의 수가 증가된 근본적인 원인은 상업의 발전에 있다. 17세기 후반기부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쟁피해가 어느정도 극복되고 종래 철저히 금지되었던 민간상인의 중국 · 일본과의 교역이 비록 밀무역의 형태로나마 어느정도 열리게 되어 국내 상업계 일반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고, 그것이 국내상업계의 대종을 이룬 서울시전에도 미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쟁 때문에 농촌에서 떠나 도시로 모여들어 도시인구가 늘어나게 됨으로써 상업인구가 증가하게 되었고 서울은 그 대표적인 경우가 되었다. 또한 대체로 17세기 후반기부터 시작된 금속화폐의 유통이 이 시기에는 정착화되어 국내의 상업발전을 촉진하게 되었다.

18세기에 와서 서울시전이 증가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서울의 인구가 증가되고 도시권이 확대됨에 따라 자연히 시전설치지역이 확대된 사실과 인구증가 및 상업 발전과 함께 종래의 관아도시적 성격에서 상업도시적 성격으로 옮겨가고 이 때문에 서울사람들의 도시인적 기호가 늘어나고 생활품이 다양화한 사실, 그리고 도시인적 생활방식이 발달함에 따라 종래에는 상품화되지 않았던 물품들이 새로 상품화된 사실들을 들 수 있다.

종래 서울의 도시권은 4대문 안에 한정되어 있었고 시전권도 종루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으로 종묘까지 남쪽으로 광교를 지나 남대문에 이르는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으나, 왕조후기에 와서는 도시권이 서남쪽으로 용산강 · 마포강 · 서강지역까지 확대되었고 동쪽과 서쪽으로도 동대문 · 서대문 밖까지 확대되어 갔다. 도시권이 확대됨에 따라 자연히 시전권이 확대되었고 이 때문에 종래 대체로 지켜오던 일물일전(一物一廛) 원칙이 무너지고 같은 상품을 판매하는 시전조직이 여러곳에 생겨나게 되었다. 미전(米廛)의 경우를 예로 들면 종래는 서울안의 미전방들이 모두 성내의 미전동업조합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대체로 18세기경에는 성내의 미전조직 이외의 강상미전(江上米廛) · 마포미전(麻浦米廛) 등의 새로운 미전조직이 생겼고 여기에 강변과 마포지방의 미전방 등이 소속되었던 것이다. 각기 하나의 미전조직 속에 몇 곳의 미전방이 소속되어 있었는지 정확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미전조직이 하나 둘씩 늘어난다는 사실은 그것에 소속되는 개별 미전방이 그만큼 증가됨을 말한다.

서울의 도시적 성격이 발달함에 따라 서울사람들의 생활기호도 늘어갔다. 이 때문에 종래의 시전이 대개 가공되지 않은 물품을 판매하는 경우가 많았던데 비하여 가공상품의 종류가 증가되어 갔고, 결국 가공상품을 새로 전안물종(廛案物種)으로 인정 받는 시전이 증가되어 갔다. 예를 들면 17세기 초엽에 담배가 처음 들어와서 재배되기 시작하자 엽초전(葉草廛)이 새로 조직되었으나 영조 18년(1742)에는 엽초전 이외에 절초전(折草廛)이 다시 조직되었다. 절초전은 엽초를 가공하여 즉 썰어서 파는 시전인데 이것은 담배의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엽초전조직에 들어 있지 않는 상인들이 엽초전의 금난전권을 피하여 따로 절초전을 만든 것이다. 즉 엽초보다 절초를 즐기는 소비자의 기호에 맞추어서 또 하나의 담배전이 생겨난 것이다.

종래에는 상품화되지 않고 가정에서 자급자족하던 물품이 상업도시적 성격이 발달함에 따라 수요가 많아지고 따라서 상품화하는 일은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특히 18세기경에 와서 상업의 가속도적인 발달과 도시인구의 증가추세 때문에 이와 같은 현상이 유달리 발달하였음을 볼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장 담그는 원료인 메주가 이 무렵부터 서울에서는 상품화되고 있었는데 영조 23년(1747)에 마침내 훈조전(燻造廛)의 조직이 이루어졌다.

18세기 이후로 서울의 시전이 이와 같이 증가되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종래 시전상인이 아닌 상인들이 새로이 시전상인이 되어 갔음을 말한다. 이들은 절초전을 조직한 '擧動時坊軍立役者'와 훈조전을 조직한 '都下遊手輩' 등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대체로 종래 시전상인들이 새로운 시전을 조직하여 시전상인으로 등장해 간 것이라 생각된다. 어떻든 이와 같이 시전이 증가된 결과는 서울의 상업계에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시켰다. 영조 17년(1741) 당시의 한성부윤이던 이보혁(李普爀)은 시전의 수가 증가되고 그것이 모두 금난전권을 행사함으로써 나타난 서울상업계의 문제점과 그것에 대한 대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5∼6년 이래 서울 안의 유의유식(遊衣游食)하는 무리로서 평시서에 출원하여 새로운 시전을 설립한 자가 대단히 많다. 이들은 상품을 판매하는 일보다 난전잡는 것을 더 일삼아서 심지어는 채소와 기름, 젓갈 같은 것도 그 전매권을 가진 시전이 새로 생겨 마음대로 사고 팔 수 없게 하며 지방민이 가져 오는 사소한 생산품을 매매하여 생계를 이어 가는 서울의 영세상인들이 금난전권의 피해를 입어 장차 거래가 끊어질 형편이다. 진신들 가운데는 난전(亂廛)의 난잡함을 염려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은 시전의 금난전권 행사로 일어나는 폐단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내 생각으로는 정부가 평시서(平市署)의 전안(廛案)을 조사하여 10년 이내에 조직된 작은 시전은 그 금난전권을 모두 없이 함으로써 영세민들을 구제하여야 할 것이다.[[註11]」


