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근세의 정치


3-1. 근세의 세계


 

 

 

티무르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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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에서 티무르와 그의 자손이 지배하였던 왕조(1369∼1508).

창시자 티무르는 몽골제국 왕실의 후예로, 흠찰한국(欽察汗國)을 정복하고 사마르칸트에 도읍하여 인도 ·투르크를 정복한 뒤 명(明)나라를 정벌하러 가다가 1405년 병사하여 그의 손자 칼릴샤[哈里沙]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칼릴샤는 폭정을 펴 1409년 폐위되고, 티무르의 제4남 샤로흐[沙哈魯]가 즉위하여 아프가니스탄의 서부 헤라트를 도읍으로 삼았다. 그의 38년 간의 치세(治世)는 티무르왕조의 전성시대를 이루었으나 1447년에 즉위한 그의 아들 울루그 베그가 살해된 뒤에는 혼란에 빠졌다.

6대 아브사이드(재위 1455∼69)에 이르러 우즈베크족의 도움으로 마와란나하르를 영유하게 되고 그의 아들 아하마드(재위 1470∼99)의 치세까지 중흥을 이루었으나 그의 사후 내란상태에 들어가 1500년 우즈베크족에게 멸망하였다.


 

 

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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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비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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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이슬람왕조(1502∼1736)이다.  이 가문(家門)은 예언자 마호메트의 혈통을 이었다고 칭하면서 대대로 이란 서부에 있는 아르다빌에서 신비주의 교단의 성자(聖者)로서 다수의 신도를 얻었다. 후에 이 교단이 무장화하여 이스마일 1세(재위 1502∼1524)는 투르크계(系) 부족의 병력을 중심으로 1502년 백양왕조(;아제르바이잔을 중심으로한 투르크멘 족의 왕조)를 격파하고 타브리즈를 수도로 사파비왕조를 창시하였다. 그는 티무르왕조의 쇠퇴를 기회로 하여 이란 전역을 평정하고 유프라테스강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 '제왕(諸王)의 왕'이라고 부르면서 이란의 민족적 부흥을 실현하였다. 또한 이슬람교의 시아파(派)를 국교로 하여 신정국가(神政國家)를 세워 신앙의 통일로 이란의 민족의식을 견고히 하였으나 수니파의 오스만투르크제국(帝國)과 대립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북동쪽의 우즈베크족과도 항쟁하였다.

  제5대 아바스 1세(재위 1587∼1629)는 이스파한으로 천도하고 관료기구의 정비, 군제개혁 등으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확립하였으며 서쪽의 오스만투르크와 싸워 위세를 떨치면서 최성기를 이룩하여 이란적 특색의 이슬람 문화를 번영시켰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국정이 문란하여 17세기 후반에는 쇠퇴하였으며 1722년 새로 일어난 아프간족의 마흐무트의 침입으로 1736년 멸망하였다.


 

 

무굴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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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전반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인도 지역을 통치한 이슬람 왕조(1526∼1857)이다. 무굴제국의 시조 바부르는 중앙아시아를 전전한 후 카불을 점령하고, 이 곳을 근거지로 하여 1526년 인도에 침입, 델리 왕조인 로디조(1451~1526)의 이브라힘왕을 델리 북방의 파니파트전투에서 격파하고, 델리를 탈취하여 여기에 무굴제국을 창시하였다. 이때 바부르는 화약과 대포를 이용하여 10배의 상대군을 격파하였다. 바부르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인 제2대 후마윤은 벵골 ·비하르 지방에서 일어난 아프간계(系) 수르 왕조의 셰르 샤에게 패하여, 1540년 페르시아로 도망하였다가 1555년 재차 델리를 점령하고 일시 중단되었던 무굴 왕조를 부활시켰다. 그 뒤를 이은 왕이 13세에 즉위한 M.악바르 황제이다. 그는 북인도에 지배력을 확보하게 되자 그 세력을 인도의 다른 지방까지 확대하여, 라자스탄 지방에 독립국으로 있던 라지푸트족의 왕(라자)들을 동맹세력으로 끌어들였다. 또한 1573년 서방의 구자라트 지방에 진격하여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 왕조를 타도하였다. 동방으로는 1576년 벵골 지방까지 그의 지배하에 넣었다.


  1580년대에는 인도 북서부지방의 펀자브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카불까지도 군대를 파견하여 인더스강 하류 신드 지방까지 정복하였다. 1590년대에는 남하정책으로 데칸 지방의 이슬람 여러 왕조에도 세력을 뻗어나갔다. 행정면에서도 악바르 황제는, 이슬람교도나 힌두교도 등 종파를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라 중용하여 각 지방의 토지측량이나 지세(地稅) 결정 등의 실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따라서 무굴제국의 행정 ·사법 ·지방행정 등의 지배체제는 악바르 황제 시대에 거의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악바르 황제의 사후 자항기르, 샤 자한, 아우랑제브로 이어져 이 시기는 무굴제국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특히 제6대 아우랑제브는 데칸의 이슬람 여러 왕조를 정복하여 최대의 판도를 실현하였다. 그러나 그의 만년인 1674년 힌두교도들이 데칸지방에 마라타왕국을 세워, 무굴제국의 강력한 적대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707년 아우랑제브가 데칸고원의 원정 도중 죽자 제위(帝位) 계승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 무굴의 중앙 권력은 급속히 쇠퇴해졌다. 18세기 말에 이르자, 약화된 무굴의 중앙권력은 데칸지방에서 델리 주변까지 세력을 확장한 마라타동맹에 의하여 좌우되어, 무굴 황제의 지배력은 약화되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쳐 영국의 식민지 지배세력은 마라타 ·마이소르 등 강력한 봉건세력을 멸망시키고, 인도에서의 식민지 지배영역을 확대하여 갔으나, 명목상으로만 존속한 무굴 황제의 지위는 그대로 남겨 두고 식민지 지배의 도구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1857년, 북인도를 중심으로 ‘세포이의 반란’이 일어나자, 각 주둔지에서 반란을 일으킨 인도의 병사들이 델리에 집결하여, 무굴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를 추대하여 새로 정권을 수립하였다. 2년에 걸친 이 반란이 영국군의 무력으로 진압되자, 그들은 탄압정책을 한층 강화하여, 그때까지 명목상으로만 남겨 두었던 무굴 황제의 지위를 폐함으로써 무굴제국은 멸망하였다.


  무굴제국의 역사를 역대 왕들의 흔적을 통해 살펴보면 먼저


  바부르 (Babur, 1526 -1530)

  1526년에 바부르가 인도로 침략할 당시에 로디(Lodi)왕조가 아그라와 델리를 통치하고 있을때였으며 로디왕조는 아그라와 델리 그리고 펀잡의 일부를 포함하는 거대한 제국의 주인으로서 군림하고 있을때였다. 그러나 로디왕조는 바부르에 의해 패배당했으며 1526년 4월 21일의 파니팟트(Panipat)의 세번째 전투에서 로디는 사망했다. 이 유명한 전투이후에 바부르는 그의 아들 후마윤(Humayun)과 크와자 키타칸(Khwaja Kitakhan)의 지휘아래 아그라를 점령하기위해 서둘러 그의 군대를 파견했다. 동시에 바부르 자신은 델리를 점령하기위해 델리로 진군했으며 1526년 5월 10일에 로디의 궁전에 입성했다. 그의 아들 후마윤은 아그라에서 바부르를 맞이하였으며 그에게 유명한 다이아몬드인 코히누르(kohinoor)를 바쳤다.


   아그라에서 초창기 바부르가 머무는 동안에는 그는 인도에 머물 마음이 없었으나 그의 마음은 얼마지나지 않아서 바뀌었으며 결국 인도에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인도에서의 무굴 제국은 그의 통치기간동안 조용할 날이 없었으며 그는 전투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러나 그의 생애 마지막 4년간만을 단지 아그라에서 보낼수가 있었다. 바부르의 통치기간당시에 아그라는 길이로는 2마일정도였으며 넓이로는 반마일에 이르는 작은 도시에 불과하였다. 4년이라는 짧은 기간안에 그는 아그라에 "구이에 아프간(Gui-e-Afghan)"으로 일컬어지는 아름다운 정원을 건축했으며 후에 이 정원은 "아람박(Aaram Bagh)"이라고 불리어졌다. 이 정원은 야무나강둑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심으로부터 3킬로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바부르는 정원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람박 또한 그러한 이유로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이 정원안에는 화려한 건축물과 욕탕과 사원등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이정원은 자신이 죽은후에라도 이곳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그런 정원이었으며 이런연고로 바부르의 사후에 그의 시신은 한동안 아람박에 매장되었다가 후에 카불(Kabul)로 옮겨졌으며 그곳에서 그는 잠들고 있다.


 


  후마윤 (Humayun,1530 - 1556)

  바부르의 죽음 이후에 그의 아들 후마윤은 확실한 자신의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었으며 1530년에 왕좌를 물려받았다. 이때에 후마윤은 경험면에서 그리고 행정적인 면에서 그의 능력으로 제국을 다스리기에는 어려운때였다. 그는 유명한 아프간 지배자인 세르사 수리(Shershah Suri) 에 의해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힘을 결집해서 1539년에 후마윤을 공격했으며 결국 후마윤은 인도를 떠나야 할 상황으로 몰렸으며 아프카니스탄의 카불에 도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편으로 약 15년간의 인도에서의 생활기간동안 후마윤은 하미다 바노(Hamida Bano)와 결혼을 했으며 후에 그녀는 위대한 무굴의 황제인 악바르를 낳게 된다. 후마윤은 카불의 지배자의 힘을 빌어서 아프간으로부터 그의 왕좌를 다시 얻으려는 노력을 했다. 후마윤은 카불왕의 도움으로 아프간을 공격했고 시르힌드에서 그들을 패배시킬수가 있었고 아그라를 포함한 자신의 제국을 재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불과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후에 후마윤은 델리에서 사고를 당하게 된다. 그는 책을 상당히 좋아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자신소유의 아름다운 도서관을 갖고 있기도 할정도였다. 하루는 그가 그의 도서관의 계단을 오르는 중에 불행하게도 미끄러지는 바람에 1556년에 그의 생을 마치게 된다. 그의 무덤은 후에 그의 아들과 부인에 의해 델리에 지어졌으며 무덤안에는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함께 묻혀진것으로 알려진다.


 


  악바르 (Akbar the Great, 1556 - 1605)

  잘라우딘 모하메드 악바르(Jalauddin Mohammad Akbar) 는 1542년 10월15일에 아마르콧트(Amarkot)성에서 태어났다. 악바르는 야무나 강둑의 서쪽편을 따라 도시를 확장했으며 도시의 방어와 장식을 위해 6개의 높은 성문과 성주위를 흐르는 도랑을 만들었으며 하루만에 성곽이 봉쇄되도록 만들었다. 악바르는 단지 14세의 나이에 왕족의 확실한 계승자로 낙인을 받았으며 그는 1556년에 그의 스승이자 장군 바이람 칸(Bairam Khan)의 도움으로 칼란누르(Kalanoor)에서 왕위를 계승했다.


  바이람칸의 도움으로 악바르는 그 유명한 빠니팟트의 5섯번째 전투에서 아프간을 패배시켰으며 1558년에 악바르는 처음으로 아그라에 도착하였다. 아그라는 바부르와 후마윤에 의해 이미 무굴제국의 정권아래 들어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역사적인 도시는 정치적인 세력과 문화적인 성숙도 그리고 건축적인 영화에 있지는 못했다. 그러나 악바르를 비롯하여 그의 연이은 계승자인 자항기르와 샤자한에 의한 통치기간동안에 비로서 아그라의 진가를 갖추게 되었으며 무굴제국의 수도로서의 역할을 시작하였다.


  1566년에 악바르는 오래된 바달가르(Badalgarh) 성을 부수고 아그라에 새로운 성을 건축하기 시작하였으며 아그라성은 예술과 건축의 아름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악바르는 무굴제국의 수도로서의 아그라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수많은 쓰러져가는 건물들을 재건축하기 시작했다. 악바르는 유능한 행정가였으며 많은 교육을 받지는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능력있는 사람들과 유능한 관료들의 도음으로 그는 행정전반을 잘 처리해 나갔다. 또한 악바르는 무슬림통치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힌두인들의 존재가치 또한 인정했으며 이웃하고 있는 라자스탄의 라지푸트들과의 혼인관계에 대한 허용을 선포했으며 그뿐아니라 자신이 직접 라자스탄의 지배계급의 공주인 조다 바이(Jodha Bai)라는 여인과 결혼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악바르는 자신의 관료를 무슬림뿐만이 아니라 힌두인들에게서도 기용하였으며 거기에는 어떤 계급과 신앙의 차별이 없이 오로지 국가의 이익만을 고려할 뿐이었다.


  그는 행정부 전반에 걸친 행정개혁을 단행했으며 이로인해 그의 9명의 행정관료들(9개의 보석으로 불리기도 한다)의 도움으로 악바르는 인도에 매우 효율적인 행정시스템을 도입했으며 그 자신이 인도의 위대한 왕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1568년에 악바르는 칫토르가르(Chittorgarh)를 공격해서 점령했으며 그곳에서 승리의 표시로 그성의 높은 성문을 운반해서 아그라에 보존시키기도 하였으며 지금도 그 성문을 볼수가 있다고 한다. 그때까지 악바르는 아들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고 그의 관료중의 한사람이 악바르에게 유명한 수피 성자 쉐이크 살림 씨스띠(Sheikh Salim Chisti)를 소개해 줬고 이 때가 1569년의 일이었다. 그 성자는 악바르가 사는 아그라로부터 37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있는 파테푸르 씨크리(Fathepur sikri)에 살고 있었다. 악바르는 걸어서 그 성자에게 가서 그를 영접했으며 그 유명한 성자는 악바르에게 아들의 축복을 내려주었으며 이와 같이 해서 악바르는 아들을 얻게 되었다. 악바르는 그때 그 성자와 함께 살기로 마음먹고 1569년에 제국의 수도를 파테푸르 씨크리로 선포하였으며 새로운 도읍지로서의 건설을 명령하였다. 많은 건축물들이 새로운 수도에 지어졌으며 그는 구자랏트(Gujarat)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높은 문을 건축했으며 그것의 이름을 불란드 다르와자(Bland Darwaza) 또는 승리의 문이라고 지었다. 1575년에서 1586년까지 악바르는 파테푸르 씨크리에서 인도를 지배하였으며 유명한 성자 살림의 사망후에 그는 파테푸르 씨크리에 그 성자를 기리기 위해 하얀색의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무덤을 만들었다. 그 성자는 죽기전에 악바르에게 파테푸르 씨크리를 떠나서 아그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조언했다고 알려진다. 그래서 그 성자의 건의에 따라서, 그리고 심각한 마실물의 부족으로 인하여 악바르는 1586년에 아그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악바르는 "디네 라이"(Din e Lahi) 라고 불리는 새로운 종교를 널리 전파했으며 그 당시의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좋은 가르침을 거의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악바르는 마음과 정신이 하나된 통일인도에 대한 전망을 주시하고 있었으며 두개의 주류 공동체인 힌두인들과 무슬림인들 사이의 문화적 융합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구상하기도 했으며 그것을 위하여 "술라이 쿨(Sulha-I-kul)"이라는 정책을 선포하기도 했다. 따라서 악바르 통치하의 아그라는 문화적 통합의 중심지가 될수가 있었다. 50년간의 위대한 통치후에 악바르는 1605년 10월 25에서 26일로 넘어가는 밤사이에 사망했으며 그의 무덤은 시칸드라에 마련되었다. 이 무덤은 이미 악바르 자신에 의해 그의 생애동안에 지어진 것이며 그의 사망후에 그의 아들 자항기르에 의해 완성되었다.


 


  자항기르 (Jahangir, 1605 - 1628)

  자항기르는 1569년 8월에 파테푸르 씨크리에서 태어났으며 악바르는 그의 아들의 이름을 수피성자의 이름을 따서 술탄 무하마드 살림(Sultan Muhammad Salim) 으로 이름을 지었다. 악바르는 그를 애정으로 쉐쿠 바바(Shekhoo Baba)라는 이름으로 부르곤 하였다. 어린왕자 시절의 살림은 파테푸르 씨크리에서 1573년에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페르시아어와 터키, 아라비아어, 힌디 그리고 역사와 지리 수학등을 배웠다. 따라서 그는 훌륭한 힌디, 아라비아, 터키, 페르시아어의 학자가 되었으며 악바르의 사망후에 1605년 11월 3일에 아그라에서 왕좌를 물려받았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왕관을 머리에 취했다. 자항기르는 쉐르 아프간(Sher Afghan)을 살해했으며 나중에 누르마하이(Noor Mahai)와 결혼을 했으며 그는 그녀를 누르이 자항(Noor-I-Jahan) 혹은 세상의 빛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후로 여인과 술에 빠졌으며 따라서 그의 통치기간동안 전적으로 누르이자항이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고 그는 단지 명목상의 황제에 불과했다. 그의 부인인 누르자항은 당대의 풍속의 유행에 대단히 민감했으며 또한 그녀는 미술을 장려했고 자신의 부모들에 대하여는 상당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죽고난후에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해 아름다운 건축물을 야무나 강둑 동쪽편에 지었으며 이름을 잇트마드우드 다울라라고 지었다. 그건물은 아름다운 하얀대리석의 무덤이며 훌륭한 상감세공작품과 여성의 우아함등이 어우러져 있다.


 


  샤자한 (Shahjahan, 1628 - 1658)

  샤자한의 어린시절이름은 꾸람(Khurram)이었으며 1592년 라호르(Lahor)의 꾸람에서 태어났다 . 유능한 장군으로서 수많은 유명한 전투에서 이름을 날리던 어린 왕자 꾸람은 인도의 미래의 황제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꾸람은 자신의 다른 모든 형제들을 죽이고 나서 모하밧트 칸(Mohavat Khan)과 누르자항의 오빠이자 꾸람의 장인인 아사프 칸(Asaf Khan)의 도음으로 1628년 2월에 인도의 제황이 되었다. 이후에 아사프칸은 수상이 되었고 모하밧트칸은 7000의 군사와 7000의 기마병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샤자한은 거대한 건물과 웅장한 건축물 그리고 궁전 ,기념비등을 건설하는것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그라를 빛나고 찬란한 도시로 만들었다. 그는 1612년 4월에 아르주만드 바노(Arjumand Bano)와 결혼했으며 그녀는 샤자한으로 하여금 사랑의 덫에 걸리도록 하기에 충분했으며 샤자한은 그녀가 죽은후에 그녀를 기념하기 위한 크고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주겠다고 뭄타즈마할에게 약속을 하였다. 그래서 뭄타즈가 1631년에 죽었을 때 그는 상당한 충격에 빠졌으며 얼마후에 그는 그녀에게 약속했던 그리고 그녀를 기리기 위해 하얀대리석의 꿈으로 불려지는 타즈마할을 건축했으며 그것은 세계7대불가사의로 불리게 되었다. 샤잔은 오늘날의 델리로 알려진 지역인 샤자하나바드를 조성했으며 이것만이 아니고 그는 레드포트, 마스지드 그리고 타테 타우스로 불려지는 아름다운 공작왕좌등을 만들었다. 그 탁테타우스는 상당한 양과 가치의 금으로 만들어졌으며 이왕좌의 아름다운 공작상은 밝은 보석으로 만들어졌다. 왕좌의 천장 역시 금과 귀금속, 그리고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져 있으며 에머랄드색의 많은 기둥들로 받쳐지고 있다. 또한 왕좌로 오르는 계단은 은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놀라운 물건은 1736년에 나디르에 의해 페르시아로 옮겨져갔으며 나중에 페르시아에서 녹여졌다고 한다. 샤자한은 그의 노년기를 혐오와 심한 고통속에 보내게 되었다. 그것에 관한 이유는 많이 있을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인생의 중반에 그의 사랑하는 부인을 잃었다는 것이고 두번째로 인생의 기간동안 병속에 지냈다는 것이고 세번째로는 그는 그의 막내아들에 의해 아그라의 성에 갇혔다는 것과 샤자한의 나머지 아들들이 모두 자신의 막내아들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사실이 그 이유들일 수 있다. 오로지 그의 사랑하는 딸인 자하나라 베굼(Jahanara Begum)만이 아버지와 함께 보냈으며 심지어는 아그라성에 함께 갇히기도 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괴로워하는 늙은 아버지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소원이 자신의 사랑과 함께 그옆에 묻히는 것이라고 표현했으며 이후에 그는 1666년 1월 31에 하늘로의 영원한 항해에 나서게 되었다. 그의 잔인한 아들인 아우랑제브는 아버지의 장례식에조차 참석할수 없었으며 위대한 샤자한은 시종들에 의해 옮겨져 뭄따즈옆에 묻혔고 아우랑제브는 한달가량뒤에 아그라에 와서 그의 아버지 기념비 근처의 대리석 울타리 설치의 형식적인 절차를 수행했을 뿐이었다. 후에 샤자한의 딸인 자하나라역시 1681년 즉 아버지가 죽고난후 15년후에 젊은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따르게 되었고 그녀는 델리의 니자무딘의 한 장소에 묻혔다.


 


  뭄따즈 마할 (Mumtaj Mahal 1592 - 1631)

  뭄따즈 마할이라는 이름은 샤자한의 사랑하는 아내에게 주워졌던 이름으로서 실제의 그녀의 이름은 아르주마나드 바노 베굼(Arjumanad Bano Begum)이며 왕자인 꾸람과 결혼한 여인이었다. 이 꾸람왕자가 나중에 무굴제국의 5번째 황제인 샤자한이다. 결혼당시의 그녀의 나이는 19살 이었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야민우다울라 아사프 칸으로서 그는 자항기르 관료로서 낮은 직위에서 일하던 사람이었고 누루자한의 오빠였다. 샤자한은 그녀의 독특한 매력과 진실로 인해 그녀에게 크나큰 사랑을 느꼈으며 자신의 사랑을 주었다. 뭄따즈는 샤자한의 통치기간동안 행정분야에 있어서 주요한 역할을 했으며 주요한 자문역을 맡기도 했다. 이 아름답고 정신적으로 기민한 여인인 뭄따즈는 샤자한과 18년 동안 결혼 생활을 보냈으며 이 기간동안 많은 행정적인 문제점들을 해결했고 침착하게도 그 일들을 훌륭히 잘해내었다. 그녀는 또한 사회 복지 활동에도 적극적이었으며 많은 수의 억눌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훌륭한 안식처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뭄따즈는 14명의 아이들을 나았으며 부르한푸르(Burhanpur)에서 14째의 해산에서 심각한 병을 얻었으며 이때의 샤자한은 칸자한(Khan jahan)과의 전투에 참가하고 있을 때이다. 모든 노력이 뭄따즈를 살리기 위하여 시도되었지만 실패에 그쳐졌고 마침내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해서 자신의 딸인 자하나라에게 샤자한을 잘 보필할 것을 책임지워줬다. 그리고 그녀의 죽임이 가까이 옴에 따라 그녀에게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당신이 믿을 수 있도록 하는지 물었고 그때의 뭄따즈는 그에게 결혼을 하지 말것과 아이들을 잘 돌보길 부탁했다. 그녀는 1631년 6월 17일에 사망했으며 그때의 나이 39살 이었다. 뭄따즈의 죽음과 동시에 온 제국이 수의를 입었고 숭고한 여인의 죽음을 애통해 하였다. 샤자한은 그가 뭄따즈와 약속한 것들을 지켰으며 자식들에게는 사랑과 애정을 나눠 주었으며 뭄따즈가 죽고난 후 바로 타즈 마할을 건축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나라의 축제 기간동안에는 샤자한은 뭄따즈의 무덤에 와서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곤 했으며 그의 수염은 회색빛으로 자라났으며 그의 심신은 매우 약해졌다. 샤자한은 뭄따즈를 잊으려고 무척이나 많은 노력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으며 매주 금요일에는 뭄따즈의 무덤을 찾아가곤 했었다고 전해진다.


 


  아우랑제브 (Aurangzeb, 1658 - 1707)


  무히우딘 무하마드 아우랑제브(Muhiuddin Muhammad Aurangzeb)는 1618년 11월3일에 우짜인(Ujjain)근처 도하드(Dohad)에서 태어났다. 그는 학업에 매우 열중했으며 후에 페르시아어와 아라비아어, 경전코란의 학자가 되었으며 1634년에 그는 1만명의 수장인 만사브다르(Mansabdar)가 되었으며 오차(Orcha)지역에 대한 공격이 맡겨졌다. 그리고 데칸(Deccan)의 수베다르(Subedar)로 임명되어서 1636년부터 8년간을 머물게 되었다. 1637년 5월 18에 그는 딜라스 바노베굼(Dilras Bano Begum)이라는 페르시아의 공주와 결혼을 했으며 1644년에 그는 수베다르직에서 사임을 했으나 후에 그는 다시 구자랏트의 수베다르(일종의 총독의 직위)가 되었다.

  그는 더욱이 1648년~1652년까지 물탄의 수베다르로서 임했으며 1649년, 1652년에 두번씩이나 칸다하르를 정복하기 위해서 파견되었으나 두번다 실패를 했으며 이런한 일로 샤자한은 그의 아들을 직위에서 물러나게 했으며 다시 그를 데칸의 수베다르로 임명하였으며 그곳에서 그는 1652년에서 1658년까지 머물게 되었다. 아우랑제브는 1655년부터 1706년까지 거의 51년의 기간동안 통치를 했으며 악바르처럼 관대하지도 않았고 건축물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는 확고한 수니 무슬림 신자였으며 종교적 문제에 관하여서는 매우 엄격한 입장을 취했다. 또한 건축물 조성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반대의 입장에 있었으며 그것을 위한 지출은 절대적으로 낭비라고 믿었다. 그는 거의 아무것도 아그라를 꾸미기 위해 한 것이 없으며 오히려 더욱 쇠퇴하게 만들었다. 또한 종교적 감정에 있어서 너무나 비판적이어서 아그라의 기존의 기념비등에 대해서도 그러한 생각을 했으며 특히 건축물등에서 사진이나 새, 혹은 어떤 살아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어디에서든지 간에 그는 그것들을 부수는 것은 물론이고 철거해 버렸다. 또한 그는 힌두이즘과 다른 종교에 대하여서도 무척이나 배타적이 었던 사람으로 일컬어 진다. 아우랑제브는 자지야(Jazia)라고 부르는 종교세를 부과하고 증가시켰으며 마투라(Mathura)와 바라나시(Varanasi) 그리고 다른 지역의 유명한 신전들을 파괴했으며 그 잔해물들로 회교사원을 건축했다. 그는 힌두인들에게 무슬림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했으며 시크교(Sikh)의 구루(Guru)인 태그바하두루(Teg Bahaduru)와 구루 고빈드씽(Gobind Singh) 두아들을 자신이 보는 앞에서 산채로 매장을 해버렸다. 그는 힘으로써라도 이슬람이 전파되길 바랬으며 이런 혹독한 종교정책의 결과로서 그의 지배기간동안에 제트족과 마라타 그리고 모든 시크교인들이 그의 지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었다. 힌두인들은 실제로 무굴제국의 등뼈와도 같은 중추적인 역할을 점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지원과 협조 없이는 악바르대제라 하더라도 인도에 대한 지배를 계속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그 당시까지 무굴제국은 힌두인들을 믿었고 존중했던 것이며 인도에서 적절히 통치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우랑제부부터 힌두인들을 억압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무굴제국은 무너져가기 시작했다. 아우랑제부는 결코 그의 주변 사람들을 그리고 심지어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 조차도 믿거나 신뢰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왕이 되도록 많은 힘이 되어준 그의 여동생 로샤나라(Roshan ara) 조차도 역시 그로부터 어떤 호의도 얻을 수 없었다. 그의 딸인 제분니사(Zebun Nissa)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한동안의 긴 전제정치 후에 그는 1707년 3월 3일에 남쪽 지방인 아흐마드나가르(Ahmad Nagar)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그때의 나이가 90살 이었다. 그는 평범한 무덤에 묻혔으며 그의 죽음은 제국의 수도인 아그라의 많은 불행을 몰고왔다. 정치적인 불안들이 아그라로 하여금 젯과 마라타 심지어는 이국의 침입자들의 위협에 노출되도록 만들었으며 아그라의 성은 그들에 의해 몇번씩이나 약탈되었다. 이러한 연고로 18세기 말엽에 아그라는 위대한 무굴제국 기간동안의 영광과 찬란함을 잃어버리게 되고 말았다.


  한편, 무굴제국은 영지(領地)를 직할지와 봉토(封土)로 구분하여 통치하였다. 봉토는 관료나 군인들에게 봉록으로 주는 토지였으나, 관할지를 자주 바꾸어 같은 토지를 오랫동안 지배할 수 없게 하였다. 직할지와 봉토의 비율은 약 1:3으로 봉토가 훨씬 많았다. 무굴령은 악바르 시대에는 12주(州)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17세기 중엽에는 정복지의 증대에 따라 22주가 되었다.


  각주에는 주장관과 주 재정장관 등이 배치되어 각각 군사와 행정을 담당하였다. 주 밑에는 현(縣) ·군(郡)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실제의 행정상 중요한 단위는 군이었다. 군은 획일적인 행정단위라기보다는 소재지에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던 지역단위로서, 무굴제국은 종래의 사회관계를 지배의 말단조직으로서 그대로 이용하였다.


  무굴제국의 관위제도(官位制度)는 만사브제(制)이다. 이 제도는 악바르시대에 정비되었는데, 만사브는 10단위에서 1만 단위까지 33의 위계(位階)로 나누어 있었다. 1600년경 만사브 보유자수는 1,600명 정도였으며, 그들이 무굴 중앙정부 권력의 지배자집단을 이루었다. 특히 만사브 1,000 이상의 고위 위계 보유자는 137명이었는데, 만사브 5,000 이상의 위계는 거의 황족에 국한되었다. 이 만사브제의 기본원리는, 모든 관료는 맨처음 만사브수(數) 10의 위계가 주어지고, 그 후 능력과 공적에 따라 순차적으로 높은 지위의 위계가 주어졌다. 또 만사브수에 맞추어 그에 딸리는 코끼리나 말의 수, 병사의 수효가 정해졌으며, 봉록도 만사브수에 따라 정해졌다.


  무굴제국 최대의 재원(財源)은 토지로부터 징수하는 지세(地稅)였다. 이 지세는 하라주라 하였고, 이것을 바치는 농민은 라이야트라 불렸다. 라이야트 농민의 자기 경작지에 대한 권리는, 최근의 여러 연구에 의하면, 농민이 자기 경작지를 상속할 수 있었고, 또 저당 ·매매도 할 수 있었던 점 등으로 보아 강력한 사적(私的)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무굴 왕조는 본래 시아파(派) 이슬람교를 신봉하여 종교적으로 매우 관용적이었으며, 악바르 황제는 특히 힌두교의 신앙 ·습관 등을 보호하였다. 그러나 그 후의 황제는 점차 수니파 이슬람교로 기울어졌으며, 아우랑제브 황제에 이르러서는 거의 광신적인 이슬람교 신앙을 가져 힌두교를 심하게 압박하였다. 이 시대의 피정복민이었던 힌두교도 민중 사이에서는, 엄격한 카스트제도에서 벗어나 신을 열렬히 숭배하는 바크티파의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으며, 펀자브 지방에서는 카스트제도를 부정하는 시크교의 세력이 확대되어갔다.


  아우랑제브 황제를 제외한 역대의 무굴 황제는 모두 그의 통치시대에 장려한 건축물을 건립하였다. 무굴시대 초기에 악바르가 건립한 건축은 페르시아 양식과 인도 재래의 형식을 합친 모티프를 지닌 힘찬 것으로 황제의 호방한 성격을 나타내는데, 악바르의 도성(都城) 파테푸르 시크리와 아그라의 성 등이 대표적이다. 샤자한 황제는 그보다 화려한 외형과 정교하고 치밀한 장식을 중요시하였다. 아그라의 타지마할묘(廟)나 델리성의 황제접견소(알현소) 등은 이 시대의 대표적 건축이다. 아우랑제브 황제가 죽은 뒤 궁정 문화의 중심은, 그때까지의 델리보다도 라크나우와 하이데라바드의 태수(太守) 궁정으로 옮겨가 이 지역에 궁전 ·사원 등이 건립되었다.


  무굴시대의 그림은 주로 미니어처(細密畵:장식이나 서적의 삽화로 그린 정밀한 채색화)였으나, 페르시아의 전통에 인도 재래의 수법을 가미한 무굴파(派)나 라지푸트 토후국(土侯國)의 궁정에서 번성하였던 라지푸트파의 그림이 성행하였다.


 

 

무로마치 막부

http://mtcha.com.ne.kr/world-term/japan/term12-muromachimagbu.htm

http://www.japan815.com/ja10/yunpyo.htm

http://blog.naver.com/zircon13/20016849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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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카가[足利]가 교토[京都]를 본거지로 수립한 무가정권(武家政權)이다. 3대 쇼군[將軍] 요시미쓰[義滿]가 무로마치[室町]에 하나노고쇼라 불리는 새로 궁전을 지었기 때문에 통상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라고 한다.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尊氏]가 정권을 장악한 후 1573년 쇼군 요시아키[義昭]가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에 멸망할 때까지 15대의 쇼군이 존속하였다.

  정치사적으로는 대략 3기(期)로 구분되는데 1기를 쇼군 권력의 형성기, 2기를 권력의 확립기, 3기를 권력의 해체기라 할 수 있다. 이 막부의 특징은 초기에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의 제도를 그대로 승계하였고, 그 후 간레이[管領]라는 재상직(宰相職)을 둔 것 등이다.


  이 시기는 좁은 뜻으로는 남북조(南北朝)의 통일이 이루어져 막부의 일원정치가 시작되기까지의 56년간과 1467년, 무로마치의 8대 장군은 요시마사 때, 무사들은 장군의 후계 문제로 파가 갈려 이후 11년간 발생한 전쟁인 오닌[應仁]의 난이 일어나 전국시대(戰國時代)로 접어든 1467년 이후를 제외한 기간을 말하기도 한다. 전대(前代)인 가마쿠라[鎌倉]시대까지는 천황을 받드는 구게[公家] 정권과 막부 정권이 양립하는 2원정치였으나 아시카가시대는 구게 정권을 물리치고 무가(武家)에 의한 단독정권을 수립한 것이 특징이다.


  정치적으로는 고다이고 천황[後醍蝴天皇]의 친정[親政]을 내세우는 남조에 대하여 고묘천황[光明天皇]을 옹립하고(북조) 남조를 굴복시킨 권력의 확립기, 최성기, 쇠퇴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즉, 고다이고 천황은 고대적인 천황제와 귀족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천황 중심의 정치를 부활시켰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반란으로 천황은 요시노로 패주하게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장원(莊園) 제도가 붕괴되고 그 대신 슈고다이묘[守護大名]가 각처에서 세력을 뻗어 슈고다이묘들의 세력 균형 위에 유지되다가 1467년 오닌의 난이 일어나면서 이들 슈고다이묘들의 세력이 각축전을 벌이는 전국시대를 겪은 뒤 멸망하였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농업 기술이 발달하여 쌀과 보리의  이모작이 행해졌으며 마을마다 회합을 열어 촌락 농민들끼리 세금이나 농업기술 등에 대해 의논하기도 했는데, 이로써 유대가 강해진 농민들이 단결하여 세금 문제로 막부에 무력으로 대항하기도 하였다. 이를 쯔찌잇키라고 하며 간혹 종교적인 문제로 잇키를 일으키기도 했는데 이를 잇코잇키라고 한다. 때로는 이 잇키 때문에 패망하는 다이묘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 시대에는 다이묘들이 무기조달을 위해 상공업자를 보호했기 때문에 상품유통과 함께 운송업을 하는 거상들도 많아졌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막부가 쿄오토에 있었기 때문에 선종의 영향을 받은 무사들의 정신세계와 귀족들의 문화가 합쳐져 간소하면서 깊이 있는, 새로운 무가문화가 만들어졌다. 건축물로는, 무로마치 막부 3대장군인 요시미츠의 금각과 8대 요시마사가 세운 은각이 유명한데 둘 다 선종사원의 건축양식을 보인다. 특히 은각의 건축 양식은 현재 일본 주택의 원형이 되었다. 무로마치 시대의 정원은 초기에는 자연미를 그대로 살린 금각사와 같은 형태가 많았으나 후기로 갈수록 류우안지의 석정처럼 자연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카레이산스식이 유행하였다. 전통예술 분야에서는 간아미·제아미 부자가 노오가쿠(能樂)를 완성하였는데 이 노오가쿠는 서민들의 소박한 연극을 근간으로 한 가무극으로 독특한 상징미를 갖고 있으며, 막간극으로 쿄오겐(狂言)이 함께 상연되었다. 이 두 전통예술은 현재에도 그 연출기법이 그대로 지켜지고 있다.


  아시카가시대는 왜구(倭寇)가 가장 많이 발호하던 시기로 일본 서해안의 무사(武士)나 어민들이 선단을 만들어 우리나라와 중국 연안에서 해적행위를 자행하였다. 세종 때 쓰시마섬[對馬島]을 정벌하여 왜구 침범을 응징하고 매년 50척의 무역선 내조를 허용하여 공식적인 통상관계가 수립되었으나 왜구는 근절되지 않았다. 3대 쇼군 요시미쓰[義滿] 때는 명(明)나라에 내조(內朝)하여 명으로부터 처음으로 ‘일본국왕’의 칭호를 받았으며 명과의 교역도 활발하였다. 문화적으로는 교토 기타야마[北山]에 세운 긴카쿠[金閣]를 대표로 하는 기타야마문화[北山文化]와 히가시야마[東山]에 세운 긴카쿠[銀閣]를 대표로 하는 히가시야마문화[東山文化] 등 무가문화가 개화하였고 동시에 서민계급의 대두에 따른 서민문화가 형성되었다. 오토기조시[お伽草子] ·교겡[狂言] ·렌카[連歌] 등 다소 외설적이지만 생기발랄한 문화였다.


