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중세의 정치


2-1. 중세의 세계


 

5대 10국

http://mtcha.com.ne.kr/world-term/china/term3-5dai%2010gug.htm


중국에서 당(唐)나라가 멸망한 907년부터, 960년에 나라를 세운 송(宋)이 전중국을 통일하게 되는 979년까지의 약 70년에 걸쳐 흥망한 여러 나라와 그 시대를 말한다.


  그 중 5대는 화북(華北)의 중심지대를 지배하고 정통왕조(正統王朝)의 계열로 볼 수 있는 양(梁:後梁) ·당(唐:後唐) ·진(晉:後晉) ·한(漢:後漢) ·주(周:後周)의 5왕조인데, 사가(史家)들이 그 이전에 존재하였던 같은 이름의 왕조와 구별하기 위해 앞에 후(後)자를 붙였다.


  10국은 화남(華南)과 기타 주변 각 지방에서 흥망한 지방 정권으로, 오(吳) ·남당(南唐:江西 ·安徽 ·福建) ·오월(吳越:浙江) ·민(:福建, 뒤에 南唐에 병합) ·형남(荊南, 또는 南平) ·초(楚:湖南) ·남한(南漢:廣東 ·廣西) ·전촉(前蜀) ·후촉(後蜀:四川) ·북한(北漢:山西)을 말한다. 이 밖에도 단기간 독립을 유지하고 있던 연(燕:河北) ·기(岐:鳳州) ·주행봉(周行逢:建州) 정권 등이 있었다.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 지방의 절도사(節度使:地方軍司令官)들은 군사 ·민사 ·재정 등 3권을 장악하여 군벌화(軍閥化)하고, 특히 875년의 왕선지(王仙芝) ·황소(黃巢)의 난에 활약한 유적(流賊)이나 이민족 용병(傭兵) 출신자들은 자립해서 절도사를 칭하여 이들이 병탄(倂呑)을 되풀이한 결과 대체로 11개 세력으로 갈라져, 후량(後梁)이 당의 제위(帝位)를 탈취한 것을 계기로 해서 각각 왕호(王號) 또는 제위를 칭하게 되었다.


  이들 나라의 지배체제는 절도사의 막부(幕府)를 확충한 형태의 것으로서, 그 지배자들은 다투어 직할군단인 아군(牙軍)을 확대하고, 그 밖에도 세습화(世襲化)한 직업군인들의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일찍이 양성해온 친위군(親衛軍) 조직을 두었으며, 행정의 모든 부문에도 심복의 무장(武將)들을 앉혀 무인정치(武人政治)의 양상을 나타내었다. 이들 정권은 중원(中原)의 5대를 비롯해 모든 왕조들이 군인의 쿠테타로 성립된 것이었고, 하층계급 출신자가 권력의 정상에 뛰어오른 하극상(下剋上)의 양상을 띤 것이었다. 당나라 말기의 극한상태에 다다른 사회적 혼란으로 생산체제는 일시 붕괴되었으나, 각국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다투었기 때문에 점차 회복되어갔다.


  5대에, 최초로 등장한 후량(後梁)은 옛 당나라 귀족 세력의 숙청에 힘을 기울여, 이 때문에 중원에서 탈출한 귀족들이 촉(蜀) ·남당(南唐) 등에 당문화를 들여오게 되었다. 그 뒤 처음에는 진왕(晉王)이라 칭하였던 이씨(李氏)가 923년 후당(後唐)이라 개칭하고 후량을 멸망시켜 화북을 거의 통일하였으며, 제도상으로도 새로운 통일 기운이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후당은 당나라 때의 3성 6부(三省六部)를 중심으로 한 행정체계를 대신해서 민정을 관장하는 재상(宰相:同平章事)과 군정을 관장하는 추밀사(樞密使), 재정을 관장하는 삼사사(三司使)가 중앙정부의 중심이 되고, 여기에 금군(禁軍:近衛兵) 장관인 시위친군도지휘사(侍衛親軍都指揮使)를 더해서 정권의 4대핵이 되게 하였다.


  한편 화남(華南)에서는 오(吳)를 무너뜨리고 뒤를 이은 남당(南唐)을 중심으로 통일을 이루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형남(荊南) ·오월(吳越) 등이 화남 ·화북의 완충지대적 존재로서 중개무역으로 나라를 보존하여 나갔다.


  남한(南漢)은 남해무역(南海貿易)에 의존하였으나 다른 나라들은 특산물을 개발(吳越의 窯業, 四川의 製紙 등)하여 지역분업(地域分業)을 배경으로 해서 진(鎭) ·시(市) ·초시(草市) 등 소도시의 융성을 보게 되어 이는 뒤에 올 송(宋)의 재통일 아래서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할 바탕이 되었다. 이 당시 농촌의 양세(兩稅)에 대해서 도시의 옥세(屋稅) ·지세(地稅)를 늘인 것도 이와 같은 경제발전에 대응한 것이었다.


  그 사이 북방에서 발해(渤海)를 멸망시키고(923) 급격하게 강대해진 거란(契丹)은 후당에 반역한 후진(後晉)의 건국을 도와준 대가로 연운(燕雲) 16주(州)를 할양받고, 후진까지 멸망시켜 하북(河北)을 점령해서 폭정(暴政)을 하였다. 거란에 대한 민족적 단결의 필요성과 함께 군사력 ·재정규모 ·영토 등 모든 면에서 분할되어 소규모화한 절도사는 중앙 의존적인 존재가 되고, 중앙정부에서 파견하는 관리 및 군대가 점차 지방에 침투하게 되어 중앙집권적인 문신관료제도(文臣官僚制度)가 완성되어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럴 즈음 후주(後周)의 명군(明君)이라 일컬었던 세종(世宗)에 의해 통일의 기초가 거의 굳혀졌고, 마지막으로 후주의 근위군(近衛軍) 총사령관이었던 조광윤(趙匡胤)이 일어나 송(宋)을 세우고 안일(安逸) 속에 빠져 있던 남당(南唐)을 비롯한 여러 나라를 병합해서 통일을 완성하였다. 문화적으로 이 시대에는 촉(蜀)의 인쇄술, 문학에서의 사(詞), 회화(繪畵)에서의 수묵화(水墨畵) 등 송문화의 기초가 이루어졌다.


 

 

여진족

http://cafe.naver.com/leeju9009.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6003

말갈족, 여진족, 만주족은 시대에 따른 종족의 이름이나 모두 같은 종족입니다. 저는 강의 시간


도중에 교수님으로 부터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정말 놀라운 이야기였습니다. 먼저 이야기는 신


라 시대로 거슬로 올라갑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은 고려의 태조 왕건에게 항복을


합니다. 그때 마의 태자라고 금강산에 가서 죽었다는 경순왕의 아들이 있다는 것은 아시죠?


그런데 역사라는 것이 항상 승자의 위치에서 쓰여지다 보니 최근에 와서는 이것도 왜곡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고 합니다. 핵심은 이 경순왕의 아들이 한반도를 떠나서 만주로 떠났다는


것인데요. 이때 많은 추종자들이 따라갔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역사적으로 우리가 오랑캐라


부르는 여진족(말갈족,여진족)은 이때부터 출현했다고 하니 말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진족이 세운 나라인 금나라가 있었습니다. 이나라는 비록


칭기스칸의 군대에게 멸망하였으나 송을 남쪽으로 내쫓고 중국을 거의 잡고 있던 나라입니다.


이 금나라의 역사서인 금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이 쓴 역사책의 성격보다는 나라에


서 정책적으로 펴낸 가장 중요한 역사책입니다. 이 책의 첫장의 첫줄을 보면 우리의 조상은 신라


로부터 왔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과 여진족과의 관계를 말해주는 내용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마지막 왕조 였던 청나라는 역시 여진족의 후손인 만주족이 세운


나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중원을 통일하여 중국식 이름인 청으로 바꾸기전에는 나라이름이 후


금이였을 정도입니다. 청나라의 시조는 잘 알려진대로 누르하치 입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누르하치의 정식이름은 "애신각라 누르하치" 라고 합니다. 성이 애신각라 이죠. 애신각라라는 뜻


은 신라를 사랑하고 기억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즉 자신의 뿌리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들었을 때 정말 놀랐습니다. 이것은 왜 중국이 고구려사를 왜곡하는지와 잘 연결됩니다.