도시행정을 담당한 고위관리가 시전의 금난전권이 도시민의 생활에 불편을 주고 있음을 인식한 사실은 획기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17세기 이후 정부는 그 재정적 수입을 늘리기 위하여 시전의 금난전권을 강화하는 정책과 시전의 수를 증가시키는 정책으로 일관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 와서 금난전권을 오히려 약화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정부 관리에게서 나온 것은 그것이 이 시기의 도시 상업계에 얼마나 큰 문제를 야기하였는가 짐직하게 한다. 그 문제점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시전의 수가 증가하고 그것이 모두 금난전권을 행사한 결과 도시소비자층의 생활에 큰 타격을 주었다. 금난전권이 강화됨에 따라 도시민의 생활품은 그 대부분이 시전의 전매품이 되었으며 이 때문에 독점가격이 형성되어 심한 물가고를 초래하였고 도시소비자의 생활에 심각한 위협을 주게 된 것이다.

둘째, 금난전권이 본래 도시 사상인층의 성장 앞에서 시전상인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형성된 것이므로 그것이 강화됨에 따라 도시의 영세상인들이 심한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에 새로운 시전을 조직한 상인들은 대체로 권세가의 노복들이거나 또 어느 정도의 재산을 축적한 난전상인들이었다. 이들이 시전상인으로 상승하여 금난전권을 행사하게 되는 반면 시전상인으로 성장할 수 없는 영세상인들은 금난전권 때문에 심한 압박을 받게 된 것이다.

셋째, 금난전권은 도시의 영세상인 뿐만 아니라 도시수공업자의 생산활동에도 큰 압박을 주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기호가 늘어감에 따라 새로운 제품이 고안 · 제조되고 이 때문에 도시의 민간수공업이 발달하여 갔지만 이들 수공업자 스스로가 시전을 조직하는 경우 이외에는 그들의 새로운 제품이 대부분 기성시전의 전안물종에 포함되어 수공업자의 제품 판매행위는 금난전권으로 금지되었다. 따라서 서울의 영세수공업자들은 대부분 금난전권의 통제 때문에 시전상인의 기반아래 들어가게 되었고 또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도 보이고 있었다.

시전의 금난전권 강화와 수적 증가가 가져 온 도시소비자층과 영세상인 및 영세수공업자들의 희생과 반발이 점차 심각해짐에 따라 시전정책은 이들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바꾸어 나가려 하였지만 여기에는 시전상인들의 심한 반발이 뒤따랐기 때문에 금난전권이 즉시 폐지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주로 18세기 후반기를 통하여 서울시전의 금난전권은 점점 제한 내지 약화되어 갔고 영조 17년(1741) 이보혁의 건의가 있은지 약 30년후에는 마침내 통공발매정책, 즉 금난전권을 제한하는 획기적인 정책 전환이 이루어졌다. 정조 15년(1791)에 실시된 신해통공(辛亥通共)의 주창자인 채제공(蔡濟恭)은 통공정책의 실시를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서울시내의 민폐를 말하면 도매가 으뜸이며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고자 하면 도매를 폐지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우리나라의 금난전법(禁亂廛法)은 본래 국역을 지는 육의전(六矣廛)으로 하여금 이익을 독점하게 하기 위하여 실시한 것이다. 그러나 근래에는 무뢰배들이 삼삼오오로 시전을 만들어 일상생활품을 매점하지 않는 것이 없고 크게는 말이나 배로 싣고 오는 물품에서부터 작게는 머리에 이고 손에 든 물품에 이르기까지 길목에 잠복하였다가 싼값으로 억지로 사려하고, 물건 주인이 혹시 팔지 않으면 난전이라 하여 이를 결박하고 형조나 한성부에 넘기기 때문에 밑지더라도 팔지 않을 수 없으며 시전상인들은 이렇게 산 물건을 곱절로 팔아 이익을 얻는다. 이런 경우 사람들이 사지 않으면 그만이겠지만 사지 않을 수 없을 때는 그 시전이외에 딴 곳에서는 살 수 없기 때문에 그 값이 날로 오르기만 한다. 내가 어릴 때와 비교하면 물가가 3배 내지 5배로 올랐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채소와 질그릇 등도 그것을 전매하는 시전이 생겨서 자유롭게 매매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소금을 구할 수 없고 가난한 선비는 제수를 구하지 못하여 제사를 철폐하기도 하니, 이는 오로지 도매를 금하지 않고 금난전권을 시전이 행사하게 함으로써 빚어진 폐단이다. 정부는 마땅히 평시서로 하여금 30년 이내에 설립된 작은 시전을 폐지하고 형조와 한성부에 명령하여 육의전 이외에는 난전을 금할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어기는 자는 오히려 벌주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註12]」