 

 

 

에도시대

http://myhome.naver.com/dangunkwon/history/history10.htm

히데요시 사후, 토쿠가와이에야스는 세끼가하라 전투에서 토요토미의 추종세력을 격파하고 1603년 정이대장군이 되어 에도(토오쿄오)에 막부를 설치했다. 이후 약 260년간의 에도막부의 통치 시기를 에도 시대라 한다.


이에야스는 막부 직할령을 내려 전국의 25%와 교오토오, 오오사카, 나가사키 등의 중요 도시를 직접 지배하였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일족과 가신들에게 영지를 나눠주었는데 그 영지를 한(藩)이라 하였고, 그 영주를 다이묘오(大名)이라 하였다. 에도 막부는 전국의 한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조직을 정비하여 막번체제를 구성했다. 막부는 다이묘가 지켜야할 규칙을 정하고 이를 어겼을 때에는 영지를 몰수하는 등 엄하게 다스렸으나 그 규칙 안에서는 영주 나름대로 영지를 지배할 수 있는 독자적 권한을 부여해 주었다. 이밖에, 조정과 사원에까지 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만큼 막부는 실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3대 쇼군인 이에미츠는 참근교대제를 만들어 영주의 처자식들을 볼모로 잡고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실시하였다. 에도 막부는 전체 인구의 76.4%나 되는 농민들을 지배하기 위해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도를 만들어 최상계급인 무사들은 농민이나 쵸오닌(주로 상인)들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도록 했다. 이로써 소수의 무사들이 대다수인 농민과 쵸오닌을 지배하는 봉건사회가 유지될 수 있었다.


이에야스는 초기에는 해외도항 무역과 해외 이주를 허락하였으나 기독교가 일본사회 깊숙이 파고드는 것을 보고 불안해지기 시작, 결국 기독교 금지령을 내렸다. 이에마츠는 아예 해외도항과 해외이주자의 귀국을 법으로 금지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하는 극약처방을 썼다. 이에 1637년 큐우슈우의 시마바라에서 과중한 세금과 기독교 금지에 대항하여 잇키가 일어났다. 4개월에 걸쳐 겨우 난을 수습한 막부는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력하게 하고 1639년 쇄국령을 공포, 기독교와 관련이 없는 네덜란드인과 중국인에게만 나가사키와 데지마를 개항했다. 이로 인해 일본의 독자적인 문화와 산업이 발달하였으나 서양문명과의 교류가 단절되어 문화적 고립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켄로쿠 시대(1688∼1703)에 에도 막부는 불량화폐의 남발로 재정이 파탄 지경이 이르게 되자 세 차례에 걸쳐 경제개혁을 단행하였다. 차례로 교호(亨保)의 개혁, 간세이(實政)의 개혁, 텐보(天保)의 개혁을 일컬어 에도 시대 3대 개혁이라고 하는데 공통적으로 경제난을 극복하고자 무사들의 사치를 금하는 검약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에도 시대 학문은 일본의 고전을 연구하는 국학과 의학을 중심으로 한 양학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는데 국학은 후에 존황양이 운동으로, 양학은 개국을 주장하고 막부를 반대하는 운동으로 이어졌다.


일본이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동안에 이미 근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구미 서구열강들은 일본에 개항을 요구해왔다. 이에 막부는 끈질기게 개항을 거부하였으나 결국 미국의 강력한 개항요구에 밀려 1854년 카나가와에서 일미화친조약을 체결하고 시모다 항과 하코타테 항을 개항하였다. 이어 1858년 미국의 통상 요구에 다이로(大老) 이이나오스케가 조정의 허락도 없이 단독으로 일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해버렸다. 일미수호통상조약은 치외법권허용, 관세자주권 포기 등 상당히 불평등한 조약이었는데, 결국 이이나오스케는 존왕양이론자들에게 암살 당하고 만다.


개항 이후 수출의 급증으로 일본 자국 내에서는 물자부족현상으로 물가가 급등하는 경제혼란이 일어났다. 이에 사쯔마와 초오슈우의 하급무사들이 존황양이운동을 일으키고 영국과 네덜란드, 프랑스, 미국 등의 열강의 함대들과 교전 상태에 들어갔으나 열강의 힘에 밀려 결국 '양이'를 포기하고 존황도막, 즉 막부를 타도하는 쪽으로 방향수정을 하였다. 사쯔마와 초오슈우는 삿초 동맹을 맺고 신정부 수립을 목표로 영국의 지원 하에 서양식 신식 군비를 정비하였다. 이에 막부도 프랑스의 원조를 받아 쵸오슈우를 정벌하는 등 치열한 대립상황에 빠진다. 여기에 폭동과 농민봉기까지 일어나 일본사회는 극도의 혼란상황에 이르게 되어 이세 신궁에 참배하는 것이 사회적인 유행이었다. 상황이 점차 악화되자 15대 쇼군 요시노부가 왕정복고를 선언하고 정권을 천황에게 반납했으나 신정부는 요시노부의 영지와 관위를 빼앗아 버렸다. 이로 인해 막부의 무사들이 교오토오에서 도바·후시미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이 전재에서 신정부군이 승리하게 되었고 260여 년 간 계속되었던 에도 막부의 시대는 끝나 버렸다


 

 

 

르네상스

http://100.naver.com/100.php?id=56841

http://www.kmib.co.kr/event/serial/millennium/history/w1301-1400.html


르네상스는 학문 또는 예술의 재생·부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프랑스어의 renaissance, 이탈리아어의 rina scenza, rinascimento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고대의 그리스·로마 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이들을 부흥시킴으로써 새 문화를 창출해내려는 운동으로, 그 범위는 사상·문학·미술·건축 등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5세기 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중세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그때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야만시대, 인간성이 말살된 시대로 파악하고 고대의 부흥을 통하여 이 야만시대를 극복하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 운동은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인데, 이 운동은 곧 프랑스·독일·영국 등 북유럽 지역에 전파되어 각각 특색있는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근대 유럽문화 태동의 기반이 되었다. 이때의 르네상스 외에도 문화부흥 현상이 보인 기타의 시대에 대해서도 이 용어를 사용하는데,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 오토 왕조의 르네상스, 12세기의 르네상스, 상업의 르네상스, 로마법의 르네상스 등이 이에 속한다. 르네상스라는 개념 형성은 이미 그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사상의 기본요소는 F.페트라르카가 이미 설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고대를 문화의 절정기로 보는 반면, 중세를 인간의 창조성이 철저히 무시된 ‘암흑시대’라고 봄으로써 문명의 재흥(再興)과 사회의 개선은 고전학문의 부흥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인문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던 크나큰 확신이기도 했는데, 이들은 단순한 라틴 학문의 부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지적(知的) ·창조적 힘을 재흥시키려는 신념에 차 있었다.


당시 L.브루니는 자기 시대의 학문의 부활에 대하여 기술하였고, 16세기의 미술가 G.바자리는 저서 《이탈리아의 가장 뛰어난 화가 ·조각가 ·건축가의 생애》에서 고대 세계의 몰락 이후 쇠퇴한 미술이 조토에 의해 부활했다고 하여 ‘재생(rinascita)’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다시 볼테르는 14 ·15세기의 이탈리아에 학문과 예술이 부활했음을 지적했으며, J.미슐레는 16세기의 유럽을 문화적으로 새로운 시대라고 하여 처음으로 르네상스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재발견, 그리고 합리적인 사유(思惟)와 생활태도의 길을 열어 준 근대문화의 선구라고 보고 이와 같은 해석의 기초를 확고히 닦은 학자는 스위스의 문화사가 J.부르크하르트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860년에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문화》를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시대’로서의 르네상스라는 사고방식이 정착하여 오늘까지의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는 르네상스와 중세를 완전히 대립된 것으로 파악하고, 근세의 시작은 중세로부터가 아닌 고대로부터라는 주장에 이르게 되었으며, 중세를 지극히 정체된 암흑시대라고 혹평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의 연구들은 이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여 르네상스의 싹을 고대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중세에서 찾아야 하며, 르네상스를 근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도 대두되고 있다.


 

 

 

종교개혁

http://my.dreamwiz.com/geophill/text2/text21.html

http://100.naver.com/100.php?id=139820

http://kin.naver.com/open100/r_entry.php?rid=9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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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터의 종교 개혁


   가. 종교 개혁의 배경

     ① 인문주의자들의 부패한 교회에 대한 비판

     ② 교황권의 약화와 왕권의 강화

     ③ 독일의 정치적 분열 : 교황의 간섭으로 교황청에 대한 불만 고조


   나. 믿음을 강조한 루터

     ① 종교 개혁의 동기 :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

     ② 경과

        -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발표, (믿음과 신의 은총과 성서에 의한 구원 강조)

        - 교황과 독일 황제의 탄압

        - 제후와 국민들의 루터지지

     ③ 결과 :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 루터파 교회의 승인


 2) 칼뱅의 종교 개혁


   가. 예정설을 주장한 칼뱅

     ① 예정설 : 인간의 구원은 신이 미리 정해 놓았다는 주장

     ② 상공 시민층의지지 : 베버의 자본주의의 기원

     ③ 프랑스, 네델란드, 영국 등에 전파


   나. 크리스트 교 세계의 분열

     ① 종교 전쟁 발생 : 신교와 구교의 분쟁

     ② 독일의 30년 전쟁

        - 국제 전쟁으로 확산

        - 베스트팔렌 조약(1648)으로 개인 신앙의 자유 확립


 

 

 

인문주의 

http://lily0.knu.ac.kr/%7Ez971554/archiv/hisgene/histgra/human.htm

http://www.kmib.co.kr/event/serial/millennium/history/w1301-1400.html

http://cafe.naver.com/gaury.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4010

http://cafe.naver.com/withmygod.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025


 

 

 

루터

http://www.lck.or.kr/luther/luther_luther/luther_index.htm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아이슬레벤에서 한스 루더와 마가렛 루더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나중에 루터가 죽었을 때의 떠들썩함과는 달리, 그의 출생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그와 그의 친구들은 정확한 출생연도를 가지고 실랑이를 벌일 정도였다.


루터의 아버지는 자영 농민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훌륭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린데만가 출신이었다.



루터는 당시 관습에 따라 출생 다음 날(성 말틴의 날) 세례를 받고 그 날의 성인의 이름을 따라 말틴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칼뱅

http://blog.naver.com/khls58/40013078116

http://mtcha.com.ne.kr/world-man/france/man36-1-kalbeng.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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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칼뱅은 1509년 7월10일 프랑스 느와용에서 법률가였던 제랄 코반(Gerard Cauvin)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래 이름은 장 코반(Jean Cauvin). 라틴어로는 요하네스 칼비누스(Johannes Calvinus)로 쓰고 장 칼뱅(Jean Calvin)은 프랑스어 이름이다. 영어권에서는 존 칼빈(John Calvin)으로 부른다.


칼뱅은 20대 초반에 프로테스탄트로 회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최종 학위는 1531년 오를레앙 대학에서 받은 법학박사이다. 학위를 마친 후의 그의 생애는 네 부분으로 나뉜다.


1533년에서 1536년까지는 프랑스 앙굴렘과 스위스 바젤을 전전하며 신학을 연구한 기간이었다. 이때 쓴 책들이 1534년의 ‘영혼의 깨어 있음에 관하여(Psychopannychia)’와 1536년의 ‘기독교강요’ 초판이다. ‘기독교강요’는 1559년 최종판인 7판(크게 보면 4판)이 나올 때까지 계속 개정된 칼뱅 필생의 역작이다.


이후 1536년에서 1538년까지 칼뱅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1차 망명생활을 한다. 이즈음 칼뱅이 제네바 시의회에 제출한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조항’이 통과된다. 칼뱅은 제네바 시민의 종교교육과 교회조직을 관할하게 됐다. 그러나 그의 과감한 개혁은 반대자들의 벽에 부닥쳤다. 1538년 기욤 파렐과 함께 성찬방식에 대한 논쟁에 연루돼 제네바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제네바에서 추방된 후 1541년까지 칼뱅은 지금 프랑스 땅이 된 독일 스트라스부르크에서 프랑스 피난민을 위해 목회를 했다.


1541년부터 1564년 5월27일 서거하기까지 칼뱅은 다시 제네바에서 활동했다. 제네바 시민들이 칼뱅을 다시 부른 것이다. 칼뱅은 제2차 제네바 생활중인 1541년에 ‘제네바 교회의 법령’을 제정,공포하고 1542년 방대한 양의 ‘제네바 요리문답’을 완성한다. 이것은 1552년에 제정한 ‘제네바 신조’의 기초가 됐다.


1551년엔 볼섹과 1553년엔 셀베르와 각각 예정론과 삼위일체론에 대한 교리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의 결과로 볼섹은 제네바에서 추방당하고 셀베르는 화형에 처해졌다.


칼뱅은 1559년 지금의 제네바 대학의 전신인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운다. 그는 아카데미를 통해 제네바를 개혁운동의 거점도시로 만들었다.


칼뱅은 당시 유럽에서 불길같이 일어났던 프로테스탄트 운동을 하나로 묶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유럽 각국의 종교개혁자,집권자들과 서신을 교환하고 프랑스 신앙고백(1559)과 스코틀랜드 신앙고백(1560)에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은 펠라기우스주의를 비판한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을 재발견해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은총을 부각했다. 특히 칼뱅은 인간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우선하는 역할을 강조하면서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이중적 예정을 강조했다.


칼뱅의 신학은 성찬론과 예정론을 제외한 많은 부분에서 루터의 신학과 비슷하다. 믿음과 은혜를 통한 구원,그리스도 속죄의 절대성,진정한 앎을 위한 계시의 필연성,강력한 인격적 신앙을 강조하는 점은 루터를 계승했다. 그러나 루터는 인간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부각시킨 반면 칼뱅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통치와 그의 섭리에 초점을 두는 것이 칼뱅 신학이 루터 신학과 다른 점이다.


루터는 당시의 사람들을 교권으로부터 해방하려는 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던 반면 칼뱅의 사상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중심으로 한다. ‘오직 주께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명제가 이러한 칼뱅의 하나님 중심적 신학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


칼뱅은 이 세상도 하나님의 통치 영역내에 있는 것으로 보고 국가와 교회를 이원적으로 나눈 루터의 두 왕국 이론을 자기의 입장과 구별하였다. 칼뱅은 세상과 교회를 구분하기보다는 세상에 참여하여 변혁시키는 기독교인의 책임을 강조한다. 칼뱅은 그가 활동한 제네바를 성경적 세계관에 따라 재설계해 총체적인 도시선교와 사회변혁의 모델을 제시하고자 했다.


스위스의 자연환경을 고려해 직물공업과 정밀공업 육성을 제안해 시민들의 경제에 도움을 주고자 했고 목사 12인과 평신도 12인으로 구성된 ‘종교법원’(Consistoire)을 만들어 신정적 정치를 구현하려 했다.


목사 외에 장로 집사 교사 등의 평신도들을 교회의 리더십으로 세운 대의적 교회정치 형태는 이후의 민주주의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유럽에서는 칼뱅을 포함한 츠빙글리와 불링거 등의 신학적 영향으로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가 형성됐다. 개혁교회는 우리나라에선 일상적으로 장로교회라고 부른다.


160년전 결성된 ‘세계개혁교회연맹(WARC)’에는 현재 세계 107개국 215교단 7500만의 신자가 소속돼 있다.


종교개혁 당시 루터가 중심이 된 독일의 루터교회,헨리 8세의 수장령에 의해 설립된 영국의 성공회 등과 함께 개혁교회는 프로테스탄트 교회(the protestant churches)의 주요 교단을 이룬다.


칼뱅의 사상은 인류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서구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두 이념이 모두 칼뱅의 사상에서 유래하였다는 분석도 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그의 책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서구 자본주의가 칼뱅주의의 금욕주의 정신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 또 서구 시민민주주의 정치체계, 그것의 사상적 기반인 로크와 루소 등의 자연권 사상,근대의 시민혁명이 모두 칼뱅의 신학과 연관된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칼뱅의 사상을 이러한 이념들과 직접 연결하는 것은 사실 무리가 있고 그들 사이에 내용적 연관성이 있다고 보는 정도로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기독교 강요’ 초판의 서문을 보면 칼뱅이 그의 모국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이 박해받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강요’의 서문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내는 서간문의 형태로 돼있는데 그는 이 서문을 통해 당시로서는 새로운 프로테스탄트 신학과 그 신자들을 변호했다. 이런 점은 칼뱅의 신학이 일종의 목회적 관심속에서 배태된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는 다른 신학자들과 논쟁하면서 많은 소논문들을 썼다.


칼뱅의 신학은 상당히 실용적이며 시대적인 신학이었다. 현실에 충실한 신학이 영원할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항상 개혁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를 주장한 칼뱅은 오늘에도 우리의 교회와 신학이 주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 계속적으로 새로워져야 함을 일깨우고 있다.


 

 

 

영국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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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tcha.com.ne.kr/world-term/england/term30-youngguggyohe.htm

성공회(聖公會 ; The Anglican Domain)라고 하며 1534년 생겨났다. 성공회라는 명칭은 '하나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적인 교회'라는 교회에 관한 신앙고백 가운데 성(聖)과 공(公) 두 자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밖에 영국 국교회, 영국교회, 영국성공회, 잉글랜드교회, 앵글리컨처치라고 하며, 미국의 성공회는 주교 감독제교회라는 의미의 에피스코팔교회(Episcopal Church)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영국에 처음으로 가톨릭이 전파된 것은 1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596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 1세(540∼604)가 어거스틴(?∼604)과 수도사 40명을 영국에 파견한 이후 로마가톨릭은 영국교회는 물론 정치적으로 영국을 지배하였으며, 교회법정에서는 국가의 사법권을 대행하였다. 성공회의 개혁은헨리 8세(1491∼ 1547)와 캐서린 왕비의 결혼무효소송으로 시작되었다. 교황 클레멘트 7세가 이 소송을 거절하자, 헨리 8세는 의회를 소집하여 1534년 국왕지상법(國王至上法=수장령) 을 발표한 데 이어, 1536년 로마의 감독권을 폐지하는 법령을 발표하였다.


  개혁은 대주교 크랜머에 의해 프로테스탄트적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며, 크랜머는 1549년 성서적 요소를 회복시킨 공동기도서를 만들었다. 1553년 여왕 메리 1세(15 53~ 1558)가 로마 가톨릭으로 복귀했으나, 여왕 엘리자베스 l세(1558~1603) 즉위 후 종교개혁의 정착기를 맞이하였다. 1559년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포용하는 기도서를 제정하고 1563년 중용 노선을 추구하는 39개 신조를 발표하여 가톨릭적이며 개혁적인 성공회의 전통을 형성하게 되었다. 1570년 교황 비오5세가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하자 성공회는 로마교회와 완전히 갈라섰다.


  성공회는 온건한 칼뱅주의로, 성세·성체·고백·혼인·견진·종부·신품성사의 7성사를 행하며, 구약과 신약 66권 외에 외경(外經) 14권을 준정경(準正經)으로 삼고 있다. 신앙의 판단은 성서와 이성, 전통에 의거하며, 다음의 람베드-시카 고 4개 조항을 신앙적 기준으로 삼는다.


  ① 구약과 신약 66권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하느님의 계시된 말씀이다. ②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은 그리스도신앙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선언이다. ③ 세례와 성찬례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두 가지 성사다. ④ 역사적 주교직은 교회의 일치를 위한 적절한 처리방법이며, 그 형태는 다양할 수 있다. 성직에는 주교, 사제, 부제의 세 계급이 있다. 네 개 이상의 교구가 있으면 관구를 형성할 수 있고, 교구는 많은 전도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도구에는 하나 또는 여러 개의 교회가 속해 있다.


  근세 영국의 해외 진출에 따라 성공회는 북아메리카·아프리카·아시아·오세아 니아로 확대되었으며, 대표 주교인 캔터베리 대주교 관구와 통공(通共)관계에 있는 모든 교회를 일컫게 되었다. 세계성공회는 중앙헌법이나 연방적 통치의 체제를 갖지 않으며, 독립관구가 되지 못하여 캔터베리 대주교 관할 하에 있는 소수 교회를 제외한 나머지 성공회는, 나라마다  독립된 관구나 관구군을 갖고 독립적인 헌장과 교회법 체계를 갖추어 독자적으로 운영된다. 현재 세계 성공회는 전세계 160여개국에 37개의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지역 관구 교회로 이루어져 있으며 신자는 약 7000만명 정도이다.


 

 

 

프로테스탄트 교회

http://blog.naver.com/zeus0915/20011520189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530&no=1770

16세기 M.루터·J.칼뱅 등의 종교개혁에서 비롯된 그리스도 교회. 가톨릭을 구교(舊敎)라고 하는 데 대해 신교(新敎)·개신교(改新敎)라고도 한다. 로마 가톨릭교회 및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3대 교파를 이룬다.


[역사]


1517년 루터의 면죄부 비판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은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서에 의해서> <만인은 하느님 앞에서 동등한 사제>라는 3가지 원리로 가톨릭교회를 비판하였다. 이것이 1526년 이후 독일의 여러 지방으로, 30년 독일 루터파 교회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이 작성된 뒤에는 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3국으로 확산되었다.


종교개혁은 스위스에서도 일어나 취리히에서는 U.츠빙글리, 제네바에서는 칼뱅 등이 프로테스탄트적 종교개혁에 앞장섰다. 이 스위스 계통의 개신교(Protestantism)를 개혁파교회 또는 장로교회라고 한다. 그러나 가톨릭측이 반종교개혁과 정치투쟁으로 반격하여 유럽 각지에서 종교전쟁·정치혁명이 일어났다.


장로교회는 프랑스·영국·스코틀랜드·네덜란드·헝가리·폴란드 등으로 확산되었으며, 영국에서는 유럽 대륙과는 달리 신학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인 이유에서 가톨릭의 지배에서 벗어나 영국국교회가 성립되어 프로테스탄트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를 취하였다.


이에 영국국교회의 중립적 위치를 비판하고 종교개혁의 철저한 순화(純化)와 양심의 자유를 주장한 것이 여러 퓨리턴파(청교도)로서 각각 장로파·회중파(會衆派)·침례파·퀘이커파 등 여러 교회로 성장하였다. 이들 여러 교회의 신학적 특징은 칼뱅주의뿐만 아니라 교파에 따라서는 재세례파(再洗禮派)나 스피리추얼리즘(영성주의)의 요소를 함유하고 있거나 주요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8세기에는 관용의 법칙이 성립되어 세속문화의 발전과 더불어 교회의 영향력은 쇠퇴하였으며 프랑스에서는 유물론과 무신론이 반교회적 태도를 급격히 신장시켰다. 독일과 네덜란드 프로테스탄트교회에서는 경건주의운동이 일어나 지식인들에게서는 계몽주의가 싹텄고 농민층 중심의 보수적 사람들은 경건주의를 지주로 신앙부흥운동을 일으켜 반계몽주의 태도를 취하였다.


영국에서는 영국국교회로부터 갈라진 경건주의와 유사한 감리교회가 생겼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파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미국은 퓨리턴파 교회와 감리교회를 주력으로 하는 대표적 프로테스탄트 국가로서 종교가 사상이나 문화형성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들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 가운데 영국국교회·스코틀랜드장로교회·독일루터교회·네덜란드개혁파교회 등은 국가와 결부된 국가교회이지만 퓨리턴 이후에는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기 시작하여 자유교회가 성립하였다. 이 정교(政敎) 분리가 거의 완전히 실현되고 자유교회제도가 전형적인 방법으로 시행된 곳은 미국으로, 국가교회형(型) 영국국교회·루터파교회·개혁파교회 등도 자유교회화되어 있다.


1830년대 프로테스탄트교회는 내외의 복음전도와 성서배포, 도덕적 생활의 권장, 자선사회사업 등에 주력하고 역사학의 연구방법을 응용하여 신앙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려고 하였다. 또한 18세기 말부터 적극적 해외 전도사업에 나서 각 교파는 아시아·아프리카·남아메리카 등 곳곳에 교회에 더불어 미션 스쿨이나 사회사업단체 등을 설립하였다.


제 1 차세계대전 이후 프로테스탄트교회는 복음의 진리가 현대인의 마음을 감화시키는 것으로 새롭게 이해하려고 하였고, 또 교파의식을 초월하여 세계적인 시야와 관련에까지 도달, 프로테스탄트 이외의 교회와도 협력하여 세계교회 일치운동을 적극화하였다. → 프로테스탄티즘 → 교회


 

 

 

예수회

http://blog.naver.com/imperatore1/20015140346

http://cafe.naver.com/jesuit.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30


예수회는 16세기 로욜라가 창립한 카톨릭 내의 결사 단체로 각 국에서 몰락해가는 로마 카톨릭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 카톨릭 내에서 교황청의 권력을 옹호하며, 기독교를 핍박·견제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예수회는 각 국에서 로마 교황청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정치, 사회, 종교, 사회조직 등에 침투하였고,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음모, 암살 등을 자행해 왔기 때문에 여러 나라에서 추방된

경험이 있습니다.


예수회는 종교개혁 이 후 종교재판을 주도하며 수 많은 기독교인을 학살하였고, 많은 나라에서 카톨릭을

유지시키기 위해 정부와 협력해 기독교인이나 그리스 정교인을 고문하거나 강제 개종시켰습니다.


예수회는 또한 파시스트과 나치당을 지원하여 2차 대전을 일으켰는데, 2차 세계대전은 카톨릭 신자인 히틀러와

교황청이 협력하여 세계를 정복하려고 했던 전쟁입니다.

이 과정 중에 교황청은 히틀러의 대량 학살을 교사(敎唆) 내지는 방조하였고, 한 번도 비난한 적이 없으며,

물심양면으로 나치를 지원하였습니다.


예수회와 교황청 사이에도 권력 타툼이 있었고, 교황청의 권력을 장악한 예수회를 축출하기 위한 시도는

교황의 암살 등으로 좌절 되었습니다.

예수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프리메이슨의 사상과 조직을 흡수하여 창립되었고, 프리메이슨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가지고 있고, 많은 예수회 사제가 프리메이슨이라는 점입니다.


유대인 일루미나티는 시온 의정서에서 일반 민중과 정치인은 머리 나쁜 소 같은 사람들이라며 경멸하지만,

엘리트 결사 조직인 예수회는 존중하며 경쟁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예수회와 프리메이슨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때로는 협력하지만 서로 다른 사상과 기반을 가진 권력집단이며,

언젠가는 제거해야할 적으로 교황청은 말세 때 프리메이슨에 의해 파멸될 것입니다.(계시록 17/16)

 

 

 

3-2. 근세 사회의 성립


조선의 건국

 

 

 

위화도 회군

http://blog.naver.com/niche02/20003633798

http://www.gnedu.net/php-bin/swebdata/%C3%CA%B5%EE%C7%D0%B1%B3/6%C7%D0%B3%E2/%BB%E7%C8%B8/1%C7%D0%B1%E2/es20001010163839/%BC%D2%B4%DC%BF%F81/page4-2-2.htm

http://sugok.chongju-e.ac.kr/~nayana/교육용/1388위화도.htm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C0%A7%C8%AD%B5%B5%20%C8%B8%B1%BA&sort=0&c=1&qt=df


왜구의 토벌이 한창 진행되던 우왕 말년에, 고려와 명 나라 사이에 영토 싸움이 일어났다. 명은 원의 쌍성 총관부 관할하에 있던 땅을 그들의 직속령으로 만들겠다고 고려에 통보해 왔다. 이에, 고려의 조정은 크게 분개하여 요동 정벌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요동 정벌을 둘러싸고 조정의 의견이 갈라졌다. 최영을 중심으로 하는 쪽은 싸움에 나가라고 주장하였고,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쪽은 국내외의 상황으로 보아 요동 정벌은 실제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반대하였다. 

  결국, 최영의 주장에 따라 정벌군이 파견되었으나, 이성계 등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대파인 최영 등의 세력을 제거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성계 일파는 정치 권력을 차지하고 새 왕조를 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과전법

http://www.tutork.com/ss5-42.htm

http://my.netian.com/~bangjam/work/lecture/text/korea/17.htm


과전법은 수조권(收租權)에 입각한 토지 지배의 전통이 반영되어 있는, 전근대 사회


의 전형적인 토지 제도였다. 즉, 토지의 원래의 수조권자인 국가와 그 수조권을 나누어 받은 개인 (주로 양반 관료)을 전주(田主)로, 또 실제의 토지 소유자인 농민을 전객(佃


客)으로 규정함으로써, 소유자인 농민을 경작자처럼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과전법의 가장 큰 목표는 수조권을 개인에게 나누어 주는 사전을 축소하고 국가 수


조지인 공전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었다. 현직 및 퇴직 관리에게 지급하는 핵심적인 사전인 과전을 경기 지방의 토지로만 한정하여 분급한 것도 사전을 축소하려 한 노력의 하나였다. 그러나 사전 개혁의 대상이었던 여말의 대규모 농장 중에서 수조권이 국가에 넘겨진 것은 권문세족의 농장 뿐이었고, 당시 새로 등장한 정치 세력과 지방 토호의 토지는 보호되어 수조권에 의해 지배되던 토지들이 사유지로 변해 갔다. 거기에다 세습이 가능한 사전인 공신전·별사전 등은 경기 지방 이외에 있는 토지로도 분급되어, 사유지로 변할 가능성을 늘 안고 있었다. 한편, 과전법 추진 세력은 자신들의 지지 세력이었던 농민들에 대한 배려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공전·사전을 가리지 않고 수조권자에게 내는 조(租)는 1 결당 생산량의 1/10에 해당하는 30 두(斗)로 한정하도록 하였다.


  과전은 사망시 국가에 반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합법적으로 세습이 허용되


는 공신전이 증가한 데다, 과전도 차츰 수신전(守信田)·휼양전(恤養田)의 명목으로


세습되어, 차츰 신진 관료에게 줄 토지가 부족해졌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세조 때는 과전법을 직전법(職田法)으로 개혁하여 현직 관리에게만 과전을 지급하도


록 하였고, 그 뒤 성종 때는 토지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관수 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하기도 하였으나, 양반 지주들의 농장 확대를 막지는 못하였다. 명종 때(16 세기 중엽)는 마침내 직전법마저 폐지되고, 관리들은 녹봉만 받게 되었다. 이제 사적 소유


권과 병작 반수제에 입각한 지주 전호제가 일반화되었고, 이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수조권에 입각한 토지 지배는 소멸되고, 소유권에 입각한 토지 지배가 확산되어 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몽주

http://www.hiskjn.com.ne.kr/kjne/l127.html

http://100.naver.com/100.php?id=136035


고려 말기의 원의 간섭이 뜸한 시기였다. 또한 중국에서 명이 원을 대신하면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원·명 교체기이기도 했다. 국내적으로는 신진사대부들이 친원파인 권문세족을 척결하면서 성리학에 기반하여 정권을 차츰 장악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런 시기에 정몽주는 1337년 경상도 영천 땅에서 한미한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살이에 나간 20세 후반에 이색은 문하에 들어갔다. 이색에게서 성리학을 열심히 배우고 현실개혁에도 눈을 떴다. 특히 정몽주는 자기보다 연하인 정도전을 아껴 그에게 '맹자'를 선물로 주며 학문을 권장하기도 했다. 정몽주는 조정에서 촉망받는 벼슬살이를 이어갔다. 그러나 정몽주·정도전 등은 신진 세력이었기 때문에 권신들과 잦은 마찰을 빚게 되었다. 또 이들은 유학자 출신이었기에 불교도와도 분란을 일으켰고, 친명파였기에 친원파와도 정적의 관계가 되었다. 정도전이 이러한 면에 대하여 급진적이었다면 정몽주는 온건적 입장이었다.

1375년(우왕 2), 권신인 이인임 일파에 대해 탄핵하면서 정몽주는 경상도 언양에서 귀양살이를 2년 했다. 귀양에서 풀려난 후 그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기도 하고 제학 등의 벼슬을 받아 활동하기도 했다. 특히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몽주는 조전원수로 이성계를 따라 공을 세우기도 했다. 다시 1383년 이성계와 함께 북쪽 오랑캐 방비에 나서 공을 세웠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이성계와 사귀게 되었다. 정몽주는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정도전을 서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이성계와 정몽주의 도움으로 정도전은 대사성 등의 벼슬을 누렸다.

1388년 최영과 이성계는 요동정벌에 나섰으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최영 등 보수세력을 제거하고 집권했다. 이어 우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신진세력의 기반을 확실하게 했다. 이때 정몽주와 정도전은 각기 좌익·우익에서 이성계를 도왔다.

차츰 이성계는 실세로 부상하였다. 더욱이 이들 신진 세력은 이성계의 명망을 업고 새로운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곧 조준·남은·정도전 등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이때 정몽주는 소외되고 있었다. 이에 그는 이들 급진세력을 제거하려는 생각을 굳혔다. 1392년 세자가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성계가 마중하러 황주로 가는 길에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정몽주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여겼다. 정몽주는 대간을 통해 정도전·조준·남은 등을 탄핵하고 죽이려 하였다. 이때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급히 이 사실을 이성계에게 알렸다. 이성계는 정몽주를 제거하기도 결정하였다. 이 사실을 들은 정몽주는 이성계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이성계 집으로 찾아갔다. 이성계가 정몽주의 심중을 떠보려할 때 정몽주는 '단심가'로 대답했다. 자기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아버지의 의중을 안 이방원이 수하장수를 동원하여 선죽교에서 죽였다. 그리고 정몽주 세력들도 완전 제거되었다. 때는 1392년이었다.

나중에 이방원(태종이 되었을 때)은 정도전을 제거하면서 그의 라이벌이라 할 정몽주에게 시호를 내리고 복권시켰다. 정몽주는 충신의 표본으로 받들어 모셔졌다. 효종은 늘 그의 단심가를 읊조리며 충신의 표상으로 삼았다. 이런 모습은 새로운 충신을 배출해내기 위한 이미지조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몽주는 임금과 고려왕조에 대해서만 충의 개념을 적용시켰지 당시의 사회 모순 특히, 백성의 비참한 삶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적극적으로 개혁하고자 하는 백성에 대한 충성에서는 다분히 한계성을 지니고 있던 인물이었다.


 

 

 

공양왕

http://www.koreandb.net/KoreanKing/html/person/pki50034.htm


1345(충목왕 1)∼1394(태조 3)

고려 제34대왕

재위 1389∼1392

본관은 개성(開城)


이름은 요(瑤). 신종의 7대손으로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균(鈞)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국대비 왕씨(國大妃王氏)이다. 비는 창성군(昌成君) 진의 딸 순비 노씨(順妃盧氏)이다.


1389년 이성계(李成桂), 심덕부(沈德符) 등에 의하여 창왕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이성계일파의 압력과 간섭을 물리치지 못하고 우왕을 강릉에서, 창왕을 강화에서 각각 살해하였다.


재위 3년동안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사회전반에 걸쳐 몇 차례 제도를 개편했는데, 이것은 이성계 등 신진 사대부들이 자기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선, 관제에 있어서 전리사(典理司), 판도사(版圖司), 예의사(禮儀司), 군부사(軍簿司), 전법사(典法司), 전공사(典工司) 등을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6조로 개편하고, 첨설직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유학의 진흥을 위하여 개성의 오부와 동북면과 서북면의 부·주에 유학교수관을 두었으며, 과거시험에 무과를 신설하였다.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할 목적으로 주자가례를 시행하여 집집마다 가묘를 세우게 했고, 출가하여 승려가 된 이들을 찾아내어 본업에 복귀시켰다. 그리고 오교양종(五敎兩宗)의 불교계파를 없애 군대에 편입시킴과 동시에 절의 재산을 몰수하여 각 지방 관청에 소속시키는 조치도 취했다.


1390년 도선(道詵)의 비록(秘錄)에 의하여 한양으로 천도하여 판삼사사(判三司事) 안종원(安宗源) 등으로 개성을 지키게 하고 백관을 분사(分司)하게 하였으나, 이듬해 민심의 동요로 다시 개성으로 환도하였다.


경제면에 있어서는 1391년 광흥창(廣興倉), 풍저창(豊儲倉)을 서강(西江)에 세워 조운의 곡식을 비축하게 하였으며, 개성 오부에는 의창(義倉)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조준(趙浚)의 건의로 과전법을 실시하여 녹제와 전제를 개혁, 신흥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다지게 하였다.


또한, 인물추고도감(人物推考都監)을 두어 노비결송법을 정하였다. 1391년 이성계일파에 반대하던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자 정치무대는 이성계의 독무대가 되었다. 얼마없어 조준, 정도전, 남은 등에 의하여 이성계가 왕으로 추대됨으로써 공양왕은 폐위되고 고려왕조는 끝나고 말았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간성군(杆城郡)으로 추방되면서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고, 1394년 삼척부(三陟府)로 옮겨졌다가 살해되었다.


능은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에 있는 고릉(高陵)인데, 강원도 삼척군 근덕면에도 공양왕릉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말 불안했던 왕실의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이 건국된 후 태종 16년에 이르러 공양왕으로 추봉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2)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 정비

 

 

 

한양천도

http://www.gnedu.net/php-bin/swebdata/%C3%CA%B5%EE%C7%D0%B1%B3/6%C7%D0%B3%E2/%BB%E7%C8%B8/1%C7%D0%B1%E2/es20001010163839/%BC%D2%B4%DC%BF%F81/page4-2-5.htm

http://www.digitalmal.com/news/read.php?idxno=9295&rsec=MAIN&section=MAIN


 

 

 

경복궁

http://pwj32.com.ne.kr/1/1_9_4.htm


일전에 박약회원들과 함께 창덕궁과 창경궁을 돌아 본 나는 서울에 있는 다른 고궁들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제 오후에는  서울 시민대학 동문인 최건석(崔建錫)선생과 더불어 경복궁을 돌아 보았다.