만주땅은 중국의 영토에 들어간지 불과 50여년 밖에 안되었습니다. 물론 현재의 중국이라


불리는 나라의 정체성도 의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중국은 불과 50여년에 걸쳐서 이루어


진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중국은 개방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엄청난 경제 성장과 세계의 중


심으로 가기 위한 발판을 지금 만들어 놓으려 하죠. 그런데 문제는 중국의 큰 위협의 하나는 생


각보다 정체성이 많이 없다는 거죠. 만주땅 역시 그렇고. 티벳 문제와 위그르 그리고 내몽골등


그들은 전혀 자신들을 완전한 중국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은 만주에서


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역사왜곡을 시도하는 거죠. 이쯤에서 보면 한걸음나아가 우리 민족의


통일 후에 만주에서의 점유를 주장한다면 중국은 굉장히 난처합니다. 이것도 역시 이유가 된다


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의 말씀은 만주족과 조선족은 본토 한족보다 우리와 같은 비슷한 민족이


라는 것입니다.


 

 

일본의 봉건제도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201&no=75


일본에서의 봉건제도 개념은 일의적(一義的)이 아니다. 중국사에서의 군현(봉건)이란 경우의 봉건이라는 개념과 비슷한 해석도 있고, 유럽 중세의 주종제도(主從制度)를 가지고 봉건제도라고 하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가장 널리 이루어지고 있는 해석은 주종제도적 결합에 의해서 권력을 구성하는 지배계급이 자립적인 소생산자인 농민으로부터 고율의 소작료(해마다 바치는 공물)와 부역 등을 거두어들이는 관계를 기축으로 해서 성립된 사회를 봉건사회라고 하며, 그 사회를 규정하는 제도를 봉건제도로 간주하는 것이다.


<봉건제도 성립 논쟁>은 주로 소농민경영의 성립이라는 생산방식에 기본적 관점이 두어진 형태로 전개되었으나, 그 뒤 권력론·국가론적 관점이 도입됨으로써 일본의 봉건사회의 구조적 특질로서는 대략 다음과 같은 점들이 주목되었다.


첫째로는 중앙집권성이 강한 일본의 봉건사회에서는 재지영주층(在地領主層)의 자립할 거적인 영역지배가 장기적 과정을 거쳤다는 것, 둘째로는 재지영주층에 의한 농민지배가 유럽과는 달리 일률적인 <농민> 신분지배로서 이루어졌다는 것, 셋째로는 가마쿠라[鎌倉]시대를 통하여 고부[公武], 즉 구게[公家:조정]와 바쿠후[幕府;막부]권력의 결합에 의한 집권적(集權的)인 국가체제가 계속되었다는 것, 넷째로는 중세 후기에 재지영주층의 영역지배가 진행되었으나 다시 오다[織田]·도요토미[豊臣]정권과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때에 집권적 정치체제·국가체제가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일본에서는 대체로 유럽의 그것과 비슷한 주종제도가 형성되었으나 국가체제·신분제 등의 측면에서는 개별의 영주제적 지배가 국가적으로 규제되어, 집권적 경향이 짙은 봉건제도가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장원

http://blog.naver.com/hiddenpearl/120015063794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201&no=939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201&no=940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201&no=941


중세의 장원은 ... 사실상 로마제국 말기 원로원 의원들이나 유력 토지귀족들에


의한 대토지 농장 경영으로부터 출발하였습니다. 널리 잘 알려져있다 시피


로마제국은 말기에 이르게 되면 .. 자영농민들이 몰락을 하게 되고


그 자리를 원로원 의원들이나 토지를 많이 가진 토지귀족들이 차지하게 됩니다.


이들은 로마제국 말기 ..중앙정부의 지방통제력이 점차 약화되어 감에


따라서 자신이 가진 토지를 바탕으로 하여 지방에 여러 농노들을 거느리고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중세의 장원과 봉건영주의


기원이 되었던 것이지요.


장원은 본질적으로 독자적 방어와 자급자족적인 농촌경제의 달성을


목표로 합니다. 로마제국 말기의 혼란한 상황하에서 중앙정부의


지원이나 다른 지방과의 교역을 전혀 생각할 수 없던 시기에 있어서


독자적인 방어체계의 수립과 자급자족적인 경제체제의 수립은 필연적인


항목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장원은 영주의 성인 장관(莊館)을 중심으로 하였고


여기에는 영주 자신 또는 관리인들이 살고 있었으며 ...장관에는


하인들을 위한 오두막집과


여러가지의 작업장들이 함께 부속되어 있었습니다


(중세 이야기책 같은 것들을 보면 제분소나 제빵소를 이용하고 ...영주에게


돈을 납부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지요? 바로 그런 작업장들을 생각하여 보시면


됩니다. 정말 악질적인 영주같은 경우는 대장간에 화덕을 설치하고 심지어


화덕세도 받았다고 하는군요.)


농민들이 거주하는 가옥은 영주의 장관을 중심으로 하여 주변지역에 산개되어


일정한 취락을 이루고 있었으며 각각은 조그마한 밭과 창고를 가지고 독립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개의 장원은 크게 2~3개의 토지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 이것들은


각각 지목들로 분할되어 각 지목은 영주직영지와 농민보유지들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농업기술이 그리 발전하지 못하였었기 때문에 윤작


기법 - 땅을 번갈아 가며 경작하는 농업기법 - 을 사용하여야 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장원제도 하에서 농민들은 영주에게 소작료를 바치고 ...각종의 세금을


납부하여야 하였으며 (사망세, 화덕세, 결혼세와 같은 말도 안되는 명목들이


많았죠) 또한 영주직영지의 경작이나 성의 축조와 같은 부역에 동원되어야만


하였습니다. (좋은 영주를 만나는 경우에는 괜찮았겠지만 악독한 영주를 만나는


경우 그들은 늘 쥐어짜인 것이겠지요.)


장원제도는 십자군 전쟁 이후 교역이 성행하고 이에 따라서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됨에 따라서 점차적으로 해체되어 가게 됩니다.


12세기 말에 이르게되면 지대를 현물 대신 화폐로 받았던 영주들이 많아지게 되는데


이러한 화폐지대가 도입됨에 따라서 농민들의 부담은 가벼워지게 되었지만


필연적으로 영주의 수입은 줄어들게 되 버렸죠( 14~15세기에 발생한 가격혁명이


여기에 크게 작용합니다.) 이에 결국 영주의 권한은 계속 축소되다가


결국 나중에 가게 되면 유명무실화하게 되어 결국 장원제도가 해체되게 되는


것입니다.


 

 

농노

http://blog.naver.com/blueangel51/40006252475


세습농지와 영주에 예속되어 있던 중세 유럽의 소작농민신분.


중세 유럽의 농노 대부분은 지주의 땅에서 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려나갔다 . 이 점은 농노의 주요특징으로 토지와 상관없이 사고 팔 수 있었던 노예와 구별되었다. 농노는 노동을 통해 스스로 음식과 의복을 얻었으며 소작지에서 나는 곡물 중 상당 부분을 영주에게 바쳐야 했다. 영주는 다른 소작인이 맡지 않은 영주 직영지(demesne land)의 일부를 농노에게 경작시킬 수 있었고, 농노는 자기 영주의 방앗간만을 이용해야 했다.


농노의 또다른 주요특징은 자유민이 가진 인신(人身)의 자유를 누릴 수 없었다는 점인데 특히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었다. 그들은 영주의 허락이 없으면 자기 경작지나 마을을 영영 떠날 수 없었고 결혼을 할 수도 없었으며 직업을 바꾸거나 재산을 처분하지도 못했다. 뿐만 아니라 지정된 토지에 예속되어 있어서 토지와 더불어 새로운 영주에게 넘겨질 수도 있었다. 이들은 종종 가혹한 대우를 받았으며, 영주에게 대항할 수 있는 법적 구제책도 거의 없었으므로 정식으로 해방되거나 도망을 가야만 자유민이 될 수 있었다.


로마 제국에서 노예들이 경작하던 대규모 사유지 대부분은 일찍이 2세기부터 점차 농민 소작지로 나누어 졌다. 로마 제국 말기의 농민들은 대부분이 노예의 후손들이었는데 처음에는 징세관에게서, 나중에는 야만족이나 포악한 이웃에게서 보호받기 위해 더 넓은 땅을 가진 지주나 다른 유력인사들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 콜로누스'라 불리던 이들 종속 농민은 지주에게 소작지를 받아 경작했거나, 보호받는 대가로 지주에게 자기들의 농지를 바쳤던 것 같다. 이들은 지주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지주의 속박을 받게 되었다. 콜로누스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경작하기로 한 농지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332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콜로누스들을 지주에게 노동 봉사하도록 법으로 정했다. 콜로누스는 법적으로는 자유의 몸이었지만, 충성에 대한 맹세 때문에 그들이 빌린 농지뿐만 아니라 빌리지 않은 땅까지 경작해야 했다. 결국 콜로누스들은 농지에 묶이게 되었고 지주 관리인들은 노동 봉사를 받아내기 위해 그들을 통제했으므로, 콜로누스들의 사회적 지위는 노예와 다름없게 되었다. 이들은 6세기에 들어와서 노예와 같은 농민이란 뜻에서 농노(servi, serf)라 불렸고 사회적으로 열등한 대우를 받았다. 5세기 로마 제국이 몰락하고 12세기 봉건 군주국, 공작령, 백작령 재건 초기까지 대부분 유럽 국가에 소규모의 지방분권 정체(政體)가 형성되었는데 농노는 그곳에서 인구의 다수를 구성하는 계급이 되었다.