이와 같은 채제공의 건의가 충분한 논의를 거쳐 받아들여짐으로서 통공정책은 실시되게 되었다. 이 때 실시된 통공정책은 비록 육의전이 제외된 제약성은 있지만 일단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금난전권을 잃게 하였고 따라서 육의전 이외의 시전에게는 큰 타격을 주었다. 통공정책이 실시되자 서울시전상인들이 이에 불만을 품고 그 주창자인 채제공에게 항의하였고 2년이 지난 후까지도 70여명의 시전상인이 이 때 수원유수로(水原留守)로 전출된 채제공을 그곳까지 찾아가 항의한 일이 있다.[[註13]

신해통공 이후 육의전 이외 모든 시전의 전안물종이 완전히 자유매매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신해통공 이후 많은 시전들이 통공조처의 철폐를 요구하거나 아직 금난전권을 가지고 있는 육의전 속에 들어 가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 그들의 전매특권이 무너져갔고 이 때문에 큰 타격을 받고 있었음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면자전(綿子廛) · 의전(衣廛) · 혜전(鞋廛)의 상인들이 신해통공 이후 실업할 상태에 빠졌다 하여 난전을 금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계속 요청하였고[[註14] 상전(床廛) · 본리전(**里廛) · 진사전(眞絲廛) · 연죽전(烟竹廛) 등의 상인들도 역시 신해통공 이후 파산상태에 빠졌다 하여 금난전권을 복구시켜 줄 것을 꾸준히 요구하였다.[[註15] 또 포전(布廛)과 저포전(苧布廛) 등은 두 시전조직을 합하여 육의전 속에 들어가게 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되었다.[[註16]

19세기 전반기의 세도정치시대를 통하여 일부의 시전조직은 교묘한 방법으로 금난전권을 도로 찾은 경우도 있었다. 헌종 12년(1846) 당시의 영의정이던 권돈인(權敦仁)은 이 무렵 육의전 이외에도 몇 개의 시전이 합법적으로 금난전권을 가지게 되었고 또 사소한 잡전들까지도 문서를 위조하거나 부당한 방법으로 문서를 기재하여 금난전권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하고 있다.[[註17] 세도 정치시대에 들어오면서 18세기 후반기에 실시된 통공정책이 일부 후퇴하였음은 사실이나 대체적으로는 문호개방 이전까지 통공정책의 원칙을 지키는 방향이 유지되었다. 즉 육의전 이외 시전들의 꾸준한 금난전권 복구요구에 대하여 정부는 한결같이


「서울안 사람들로서 통공조처가 옳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10명 가운데 8∼9명이다.[[註18] 도매법 즉 금난전법은 실제로 모든 사람의 공공된 이익이 되지 못한다.[[註19] 통공조처를 실시한지 이미 수십년이 지났는데 지금에 갑자기 난전을 금하게 하면 시전상인에게는 비록 유익하겠지만 가난하여 난전으로 생활하는 백성들은 하루 아침에 실업하게 될 것이다.[[註20]」


라고 판정하여 금난전권의 부활을 거부하였다. 한편 신해통공 이후에도 계속 금난전권을 행사하고 있던 육의전은 문호개방 이후 일본상인과 청나라 상인이 서울안에 침투해 들어오는데 일정한 견제역할을 하였으나 청일전쟁 이후 갑오개혁이 실시됨으로서 그 금난전권이 무효화하였다.


 

 

 

 

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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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에 관하여

1. 규장각의 설치 과정과 배경

규장각이란 원래 임금의 글씨를 모아두는 기구라는 뜻이다. 규장각은 이미 세조 때에 양성지(梁誠之)에 의해 \'어제존각지소(御製尊閣之所)\'로 그 설치가 제창되었으나 시행되지 못하다가 숙종 때에 이르러 비로소 종정시(宗正時)에 작은 건물을 별도로 지어 \'규장각(奎章閣)\'이라 쓴 숙종의 친필 편액을 받아 걸고 열성조(列聖組)의 어제(御製)·어서(御書)를 봉안하는 장소로 삼았다. 이후 유명무실한 존재였던 규장각은 정조에 이르러 \'계지술사(繼志述事: 선왕의 뜻을 계승하여 정사를 편다)\'는 명분 아래 그의 세력 기반 내지 문화정책의 추진기관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정조는 즉위한 다음날 규장각제도의 창설을 명하고 6개월의 준비기간 후 어제 편찬 및 보관을 목적으로 하는 왕실 도서관으로 출발하였다. 이후 그 직제가 완성되며 학술 연구 기관으로 되었고, 최종적 제도 완비 전후로는 정책 연구 기능까지 발휘한다.