최선생은 오래도록 공직에 계시다가 퇴임하신, 견문이 넓으신 분인데 왕실에 관한 재미 있는 일화들을 많이 알고 있어서 시종 즐거운 웃음 속에 여러 전각들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서울인 개경(開京)으로부터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어 도성을 쌓고 이 곳에 궁궐을 조성하였다. 이것이 사적 제117호인 조선시대의 정궐(正闕) 경복궁(景福宮)이다. 시경 대아편(詩經 大雅篇)의 "임에게 영원토록 큰 복을 내리소서" (君子萬年 介爾景福)라는 글귀에서 따온 이름이다.


원래 태조는 고려시대 남경의 이궁(離宮:궁정동 일대))터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새로운 왕조의 뻗어 나는 기세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다 하여 그 남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해산(亥山:北岳山)을 주산으로 한 임좌병향(壬坐丙向:북북서에 앉아 남남동을 바라봄)으로 자리를 잡았다.


북악산을 주산으로 동편의 낙산(駱山)이 좌청룡, 서편의 인왕산(仁王山)이 우백호가 되고, 남쪽의 목멱산(木覓山:현재의 남산)을 안산으로 하여 능선이 이어진 지형을 따라 도성을 쌓고, 그 안의 평지에 서울의 시가를 조성했다.


그런데 정궁인 경복궁의 위치는 도성의 중심부에 있지 않고 서편으로 치우쳐 있다. 지금은 광화문 앞 대로가 직선으로 열려 있지만 그 때는 황토현(黃土峴)이 가로막고 있어서 남대문으로 가자면 지금의 세종로 네거리에서 동쪽으로  종루까지 가서 거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광통교(廣通橋)를 건너야 했다.


조선조의 중심은 종묘(宗廟)에 있었다. 그래서 도로의 기점도 종묘 앞에 있었다. 세종로 비각에 있는 도로원표는 일인들이 세운 것이며, 4km를 10리로 한 것도 그들이다. 조선조의 10리는 대동여지도에서 확인된 것처럼 5.7km이었다.


경복궁은 태조 이성계가 세웠으나 왕자의 난이 벌어진 후 왕위에 오른 정종은 경복궁을 버리고 개경으로 돌아갔고, 그 후 개경에서 즉위한 태종은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였으나 경복궁으로 가지 않고 창덕궁을 지어 그 곳에 머물렀다.


세종이 즉위한 후에 경복궁으로 옮기었고, 그 후 사정에 따라 왕들이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를 넘나들었으며, 임진왜란 때 모든 궁궐이 소실된 후로는 창덕궁을 우선 복구하여 씀으로서 경복궁은 300년 가까이 폐궐이 되다시피 했다가 고종 초에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중건과정에 또는 중건하여 고종이 이어(1868)한 후에도 여러 번 부분적으로 불이 나서 부족한 국가재정 속에서 복구에 어려움을 겪었고, 1895년 궐내의 건천궁에서 명성황후가 일인들에 의하여 시해되자(을미사변) 신변에까지 위협을 느낀 고종은 다음 해 2월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감(俄館播遷)으로서, 270년만에 다시 지은 경복궁은 겨우 28년이 지나 다시 공궐이 되었다.


1년 후(1897) 고종은 궁궐로 복귀하지만 경복궁에 마음이 없어서 러시아 공관 바로 옆의 경운궁(慶雲宮:현재의 덕수궁)으로 이어하고, 그 뒤를 이은 순종도 창덕궁에서 머물다가 나라를 잃었으므로 경복궁의 궁궐로서의 역할은 1896년의 아관파천으로서 이미 끝나 있었다.


1910년 이후로 궁내의 여러 전각이 헐리고 불하되었으며, 그 중에는 정현각의 경우처럼 장충동의 일본인 별장으로 옮겨 지어지는 등 갖은 횡포와 수모를 겪었다. 창경궁의 경우 왕궁을 동물원으로 만들기까지 했으니 더 말하여 무얼 하겠는가?


1915년 가을에는 일인들이 통치 5주년기념으로 소위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 내에서 개최하여 조선조 정궁으로서의 체면을 완전히 추락시켰고, 궁내 건물을 철거하여 진열관을 신축할 뿐 아니라, 경내에 불교유물을 수집 전시함으로서 억불정책의 본거지가 여지 없이 사상적인 유린을 당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공진회 개막식에서는 일인총독 데라우찌(寺內正毅)가 근정전의 어좌에 올라앉아 개회사를 읽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고, 1916년부터는 총독부 건물을 짖는다고 궁궐의 정면을 마구 허물었으며, 1917년에 창덕궁의 내전에 불이 나자 경복궁의 내전을 헐어다 옮겨 짖기도 했다.


이리하여 흥선대원군이 애써 중건한 경복궁은 중건 이전의 황폐 했던 상태로 되돌아 갔고, 그 대신 총독부 건물을 비롯하여 박물관, 미술관, 박물관 사무소 등 궁궐과 관계 없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서구식 건물들이 들어 섰다.

 

이것은 일제 하의 국권이 없던 시절 그들이 한 짓이니 어쩔 수 없었다지만, 광복 후에 일부 건물이 복원되기도 하고 현재도 복원되고 있으며, 새로운 건물이 지어 지기도 했는데 재정이 어려워서 그렇기는 했겠지만 광화문처럼 철근콘크리트로 목조건물의 흉내만 낸 것도 그렇고, 궁궐과 관계 없는 건물을 어울리지 않게 지어대는 것도 그렇다.


건춘문 쪽 옛 선원전(璿源殿) 터에 새로 지어진 민속박물관은 법주사 팔상전과 금산사 미륵전에 불국사의 백운. 청운교를 본 딴 우리 나라 전통 건축미를 한 곳에 모은 듯이 보이지만 나는 불교양식의 건물이 배불정책을 추구해 온 조선왕조의 궁궐 안에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불교를 배척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불교도 우리 전통문화요, 유교도 우리 전통문화로서 다 같이 소중하지만, 궁궐은 궁궐대로 궁궐다운 면모를 보존하고, 박물관 건물은 궁궐이 아닌 별도의 공간에 위치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국립박물관을 옮길 계획이 서기 이전에 지어진 것이라고 이해는 되지만 이제 국립박물관도 옮기도록 건축이 진행되고 있다고 하니 민속박물관도 과감히 그 쪽으로 옮기고, 궁궐 내에 진열된 불교문화재도 국립박물관으로 옮기던지, 아니면 새로운 불교박물관을 설치하여, 궁궐의 본 모습도 보존하고 문화재도 효율적으로 관리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궁성은 남북이 길고 동서가 좁은 직사각형의 윤곽으로 둘러 쌓고, 남에 흥예문(興禮門), 북에 신무문(神武門), 동에 건춘문(建春門), 서에 영추문(迎秋門)을 세우고, 흥예문 밖에 또 하나의 큰 대문인 광화문(光化門)을 세웠다.


이 궁의 정문이요 남대문인 광화문은 돌로 높은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높이 세운 2층 문루로서 정궁의 정문 다운 위용을 자랑하던 건물이었다. 돌로 쌓은 높은 축대, 이를 육축(陸築)이라 하는데 도성의 남문인 서울 남대문과 같이 육축 위에 지은 대문은 다른 궁궐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위세를 지닌 구조이다.


일제강점기에 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헐어 버리려는 것을 거세게 저항하여 겨우 목숨을 보존한 채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다가 6.25전란에 다시 불에 타서 석축만 남아 있던 것을 1968년에 제자리로 옮기어 복원하였으나 옛 모습만 모방한 철근콘크리트 건물이어서 아쉽기 그지 없다.


광화문을 들어서면 이 궁궐의 정전인 근정전으로 들어가는 흥예문(興禮門)의 복원공사가 현재 진행 중에 있다. 2칸통3칸의 2층 문루였으며 그 앞에는 동에서 서로 흐르는 어구(御溝)가 있었고, 그 도랑을 건너기 위한 다리 금천교가 있었다.


궁궐의 남문인 흥예문을 들어서서 근정전의 앞문인 근정문(勤政門) 하나를 더 들어서야 이 나라의 지존이신 대왕전하가 임어하시는 정전 근정전과 만난다. 어도(御道) 좌우로는 품계석(品階石)이 늘어서 있고, 그 끝에서 전각으로 오르는  댓돌인 월대(月臺)로 이어진다.


월대는 상.하 두 단으로 돼 있고 하단이 더 넓다. 월대 주위에는 돌난간이 둘렸는데 난간을 가로지른 팔각으로 다듬은 긴 돌을 '돌난대' 라 하고, 그 돌난대를 연꽃 잎처럼 다듬은 기둥 '하엽동자'(荷葉童子)가 받치고 있다.


계단 좌우에는 물론, 월대 주위에 남북의 방향을 표시하는 말(午)과 쥐(子), 주작(朱雀)과 현무(玄武), 상서로움을 나타내는 서수(瑞獸)로서 인자한 호랑이, 우아한 기린 등의 조각상이 있고, 특히 월대의 귀기둥 머리에 조각된 해태가족상이  무척 아름답고 인상적이다.


배를 땅에 대고 엎드린 한 쌍의 해태 부부가 몸은 밖으로 향했는데 머리는 돌려 안을 되돌아보고 있다. 앞을 보고 걷거나 뛰는 모습이면 임금을 배반하고 떠나는 것이지만 뒤돌아보고 엎드렸으니 이는 왕화(王化:왕의 교화)를 기다리는 형상이다.


해태부부의 가슴과 등에 귀여운 새끼해태가 기어오르며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 백성을 상징하는 이 해태가족, 왕을 우러러 교화를 갈망하는 이 어진 백성들을 위하여 부지런한 정치(勤政)를 펼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라 할 것이다.


월대 위에 번듯하게 서 있는 국보 제223호인 근정전,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로 여러 번 중건 논의가 있었지만 그 때마다 '창건하자마자 왕자의 난이 일어났던 곳이라' 이라 하여 선뜻 찬동을 얻어내지 못하고 미루어 오던 것을 대원군이 용단을 내리어 초기 건물보다 크고 품위 있게 지은 정면 5칸의 2층 건물이다.


근정전 좌우에는 향로(香爐)가 있고, 청동제 향로 옆에는 무쇠로 만든 '드무'가 있다. 향로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여 향을 피우던 화로이고, 드무는 상징적인 방화수를 담는 그릇이다. 공중에 떠다니는 화마(火魔)가 물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다른 화마가 벌써 와 있다 하여 다른 곳으로 간다는 설화가 담겨 있다.


근정전 역시 외모는 2층이지만 내부는 통층이고, 중앙 뒷벽에 어좌가 있어 일월오악병이 둘려 있고 그 앞에 용상이 놓여 있다. 이 근정전이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정궐의 정전이다. 의식을 주로 하던 곳이어서 법전(法殿)이라고 했고, 왕이 조회(朝會)를 받던 곳이라 하여 수조지소(受朝之所)라고도 했다.


근정전 뒤에 왕의 실질적인 집무실이요 흔히 편전(便殿)이라고 부르던 사정전(思政殿)이 있다. 정면 5칸의 단층 건물이다.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깨닫고 생각하지 않으면 모른다. 홀로 숭고한 위치에서 만백성을 살펴야 하는 임금은 항상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정전이라고 명명한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의 논리이다.


사정전의 동쪽에는 아담한 건물 만춘전(萬春殿)이 있고, 서쪽에는 천추전(千秋殿)이 있다. 봄에는 온돌시설이 되어 있는 만춘전을, 가을 겨울에는 천추전을 사용했다. 그래서 근정전이나 사정전 뒤에는 없는 굴뚝이 만춘전, 천추전 뒤에는 나란히 서 있다.


사정전 뒤로부터 내전구역이다. 첫 머리에 임금의 침소인 강녕전(康寧殿)이 있고, 일각에 연생전, 연길당, 경성정, 응지당 등의 행각(行閣)들이 주변을 둘러 싸고 있다. 침전이라고 해서 적은 집이 아니다. 강녕전만 해도 55칸이나 되고 부속 건물까지 합하면 200칸도 넘었다고 한다.


왕의 침소 바로 뒤에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交泰殿)이 있다. 강년전보다는 좀 작지만 역시 여러 건물들이 일곽을 이루고 있다. 여성의 공간이어서 모든 것을 크기보다는 아름다움에 중점을 둔 듯하다.


교태전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후원의 인조동산 아미산(蛾眉山)이다. 창덕궁이나 창경궁의 내전 뒤에는 으레 산자락과 연결되어서 화계를 가꾸기가 좋지만 교태전 뒤에는 동산이 없다.


그래서 경회루를 짖느라고 파낸 흙을 옮기어 작은 동산을 만들어 화계를 쌓고 기화요초를 심었으며, 연지석, 일영대, 월영대 등의 석조물을 만들어 운치를 더하게 했다. 그 사이에 네 개의 붉은 색 벽돌굴뚝이 적당한 간격으로 솟아 있다.


정자라도 세우듯이 6각형으로 반듯하게 쌓아 올린 굴뚝의 윗 부분에 처마를 구성하여 기와 지붕을 이었고, 각면 중심부에는 하얀색 삼화토로 직사각형의 액자를 만들어 그 안에 매란국죽이나 길상의 무늬를 조성하였다. 대단한 작품이다.


교태전 뒷문을 나서면 동쪽에 흥선대원군이 정성을 다하여 지었다는 대왕대비(조대비)의 침전인 자경전(慈慶殿)이 있다. 자경전의 아름다움은 화문담이라고 불리는 전각을 둘러싼 꽃담과 후원의 십장생 굴뚝에 있다.


화문담의 무늬에는 한 번 시작하면 끝이 없다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줄무늬. 수복강년(壽福康寧) 등의 문자무늬, '매화 옛 등걸에 걸린 달' '묵은 대나무의 바람결' 등을 표현한 그림무늬 들이 우리나라 꽃담의 아름다움을 대표한다 할 것이다.


자경전 뒤뜰에는 샛담이 있고, 거기에 길이 3m81cm, 높이 2m36cm, 두께 65cm의 굴뚝이 함께 설치되어 있다. 그 굴뚝의 전면에 높고 넓은 액자를 만들고 거기에 십장생(十長生)을 비롯하여 연꽃과 포도무늬를 서정적으로 그려 넣었는데, 그냥 그려 넣은 것이 아니고 흙을 빚어 구어서 화면을 이룩하였다. 보물 재810호이다.


궁궐의 외전과 내전이 이어진 남북 축선의 서편에 큰 연못을 파고 그 안에 섬을 조성하여 지은 큰 루각 경회루(慶會樓)가 있다. 창건은 태조 때 했지만 습한 자리를 파서 연못을 만들고 연못가에 다락집을 지은 정도였다.


그 후 태종은 이궁인 창덕궁에 있었지만 국초의 국가체모를 위해서는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연회장이 필요했고, 왕권을 확고히 한 국왕으로서의 위엄을 갖추어야 했다. 그래서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파고, 그 속에 섬을 만들어 그 위에 번듯한 누각을 지으라 했다.


당시의 능력으로 이것은 불가능하다 하여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한미한  가문 출신의 기술관료로서 도성 건설에 참여했던 박자청(朴子靑)이 이를 해냈다. 그래서 그는 낮은 신분으로 벼슬에 나와 후일 공조판서에까지 이른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었다.


누각이 완성되자 태종은 양녕대군(당시 세자)에게 편액을 쓰게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높이 평가되던 세자의 글씨를 내외에 과시하고 싶어서였으리라. 그 후 세종 때와 성종 때에 돌기둥에 용을 새기는 등 대대적인 개수공사를 거쳐 위용을 갖춘 누각이 되었는데 그만 임진왜란 때 불에 타고 말았다.


지금의 경회루는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것이다. 전면 7칸, 측면 5칸에 돌기둥만도 48개로 이루어진 이 누각의 면적은 280여 평에 달한다. 못 가운데 지은 다락집으로서는 대단한 규모이다.


흥선대원군이 다시 지으면서 용을 조각했던 돌기둥 대신 구리로 두 마리의 용을 만들어 연못 속에 넣었다. 잠용(潛龍)이 물 속에서 기운을 축적하여 필요한 때 나라의 운세를 북돋아 주기를 염원하는 뜻이 담겼다.


연못 남쪽에는 또 하나의 거대한 전각 수정전(修政殿)이 있다. 조선초기에는 없었던 건물인데 고종시절 내각이 사용하던 건물로 군국기무소(軍國機務所)의 기능을 수행하던 곳이다.


거기에서 다시 발길을 북으로 돌려 내전의 뒤쪽으로 올라가면 빈궁의 처소이던 흥복전(興福殿)의 허전한 빈터가 자리하고 있다. 다행이 함화당과 집경전 두 건물이 남아 있어서 행각들은 다 없어 졌어도 빈궁 침소의 한 유형을 볼 수 있다.


우측으로 다시 올라가면 명성황후가 일본인 낭인들에게 시해된 건천궁의 빈터가 있고, 건천궁에 속했던 연못 안의 섬 위에 세워진 2층 6각형의 아름다운 정자 향원정(香遠亭)이 남아 있어서 역사를 말해 주는 듯하다. 그 오른 쪽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을 자연석에 새긴 '명성황후가 조난 당한 곳' (明成皇后 遭難之地)이라는 빗돌이 서 있다.


그 뒤로도 궁궐의 북문인 신무문과 후원의 여러 전각과 정자들이 있었지만 일제 때 총독부 관사를 지으면서 모두 헐렸고, 광복 후로는 총독부 관사로 들어갔던 대통령 관저가 경무대가 되었다가 청와대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다시 원상을 회복할 수는 없게 되었다.


웃으면서 살펴본 500년 도읍지를 돌아서는 발 거름이 왠지 가볍지가 못하다. 그러나 어느 나라의 고궁인들 오랜 역사를 지닌 고궁치고 왕조의 패망을 지켜보지 않은 고궁이 있으며, 슬픈 역사를 지니지 않은 곳이 있으랴.


이제 다 돌아보았으니 경봉궁 터 잡을 때의 일이라고 해서 세상에 흔히 돌아다니는 이야기나 하나를 더 하기로 하자. 한양을 도읍지로 하여 이 자리에 궁궐을 짖기로 한 이성계 일행이 이 번에는 궁궐의 좌향을 가지고 이견이 벌어졌다. 먼저 무학대사가 입을 열었다.


'북악을 주산으로 할 경우 남향이 되어 좋기는 하지만 동쪽의 낙산이 좌청용이 되고 서쪽의 인왕산이 우백호가 되면 백호의 기상이 너무 왕성하여 차손이 장손을 꺾을 것입니다. 그러니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동향을 하면 북악산이  좌청용이 되고 목멱산(남산)이 우백호가 되어 장손이 왕성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성계는 내심으로 총애하는 후비 소생의 아들을 생각했고, 당시의 실세이던 이방원은 자기를 생각해서 차손이 잘 되는 쪽을 택하고 싶었다. 이를 간파한 정도전이 말했다. '예기에 이르기를 "천자가 병풍을 세워 그 앞에 서면 제후는 북을 면하여 천자를 알현 한다."(天子當依而立 諸侯北面而見天子: 禮記 曲禮 下)고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남면을 하소서.'


이렇게 해서 현재와 같은 임좌병향이 됐는데, 그 후 조선왕조 500년, 27대 가 이어지는 중에 적자승계가 된 것은 겨우 여덟 번 밖에 없었고, 그 중에서도 문종은 재위 2년, 단종은 왕위를 찬탈 당하고, 연산군은 폐위, 인종은 재위 1년, 경종 재위 3년, 순종은 국권을 상실하는 등, 왕다운 왕 노릇을 한 임금은 현종과 숙종 단 두 분 밖에 없었다고 한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 많은 비빈들을 두고도 말기에 와서는 가까운 왕족이 없어서 7촌, 8촌까지 양자를 해야 했으니 역시 인력에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풍수지리설을 믿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덕산의 남연군 묘 밑에도 가 보면 문화재 당국에서 세워 놓은 안내문에까지 '정만인(鄭萬寅)이라는 지사(地師)가 이 곳이 두 대에 걸쳐 천자가 날 자리(二代天子之地)'라고 했다는 설명이 있는데 이를 두고 풍수가 들은 '우리 나라엔 원래 천자가 없는데 이 자리를 쓰고 고종이 태어나서 후에 대한제국으로 독립하면서 황제가 되어 순종까지 이어졌으니 2대 천자가 나지 않았느냐' 고 입에 침이 마르지만 어찌 그렇겠는가.


경복궁이든, 남연군 묘든 모두 후세의 호사가들이 결과를 가지고 그럴싸하게 지어낸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저 우리 나라의 전통문화 속에는 이러한 사고와 풍습이 뿌리 깊이 자리잡고 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한 번 웃어 볼 일이다.



 

 

 

정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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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hiskjn.com.ne.kr/kjne/l126.html

http://www.sobak2010.co.kr/assets/men/jungdojun.htm


정도전은 고려 말에 정치의 일련의 과정을 주도하며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등극시킨 1등 공신이다. 정도전은 경상도 봉화에서 1330년에 태어났다고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이처럼 그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의 가문은 아주 한미했음을 알 수 있다.

청소년기에 정몽주와 함께 그는 이색의 문하에서 성리학적 교양을 갖추었다. 20대 후반에 정계에 나가 촉망받는 벼슬살이를 하였다. 사상적으로 성리학, 대외적으로 친명파였던 그는 '불씨잡변'을 통해 불교의 폐단을 극단적으로 비판하였다. 그는 선배인 정몽주보다 급진적이었고 훨씬 개혁적이었다. 그는 철저하게 불교를 이단으로 배척하였다.

1375년(우왕 2) 당시 권신 이인임을 탄핵하다가 감옥에 갇혔고 이어 전라도 회진으로 유배되었다. 정도전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와서는 삼각산에 서재를 짓고 학문에 열중하며 제자를 길렀다. 그는 그곳 고관 출신의 미움을 받아 서재를 부평·김포로 옮기며 유랑생활을 계속했다. 이렇게 떠돌기 6년만에 그는 함흥에 있는 이성계를 찾아나섰다.

그는 이성계가 거느린 대군을 보고 "참으로 훌륭합니다. 이런 군대로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고 감탄했다. 이 말 속에는 이성계를 이용해 한번 세상을 엎어보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정도전은 이성계의 참모가 되었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은 우리 역사에서 일획을 긋는 계기가 되었다.

1388년 이성계는 요동 정벌 불가론을 제기하며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최영 등 보수세력을 제거하고 집권했다. 이어 우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신진세력의 기반을 강화하였다. 이 당시 정몽주와 정도전은 각기 좌익·우익으로 크게 이성계를 도왔다. 신진사대부 세력이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분열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정도전은 새로운 왕조의 개창을 주장한데 반해 정몽주는 고려 왕조내에서의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였다. 전자를 혁명파 신진사대부, 후자를 온건파 신진사대부라 한다.

정도전 등 혁명파는 이성계의 명망을 업고 새로운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곧 그는 조준·남은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정몽주는 이성계·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선수를 쳤다.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 당한 것을 기회로 대간 세력을 모아 정도전 등을 탄핵하여 귀양보내 버렸다. 이에 위기 의식을 느낀 이성계 일파는 아들 이방원을 통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살해했다. 이로써 정몽주 세력은 제거되었다. 정몽주 세력이 제거되자 정도전 일파에 의해 이성계는 왕위에 올랐다. 정도전은 일급공신이 되었다.

조선의 개국은 정도전의 역성혁명론의 실천임과 동시에 그가 염원하던 유교적 왕도 정치의 실습장이었다. 그는 왕도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조선경국전'을 편찬해 새로운 법제도의 틀을 닦았으며,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 새 왕조의 면모를 높였다. 또한 그는 '경제문감'을 저술해 재상, 대간, 수령, 무관의 직책을 확립했다. 당시 명나라가 공물을 무리하게 요구하자 그는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군량미 확보, 진법 훈련, 사병 혁파 등을 적극 추진해 병권 집중운동을 폈다. 그러나 정도전의 이같은 노력은 사병 혁파에 위기를 느낀 이방원의 무력 동원으로 중도에서 좌절되었다. 정도전의 현실적 힘이 왕권을 능가하게 되자 이방원은 왕권 확립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그를 제거해 버렸던 것이다. 이때가 1398년으로 정도전의 나이 62세였다.

정도전은 자신을 한나라의 장량에 비유하며 조선의 개국에 자신의 공이 가장 컸음을 공공연히 자랑하였다. 그리고 한고조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해 한나라를 세웠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해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개국했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정몽주와 비교했을 때 정몽주는 조선조에서 충신의 표상으로 우러름을 받았지만 그는 만고의 역적으로 평가되었다. 이것은 정권을 장악한 태종 일파가 그들의 정치행위를 합리화시키려는 의도에서 평가된 것이다. 실상 정도전은 고려 말기 사회적 모순을 적극적으로 해결해 나간 혁명가였다. 또한 그의 정치과정은 전제개혁을 통해 어느정도 일반 백성의 원한을 해결해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견지에서 그의 개혁정치 사상에 대한 평가는 높이 살만하다.


 

 

 

집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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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문화의 완성이라는 점은 집현전의 운영, 육전의 법, 경연, 삼강과 오륜의 행실도, 예악의 정리, 경서 및 사서의 편찬 등을 통하여 나타났다. 이 내용은 이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훌륭한 유학적 소양을 갖춘 신하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들과 세종 자신이 갖고 있는 왕권을 조화롭게 운영하지 않았다면 많은 잡음과 함께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먼저 세종이 이들을 어떻게 이끌어내고 그들의 학문을 키웠으며, 또 그들과 함께 정치운영을 하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가장 먼저 학문연구기관이자 인재양성소로서의 집현전의 운영을 검토함으로써 그 토대가 어떻게 마련되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집현전의 설치와 운영에 대해 알아보자. 집현전은 고려 인종(仁宗) 14년(1136)에 연영전(延英殿)을 집현전이라고 이름을 바꾼데서 비롯 된다.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정종대에 설치된 일이 있었고 또 태종 17년 정월에 사간원에서 상소하길, 정치를 하는 데는 나라에서 나라일을 맡길 인재를 길러야 하는데, 수문각(修文閣) · 집현전 · 보문각(寶文閣) 등 이 이름뿐이지 제구실을 못하니 새로 집현전을 만들자고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집현전을 설치 운영하여 그 성과를 거둔 것은 세종 때였다. 즉 집현전이라고 하면 세종 2년 3월에 설치 운영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때 집현전을 설치하게 된 목적은 조선이 표방한 유교정치와 대명(對明) 사대관계를 원만히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토대구축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교 교양에 철저한 인재의 양성 및 이에 입각한 문물의 정비와 전통문화의 정리가 요구되기도 하였다. 이를 위해 집현전에는 유학에 능통한 연소한 문사들을 뽑아 이들에게 여러 가지의 특 전을 주어 그들의 학문과 연구활동을 보장하였다.

사헌부(司憲府)의 규찰을 받지 않아 신분이 보장되었고, 경제적인 배려 또한 각별하였다. 산사(山寺)에서 독서에 몰두할 수 있도록 장기간의 휴가인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혜택을 주었다. 정원은 처음에 10명이던 것이 뒤에는 20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의 직무 중 중요한 것은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이었다. 따라서 이곳에 소속된 간원은 경연관(經筵官) · 서연관(書筵官) · 시관(試官) · 사관(史官) · 지제교(知製敎)의 직책을 겸임하기도 하였다. 경연과 서연이 인정(仁政)을 베풀기 위한 국왕과 세자의 수덕(修德)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집현전의 기능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들의 연구분야는 중국의 옛제도를 연구하거나 각종 서적의 편찬사업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충실한 연구와 학문을 쌓도록 하기 위해 세종은 이들을 다른 관부에 전직도 시키지 않고 집현전에만 10년에서 20년 가까이 있게 하였다. 이것은 일면 굉장한 특혜였다. 국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서 학문과 연구에 정진할 수 있었다. 이렇게 철저한 신분보장과 필요한 물품의 지원, 그리고 세종 자신의 학문적 관심은 집현전을 당대 제일의 학문연구기관으로 만드는데 충분한 것이었다. 따라서 집현전은 세종조의 국가 정치 일반 있어서 자문기관 역할을 하기도 하였고, 또한 국가 제도 · 정책 연구 기관의 기능을 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집현전을 운영한 결과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최항(崔恒) · 박팽년(朴彭年) · 신숙주(申叔舟) · 성삼문(成三問) · 이선로(李善老) · 이개(李塏) · 류의손(柳義孫) · 권채(權採) · 남수문(南秀文) 등이 그들이다. 이러한 인적 자원은 세종 때 찬란한 문화와 유교정치의 발전을 이룩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세종 11년에는 대궐 서편에 집현전을 새로 마련하고 또한 장서각을 집현전 북쪽에 다시 올렸다. 집현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아침 일찍이 들어와서 저녁 늦게 나갔다. 때를 맞추어 부지런히 연구하였으며, 일상 왕의 옆에서 공부하였다. 집현전의 학자들에게는 삼시 세끼를 직접 궁중의 내관(內官)들이 대접하였고, 학사들은 밤에도 순번을 정하여 집현전을 지키면서 밤을 새워 책을 읽기도 하였다. 새벽이면 일찍 일어나는 세종인지라 혹 집현전의 학사 중 무리하여 병이 나는 자라도 있을까 염려하여 내관에게 불을 밝히게 하고 집현전을 수시로 찾았다. 간혹 독서하다 피곤하여 깜빡 잠이 든 학사가 있으면 그들을 깨우지 않고 초피(貂皮)의 웃옷을 벗어 살며시 덮어주곤 하였다. 어찌보면 열심히 공부하는 제자를 스승의 사랑과 보살핌의 손길로 아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린 학사들이 있으면 당대의 유학자들에게 보내어 그들의 학문을 배우도록 하는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결국 집현전의 운영은 세종 과 집현전 학사들의 노력이 한데 어우러진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하여 집현전에서 편찬된 서적을 몇가지 든다면 다음과 같다.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 <치평요람(治平要覽)> · <훈민정음(訓民正音)> · <역대병요(歷代兵要)> · <효행록(孝行錄)> · <삼강행실(三綱行實)> 등이 그것이다. 이외에도 수많은 서적들이 언 해되거나 주석되어 그 학문적 성과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나타내 준다. 특히나 학사들의 학문적 성취와 관심에 대해서는 명나라의 유신들도 감탄하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세종 때 이렇게 활발한 연구활동과 학문활동 등이 수행된 집현전은 결국 정치적 역풍에 휘말려 세조 2년 육신사건(六臣事件)으로 혁파되게 되었다. 이 후 여러차례 집현전과 같은 기관을 두고자 하는 노력은 있었지만 결코 세종 때 집현전의 기능을 갖기란 어려웠다. 하지만 한편으로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관주도적인 문화(편찬)사업은 그 뒤 홍문관(弘文館) 또는 정조대의 규장각(奎章閣) 등에 의해 계승되기도 하였다.


집현전의 운영을 통하여 마련된 유교적인 학문연구의 성과는 경전의 주해, 제도의 연구 등 여러 분야로 파급되어 나갔다. 여기서 특히 괄목할 만한 것은 예조 ·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 · 집현전 등에서 연구하고 마련한 국가의 유교적 의례인 국가오례(國家五禮 : 吉禮 · 嘉禮 · 賓禮 · 軍禮 · 凶禮)와 사대부 · 서인들의 유교적 의례로서 정리된 사례(四禮 : 冠禮 · 婚禮 · 喪禮 · 祭禮) 등의 제도가 마련됨으로써 왕조적 질서와 사회적 질서체계가 올바로 운영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종조에 이루어진 오례의 내용은 사실상 왕실중심의 의례만을 일단 정례화한 것으로 나타난다. 전체 국가질서의 편성보다는 왕실의 권위와 존엄성을 생각하는 의례, 더욱이 왕위계승을 유가적 논리 안에서 정치적 관행으로 정착시키려는 정치적 의지를 보인다.


 왕실중심의 의례의 정례화는 왕권을 유교이념으로 명분을 정립시키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사례로써 소개되는 주자가례는 사대부 중심의 사회공동체 질서론을 반영한 의례로 자리잡게 됨을 의미한다. 조선초기 사회의 정돈과정에서 보여 준 역사사실의 실태라고 하겠다. 이것은 조선왕조가 왕실과 왕권의 권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었는가를 내용으로 한 것이었다. 이는 조선왕조의 정통성의 문제와 새로운 정권의 혁명적 내용도 수용하는 명분논리, 그리고 왕실의 정치적 위상의 정비가 바로 유교적 예론으로 심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례의 운영구조가 가지는 의미는 왕실 즉 왕권의 위상이 어느정도인가를 가늠해주는 척도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겠다.

 사례(四禮)의 체계와 내용은 이미 조선시대에도 그 보급 노력이 있었다. 세종조의 단계에 들어와서는 양반 사대부층의 유교적 윤리 실행의 표준으로서 주자가례(朱子家禮)가 정착되었다. 이것은 당시 유자층으로서 사대부의 반열에 있는 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하는 도덕규범의 의례였으며, 상층사회구조의 운영도 이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 백성에 대해서도 유교적인 교화정책(敎化政策)으로서 열녀 · 효자 등에 대한 표창과 이를 기리기 위한 정표(旌表)의 정책이 있었으며, 나아가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가 만들어져 보급되었다.

 집현전(集賢殿)에서 새로 올린<삼강행실>의 서문(序文)에 이르기를,


 “천하의 떳떳한 도가 다섯 가지 있는데, 삼강이 그 수위(首位)에 있으니, 실로 삼강은 경륜(經綸)의 큰 법이요, 일만 가지 교화의 근본이며 원천(源泉)입니다. 만약 고대(古代)의 일을 상고하여 본다면, 순(舜)임금은, 오전(五典)을 삼가 아름답게 하였으며, 성탕(成湯)은 일찍이 사람의 기강(紀綱)을 닦았고, 주(周)나라에서는 백성에게 오교(五敎)를 소중히 여기어서, 향삼물(鄕三物)로 선비들을 추거(推擧)하여 손님으로 예우(禮遇)하였습니다. 그러니 제왕(帝王)의 정치가 무엇을 먼저 힘쓸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선덕 신해년에 우리 주상 전하께서 측근의 신하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삼대(三代)의 정치가 훌륭하였던 것은 다 인륜(人倫)을 밝혔기 때문이다. 후세에서는 교화가 점점 쇠퇴하여져서, 백성들이 군신 · 부자 · 부부의 큰 인륜에 친숙하지 아니하고, 거의 다 타고난 천성(天性)에 어두워서 항상 각박(刻薄)한데에 빠졌다. 간혹 훌륭한 행실과 높은 절개가 있어도, 풍속 · 습관에 옮겨져서 사람의 보고 듣는 자의 마음을 흥기(興起)시키지 못하는 일도 또한 많다. 내가 그 중 특별히 남달리 뛰어난 것을 뽑아서 그림과 찬을 만들어 중앙과 지방에 나누어 주고, 우매한 남녀들까지 다 쉽게 보고 느껴서 분발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면, 또한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이루는 한 길이 될 것이다.'고 하시고,


 드디어 집현전 부제학 신(臣) 설순에게 명하여 편찬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여기에서, 중국(中國)에서부터 우리 나라에 이르기까지, 동방(東方) 고금(古今)의 서적(書籍)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모아 열람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중에서 효자·충신·열녀로서 우뚝히 높아서 기술할 만한 자를 각각 1백 인을 찾아내어, 앞에는 형용을 그림으로 그리고 뒤에는 사실 을 기록하였으며, 모두 시(詩)를 붙이었다. 이를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라고 이름을 하사하시고, 주자소(鑄字所)로 하여금 인쇄하여 길이 전하게 하였다.


군신 · 부자 · 부부의 도리인 군위신강(君爲臣綱) · 부위자강(父爲子綱) · 부위부강(夫爲婦綱)의 삼강의 보급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세종 스스로도 직접 당시의 세태가 인륜을 저버리거나 인륜을 참되게 알지 못하여 군신과 부자, 부부의 도리가 천리에 어긋나고 있음을 지적하고, 


`삼강(三綱)은 인도의 대경(大經)이니, 군신(君臣) · 부자(父子) · 부부(夫婦)의 도리를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혹은 `내가 생각하건대 하늘이 준 덕과 진심, 그리고 의젓하게 타고난 천성은 생민(生民)이 똑같이 받은 것이므로, 인륜(人倫)을 도탑게하여 풍속을 이루게 하는 것은 나라를 가진 자의 선무(先務)이다.'


 `입으로 외고 마음으로 생각하여 아침에 더하고 저녁에 진취하여, 그 천성의 본연(本然)을 감발(感發)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게 되면, 자식된 자는 효도를 다할 것을 생각하고, 남편된 자와 아내된 자는 모두 자기의 도리를 다하게 되어, 사람들이 의리를 알고 스스로 새롭게 하려는 뜻을 진작할 것이니, 교화(敎化)가 행하여 지고 풍속이 아름다워져서 더욱 지치(至治)의 세상에 이르게 될 것이다.'

라고 강조하였다.


 세종은 이렇게 삼강과 오륜, 인간사회의 질서체계를 오례와 사례의 구조를 통하여 사회의 운영을 교화해 나가고자 노력하였다. 이와 더불어 종실의 범위를 종친과 마찬가지인 왕의 현손(玄孫 즉 4대손)까지의 자손으로 하고 이들에 대한 교육의 제도를 정하였다. 즉 처음으로 종학(宗學)의 법을 정하였던 것이다. 사실 종실 자제들에 대한 교육은 그들이 문장을 잘 하도록 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학문을 닦아 몸가짐을 신중히 하고 자질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종친들은 관직에 나아갈 수 없도록 법률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많은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무뢰배들과 어울려 갖은 비리를 저지르기 일쑤였으며, 공부하는데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사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종친들을 권력으로부터 소외시키려는 의도와 관료들의 입장에서는 왕실의 세력확대를 견제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그러나 왕실 주변의 인물을 정치권에서 배제시키는 제도적 조치는 종실의 인재들의 건전한 사회활동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종학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세종은 1428년 7월에 대군 이하 종실 자제들의 교육을 위하여 종학을 처음으 로 건립하였고, 이듬해 10월에 학사를 세우고 교수로서 종학교수관(宗學敎授官)을 두었으며 또한 종학식략(宗學式略)을 상정하기도 하였다.