14세기경 서유럽의 경제상황은 바뀌어 농노 대신 자유농민 계급이 점점 늘어났다. 중앙·지방정부의 세력이 커감에 따라 농민은 농노가 되지 않고도 영주의 땅을 경작할 수 있게 되었으며, 마침내는 영주 직영지에서 노동 봉사를 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영주들은 농민들에게 노동을 강요할 수 없게 되었다. 흑사병이 번져 1350년 이후 인구가 크게 줄어들어 매우 넓은 땅이 경작되지 않은 채 방치되었으며, 동시에 심각한 노동력 부족현상이 일어났다. 이 2가지 현상은 모두 농민들에게 경제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했다. 또한 14~15세기 서유럽 곳곳에서 일어난 잦은 농민반란 역시 농민들의 토지보유권을 보다 확고하게 만들어주었다. 이 시대 농민들이 노예상태에 있던 조상들보다 더 부유해진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인신의 자유권을 더 많이 가졌고, 더이상 영주들에게 완전히 예속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동유럽 농민들은 서유럽 농민들 같은 혜택을 입지 못했다. 14세기만 해도 그들은 서유럽 농민과 비슷한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동부 독일, 폴란드, 보헤미아, 모라비아, 헝가리에서는 삼림지역에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자유 농민 공동체가 많이 생겨나 어떤 면에서는 서유럽보다 낫기도 했다. 그러나 14~15세기 동유럽을 휩쓴 전쟁 때문에 중앙정부가 힘을 잃고 귀족의 권력이 커지는 등 정치·경제 상황의 변화는 동유럽 농민의 지위향상을 방해했다. 이런 사태는 서유럽의 곡물수요가 늘어난 것과 때를 맞추어 동부 독일, 프로이센, 폴란드, 러시아에서 일어났다. 귀족들과 지주들은 수요증가를 틈타 이익을 보려고 농민보유지를 도로 빼앗고 영주 직영지를 늘렸으며 농민들에게 과중한 노동 봉사를 요구했다. 그결과 동부 독일에서부터 모스크바 대공국에 걸친 지역에서 농민의 지위는 급격히 낮아졌다.


18세기말에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농민들은 농노제에서 풀려나 거주이전과 결혼의 자유를 회복하고 자신의 선택에 따라 전문기술을 배울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 러시아의 농노들 역시 1861년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해방령을 공포할 때까지 인신의 자유와 개인토지를 갖지 못했다.


중국의 경우 농토에 예속된 농민들은 법적으로는 자유민이었으나 먹고 살기 위해 전적으로 지주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농노제도 아래 그들은 거래대상이었으며,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처벌을 받았으며, 지주에게 노동으로 지대(地代)를 대신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뒤 농노들은 모두 해방되었다.


 

 

교황

http://bomul.paolo.net/pope/115.html


오늘날 교황을 뜻하는 '파파(papa)'란 호칭은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 본뜻은 '아버지'이다. 이 호칭이 로마주교 즉 교황에게 국한되기 시작한 것은 5세기 중엽부터이고, 그 전에는 일반주교들과 대수도원의 원장들도 이 호칭으로 불렸다. 그러나 11세기부터는 완전히 교황에게 국한된 호칭이 되었다.


교황의 호칭중에도 이 밖에도 '성부(聖父' '성하(聖下)'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호칭들은 아직 교회 안에서의 교황의 위치나 교회밖에서의 교황의 정치적 지위를 나타내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그런 명칭은 다른 명칭에서 찾아야 한다.


1983년 '교황청 연감'에 보면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밑에 무려 9개의 명칭이 나열되어 있다. 즉 로마주교,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 으뜸 사도의 후계자, 전교회의 대사제, 서구의 총대주교, 이탈리아의 수석주교, 로마 관구의 수석 대주교, 바티칸 시국의 원수, 하느님의 종 중의 종 등인데 이 중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를 제일 큰 활자로, 로마 주교를 다음으로 큰 활자로 표시함으로써 기타 명칭들에 비해 이 두 명칭이 가장 중요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상 9개의 명칭 중에서 '바티칸 시국의 원수'는 가장 늦게 생긴 것이고, 또 유일하게 교황의 정치적 지위를 나타내는 명칭이다.


이 명칭은 1929년 교황청과 이탈리아 국가와의 정교조약을 통해 바티칸 국가가 창설됨으로써 비로소 교황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바티칸 시국의 원수'란 명칭을 제외하면 다른 모든 명칭은 교회 개념과 관련되는 것들이다. 교회제도면에서 교황은 첫째로 로마주교이고 동시에 유럽교회의 총대주교, 이탈리아의 수석주교, 로마관구의 수석 대주교이다. 제도면에서 볼 때 교황은 다른 주교들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주교에 불과하고, 비록 로마주교일지라도 로마 교구를 책임진 주교에 불과하다. 그러나 최초의 로마주교가 베드로 사도였다는 점에서 로마주교의 위치는 전혀 다른 의미와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즉 로마주교는 다른 아닌 베드로의 후계자이기 때문이다.


이 로마주교의 후계자, 즉 베드로의 후계자란 명칭에서 미구에 가장 중요한 명칭이 파생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란 명칭이다. 이 명칭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에서 비롯되었는데, 그는 그때까지 교황에게 적용되어온 '성베드로의 대리자'란 명칭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란 명칭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로써 교황은 베드로와 같이 그리스도의 대리역을 맡은 사람이 되었고, 베드로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중재자 구실을 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종중의 종'이란 명칭은 교황 그레고리오 1세(190-605)때부터 사용되어온 것으로, 교황 자신에 대한 겸칭(謙稱)에 불과하고 다른 뜻을 별로 없다.


교황직의 근본적이고 유일한 특성은 그 신적 기원,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직접 이 직책을 베드로와 그 후계자들에게 위임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스도는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터인 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16;18-19)고 하며 교회에 대한 최초의 사목직책을 베드로와 그 후계자에게 위촉했던 것이다. 이 성경구절은 간략한 것이지만 교황직의 신적 기원에 대한 결정적이고 중심적인 증명이 되었다.


그러나 그후 교황직의 신적기원에 대한 반대가 교회 내외에서 끊이지 않았고, 그래서 교황직은 그의 수위권에 대해 교회 내외로부터 계속 도전을 받아야 했다.


교회 밖에서는 일찍부터 이 성경구절이 마태오 복음 외에 다른 복음에는 없고, 따라서 후기에 삽입된 것이라고 하며, 교황직의 신적기원을 반대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교회 내외서도 이 성경구절을 베드로에서만 국한시키려 하지 않는 사람이 나타났다. 한 유명한 교우는 그 구절을 베드로에게 국한시키지 않고 베드로를 통해 모든 사도들을 포함한 것으로 해석하려 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동등자 중의 첫째(Primus inter pares)'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곧 '주교 지상주의(Episcpoalism)'로 불리는 것이다. 이것은 주교들이 그들의 교구에 대해 교황의 지나친 간섭을 의식한 데서 발생한 것으로, 로마의 중앙집권에 대한 주교직의 자립을 의미한다. 이런 주장은 교황직이 위기를 맞을 때마다 나타났고, 비단 교황의 수위권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났다는 점에서 문제와 심각한 일면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교황직은 그때마다 자신의 수위권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특히 레오 1세 교황은 이미 5세기 중엽에 그것을 이론화였고, 그것은 마침내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신조로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그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주교들에게 보다 큰 권한을 부여하였다.


교황의 수위권은 주교 지상주의자들로부터보다, 공의회 지상주의자들로부터 더욱 강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교황을 공의회에 예속시킬뿐더러 경우에 따라서는 공의회가 교황을 폐위시킬 권한까지 갖는다고 주장하였다.


불행히도 이런 주장은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에서 교황을 폐위시키고 새 교황을 선출함으로써 한때 크게 득세하였으나, 점차 쇠퇴하여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까지에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1917년의 교회법은 물론이요, 최근에 반포된 교회법에서도 교황은 공의회의 주장임을 명문화하였다. 즉 교황만이 공의회를 소집하고 폐회할 수 있고, 교황만이 직접 또는 사절을 통해 공의회를 주재하고 의제도 결정한다.


무엇보다도 공의회의 결의는 모두 교황의 인준을 받아야 하고, 교황의 이름으로 공포될 때 비로소 법적 효력을 갖게 된다고 명문화하였다.


그러므로 교황직은 전교회의 모임인 공의회를 통솔할 수 있는 권한까지도 겸한 최고의 주교직이다.