정조는 자신이 훌륭한 학자였다. 정조가 재위하며 추진했던 여러 가지 정책들은 대부분 학문적인 것과 연관이 있었고, 통치 이념과 기반도 학문에서 찾았다. 정조의 이러한 학자적 소양은 그의 문집인 『홍재전서』중 날마다 스스로 반성하려는 뜻에서 각신(閣臣)으로 하여금 기록케 한 정조의 어록인 일득록에 잘 드러나 있다. 정조는 학문을 생활화하여 자신만 학문에 정진하는 것이 아니라 신하들에게도 학문에 힘쓸 것을 요구하였고, 신하들과 학문적 토론을 즐겨 하였다. 또한 이러한 학자적 소양은 자연스럽게 방대한 양의 도서 간행과 연구 자료의 보관 및 관리를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조의 개인적인 학문적 취향이 규장각 설치의 모든 배경은 아니다. 정조의 학문적 소양은 그의 정국 운영 방향과 통치 이념을 결정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뒷받침할 기구가 바로 규장각이었다. 우문정치(右文政治: 문치주의 정치)라는 선대 왕조의 통치 방향을 따라 계지술사의 명분을 세우면서도 자신이 처한 정치적 현실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 제도적 장치로서 나타난 것이 규장각이다. 이것은 정조의 개인적인 학문적 기질과는 별도로 역대로 문치주의를 내세워온 조선 왕조의 기본 정책의 영향이다. 즉 정조는 숙종·영조에 걸쳐 제기되어 온 문풍 혹은 문체문제를 표면화시켜 반정의 기치를 드러내었고 이는 \"문체의 성쇠흥체는 정치와 통한다\"와 같은 말에서도 잘 표현되 있다. 이와 함께 정조는 외척과 척신들에 의한 압박을 온몸으로 체험한 인물로서 영조대의 탕평정국을 극복하고 정치원칙에 근거를 두는, 즉 진정한 의리에 바탕을 두는 탕평이 필요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우문정치와도 연결 되는 것으로 사대부의 문풍을 바로 세움으로서 의리를 존중하는 탕평이 실효성을 거둘 수 있다고 여긴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왕권 강화와 새로운 정치 기구가 필요했고 규장각은 정조의 친위 세력으로서 정치 기구의 성격을 가지고 설치 된 것이다. 초기에 정치적 성격이 강하였던 규장각은 점차 문화 정책의 중심 기관으로 기능하였다. 홍문관과 예문관의 양관에서 수행하던 문한관(글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관직)을 \'청직(淸職)\'이라 하여 조선 시대 관료의 꽃으로 불리우고 있었는데 규장각은 이 양관의 기능외에 승정원의 비서실 기능, 춘추관의 역사 기록 기능, 사간원의 언론 기능, 종부시의 왕실 관련 업무까지 아우르며 \"청화지직(淸華之職)\"이라 불릴 정도로 관료 기구의 핵심으로 변모한다.


 

 

 

 

초계문신제

http://blog.naver.com/yunbh66/140004434355

《왕권과 신권(臣權)의 치열한 대립 속에서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숨지는 모습을 본 정조(正祖). 그가 등극 후 설치한 규장각은 단지 ‘학문에 경도된 임금’의 호사취미였을까.


 


정옥자 서울대 규장각 관장(59·국사학과 교수)은 최근 펴낸 책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효형출판사)에서 규장각의 교육기능이 사실상 ‘왕권을 보위하는 문신 근위부대 육성이었다’는 분석을 제시했다.》


정관장은 규장각이 문화정책 수립, 추진기관이라는 전제를 인정하되 어떻게 정치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는가를 당대 정치사의 맥락에서 역동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정조는 선왕인 영조가 각 세력간의 견제를 위한 탕평책에 소진되는 것을 보면서 왕권을 옹립할 이데올로기적인 친위부대를 육성해야 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규장각의 ‘초계문신(抄啓文臣)’제도가 그 현실적인방편이었지요. ”



정조5년인 1781년 처음 실시된 ‘초계문신’이란 정6품이상이나 7품이하의 과거에 새로 급제한 37세 이하의 문신 중에서 인재를 뽑아 교육하다가 40세가 되면 현업에 복귀토록 한 재교육시스템. 인물 선정은 의정부에서 했지만 교육은 규장각에서 맡았으며 무엇보다도 정조가 직접 선정된 인물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시험을 치렀다.



“17세기의 정치구조는 산림(山林)의 활동에서 볼 수 있듯이 학계의 영수가 정계의 지도자가 되는 양상이었습니다. 이런 신하들을 통치하려면 군주 자신이 이데올로기적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해야 했기 때문에 숙종 영조 정조 등이 학문에 능통한 ‘군사(君師)’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드센 신권을 견제하기 위해 왕이 직접 신하를 가르치고 그들을 학문으로 제압해야했던 것이지요.”