 심화 확대된 유교의 정치이념과 사회윤리는 예악(禮樂)의 정리로 더욱 세련화되었다. 유교사상에서 예(禮) · 악(樂)의 정비는 곧 모든 질서의 안정을 뜻한다. 예라는 것은 도덕인의(道德仁義)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예제(禮制)가 행하여지면 이와 더불어 악(樂)이 흥한다는 것이 유가의 기본 인식이었다. 따라서 세종 때에 유교정치를 추구하고 이것이 안정되어감에 따라 이러한 예악관에서 왕조의 예 · 악의 기준을 확립코자 하였던 것이다.



 

 

의정부 서사제

http://blog.naver.com/santeria.do?Redirect=Log&logNo=120001166739

http://chang256.new21.net/board/reply.php?db=536&no=895&page=1

http://leekcp.new21.org/b%20kh/a%20kb/simha%287%29/3332.htm


의정부는 조선시대 백관의 통솔과 서정을 총괄하던 최고의 행정관청이다.


별칭으로 도당, 묘당, 정부 또는 황각이라고도했다.


이 기관은 1400년 4월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고려시대 최고관청인 도평의사사를 혁파하고 설치되었다.


 


1400년 이후 의정부는 의정부서사제가 실시되면서 국정을 총괄하였으나,


1414년 태종이 왕권강화를 위하여 육조직계제를 도입하면서 정치적인 권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그러나 1436년 의정부서사제가 다시 부활되어 국정을 주도하게 되었고


세조등극 이후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다시 육조직계제가 부활하면서


1455년부터 1516년까지는 힘이 약했다.


또한 세조말년에는 원상제도가 운영되면서 의정부나 육조를 제치고


일시적으로 원상들이 권력을 장악하기도 했다.


 


중종반정 이후 의정부서사제가 부활되면서 의정부가 중심이 되어 국정을 운영하다가


1554년부터 비변사가 설치되어 실권을 장악하자 1864년까지 유명무실한


형식상의 최고 기관으로 남아야 했다.


 


1865년 비변사가 의정부에 합속됨으로써 기능을 회복하였으나


1873년까지는 대원군의 섭정으로,


1873년 이후에는 민비 척족의 민씨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여 다시 유명무실하게 되고말았다.


 


의정부는 조선 개국 이후 10여 차례의 변천을 거치면서 정1품의 영의정,좌의정,우의정,


종1품의 좌찬성, 우찬성, 그리고 정2품의 좌참찬, 우참찬 각 1인에다가


정4품의 사인 2인, 정5품의 검상 1인, 정8품의 사록 1인으로 구성되었다



 

3) 유교 정치의 실현 노력


 

 

 

왕도정치

http://www.koreandb.net/koreanking/html/person/pki60011.htm

http://www.mizii.com/jesusi/inlight/philosophy/chinese/confucius/virtue.htm

http://chang256.new21.net/board/reply.php?db=536&no=920&page=1


1506년 9월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이 반정(反正)을 일으켜 연산군을 쫓아낸 뒤 왕으로 추대되었다. 중종은 연산군 때의 여러가지 폐정(弊政)을 개혁하기 위하여 홍문관을 강화하는 동시에 문신의 월과(月課)·춘추과시(春秋課試)·사가독서(賜暇讀書)·전경(專經) 등을 엄중히 시행하며 문벌세가를 누르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1515년 신진사류인 조광조(趙光祖)를 등용하여 우익으로 삼고, 그가 주장하는 도학(道學)에 근거한 철인군주정치(哲人君主政治)를 표방하여 기성사류인 훈구파를 견제하는 동시에, 유교주의적 도덕규범인 향약(鄕約)을 전국적으로 실시하고 현량과(賢良科)를 두어 친히 김식(金湜) 등 유능한 신진사류 28명을 뽑아 언론·문필의 중요직에 등용하여, 이른바 이들 사림파(士林派)를 중심으로 한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 이상정치를 행하려 하였다.


 

 

 

사간원

http://blog.naver.com/santeria/120002469291

http://comgangsa.com.ne.kr/data/7.htm

http://www.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179-saganwon.htm


조선시대 간쟁과 논박을 담당한 관청.


 


간원(諫院), 미원(薇院)이라고도 한다.


사헌부·홍문관과 함께 대간 또는 3사로 통칭되었다.


1401년(태종 1)에 의정부제의 정비에 따라 문하부낭사(門下府郎舍)를 사간원으로 독립시키면서 성립되었다. 그러나 기능상으로는 문하부낭사의 직장에서 연원된 것이었다.


문하부낭사는 고려 성종대에 문하부를 설치하고, 정3품 산기상시(散騎常侍 : 또는 상시) 이하의 관원을 편제시키고 간쟁(諫諍)·봉박(封駁)을 관장하게 하면서 성립되었다.


이후 문하부낭사는 고려 정치체제의 변동에 따라 자주 바뀌었다.


조선시대에는 1392년(태조 1) 개창과 함께 고려의 문하부낭사제를 계승했다.


그러나 1401년에 문하부의 혁파와 함께 사간원으로 계승되면서 독립관아가 되었다.


이당시 사간원의 직장과 관원을 보면 직장은 그대로 계승되었지만 관원은 대폭 감축되고 간소화되었다. 즉 좌·우 산기상시, 내사사인, 기거주가 혁거되었고,


좌·우 간의대부가 좌·우 사간대부(司諫大夫)로, 직문하가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로,


좌·우 보궐이 좌·우 헌납(獻納)으로, 좌·우 습유가 좌·우 정언(正言)으로 각각 개칭되는 등


7관직 11명이 4관직 7명으로 조정되었다.


이와 같이 사간원관이 대폭 감소된 것은 태종의 왕권강화 도모와 관련된


사간원의 약화책에서 기인되었다.


사간원의 법제적인 기능을 보면, 성립 때는 간관으로서의 기능만이 계승되어 간쟁을 담당하도록 규정되었다. 그리고 왕명·문서의 출납업무는 승정원으로 이관되면서 폐지되었다. 이 기능이 1466년(세조 12)에 간쟁·봉박으로 정리되면서 개정되었고, 이것이 〈경국대전〉의 편찬과 함께 명문화되면서 후기까지 변동 없이 계승되었다. 간쟁은 왕에 대한 언론으로서 왕의 언행과 시정에 잘못이 있을 때 이를 바로잡기 위한 언론이고, 봉박은 일반정치에 대한 언론으로 그 대상은 그릇된 정치와 부당·부적합한 인사 등이었다. 즉 사간원의 제도상 직무는 왕과 정치에 대한 언론이었으나 실제 기능은 법제적인 언론활동은 물론, 현실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활동으로 확대되면서 전개되었다. 언론활동은 크게 간쟁·탄핵·시정·인사 등으로 구분되었다. 국왕을 대상으로 한 언론인 간쟁은 제도상으로는 사간원 고유의 기능이지만 사헌부·홍문관에서도 행했다. 탄핵은 관원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언론으로 부정·비위·범법한 관원을 논란·책망하여 그 직위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었다. 시정은 그 시대에 이루어지고 있는 정치의 시비를 논하여 바른 정치로 이끌어가는 언론이었다. 인사는 부정·부당·부적합한 인사를 막아 합리적·능동적인 정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언론이었다. 또한 사간원관은 왕이 중신을 접견하여 정치적 보고와 자문을 받는 조계(朝啓)·상참(常參)에 참여했고, 의정부·6조와 함께 정치와 입법에 관한 논의에 참가했다. 왕을 모시고 경서와 사서를 강론하는 경연과 세자를 교육하는 서연에 입시했고, 왕의 행행에 호종했다. 또 사헌부관원과 함께 5품 이하 관인의 제수와 관련된 고신(告身)과 법령의 제정·개정과 관련된 의첩(依牒)을 심사하고 동의했다.


이러한 사간원의 기능은 대개 사간원 단독으로 전개했지만, 사안이 중요하거나 사헌부·홍문관의 협조가 필요할 경우에는 대간합사나 3사합사로도 전개했다. 사간원의 기능발휘는 조선 일대를 통하여 국왕의 대간에 대한 인식·대우, 의정부나 비변사의 대두, 당쟁, 세도·외척정치의 운영, 정치분위기 등과 관련되는 가운데 시기적으로 신축이 반복되면서 대체로 본래의 정신·기능에 부합되어 전개되었다. 사간원의 직제는 성립 때는 좌·우 사간대부(각 1명, 정3품 당상), 지사간원사(1명, 종3품), 좌·우 헌납(각 1명, 정5품), 좌·우 정언(각 1명, 정6품)이 있었다. 이 직제는 그후 정치적 변동에 따라 관원의 수가 축소되고 명칭이 개변되었다.


사간원을 포함한 3사 활동의 중심이 된 탄핵활동은 그 직무의 보장·장려와 관련되어 면책의 특권을 누리면서 사실이 확인된 경우에는 물론 풍문에 의해서도 행했는데, 이때 탄핵을 받은 관원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직무수행이 중지되고 다시 직무를 보기 위해서는 제수의 절차를 거쳐야 했다. 사간원의 관원은 가계가 좋고 재행이 뛰어난 인물을 제수했다. 사간원관은 홍문관·사헌부관과 함께 체직·승자에서 의정부·6조 관원에는 뒤떨어지나, 그외의 같은 품직보다는 우대되고 우월한 지위를 누렸다. 그중 정5품의 헌납과 정6품의 정언은 대개 같은 품직인 의정부·6조 직에 체직되었다가 같은 직에서 2년 6개월 미만의 근무 후 정4품과 정5품에 승자·승직되었다. 사간원관은 사헌부관과 함께 대간이라 통칭되면서 모두 고과(考課)를 받지 않았고, 당상관도 이들의 인사에는 정중히 답례할 것이 규정되는 등 우대를 받았다. 특히 사간원관은 언론의 대상이 국왕이었음과 관련되어 사헌부관이 제수되지 못했고, 정6품 정언은 처음 소속된 관아의 지위에 따라 사헌부감찰의 하위에 놓였지만 1471년(성종 2) 이후에는 상위로 개선되었다. 또 사간원관은 사헌부관이 부 내에서의 근무시에 상관·하관의 위계와 질서가 엄격했음과는 달리, 상관·하관 사이에 격의가 없었고 직무중에도 음주가 허용되는 등 분방했다. 사간원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의정부 소속의 도찰원으로 개편되면서 소멸했다.


 

 

 

호패법

http://cont111.edunet4u.net/2002/yjsgun11/Mm/Module/hope.htm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540&no=6


조선시대에 16세 이상의 남자에게 발급한 패. 호패(戶牌)라고도 한다. 오늘날의 주민등록증과 비슷한 것으로 그 목적은 호구(戶口)를 명백히 하여 민정(民丁)의 수를 파악하고, 직업·계급을 명시하여 신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군역(軍役)·요역의 기준을 밝혀 유민을 방지하고 호적편성에 누락되거나 허위로 조작하는 사례를 방지하는 데 있었다. 그 기원은 원(元)나라에서 비롯되었는데, 고려말 이 제도를 본따 군정(軍丁)에 한해서 호

 

패를 패용하게 하였으나 잘 시행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조 7년(1398) 이후 이의 실시에 대한 논의가 꾸준히 제기되다가 태종 13년(1413) 9월 황사후(黃士厚)의 건의로 먼저 호패사목(號牌事目)을 작성한 뒤, 이에 따라 실시하였다. 그 뒤로도 숙종 초까지 5차례나 중단·실시의 변천을 겪으며 고종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와 같이 여러번 중단된 것은, 이의 실시에도 불구하고 유랑민이 감소되지 않았고, 양인(良人)들은 호패를 받으면 곧 호적과 군적(軍籍)에 올려지고 동시에 군정으로 뽑히거나 그 밖에 과중한 국역(國役)이 부담되어 이를 기피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를 계기로 양인들이 국역을 피하기 위하여 양반의 노비로 들어가는 경향이 늘어 양인수가 줄어들었으며 위조패(僞造牌)·무패(無牌)·불개패·불각패(不刻牌)·실패(失牌)·환패(換牌) 등 호패법을 위반하는 자에 대한 치죄(治罪)로 형옥(刑獄)이 번거롭고, 이에 따라 민심이 소란하여 호패폐지론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도적 및 백성의 유리(遊離)를 방지할 수 있고 모든 백성의 신분과 직임(職任)을 밝힐 수 있으며, 군정 확보에 유리한 점을 들어 복구하여야 한다는 호패실시론자들도 있었다. 호패는 왕족·관인(官人)으로부터 양인·노비에 이르기까지 16세 이상의 모든 남자가 소지하였는데, 그 재료, 기재내용, 발급순서, 호패법 위반자에 대한 처벌규정 등은 신분이나 실시 시기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었다. 호패의 관할기관은 서울은 한성부, 지방은 관찰사 및 수령이 관할하고, 실제 사무는 이정(里正)·통수(統首)·관령(管領)·감고(監考) 등이 담당하였다. 그 지급 방법은 각자가 호패에 기재할 사항을 단자(單子)로 만들어 제출하면 2품 이상과 3사(司)의 관원은 관청에서 만들어 지급하고 나머지는 각자가 만들어 관청에서 단자와 대조하여 낙인(烙印)하여 지급하였다. 호패제는 처음 실시된 1413년부터 지속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한 1675년까지 260여 년 사이에 18년 정도만 실시되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호패를 받은 사람은 전체인구의 10∼20%에 지나지 않았으며, 《성종실록》에도 호패를 받은 자 중 실제로 국역을 담당한 양인은 10∼20%라고 되어 있어 성공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속대전》의 규정에 의하면, 호패를 차지 않은 자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 위조·도적한 자는 사형, 빌려 차는 자는 누적률(漏籍律)을 적용하고 이를 빌려준 자는 장(杖) 100에 3년간 도형(徒刑)에 처하도록 하였으며, 본인이 죽었을 때에는 관가에 호패를 반납하였다.


 

 

4) 문물 제도의 정비



 

 

 

경국대전

http://my.dreamwiz.com/jabcho89/ko-data/cocept/te-text/502/t-5004.htm

http://wwwk.dongguk.ac.kr/~kjm/pds/chosen-law/mokfan/kyongguk/kyongguk.html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B0%E6%B1%B9%B4%EB%C0%FC&sort=0&c=1&qt=df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B0%E6%B1%B9%B4%EB%C0%FC&c=2&sort=0&qt=df&fr_res=0&to_res=0


조선 왕조의 통치 체제는 법전의 편찬으로 뒷받침되었다. 조선 왕조에서 법전의편찬은 이미 태조 때부터 시작되었다. 태조 때에는 조선경국전, 경제육전 등이 편찬되었으며, 태종 때에는 원육전, 속육전 등이 편찬되었다. 또, 세종 때에는 정전 6권이 편찬된 바 있었다. 이후 세조가 즉위하여 정치의 기본이 되는 법전의 편찬에 착수하여 성종 때에 완성한 것이 경국대전이다. 경국대전의 편찬은 조선 왕조의 통치의 규범 체제가 확립되었음을 의미한다. 경국대전의 완성으로 국왕과 신료들에 의하여 국정이 합리적으로 운영되는 조선 왕조의 통치 체제가 일단락되었다.


경국대전의 구성은 아래와 같다.


① 이전: 관제와 관리의 임명 등


② 호전: 재정 및 민사 등


③ 예전: 과거·제례·외교·교육 등.


④ 병전: 군제와 군사 등.


⑤ 형전: 형벌·노비·재판 등.


⑥ 공전: 도로·교량·도량형 등.


 

 

 

황보인

http://blog.naver.com/onisl3k/20015276939

평장사(平章事) 안우(安祐)의 사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황보임(皇甫琳)은 본관이 영주(永州)로 부친은 진주 목사 황보안(皇甫安)이며 황보전(皇甫전)과 영의정(領議政) 황보인[皇甫仁:?∼1453(단종 1)] 의 두 아들을 두었다.


 


황보인은 사복시 윤(司僕寺尹) 황보석(皇甫錫) 등의 아들을 두었고 황보인(皇甫仁)의 사위[女壻]는 윤당(尹塘)으로 부사(府使) 이교연(李교然)의 처(妻)의 동성(同姓) 종형제(從兄弟)이다. 윤당은 파평윤씨이며 판서 파평군 소정공 윤곤의 손자로 1453년(단종 1)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있던 고성이씨(固城李氏) 이교연의 처와 4촌지간이었다.


또 다른 황보인(皇甫仁)의 사위는 홍원숙(洪元淑)과 권은(權은)이다. 권은은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권담(權聃)의 아들이다



 

 

 

3-3. 통치 체제의 정비


1) 중앙 정치 제체

 

 

 

3사

http://100.naver.com/100.php?id=86347

이 기관은 독자적으로 언관의 기능을 담당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간원·사헌부가 함께 언론을 펴기도 하였다. 이를 양사합계(兩司合啓)라고 하며, 홍문관이 합세할 때는 삼사합계라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때로는 삼사의 전관원이 대궐문 앞에 부복하여 국왕의 허락을 강청하는, 오늘의 연좌데모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합사복합(合司伏閤)을 하기도 하였다.


 

 

 

6조

http://comgangsa.com.ne.kr/data/9.htm

조선시대 행정실무기관인 이조(吏曹)·호조(戶曹)·예조(禮曹)·병조(兵曹)·형조(刑曹)·공조(工曹)를 일컫는 말.


'조'(曹)는 치사(治事:일을 처리함)를 뜻하는 말이며, 오늘날의 부(部)에 해당한다


6조의 사무는 의정부를 거쳐 왕에게 보고되었으나, 때로 6조가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6조직계제(六曹直啓制)가 시행되기도 했다. 6조의 서열도 처음에는 고려의 서열을 따랐으나 세종이 즉위하면서 '주관'대로 이·호·예·병·형·공의 순서로 바꾸었다. 6조의 관원으로는 정2품 판서(判書), 그 아래 종2품 참판(參判)과 정3품 참의(參議)가 있었으며, 이들을 3당상(三堂上)이라고 했다. 그 아래 낭청(郎廳)이라 하여 실무에 종사하는 정5품 정랑(正郞)과 종5품 좌랑(佐郞)이 3명씩 있었는데, 병조와 형조에는 4명씩을 두었다. 호조와 병조에는 수학과 법학을 전담하는 종6품 산학교수(算學敎授)와 율학교수 등 기술관을 9명씩 두었다. 6조에는 사(司)라고 하여 여러 아문이 있었는데 이곳은 낭관이 주관했다.

이조(吏曹)·호조(戶曹)·예조(禮曹)·병조(兵曹)·형조(刑曹)·공조(工曹)

조선시대에 들어와 1405년(태종 5)에는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설치했으며, 사평부(司平府)·승추부(承樞府)·상서사(尙瑞司) 등 별도의 재정·군사·인사 기구를 폐지하여 6조의 위상을 강화하고 인사권을 이조와 병조에 나누어주었다. 또 이전에는 장관이 정3품 전서(典書)였으나 이때 정2품 판서로 승격했다. 이렇게 재상이 6조의 장관이 됨으로써 6조의 독자성이 강화되었다. 6조는 각각 속사(屬司)를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각종 아문(衙門)도 6조에 분속시켜 이들의 사무는 반드시 6조를 거쳐서 보고·집행되게 했다


이조는 문관의 인사를,

호조는 재정·조세·공물·호적 등을,

예조는 사대문서·외교·의례·연회·학교·취재·과거 등을,

병조는 군사·군기·군적을,

형조는 재판·노비관계 사무를,

공조는 도량형·영선·도로·교량 등의 일을 맡았다.


 

 

 

의금부

http://www.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281-uigumbu.htm

http://211.252.89.97/ban/sa/ex/h5342.htm


조선시대의 사법(司法)기관으로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推鞫)하는 일을 맡았다. 금오(金吾) ·왕부(王府) ·조옥(詔獄)이라고도 한다. 1414년(태종 14)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를 개편한 것으로, 《경국대전》에는 경찰업무를 5위(五衛)에 넘기고 의금부는 다만 ‘봉교추국(奉敎推鞫)’만을 맡는다 하여 왕명(王命)에 의해서만 죄인을 추국하는 기관으로 규정하고 있다. 형조 ·한성부와 함께 3법사(三法司)라 하였다. 국초에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계승,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를 두어 순작(巡綽) ·포도(捕盜) ·금란(禁亂) 등의 경찰업무를 맡게 하고 사법권은 형조에서 장악하였는데, 1394년(태조 3) 박위(朴喇)의 불경죄(不敬罪)를 형조 ·사헌부와 합동으로 처결하여 사법기관으로서의 행적을 남기더니 정종 때 형조의 체수(滯囚)를 처결하는 등 그 기능이 확대 강화되어 본래의 경찰업무 외에 형옥(刑獄)을 다스리는 일까지 겸하게 되었다.

  순군만호부는 1402년(태종 2) 순위부(巡衛府)로 개칭하고 1403년 다시 의용순금사로 개편되어 병조에 소속되었다가 14년 의금부로 개칭되면서 경찰권을 5위에 넘기고, 왕명을 받들어서 주로 왕족(王族)의 범죄, 국사범(國事犯) ·반역죄 등의 대옥(大獄), 자손의 부조(父祖)에 대한 죄나 노비의 주인에 대한 죄 등의 강상죄(綱常罪), 사헌부에서 적발한 사건 기타 다른 기관에서 판결하기 곤란하여 오래 지연된 사건 등을 처결하는 특별 재판 기관이 되었으며, 또한 사형죄에 대하여는 금부삼복지법(禁府三覆之法), 또는 삼복계(三覆啓)라 하여 3심(三審) 기관의 기능까지 맡았다.  


  그리고 국왕직속의 특별 사법기관인 만큼 지위의 고하(高下)나 신분의 귀천을 불문하고 다스리게 되어 있어 그 치리(治理)의 대상과 범위에는 제한이 없었으나, 형벌을 관장하는 데 있어 형조가 다스리는 부분과 중복되는 면이 있었고, 순작포금(巡綽捕禁)에 있어서는 부병(府兵)의 기능과 병행되어 관장의 한계가 명확하지 않았다. 동면·서면·남면(南面)에 감옥을 두었는데, 서간에는 조관경죄자(朝官輕罪者), 동간·남간에는 역옥(逆獄) 등 중죄자를 수금했다. 궐내에는 의금부 관원들의 당직청(當直廳)을 두어 그들로 하여금 궐내 순작의 임무도 맡게 하였다.


  관원도 처음에는 제조(提調) 1명, 진무(鎭撫) 2명, 부진무(副鎭撫) 2명, 지사(知事) 2명, 도사(都事) 4명 등을 두었으나, 《경국대전》에서는 동반(東班)의 종1품 아문으로 하여 판사(判事:종1품) ·지사(知事:정2품) ·동지사(同知事:종2품) 등 4명의 당상관(堂上官)을 겸관(兼官)으로 하여 타관직자가 겸임케 하고, 경력(經歷:종4품) ·도사(都事:종5품) 등 10명과 나장(羅將) 232명을 두었다.


  그러나 《속대전(續大典)》에 이르러서는 경력을 없애고 도사를 종6품과 종8품으로 나누어 각 5명, 나장은 40명을 두었고, 《육전조례(六典條例)》에서는 다시 조정하여 나장 80명, 군사 40명을 두었다. 의금부에는 1402년(태종 2)부터 신문고가 설치되어 소속 당직청(當直廳) 낭관(郎官) 1명이 번(番)을 서면서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이나 불복삼심(不服三審)의 상소 등을 받아들였고, 단송별감(斷訟別監)이 따로 설치된 81년(성종 12)부터는 현임(現任) ·원임(原任) 조관(朝官)의 범죄도 전담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 때는 우매한 군왕을 돕는 도구로 전락하여 총신을 잡아 처단하는 공포정치의 집행본부가 되었다가,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이후 제 기능을 회복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의금사(義禁司)로 개칭하여 법무아문(法務衙門)에 속했다가, 법무아문권설재판소(法務衙門權設裁判所)로 이름을 바꾸어 다음해 3월 재판소구성법(裁判所構成法)을 제정했다. 1899년 평리원(評理院)으로 개편되었다.


 

 

 

승정원

http://211.252.89.97/ban/sa/ex/h5341.htm

조선시대 국왕의 비서기관으로 의정부·육조 ·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조선의 중추적인 정치기구로, 왕명의 출납(出納)을 맡아 보았으며 정원(政院) ·후원(喉院) ·은대(銀臺) ·대언사(代言司)라고도 불리었다. 국초에는 따로 관서가 없고 군무(軍務) 등 군국기무(軍國機務)의 일을 맡아보던 중추원(中樞院)에 정3품의 도승지(都承旨), 좌 ·우 승지, 좌 ·우 부승지 각 1명을 두어 이 일을 맡아보게 하였으며, 1400년(정종 2) 4월 중추원의 군무를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이관하면서 승정원을 따로 설치, 승지의 기능을 맡게 하였다. 1401년(태종 1) 의흥삼군부와 병합하여 승추원(承樞院)으로 개편하고 도승지를 지신사(知申事), 승지를 대언(代言)으로 개칭하였다가, 1405년 승추부를 병조에 병합하면서 다시 승정원을 독립 관서로 설치하고 지신사, 좌 ·우 대언, 좌 ·우 부대언(副代言) 및 당후관(堂後官)과 동부대언(同副代言)을 새로 두었다. 1433년(세종 15) 지신사를 도승지로, 대언을 승지로 고쳐 승정원 제도를 완비하여 육조의 업무를 분담하였다. 즉 도승지는 이조, 좌승지는 호조, 우승지는 예조, 좌부승지는 병조, 우부승지는 형조, 동부승지는 공조를 맡았으며 이를 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의 6방이라 하였다. 육방의 승지는 모두 정3품 당상관(堂上官)으로 임명하였고 당후관으로는 정7품 주서(注書) 1명을 두어 일기(日記) 등 기록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중기 이후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정7품) 1명을 더 두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궁내부 관제를 두었을 때 궁내부 예하의 승선원(承宣院)으로 개편되었으며, 그 권한도 대폭 축소되었다. 1895년 4월 시종원(侍從院)의 비서감(秘書監)으로 되었다가 11월 독립하여 비서원(秘書院)으로 개편되었으며, 1905년(광무 9) 다시 비서감으로 되었으나 1907년(융희 1) 폐지되었다.


 

 

 

한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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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조를 대신하여 새로운 왕조를 건설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수도 개성부의 직제에 따라서 그대로 개성부를 새로운 나라의 수도로 정하고 여기에 책임자로 판사(判事) 2명, 윤(尹) 2명, 판관(判官) 2명, 참군(參軍) 2명을 두었으며, 태조 3년(1394) 11월 26일 한양으로 천도하고 다음 해인 1395년 6월 6일 한양부(漢陽府)를 한성부(漢城府)로 고친 후에 판사를 판부사(判府事)로 고쳐서 1명을 두었다. 예종 때에는 판부사를 다시 판윤(判尹)으로 고치는 동시에 2명의 윤(尹)을 좌윤(左尹) 1명, 우윤(右尹) 1명으로 하였고, 2명의 소윤(小尹)을 폐지하고 1명의 서윤(庶尹)을 두었으며, 참군 1명을 증원하여 3명으로 하였다.

이와 같은 변천을 거친 한성부의 조직은 성종 5년(1474)에 반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정2품 판윤 1명, 종2품 좌·우윤 각 1명, 종4품 서윤 1명, 종5품 판관 2명, 종7품 참군 3명으로 규정하여 조선후기 숙종 때까지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숙종 12년(1686)에 판관 2명 중에서 1명은 타관이 겸하도록 하였으며, 참군 3명 중에서 1명을 감하여 2명으로 하였고, 영조 즉위녕(1725)에는 참군 2명 중 1명은 주부(主簿)로 하였다.

영조 40년(1764)에는 참군을 완전히 폐지하고 주부 2명을 두었으며 이속(吏屬)으로 서리(書吏) 41명, 서사(書寫) 1명, 서원(書員) 11명, 사령(使令) 30명을 두었다.

고종 4년(1867)에 반포된 『육전조례』에는 정2품 판윤 1명, 종2품 좌· 우윤 각 1명, 종4품 서윤 1명, 종5품 판관 1명, 종6품 주부 2명, 검률 1명 의 정직관원(正職官員)과 서리 41명, 호적청 서원 11명, 서사 1명, 소자 서리 41명, 대령서리 1명, 고직 1명 등의 이서(吏胥)와 사령(使令) 47명, 구종(驅從) 14명, 군사 7명이 있었다. 즉 한성부의 관원으로 정직(正職) 8명, 이서(吏胥) 58명, 도예(徒隸) 68명 등 모두 134명이 있었다.



 

 


고종 31년(1894) 6월 28일 갑오개혁으로 모든 관제가 개혁될 때에는 한성부 직제도 큰 개혁이 이루어졌다. 즉 고종 31년 7월 18일 의안 제18호 에 의하여 좌·우윤과 판관·주부를 폐지하고 판윤 1명과 소윤 1명, 주사 (主事)를 두었으며, 8월 4일에는 의안 제25호로 한성부판윤을 폐지하고 부윤(府尹)을 두었으며, 그 밑에 주사를 두었다.

고종 32년(1895) 월 26일에는 칙령 제98호에 의하여 전국 8도제도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 337군으로 하면서 수도였던 한성부를 한성군(漢城郡)으로 격하하고 한성부는 전국 23부 중의 하나로서 한성군을 포함하여 양주군·광주군·적성군·포천군·영평군·가평군·연천군·고양군·파주군·교하군 등 11개 군을 관할하는 관부가 되었다. 따라서 종래의 한성부의 역할은 한성군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지방제도는 실시한지 불과 1년 3개월 만인 고종 33년 (1896) 8월 4일 칙령 제35호로 완전히 폐지되고 칙령 제36호로 전국 23부 337군을 13도 7부 331군으로 개편하여 각 도의 책임자를 관찰사라고 하였다. 이때 한성군으로 격하되었던 한성부는 다시 종전과 같이 한성부로 되었으며 그 직제를 개정하여 판윤 1명, 소윤 1명, 주사 1명, 서기 4명, 사령 6명, 청리 4명, 사동 2명을 두었다.

광무 9년(1905) 12월 26일자로 한성부 직제를 다시 개정하여 윤(尹) 1명, 참서관(參書官) 1명, 주사(判任) 5명을 두었고, 융희 원년(1907) 12월 13일에는 다시 한성부의 직제를 개정하여 부윤(府尹) 1명, 사무관(事務官) 2명, 주사(主事) 7명, 기수(技手) 5명을 두었다. 융희 3년(1909) 3월 11일에 한성부 관원을 증원하였는데 주사 3명을 증원하여 10명이 되었고 기수 5명을 증원하여 10명이 되었으며 동년 12월에는 5명을 더 증원하여 기수가 총 15명이 되었다. 1910년 일제강점 후 한성부는 경성부(京城府)로 개칭되었다.

 

    (2) 한성부 관할구역

현재의 서울특별시는 한강을 중심으로 하여 그 남쪽과 북쪽에 위치 하고 있으며, 대체로 북쪽으로는 북한산을, 서쪽으로는 덕양산을, 남쪽으로는 관악산을, 동쪽으로는 용마산을 경계선으로 하여 605㎢에 달하는 광활한 지역이다. 그러나 태조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1394년 이후 1910년까지 516년간의 한성부 관할구역은 도성을 중심으로 하여 도성 밖 10리까지로 하였다. 도성으로부터 10리까지라고 하더라도 그 경계는 대체로 산의 능선이나 하천으로 하였으므로 산세나 수로에 따라서 10리가 넘거나 모자라는 곳도 있었다. 도성으로부터 10리까지 되는 지점은 대체로 동쪽으로 양주 송계원과 대현을 연결하는 선이며, 남쪽으로는 한강과 노량도까지로 하였고 서쪽으로는 고양 덕수원까지로 하였으며 북쪽으로는 북한산으로 하였다.

이와 같은 관할구역은 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의 5부(部)로 나누는 동시에 5부를 다시 52방(坊)으로 분할하여 관리하였다. 그러나 이 52방제도는 시대에 따라 49방 또는 47방, 43방 등으로 조정하여 부민을 관리하였으며, 조선후기에는 방 밑에 계(契)·동(洞)으로 행정체제를 세분하여 고종 때에는 47방 288계 775동으로 하였다.


 


도성삼군문분계지도


동부는 숭교방·창선방·건덕방·연화방·숭신방·인창방·경모궁방 의 7방을 관할하였으며, 남부는 광통방·회현방·명례방·태평방·훈도방·성명방·낙선방·명철방·두모방·한강방·둔지방의 11방을 관할하였고, 서부는 인달방·적선방·여경방·양생방·반석방·반송방·황화방·용산방·서강방의 9방을 관할하였으며, 북부는 광화방·양덕방·가회방·안국방·관광방·진장방·순화방·준수방·의통방·상평방·연은방·연희방의 12방을 관할하였고, 중부는 정선방·경행방·관인방·수진방·등청방·장통방·서린방·견평방의 8방을 관할하였다.

 

2. 한성부의 기능

조선시대 관리들은 오전 7시경에 출근하여 오후 6시경에 퇴근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해가 짧은 겨울에는 오전 9시경에 출근하여 오후 4시경에 퇴근하였다. 그러나 하급관원들은 아침에 상관을 맞이하는 예의가 있었고 저녁에 상관을 배웅하는 절차가 복잡하였으니 출근시간이나 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다. 한성부 관리들의 근무도 일반 관리들의 근무와 다를 바가 없었으며 업무는 대체로 호적·시전·가옥·전토·도로·교량·개천 ·채무·투쟁·순찰·검시·차량·우마 등에 관한 것이었으며, 특히 호적업무와 같은 것은 전국적인 것을 관장하였다. 이와 같은 한성부의 업무는 6방 (이·호·예·병·형·공방)에서 나누어 맡았다. 6방이 관할하는 업무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이방(吏房)과 호방(戶房)

서윤(庶尹)이 관할하는 이방에서는 관원들의 성적을 평가하고 인사를 담당하였는데, 6월과 12월에 매년 2번씩 하는 성적평가는 물론 근무성적이 그 기준이 되겠으나 언어·행동·예의범절 등도 참작되었다. 관원들의 성적 평가는 상·중·하의 3단계로 구분하였으며 10번 심사하여 10번 모두 상을 받으면 당하관 이하는 1계급 진급시켰고, 만일 10번 심사하여 2번 중을 받으면 무록관(無祿官)에 임명하였으며, 3번 중을 받으면 파면하였다. 만일 5번이나 3번, 혹은 2번의 심사를 받은 관리가 1번 중을 받으면 상위관직에 임명하지 아니하고 2번 중을 받으면 파면하였으며 당상관은 1번 중을 받아도 파면하였다.


 



한성부호적   판관(判官)이 관할하는 호방에서는 주로 호적·시전·가옥·전토· 채무·낙계(烙契)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한성부의 업무 중에서 가장 방대한 것은 호적업무로서 그것은 한성부가 전국적인 호적업무를 담당했기 때문이다. 한성부청사 총 172간 가운데 73%에 달하는 123간이 호적업무와 관계되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호적은 원칙적으로 3년마다 한번씩 작성하였는데 이때 총책임자는 한성부판윤이었으며 실무적인 책임자는 호방의 책임자인 판관이었다. 한성부 관원 중에서 5명을 선정하여 감동관(監董官)으로 하여 5부에 각기 한 사람씩 배치하여 호적업무를 담당토록 하였으며, 실무는 지색서리(紙色書吏)가 담당하도록 하였다. 지방에는 그 지방 수령이 책임자가 되었으며 실무는 면임(面任)·리임(里任)·감고(監考) 등을 임명하여 업무를 수행하였다.

10개월을 기한으로 하여 호적이 완성되면 1부는 한성부에 보관하고, 1부는 강화도로 수송하여 보관하였는데, 강화도로 수송할 때에는 판관이 직접 호송하였다. 


조선시대 최초로 호구조사를 한 것은 태조 6년(1397)이라고 하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며, 태종 4년(1404) 5월 25일에 실시한 호적조사가 최초의 것이다. 이때 경기도를 제외한 7개 도의 호수는 153,404호이고 인구수는 322,786명이었다. 그 당시 호구수는 물론 전체 호구수로는 볼 수 없는 것이며, 역(役)을 부담할 수 있는 정(丁)수로 볼 수 있으나 아무튼 호적이 최초로 작성되었다는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전체의 호구조사는 세종 10년(1428)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한성부 호구를 살펴보면 다음 표와 같다.


한성부 호구표 

시대별 세종10년

(1428)  인조 26년

(1648)  효종 8년

(1657) 숙종 43년

(1717)  영조 29년

(1753)  순조 7년

(1807)  철종 3년

(1852)  고종 8년

(1904) 

호구수 16,912 16,066 15,760 34,191 34,953 45,707 45,678 42,730

인구수 109,372 95,569 80,572 238,119 174,203 204,886 204,886 192,304


한편 조선시대는 농업을 중시하고 상공업을 천시하였기 때문에 상공업이 크게 번성하지 못하였으나, 20만명 전후의 인구가 생활하는 수도에 그들의 생활필수품 조달을 위한 최소한의 상거래는 있었다. 정종 때(1399) 건설하기 시작하여 태종 14년(1414)에 완성을 본 수천간에 달하는 서울의 행랑(行廊)이 있어 상업이 이루어졌다. 수도 남쪽 숭례문(남대문)에서부터 동쪽 흥인문(동대문)까지 도로 양측에 건설된 행랑은 조선시대 시전(市廛)으로서 수도 한성부민의 생활필수품의 공급처였다. 조선후기로 오면 육주비전을 비롯하여 도성 내에 이현시장·칠패시장 등 많은 시장이 건설되었고, 도성 외에는 뚝섬·두모포·한강진·마포·누원·송파 등지에 시장이 건설되어 한성부민의 생활필수품의 공급처였다. 조선후기로 오면 육주비전을 비롯하여 도성 내에 이현시장·칠패시장 등 많은 시장이 건설되었고, 도성 외에는 뚝섬·두모포·한강진·마포·누원·송파 등지에 시장이 건설되어 한성부민의 생활 필수품과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공급하였다.