우리는 역사 안에서 교황들 다시 말해서 세계사와의 관계에서 교황의 역사를 일별하였다. 교황들 중에는 훌륭한 교황도 많았으나, 기대에 어긋난, 좋지 못한 교황도 적지 않았다.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전개하는 교회의 역사가 하느님의 위촉과 인간의 허약 사이의 긴장과 모순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종말 완성을 향해 전진하고 있듯이 교황사에 있어서도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나약 사이에서 긴장과 충돌이 끊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세우고, 그것을 지속시킬 사명을 인간에게 위촉한 분이 바로 그리스도 주님이기 때문에 교회는 교황의 지도하에 존속할 수 있었다. 인간적인 배반은 이미 베드로 사도에게서 시작된 것이지만, 그후 많은 교황들의 배신은 또한 남은 뛰어난 교황들의 성성에 의해 극복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교황의 역사는 베드로로부터 요한 바오로 2세에 이르는 2천년간 여러번 위기를 극복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가장 객관적이고 가장 정확한 증명이다.


 

 

슬라브사회

http://www.haeseong.hs.kr/tc/%BF%AA%BB%E7%B0%FA/%BC%BC%B0%E8%BB%E7/%BC%BC-4-1_11.htm


슬라브 족과 동유럽


a. 서슬라브 족 : 폴란드, 체코


b. 남슬라브 족 :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c. 아시아 계 : 불가르, 마자르 인


 

 

황제교황주의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201&no=1869


국가원수가 교회의 최고 우두머리이며 종교문제의 최고 심판자인 정치체계.


이 말은 비잔틴 제국과 관련해 가장 많이 쓰인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에 따르면 비잔틴 법률은 교회가 제국에 일방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상호의존 관계에 있음을 규정해놓았다고 한다. 또한 역사가들은 황제가 교리적으로 절대로 오류가 없다거나 성직자의 권리를 부여받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비잔틴 그리스도 교회의 전반적인 인식이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에 대한 황제의 직접적인 압력이 실패로 끝난 경우가 적지 않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 단성론(單性論)을 주장한 제노(474~491 재위)와 아나스타시우스 1세(491~518 재위)의 노력, 로마와의 결합을 지지한 미카일 8세(1259~82 재위)의 노력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오안네스 크리소스톰을 비롯해 비잔틴 제국의 권위 있는 신학자들은 대부분 교회에 대한 황제권의 우위를 부인했다. 그러나 사실상 동로마 제국 황제는 전체 그리스도 교회의 보호자이자 교회 행정문제의 관리자 역할을 했다. 카이사레아의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외적인(영적인 것의 반대 개념) 교회문제의 감독관'이라고 불렀다.


황제는 공의회를 주관했으며, 성직자를 임명하고 성직자 관할권의 영토적 한계를 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그의 〈신법전 6 Novella 6〉(535) 서문에서 교회와 황제의 이상적인 관계를 '교향곡'으로 묘사함으로써 이 관계를 동적(動的)이고 도덕적인 것으로 해석했다. 이는 여러 가지로 악용되기도 했지만 국가에 대한 교회의 종속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황제교황주의는 러시아에서 더욱 현실적으로 나타났다. 교리상의 권위를 주장한 사람은 없었지만 이반 4세는 사실상 별다른 반대에 부딪히지 않고 이를 악용했으며, 표트르 대제는 마침내 교회를 국가의 한 부서로 만들기도 했다(1721). 잉글랜드의 헨리 8세 재위 때나 종교개혁 이후 독일에 널리 퍼져 있던 '그 나라의 종교는 군주의 종교에 따라 정해진다'(cujus regio, ejus religio)는 원칙에서 볼 수 있듯이 황제교황주의 개념은 서방 그리스도교 국가에도 적용되어왔다.


 

 

그리스정교

http://blog.naver.com/marchim/140008721517


그리스정교란 그리스 등지에서 믿는 그리스도교의 한 일파입니다.


그리스정교의 기원을 따지자면,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12년 막센티우스와 운명의 일전을 앞두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되는데 "CH/R, In hoc Signo Vinces!"라고 써 있었다고 전해집니다.그 뜻은 CH는 CHRISTUS(그리스도), R은 REX(왕), In hoc Signo Vinces는 이 표식으로 승리하리라라는 뜻입니다.


그는 십자가를 앞세우고 승리하였고, 그에 따라 313년 밀라노 칙령에 의해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였으며, 그 자신이 개종하였습니다.


그 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전지전능한 유일신인 하나님과 로마 종교에서 신으로 숭배되던 황제를 결합시켜 로마 황제를 기독교의 최고 지도자로 설정하려는 의도였습니다.모든 인류 위에 군림하는 하나님의 힘과 권위를 이용하여 황제의 지위를 확고히 하려는 정치적 이유가 있었던 것이죠. 그 후 로마제국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게 되는데, 이로써 기독교는 동유럽과 아시아의 중심에 거점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로마 제국이 395년 동서로 분할되었던 것이죠. 그에 따라 교회도 동서로 분할되었고, 동서로 갈라진 교회는 서로가 정통을 주장하며 대립했습니다. 기독교는 유대인에 의해, 유대인의 땅에서 일어난 종교지만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에 번져나갔겠죠.? 자연히 기독교의 중심은 로마가 되었고, 니케아 공회에 의해 가톨릭교회가 성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게 됨에 따라, 콘스탄티노플은 정치의 중심지, 로마는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자 서로마 제국은 그 정통성을 내세워 로마 교회의 교황이 전체 가톨릭의 최고 지도자임을 주장함, 동로마 제국의 황제와 심각한 대립, 갈등을 겪습니다. 동로마 황제의 주장은 수도가 이전되었으므로 당연히 교황도 자신이라는 것이고, 서로마 교황의 주장은 베드로가 순교한 곳이 로마이므로 당연히 서로마교회에 정통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 교황이 800년 카를 대제에게 471년 이래 폐위된 서로마 황제의 관을 내림, 동로마 제국에 맞서는 신성로마제국이 성립되어 동로마 제국 황제의 권위는 로마로부터 완전히 부정되었죠. 이에 동로마 제국은 교황의 권위를 부정, 1054년 서로 파문을 선언하였습니다. 서로마 제국의 기독교는 로마가톨릭, 동로마 제국의 기독교는 동방정교로 분리되었습니다. 동방정교는 로마가톨릭을 부정하며, 기독교 초기의 정통성, 하나님께 올리는 의식 등을 존중합니다. 동방정교, 그리스정교는 동유럽 국가에서 받아들였고, 러시아정교 등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정교회에서는 사제의 독신을 요구하지 않으며, 로마로부터 분리될 때 주장한 것이 "성상숭배"였으므로 성상(동상형태의 상), 또는 입체초상을 만들지 않으나, 성상(그림/초상화)는 매우 중요시합니다.


 

 

2-2. 중세 사회의 성립


1) 고려의 성립과 민족의 재통일


 

 

송악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11&dir_id=110101&eid=8klPC6VM1VDRfT8DFOHnXDwidKqstrsH


송악 (지금의 개성)이 고려의 도읍이 된 이유는 명확하게 명시되어있지는

않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고려 건국 이후에도 신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각지를 할거한 호족들의 세력은

여전히 강했고 그래서 태조 왕건이 혼인 정책 등을 통해 그들을 무마하고 중앙으로

흡수하려고 한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호족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근거지에서 그 힘의

의미를 갖는 이들이고 태조 왕건 또한 개경의 호족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송악으로 도읍을 옮긴 이유가 가닥이 잡힐 것이라 생각합니다.

즉 왕건이 고려 태조로 즉위한 철원은 궁예의 후고구려 도읍이었기에 도읍이 있는 곳에

세력을 갖고 있던 기존 세력들의 견제가 있었고 이에 왕건은 자신의 본거지인 송악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중앙에 들어온 기존 세력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세력이 궁에

미치는 영향을 강화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송악에는 왕건 자신이 젊을 때 쌓은 성까지 있었으니 천도를 한다면 더할나위없이

좋은 곳이었겠지요.


둘째, 풍수지리상으로 송악은 북쪽은 천마산, 그 남쪽에 진산인 송악산이 있고, 동남쪽에 용수산, 서남쪽에 진봉산이 있으면서 산세가 아름답고 남쪽에 한강이 흘러 평야가 이루어져 예부터 풍수지리상 길지로 알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왕건이 태어나기 전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송악에서 집을 지을 때 풍수지리학의 대가인 도선대사가 지나가다 보고는 "기장 심을 자리에 삼을 심고 있군." 하고 중얼거려 왕륭이 놀라서 쫓아가서 물으니 도선은 "집터를 널찍하게 닦고, 36채의 큰 집을 지으시오. 그러면 나라를 통일할 큰 인물을 얻게 될 것이오.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건'이라고 지으시오. 세울 건!" 하고 대답하고 아들을 낳으면 전하라며 책(비기)을 주고 갔다고 합니다.