정조가 명청대 패관소설이 유행하는 등의 당대 문장경향을 비판하며 문체반정을 도모한 것도 신권 견제의 일부였다. 당시 신체문(新體文)을 구사했던 것은 신권을 주장했던 노론 벽파였던 것. 정 관장은 문체반정을 통해 이들을 노론 시파로 흡수하려 했던 것이 정조의 복안이었다고 해석한다.



정 관장은 “정조는 신권 견제책으로 초계문신제 등을 통해 왕을 보위하는 이른바 ‘근신’(近臣)들을 길러냈지만 말년에는 자신이 근신을 너무 키웠다고 후회했다”고 지적하고 “이 근신세력이 이후 세도정치의 뿌리가 되는 것을 보면 개혁이란 중단없이 요구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정 관장은 30, 40대를 오로지 규장각에 쌓여있는 고서들을 읽는 일로 보낸 정조와 규장각 전문연구가. 초계문신에 관련된 자료도 “신이 올라” 하루 수십책씩 규장각 책을 읽어대던 30대 연구자 시절에 발견해 지금까지 학문적으로 다듬어왔다.


시흥환어행렬도

http://www.dgedu.net/student/go_history/sub6_1_6_0.htm


 

 

4-4. 정치 질서의 변화


1) 세도정치의 전개

 

 

 

수렴청정

http://boinp.netian.com/13_01.html

http://www.koreandb.net/koreanking/html/person/pki60013.htm

http://blog.naver.com/killidmg/120012435928


명종은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8년 동안 모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다. 문정왕후가 수 렴청정으로 왕권을 대신하게 되자 조정의 대세는 윤원형 일파에게 돌아갔다.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친동생으로 153 7년(중종32년) 김안로가 실각한 뒤 등용된 인물이었다. 그는 중종 시대부터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 일파와 왕위 계 승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세간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윤임 일파를 대윤, 윤원형 일파를 소윤이라고 했다.


 

 

 

신유박해

http://www.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231-sinyubaghe.htm

1801년(순조 1) 천주교도를 박해한 사건을 말한다.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는 당시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1794년 청나라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국내에 들어오고 천주교도에 대한 정조의 관대한 정책은 교세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례 ·의식을 거부하는 천주교의 확대는, 유교사회 일반에 대한 도전이자 지배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때문에 정조가 죽고 이른바 세도정권기에 들어서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1801년 정월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사교(邪敎) ·서교(西敎)를 엄금 ·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렸다.


  이 박해로 그해 2월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의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되고, 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즉, 정약종(丁若鍾)·최창현(崔昌顯)·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民)·이승훈(李承薰)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했다. 권철신(權哲身)·이가환(李家煥)은 옥사했으며, 이존창(李存昌)은 충청도 공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고 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 형제는 유배당했다. 여주와 양근 감옥에 갇혔던 이중배(李中培)·최필제(崔必悌) 등의 경기지방 천주교도들도 다수 처형당했다. 그리고 당시 조선에 입국해서 활동하던 주문모 신부는 박해기간동안 주로 강완숙 골롬바의 집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당시 배교자 김여삼의 밀고로 신부의 거처가 알려지자 주신부는 정조의 서형(庶兄) 은언군(恩彦君)의 처 송 마리아의 집(廢宮)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2주일 후 주신부는 자신만 자수하면 박해가 누그러 질 것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의금부에 자수하였다. 그는 취조중에도 언제나 순교할 각오를 당당하게 말하고 '호교론' 의 글을 써서 판관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3월 15일 조정에서는 주신부를 청국인으로서 본국으로 송환하기 보다는 즉시 군문에 붙여 사형하기로 결정하고 4월 19일에 순교하게 되니 그의 나이 50세였다. 주문모신부의 순교는 본인이 의도한 바와는 반대로 박해가 더욱 확대되었다. 그리고 5월 22일에는 주문모신부를 6년간 헌신적으로 봉사한 강완숙(골롬바)이 8명의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했다.


  또한 신유박해는 황사영(알렉시오)의 체포를 계기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그는 이미 2월 11일에 체포령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7개월이 넘도록 그의 행방을 전혀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전주에서 유항검이 황심을 북경 왕래자의 하나라고 자백하자 9월 25일에 황심이 체포되고 황심은 그 다음 날 황사영의 거주지를 실토하게 됨으로써 9월 29일 황사영도 제천에서 피신 중이던 김한빈과 함께 체포됐다.


  황사영은 제천에 은신해 있는 동안 백서를 작성했다. 이 비밀 편지는 황심이 옥천희와 같이 옷속에 감추어서 그해 10월 동지사 일행에 끼어 가서 북경주교에게 전달하려고 했으나 황심의 체포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백서는 황사영 혼자서 구상하고 쓴 글임에도 조정에서는 정약용, 이치훈과 함께 공모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문초했으나 다른 이들과의 관계가 없음이 밝혀지자 두사람은 귀향선고가 내려지고 황사영은 11월 5일 옥천희와 현계흠과 함께 대역 부도죄가 선고되어 처형당하였으며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27세였다.