 


남대문 밖 칠패시장(혜촌 김학수 그림)


때로는 누원·마포·송파 등 외곽지대 상인들이 매점 매석하여 물품 의 품귀와 물가의 상승을 가져 오기도 하여 이에 대한 단속의 필요에서 경시서(京市署)가 설치되었으며, 한성부 호방은 이 경시서와 함께 상인 들을 관리하여 물가를 조절하는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상거래를 엄격히 단속하여 한 시전에서 한가지 물품만을 취급하는 것 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쌀·어물·과실 등 수요가 많은 것은 예외가 있기 도 하였다. 시전의 규칙이 엄격하여 등록된 상품만 거래하였으며 다른 상품을 거래할 때에는 난전(亂廛)이라고 하여 엄격히 처벌하였다.

상품의 성격에 따라서 규모가 큰 시전을 골라 정율의 국역을 부담시키고 이들을 유분각전(有分各廛)이라 하고, 정율의 부담이 없는 영세한 시전을 무분각전(無分各廛)이라고 하였다. 유분각전 중에서도 가장 규모 가 큰 시전 6개를 지정하여 육의전(六矣廛)이라고 하였고, 이 육의전은 궁중과 부중에서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는 대신 독점판매를 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시전은 대체로 상·중·하의 3등급으로 구분하여 세금을 부과하였다. 매월 상등은 저화(楮貨) 3장, 중등은 2장, 하등은 1장을 세로 납부하였으며, 좌고(坐賈)들에게도 매월 1장씩 세를 납부하였다.

한성부에서는 가옥을 신축하려는 부민에게 가대(家垈)를 지급하였는데, 공지나 이미 지급된 토지 중에서 2년이 지나도록 가옥을 신축하지 않으면 도로 회수하여 새로운 신청자에게 지급하였다. 가대는 신분에 따라 지급하여 대군(大君)이나 공주(公主)는 30부(負), 1·2품 관원은 15부, 3·4품 관원은 10부, 5·6품 관원은 8부, 7품 이하와 유음자제에게는 4부, 일반서민에게는 2부를 지급하였다.

가옥도 대군은 60간, 2품 이상은 40간, 3품 이하는 30간을 넘지 못하 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대지나 가옥을 건축하는데 있어서 사대부나 서인 을 막론하고 대부분 이 규정을 지키지 않았고, 가대나 가옥은 조선초기부터 매매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업무들은 한성부 호방과 오부(五部)에서 취급하였다.

이외에도 호방업무는 국왕이 죄인을 치죄할 때에 호적을 준비하고,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 잡색군(雜色軍)이나 교각군(交脚軍)을 선정하여 보내는 업무, 매년 연초에 과거에 급제한지 60년이 되는 연로자에게 연회를 베푸는 업무, 관리로서 80세가 넘은 사람과 사족(士族)의 부녀로서 90세가 넘는 노인들을 도와주는 업무, 당상관과 그 처의 나이 70세 이상자에게 국가에서 매년 선물을 보내는 업무, 국왕이 적전(籍田)에서 친경(親耕)을 할 때 이에 대한 준비업무, 국상(國喪) 때 상여를 운반할 사람을 선발하는 업무, 걸인을 구제하는 업무, 정남(丁男)에게 호패를 만들어 지급하는 업무, 사채로서 치부하지 못하도록 하고, 사채를 쓰고 갚지 못하면 비록 10년이 지나도 십분의 2 이상은 이자를 받지 못하게 하는 업무 등 다양하였다.

    (2) 예방(禮房)과 병방(兵房)

예방은 1주부가 관장하며 중요한 업무는 간택(揀擇)과 산송(山訟)이었다. 왕이나 왕자, 왕녀가 혼인할 때 그 배우자를 선택하기 위한 교지가 내리면 예방에서는 오부에 명하여 간택에 적합한 규수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예조에 보고하였으며, 당상관과 예방낭청이 직접 대궐에 나가서 간택업무에 참석하였다. 조선시대 서민들은 남자는 15세 여자는 14세를 결혼의 적령기로 하였으며, 부모 중 숙환이 있거나 50세가 넘으면 12세 이상이면 혼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왕실에서는 일정한 연령의 제한이 없고 형편에 따라서 혼인을 시켰다.

조선시대에는 풍수지리설이 성행하여 산소를 잘 써야 자손이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사상이 만연되어 권력있는 사람들은 남의 산에 불법으로 묘를 쓰거나 또는 몰래 쓰는 경우가 허다하여 이에 대한 소송이 많았고 이것은 예방업무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정조대왕 능행도   일식이나 월식이 있을 때는 그것이 신의 조화라고 생각하고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제사는 한성부가 지낼 때가 있고 국왕이 직접 지낼 때가 있었다. 한성부에서 치제할 때에는 한성부 당상관 1명과 낭청 1명이 푸른 제복을 입고 대청 앞에 나가서 치제하였고, 국왕이 직접 치제할 때에는 한성부 대청 앞에 제단을 마련하고 치제하였는데 이의 준비는 모두 예방에서 하였다. 또한 왕이 성외로 거둥할 때는 어가를 인도하고 일반 백성들의 접근을 금하며, 가로변에 등을 달고 경계하는 업무 등을 예방에서 관장하였다.

병방은 예방과 같이 1주부가 관장하며 주로 순찰(巡察)과 금화(禁火)업무를 담당하였다. 서울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순찰업무는 한성부와 군문, 그리고 성종 때 포도청이 설치된 이후에는 대체로 한성부와 포도청이 중심이 되어 치안을 담당하였다. 성종 12년(1481) 좌포도장과 우포도장을 정식으로 설치하고 포도절목을 제정하여 포도장과 포졸들의 임무와 치안구역, 그리고 치안에 필요한 여러가지 규칙을 정하여 치안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였다.

도성 18km에는 동대문·남대문을 비롯하여 대문이 4개, 소문이 4개 총 8개의 문이 있어 저녁 10시경 종루에서 28번의 종을 치면(人定) 8개의 문이 일제히 닫혀 성 밖의 사람은 들어갈 수 없고 성 안의 사람은 나갈 수가 없으며 모든 사람들은 출입을 할 수 없었다. 

만일 상사나 질병 기타 부득이 왕래해야 할 일이 있으면 순군이나 파수군의 인도를 받아야 했으며, 아침 4시경에 종루에서 울리는 33번의 종소리(罷漏)에 맞추어서 4대문과 4소문이 일제히 열리면서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는 것이다. 만일 저녁 10시경부터 아침 4시경까지 통행금지시간에 무고히 왕래하는 자가 있으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처벌을 받게 되었다. 3품 이상의 관원은 그의 시종을 구금하고 그 이하는 관리라 하더라도 본인을 구금하였다.    



보신각 종


한성부 치안업무를 담당하였던 말단기관으로서 경수소(警守所)가 있었다. 여기는 보병 2명이 마을사람 5명을 거느리고 활·칼·장을 휴대하고 숙직을 하였다. 경수소는 세종 때 성내가 87개소, 성외가 19개소 모두 106개소가 있어 그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였는데, 이것은 반관반민(半官半民)으로 조직된 치안기구로서 조선후기까지 한성부 치안의 일부를 담당하였다.

경수소보다 그 규모가 훨씬 작은 지방민의 자치조직인 이문(里門)이 있었다. 이것은 세조 12년(1465) 마을 입구에 문을 설치하고 그 마을 사람들 2·3명이 한 조가 되어 문을 지키면서 그 마을을 출입하는 행인들을 조사하였던 것으로 그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였던 순수 민간 자치조직이었다. 그러나 이문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부터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으며, 지금은 다만 이문동이라는 동명만이 전할 뿐이다.

또한 한성부 가옥은 대부분 초가로 되었기 때문에 한번 화재가 났다 하면 수백 수천간의 가옥이 일시에 소실되는 대화재로 번져 백성들은 물론 국가에서도 화재예방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순찰업무를 철저히 하는 동시에 소화용수와 소방용구를 항상 준비시켰다. 이와 함께 방화벽을 만들어 불이 나면 그 지역만 연소되고 다른 구역은 연소되지 않도록 하는 등 화재예방과 일단 불이 났을 때에 그 재해를 최소화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3) 형방(刑房)과 공방(工房)

형방은 2주부가 관장하였으며 그 업무는 주로 사체를 검시하고 위법자를 처벌하는 것이었다. 한성부 관할구역에서 검시를 해야 할 사건이 있으면 한성부 형방에서 해당 지역의 부장(部長)에 명령하여 초검을 하도 록 하였으며 재검할 때에는 형조에서 직접 하였다. 초검관과 재검관, 삼검 관을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고 독립적으로 검시토록 하였으니 그 형식은 매우 합리적이었다.

한편 세력있는 사람들이 남의 집을 함부로 침탈하는 일아 가끔 발생 하여 형방에서는 오부 각 방에 지시하여 매월 조사 보고케 하였으며, 위법 자는 3년 도형(徒刑) 후 유배형에 처하였다. 또한 국왕이 거둥할 때 도로 변의 잡인을 금지하고 교외로 거둥할 때에는 오부 각 방에서 50명씩 동원 하여 서리나 사령이 인솔하여 도로를 건설하고 잡인의 접근을 금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사신이 왕래할 때에 도로의 경비와 잡인의 금지, 승려들의 도성 내 출입 금지, 노비안을 작성하여 형조에 보고하는 등의 업무를 형방에서 담당하였다.

공방은 형방과 같이 2주부가 담당하였으며 그 업무는 도로·교량· 개천 등에 관한 것이었다. 한성부의 도로는 1394년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할 당시에 대로는 약 17m, 중로는 5m, 소로는 3m로 하여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도로변에 있는 민가들이 도로를 침범하여 울타리를 치거나 혹은 가옥을 짓기도 하였고 심한 경우에는 도로를 완전히 막아버리는 경우가 많아 교통의 불편을 초래하였다.

한성부 내의 도로를 관리하고 정리하는 실무는 각 방의 관리들이 담당하였으나 이에 대한 총괄업무는 한성부 공방에서 담당하였다. 또한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한성에 수도가 건설되어 인구가 집중되었으므로 자연적인 유수와 인위적인 하수 처리는 신도 건설 초기부터 위정자들의 관심사였으며 행정 담당자들의 큰 업무의 하나였다.

동·서·남·북 4산에서 흘러내려 하나의 개천을 이루고 서울의 중심 부를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청계천의 치수와 그 지류와 본류를 통과하는 교량은 대단히 많았다. 때로는 개천도감(開川都監) 또는 준천사 (濬川司) 등 별도의 기구를 조직하여 청계천을 굴착하고 제방을 쌓는 등 치수사업을 하였고 때로는 수만명의 역군을 동원하여 배수공사를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도로를 보수하고 교량을 가설하며 개천을 관리하는 업무는 주로 한성부 공방과 그 하부조직인 오부(五部)에서 담당하였다.


 

 

 

성균관

http://www.skyman.co.kr/skku-skku600.htm

http://ipcp.edunet4u.net/%7Ecosguide/outdoor/hisculture/fa.htm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BC%BA%B1%D5%B0%FC&sort=0&c=1&qt=df


 

 

 

대간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536&no=719

http://dugok.x-y.net/kor-his/sys/degan.htm

http://blog.naver.com/uprodigy/40004562553


감찰의 임무를 맡은 대관(臺官)과 국왕에 대한 간쟁(諫諍)의 임무를 맡은 간관(諫官)의 합칭. 고려 시대는 어사대·중서문하성의 낭사(郎舍)에, 조선 시대는 사헌부·사간원에 소속되었다. 그들은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고, 군주·백관의 과실을 간쟁, 탄핵하며, 관리의 인사에 서경권(署經權)을 행사하는 등의 정치적 소임을 담당하였다. 이와 같은 직임에 따라 언관(言官) 또는 왕의 이목관(耳目官)이라고도 불렸다.


대간제의 최초의 형태는 이미 주대(周代)부터 나타나며, 진(秦)·한(漢)대에 하나의 제도로서 제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어서 당·송대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우리 나라의 대간제는 당나라의 제도를 참고해 우리 실정에 맞게 재편성되었다. 시작은 신라 태종무열왕 6년(659)에 감찰기구로 설치한 사정부(司正府)에서 볼 수 있다.


≪삼국사기≫ 직관지에, 사정부와 함께 관원으로 영(令)·경(卿)·승(丞) 등을 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본기(本紀)에는 544년(진흥왕 5)에 이미 사정담당 관원을 설치하고 있었음도 아울러 전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나라 대간 제도의 기원은 진흥왕 때까지 올라 갈 수 있으나, 하나의 독립된 관부를 가지고 중요한 기능을 발휘하게 된 것은 태종무열왕 때부터라고 하겠다.


그 뒤 사정부에는 673년(문무왕 13) 지방 주현의 감찰관인 외사정(外司正)이 두어졌다. 746년(경덕왕 5)에는 내성(內省) 산하 여러 관사의 관원을 규찰하기 위한 관부로 내사정전(內司正典)이 신설되어, 신라의 감찰 기구는 점차 확대되었다.


요컨대, 신라에서는 사정부와 내사정전의 관원들이 대관이었던 셈인데, 그들은 간관의 구실까지 겸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골품 제도가 사회 조직 원리로 되어온 고대적 전제 왕권의 신라 사회에서 그들의 간관적 기능이 어느 정도로 수행될 수 있었는가는 매우 의심스럽다. 신라의 예에 비추어 고구려와 백제도 비슷한 제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확실한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 역사상 대관·간관이 따로 구분되어 설정된 것은 발해가 처음이었다.


발해의 관제를 보면, 감찰기관인 중정대(中正臺)에는 대중정(大中正)·소정(小正) 등의 대관이 있었고, 선조성(宣詔省)에는 좌상시(左常侍)·간의(諫議) 등의 간관이 있었다. 그러나 발해사회가 지니는 고대적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간관의 기능은 그리 활발하지 못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뒤 대간 제도가 조직·기능 양면에서 진전을 보여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등장하게 된 것은 고려 왕조였다. 그것은 조선 왕조에서도 대체적으로 그대로 계승되어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까지 지속되었다.


[고려]


고려의 대간 제도는 이미 국초 이래의 사헌대(司憲臺)·내의성(內議省)의 존재에서 편모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식 관부로 발족한 것은 성종 때부터였다. ≪고려사≫ 백관지에, 대관제는 성종 14년(995)에, 간관제는 목종에서 문종 연간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사≫ 세가·열전 및 ≪고려사절요≫와 비교, 검토한 결과 시기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의 대간 제도는 성종 1∼2년에 와서, 우리 나라 재래의 전통 위에 중국의 것을 가미하고, 거기에 왕조의 특수성까지도 포괄해 이룩된 정치 조직의 하나였다.


(1) 구성


대관은 사헌대 내지 어사대의 관원으로서, 대부(大夫, 정3품) 1인, 중승(中丞, 종4품) 1인, 시어사(侍御史, 종5품) 2인,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정6품) 2인, 감찰어사(監察御史, 종6품) 10인과 판사(判事, 정3품) 1인, 지사(知事, 종4품) 1인, 잡단(雜端, 종5품) 1인이 증치된, 도합 8직 19인으로 구성되었다. 그러한 구성은 다른 왕조보다도 확대된 조직으로 직권을 행사함에 있어 정치적 기능이 주목된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고려 특유의 판사·지사·잡단의 존재이다. 특히, 판사는 어사대의 실제적인 장관인 대부보다 상급 직위였고, 또 대체적으로 재상의 겸임직이었다는 점에서, 고려 대관제의 성격과 기능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한편 지방의 특별 구역인 서경(西京)과 양계(兩界)에도 분대(分臺)라는 상설 감찰 기관을 두고 있었다. 그 곳의 분대어사는 중앙의 감찰방어사(監察房御史)들이 파견 근무의 형식을 취해 부임한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의 외사정제와 유사성이 많다.


간관은 대관처럼 명확하지 않으나, 중서문하성의 하부 조직을 이루는 관원들이 모두 간관이었다고 파악된다. 즉, 중서문하성의 2품 이상이 재부(宰府)를 구성, 성재(省宰)·재신·재상이라 하였고, 3품 이하관은 낭사를 구성, 성랑(省郎)·간관이라고 불렸다.


구체적으로 좌우산기상시(左右散騎常侍)·직문하(直門下)·좌우간의대부(左右諫議大夫)·급사중(給事中)·중서사인(中書舍人)·기거주(起居注)·기거랑(起居郎)·기거사인(起居舍人), 그리고 좌우보궐(左右補闕)과 좌우습유(左右拾遺) 등 10직 14인이었다. 그와 같은 조직은 대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원에서 조선이나 당·송의 어느 왕조보다도 우세하였다.


아울러, 낭사가 재부인 중서문하성의 하부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 간관의 최상급 직위인 산기상시는 중추원의 추밀재상(樞密宰相)이 겸임하는 예가 많았다는 점 등은 중시되어야 할 사항들이다.


(2) 기능


대·간은 각기 관부를 달리하고 있었고, 맡고 있는 일도 조금씩 달랐다. ≪고려사≫ 권76 백관지에, “낭사는 간쟁과 봉박(封駁)을 맡았다.”, “대관은 시정(時政)을 논박하고 풍속을 교정하며 규찰, 탄핵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하였다. 이처럼 간관이 담당한 간쟁·봉박의 주대상이 군주였음에 비해, 대관은 관료·양천인(良賤人)의 감찰에 주임무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같은 언관으로서 다같이 시정의 득실을 논했고, 간관이 관료의 비행·탐학을 논죄하는가 하면, 대관들도 군주에 대한 간쟁 등 간관의 직능을 수행하였다. 요컨대, 어사대와 낭사 간에 직능상 약간의 차이는 있었으나, 대체로 상호 중첩된 기능을 담당하며 서로 보조하는 형편이었다. 더구나 대왕권 관계(對王權關係)에서는 운명 공동체로서 유대를 가지고 결속되어 있었다. 대간들은 왕권과의 대립, 재상의 규탄, 백관의 논핵 등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많은 어려움과 위험이 뒤따랐다. 그에 따라 그들에게는 직권 행사에 부응하는 여러 특권과 은전이 부여되어 있었다.


대간은 재직 중 함부로 체포되지 않고, 곧바로 지방관으로 전보되지 않았으며, 어사대는 불가범(不可犯)의 특수지역으로 인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왕을 직접 대면해 언론할 수 있는 면계(面啓)의 배려를 받았다. 또한 피마식(避馬式)에서도 특별한 대우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직위는 화요직(華要職)으로 간주되어, 비록 품질은 양부 재추(兩府宰樞)에 미치지 못했으나 실권은 그들에 비견할 만한 것이었다.


대간의 위치와 직무가 크고 중요했던 만큼, 그들은 가문과 능력 등의 여러 부면을 심사한 뒤 엄선되었다. 세가 출신(世家出身)으로서 풍부한 교양과 깊은 학식을 갖추고, 군주와 재상을 상대로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언론을 펼 수 있어야 하였다. 나아가서 사세에 따라 왕권과 맞서게 되므로 특별한 강직성이 요구되었다. 또한 백관의 비위를 규핵하는 자리였음으로 행동은 엄숙 방정하고, 생활은 청검 순직하며, 타관의 모범이 되어야 하였다.


(3) 대상


대간의 정치적 기능, 즉 시정의 논집·봉박·서경·규찰·탄핵 등의 대상으로는 군주와 재추 문무 양반(宰樞文武兩班) 등 두 부류를 볼 수 있다. 왕권에 대한 대간의 기능에서, 국왕의 전제와 횡포를 억제한 면보다는 오히려 왕권을 강화하는 면에서 작용한 것 같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정치의 실제에 있어서 대간과 국왕을 대비시켜 놓고 보면, 그들이 왕권을 규제한 면이 강하게 나타난다.


후자 즉 재추 문무 양반 중 재추에 대해서 보면, 그들 또한 서경·규찰·탄핵 등으로 많은 규제를 받았다. 그러나 양자는 그러한 규제·대립의 관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서로 긴밀하게 협조하는 일면도 있었다. 우선, 양자는 같은 신료(臣僚)의 처지에서 왕권에 대해 운명 공동체적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대간제는 고려의 귀족제 사회 체제에 잘 어울리는 제도로, 설치 자체가 왕권의 일방적인 독주를 막고자 희망하는 유신 귀족(儒臣貴族)들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한편 대간의 장관을 재추가 겸임한다거나 또는 간관이 성재가 있는 중서문하성의 하부 관원으로 존재하는 등, 조직적인 면에서도 유대의 소지가 마련되어 있었다.


요컨대, 대간은 왕권과 재추 각자와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얽힌 속에서 규제와 협력의 두 측면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고려 왕조에서는 대간과 재추 간에 밀접히 연결되어 있던 조직상의 특성이나 귀족제적인 사회 체제로 보아 양자 사이에는 협력 관계가 강하였고, 그에 따라 왕권과의 관계에서는 규제 기능에 주안점이 있었다.


[조선]


새로운 조선 왕조가 들어섰으나, 대간제도는 거의 그대로 계승되었다. 대간에게는 여전히 언관으로서 간쟁과 탄핵·서경 등의 권한이 부여되고, 그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또한 강직하고 식견이 뛰어난 위망있는 관료들로 선발하였다. 그러나 왕조의 교체에는 권력구조와 사회체제의 변화까지 수반되었던 만큼 대간제도에도 변화가 뒤따랐다.


1392년 7월 문무의 관제를 제정, 공포하면서 사헌부의 대관은 종2품의 대사헌 1인, 종3품의 중승·겸중승 각 1인, 정4품의 시사(侍史) 2인, 정5품의 잡단 2인, 정6품의 감찰 20인으로 구성되었다. 이것은 고려의 대관인 판사·지사 등을 없앤 축소된 조직이었다. 특히 판사는 성재의 겸임직으로 관심의 대상이었는데, 조선에서는 애초부터 이 직관을 설치하지 않았다. 대신 대사헌의 품계를 종2품으로 올려 재상의 지위에 처하도록 하였다.


그 뒤 1401년(태종 1) 7월에 대사헌은 그대로 두고 중승·겸중승은 집의(執義)로 단일화하고, 시사는 장령(掌令), 잡단은 지평(持平)으로 명칭을 바꾸며, 감찰은 정원을 5인 늘렸다. 이와 같은 대관의 조직은 세조 때 감찰의 정원수에 약간의 변동이 있었을 뿐, 대체로 그대로 ≪경국대전≫에 수록되어 조선의 제도로 고정되었다. 그리하여 그 뒤 몇 차례에 걸친 관원수의 증감에도 불구하고, 1894년의 갑오경장 때 의정부 직속으로 도찰원(都察院)이 신설되기까지 그대로 계속되었다.


이상과 같은 조선의 대관제는 조금 성격이 다른 감찰을 제외하고 언관으로서의 대관만을 대상으로 파악할 경우, 고려에 비해 3인이나 감소되고, 또 재부와 사헌부 간의 긴밀한 관계가 단절되고 있다. 그리고 각 도에 수시로 파견되는 행대(行臺)·분대(分臺) 또한 고려의 분대와 내용을 달리하는 존재로서 약간의 상이점이 발견된다.


간관제 역시 1392년 7월에 공포되어, 간관은 문하부낭사 소속관원으로 정3품의 좌·우산기상시 각 1인, 종3품의 좌·우간의대부 각 1인, 직문하 1인, 정4품의 내사사인(內史舍人) 1인, 정5품의 기거주 1인, 좌·우보궐 각 1인, 그리고 정6품의 좌·우습유 각 1인이 있었다. 고려와 비교해 급사중·기거랑·기거사인 3인이 줄고, 품계에도 약간의 변동이 보인다. 그러나 그 밖의 정원·명칭, 그들이 문하부에 소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간관제는 1401년 7월의 개혁에서 조선왕조 나름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즉 문하부를 혁파하고 의정부를 설치하였다. 그 때 문하부낭사는 의정부에 소속되지 않고 사간원으로 독립, 국왕의 직속기관이 되었다. 그로 인해 왕권 규제면에서의 간관기능은 약화되고 대신 재상에 대한 견제권이 강화되었다.


또한, 간관수가 감소되어, 우선 최고직인 산기상시가 혁파되고, 내사사인·기거주는 간관 대열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간의대부는 사간대부(司諫大夫)로 고쳐지고, 직문하는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보궐은 헌납(獻納), 습유는 정언(正言)으로 바뀌어, 총인원이 고려 때의 절반인 7인만이 남게 되어 기능이 약화되었다.


그 뒤 간관의 수를 줄이고자 하는 왕권의 노력은 계속되어, 세조 때는 3인까지 줄어들었다. 1466년(세조 12)에는 사간대부를 정3품의 대사간(大司諫)으로, 지사간원사를 사간(司諫)으로 바꾸었고, 여기에 헌납·정언 각 1인을 더해 4직 4인으로 고정시켰다. 1470년(성종 1) 정언 1인을 추가해 ≪경국대전≫에 실었다. 이 제도는 연산군의 폭정으로 한때 폐지되기도 했으나 곧 복구되어 갑오경장 때까지 존속하였다.


간관의 경우도 대관처럼 재상과의 분리 및 정원의 감소로 조직면에서 고려 때보다 훨씬 열세였다. 따라서, 대간의 직임은 고려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권한의 한계에서는 훨씬 약화되었다.


서경의 경우, 고려에서는 1품에서 9품까지의 모든 관리에게 적용시켰으나, 조선은 5품 이하로 한정시켰다. 또한 고려에서는 풍문(風聞)에 의한 조사 탄핵이 별다른 제약이 없었으나, 조선은 금지되었다. 그리하여 대간의 정치적 기능도 서경과 탄핵 등 직권이 크게 축소되면서, 왕권의 규제라는 측면은 큰 의미를 잃어버렸다.


오히려 대간제 존재의미는 신료 내부의 상호 견제 작용에 의한 권력 구조의 안정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에서는 재상과 대간이 동일 관서의 상하 관계가 아니라 일대일의 정치적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간은 의정부를 감찰, 탄핵한 반면, 의정부 역시 대간의 일에 간여하고 있다. 아울러, 대간이 서경권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조(吏曹)에는 그들에 대한 고공(考功)의 권한을 부여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조선 시대의 대간은 왕권 및 의정부와 육조(특히 이조)와 상호 견제하도록 짜여진 권력 구조 위에서 정치의 안정을 도모하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대간이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정권 다툼에 이용될 때는 많은 폐단을 낳을 위험성도 있었다. 결국, 그와 같은 가능성은 성종 때 신구세력의 대립과 그로 인한 연산군 때의 사화 및 선조 이후의 당쟁에서 사실로 나타났다.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은 당쟁의 요인을 이조 전랑(吏曹銓郎)과 대간의 권한이 지나치게 큰 데서 찾고 있다. 이건창(李建昌)도 그 원인의 하나로 ‘대각태준(臺閣太峻)’을 들고 있어, 대간이 정쟁(政爭)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대간은 고려와 조선에서 모두 정치 권력의 핵심에 위치한 관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각 왕조에서 맡은 구실과 기능은 조금 달랐다. 대간제 또한 그것이 딛고 있는 사회 체제와 정치 체제를 반영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운영의 실체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太祖實錄, 太宗實錄, 經國大典, 三峰集, 朝鮮初期 言官·言論硏究(崔承熙, 서울大學校 韓國文化硏究所, 1976), 高麗時代 臺諫制度硏究(朴龍雲, 一志社, 1980), 朝鮮成宗時代の新舊對立(申奭鎬, 近代朝鮮史硏究 1, 朝鮮總督府, 1944), 高麗時代의 署經에 대하여(金龍德, 李丙燾博士華甲紀念論叢, 1956), 臺諫制度의 法制史的考察(李洪烈, 史叢 5, 1960), 朝鮮 中宗初에 있어서의 大臣과 臺諫의 對立(朴榮圭, 慶北大學校論文集 5, 1962), 李朝 臺諫의 機能變遷(李載浩, 釜山大學校論文集 4, 1963), 高麗의 中書門下省에 대하여(邊太燮, 歷史敎育 10, 1967 ; 高麗政治制度史硏究, 1971), 高麗御史臺에 관한 一硏究(宋春永, 大丘史學 3, 1971), 朝鮮朝 士林政治의 權力構造(宋贊植, 經濟史學 1, 1978).


<박용운>



 

 

 

2) 지방 행정 조직

 

 

 

암행어사

http://www.imbc.com/tv/drama/inspector/html/story_.html

http://contents.edu-i.org/gongmo/2001/sys9926/auditor_series.html


 

 

 

유향소

http://211.252.89.97/ban/sa/ex/h5337.htm

고려 말~조선시대 지방 군(郡) ·현(縣)의 수령(守令)을 보좌한 자문기관(諮問機關)으로 수령의 아문(衙門)에 다음가는 중요한 관아라 하여 이아(貳衙)라고 불렀으며, 향소(鄕所) ·향소청(鄕所廳)이라고도 하였다. 이 제도는 고려의 사심관(事審官)에서 유래된 것으로, 초기에는 덕망이 높고 문벌이 좋은 사람을 사심관으로 삼다가 말기에는 전함(前銜:전직) 품관(品官)들을 사심관에 임명하면서 유향품관(留鄕品官) ·한량관(閑良官)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이들 유향품관 ·한량관들이 자의적(自意的)으로 유향소를 만들어 지방자치의 기능을 맡았다. 유향소는 벼슬에서 은퇴한 이들 지방 품관을 우두머리로 뽑아 지방의 풍기를 단속하고 향리(鄕吏)의 악폐를 막는 등 민간자치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맡았는데 태종 초에 와서 차차 지방 수령과 대립하여 중앙집권을 저해하는 성향을 띠게 되어 1406년(태종 6)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좀처럼 없어지지 않아 그 폐지가 불가능해지자 1428년(세종 10)에는 유향소의 설치를 다시 명하여 각 유향소의 품관 정원을 정하고 이를 감독하는 경재소(京在所) 제도를 강화하였으며, 수령의 비행(非行) 여부를 논할 수 없다는 법이 마련됨에 따라 유향소의 자치적 성격은 크게 줄어들어 품관들은 위축된 지위의 보존을 위해 수령들과 타협 결탁하기도 하였다. 유향소는 1467년(세조 13) 함경도에서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그들의 일부가 이에 가담함에 따라 다시 폐지되었는데, 이때 폐지된 이유 중의 하나는 유향소가 수령의 편에 서서 백성을 침학(侵虐)함이 심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뿌리를 내린 유향소는 쉽게 없어지지 않고, 꾸준한 복설(復設)운동의 결과 1488년(성종 19)에 다시 부활되어 향임(鄕任), 혹은 감관(監官) ·향정(鄕正)의 임원을 두게 되었는데, 이들 임원은 주(州) ·부(府)에 4,5명, 군에 3명, 현에 2명의 정원을 두었으나 후대에는 창감(倉監) ·고감(庫監) 등의 직책이 생겨 10명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좌수와 별감

http://211.252.89.97/ban/sa/ex/h5268.htm

조선시대 지방 군 ·현의 수령(守令)을 보좌하던 자문기관인 향소(鄕所)의 벼슬로 향소는 유향소(留鄕所)라고도 하며, 여기에 좌수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좌수는 향사(鄕士)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사람을 향사들이 선거하여 수령이 임명하였으며, 임기는 2년이었으나 수령이 바뀌면 개선할 수도 있었다. 유향소는 원래 지방풍속의 단속과 향리의 규찰 등을 그 임무로 했는데, 성종 때 확정된 주(州) ·부(府) 4,5명, 군(郡) 3명, 현(縣) 2명의 정원이 대체로 지켜지다가 후대에는 창감(倉監) ·고감(庫監) 등의 직책이 생겨 때로는 10명이 넘는 경우도 있었으며, 좌수라는 칭호도 향임(鄕任) 흑은 감관(監官) ·향정(鄕正) 등의 호칭이 더 많이 쓰였다. 직임(職任)을 6방(房)으로 나누어 좌수가 이(吏) ·병(兵)방, 좌별감이 호 ·예(禮)방, 우별감이 형(刑) ·공(工)방을 맡는 것이 통상이었다.


 

 

 

관찰사

http://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58-goanchalsa.htm

조선시대 외관직(外官職) 문관의 종2품 벼슬이다. 감사(監司)도백(道伯)·방백(方伯)·외헌(外憲) 등 여러 별칭이 있다. 13도(道)에 각 1명씩 두었으며,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무관직(武官職)을 거의 겸하고 있었다. 고려 말기에는 안렴사(按廉使)·관찰출척사(觀察黜陟使)라 하였고, 조선 초기에는 안렴사·관찰사·관찰출척사 등의 이름으로 자주 바뀌었으며 관찰사로 굳어진 것은 7대 세조 때부터였다.


  처음 이름은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였는데 1466년(세조 12) 관찰사로 고쳤다. 관찰사를 처음 두었던 시기는 고려 말엽인 1388년(창왕 즉위)으로, 도별로 4~6품의 문신을 6개월 임기로 파견하던 안렴사(按廉使) 체제를 부곡제(部曲制) 정리와 군현제 개편을 바탕으로 도제가 강화되는 추세 속에서 2품의 고위관료를 1년 임기로 파견하는 관찰사 체제로 개편한 것이다. 이어서 1389년(공양왕 1)에는 경관(京官)이 구전(口傳)으로 임명되어 겸임하던 것을 제수(除授)하여 임명하는 전임관(專任官)으로 바꾸고, 이듬해에 하부기구로 경력사(經歷司)를 설치하여 경력(經歷)·도사(都事)를 둠으로써 기본틀이 갖추어졌다. 그러나 조선 성립 이후에도 동·서북면에는 도순문사(都巡問使)를 감사로 파견하고, 몇 차례 안렴사로 환원되었다가 다시 관찰사로 바꾸는 등 일정하지 않다가, 1414년(태종 14) 동·서북면을 영길도(永吉道)와 평안도로 개편하고 1417년(태종 17) 전국 8도에 관찰사를 파견함으로써 제도로서 확립되기에 이른다.즉,


  관찰사[감사]는 종2품 이상의 현직 및 퇴직 관료 중에서 임용하였다. 임기는 360일로 규정되어 5도 및 경기도에 적용하였고, 함길 평안 양도는 2년이었다. 양도는 감사가 가족을 거느리고 부임하여 감영 소재지의 수령을 겸직하는 겸목(兼牧)이 이루어진데 반해, 6도의 감사는 단신으로 부임하여 임기 동안 감영을 중심으로 도내 군현을 순력(巡歷)하면서 업무를 수행하였다.


  중요한 정사에 대해서는 중앙의 명령을 따라 시행하였지만, 자기 관하의 도에 대해서 민정·군정·재정·형정(刑政) 등을 통할하여 지방행정상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관하의 수령(守令)을 지휘 감독하였다.


  그리고 관찰사는 수령 등과는 상피(相避)하여야 했다. 또한 관찰사는 도내의 행정 및 군사 업무를 통제 지휘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도내 수령에 대한 지휘권은 물론이고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직책을 모두 겸해서 따로 병마·수군절도사가 두어지는 도에서도 군사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였다. 관찰사는 중요한 정사에 대해서는 중앙의 명령에 따라 행하였지만, 관할하고 있는 도에 대해서 도의 장관으로서 경찰권·사법권·징세권 등을 행사하여 지방행정상 절대적 권력을 가졌던 것이다. 관찰사의 관청은 감영(監營)이라고 하며, 1446년(세종 28) 경력이 폐지된 뒤로는 도사(都事) 외에 검율(檢律)·심약(審藥) 등이 직속관원이었다. 한때 관찰사가 감영이 설치된 지역의 수령을 겸한 일이 있는데, 그 경우 판관(判官)을 두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중군(中軍)이 추가되었다. 그밖에 일반 행정은 감영에 속한 영리(營吏)들이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6방에 소속되어 담당하였다.


  지방별로는 경기관찰사는 서울 또는 수원에, 충청관찰사는 충주 또는 공주에, 경상관찰사는 경주(慶州)·상주(尙州)·성주(星州)·달성(達城:대구)·안동(安東)에, 전라관찰사는 전주(全州)에, 함경관찰사는 함흥(咸興)·영흥(永興)에, 평안관찰사는 평양에, 황해관찰사는 해주(海州)에, 강원관찰사는 원주(原州) 등지에 두었다.


 

 

 

군현

http://chang256.new21.net/board/reply.php?db=201&no=144&page=1

http://history5000.com.ne.kr/ks6.html

1413년(태종 13) 정부는 전국을 8도(경기. 충청. 전라. 경상. 황해. 강원. 평안. 함길)로 나누고 속군, 속현에 현감을 파견하는 것을 골자로 한 지방제도 개편을 단행했다. .군현의 등급 정리 . 속현, 향, 소, 부곡의 정리라는 큰 줄기를 갖는 이번 개편의 목적은 정비된 군현제를 통해 향리세력의 약화와 중앙집권을 이루는 것이였다.

전왕조 때부터 오랜 과제였던 일반 군현, 속현, 향, 부곡의 승격.하락 기준이 아직 완전히 마련되지는 않았지만 속현, 향, 소, 부곡의 주읍화를 시행하였고, 지난 수년간 왜구의 피해로 토착세력의 기반이 허약해 큰 저항이 없던 전라도가 가장 앞선 진척도를 보였다. 


 


 

 

3) 군역 제도와 군사 조직

 

 

 

양인개병제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11&dir_id=110101&eid=OAuHk916oVXwinolrRxOinF1Fm6A63Db


법제적인 측면에서 중인 신분은 없습니다. 오직 양인과 천인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물론 사회적인 측면에서 중인 신분은 존재합니다. 역관, 향리, 의관 등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러나 국가에서 파악하는 신분이라는 범주는 양인인가, 천인인가 일 뿐입니다.