 

 

왕건

http://www.koreandb.net/KPeople/KPShow.asp?ID=0014027&Type=L

http://100.naver.com/100.php?&id=154713&adflag=1


본관 개성(開城). 자 약천(若天). 성 왕(王). 휘 건(建). 시호 신성(神聖).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위숙왕후(威肅王后:追尊) 한씨(韓氏)이다.


895년(진성여왕 9) 아버지를 따라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898년(효공왕 2)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고, 900년 광주(廣州)·충주(忠州) 등을 공취, 그 공으로 아찬(阿粲)의 위계를 받았다. 903년에는 수군을 이끌고 전라도 지방을 공략,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閼粲)에 승진되고 계속하여 전라도·경상도 지방에서 견훤(甄萱)의 군사를 격파하는 한편 정벌한 지방의 구휼(救恤)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913년 시중(侍中)이 되었다.


918년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는 궁예가 민심을 잃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하였다. 이듬해 수도를 송악(松嶽)으로 옮기고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나갔다. 즉, 지방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서경(西京)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935년 투항해 온 신라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합병하고 이듬해에는 앞서 항복해 온 견훤과 함께 신검(神儉)의 후백제를 공격, 이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였다. 이 해 《정계(政誡)》 《계백료서(誡百寮書)》를 저술하여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 943년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남겼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능은 현릉(顯陵:개성)이다.


 

 

고려의 민족 재통일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bknu=05010094&query=%B0%ED%B7%C1%C0%C7+%B9%CE%C1%B7+%C0%E7%C5%EB%C0%CF&cpname=booktopia&menu=sview&encrt=0Nj9Wa9QIxMTGEDZMSZwZ3NpemU9#middle_tab

http://www.tgedu.net/student/cho_sa/chap4/4-1/4-1-4/main.htm

http://blog.naver.com/kosfamil.do?Redirect=Log&logNo=40018051157



 

 

광평성

http://dugok.x-y.net/kor-his/sys/goangpyung.htm


904년(신라 효공왕 8) 궁예(弓裔)가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고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였을 때 설치하여 내정을 통괄하게 하였다. 장관을 광치내(匡治奈)라 하며, 그 아래에는 대룡부(大龍部) ·수춘부(壽春部) ·병부(兵部) ·봉빈부(奉賓部) ·의형대(義刑臺) ·조위부(調位部) ·물장성(物藏省) ·금서성(禁書省) ·원봉성(元鳳省) ·비룡성(飛龍省) 등을 두어 사무를 분담하였다.


한편, 고려 태조는 태봉의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고 그 장관을 시중(侍中)이라 하였다. 982년(성종 1) 어사도성(御事都省)으로 고쳤다가, 995년 상서도성(尙書都省)이라 하였다.


2) 태조의 정책


 

 

취민유도


http://blog.naver.com/jhs6117.do?Redirect=Log&logNo=80007880261

백성들에게 조세를 수취할 때에 일정한 법도가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유교적 민본 이념을 나타내는 말이다.


 

 

흑창

http://blog.naver.com/jhs6117.do?Redirect=Log&logNo=80007880261

고구려의 진대법을 계승하여 춘궁기에 곡식을 나눠 주고 추수 후에 갚게 했던 빈민 구제 기구이다.


 

 

정계와 계백료서

http://blog.naver.com/jhs6117.do?Redirect=Log&logNo=80007880261

태조가 신하들의 임금에 대한 도리를 강조하기 위하여 지은 책이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훈요10조

http://corea1.hihome.com/polity/j1_4.html

http://www.jeri.or.kr/jries/web/go/soc/his/%BF%F638.htm



 훈요 10조(訓要十條)는 943년(태조 26) 고려 태조가 그의 자손들에게 귀감으로 남긴 10가지의 유훈(遺訓)을 말한다. 태조가 총애하던 중신 박술희를 내전으로 불러들여 그에게 주었다고 하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전한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짐이 듣건대, 순(舜) 임금은 역산(歷山 : 중국 산둥성에 있는 산)에서 농사를 짓다가 마침내 요(堯) 임금의 선양(禪讓)을 받았고, 한(漢) 고조(高祖)는 패택(沛澤)에서 일어나 드디어 한나라 제업(帝業)을 일으켰다고 한다. 짐도 또한 미천한 가문에서 일어나 그릇되게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서, 여름에는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지 않으며, 몸과 마음을 괴롭힌 지 19년 만에 삼한을 통일하였다. 외람되게 왕위에 있은 지 25년이 되니, 몸은 이미 늙었도다. 다만, 뒷임금들이 정욕(情慾)을 함부로 부려서 기강을 어지럽게 할까 크게 근심하는 바이다. 이에 훈요(訓要)를 말하여 뒷날에 전하니, 바라건대 조석(朝夕)으로 펴 보아 영구히 귀감(龜鑑)으로 삼을 지어다.

1.

 국가의 대업이 제불(諸佛)의 호위와 지덕(地德)에 힘입었으니 불교를 잘 위할 것.

2.

 모든 사원은 다 도선이 산수의 순역을 가려서 개창한 것이니, 함부로 사원을 지어 지덕을 손상시키지 말라.

3.

 왕위 계승은 적자 적손을 원칙으로 하되 장자가 블초할 때에는 인망있는 자가 대통을 이을 것.

4.

 거란과 같은 야만국의 풍속을 본받지 말 것

5.

 서경은 수덕이 순조로워 우리 나라 지맥의 근본이니 100일간 그 곳에서 머물라.

6.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 등의 중요한 행사를 소홀히 다루지 말 것.

7.

 소인을 멀리하고, 현인과 친하며, 조세를 가볍게 하고, 상벌을 공평히 할 것

8.

 차현 이남 금강 이외의 산형지세는 배역하니 그 지방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 것.

9.

 관리의 녹봉은 그 직무에 따라 제정할 것

10.

 널리 경사(經史)를 보아 지금을 경계할 것.


이상은 태조의 사상 배경과 정책의 요체가 집약된 것으로, 왕권의 강화와 불교 숭상, 풍수지리설의 신봉을 통해 집권을 정당화하고 후사에 의한 계속적인 집권을 확고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그 내용이 사서에 실린 뒤로는 흔히 군왕을 간하는 신하들의 전거가 되었다. 훈요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 부분은 서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신서(信書)이며, 뒷부분은 본론격인 10조의 “훈요”이다.


유훈 조작(?) : 943년 4월 왕건이 후왕들에게 유언으로 구술했다는 훈요 10조 중 여덟째 조항이 ‘조작됐다.’는 일부 학계의 주장이 있다. 조작의 근거로 제시한 것은 왕건이 죽은 뒤 바로 공개되지 않았고 당시 기록이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1010년 거란족의 침입으로 왕실 문서가 전소된 후 8대 현종 때 다시 정리되었는데, 이 때 사라진 훈요 10조를 최항의 집에서 뒤늦게 발견하여 고려사 등에 기록한 사람이 고려 실록을 재편찬한 일개 신하인 최제안이라는 점, 훈요 10조를 재정리한 현종이 신라계 신하들에 의해 옹립됐다는 점 등에서 당시 후백제계 인사를 제거하기 위한 ‘지역 차별 정책’의 필요성 때문에 “최항이 훈요 10조를 일부 조작했다.”라는 주장이다.

 

 

기인

http://myhome.shinbiro.com/%7Ehyun7301/jedo/hostage.html


고려·조선시대 지방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들의 자제(子弟)를 서울에 인질로 둔 제도.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지방호족을 포섭하는 방법으로 시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당시에는 호족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국왕에게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제도는 아니었고, 호족도 이를 통해 중앙과 연결하여 기반을 다지는 데 이용함으로써 서로 호혜적인 입장에서 운영되었습니다. 성종 때 지방제도가 정비된 이후에 기인제도는 변화를 겪는데, 원래 기인은 10년~15년간 중앙 관서에서 이속(吏屬)으로 잡무를 담당하면서 출신 지방의 부거자(赴擧者)의 신원을 조사하는 일이나, 사심관(事審官)을 선발할 때 자문에 응하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역(役)이 끝나면 동정직(同正職)으로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종 때 속현까지 감무(監務)를 파견하면서 기인은 지방세력의 견제라는 의미가 차츰 줄어들고, 일종의 직역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국가의 대우도 점점 낮아졌으며, 고려 후기에는 천역(賤役)으로 변질되어 조세 수입을 보충하기 위하여 한지(閑地)를 개간시키거나 궁실의 수영(修營) 및 관청의 사령(使令)을 담당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역의 과중함을 이기지 못해 도망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하였고, 이때 도망한 기인이 소속된 관청은 출신 군현에 일정한 배상을 강요하였습니다. 이에 폐단이 발생하자 1336년(충숙왕 5)에 이 제도를 폐지했으나, 이는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노동력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1343년(충혜왕 4)에 다시 복구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는 이를 폐지하고자 하나 실현하지 못하였고, 대신 정종 때는 기인의 정원을 향리의 수에 따라 지방에 공정하게 정해주었습니다. 1416년(태종 16)에는 기인의 수를 총 490명으로, 22년(세종 4)에는 390명으로, 29년에 다시 향읍의 크고 작음에 따라 경기는 향리 50명 중에서 2명, 경상·전라·충청·황해·강원은 30명 중에서 1명씩 선발하게 하였습니다. 조선 초의 기인은 주로 지방에 파견되어 소목(燒木)을 상공(上供)하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1609년(광해군 1) 대동법 실시로 폐지되었습니다.