    이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자, 또한 이를 구실로 노론(老論) 등 집권 보수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다툼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신유박해 이후 살아남은 신자들은 수도와 박해지를 피해 강원도와 경상도로 이주하면서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것이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배교자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는 반면에 새로운 입교자도 늘어갔다.



 

 

 

흥선대원군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C8%EF%BC%B1%B4%EB%BF%F8%B1%BA&sort=0&c=3&qt=df


 

 

 

2) 세도 정치기의 권력 구조


3) 세도 정치의 폐단

 

 

 

세도 정권

http://www.osan.hs.kr/%7Ecasadeco/menu07-02-c.htm

http://tutork.com/sh1-20.htm

조선 후기, 국왕의 외척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여 왕명의 출납과 관리의 임면(任免) 등에서 왕권을 대행하던 비정상적인 정치 형태. 순조 때 안동 김씨, 헌종 때 풍양 조씨, 철종 때 다시 안동 김씨 등 에 의해 3대 60여 년 간에 걸쳐 외척 가문의 세도 정치가 행해졌다.


   19 세기의 세도 정치는 종래의 붕당 정치 변질에 따른 일당 전제마저 거부하고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정치 형태로서, 정권의 최소한의 사회적 기반마저 결여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나마 중세적 정치 체제를 유지해 주던 붕당 정치는 완전히 파탄되고 말았다.


   붕당 정치에 있어서는 붕당 상호 간의 대립으로 위정자들이 어느 정도 여론을 수렴하고 정치적 명분을 내세워 사회 변동에 대처하기도 하였으나, 세도정권은 그 어느 누구의 간섭과 견제도 없이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하였다. 따라서, 관료들은 오직 자기 지위의 보전을 위해 세도가의 비위를 맞추기에만 급급하고, 그러다 보니 정치 질서는 문란하기 그지 없었다. 당시 조선 사회에는 봉건적 질서의 와해 속에 사회, 경제, 사상 등 모든 면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전개되고 있었지만, 세도 정권은 이를 묵살하고 백성에 대한 수탈에만 집착하는 행정 부재, 정치 부재의 행태를 연출하였던 것이다.


   역사의 발전 방향에 역행하는 속성을 드러낸 세도 정권의 수탈은 이른 바 삼정의 문란으로 나타났고, 그 결과 농촌의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으며, 민중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항거하였다. 19 세기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민란은 바로 이러한 세도 정권의 부패와 비리에 항거한 농민들의 분노가 표출된 것이었다


 

 

 

고증학

http://211.252.89.97/ban/sa/ex/h6361.htm

중국의 명(明)말 ·청(淸)초에 일어난 실증적(實證的) 고전 연구의 학풍 또는 방법으로 중국에서는 고거학(考據學), 또는 박학(朴學)으로 많이 불린다. 이 학풍이 일어난 배경은 현실 문제는 접어두고 이기(理氣)니 심성(心性)이니 하는 공허한 형이상학, 이른바 송학(宋學)에 대한 반발과 반청(反淸)감정, 시대의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어났다. 송학이란 이름에 맞서서 이를 한학(漢學)이라고도 불렀다. 학문 방법은 매우 치밀하고 꼼꼼하게 글자와 구절의 음과 뜻을 밝히되 고서(古書)를 두루 참고하여 확실한 실증적 귀납적 방법을 택하여, 종래의 경서 연구 방법을 혁신하였다. 고증학을 5가지로 나누어 ① 훈고학(訓뭍學) ② 음운학 ③ 금석학 ④ 잡가 ⑤ 교감학(校勘學)으로 분류한다. 이 학풍이 중국에 끼친 영향을 보면 이른바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주장하여 정치 ·민생(民生)이 우선이란 이론을 제공했고 학문 연구는 정확한 음운과 뜻[訓뭍], 역사적 고증이 있어야 하는 새로운 학문풍토를 정착시켰다. 대표적인 학자는 염약거(閻若揖)  ·호위(胡謂) ·모기령(毛奇齡) ·만사대(萬斯大) ·만사동(萬斯同) 등이다. 이 학파가 극성기에 오파(吳派)와 환파(椀派)로 분파하였는데 오파에서는 혜동(惠棟)이 영수가 되고 환파에서는 대진(戴震)이 영수였는데 오파는 순수한 한학(漢學)을, 환파는 음운 ·훈고 ·수학 ·천문학 ·지리학 ·수리학(水利學)을 연구했다. 대진의 제자엔 단옥재(段玉裁)와 왕염손(王念孫) 부자(父子)가 있다. 이 고증학은 영 ·정조 때 일어난 한국 실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渤海考)》, 김정호(金正浩)의 《마과회통(麻科會通)》, 박세당(朴世堂)의 《색경(穡經)》, 서유구(徐有而)의 《임원경제십륙지(林園經濟十六志)》, 신경준(申景濬)의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 홍대용(洪大容)의 《담헌서(湛軒書)》,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박지원(朴趾源)의 《연암집(燕巖集)》 등 각 분야의 실학적인 저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4-5. 대외 관계의 변화


1) 청과의 관계

 

 

 

간도협약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B0%A3%B5%B5%C7%F9%BE%E0&sort=0&c=1&qt=df

http://www.dokdocenter.org/bbs/zboard.php?id=tgan

http://100.naver.com/100.php?id=3045

청나라는 19세기 말기부터 간도가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여 군대까지 투입하고 지방관까지 두었으나, 한국도 그에 강력히 맞서 영토권을 주장하였으므로 간도영유권 문제는 한·청 간의 오랜 계쟁문제(係爭問題)였다.