각각의 보기들을 살펴보면,

먼저, 正軍 또는 正兵은 양인에게만 부과되는 군역입니다. 여기서 양인은 법제적인 신분일 뿐입니다.

둘째, 농민들이 모두 정병이 된 것은 아닙니다. 만약 모든 농민이 정병이라면 누가 농사를 짓겠습니까? 다만 모든 농민 중에 양인 신분인 사람은 정병의 의무를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병의 의무를 지는 방법으로 정군이 되든지, 보인이 되는 두가지 방법이 있었을 따름입니다.

세째, 일단 군역의 부과대상자를 가리는 과정에서 양인인가 천인인가를 판별합니다. 그리고 군역 대장에 올라가면 지방 수령들에 의해 정병과 보인으로 구분되었습니다. 구분의 기준은 주로 경제력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네째. 양반도 예외없이 군역을 부담했습니다. 오늘날 남아있는 [퇴계전서]의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퇴계 이황이 서울에서 관리생활을 하고 있는데 고향에 있는 아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조만간 퇴계의 고향으로 군역 사찰이 들어가므로 사찰에 걸려 군역대상자로 충당되지 않도록 당부하는 내용입니다. 즉 원칙적으로 양반이라해도 군역을 져야하는 대상이었습니다. 다만 전직, 현직 관료들과 지방 향교의 유생들은 면제받는 상황이었습니다. 이것도 각 지역마다 정해진 액수가 있고 명단이 있어 상당히 조직적으로 관리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군역은 자유인으로서 가지는 권리에 대한 대가가 아니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조선시대에 자유인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맹자]에서, "넓고 넓은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것이 없으며, 그 위에 존재하는 인간 중에 왕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다."라고 한 것처럼 당시 사회에 자유인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또 조선 전기에 군역은 권리에 대한 댓가라기 보다는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였습니다. 다시 말해 의무이기도 했지만 충분한 반대급부까지 보장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봉족

http://www.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171-bongjog.htm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536&no=671


조선시대 평민의 남자가 부담한 국역(國役)으로, 조선은 초기부터 양인(良人:평민)을 중심으로 한 병농(兵農)일치의 개병제(皆兵制)를 확립, 양반계급을 제외한 16~60세 평민에게 군역(軍役)을 부과하고, 이를 정규군사로서 활동할 호수(戶首)와 그 경제적 뒷받침을 맡을 봉족(奉足)으로 구분하였다. 이들 봉족에게는 정정호에 재물을 바치거나 노동력을 제공하여 정정의 입역비용을 지원하거나, 정정호의 가계를 지원하도록 했다.  현역으로 뽑혀 번상(番上)하는 사람에게 직접 군역을 지지 않는 장정을 봉족으로 삼게 하여 그 비용을 충당케 하였는데, 군역을 지는 호수(戶首)에 대한 봉족의 지급은 병종(兵種)에 따라 달랐다.


  봉족제는 고려의 양호제(養戶制)에서 유래한다. 고려에서는 3가 1호로 구성되는 1군호(軍戶)에 족정(足丁)이라는 17결의 토지를 군인전으로 지급했다. 3가는 각각 군정 1명씩을 내어 1군호에 3명의 군정이 나오는데, 그중에서 입역하는 자는 정정 1명뿐이고 2명은 상번한 정정의 양호(養戶)가 되어 군인전을 경작했다. 조선의 봉족제는 토지지급 없이 토지를 보유한 가호(家戶)를 대상으로 편호(編戶)한 것이다.


  1404년(태종 4)에는 봉족제도를 다시 정비하여 군역을 비롯한 각 읍의 양(良) ·천역(賤役)에 대한 봉족의 수를 규정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토지 2결(結) 이하를 소유한 빈호(貧戶)로서 갑사(甲士) ·시위패(侍衛婢:이전까지는 서울에 번상 시위하는 군사를 시위패(侍衛牌), 각 지방에서 근무하는 군사를 영진군(營鎭軍) ·수성군(守城軍), 평안 ·함경도의 군사를 정군(正軍)이라고 불렀다.) ·기선군(騎船軍:후의 水軍)의 역(役)을 지는 사람에게는 각각 봉족 2호(戶), 진속군(鎭屬軍) ·향리(鄕吏) ·역리(驛吏) 등에게는 봉족 1호, 경외(京外)의 입역노비(立役奴婢)에게 봉족 2호를 주었으나 종실(宗室)의 원친(遠親)이 속한 족친위(族親衛;오위(五衛)의 호분위(虎賁衛)에 소속되어 있던 군대), 오위(五衛)의 충좌위(忠佐衛)에 속한 공신(功臣)의 자손이 속한 충의위(忠義衛) ·충찬위(忠贊衛), 양반의 자제가 속한 충순위(忠順衛;오위(五衛)의 후위(後衛)인 충무위(忠武衛)에 속하였던 군대) ·친군위(親軍衛;5위(五衛)의 하나인 호분위(虎賁衛)에 속해 있던 소부대) ·별시위(別侍衛;5위 중의 하나인 용양위(龍折衛)에 속한 소부대), 그리고 수성군(守城軍)에게는 봉족을 지급하지 않았다.


  또한 6결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부호(富戶)가 군역에 설 때에도 봉족을 주지 않았다. 역을 지는 자와 그에 딸린 봉족의 관계는 전혀 관계가 없는 타인일 수도 있지만 모두 평민으로서 보통 가족, 친족관계이거나 이웃 등 가까운 사이로 이루어졌으며 향리의 봉족은 향리가 딸리게 되어 있었다. 봉족을 사람 단위로 부를 때는 조정(助丁)이라 하고, 함경도에서는 관하(管下), 제주도에서는 인록(人祿)이라 하였으며, 호(戶)를 단위로 할 때는 봉족호(奉足戶) ·조호(助戶)라 하였는데, 초기에는 가호(家戶) 내의 인정(人丁) 파악까지 이루지 못하여 사람 단위로 하지 못하고 봉족의 배정도 자연호(自然戶)를 단위로 이루게 되어, 부호(富戶)는 1정(丁)이 단독으로 1호, 빈호(貧戶)는 5정을 1호로 하기도 하였으나 보통 3정을 1호로 구성하였다.


  그러나 봉족제는 가구별 인정보유수의 차이가 커서 군역부담이 불균등해지는 문제가 있었다. 더욱이 조선 초기에는 울타리를 기준으로 하여 울타리 안의 가구를 하나의 자연호로 파악하므로 부호는 울타리 안에 수많은 자연호를 숨기고 있기도 했다. 이를 1가로 인정하면 이들의 부담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된다. 이들은 향리·수령과 결탁하여 군역차정·군적작성 과정부터 이런 특혜를 누렸다. 봉족의 지급액은 역종(役種)과 유역자의 신분, 유역자가 보유한 토지와 인정의 양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유력한 신분이 입역하는 역종일수록 봉족이 많고 같은 역종이라도 유역자의 신분이 높으면 많은 봉족을 받았다. 봉족호는 2~3결 이하의 전지(田地) 소유자로 삼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부호가 봉족이 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으며 가능한 가족·친지들로 묶어주도록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친족이 아닌 빈민이나 지위가 낮은 자로 충당하되 호수(戶首)가 봉족에게서 높은 역가(役價)를 징수하고 노비처럼 부리기도 했으며, 봉족이 주호(主戶)의 역을 대립(代立)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 후 세종 시대를 거치면서 호구 조사에 진전이 이루어짐에 따라 호단위 봉족제도의 단점을 보완하였다. 1464년(세조 10) 인정(人丁) 단위의 보법(保法)으로 개편, 2정(丁)을 l보(保)로 하는 보인제도(保人制度)로 대체되어 종래 2호의 봉족호를 받던 갑사는 2보(4명의 보인), 기정병(騎正兵) ·수군(水軍) 등은 1보 1정(3명의 보인), 보정병(步正兵)은 1보(2명의 보인)를 지급받아 그들의 군역에 따른 경비를 충당하였다


 

 

 

품계

http://anu.andong.ac.kr/%7Edwyun/poomgea.htm


官職이란 政府職制에 의한 職責을 말하는 것이며, 品階란 관리의 등급으로 位階 또는 官階라고도 한다. 이는 중국 周나라 때부터 시행되었으며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어 조선말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品階는 시대에 따라 다르며 文官과 武官에게 주는 명칭도 각기 달랐고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의 鄕職에도 9품의 上·下 구분이 있었다.


신라 때는 骨品制度를 바탕으로 한 귀족 연합의 전통위에 형성되어 1등급인 伊伐瑗에서 17등급인 造位까지 구분 하였고, 고려 때는 골품제를 폐지하고 당나라 제도를 본받아 중앙집권적 3省 6部 체제를 확립 하였다.


이는 從 1品에서 從 9品까지인데 3품까지는 正·從 2등급으로, 4품부터는 다시 上下로 구분하여 총 29階였으며, 이외에 왕의 최고 고문격인 三司·三公직이 있었는데 이들은 정 1품이었다.


조선은 초기에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다가 점차 왕의 권한이 커지면서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갖추고 정 1품에서 정 9품까지 18品階의 관계로 하였다.



1. 官職의 名稱


원래 관직의 정식명칭은 階(품계의 명칭)·司(소속된 관청)·職(맡은 직분)순으로 쓰는데, 예를들면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은, 대광부국숭록대부란 階를 말하며 品階名稱이고, 議政府는 司를 말하며 소속된 관청을 뜻하고, 領議政은 職을 말하며 職分이 된다.


특히 정 3품 이상(文官은 通政大夫, 武官은 折衝將軍)을 堂上官, 정 3품 이하(文官은 通訓大夫, 武官은 어모장군)를 堂下官이라 하는데, 堂下官 중에서도 종 6품이상을 參上官, 정 7품이하를 參下官이라 한다.



2. 官職의 行守法


간혹 어떤 官職에는 관직위에 行자나 守를 붙여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行守法이라 한다.


行이란, 자신의 품계보다 실제관직이 낮은 경우 즉, 종 1품계인 崇祿大夫가 정 2품 관직인 吏曹判書職을 맡으면 관직앞에 行자를 붙여 崇祿大夫行吏曹判書라 한다.


반대로, 자신의 품계보다 실제 관직이 높은 경우를 守라 하는데 종 2품계인 嘉善大夫가 정 2품인 大提學을 맡으면 嘉善大夫守弘文館大提學이라 한다.



3. 文散階·武散階·雜織·土官職


文散階란 文官의 位階制度로서 文臣(조회가 있을 때 文官은 동쪽에 서게 되므로 東班이라


고도 한다)에게 주는 품계이며,


武散階란 武官의 位階制度로서 武臣(조회 때 무관은 서쪽에 서게 되므로 西班이라고도 한다)에게 준는 품계이다.


雜織이란 사무를 담당하지 않고 잡직에만 종사하던 관직으로 6품까지만 오를 수 있었으며 정직에 임명될 때에는 1품계를 낮추었다.


또한 土官職이란 함경도·평안도 지방의 토착민들에게 주었던 특수관직으로 이들이 異民族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고 성격도 대륙적 기질을 띄고 있어 反逆할 우려가 있으므로 중앙관직은 주지않고 이러한 관직을 주어 민심을 회유할 목적으로 실시되었다. 이는 5품까지 한정되었는데 중앙관직으로 임명될 때에는 1품계 강등하였다.



4. 贈職과 影職


贈職이란 宗親이나 종 2품이상 官員의 부모·조부모·증조부모 또는 효자·충신·학덕이 현저한 사람에게 功이나 德을 기리어 나라에서 死後에 관직과 품계를 追贈하는 벼슬로 官職앞에 贈자를 붙인다.


影職이란 실제로 근무하지 않고 이름만 가지고 있는 벼슬로 이를 借銜(차함)이라고도 한다.



5. 薦擧·蔭職·蔭官


薦擧란 학식과 性行이 뛰어나고 德望이 높은 士林중에서 現職高官이나 地方 觀察使 등의 推薦으로 발탁되어 벼슬로 나가는 것을 말한다.


蔭職이란 功臣 또는 現職 堂上官의 자손들이 科擧에 응하지 않고 간단한 시험으로 관리로 임명되는 것인데, 蔭仕 또는 南行이라고도 하며 특히 蔭職 출신의 宰相을 蔭宰라 한다.


蔭官이란 小科(사마시)에 합격한 生員·進士가 처음으로 벼슬에 나가는 것을 말하며 初仕 또는 筮仕(서사)라고도 한다.



6. 耆老所와 궤장


耆老所란 임금이 年老하거나 정 2품의 文官중 70세이상이 되는자에게 경로와 예우를 목적으로 설치된 관청으로 耆社라고도 한다. 여기에 들면 靈壽閣에 肖像이 걸리고 宴會가 열리며 田土와 奴婢 등을 하사 받는다.


초기에는 武臣이나 蔭官은 들어갈 수 없었으며, 국왕과 신하가 함께 참여한다하여 관청의 서열로는 으뜸이었으며 매우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역대 국왕중에는 태조·숙종·영조가 여기에들어갔다.


궤장이란 70세이상의 1품관으로 국가의 요직을 맏고 있어 致仕(벼슬을 물러남)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국왕이 궤장을 직접 하사하였으며, 국가행사로서 궤장宴이란 잔치를 성대하게 베풀어 주었다.



7. 敎旨와 牒紙


가. 敎旨 : 4品官 以上 官員에게 내리는 辭令狀(職牒)


나. 牒紙 : 5品官 以下 官員에게 주는 辭令狀


다. 傳敎 : 임금의 命令


라. 除授 : 추천없이 임금이 직접 官員을 任命하는 것


 

 

 

진관체제

http://www.hwayang.pe.kr/htr-401.htm


선행적인 군사편제의 바탕위에서 지역 단위 군사편제로서 더욱 조직화된 것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지방 군사제도인 진관체제(鎭管體制)였다. 세조 3년(1457) 10월 각 지역의 전략적 거점을 거진(巨鎭)으로 해서 나머지 주변의 제진(諸鎭)이 그 예하에 소속되게 한 진관체제(鎭管體制)는 군익도 체제의 중·좌·우익의 체제가 지양되고, 거진을 중심으로 제진(諸鎭)을 이에 부속시킴으로써 제진의 독자성을 부여하고, 일원적 군사체제를 더욱 분명히 한 조치였다


  이같은 진관체제에서의 각 도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 종 2품)를 두고 도내의 육군에 대한 지휘권을 갖게 하였는데, 그의 주재지가 주진(主鎭)이었고, 그 아래에는 목사(牧使 : 종 3품)가 겸하는 경우가 많은 첨절제사(僉節制使, 부윤은 절제사) 거진(巨鎭)을 단위로 하는 진관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말단 제진(諸鎭)은 군수(郡守 : 종 4품) 이하가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의 직함을 갖고 있었다.


  전라도의 경우는 전라관찰사가 병사(兵使)를 겸임하여 군사관계 행정을 장악하고 실제적인 군사지휘권은 병영에 있던 전임의 병마절도사가 가지고 있었다. 결국 관찰사는 1도의 행정책임자로서 군사관계 행정을 장악한다는 점에서 병사(兵使)를 겸할 뿐, 실질적인 군사지휘계통은〈병영의 병마절도사→거진(巨鎭)의 첨절제사 도는 병마절제사→제진의 동첨절제사〉로 연결되는 일원적 계통이 확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수군의 경우도 육군의 진관편성에 이어 진관조직을 갖추게 되었는데, 각 도의 수군 최고 지휘관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 정 3품)이었다.


 

 

 

 

잡색군

http://www.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301-jabseggun.htm

고려시대에도 1268년(원종 9) 이후 잡색군에 관계된 기록이 몇 가지 발견되지만 그 성격이 명확하지 않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체계적인 군대조직으로 정비되기 시작한 듯하다. 조선 전기에는 지방의 군사력으로서 영진군(營鎭軍)과 수성군(守城軍)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지만, 이는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설치된 진(鎭)이나 도절제사(都節制使)가 있는 내상(內廂)에만 두어졌고, 대부분의 내륙지방에는 군대가 없었다.


  또한 정규군 이외에도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정규의 군역 부과자 이외의 각종 인정(人丁)을 망라하는 광범위한 동원태세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1410년(태종 10) 잡색군의 조직이 이루어지지만, 이것은 고려말 이래의 연호군(煙戶軍)의 동원태세를 재정비하는 데서 취해졌을 뿐이었고, 1425년(세종 7)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에서 비로소 별패(別牌)·시위패(侍衛牌)·영진군·수성군·기선군(騎船軍)과 함께 하나의 병종(兵種)으로 파악되었다.


  편성 대상은 정규의 군인이나 그 봉족(奉足)이 되지 않는 자들 가운데 현직 관리와 전함(前銜) 3품 이상자를 제외한 향리·관노(官奴)·공사천구(公私賤口)·목자(牧子) 향교의 생도 등 군역 이외의 국역(國役)을 지거나 아예 국역을 지지 않는 자들을 망라하였다. 편성은 25명 1대(隊)로 하였는데, 수령에게 그 징발과 지휘 권한이 있었다. 징발 대상자가 원하는 바에 따라 마군(馬軍)·보군(步軍)으로 편제하였고, 10인 단위에는 소패(小牌), 50인 단위에는 총패(摠牌)라는 지휘자를 두었다. 하지만 세조 이후 전국을 군사조직으로 묶은 진관체제(鎭管體制)가 완성되면서 군액(軍額)을 파악할 때조차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유명무실화되었다.


 

 

4) 관리 등용 제도


 

 

 

취재

http://100.naver.com/100.php?id=149062

취재에는 이조취재(吏曹取才:文官) ·예조취재(禮曹取才:雜職) ·병조취재(兵曹取才:武官)의 구별이 있었다. 일정한 신분을 가진 자에게 제한된 한도 내에서 관직을 주기 위해 제정한 제도이다. 이 중 이조취재에는 수령(守令) ·외교관 ·역승(驛丞) ·도승(渡丞) ·서제(書題) ·녹사(錄事) ·도류(道流) ·서리(書吏) 및 음자제(蔭子弟) 등이 보던 취재가 있었는데, 외교관 ·음자제의 취재는 매년 정월에, 녹사 취재는 매년 정월과 7월에, 서리 취재는 3년에 1회, 그 외는 부정기적으로 시행하였다.


수령을 뽑는 취재는 사서오경(四書五經) 중 1책과 《대명률(大明律)》 《경국대전》의 강(講)과 《치민방략(治民方略)》의 제술(製述)로써 하였다. 예조취재는 의학 ·한학(漢學) ·몽학(蒙學) ·여진학(女眞學) ·천문학 ·지리학 ·명과학(命課學) ·율학(律學) ·산학(算學) 등 대체로 기술관의 취재였는데, 응시자격은 제학생도(諸學生徒) ·권지(權知) ·전함(前銜) 등이며, 성적은 분수(分數)로 계산하여 1 ·2 ·3 등으로 나누어 1 ·2등만 임용하고 3등은 임용하지 않았다.


병조 취재에는 내금위(內禁衛) ·별시위(別侍衛) ·친군위(親軍衛) ·갑사(甲士), 도총부(都摠府)의 당하관(堂下官) ·부장(部將) ·무선전관(武宣傳官) ·파적위(破敵衛) ·장용위(壯勇衛) ·착호갑사(捉虎甲士) ·대졸(隊卒) ·팽배(彭排) ·취라치[吹螺赤] ·대평소(大平簫) ·마의(馬醫)의 취재가 있었다. 시험과목은 기사(騎射) ·기창(騎槍) ·격구(擊毬)와 시험의 종류에 따라 목전(木箭) ·철전(鐵箭) ·편전(片箭) 등으로 구별하여, 그 사격거리가 달랐으며, 시험시기는 부정기적이었다.


 

 

 

음서

http://211.46.254.1/2003student/sbg/menu3_6.htm


고려시기 관료 진출의 주요 통로는 과거와 음서였다. 과거제도는 시험을 통하여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므로 능력에 따른 등용이라 할 수 있으며, 음서제도는 부조(父祖)의 음덕으로 관직에의 진출이 가능한 것이므로 세습적인 원리에 기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종전에 고려 관료지배층의 성격을 둘러싸고 귀족제와 관료제라는 서로 다른 주장이 있었는데, 이것은 과거와 음서가 이처럼 상호 모순되는 성격을 갖고 있는 데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겠다.


과거제가 고려에서 처음 도입되어 시행된 것은 광종 9년(958)이었다.

후주(後周) 출신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실시되었는데 이 제도는 당시 훈신세력을 억제하고 신진세력을 등용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에서 시행되었다.

이후 과거제도는 제도적 정비과정을 거치면서 관인을 배출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로서 자리잡았다.

과거제도가 실시된 처음에는 고시 절차가 비교적 단순하여 국학생이나 지방출신의 향공(鄕貢)을 막론하고 예비고시없이 곧바로 본고시(本考試)에 응시하였다.

이후 예비고시라 할 수 있는 국자감시(國子監試)가 설치되어, 중앙의 국자감 학생이나 지방의 향공 등이 모두 거쳐야 하였다.

국자감시에 합격한 진사(進士)들은 본고시인 예부시(禮部試 : 東堂試)를 거쳐야 급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부시 급제자를 대상으로 국왕이 친히 시험하는 복시(覆試)가 있었는데, 이것은 간헐적으로 시행되었으며, 급락(及落)과는 관계없이 급제 순위를 결정할 뿐이었다.



이렇게 제도적으로 정비를 본 고려의 과거제도는 공민왕 18년(1369)에 이르러 변혁을 보게 되었다.

원의 제도를 따라 향시(鄕試) 회시(會試) 전시(殿試) 제도를 채용하였다. 이리하여 과거지망생은 누구나 제1단계인 향시를 각자의 본관지 해당 도에 가서 응시해야 했으며, 이어 향시 합격자들은 중앙의 예부에서 주관하는 회시에 응시하여야 했다. 회시 합격자는 다시 전시를 치러야 했다. 전시가 강화됨으로써 과거시험에서 왕권의 영향력이 한층 커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거삼층제(科擧三層制)는 우왕 2년(1376)에 폐지되었다가 창왕 즉위년(1388)에 부활하였다.

시험과목을 보면, 제술과의 경우 예경(禮經) 육경의(六經義) 사서의(四書疑) 등의 경학과 시·부·송 등의 문예, 그리고 시무책·책문·대책 등의 시무 등을 시험보았다.


명경과는 주역(周易)·상서(尙書)·모시(毛詩)·예기(禮記)·춘추(春秋) 등 5경을 고시과목으로 했다.


잡과는 전문분야에 따라 율업(律業 : 明法業)·산업(算業 : 明算業)·서업(書業 : 明書業)·의업(醫業)·주금업(呪業)·복업(卜業)·지리업(地理業)·하론업(何論業)·삼례업(三禮業)·삼전업(三傳業)·정요업(政要業) 등의 11종류로 나누어 치렀다.


과거 시험에 응시하는 자격은 중요한 문제인데, 과거의 대표격인 제술업과 명경업에는 향리층 가운데서도 일정한 선 이상의 자손만이 응시가 가능하였고, 일반 양인과 향 부곡인들이 응시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잡과(雜科)의 경우는 일반양인 이상에게 개방되어 있었다고 여겨지지만, 실제로 그들이 사회적 경제적 상황을 극복하고 잡과에 응시 급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보인다.


제술과의 급제자는 초사직(初仕職)으로 중앙의 권무 내지는 8·9품에 해당하는 일반직을 제수받기도 했지만 주로 권무 내지 9품에 해당하는 문한 학관직과, 그리고 각급 지방행정 단위의 7·8품직을 보임받았다.

중기이후는 급제후 상당한 기간 동안 대기했다가 초사직을 받는 예가 많아져 갔다.

명경과 급제자는 제술과에 비해 동정직을 제수받는 비율이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잡과의 급제자들은 대개 하급관료나 이속직에 취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본고시인 예부시의 책임자는 지공거(知貢擧)와 동지공거(同知貢擧)였다.

이들은 제술과의 경우 문제를 출제하고 시험을 감독하며 채점과 과차(科次)를 정하는 일까지 담당했다.

과거를 통해 좌주와 문생의 관계가 형성되었는데, 양자는 공고한 유대를 맺고서 학문의 전통을 이어갈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음서는 조상의 음덕에 의하여 그 자손이 관리가 될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음서제는 목종 대에 최초로 시행한 기록이 보이며, 성종대 이후 정비되었다.

음서는 규정에 따르면 문무5품 이상 관리의 자손에 대한 일반적인 음서, 공신자손에 대한 음서, 그리고 조종의 묘예(苗裔)에 대한 음서 등 세가지로 나누고 있다.

이 가운데 공신자손 조종의 묘예에 대한 음서는, 그 음서의 성격상 특수한 경우, 즉 국왕의 즉위나 복위, 왕태후와 태자의 책봉, 기타 다른 국가적 경사가 있을 때 부정기적으로 시행되었다고 이해된다.

문제는 문무 5품 이상 관리의 자손을 대상으로 하여 시행된 음서 즉 문음(門蔭)이다.

문음은 앞의 2종류 음서와는 달리 연중 어느 달이나 제수된 것으로 나타나 어느 때나 시행될 수 있는 항례적인 제도였다. 음서를 통해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연령은 18세 이상으로 한정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지만, 이 규정은거의 지켜지지 않아 최저 5세에 음직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부터 음서를 통해 관리가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과거에 여러 차례 응시한 뒤에 음직에 나아가는 경우도 상당수 있었다.


음직으로 처음 제수된 관직은 실직이 아닌 산직(散職)인 동정직(同正職)이었으며, 그 관품은 정8품과 정9품의 품관 동정직과 이속동정직이었다.

부음(父蔭)을 받는 경우에는 주로 품관직을 받았지만, 부음 이외의 음서를 받을 때에는 대체로 이속직을 받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관리들은 5품 이상의 직위를 가짐으로써 자손에게 음서의 혜택을 줄 수 있었지만, 2품 이상의 고위 관리가 된 이후에 탁음자(托蔭者)가 되는 현상이 두드러지며, 사망한 뒤에 탁음자가 된 관리도 상당수 보인다.


결국 음서는 자격을 갖추었다고 하여 모두가 강제적이고 의무적으로 택해야 하는 입사로가 아니라 탁음자 또는수음자가 필요할 때 비교적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입사로였다고 추정된다.

공신의 자손에게는 동일 탁음자에 의해 여러 차례에 걸쳐 음서를 받을 수 있었지만, 문음의 경우는 통상 한 사람에게만 음직을 수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재음(再蔭) 삼음(三蔭)의 사례도 나타나고 있어, 여러 명이 음서를 받는 것도 드물지 않았던 것 같다.

음서는 일정한 자격만 갖추면 누구나 혜택을 받을 수 있어 문벌귀족 계층에게 유리한 입사로가 된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음서를 통해 조기에 관리로 진출할 수 있었으며, 그들은 한품의 제한없이 누구나 고위관리로 승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음서 출신의 인물 가운데 41.9%나 되는 인물들이 과거에 다시 급제한 것으로 나타나, 과거의급제가 당시에 선호하는 바였으며, 관리생활을 하는 데도 유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과거와 음서 두 제도는 원리상 충돌하는 것이었지만, 서로 보완하면서 고려의 관인(官人)을 배출하는 통로가 되었다.

그러나 역시 당시 관인에게 가장 중요하였고 선호되었던 것은 과거였다. 관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과거에 급제하여 관인이 되고자 희망하였다. 이러한 과거를 통해 새로운 관인이 끊임없이 공급되어, 고려 관료사회가 정체되지 않고 새로운 활기를 유지하였고, 그것이 왕조를 오래 지속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천거

http://blog.naver.com/secult/40012694166


천거라는 것은 유능한 인재가 있다면 추천을 받아 관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조선 중종때 조광조의 건의에 따라 현량과를 실시하였는데 천거제 입니다.


 


과거시험을 통해 관직을 가지는 방식이 아닌 유능한 인재가 있다면 추천을 받아 관직을 받는 것을 천거라고 합니다.


 

 

 

상피제

http://cafe.naver.com/garnet.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043

http://blog.naver.com/iamazure/80011079608


관료제의 원활한 운영과 권력의 집중, 전횡을 막기 위해 친족간에 같은 행정조직 혹은 연고가 있는 관청에 근무할 수 없게 한 제도. 지방 통치를 그 지방 출신자에게 맡기지 않았던 중국 송나라의 회피(回避)제도에 연원을 두고 있다.


고려시대에도 시행했었으나, 엄격하고 광범위한 시행은 조선후기로 알려져 있다. 과거 검찰, 경찰, 국세청 등 권력기관에서 출신지나 연고지 임명을 피하기 위해 도입을 시도한 적이 있었고, 고위직의 출신 지역 편중 현상을 억제하기 위한 인사원칙의 지침으로 적용되기도 했었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최근 청와대가 국가개조의 핵심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공직사회 개혁의 일환으로 중하위직 공무원을 대상으로 도입을 추진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경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11&dir_id=110101&eid=1oHVa3rhorCn0hcr%2FuZcbiKlXCPOTsFR

서경(署經)은 고려시대의 언론기관인 대성과 조선시대의 언론기관인 삼사에서 갖고있던 권한으로 관리를 임명하거나 면직시킬 때, 법률과 제도를 새로 만들거나 폐지할 때 행사할 수 있었던 동의권을 말합니다. 이는 언론기관으로서 국왕을 견제하는 제도의 하나입니다. '서경'이라는 말 자체는 오늘날의 '서명'과 비슷한 의미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3-4. 사림의 대두와 붕당정치


1) 훈구와 사림

 

 

 

훈구와 사림

http://blog.naver.com/jljh00/120016625550


 

 

 

2) 사림의 정치적 성장

 

 

 

무오사화

http://boinp.netian.com/10_01.html

http://linux.korea.ms.kr/%7Enote/class/read.cgi?board=history1&nnew=2&y_number=21


사건은 1498년 무오년,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1498년 실록청이 개설되고 이극돈이 실록 작 업의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 점검 과정에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과 이극돈 자신을비판하는 상소문을 발견했다. '조의제문'은 진나라 항우가 초의 의제를 폐한 일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 글에서 김종직은 의제를 조의하는 제문 형식을 빌려 의제를 폐위한 항우의 처사를 비판하고 있었다. 이는 곧 세조의 단종 폐위를 빗댄 것으로 은유적으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나머지 상소문은 세조비 정희왕후 상 중에 전라감사로 있던 이극돈이 근신하지 않고 장흥의 기생과 어울렸다는 불미스러운 사실을 적은 것이었다. 당시 이 상소 사건으로 이극돈은 김종직을 원수 대하듯 했는데, 그것이 사초에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하자 그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달려간 곳이 유자광의 집이었다. 유자광 역시 함 양관청에 붙어있던 자신의 글을 불태운 일 때문에 김종직과 극한 대립을 보였던 인물이었다. 게다가 김종직은 남 이를 무고로 죽인 모리배라고 말하면서 유자광을 멸시하곤 했다. 유자광은 '조의제문'을 읽어보고는 곧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 윤필상 등의 훈신 세력과 모의한 뒤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내용은 뻔했다. '조의제문'이 세조를 비방한 글이므로 김종직은 대역 부도한 행위를 했으 며 이를 사초에 실은 김일손 역시 마찬가지라는 논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연산군은 사림 세력을 싫어하던 차였다. 그래서 즉시 김일손을 문초하게 하였다. '조의제문'을 사 초에 실은 것이 김종직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의도하던 바 대로 진술을 받아내 자 연산군은 김일손을 위시한 모든 김종직 문하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미 죽은 김종직에게는 무덤을 파서 관을 꺼낸 다음 시신을 다시 한 번 죽이는 부관참시형이 가해졌으며,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세조를 능멸하였다는 이유로 능지처참 등의 형벌을 내렸고, 같은 죄에 걸린 강겸은 곤장 10 0대에 가산을 몰수하고 변경의 관노로 삼았다. 그 밖에 표연말, 홍한, 정여창, 강경서, 이수공, 정희량, 정승조 등은 불고지죄로 곤장 100대에 3천리 밖으로 귀 양보냈으며, 이종준, 최보, 이원, 이주, 김굉필, 박한주, 임희재, 강백진, 이계명, 강혼 등은 모두 김종직의 문도 로서 붕당을 이루어 국정을 비방하고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목으로 곤장을 때려 귀양을 보내 관청의 봉수대를 짓게 하였다. 한편 어세겸, 이극돈, 유순, 윤효손, 김전 등은 수사관(실록 자료인 사초를 관장하는 관리)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되었으며, 홍귀달, 조익정, 허침, 안침 등도 같은 죄로 좌천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부분의 신진 사림이 죽거나 유배당하고 이극돈까지 파면되었지만, 유자광만은 연산군의 신임을 받 아 조정의 대세를 장악했다. 이에 따라 정국은 노사신 등의 훈척 계열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초가 원인이 되어 무오년에 사람들이 대대적인 화를 입은 사건이라 해서 이를 무오사화라고 하는데, 이 사건을 다른 것과 구별하여 굳이 사화(士禍)가 아닌 사화(史禍)라고 쓰는 것은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이다.


 

 

 

갑자사화

http://boinp.netian.com/10_01.html

http://linux.korea.ms.kr/%7Enote/class/read.cgi?board=history1&nnew=2&y_number=20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이 심해지자 점차 국가 재정이 거덜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신들은 그의 행동을 비판하지 못했다. 오히려 연산군의 폭정을 기화로 권신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연 산군이 국고가 빈 것을 알고 이를 메우기 위해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을 요구하고, 노비까지 몰수하려 하자 대신들의 태도는 급변했다. 왕이 향락과 사치에 마음을 빼앗겨 급기야 자신들의 경제 기반까지 몰수하는 것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막상 왕의 요구가 자신들의 이해 관계와 맞물리자 왕의 처사가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그동안 못마땅하게 여겨오던 왕의 지나친 향락을 자제해 줄 것을 간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하들 모두가 연산군에게 반발했던 것 은 아니었다. 무오사화 이후 조정은 다시 외척 중심의 궁중파와, 의정부 및 육조 중심의 부중파로 갈라져 있었다. 따라서 공신전을 소유하고 있던 부중파 관료들은 연산군의 공신전 몰수 의지에 반발하고 있었지만, 궁중파는 일 단 왕의 의도에 부합하자는 논리를 펴고 있었다. 이번 대립을 이용하여 정권을 잡으려는 인물이 바로 임사홍이었다. 그는 일찍이 두 아들을 예종과 성종의 부마 로 만든 척신 세력 중의 하나였다. 임사홍은 성종 시대에 사림파 신관들에 의해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간 적이 있 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사림을 싫어한 그는 연산군과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해 훈구 세력과 잔여 사림 세력을 일시에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임사홍은 우선 연산군의 비 신씨의 오빠 신수근과 손을 잡고 음모를 꾸미던 끝에 성종의 두번째 부인이자 연산 군의 친모였던 윤씨의 폐비 사건을 들추어 낸다. 폐비 윤씨 사건은 성종이 차후에는 거론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 긴 적이 있어 그 때까지 아무도 그 사건을 입에 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임사홍은 이 사건의 내막을 연산군이 알게 될 경우 윤씨의 폐출을 주도했던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에게 동시에 화를 입힐 수 있다는 계산을 한다. 임 사홍의 밀고로 윤씨의 폐출 경위를 알게 된 연산군은 엄청난 살인극을 자행한다. 연산군은 우선 윤씨 폐출에 간여한 성종의 두 후궁 엄귀인과 정귀인을 궁중 뜰에서 직접 참하고 정씨의 소출인 안양군, 봉안군을 귀양보내 사사시켰다. 그리고 윤씨 폐출을 주도한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부상을 입혀 절명케 했으며,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고자 왕비로 추숭하고 성종묘에 배사하려 하였다. 이 때 연산군의 행동을 감히 막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응교 권달수와 이행 두 사람만이 성종 묘에 배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론을 펴다가 권달수는 죽임을 당하고 이행은 귀양길에 올랐다. 하지만 연산군의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막상 신하들이 자신의 행동을 저지하지 못하리라는 판단을 한 그는 윤 씨 폐위에 가담하거나 방관한 사람을 모두 찾아내어 추죄하기 시작했다. 이 결과 윤씨 폐위와 사사에 찬성했던 윤필상, 이극균, 성준, 이세좌, 권주, 김굉필, 이주 등 10여 명이 사형 당하였고, 이미 죽은 한치형, 한명회, 정창손, 어세겸, 심회, 이파, 정여창, 남효온 등은 부관참시에 처해졌다. 이밖에도 홍귀달, 주계군, 심원, 이유녕, 변형량, 이수공, 곽종번, 박한주, 강백진, 최부, 성중엄, 이원, 신징, 심순문, 강형, 김천령, 정인인, 조지서, 정성근, 성경온, 박은, 조의, 강겸, 홍식, 홍상, 김처선 등이 참혹한 화를 입었으며, 이들의 가족 자녀에 이르기까지 연좌시켜 죄를 적용하였다. 이처럼 1504년 3월부터 10월까지 7개월에 걸쳐 벌어진 이 갑자사화는 희생자의 규모 뿐 아니라 그 형벌의 잔 임함이 무오사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오사화는 신진 사림과 훈구 세력 간의 정치 두쟁이었지만, 갑자사화 는 왕을 중심으로 한 궁중 세력과 훈구, 사림으로 이루어진 부중 세력의 힘의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중종반정

http://www.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336-1-jungjongbanjung.htm

1506년(연산군 12)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등이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晉城大君:中宗)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이다.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낸 성희안과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박원종은 재위 12년간 화옥(禍獄)과 황욕(荒慾) 등 폭정으로 국가의 기틀을 흔들어놓은 연산군을 폐하기로 밀약하고 당시에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柳順汀), 연산군의 총애를 받고 있던 군자부정(軍資副正) 신윤무(申允武) 등의 호응을 얻어 왕이 장단(長湍) 석벽(石壁)에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하기로 계획을 꾸몄다. 1506년 9월 1일, 박원종 ·성희안 ·신윤무를 비롯해서 전 수원부사(前水原府使) 장정(張珽),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박영문(朴永文),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홍경주(洪景舟) 등이 무사를 규합하여 훈련원에 모았다. 그들은 먼저 권신(權臣) 임사홍(任士洪) ·신수근(愼守勤)과 그 아우 신수영(愼守英) 및 임사영(任士英)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궁궐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이튿날인 9월 2일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경복궁에 들어가서 대비(大妃:成宗의 繼妃)의 윤허를 받아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맞아 왕으로 옹립하니 그가 조선왕조 제11대 왕인 중종이다.