 

 

3) 광종의 개혁 정치


 

왕규의 난

http://dugok.x-y.net/kor-his/per/wanggyu.htm


945(乙巳)년 고려사에 다시 어느날 민휴공(敏休公) 최지몽(崔知夢)이 혜종(惠宗)께 아뢰길 "近日에 變故고 있을것이니 마땅히 곧 옮기셔야합니다" 라고 간하자 혜종(惠宗)이 중광전(重光殿)으로 침소(寢所)를 옮긴후 왕규(王規)가 部下를 시켜 벽을 뚫고 왕을 시해(弑害) 하려했으나 실패하자 왕규(王規)는 민휴공(敏休公)에 칼을 빼 꾸짓기를 "임금이 침실을 옮 긴 것은 반드시 너의 꽤일 것이다" 라고 체근하자 지몽은 아무말도 안하자 슬그머니 그만 둠.


  그 사건후 혜종(惠宗)은 불안하여 갑사(甲士)로 호위(護衛)시키고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불분멸하고, 소인(小人)들을 상대(相對)하고, 절도(節度)가 결여되어 주위사람의 불만을 샀 으나 혜종(惠宗)은 호족(豪族) 세력을 두려워하고 대광(大匡) 왕규(王規)가 자신을 보호해 줄 유일한 사람이므로 참언을 듣고도 감싸줌              (高麗史 8冊 88項, 高麗史節要 1冊 111項)



   945(乙巳)년 고려사에 고려 3대 정종(定宗)은 민휴공(敏休公) 최지몽(崔知夢)에게 대광 왕 규(大匡 王規) 음모(陰謀)를 사기(事機)에 주(奏)함을 표창(表彰)하고 장획(臧獲=奴婢), 은 안마(銀 鞍馬),은 식기(銀 食器)하사(下賜)하셨다.                     (高麗史 8冊 88項, 高麗史節要 1冊 111項)


 

 

노비안검법

http://www.realmani.com/cgi-bin/realmani/read.cgi?board=funstory&y_number=58&nnew=2

http://www.mtcha.com.ne.kr/korea-term/goryo/term43-nobiangumbub.htm


노비안검법 奴婢按檢法 

개요

고려 초기 광종 때 양인이었다가 노비가 된 사람을 조사하여 다시 양인이 될 수 있도록 조처한 법.

내용

후삼국을 통일한 뒤 고려는 왕건 이래로 호족세력을 억압하는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광종 때에 이르러 과거제 시행, 사색공복제(四色公服制) 제정, 칭제건원(稱帝建元) 등과 함께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이 법을 실시하였다.


당시 호족은 후삼국의 와중에서 전쟁 포로가 되었거나 빚을 갚지 못했든지, 아니면 그 밖의 강제적인 방법으로 양인에서 노비가 된 사람들을 많이 소유하였다. 이러한 노비는 호족이 소유한 토지와 함께 그들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이 되었고, 이는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왕권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제한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918년(태조 1) 태조는 노비가 된 양인 가운데 1,200명을 방면시켰고, 그 후에도 이러한 노력을 계속하였지만 호족의 반발로 제대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에 956년(광종 7) 광종은 노비의 안검을 명령하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양인을 회복시켰는데, 이것은 호족에게 귀속되던 세(稅)를 국가에 환원시키고 호족의 사병(私兵)을 감소시킴으로써 호족의 약화와 왕권의 강화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러나 호족의 강력한 반발을 받았으며, 심지어 광종의 비(妃)인 대목황후(大穆皇后)까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지만 폐지하지는 못하였다. 경종 때 호족의 반발이 더욱 격화되자, 987년(성종 6) 노비환천법을 실시하였다.



백관의 공복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B9%E9%B0%FC%C0%C7%20%B0%F8%BA%B9&sort=0&c=1&qt=df


 

전시과 제도

http://www.onreport.co.kr/data/193/F192758.html

http://www.tgedu.net/qna/content.asp?gu=qna0608&pid=506&gotopage=8&block=


공음전시과가 제정된 것은 1049년(문종)입니다. 이는 경정전시과가 제정된 시기(1076)보다 다소 앞선 시기입니다. 공음전 지급 대상은 1품에서 5품까지의 공신들이며, 지급 액수는 최고 전지 25결과 시지 15결이며, 최하는 전지 15결과 시지 5결입니다. 이러한 공음전시는 원래 경종 원년 개국공신 및 귀순 성주들에게 준 훈전에서 유래한 것이며, 이로서 문벌귀족(귀족이라는 말은 신분을 세습할 수 있는 무리로서 음서과 공음전에 의해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세습할 수 있는 5품 이상의 관리로 일반적인 관리와는 대별됩니다)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실하게 설정할 수 있어 고려사회의 지배층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4) 유교적 정치 질서의 강화


 

시무 28조

http://home.cein.or.kr/~younggnn/data/history/history3jungse/h3-3-2.htm

http://chungdong.or.kr/highroom/history/dictionary/%BD%C3%B9%AB28%C1%B6.html



1. 요지(要地)를 가려 국경을 정하고, 그 지방에서 활 잘 쏘고 말 잘 타는 사람을 뽑아 국방을 맡도록 하소서.

  2. 불사(佛事)를 많이 베풀어 백성의 고혈(膏血 : 기름과 피)을 짜내는 일이 많고, 죄를 지은 자가 중을 가장하고, 구걸하는 무리들이 중들과 서로 섞여 지내는 일이 많습니다. 원컨대 군왕의 체통을 지켜 이로울 것이 없는 일은 하지 마소서.

  3. 우리 왕조의 시위하는 군졸은 태조 때에는 그 수효가 많지 않았으나, 뒤에 광종이 풍채 좋 은 자를 뽑아 시위케 하여 그 수가 많아졌습니다. 태조 때의 법을 따라 날쌔고 용맹스런 자만 남겨 두고 그 나머지는 모두 돌려 보내어 원망이 없도록 하소서.

  4. 왕께서 미음과 술과 두부국으로 길가는 사람에게 보시(布施 : 법이나 재물을 베품)하나, 적 은 은혜는 두루 베풀어지지 못합니다. 상벌을 밝혀 악을 징계하고 선을 권장한다면 복을 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은 일은 임금의 체통이 아니오니 폐지하소서.

  5. 태조께서는 수년에 한 번씩 사신을 보내어 사대의 예를 닦았을 뿐인데, 지금은 사신뿐 아니 라, 무역으로 인하여 사신의 왕래가 빈번하니, 지금부터는 사신 편에 무역을 겸하게 하되, 그 밖의 때에 어긋나는 매매는 일체 금지하도록 하소서.

  6. 불보(佛寶)의 돈과 곡식은 여러 절의 중이 각기 주군(州郡)에서 사람을 시켜 관장하며, 해마다 장리(長利 : 비싼 이자)를 주어 백성을 괴롭게 하니 이를 모두 금지하소서.

  7. 태조께서 나라를 통일한 후에 군현에 수령을 두고자 하였으나 대개 초창기에 일이 번다하여 미처 이 일을 시행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청컨대 외관(外官 : 지방관)을 두소서.

  9. 관료들로 하여금 조회할 때에는 모두 중국 및 신라의 제도에 의하여 공복을 입도록 하여 지위의 높고 낮음을 분별하도록 하소서.

 11. 풍속은 각기 그 토질에 따라 다른 것이므로 모든 것을 반드시 구차하게 중국과 같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12. 공물과 요역을 공평하게 하소서.

 13. 우리 나라에서는 봄에는 연등(煙燈)을 설치하고, 겨울에는 팔관(八關)을 베풀어 사람을 많이 동원하고 노역이 심히 번다하오니 원컨대 이를 감하여 백성이 힘펴게 하소서.

 14. 임금께서는 스스로 교만하지 말고 아랫사람을 공손히 대하고, 죄지은 자는 모두 법에 따라 벌의 경중을 결정하소서.