일제는 1905년(광무 9)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뒤 청나라와 간도문제에 관한 교섭을 벌여 오다가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푸순[撫順]탄광 개발 등 4대 이권을 얻는 대가로 한국 영토인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는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 협약은 전문 7조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① 한·청 양국의 국경은 도문강(圖們江:두만강)으로써 경계를 이루되, 일본정부는 간도를 청나라의 영토로 인정하는 동시에 청나라는 도문강 이북의 간지(墾地)를 한국민의 잡거(雜居)구역으로 인정하며, ② 잡거구역 내에 거주하는 한국민은 청나라의 법률에 복종하고, 생명·재산의 보호와 납세, 기타 일체의 행정상의 처우는 청국민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③ 청국정부는 간도 내에 외국인의 거주 또는 무역지 4개처를 개방하며, ④ 장래 지린[吉林]·창춘[長春] 철도를 옌지[延吉] 남쪽까지 연장하여 한국의 회령(會寧) 철도와 연결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것으로 일본은 만주 침략을 위한 기지를 마련하는 동시에, 남만주에서의 이권을 장악하고, 조선통감부 임시간도파출소를 폐쇄하는 대신 일본총영사관을 두어 한국인의 민족적 항쟁운동을 방해하는 공작을 하게 되었다.


 

 

 

천주실의

http://www.jeri.or.kr/jries/web/go/soc/his/%BF%F620.htm

http://211.252.89.97/ban/sa/ex/h6362.htm

http://www.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350-1-chunjusilyi.htm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 M.리치가 저술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 처음에는 《천학실의(天學實義)》라고 하였다.

원제목은 《De Deo Verax Disputatio》로 하느님에 대한 참된 토론이라는 뜻이다. 편술한 시기 는 1593 ∼96년으로 보이며, 1603년 베이징〔北京〕에서 정식으로 간행된 뒤 2판·3판이 계속 나왔다.

모두 8편 174항목으 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국학자와 서양학자의 토론형식으로 전통유학과 불교·도교 등을 논하고, 스 콜라철학과 선 진공맹(先秦孔孟)의 고전을 들어 가톨릭의 교리와 사상을 이론적으로 옹위하면서 가톨릭신앙의 몇 가지 본질적 문제를 인간의 이성과 자연적인 식견으로 입증해 나갔다. 내용은 첫째 우주만물에는 창조주와 주 재자가 존재하 며, 둘째 인간영혼은 불멸하는 것으로 후세에 상선벌악(賞善罰惡)이 있고, 셋째 불교의 윤회설을 배격, 그리스 도 신앙은 구원을 가져다 준다는 것 등이다.

리치는 불교와 도교의 허구와 오류를 공박하였 고, 유교에 대해서는 태극설만을 배격하고 윤리적인 면에서의 일치, 우상 배격, 상제와 천주의 합일성 등에서 그 리스도교와의 전이가 가능하다는 보유론적(補儒論的) 이해를 보였다. 한국에 전파된 것은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譚)》 과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 대략적으로 소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출간 20년 내의 일로 짐 작된다. 18세기 중엽에는 한글 고사본(古寫本)이 많이 나왔다. 이 책은 유교전통사회에 가톨릭신앙을 심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고대사상과 서유럽 윤리사상의 융합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사상사 적 가치를 지닌다.


 

 

2) 일본과의 관계

 

 

 

도쿠가와 막부

http://blog.naver.com/eueesuk/20010890440

도쿠가와의 성을 따라 도쿠가와막부(幕府)라고도 한다. 그 지배체제는 가마쿠라[鎌倉] ·무로마치[室町]막부에 비하여 강력하였으며 전국의 통치권을 장악, 구게[公家] ·지샤[寺社] 세력을 통제하고 각처에 할거하는 다이묘[大名]들을 신속(臣屬)시켜 ‘막번체제(幕藩體制)’라는 집권적 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 전국 수확고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직할영토를 보유하고, 금 ·은 ·구리의 화폐발행과 주요도시를 직할하여 확고한 경제기반 위에 5,6만에 이르는 막강한 군사력을 지녔다.




막부의 직제는 다이로[大老]라는 최고직 1명을 비상근(非常勤)으로 두고, 그 밑의 로추[老中] 4,5명이 정무를 총괄하고 와카도시요리[若年寄]는 로추를 보좌하는 한편 하타모토[旗本:만 석 이하의 직속 무사]를 감독하였다. 관리는 반가타[番方:武官]와 야쿠가타[役方:文官]로 구분되었으며, 17세기 이후는 쇼군[將軍] 직속의 소바요닌[側用人]을 두어 이들이 세력을 휘둘렀다.