 

 

 

을사사화

http://linux.korea.ms.kr/%7Enote/class/read.cgi?board=history1&nnew=2&y_number=22


 

 

 

기묘사화

http://linux.korea.ms.kr/%7Enote/class/read.cgi?board=history1&y_number=23&nnew=2


 

 

 

3) 붕당의 출현


 

 

 

조광조

http://my.netian.com/~gi2young/main1/jo3/

1482(성종 13) ∼ 1519(중종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한성출생.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으로,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오사화로 화를 입고 회천에 유배 중이던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학문은 <소학>,<근사록 近思錄> 등을 토대로 하여 이를 경전연구에 응용하였으며, 이때부터 성리학연구에 힘써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가 되었다. 이때는 사화 직후라 사람들은 그가 공부에 독실함을 보고 ‘광인(狂人)’이라거나 혹은 ‘화태(禍胎)’라 하였다. 친구들과도 자주 교류가 끊겼으나 그는 전혀 개의하지 않고 학업에만 전념하였다 한다. 한편, 평소에도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언행도 성현의 가르침을 따라 절제가 있었다.1510년(중종 5)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당시의 시대적인 추세는 정치적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전반적인 흐름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安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1515년(중종 10)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라는 관직에 초임되었다. 그해 가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 감찰, 예조좌랑을 역임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이와 함께 정언이 되어 언관으로서 그의 의도를 펴기 시작하였다. 이해 장경왕후(章敬王后, 중종의 제1계비)가 죽자 조정에서는 계비 책봉문제가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이 때 순창군수 김정(金淨), 담양부사 박상(朴祥) 등은 중종의 정비(正妃, 폐위된 愼氏)를 복위시킬 것과 신씨의 폐위를 주장하였던 박원종(朴元宗)을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는데, 이 때문에 대사간 이행(李荇)의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조광조는 대사간으로서 상소자를 벌함은 언로를 막는 결과가 되므로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는 일이라 주장하여 오히려 이행 등을 파직하게 하여 그에 대한 왕의 신임을 입증 받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원로파, 즉 반정공신과 신진사류의 대립으로 발전, 이후 기묘사화의 발생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 뒤 수찬을 역임한 뒤 곧이어 정랑이 되고, 1517년에는 교리로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을 겸임하였으며,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하여 <여씨향약 呂氏鄕約>을 8도에 실시하도록 하였다.


주자학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말이었으나 널리 보급되지는 못하였고, 조선 초기에 와서도 사장(詞章)의 학만이 높이 숭상되었기 때문에 과거에 있어서도 이것에만 치중하였고 도학(道學)은 일반적으로 경시되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도학정치에 대한 주창은 대단한 것이었고, 이러한 주창을 계기로 하여 당시의 학풍은 변화되어갔으며, 뒤에 이황(李黃), 이이(李珥) 같은 학자가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도학정치는 조선시대의 풍습과 사상을 유교식으로 바꾸어 놓는데 있어서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즉, 조선시대에 일반서민들까지도 주자의 <가례 家禮>를 지키게되어 상례(喪禮)를 다하고 젊은 과부의 재가도 허락되지 않게 되었다. 1518년 부제학이 되어서는 유학의 이상정치를 구현하기 위하여 사문(斯文)의 흉기를 자신의 임무로 자부하였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주(人主)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미신타파를 내세워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강력히 주청,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이를 혁파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어 그해 11월에는 대사헌에 승진되어 부빈객을 겸하게 되었다. 그는 한편으로 천거시취제(薦擧試取制)인 현량과(賢良科)를 처음 실시하게 하여 김식(金湜), 안처겸(安處謙), 박훈(朴薰) 등 28인이 뽑혔으며, 이어 김정(金淨), 박상(朴尙), 이자, 김구(金絿), 기준(奇遵), 한충(韓忠) 등 소장학자들을 뽑아 요직에 안배하였다. 그는 이와같이 현량과 실시를 통하여 신진사류들을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시키는 실마리로 삼았다. 이들 신진사류들과 함께 훈구세력의 타도와 구제(舊制)의 개혁 및 그에 따른 새로운 질서의 수립에 나섰다. 그리하여 이들은 1519년(중종 14)에 이르러 훈구세력인 반정공신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즉, 그들은 우선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너무 많음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그리고 성희안(成希顔) 같은 인물은 반정을 하지 않았는데도 뽑혔고, 유자광(柳子光)은 그의 척족들의 권귀(權貴)를 위하여 반정하였는데, 이러한 유의 반정정신은 소인들이나 꾀하는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즉, 이들은 권좌에 올라 모든 국정을 다스리는데 이(利)를 먼저 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개정하지 않으면 국가를 유지하기가 곤란함을 극력 주창하였다. 이의 실천 대안으로 반정공신 2, 3등 중 가장 심한 것은 이를 개정해야 하고, 4등 50여인은 모두 공이 없이 녹을 함부로 먹고 있으므로 삭제함이 좋을 것이라는 위훈삭제(僞勳削除)를 강력히 청하고 나섰다. 이러한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반정 초기에 대사헌 이계맹(李繼孟) 등은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많아 외람되므로 그 진위를 밝힐 것을 주장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신진사류들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반정공신들은 기성 귀족이 되어 있었고, 현실적으로 원로가 된 훈구세력을 소인배로 몰아 배척하려는 급격한 개혁주장은 중종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내는 2, 3등공신의 일부, 4등공신 전원, 즉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되는 76인의 훈작이 삭탈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마침내 훈구파 중 홍경주(洪景舟), 남곤(南袞), 심정(沈貞)은 경빈박씨(敬嬪朴氏) 등 후궁을 움직여 왕에게 신진사류를 무고하도록 하였다. 또한, 대궐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 벌레가 파먹게 한 다음에 궁녀로 하여금 이를 따서 왕에게 바쳐 의심을 조장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홍경주와 공조판서 김전, 예조판서 남곤, 우찬성 이장곤(李長坤), 호조판서 고형산(高荊山), 심정 등이 밀의하여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통하여 비밀리에 왕을 만나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직, 조정을 문란하게 하고 있다고 탄핵하였다. 이에 평소부터 신진사류를 비롯한 조광조의 도학정치와 과격한 언행에 염증을 느껴오던 왕은 훈구대신들의 탄핵을 받아들여 이를 시행하였다. 그 결과 조광조는 김정, 김식, 김구, 윤자임(尹自任), 박세희(朴世熹), 박훈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 처음 김정, 김식, 김구와 함께 그도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간곡한 비호로 능주에 유배되었다. 그 뒤 정적인 훈구파의 김전, 남곤, 이유청(李惟淸)이 각각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에 임명되자 이들에 의하여 그 해 12월 바로 사사되었다. 이 때가 기묘년이었으므로 이 사건을 '기묘사화'라고 한다.


결국 신진사류들이 기성세력인 훈구파를 축출, 새로운 정치질서를 이루려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들의 실패원인은 그들이 대부분 젊고 또 정치적 경륜도 짧은 데다가 개혁을 급진적이고 너무 과격하게 이루려 하다가 노련한 훈구세력의 반발을 샀기 때문이다. 이를 후대의 명석한 학자인 이이가 잘 말해주고 있다. 즉, 그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들의 실패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옛 사람들은 반드시 학문이 이루어진 실천하는 요점은 왕의 그릇된 정책을 시정하는데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 다스릴 재주를 타고 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를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도학을 실천하고자 왕에게 왕도의 철학을 이행하도록 간청하기는 하였지만 그를 비방하는 입이 너무 많아, 비방의 입이 한번 열리자 결국 몸이 죽고 나라를 어지럽게 하였으니 후세 사람들에게 그의 행적이 경계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 뒤 선조 초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 뒤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는 후학들에 의하여 사당이 세워지고, 서원도 설립되었다. 1570년 능주에 죽수서원(竹樹書院), 1576년 희천에 양현사(兩賢司)가 세워져 봉안되었으며, 1605년(선조 38)에는 그의 묘소 아래에 있는 심곡서원(深谷書院)에 봉안되는 등 전국에 많은 향사가 세워졌다. 또한, 이이는 김굉필, 정여창(政汝昌), 이언적(李彦迪) 등과 함께 그를 동방사현(東方四賢)이라 불렀다. 저서로는 <정암집>이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은 소(疏), 책(策), 계(啓) 등의 상소문과 몇 가지의 제문이고, 그밖에 몇 편의 시도 실려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동인과 서인

http://blog.naver.com/eyeos.do?Redirect=Log&logNo=16884011


서인과 동인의 분파를 보실려면 근본적으로 그 이전 시기에 대하여 파악하고 있으셔야 합니다.


사림세력은 성종조부터 국가권력에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후 4대 사화를 거치면서 사림세력들이 대거 몰락하고 훈구세력이 정권을 잡았죠.

이때 4대사화 중 사림과 훈구세력이 싸운 실질적 의미의 사화는 무오와 기묘 사화였고 갑자사화와 을사사화는 훈척신 내부에서의 주도권 다툼이었습니다.


암튼 이 과정에서 사림이 대거 몰락하긴 하였지만, 모두가 몰락한 것은 아니에요..

즉 사화에도 살아남은 사림도 있었고요..

몇몇은 계속 관직에도 오를 수가 있었어요..

이 과정에서 신의겸이 등장하는데요..

신의겸은 훈구세력이지만, 사림에 대해 상당히 관대했어요..

그래서 사림들이 신의겸을 통해서 중앙으로 많이 진출을 했지요..


아직 이때에는 사림의 본격적인 진출이 이루어지지 않아 별 문제는 없었는데요..

문제는 선조대에 들어와서 사림이 대거 진출하면서 문제가 야기되었어요..

간단하게 말해서 사림의 입장에서는 훈구세력들이 좋을리 없었거든요. 사화를 통해 많은 사림이 옥사한 것은 물론이요, 당시 경제적으로도 사림의 경제력을 침해해 들어가던 세력이 기존 지배층인 훈구이니 사림 입장에선 좋을리 없었죠..


이 문제에 신의겸도 자유로울 수 없었어요..

기존의 사림 세력들은 신의겸을 옹호하였지만, 새로 등장한 사림은 김효원을 중심으로 심의겸도 제거해야 한다는 논의가 전개되요..

이 과정에서 기존의 사림세력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요..새로 등장한 사림은 상당수가 되었지요..

결국 신의겸에 대한 처리 문제에서 이견을 보인 두 세력이 서인과 동인으로 나뉘게 되죠..


그런데 이 과정에서는 아직까지 학파적 기질은 없었어요...

그러던 것이 서경덕, 조식, 이언적학파 세력들이 대거 동인에 들어가면서 학파적 성격도 지니게 되었던 거죠..

이들 학파가 동인에 들어간 것도 간단하게 보면 신진 사림이었기 때문이죠..


암튼 정파상으로도 학파상으로 동인세력은 16세기 말 정국을 주도하기에 무리가 없었죠..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이는 스스로 서인으로 가겠다 하여 '서인자정'을 해요..

이이도 엄밀하게 따지면 동인쪽에 가까운데도 서인에 들어간 것은 붕당 간의 세력균형을 위한 것이었어요..


한쪽으로 너무 기울어지면 정치 역시 한족으로 너무 기울어질 것을 우려한 이이의 현실적인 선택이었던 셈이죠...



 

 

 

 

붕당정치

http://leekcp.new21.org/b%20kh/a%20kb/6c/b/5/b123.htm

붕당 정치란 성리학적 이해 관계를 같이하는 사람들이 학연과 지연을 매개로 붕당을 이루고, 언론 활동을 통해 국왕의 신임을 얻어 국정을 주관하는 정치 형태를 말한다. 그들은 성리학에 의거하여 왕도 정치를 추구하였기 때문에 학문의 발전을 가져왔고, 정치 활성화와 정치 참여의 폭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붕당 정치가 변질되어 정권이 일부 벌열에 독점되면서 개인이나 가문의 이익을 우선하는 경향이 심해져 정치적 갈등이 심해지면서 양반층은 자기 도태를 거듭하였다.


 

 

 

 

4) 붕당 정치의 전개

 

 

 

정여립 모반 사건

http://cont111.edunet4u.net/2002/yjsgun11/Mm/Module/jungyeorip.htm

정여립은 본래 서인 세력이었으나 수찬이 된 뒤 당시 집권 세력이던 동인 편에 들어가 이이를 배반하고 성혼, 박 순을 비판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선조가 그의 이당을 불쾌히 여기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버린다. 그가 서인을 공격하게 된 원인은 분명하지는 않다. 그가 이조 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했던 적이 있 긴 했으나 이것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의 직선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동인의 영수 이발 의 성향과 일치했던 것이 동인에 동조하게 된 이유였을 것이다. 어쨌든 그가 이이를 공격한 이유로 서인의 미움이 그에게 집중되었고, 그래서 그는 동인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중 앙에서 관직을 내놓고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는 낙향한 몸이었음에도 동인들 사이에서는 명망이 높았다. 그 래서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매달 모임을 갖는 등 세력을 확장시켜나갔다. 1587년 왜선들이 전라도 손죽도를 침범하였을 때는 대동계를 동원해 이를 물리치기도 했다. 대동계의 조직은 더 욱 확대되어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 박연령,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 기인, 모사 세력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동정이 주목을 받게 되고 마침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황해도 관찰사의 고변이 임금에게 전해지자 조정은 커다란 파란을 일으켰다. 고변의 내용은 정여립의 대동계 인물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해 황해 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봉기하여 입경하고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자살하고 말았다. 이로써 그의 역모는 사실로 굳어지고, 서인의 정철이 위관이 되어 사건을 조사하면서 동인의 정예 인사들이 제거되었다. 이 때 숙청된 인사는 장살로 죽은 이발을 비롯하여 약 1천 명에 육박했다. 이를 '기축옥사'라고 한다. 이 옥사로 한때 서인이 조정을 장악하긴 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1591년 정철이 건저의(세자 책봉에 관한 의 견) 문제로 실각하자 다시 동인이 득세하였기 때문이다 건저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선조에게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발생했다. 선조의 왕비 의인왕후는 병약하여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래서 후궁 소생의 왕자들 중에 왕세자를 책봉 해야 했는데, 이 일은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어 쉽사리 진전을 보지 못했다. 이 때 이 건저의 문제를 해결하게 위해서 당시 좌의정이던 정철은 우의정 유성룡, 부제학 이성중, 대사헌 이해수 등과 상의하고 선조에게 건저(왕세자를 세우는 일)할 것을 주청하려 하였다. 정철은 또 한편으로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와도 이 문제를 상의하고 최종 결정을 위해 자리를 함께 하기로 했으나 이산해는 두 번이나 약속을 어겼다. 사실 이산해는 이 문제를 이용해 정철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산해는 정철과 건저 문제를 의논하기로 하는 한편, 후궁 인빈 김씨의 오빠인 김공량과 결탁하여 계략을 꾸몄다 . 이산해는 선조가 인빈 김씨의 소생인 신성군을 총애하는 것을 알고 김씨에게 정철이 광해군을 왕세자로 올리고 그들 모자를 죽이려고 한다고 무고했다. 그러자 인빈 김씨는 선조에게 이 내용을 전했고, 선조는 매우 진노하였다 .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정철이 경연장에서 건저 문제를 주청하자 선조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대노하였다 . 유성룡, 이산해 등은 침묵을 지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철은 삭탈관직되고 같은 서인이었던 이성중, 이해수 등은 모두 강등되어 외직으로 쫓겨났다. 정철이 실각하자 동인은 서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감행했다. 말하자면 정여립 모반 사건에 대한 보복을 할 기회를 맞은 셈이었다. 서인의 주요 인사는 대부분 숙청되고 조정은 완전히 동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동인은 이 때부터 인조반정이 있기까지 30여 년을 집권하게 된다. 그러나 동인은 정철의 치죄 과정에서 남북으로 갈라서고 만다.


 

 

 

인조반정

http://www.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290-injobanjung.htm

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sidaesa/txt/4-2-1-1.html


1623년(인조 1) 서인(西人)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종(倧: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을 말한다.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당론(黨論)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해보려고 애썼으나, 자신이 대북파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당론을 초월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이원익(李元翼)·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 등 명망 높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어진 정치를 행하려 하였으나,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臨海君)과 이모제(異母弟)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였으며, 또 계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하는 패륜을 자행하였다.  특히 임해군은 선조의 맏아들로서 1608년 선조가 죽자 광해군에게 왕위를 선위(禪位)하는 교서를 내렸으나, 명나라에서 임해군를 즉위시키려 했으며, 소북파인 유영경(柳永慶) 등 일부 대신들도 선조의 교서를 숨기고 임해군를 왕으로 세울 것을 주장했으나, 정인홍 등에 의해 유영경의 교서를 숨긴 사실이 들어나, 임해군은  광해군에 의해 진도로 유배된 후 강화의 교동에 옮겨져서 이듬해 사사(賜死)되었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실정(失政)이 계속되어 기강이 문란해지자 서인 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김류(金)·이괄(李适) 등은 반정(反正)을 모의, 1623년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추진하였다.


  도중에 이이반(李而狀)의 누설로 탄로될 위기에 놓였으나 예정대로 거사를 단행하였다. 이서(李曙)는 장단(長湍)에서, 이중로(李重老)는 이천(伊川)에서 군사를 일으켜 홍제원(弘濟院)에서 김류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 군대를 능양군이 친히 거느리고 이괄을 대장으로 하여 12일 밤에 창의문(彰義門)으로 진군하여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내응으로 반정군은 무난히 궁궐을 점령하였다. 이어 왕대비(인목대비)의 윤허를 얻어 능양군(인조)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피신하였다가 잡혀 서인(庶人)이 되었으며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대북파 이이첨·정인홍·이위경(李偉卿) 등 수십 명은 참수되었으며, 추종자 200여 명은 유배되었다. 반정에 공을 세운 이귀·김류 등 33명은 3등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의 호를 받고 권좌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즉, 1620년부터 이서·신경진(申景)이 먼저 반정의 계획을 수립한 후 구굉(具宏)·구인후(具仁) 등을 끌어들이고, 이어 김유·이귀·최명길(崔鳴吉) 등의 문신과 연계하여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면서 1623년 3월 12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진행시켰다. 이 계획은 거사 직전에 이이반(李而)의 고변(告變)에 의해 누설되었지만 광해군이 후궁과 연회를 즐기느라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예정대로 추진되었다. 능양군은 직접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이서가 장단으로부터 통솔해온 700여 명의 군사와 연서역(延曙驛)에서 합류한 후, 김유를 대장으로 삼아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했던 이귀·최명길·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 등의 600~700여 명의 군사, 그리고 이천으로부터 온 이중로(李重老)의 군사 등과 함께 창의문으로 진군하여 성문을 격파했다. 이어 창덕궁에 이르자 반정군에 포섭되었던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내응으로 훈련도감의 군사가 반정군을 체포하지 않고 오히려 성문을 열어줌으로써 대궐을 쉽게 점령했다. 반정세력은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호를 회복시켜준 후 그 권위를 빌려 광해군과 동궁을 폐출하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을 왕위에 추대했다. 한편 광해군은 반정군이 대궐에 침입한 뒤 비로소 대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으로 숨었으나 곧 체포되어 서인으로 강등된 후 강화로 귀양보내졌다. 또한 폐모정청(廢母庭請) 등에 앞장섰던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은 물론 북인으로서 광해군 말기까지 정치에 관여했던 수십 명이 처형을 당하고, 200여 명이 유배당했다. 반면 반정에 참여한 인물들은 1623년(인조 1) 윤 10월 53명이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책봉되었다. 즉, 김류·이귀·김자점(金自點) 등의 10명은 1등공신, 이괄(李适)·김경징(金慶徵) 등 15명은 2등공신, 박유명(朴維明)·한교(韓嶠) 등 28명은 3등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이 논공행상(論功行賞)이 공평하지 못하다 해서 1년 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반정 후 남인의 이원익이 영의정에 영입됨으로써 남인도 제2의 당세를 형성하게 되었다


 

 

 

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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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고위 관인으로서 정치에 참여하는 길은 원래 문무 과거(科擧)를 통하는 것이고, 그 밖에 조상의 공덕에 대한 혜택인 음직(蔭職)을 받거나 개인의 수양·학덕을 인정받아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려져 있었지만, 거기에는 까다로운 제한이 있었다. 그러나 사림파가 정치를 주도한 이후 학자와 정치가의 구분이 사라지고 학문적 이념과 정치적 명분이 결합된 정도가 깊어짐에 따라, 정치 일선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을 연마하여 높은 수준에 도달한 인물들은 과거에 매달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높은 정치적 권위를 지닐 수 있었다.


16세기 말 선조대에 이미 성혼(成渾)·정인홍(鄭仁弘)이 과거를 통하지 않고도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그 중 정인홍은 광해군대에 이이첨(李爾瞻)이 정치를 주도하는 데 가장 유력한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의 제도로 성립된 것은 17세기 전반 인조대였다. 1623년 무력정변을 통해 권력을 잡음으로써 되도록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을 필요가 큰 인조와 서인 세력은 곧 성균관에 사업(司業:종4품)을 설치하여 김장생(金長生)·장현광(張顯光)·박지계(朴知誡)를 임명하였다.


산림 우대정책은 더욱 진전되어 1646년에는 세자 교육을 맡은 시강원에 찬선(贊善:정3품 당상관)·익선(翊善:종5품, 뒤에 進善으로 바꿈)·자의(諮議:종7품)를 설치하였고, 효종대에는 성균관에 제주(祭酒:정3품 당상관)를 두었다. 그리하여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윤선거(尹宣擧)·권시(權?) ·허목(許穆)·윤휴(尹?) ·박세채(朴世采)·윤증(尹拯)·이현일(李玄逸)·권상하(權尙夏) 등이 임명되어 파격적 대우를 받으며 국가 운영 및 국왕과 세자의 교육에 참가하였다.


이들은 인조·효종 연간에 숭명사상(崇明思想)과 북벌론(北伐論)를 적극 지지하며 정권을 합리화하였으며, 강한 학연을 바탕으로 각 당의 영수가 되어 예송과 같은 경우에는 직접 전면에 나서서 정쟁을 이끌었다고 평가된다. 그 시기 이들의 중요성은 "열 정승이 한 왕비만 못하고 열 왕비가 한 산림만 못하다"는 말 속에 담겨져 전해질 정도이다. 그러나 정치체제 전체를 고려할 때 산림은 국왕과 사족의 상호관계 속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지방에 기반을 둔 사족은 조선 중기에 서로 붕당을 통한 경쟁을 하면서도 국왕에 맞서 자기들의 주도권을 강화해 가는 정치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군주체제라는 강한 틀 속에서 많은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사림파의 체제 재편이 일단락된 인조대에 이르러 사족의 정치주도권이 크게 성장한 상태에서도 그들이 내세우는 친명 반청정책과 내수사폐지론 등은 국왕과 그 측근 세력의 반대로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인조의 아버지를 국왕으로 추숭하는 것은 사족의 거의 일치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뜻대로 귀결되었으며, 소현세자가 죽은 뒤 그 적자(嫡子)가 있는데도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는 반대의견을 개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한 한계 속에서 사족이 택한 하나의 방법은 국왕으로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높은 권위를 지닌 인물을 여러 가지 명분을 들어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국왕 및 그 주변 세력에 대하여 사족의 입장을 강력히 반영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산림이 본격적으로 등용된 시기가 사족 일반과 국왕간의 대립이 크게 나타난 시기였으며, 효종이 관인의 빗발친 요구에 못 이겨 산림을 불러들였지만 그들과의 흔쾌한 협력보다는 입장의 차이가 더욱 부각된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국왕의 권위에 맞서 사족을 대표한다는 기능은 현종대에도 계속되었으나, 중세적 군주체제가 계속되는 한 근본적인 제약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특히 17세기 말 숙종대에는 사족의 자체 대립이 심화됨에 따라 붕당 지도자로서 정쟁의 전면에 나섬으로써 본래의 의미가 점점 약화되었다. 그뒤 18세기 영조·정조대와 그 이후로도 명목은 계속되었으나, 탕평책을 실시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사족세력을 누른 국왕에 의해 위상이 크게 격하되어 정치적 영향력을 거의 상실하였다.


 

 

 

예송

http://blog.naver.com/creep6565/120014981239


 

 

 

경신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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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0년(숙종 6) 남인(南人)이 대거 실각하여 정권에서 물러난 사건이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하며, 이 사건으로 서인(西人)이 득세하였다.


  이 당시 현종대인 1659년(효종10) 즉위 뒤 효종의 상례(喪禮)로 인조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일어나자, 남인이 주장하는 3년설을 물리치고 서인의 기년설(朞年說:1년설)을 채택함으로써 서인이 집권하게 하였다.(기해예송; 己亥禮訟) 그러나 남인인 허적(許積)을 영의정에 유임시킴으로써 남인 재기의 바탕이 마련되던 중, 1674년(현종15) 어머니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일어나, 이번에는 남인의 기년제를 채택하여 대공설(大功說:9개월설)을 주장한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 정권이 수립되었다.(갑인예송;甲寅禮訟)


  그러나 갑인예송(甲寅禮訟;1674년)에서의 승리로 정권을 장악한 남인이었지만 현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숙종으로부터는 신임을 얻지 못했다. 이것은 남인끼리 청남(淸南) ·탁남(濁南)으로 갈라져 서로 싸우고, 한편으로는 권력을 장악한 남인 세력에 대한 염증 때문이었다. 숙종은 서인에 속하는 모후인 명성왕후(明聖王后)족질 김석주에게 군권(軍權)을 맡겨 남인을 견제하는 태도를 보였다. 군권을 누가 장악하느냐에 의해 앞으로의 권력의 향배가 결정되었기 때문에 군권을 장악하려는 정치세력간에 각축이 계속되었다. 따라서 김석주 등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 윤휴는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의 설치를 주장하여 도체찰사부가 설치되고, 남인 허적이 체찰사에 임명되었다. 도체찰사부는 영의정을 도체찰사로 하는 전시의 사령부로서 외방 팔도의 모든 군사력이 그 통제를 받게 되었다. 총융사와 수어사도 경기도의 군사력으로 간주되어 도체찰사의 통제 아래 들어갔다. 도체찰사가 된 허적은 훈련도감과 어영청마저 도체찰사부에 소속시켜 군권을 하나로 합치자고 건의하였다. 이에 김석주 등이 강력히 반발하여 도체찰사부는 일시 혁파되었으나, 1678년 영의정 허적의 건의로 복설되었다. 군권을 비롯한 권력이 남인, 그 가운데서도 탁남(濁南)에 편중되자 숙종은 이들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고 서인들을 유배에서 방면해주었다.


  그러던 중 경신년인 1680년 3월 당시 남인의 영수이며 영의정인 허적(許積)의 집에 그의 조부 허잠(許潛)을 위한 연시연(延諡宴:시호를 받은 데 대한 잔치)이 있었다. 이 때 이번 연회에 병판(兵判) 김석주(金錫胄),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를 독주로 죽일 것이요, 허적의 서자(庶子) 견(堅)은 무사를 매복시킨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김석주는 핑계를 대고 불참하고 김만기만 참석하였다. 그 날 비가 오자 숙종은 궁중에서 쓰는 용봉차일(龍鳳遮日:기름을 칠하여 물이 새지 않도록 만든 천막)을 보내려고 하였으나 벌써 허적이 가져간 뒤였다. 숙종은 노하여 허적의 집을 염탐하게 하였는데 남인은 다 모였으나 서인은 김만기 ·신여철(申汝哲) 등 몇 사람뿐이었다. 이에 노한 숙종은 철원(鐵原)에 귀양갔던 김수항(金壽恒)을 불러 영의정을 삼고, 조정(朝廷)의 요직을 모두 서인으로 바꾸는 한편, 이조판서 이원정(李元禎)의 관작(官爵)을 삭탈하여 문 밖으로 내쫓으라고 하였다.


  다음 달인 4월 정원로(鄭元老)의 고변(告變)으로 허적이 서자인 허견(許堅)의 역모가 적발되었다. 이른바 ‘삼복의 변[三福之變]’으로, 인조의 손자이며 숙종의 5촌인 복창군(福昌君) ·복선군(福善君) ·복평군(福平君) 3형제가 허견과 결탁하여 역모하였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허견이 복선군을 보고 “주상께서 몸이 약하고, 형제도 아들도 없는데 만일 불행한 일이 생기는 날에는 대감이 왕위를 이을 후계자가 될 것이오. 이때 만일 서인(西人)들이 임성군(臨城君)을 추대한다면 대감을 위해서 병력(兵力)으로 뒷받침하겠소” 하였으나 복선군은 아무 말도 없더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모두 잡혀와 고문 끝에 처형되었고 허견 ·복창군 ·복선군 등은 귀양갔다가 다시 잡혀와 죽고, 허견의 아버지 허적은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하여 죽음을 면하였으나, 뒤에 악자(惡子)를 엄호하였다 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써 남인은 완전히 몰락하고 서인들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5) 붕당정치의 성격


 

 

 

군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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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당과 소인당이라는 말은 붕당정치 초기에 자기의 당과 상대당을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동인이면 자기의 당을 군자당이라 하고, 서인들을 소인당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욕하기 위해서 만든 말들이었지요. 하지만 환국 정치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당과 상대의 당을 존중하며 모두 군자당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조전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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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9대 임금인 성종(成宗)이 송영이란 사람을 사헌부 고위 관리에 임명하려 했다. 사헌부는 지금의 감사원이나 검찰에 해당하는 권력기관이다. 그러자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송영을 임명해선 안 된다고 들고일어났다. 송영은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한 대역죄인의 후손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성종의 의지는 강력했지만 사간원과 사헌부 역시 굽히지 않았다. 몇 번 공방이 오가다가 마침내 왕의 분노가 폭발했다. “왕의 교지가 그대들의 탄핵만도 못하다는 말인가?”

▶흔히 조선시대엔 국왕이 모든 인사를 좌지우지했던 걸로 알지만 그렇지 않았다.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탄핵과 서경(署經) 등의 방법으로 왕의 인사를 견제했다. 서경이란 5품 이하의 관리를 임명할 때 왕의 인사안(案)에 대해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적격, 부적격 여부를 따져 사인하는 것이었다. 사인을 안 하고 50일이 넘어가면 그 인사는 자동으로 무효가 됐다.


▶위세등등한 사간원과 사헌부도 꼼짝 못하는 존재가 있었다. 이조전랑(吏曹銓郞)이란 자리였다. 이조전랑은 직급으로만 치면 이조(吏曹)의 5품, 6품의 하급 관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들은 사간원 사헌부 관리 임명 추천권을 갖고 있었다. 이조전랑은 엘리트 집합소라는 홍문관에서도 가장 똑똑하고 덕망 있는 사람으로 골랐다. 그래서 ‘관직의 꽃’이라고 불렸다.


▶이조전랑은 직속상관인 이조판서를 포함해 누구로부터도 활동에 간섭받지 않았다. 전임자로 하여금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게 했다. 큰 잘못이 없는 한 삼공육경(三公六卿)까지 출세가 보장돼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소신껏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국정은 왕과 정승 판서에게 맡기고, 이들의 권력 남용과 부정을 사간원과 사헌부로 하여금 감시하게 하며, 이조전랑으로 하여금 다시 사간원과 사헌부를 견제하게 하는 것. 이 같은 삼각 구도의 균형과 견제 속에 조선왕조를 500년 지탱하게 한 인사 시스템의 비밀이 있었다.


▶일부 장관 및 공기업 임원 인사에 대해 ‘낙하산 인사’라는 비판이 일자 청와대 인사관리비서관실이 “인사 시스템은 대통령 인사를 보좌하기 위한 것이지 이를 제한하거나 견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고 했다. 나라의 인사를 대통령 뜻에 맞는 사람을 뽑는 것 정도로 아는 인식 수준으로 볼 때 대한민국의 인사 시스템은 왕조시대만도 못한 것 같다. 세도정치를 통해 권력자들이 인사를 독점하고 권력 간 견제와 균형이 사라진 조선 말기의 상황을 그들은 아는지 모르겠다.


 

 

 

향교

http://dugok.x-y.net/kor-his/bd/gyo-haynggyo.htm

1.개설

  향교는 고려와 조선왕조의 집권적 정치 구조 위에서 전개된 것으로 군현제(郡縣制)와 함께 왕경(王京)이 아닌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된 관학교육 기관이다. 국도(國都)를 제외한 각 지방에 관학이 설치된 것은 고려이후에 이루어졌다. 고려는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3경(京) 12목(牧)을 비롯한 군현에 박사와 교수를 파견하여 생도를 교육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향학(鄕學)의 시초이다. 


  그러나 이들 향학을 곧 향교의 전신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인가는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향교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검토가 요청된다. 고려초 왕건(王建)이후 역대 고려왕들은 이 새 정치이념인 유교를 새 사회의 질서의 근간으로 하여 정치권력구조를 조직하려 하였다. 이러한 역사의 추세 가운데에서 왕경이나 왕실의 정치구조뿐만 아니라, 기층사회까지 유교 이념을 침투시키려는 정치 의지가 나타났을 때 그것을 구현하는 기구로 향교 제도의 필요성이 증대된 것이다.


  정치권력이 기층 사회에 침투하여는 구체적 역사현상은 군현제가 가장 전형적인 예이다. 따라서, 향교는 군현제의 운영과 함께 이해되는 것이 그 실상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려 성종때 12목에 외관의 파견과 함께 경학 박사ㆍ 의학 박사를 파견하였던 것은 지방교육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나 아직 완벽한 지방 교육 제도가 정착된 것은 아니다.


  향교의 적극적인 유학 교육의 면모를 우리 역사에서 나타내는 것은 조선에 이르러 군현제의 재정비와 강력한 운영이 실시되던 시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향교는 조선왕조의 설립과 함께 정책적으로 그 교육적 기능과 문화적 기능을 확대 , 강화하였다고 하겠다. 따라서 향교의 전반적 설명은 조선 왕조에서 전개된 역사상을 중심으로 설명되어진다.


  한편 , 향교 교육은 과거 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과거제도는 유학 교육의 성과를 수렴하는 제도라고 할 때 지방에서의 유학교육도 과거제도와 표리 관계를 이루면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2. 재정

  향교의 운영을 위해서는 국가의 재정적 지원이 요구된다. 향교의 교사(校舍)등 시설물의 설치ㆍ보수ㆍ유지, 교수관(敎授官)의 후생비, 교생들의 숙식비, 학업 활동에 부수되는 제반비용, 그리고 향교를 중심으로 준행되는 석전례ㆍ향음례 등에 이르는 비용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조선 왕조는 막새한 재정 투자가 요구되는 향교를 각 군현에 세우고 유학 교육의 실시를 위해서 이른바 학전(學田)과 학노비(學奴婢)를 공급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숭유억불적 정책을 살펴 볼 수 있다.


  향교의 재정은 국초로부터 향교에 급여된 위토(位土) 전답의 수세 외에도 지방관이 분급한 전곡 및 요역( 役) 그리고 향교에 비축된 전곡의 식리로 충당되었다.


  학위전 이외의 수입원으로는 모군(募軍)의 대납전(代納田)과 향교 소속의 외거노비의 속전(贖錢), 어장의 망세(網稅), 그리고 향교 경비의 보충을 위하여 별도로 마련한 섬학전(贍學田)ㆍ광학전(光學田)등 기금의 이식이 있었다. 그밖에도 중건ㆍ중수의 공역이 있을 때에는 관청에서 그 비용을 지급하였고, 필요하면 유전(儒田)을 갹출하거나 그 지방 유지의 보조를 받기도 하였다. 향교에서 지출되는 비용의 세목은 춘추 석전(釋奠)의 제수(祭需)와 교임(校任)의 공궤(供饋), 백일장과 과거응시에 참가하는 유생에 대한 조전(助錢), 교복(校僕) 등의 삭료(朔料)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향교의 운영 주체는 그 지방의 수령이다. 수령의 책임아래 운영되는 향교는 자연히 수령의 개별적인 행정능력에 대한 의존도가 컸다.


 


 3. 교관

  조선 전기부터 향교 교관의 확보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 이유는 문과에 합격한 자가 지방의 교관직에 부임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생원ㆍ진사들도 과거를 통하여 중앙의 행정관료로 진출하는 것을 희망하였고 교도직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태종ㆍ세종대를 거치면서 여러차례 교관직에 대한 유인책과 논공행상의 방책을 제시하였으나 교관직에 대한 기피 현상은 근본적으로 개선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중종 때에는 일경(一經)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교관직에 머무르는가 하면 명종은 어느 정도의 학식이 있는자가 있으면 사회적 신분에 관계하지 않고 학장으로 임명하는 고육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결국 향교 교육은 관료적 범주 안에서 정상화될 수 없었으며, 이와같은 상황을 인식하였던 조선 왕조는 교육 기능을 담당하는 교관을 포기함으로써 관료적인 교육 정책을 마무리 짓는 것으로 나타난다.