 16. 중들이 다투어 절을 짓는데, 수령들이 백성을 동원하여 일을 시키니 백성이 매우 고통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엄히 금하소서.

 17. 근래에 사람들이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재력만 있으면 다투어 큰집을 지으니 그 폐단이 많습니다. 제도에 맞지 않는 것은 모두 헐어 버리도록 명하여 뒷날에 경계가 되게 하소서.

 18. 신라 말기에 불경과 불상을 만드는 데 모두 금·은을 사용하여 사치가 지나쳤으므로 마침내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근래에도 그 풍습이 없어지지 않았으니 엄중히 금하여 그 폐단을 고치게 하소서.

 19. 공신의 등급에 따라 그 자손을 등용하여 업신여김을 받고 원망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20. 불교를 행하는 것은 몸을 닦는 근본이며,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니, 몸을 닦는 것은 내생(來生)을 위한 것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곧 오늘의 일입니다. 오늘은 지극히 가깝고 내생은 지극히 먼 것이니,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는 일이 또한 그릇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21. 우리 왕조는 종묘 사직의 제사는 아직 법대로 하지 않으면서 산악(山嶽)과 성수(星宿)에 대 한 초제는 번거롭게 합니다. 그 제사의 비용은 모두 백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민심을 얻으면 그 복이 기원하는 복보다 많을 것이니,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됩니다.

 22. 광종이 노비를 안검하니 …천한 노예들이 주인을 모함하는 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런즉, 선대의 일에 구애되지 말고, 노비와 주인의 송사를 판결할 때는 분명하게 하여 후회가 없도록 힘써야 합니다.



[ 분석 및 개요 ]


  최승로는 경주 출신으로 신라가 항복할 때 아버지와 함께 경순왕을 따라 고려에 귀순하여 일찍부터 고려에서 벼슬을 한 학자 출신의 중앙 관료였다. 최승로의 시무책은, 광종 사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새로운 정치 질서 수립의 필요성을 느낀 성종 때에 건의된다. 유교적 정치 이념의 구현을 목표로 했기에 많은 조목에서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고 있으며, 유교의 ‘민본 정치 구현’과 관련된 민생의 안정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호족 세력의 억제와 외관 파견의 주장 등으로 전국적 규모의 중앙 집권적 정치 형태를 구상하면서도 시위 군졸의 축소 등으로 왕권의 전제화를 견제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중앙 집권적 관료 사회에 애착을 가졌고, 귀족 관료들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사회적 재편성을 원했기 때문이다.



최승로

http://mtcha.com.ne.kr/koreaman/goryo/man101-choisungro.htm


고려시대의 문신 ·재상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아버지는 신라 6두품인 은함(殷含)이다. 신라말 경주에서 태어나 935년(태조 18)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할 때 아버지를 따라 고려에 왔다. 12세 때 고려 태조 앞에서 《논어(論語)》를 암송하여 칭찬을 듣고, 안마(鞍馬)와 예식(例食) 20석(碩)을 하사받았으며, 원봉성(元鳳省) 학생이 되는 은혜를 입었다.

  학문연구에 전심, 일찍 문병(文柄)을 관장하고 982년(성종 1) 정광 행선관어사 상주국(正匡行選官御事上柱國)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왕명에 따라 5품 이상 경관(京官)에게 봉사(封事)를 올려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논하게 하자 사회개혁 및 대중국관(對中國觀)의 시정 등에 관한 시무책(時務策) 28조를 올려 군제(軍制)의 개편, 과다한 불교행사의 중지, 무역의 절제, 지방관제의 확정, 관복의 제정, 승려의 횡포 엄금, 공역(貢役)의 균등, 우상 철폐, 신분제도의 확립 등 전반적인 면에 걸쳐 폐단을 시정, 새로운 제도를 제정 ·건의하여 고려왕조의 기초작업에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토호(土豪)들의 횡포로 인한 세공(歲貢) 수납의 폐해를 시정토록 12목(牧)을 설치, 목사(牧使)를 상주시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도록 했다. 982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가 되었으며, 988년 문하수시중(門下守侍中)에 승진하고 청하후(淸河侯)에 봉해졌는데 이 때 식읍(食邑) 700호를 받았다. 여러 차례 벼슬을 그만두기를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989년 63세의 나이로 죽자 성종이 몹시 슬퍼하며 포(布) 1,000필, 면(麵) 300석, 갱미(粳米) 500석, 유향(乳香) 100냥 등을 내렸다. 태사(太師)에 추증되었으며, 998년(목종 1)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1033년(덕종 2) 대광 내사령(大匡內史令)이 더해졌다.


2성 6부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6&dir_id=6&eid=23ErnadIfb%2B23Onz5KFWgmdRvcijmMLt

고려 성종때 마련한 통치제도입니다.

당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고려의 실정에 맞게 조정하였구요.

최고관서로 2성중하나인 중서문하성을 두고, 그 장관은 문하시중이 맡아 국정을 총괄했죠.

나머지 성인 상서성은 실제정무를 나누어 담당하는 6부를 두었죠. 6부에는 이부,병부,호부,형부,예부,공부가 있죠


 

12목

http://www.koreandb.net/KoreanKing/html/person/pki50006.htm



982년(성종 1) 6월에 경관(京官)5품 이상에게 봉사(封事)를 올려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게 하였는데 이에 정광 행선관어사 상주국(正匡行選官御史上柱國) 최승로(崔承老) 가 시무(時務) 28조(條)를 올렸다.


성종은 최승로의 정책 건의와 보좌를 받고 새로운 국가체제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먼저 지방제도의 정비에 대하여 살펴보면 첫째, 983년(성종 2)에 지방에 12목(牧)을 설치하였는데, 이러한 지방관의 설치는 고려 건국 이래 처음 있었던 일로서, 그 역사적 의의는 큰 것이었다.


12목의 설치와 함께 금유(今有)·조장(租藏)은 혁파되었다. 12목의 설치 당시에는 지방관만이 임지에 부임하였으며, 가족의 동반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일이 지남에 따라, 986년에는 12목에 대하여 처음으로 처자(妻子)를 데리고 부임하게 하는 제도적인 조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12 목사와 경학박사(經學博士)·의학박사(醫學博士)각 1인씩을 뽑아 보내어 지방교육을 맡아보게 하는 한편, 유교적 교양이나 의술이 있는 사람을 중앙에 천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993년(성종 12)에는 12목에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하여 물가 조절의 기능을 맡게 하였으니, 지방 각 관청의 경비 지출을 위한 공해전시의 법을 정비하는 등 지방제도의 정비작업을 꾸준히 진행하여 지방행정의 기능을 크게 강화시켰다.


 

중추원

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sidaesa/txt/5-3-1-3-4.html

http://dugok.x-y.net/kor-his/sys/ko-jungchuwon.htm


중추원은 조선왕조 전기(全期)를 통하여 실직(實職)이 없는 문무 당상관(堂上官)을 대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체아직(遞兒職)으로서 본래 독립기관이었으나, 고종 31년(1894) 6월 28일 처음으로 경장관제(更張官制)를 실시할 때, 이것을 의정부(議政府)에 소속시켰는데 역시 문(文) · 음(蔭) · 무(武)의 자헌(資憲)(정2품) 이상 실직없는 인사(人士)를 대우하는 기관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동년 11월 21일 이제까지 갑오경장을 추진하던 임시 입법기관인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폐지하고, 그 대신 중추원(中樞院)에 의장(議長) · 좌(左) · 우의장(右議長)을 두어 정부의 자문에 응하게 하고 원임의정(原任議政)인 김병시(金炳始)를 의장, 조병세(趙秉世)를 좌의장, 정범조(鄭範朝)를 우의장에 임명하고[註45] 다음해 즉 고종 32년(1895) 3월 25일 칙령 제40호로 중추원제(中樞院制)를 공포하여 크게 그 기구와 권한을 확장하였는데, 그 요점은 다음과 같다.


1. 중추원은 내각의 자순(諮詢)에 응하여 다음 사항을 심사 의정한다. (1) 법률(法律) · 칙령안(勅令案). (2) 임시로 내각에서 자순하는 사항.

1. 중추원은 다음의 직원으로써 합성(合成)한다. 의장 1인, 부의장 1인(칙임), 의관(議官) 50인(1등의관(一等議官)은 칙임, 2.3등의관(二三等議官)은 주임), 참서관(參西官) 2인(주임), 주사 4인.

1. 의장 · 부의장 및 의관(議官)은 다음에 해당하는 자로써 내각회의를 경(經)하여 내각총리대신의 주천(奏薦)에 의하여 임명한다. (1) 칙임관의 직에 있던 자(者). (2) 국가에 공로가 있는 자. (3) 정치 · 법률 및 이재(理財)의 학식에 통달한 자.