 

 

 

기유약조

http://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83-giyuyagjo.htm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536&no=1785


1609년(광해군 1) 일본 도쿠가와 막부와 맺은 전문 13조의 송사조약(送使條約)이다.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국교의 재개를 위해 일본은 끈기 있게 통교 요청을 해 왔고(1599~1600), 이에 대해 우리 조정에서는 찬 ·반 양론이 대두되었으나 일본측이 대조선통교재개(對朝鮮通交再開)를 위해 적극적인 태도로 나오자 우리측은 국서(國書)를 가지고 올 것, 범능적(犯陵賊:宣陵 ·靖陵을 陵侵한 범죄인)의 압송문제, 피로인(被虜人)의 송환문제 등 대일강화조약의 성립조건을 제시했는데, 일본이 이를 이행했으므로 조약을 위한 안이 논의되었다. 조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왜관(倭館) 접대는 국왕사 일례(國王使一例) ·대마도주 특송 일례(對馬島主特送一例) ·대마도 수직 일례(對馬島受職一例)의 3가지로 한다. ② 국왕사, 배의 왕래는 상 ·부선(上副船)으로 한다. ③ 대마도주의 세사미두(歲賜未豆)는 100석으로 한다. ④ 대마도주의 세견선은 20척으로 한다. ⑤ 수직자는 연 1회 내조(來朝)하되 타인을 파견할 수 없다. ⑥ 선형(船型)은 길이에 따라 대 ·중 ·소로 나누고 선부(船夫)도 이에 따른다. ⑦ 모든 출래선(出來船)은 도주문인(島主文引:일종의 통행 증명서)을 소지해야 한다. ⑧ 대마도주에게 도서(圖書)를 조급(造給)하되 예조(禮曹) ·교서관(校書館) ·부산포(釜山浦)에 견본을 두고 이를 고험(考驗)한다. ⑨ 무문인자(無文引者)와 부산포 외에 입항한 자는 적으로 간주한다. ⑩ 과해량(過海糧)은 대마도인 5일분, 대마도주 특송인 10일분, 국왕사 20일분을 지급한다. ⑪ 왜관의 체류시일은 대마도주 특송 110일, 기타 세견선 85일, 표류인(漂流人)의 송환 등 기타 55일로 제한한다. ⑫ 대마도 도주(島主)의 세견선은 대소를 구별 않는다. ⑬ 기타는 전례에 따른다. 이 가운데 특히 논의된 것은 세견선문제(歲遣船問題)와 도서부험문제(圖書符驗問題)였다


 

 

 

조선통신사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C1%B6%BC%B1%C5%EB%BD%C5%BB%E7&sort=0&c=1&qt=df

http://www.heritagekorea.com/cgi-bin/technote/read.cgi?board=bookbd&y_number=5&nnew=2


 

 

 

안용복

http://www.tokdo.co.kr/kor/people/ahnyb.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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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에 대한 정확한 내용은 현재까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단지 자료를 통해 추측하 는 정도이다. 일본 돗토리현의 18세기 역사가 오카지마의 「죽도고」라는 사료내에 「오타니가(家) 선인(船人)에 의한 조선인 연행」라는 독립된 장에는 안용복의 1차 도 항에 관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으며, 이 부분에 안용복의 출생을 추측할 만한 몇가지 내용을 볼 수 있다.( WIN, 96년 5월 호 참조 ) 참고로 「죽도고」의 안용복 관련내용 은 『와다 시키부의 「당번공장(控帳:일지)」을 기본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죽도고'의 본문에는 「동래출신의 안핀샤(안용복)의 나이는 42세」라는 내용이 실려있다. 이로서 안용복의 출생년을 추측할 수 있지만, 아쉽게도 별도로 첨부된 안핀 샤의 요패(호패)와 관련된 기록에는 본문의 나이와 달리 적고 있어 혼선을 빚고 있다.


안용복이 차고 있었다는 호패에는 양면에 각각 「동래」(東萊 , 출신지)와 「경오」 (午, 호패발급년도로 추측)가 횡으로 쓰여져 있으며, 전면 「동래」자 아래로 「000年 三十三/ 長四尺一寸/面鐵00生0無/主京居吳忠秋」라고 써있으며, 「경오」라는 글자 아 래로는 「釜山佐川一里第十四虎三戶」라고 적혀있다.


즉, 여기서 만약 「경오」년이 호패를 발급받았던 해라면 안용복의 나이는 1차 도항 (1693년)때 36세 일 것이다. (안용복이 호패를 발급받은 해가 경오년이고, 그 해에 33 세 였다면, 경오년은 1690년 일 것이다) 아울러 안용복의 신장에 대한 기록 「長四尺一 寸」이란 내용은, 4척1촌(123㎝)이므로 이는 착오로 생각할 수 있으며, 외모는 검은 얼 굴색과 마마자욱 이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안용복은 부산 좌천동에 살았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