 


  4. 교생

  조선이 신분제 사회임을 전제한다면 향교에서 유학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생들의 사회적 신분은 명백해진다. 즉, 16세기에 오면 실록 자료에 "향교는 군역을 담당할 농민, 즉 양민들이 교생이 되고 있어 교생들에게 주어지는 면역(軍役)의 혜택을  받고자하니, 양민들 중 교생이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비판의 소리가 비등한 것으로 보아 , 조선왕조의 최고 신분인 양반 신분만이 향교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상식적인 논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왕조의 유교 교육은 양인(養人)과 교화라는 양면적 목표를 가지고 집행하였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왕조는 국초부터 국역의 대상이 된느 신분이라고 누구나 독서를 원하면 향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였던 것이다. 세종 때에 신백정(新白丁)에게 향교 입학을 허락한 것이나 조선 초기부터 자주 보이는 농민들에게 향교 교육을 허락한 점은 그러한 반증이다.


  16세기에 와서 실록 자료에 '교생은 양반이어야 한다.'는 논리의 주장이 보이는 것은 이 시기에 조선 왕조의 신분제적 편제가 강화되는 것을 배경으로 상위 신분의 양반이 유교 교육에 보다 전력하여야겠다는 명분적인 뜻이 강한 것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양반 신분층의 배타적인 교육 기회의 독점적 성격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교생들의 사회적인 신분은 국초부터 이른바 양인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 그 대상이었으며, 16세기 이후 강화 양반 신분 중심의 사회 체제속에서도 교생은 평민들이 상당수 점유하고 있었다. 이른바 동재(東齊)ㆍ서제(西齊)로 기숙사의 구별을 나타내기도 하고, 액내(額內)와 액외(額外)로 양반과 평민 교생들을 구분하였다.


  일단 교생이 되면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 양반이건 평민이건 법제적으로 문제시 되지 않는다. 군역의 면제라든지, 과거 시험을 응시하는 자격을 얻는다든가 하는 점에서 차별이 있을 수 없었다. 즉, 향교에서 학업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생원ㆍ진사 시험 회시에 직접 응시하는 특전을 부여받거나 일강(日講)ㆍ월과(月課)에 우등한 자는 호역(戶役)을 면제받는다든지 할 때, 다만 교생이라는 신분만이 요구되는 것이지 양반이냐 평민이냐는 문제되지 아니하였다.

 

  다만, 교생들의 신분 구성이 다양하였던 관계로 이다음 그들의 적업 선택에서 차이가 있었던 것 갖다. 생원ㆍ진사 시험에 응시하는 것에서부터 역학생도(譯學生徒)와 각사(各司)의 이서직(吏書職)에 이르는 다양한 직종으로 진출하는 길이 있었다.


  교생들의 교육 연한은 일정한 기간이 정해진 것 같지는 않다. 군액(軍額)의 대상이 부족할 경우는 연령의 상한선을 20세까지 제한하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40세까지는 향교에 머무르며 학생 신분을 허락 받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5. 교육과정

  향교의 교과 과정은 생원ㆍ진사의 시험 과목을 통하여 유추해 볼 수 있다. 《경국대전》에는 생원 초시의 시험 과목이 오경의(五經義)ㆍ사서의(四書疑)  2편(編)이며,진사 초시에는 부(賦) 1편, 고시(古詩)ㆍ명(銘)ㆍ잠(箴)중 1편을 짓게 되어 있다. 복시(復試)의 경우도 초시의 것을 되풀이 한다. 사장(詞章)인 제술(製述)과 경학 공부를 병행하도록 시험이 출제되었던 것으로 보아, 향교 교육도 이에 준하였을 것이다.


  교생들이 강습한 교재는 《소학》,사서오경을 비롯한 제사와 《근사록 近思錄》,《심경 心經》등으로 성균관이나 서원의 그것과 크게 차이는 없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소학》과 《가례》는 조선 초기부터 교생들에게 권장된 책으로서, 각종의 고강이나 과거의 시험 과목으로 부과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향교는 교육용 서책의 부족을 심하게 겪었고, 이는 향교 교육 자체를 곤란하게 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6. 건물의 구성과 배치

  향교의 배치는 배향공간과 강학 공간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크게 둘로 나누어지고, 이밖에 일부 변형된 방법들도 쓰이고 있다. 향교가 자리 잡은 대지가 평지인 경우는 전면에 배향 공간이 오고 후면에 강학 공간이 오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를 이루고, 대지가 구릉을 낀 경사진 터이면 높은 뒤쪽에 배향 공간을 두고 전면 낮은 터에 강학 공간을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이룬다.


  그러나 밀양향교(密陽鄕校)에서처럼 동쪽에 강학 공간을 , 서쪽에 배향 공간을 두는 예외적인 배치법도 있다.


  향교의 건물구성과 배치는 대성전, 동무ㆍ서무, 명륜당, 동재ㆍ서재로 이루어 진다.


⊙ 대성전 大成殿 - 문묘 안에 공자의 위패를 모셔놓은 전각으로 공자를 중심으로 오     성(五聖), 공문 10철(孔門 十哲)과 송조 육현(宋祖 六賢) 및 한국 십팔현(韓國 十八賢)     을 봉안하고 있다.


⊙ 동무 東武ㆍ서무 西武 - 대성전앞 , 동과 서양쪽에 공자의제자들과 현인들의 위패를    모시는 곳.


⊙ 명륜당 明倫堂 - 유학을 강학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강당이다.


⊙ 동재 東齋ㆍ서재 西齋 -학생들이 공부하고 숙식하는 곳.


⊙계성사 啓聖祠 - 5성(五聖: 孔子 ㆍ顔子ㆍ子思ㆍ曾子ㆍ孟子)의 부친들의 위패를 봉      안하여 제사 지내는 사당


  향교는 선현의 배향과 학생의 교육인 강학을 기능으로 하는 만큼 이 두 공간이 전체에서 핵심 공간이 된다. 그리고 이들 두 공간 중에서도 선현의 배향공간을 우위에 둠으로써, 대성전이 항상 명륜당보다 우위의 위치에 온 것은  사학(私學)의 서원에서와 같다.


  그러나 서원에서는 평지라 하더라고 대성전에 해당하는 사당을 대지의 가장 안쪽에 두어 신성시하는 것과는 달리, 향교에서는 그것을 강학 공간의 앞쪽에 두어 전체 공간에 있어 우위에 있게 하고, 구릉지에서는 반대로 강학 공간보다 높은터에 두어 고저 차이로 우위에 있게 하는 것이 특색이다.


  또, 배향 공간을 우위에 두는 방법은 재치에서뿐만 아니라, 구조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즉 대성전은 주심포 건축이 주류를 이루고 명륜당은 익공 건축이거나 민도릿집 계통인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또 배치에 있어 중심 공간인 배향과 강학의 두 공간은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의 균형을 이루러 공간에 어떤 위엄을 가지도록 한 것이 통일 신라시대 이후의 사찰 배치가 비좌우대칭 균형을 이룸으로써, 우리나라 전통 건축의 공통적인 배치 수법을 보여 주고 있다. 현재 남한에 남아 있는 향교는 1900년에 창설된 오천향교(鰲川鄕校)를 끝으로 231개의 향교가 있다.


 

 

서원

http://www.gnedu.net/php-bin/swebdata/%C3%CA%B5%EE%C7%D0%B1%B3/5%C7%D0%B3%E2/%BB%E7%C8%B8/2%C7%D0%B1%E2/es20001009172833/serwon.htm


 

 

 

3-5.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1) 명과의 관계

 

 

 

사대교린정책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11&dir_id=110101&eid=X8i9Min6qNOXADBrIybBY9V4ZSqlLjl6


사대는 중국, 교린은 왜국(倭國) 및 여진(女眞)에 대한 외교정책으로, 세력이 강하고 큰 나라를 받들어 섬기고(事大), 이웃 나라와 대등한 입장에서 사귀어(交隣) 국가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조선 개국 이래의 외교방침이다.


명나라에게는 사대정책을 펼쳐서 실리적인 조공외교를 하였고


여진, 일본과의 관계에서는

강경책, 회유책을 적절히 섞어서 사용하는 외교.


 

 

 

조선초기의 대외관계

http://bakmun.ms.kr/technote/read.cgi?board=ojuni_41&y_number=24&nnew=2


 

 

 

2) 여진과의 관계

 

 

 

 

해동제국기

http://kjw2.ms98.net/geo/d1/data/girigi.htm


1471년(성종 2)에 신숙주(申叔舟)가 편찬한 일본에 관한 저서. 필사본. 2책. 규장각도서. 일본의 지세(地勢)·국정(國情), 교빙왕래(交聘往來)의 연혁·사신관대례접(使臣館待禮接)의 절목(節目) 등에 걸치는 일본국기(日本國記)·유구국기(琉球國記)·조빙응접기(朝聘應接記) 등을 기록한 책으로, 책머리에는 해동제국총도(海東諸國總圖), 일본본국도(日本本國圖), 서해도구주도(西海道九州圖), 일기도도(壹岐島圖), 대마도도(對馬島圖), 유구국도(琉球國圖) 등 6장의 지도가 첨부되었다. 1473년 권말(卷末)에 전산전부관인양심조, 궤향일정서계(饋餉日呈書契) 등이 부재(附載)되었고, 이듬해 예조좌랑 남제(南悌)가 제포지도(齊浦之圖), 부산포지도(富山浦之圖), 염포지도(鹽浦之圖) 등 3매를, 1501년(연산군 7) 성희안(成希顔)이 유구의 사자에게서 들은 일본의 국정을 열기한 것을 각각 첨부하였다. 조선 전기의 한일(韓日) 관계사 연구의 귀중한 사료가 될 뿐 아니라, 일본의 역사·지리를 연구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도쿄대학본[東京大學本]과 일본의 내각문고본(內閣文庫本) 및 도쿄문구당본[東京文具堂本] 등 많은 이본(異本)이 전하며, 1933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료총간》 제2집으로 영인(影印) 간행하였다.


 

 

 

야연사준도

http://cafe.naver.com/dolnoja.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383


 

 

 

사민정책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536&no=1588

조선 세종 때 북방 개척과 함께 추진된 이민정책.


이민정책은 특히 병농(兵農)의 구별이 명확치 않은 시대에는 영토를 개척·유지하기 위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1398년 시작된 사민정책은 공주(孔州)에 경원부(慶源府)를 설치하면서 함길도에 사는 부유한 백성들을 들어와 살게 했다. 그러나 여진족의 침입으로 일시 중단되었다가, 1433년 경원부를 옮기고 영북진(寧北鎭)을 설치하면서부터 함길도 연변으로의 사민이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함길도 경성·길주·단천·북청 등에서 빈농 2200 호를 뽑아 경원에 1100호, 영북진에 1100호를 입거(入居)시키기로 결정했으며, 충청·강원·경상·전라도의 자원입거자의 경우 양인에게는 토관직(土官職)을 주고 향리·역리(驛吏)는 그 역을 영원히 면제하며 천인은 양인으로 삼기로 했다.


또, 함길도 노비 200호를 양쪽 진으로 100명씩 충당하기로 결정했다. 그 뒤에도 몇 차례 길주·경성의 주민을 동북 방면에 이주시키고, 그 빈 자리에는 하삼도(下三道) 및 강원도 주민을 이주시키는 작업이 있었다.


평안도 지방은 고려 때부터 이미 이민정책과 아울러 자발적인 이주가 이루어져 세종 때까지 이민의 필요성이 없었다. 그런데 명(明)나라 사신 왕래에 대한 부담과 여진족의 침입으로 이 지역 주민들이 다른 지방으로 유리하게 되자, 세종 19∼20년 평안도일대에서 천여 호를 뽑아 국경 연변에 이주시키고, 그 빈 자리에는 다시 황해도·하삼도의 주민을 뽑아 이주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관리들과 백성들의 반대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으며, 그 결과 평안도의 4군을 철폐하는 요인이 되었다.


 

 

3) 일본 및 동남아시아와의 관계


 

 

 

아메노모리 호슈

http://blog.naver.com/jangkong2/40016602516


본명은 ‘노부기요(誠淸)’, 자는 ‘하구요우(佰陽)’이고 ‘호슈’는 호이다. 쓰시마 번과 왜관을 왕래하며 조선과의 실무교섭을 담당했던 일본의 외교관으로 22세 때 대마도 번의 진문역(眞文役: 한문을 다루는 관리)이 되어 1755년 88세로 천수를 다할 때까지 오직 조선과의 외교통으로 일생을 대마도에서 보내고 결국 그 곳에 묻힌 친한파 유학자였다. 중국어와 조선어에 능통하여 1711년과 1719년 조선 통신사를 쓰시마 섬에서 에도까지 동행하였다. 그의 저작인 <교린수지>나 <교린제성>에는 그가 조선에 대한 인식을 구체적으로 형성하고 명확한 조선관을 가지고 있었음이 잘 드러난다. 특히 그는 조선과 교섭할 때의 기본자세에 대해 세세히 기술하면서 양국의 풍습과 문화 차이를 인정하고 무엇보다도 조선인에 대한 근본적인 지식을 가질 것을 주장하였다. 전통적으로 계승된 조선경시 풍조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던 쓰시마를 비롯한 막부, 제번 사람들이 결핍하고 있는 것을 지적한 셈이다.





  그는 상대국을 속이거나 다투지 않고 성신(誠信)으로 교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여, 손득(損得)의 이해가 아닌 성의 있는 교류를 주장하였다.  이 말은 권모술수를 본질로 하는 국제사회에서 국가 간의 불신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규범으로서 존중되어야 할 것은 ‘신뢰외교’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현재에도 생명력을 가지고 장래 한·일 우호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전제라고 생각된다. 그의 묘는 ‘성신지교린비’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죠오슈우인(長壽院)’의 뒷산 정상에 있다.



쓰시마섬 

http://www.ajutour.com/dae_fish/daemado13.htm

http://kayajang.com/%B0%A1%BE%DF%C0%E5/%C3%B5%BF%AC%B1%E2%B3%E4%B9%B0/cgi-bin/%B5%A5%C0%CC%C5%B8/%BE%B2%BD%C3%B8%B6%BC%B6.htm


 

 

 

3-6. 양 난의 극복과 대청 관계


1) 왜군의 침략

 

 

 

3포 왜란

http://cyberschool.co.kr/html/text/khis/khis424.htm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11&dir_id=110101&eid=Omizv5LcyfkfF4q3Oob386Njba1Z0GCR

한 문장으로 1510년(중종 5) 삼포(염포,부산포,제포)에서 일어난 일본거류민(늘살고있는 일본인)들의 폭동사건입니다.


1510년(중종 5) 삼포에서 일어난 일본거류민들의 폭동사건. 경오년에 일어났으므로 <경오왜변>이라고도 한다. 조선은 건국 뒤 국방문제를 감안,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1407년(태종, 7) 부산포(釜山浦;東萊)와 내이포(乃而浦;또는 薺浦, 熊川), 26년(세종 8) 염포(鹽浦;蔚山) 등 삼포를 개항하고 왜관(倭館)을 설치하여 교역과 접대의 장소로 삼았다. 조선은 삼포에 한하여 일본 무역선의 내왕을 허락하였고 무역과 어로가 끝나면 60명 외에는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왜인들은 이를 지키지 않아 정치적·사회적 문제가 제기되었다. 1510년 4월, 제포의 항거왜추(恒居倭酋)인 오바리시[大趙馬道]와 야스고[奴古守長] 등이 대마도주의 아들 소[宗盛弘]를 대장으로 삼아 4000∼5000명의 난도(亂徒)들을 이끌고 부산과 제포를 공격하는 왜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황형(黃衡)과 유담년(柳聃年)을 각각 경상좌·우도방어사로 삼아 삼포로 보내어 진압하였다. 이 난으로 조선측은 군민 272명이 피살되고 민가 796호가 불탔으며, 일본측은 배 5척이 격침되고 295명이 참획되었다. 이를 계기로 삼포는 폐쇄되어 통교가 끊겼으며, 이 상태는 12년에 임신약조를 체결하여 국교를 다시 열 때까지 계속되었다.



위는 엠파스 사전에서 대략적인 개요를 퍼온것인데요


일본인이 주장하는 구실로는


1)부산진첨사가 왜관 안의 공해(公해 :관청건물)를 개조하는데 항거왜(늘거주하는일본인)를 너무 혹사한다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소금을 달이고 기와를 굽는 데 필요한 나무 가져오기를 항거왜에 지나치게 부과하고 독려한다는 것이었다.


2)제포의 웅천현감은 일본인의 흥리(무역으로 해석하세요^^)를 금지하면서 양곡을 제때 지급하지 않고 제포첨사는 바다에서 어로작업(漁撈作業)을 하는 아무 죄없는 항거왜를 살해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삼포왜란은 보름 만에 진압되고.또한 부산포(釜山浦) 등의 삼포를 폐지하게됩니다.


 

 

 

을묘왜변

http://www.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276-ulmyooibyun.htm

조선 명종 때 왜구가 전라남도 영암·강진·진도 일대에 침입한 사건을 가리킨다. 조선정부는 삼포왜란(三浦倭亂:1510)·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1544) 등 왜구들의 행패가 있을 때마다 이에 대한 제재조치로 그들의 세견선(歲遣船)을 엄격히 제한하여 조선으로부터 물자의 보급을 받아야 하였던 왜인들은 이의 완화조치를 요구하여 왔으나 조선정부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조선정부의 통제에 대해 불만을 품은 왜구는 1555년(명종 10) 배 70여 척으로 전라남도 연안지방을 습격, 먼저 영암(靈岩)의 달량성(達梁城)·어란포(於蘭浦), 진도(珍島)의 금갑(金甲)·남도(南桃) 등의 보루(堡壘)를 불태우고 만행을 자행하였고 장흥(長興)·강진(康津)에도 침입하였다. 이를 막던 전라병사 원적(元積)과 장흥부사(長興府使) 한온(韓蘊) 등은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은 사로잡혔다. 즉, 가리포(加里浦) 수군첨사(水軍僉使) 이세린(李世麟)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전라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원적(元積)은 장흥부사 한온(韓蘊),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달량포로 출전했으나 오히려 왜구에게 포위되어 원적과 한온은 항복했다가 피살되고 이덕견만 탈출했다. 이로써 전라도 병마절도사 휘하의 정예군사가 붕괴하자 침입한 왜구의 횡행을 막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왜구는 5월 하순까지 별 저항을 받지 않고 어란포(於蘭浦)·장흥(長興)·강진(康津)·진도(珍島) 등을 짓밟으며 다시 영암으로 침입했다.


  이에 조선정부는 호조판서 이준경(李浚慶)을 도순찰사, 김경석(金慶錫)·남치훈(南致勳)을 방어사로 삼아 왜구를 토벌, 영암에서 이를 크게 무찔렀다. 즉, 정부는 금군(禁軍) 등 서울의 정예군사를 동원함과 아울러 산직(散職) 무신과 한량(閑良)·공사노(公私奴)·승도(僧徒) 등을 강제 징발하는 한편, 호조판서 이준경(李浚慶)을 전라도 도순찰사(都巡察使), 김경석(金慶錫)·남치훈(南致勳)을 좌·우도 방어사(防禦使)로 임명하여 이들을 토벌하도록 하고, 삼포 왜인의 준동을 방지하고 침입한 왜구의 진공을 막도록 경상도와 충청도에도 각각 장수를 파견했다. 후원군이 도착하자 전주부윤 이윤경(李潤慶)이 군사를 이끌고 영암으로 가서 남치훈 등과 힘을 합하여 5월 25일에 적을 크게 격파함으로써 비로소 왜구를 몰아낼 수 있었다. 왜구는 퇴각하는 길에 녹도(鹿島)를 습격한 데 이어 6월 27일에 제주도를 습격했으나, 상륙한 왜구를 목사 김수문(金秀文)이 군사를 이끌고 격멸했다. 당시 왜구는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견고한 전함을 만들어 사용하고 총통(銃筒) 제작 기술 및 사용법을 익혀서 전력이 강화되어 있었다. 이에 비해 조선에서는 지방 수군과 정병(正兵)에 대한 방군수포(放軍收布)가 공공연히 행해져 실제 근무하는 병력이 얼마 되지 않는 데다가 그나마 가난한 농민들뿐이었으며 제대로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다. 특히 국방체제인 진관체제(鎭管體制)가 기능을 잃어 군사 지휘체계가 문란했고, 봉수(烽燧)마저 제 구실을 하지 못하여 적침에 대비할 수 없었다. 그결과 같은 해 4월에 이미 왜구 침입 기미를 탐지했으면서도 큰 군사적 실패를 겪었던 것이다.


  한편, 왜구가 물러간 후 쓰시마[對馬] 도주(島主) 소오[宗義調]는 을묘왜변에 가담한 왜구들의 목을 베어 보내 사죄하고 세견선의 부활을 거듭 요청하였으므로 정부에서는 이를 승낙, 세견선 5척을 허락하였고, 임진왜란 발생 전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 전란은 비변사가 상설기관으로서의 위치를 굳히는 데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임진왜란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536&no=1518

http://lotus.silla.ac.kr/%7Elcy/imjin.htm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C0%D3%C1%F8%BF%D6%B6%F5&c=2&sort=0&qt=df&fr_res=0&to_res=0


 

 

 

2) 수군과 의병의 승리


 

 

 

관군과 의병의 활동

http://cafe.naver.com/dolnoja.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385


 

 

3) 전란의 극복과 영향

 

 

 

속오법

http://blog.naver.com/alsltptkd/120017463806

조선 후기 지방군제도의 하나. 임진왜란중인 1594년(선조 27)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속오법 에 따라 양인·공사천인(公私賤人)으로 조직된 혼성군이다. 특히 진관(鎭管) 중심으로 각 이촌 (里村)의 사정에 따라 편성되어 정유재란 때는 실전에 임하였다. 96년 말에는 거의 전국적으로 조직이 완성되었 는데, 형편에 따 라 대(隊)·기(旗)·초(哨)·사(司)·영(營) 등으로 상향조직되었다. 대개 1대가 11명으로 3대가 1기, 3 기가 1초, 5초 가 1사, 5사가 1영(약 2500여명)으로 편제되어, 고을에서 일정기간 병역과 훈련을 쌓으며 유사시에 대비하였다.

각영은 요새지인 진이나 산성 등에 설치하였고, 초관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속오군의 수는 1636년 (인 조 14) 평안도를 제외한 8만 6000여 명에서 81년(숙종 7)에는 20여 만명으로 급증하였다. 그러나 속오군은 외 적 의 격퇴라는 급박한 상황하에 조직되었기 때문에 전란 뒤 지방군에 대한 관심이 희박해지면서 점차 침체되어 갔 다. 속오군을 강화하려는 시도는 여러 번 있었지만, 왕성 중심의 5군영제(五軍營制)가 확립되자 수령 중심의 속 오군은 그 구실이 미약하게 되었다. 결국 영조 이후 속오군은 본역과 속오역을 지는 일신양역의 부담만 안고, 군 의 기능을 상실한 채 유명무실해졌다. 


 

 

 

정유재란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536&no=1524

1597년 화의 결렬로 일본의 도요토미는 재침의 명령을 내렸다. 먼저 가토·고니시·소 등을 장수로 한 1만 4500명의 군사를 선봉으로 정월 15일 조선을 침략하였다. 가토는 울산·죽도의 구루(舊壘)를 수축하고 부산의 수병(戍兵)을 합하여 잠시 기장에 주둔했다가 이어 양산을 거쳐 울산 서생포에 들어가 둔진하였다.


고니시는 앞서 지난해 말에 두모포(豆毛浦)로 상륙하여 2월에 부산의 원영(原營)을 수복하고 영주할 계획을 서둘렀다. 이때 조선에서는 한산도를 통제영(統制營)으로 삼아 남해안을 지켜오던 이순신이 무고로 하옥되고, 그를 대신하여 전라좌수사 겸 통제사의 후임에 원균이 임명되었다.

3월 중순부터는 일본의 대군이 속속 바다를 건너왔다. 대부분 구로다·모리(毛利秀元)·시마즈·나베시마(鍋島直茂)·하시수가(蜂須賀家政)·우키다·고바야가와·아사노(淺野長慶) 등 임진왜란 당시에 침입해왔던 제장들로서 총병력 14만 1500명이었다.


이밖에 수군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도토·와키사카·가토(加藤嘉明) 등이 지휘하였다. 일본군은 먼저 동래·기장·울산 등 각지를 점거하고, 웅천·김해·진주·사천·곤양 등지를 왕래하였다.


명나라에서는 병부상서 형개(邢坎)를 총독, 첨지도어사 양호(楊鎬)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 총병관 마귀(麻貴)를 제독으로 삼아 재차 원병을 보냈다.


명군은 압록강을 건너 양호는 평양에 머무르고, 마귀가 먼저 서울에 들어와 6월에 제장을 나누어 부총병 양원은 남원, 유격 모국기(茅國器)는 성주, 유격 진우충(陳愚衷)은 전주, 부총병 오유충(吳惟忠)은 충주를 각각 기지로 삼게했다.


조선은 체찰사 이원익,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 이덕형·김수 등으로 흥복군(興復軍)을 두어 8도에 모병하였다. 또 명군의 계획에 따라 장관(將官)을 분파하여 경상좌병사 성윤문(成允文), 방어사 권응수를 경주에 주둔시켜 조령로(鳥嶺路)를 막고, 우병사 김응서는 의령에 주둔하게 하여 부산로(釜山路)를 막으며, 그밖에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방어사 오응정(吳應井), 조방장 김경로, 별장 신호(申浩), 남원부사 임현(任鉉) 등은 모두 양원을 따라 남원을 수비하게 하였다.


이 해 4월 일본 수군은 조선 근해로 들어왔다. 조선 수군이 이를 중도에서 공격하려 했으나 태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거제로 물러났고, 일본 수군은 겨우 부산으로 입항하였다.


그 뒤 통제사 원균은 미숙한 전술과 무지한 싸움으로 일본 수륙군의 전략에 말려 패사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崔湖), 조방장 배흥립(裵興立) 등도 전사하니 이순신이 쌓아놓은 한산도의 수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되었다.


도요토미는 거제 해전의 소식을 듣고, 울산 죽도성에서 부장(部將) 회의를 열어 육군은 호남·호서 지역을 석권할 것과 수군은 전라 해안을 침범할 계획을 세우게 하였다.


이에 7월 28일부터 행동을 개시하여 우키다를 대장으로 한 1대(隊) 5만 병력이 사천으로부터 하동을 거쳐 구례로 들어오고, 그 일부는 함양을 거쳐 운봉으로 들어와 남원을 수륙으로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모리를 대장으로 한 1대 역시 5만의 군사로 초계·안의를 거쳐 전주로 향하고, 그 일부는 모국기의 본거인 성주로 우회하여 역시 안의·전주 방면으로 향하였다.


당시 조명 연합군이 전력을 기울인 곳은 남원이었다. 남원으로 향한 일본군은 8월 14일부터 포위 공격을 개시하였다. 격전 끝에 마침내 16일에 남원이 함락되어, 병사 이복남 등 많은 전사자를 내고 명나라의 부총병 양원은 50기(騎)로서 겨우 몸만 빠져나갔다.


그리고 2,000 병력으로 전주를 지키던 명나라의 유격 진우충도 따라서 성을 버리고 패주하여 일본군은 전주를 무혈 점령하였다.


한편, 전주로 향하던 모리의 군은 8월 안음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던 안음현감 곽준(郭說) 등의 치열한 반격을 받았다. 그러나 산성은 하루 만에 함락되고 모리 휘하의 가토군은 전주로 들어가 우키다 휘하의 고니시군과 합류하였다.


이에 서울에서는 도성민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조신 가운데는 왕의 피란을 주장하는 건의까지 나오게되었다. 그리하여 남쪽에서 퇴각한 명군이 한강에서 서울을 지켰으며, 경리 양호는 평양에서 급히 서울로 와서 일본군의 북침 저지를 지휘하게 되었다.


전주에서 합류한 일본군 가운데 모리·가토군은 전주·공주를 거쳐 전의·진천에 이르고, 다시 그 일부인 구로다군은 직산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양호는 부총병 해생(解生)·우백영(牛白英) 등을 남쪽으로 나가게 했는데, 마침 9월 5일 여명에 직산 북방 소사평(素沙坪)에서 구로다군과 충돌하여 크게 싸워 일본군의 북상을 완전히 차단시켰다.


또 원균이 패사한 뒤 다시 통제사로 기용된 이순신이 소사평의 대첩이 있은 지 10일이 지난 9월 16일 명량(鳴梁)에서 대첩을 하여 일본군의 서진(西進)도 봉쇄하였다.


진로를 봉쇄당한 일본군은 겨울이 닥쳐온다는 이유로 10월부터 남해안으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0수만의 일본군은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남해안 800리에 성을 쌓고 나누어 주둔하였다.


울산에는 가토와 나베시마군이, 양산에는 우키다와 모리군이, 사천에는 시마즈군이, 남해에는 다치바나(立花宗茂) 등의 군이, 순천에는 고니시군이 각각 주둔하였다.


이 때 명군은 남원 함락 이후 적극 전세를 펴서 수륙 원병이 다수 내도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 또한 지난해 명량대첩 이후 본영 우수영이 황폐하여 각지로 왕복하던 중 1598년 2월 고금도로 진을 옮겨 전투를 하면서, 장기 작전으로 병영을 세우고 난민을 이주시켜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수개월만에 민가가 수만 호에 이르게 되어 한산도 당시를 능가하였다.


이 해 7월 명나라 수사제독(水師提督) 진린(陳璘)의 수군 5,000이 고금도에 합세하였다. 그러자 명군은 한때 그 위세를 믿고 방자하여 사단(事端)을 자주 일으켰다. 그러나 이순신이 강온으로 잘 대처하여 명군의 군기를 감독하는 권한을 얻고, 조명 수군의 총지휘권도 실질상으로 양보받기에 이르렀다.


이 때 양호가 파직되고 그의 자리에 천진순무(天津巡撫) 만세덕(萬世德)이 임명되었다. 이를 계기로 명군은 일대공세를 취하기로 하고 4로(路)로 나누어 일제히 남진하기 시작하였다.


마귀는 2만 4000의 군사를 이끌고 동로(東路)를 따라 가토의 군을 공격하기로 하여 평안·강원·경상좌도의 방어사가 이에 분속되었다. 동일원(董一元)은 1만 3500의 군사로 중로(中路)를 따라 시마즈의 군을 공격하기로 하여 경기·황해·경상우도의 방어사가 이에 분속되었다.


유정(劉珽)은 1만 3600의 군사로 서로(西路)를 택하여 고니시의 군을 공격하기로 하여 충청·전라도의 방어사가 이에 분속되었다. 진린은 수군 1만 3300으로 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해상을 담당하게 했으나 별다른 큰 전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이에 앞서 8월 18일에 도요토미가 병사하였다. 일본군은 상(喪)을 감추고 회군하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철수를 시작하여 형세는 일변하였다.


명나라 제독 유정은 9월 중순 순천의 고니시군이 철수하여 귀환한다는 보고를 받고 9월 20일부터 육상에서 이를 공략하고, 이순신과 진린은 수상에서 봉쇄하여, 퇴로를 얻으려고 사력을 다하는 일본군과 수일간 격전을 치루었다.


그러나 그 뒤 곤경에 처한 고니시로부터 뇌물을 받은 유정은 10월 16일에 군사를 철수시켜 최후의 기회인 수륙 협공 작전이 수포로 돌아갔다. 진린 또한 고니시에게 뇌물을 받고 퇴로를 열어 주려했으나 이순신의 설복으로 뜻을 거두었다.


고니시의 구원 요청을 받은 시마즈가 병선 500여 척을 거느리고 11월 18일 야조(夜潮)를 타고 남해 노량으로 습격해 왔다. 삼경(三更)에 이순신은 분향을 하며 하늘에 맹세하고, 명군과 함께 호응하여 사경(四更)에 노량에서 적의 선대를 맞아 적함대의 절반을 분파하였다.


적은 견디지 못하여 남해 관음포(觀音浦)로 빠졌으나, 퇴로가 막혀 다시 나오는 것을 이순신이 직접 적진에 뛰어들어 독전하였다. 이 와중에 이순신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했고, 그의 유명을 받은 조카 완(莞)이 대신 지휘하여 적함 200여 척을 분파하고 무수한 적을 무찔렀다.


이에 시마즈 등은 50여 척을 건져 탈주했고 고니시는 격전중에 묘도(猫島)로 몰래 빠져나갔으며, 유정은 순천으로, 진린은 남해로 돌아갔다.


그러나 도요토미가 죽고 일본의 국내 사정이 불안하여 적군이 급히 철수하는 줄은 얼마 뒤에야 알게 되었다. 이리하여 7년간에 걸친 조일전쟁은 끝났다. 이때 좌의정 이덕형과 황신(黃愼) 등은 소를 올려 명군과 함께 대마도를 칠 것을 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599년에 명군도 철수하였다. 1월에 유정·진린·마귀·동일원 등이 진영을 철수하여 서울로 돌아오고, 4월에는 총독 형개가 이들을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http://japan.dotoru.net/onime/nippon/%B5%B5%BF%E4%C5%E4%B9%CC%20%C8%F7%B5%A5%BF%E4%BD%C3.htm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B5%B5%BF%E4%C5%E4%B9%CC%20%C8%F7%B5%A5%BF%E4%BD%C3&sort=0&c=1&qt=df


 

 

 

공명첩

http://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51-gongmyungchub.htm

http://web.cnei.or.kr/jries/web/go/soc/his/word14.htm


실직은 주지 않고 명목상으로만 벼슬을 주던 임명장이다. 여기에는 관직·관작의 임명장인 공명고신첩(告身帖), 양역(良役)의 면제를 인정하는 공명면역첩(免役帖), 천인에게 천역을 면제하고 양인이 되는 것을 인정하는 공명면천첩(免賤帖), 향리에게 역을 면제해주는 공명면향첩(免鄕帖) 등이 있다. 나라의 재정이 곤란할 때, 관청에서 돈이나 곡식 등을 받고 부유층에게 관직을 팔 때 관직명 ·성명을 기입하여 발급하던, 일종의 매관직첩(賣官職帖)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 임명된 사람은 실무(實務)는 보지 않고 명색만을 행세하게 하였다.


  이 제도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국가재정이 탕진된 데다 당쟁의 폐해로 국가기강이 문란하였고, 또 흉년이 자주 들어서 많은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자 나라에서는 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명예직(名譽職)을 주고 그 대가로 많은 재정을 확보하게 한 것이었다. 즉, 이 제도는 임진왜란중에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공(戰功)을 세우거나 납속(納粟)한 자에게 발급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전후 복구와 흉년의 기민(飢民)을 구제하기 위해서 계속 실시했다. 특히 현종대에는 곡식을 거두기 위해 대대적으로 공명첩을 발급하였다. 이때부터는 공명첩의 가격이 더욱 싸졌을 뿐 아니라 평민층·천민층에게 주어지던 벼슬의 제한도 대폭 완화되었다. 특히 숙종년간에도 여러 차례 발행하였는데, 1690년(숙종 16)의 경우 각종 공명첩 2만 장을 8도 전역에 나눠주어 팔게 할 정도였다.


  당시 진휼청(賑恤廳)에서 가설첩(加設帖)을 만들어 매매하였는데, 이 매매로 얻은 돈은 영남지방의 기민(飢民)들의 구제에 쓰였다. 이 밖에 영조 때 공명첩을 여러 번 발행하여 백성을 구제하였고, 순조 때에도 김재찬(金在讚)의 적극적인 주장으로 공명첩을 발행하였다.


  또한 절을 크게 짓기 위하여 그 비용을 부담한 사람에게 나라에서 하급무직(下級武職)의 공명첩을 주었다. 1793년(정조 17) 유점사(楡岾寺)에 100장을 주어 영산전(靈山殿)을 지었고, 1851년(철종 2) 법주사(法住寺)에 400장, 1879년(고종 16)에는 귀주사(歸州寺)에 500장을 주었다.


  공명첩의 발급은 재정이 궁핍했던 조선정부가 신분이 엄격한 양반사회에서 양반이 되기를 갈망하는 농민들의 심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공명첩에는 받는 사람이 누구이며 어떤 공으로 받은 것인지 기록해놓지도 않았으며, 특히 관직과 산계(散階)를 주는 공명고신첩(空名告身帖)의 경우 실제의 관직을 주는 것이 아니라 허직일 뿐이었다. 이 공명첩은 조선 후기 신분제의 동요에 크게 기여하였다. 공명첩을 사는 농민들은 정부로부터 공명첩에 명시된 직위를 합법적으로 취득한 것이 되며, 이를 점차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그들은 신분·호구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존재한 호적대장 등에 납속가선(納粟嘉善)이니 납속통정(納粟通政)이니 하는 명칭을 붙여야 됨에도 불구하고, '납속'의 문구는 붙이지도 않고 가선이니 통정이니 하는 직함만 표시하여 사실상 납속이란 단서를 없애버렸다. 이에 정부는 그러한 위법행위를 하는 자를 무거운 죄로 다스릴 것을 규정하였지만, 지방 말단관리들의 운영 문란으로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다.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납속수직자라 하더라도 실직자(實職者)나 마찬가지로 양반행세를 하게 되었다.



 

 

이몽학의 난

http://100.naver.com/100.php?id=126047

1596년(선조 29) 7월 종실(宗室)의 후예로서 속모관(粟募官) 한현(韓絢)의 선봉장인 이몽학은, 그가 조직한 동갑계 회원 700명을 사주(使嗾)하여 임진왜란 후의 대기근으로 굶주린 농민을 선동해서 홍산에서 반란을 일으켜 현감을 가두고 이어 임천(林川)을 함락하였다.


농민은 '왜적의 재침을 막고 나라를 바로잡겠다'는 반란 명분에 크게 호응하여 삽시에 수천의 무리를 이루어 정산(定山)·청양(靑陽)·대흥(大興)을 휩쓸고 서울로 향하던 도중에 홍주(洪州:洪城)를 공격하였다.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은 민병을 동원해서 이를 반격하는 한편, 이몽학의 목에 현상금을 걸어 반란군의 분열을 꾀하였다.


이몽학의 부하 김경창(金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