1. 중추원 회의에서 의안 전체를 부결하던가 혹은 수정한다 할지라도 내각에서 원안대로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할 때에는 상주하여 재가(裁可)를 거쳐서 시행할 수 있다.

1. 법률 · 칙령의 시행이 급하여 중추원에 자문할 겨를이 없을 때에는 내각에서 먼저 시행하고 뒤에 중추원의 검시(檢視)에 부(付)한다.


이상에 의하면 중추원은 법률과 칙령을 심사 의정(議政)하는 기관으로 일종의 입법기관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법률과 칙령을 의결한다 할지라도 그대로 실시되는 것이 아니므로 역시 자문 기관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광무 2년(1898) 11월 2일 독립협회가 나서서 민족운동을 전개할 때 칙령 제36호로 중추원 관제를 다음과 같이 개정하였다.

① 중추원은 좌개(左開) 사항을 심사결정한다.

○ 법률 · 칙령의 제정 폐지 혹은 개정에 관한 사항

○ 의정부에서 경의(經議) 상주(上奏)하는 일절의 사항

○ 칙령으로 의정부에 자문하는 사항

○ 인민(人民)이 헌의(獻議)하는 사항

② 중추원은 하기 직원으로 합성한다. 의장 1인, 부의장 1인, 의관 50인, 참서관 2인, 주사 4인.

③ 의장은 태황제폐하께서 칙수(勅授)하고, 부의장은 중추원의 공천(公薦)에 의하여 칙수(勅授)하며, 의원 50인 중 반수는 정부에서 국가유공자를 회의주천(會議奏薦)하고, 반수는 인민의 협회(協會)에서 27세 이상 정치 · 법률 · 학식에 통달한 자를 투표로 선거한다.

④ 의장은 칙임 1등이오 부의장은 칙임 2등이오, 의관은 주임(奏任)인데, 임기는 1년이다. 단 의관은 만기 1개월 전에 후임 의관을 예선(豫選)한다.

⑤ 중추원에서 각항 안건에 대하여 결의권만 있고 상주(上奏) 또는 발령(發令)할 수 없다.

⑥ 의정부와 중추원에서 의견이 맞지 아니할 때에는 부(府) · 원(院)이 합석협의(合席協議)하여 타당하게 의결한 뒤에 시행하고, 의정부에 직행하지 못한다.


이것을 고종 32년의 관제와 비교하면, 중추원은 단순한 자문기관이 아니오, 당당한 입법기관이었으며, 의원 50명중 반수는 독립협회 등 민회(民會)에서 투표로 선거하고, 부의장도 황제가 직접 임명하지 아니하고 중추원 의관의 선거에 의하여 임명하게 된 것은 크나 큰 진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 결과 독립협회 회원이 많이 중추원 의관으로 당선되고, 독립협회장 윤치호(尹致昊)가 중추원 부의장에 당선되었다.[註48] 그러나 고종황제는 민주노선을 걷고 있는 독립협회를 미워하여 이를 해산시키고, 광무 3년(1899) 5월 22일 부의장 · 의관의 선거제도를 폐지하고, 관선제도(官選制度)로 고쳤다. 즉 의관 50명 중 칙임 10명, 주임 40명으로 나누고 의장 · 부의장 및 칙임 의관은 황제가 조칙으로 서임(敍任)하고 주임의관은 의정부에서 상주, 칙임하도록 개정하고 동년 8월 25일 다시 중추원 관제를 개정하여 부의장을 폐지하고 주임의관도 10명을 줄여 30명으로 하고, 그 중에 15명만 월급을 주고 나머지 15명은 명예직으로 하였으며, 광무 9년(1905) 2월 26일 부의장을 다시 설치하였으나 의관을 찬의(贊議)로 개칭하고 찬의(贊議) 15명만 두어 기구를 더욱 축소하였다.


 

삼사

http://blog.naver.com/hesbs/120003337203


사헌부는 시정을 논평하고 모든 관원을 감찰하며 풍속을 바로잡고 억울한 일을 밝히며 외람된 행위와 허위의 언동을 금지하는 등의 일을 관장한다. 사간원은 임금에게 간언하고 정사의 잘못을 논박하는 직무를 관장한다. 모두 문관을 임명한다. 홍문관은 궁내의 경적을 관리하고 문서를 처리하며 왕의 자문에 대비하는 임무를 관장한다. 모두 문관을 임명한다. [경국대전 이전 경관직]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관리들을 언관이라고 한다. 조선 전기의 정치 운영에서 왕권과 의정부와 6조, 삼사 등은 유기적으로 기능하게끔 체제가 갖추어져 있었다. 이중 삼사의 정치적 임무는,

  사헌부는 현재 진행되는 정사를 토론하고 모든 관리들의 잘잘못을 살피며 풍속을 바로잡고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며, 분에 넘치거나 거짓된 말과 행동을 단속하는 등의 일을 한다.

  사간원은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고 관리들의 잘못을 규탄하는 등의 일을 한다.

  홍문관은 궁궐 안의 서적 관리, 문서 처리를 담당하며 왕의 자문에 대비하는 임무를 관장한다.


 

도병마사

http://dugok.x-y.net/kor-his/sys/ko-dobyungmasa.htm

http://www.mtcha.com.ne.kr/korea-term/goryo/term52-dobyungmasa.htm


도병마사는 재추로 임명된 판사(判事)·사(使)와 부사(副使)·판관(判官) 등 12인과 녹사(錄事) 8인, 그리고 이속(吏屬) 25인으로 구성되었는데, 정식 회의원은 역시 판사와 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도병마사는 무인집권기에 별로 기능을 못하다가 고종 후년에 가서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전과는 달리 국방 군사관계에 한정되지 않고 중요 국사 전반에 걸쳐 합좌하는 '도당(都堂)'이 되었다. 충렬왕 5년(1279)에 도평의사사로 승격되면서, 그 구성과 기능이 크게 확대되었다.


삼사도 재추와 함께 재상으로서 도당의 구성원이 됨으로써, 합좌하는 재추의 수가 증가하였다. 아울러 단순한 희의기관이 아니라 행정기능도 가지게 되었다.


도평의사사에는 직접 행정사무를 맡은 6색장 또는 6방녹사, 그리고 이를 통할하는 사무처인 경력사(經歷司)를 설치하였다. 결국 도평의사사는 국가 중대사를 회의할 뿐만 아니라 여기서 결정된 사항을 실제로 시행하는 집행기구가 되었던 것이다. 도병마사가 그 구성과 기능이 확대됨에 따라 식목도감은 약화되어 무력한 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식목도감

http://dugok.x-y.net/kor-his/sys/ko-sikmokdogam.htm

http://mtcha.com.ne.kr/korea-term/goryo/term100-sigmogdogam.htm


도병마사는 식목도감과 함께 고려 독자적인 정치기구였다.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재신과 추신이 모여 국가 내외의 중대사를 회의 결정하는 기구였는데, 도병마사는 변경·군사·대외문제를 의론하였음에 대해 식목도감은 대내적인 법제 격식 문제를 결정하였다


 

2-3. 통치체제의 정비


1) 중앙 정치 조직


 

 

중서문하성

http://dugok.x-y.net/kor-his/sys/ko-jungseomun.htm

http://cgi.chol.com/~edusong/technote/read.cgi?board=Allhistory&x_number=1027349368&r_search=%C1%DF%BC%AD%B9%AE%C7%CF%BC%BA&nnew=1

http://www.mtcha.com.ne.kr/korea-term/goryo/term136-jungsumunhasung.htm


중서문하성은 2품 이상의 재신과 3품 이하의 낭사로 구분되었다. 재신은 문하시중·평장사(平章事)·참지정사(參知政事)·정당문학(政堂文學)·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가리키는데, 이들은 중요한 국정 일반을 관장하였으며 또한 구체적으로 특정 국무 한가지씩 나누어 관장케 하였으니, 그것이 상서6부의 판사(判事) 겸직이었다. 재신은 6부 판사를 겸대하여 실제의 실무에 관여하였다.

중서문하성의 낭사는 3품 이하 6품 이상의 참상관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국왕의 잘못에 대한 간언과 부당한 결정 사항에 대한 반박을 직능으로 하였으며, 서경(署經 : 관직을 제수할 때 그 관리의 고신을 심사 동의하는 제도)의 권한을 가졌다.


중서문하성 중심의 정치체제는 무인집권기 이후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무인집권기에는 무인의 집정기구가 강한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중서문하성의 기능이 약화되었다.


원의 지배하에 들면서 중서문하성은 더욱 축소 약화되어, 충렬왕 원년(1275)에 관제가 격하되었을 때 중서문하성을 상서도성과 병합해 첨의부(僉議府)로 개편되었으며, 이후 충렬왕 19년(1293)에는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로 승격되었다.


공민왕 5년(1356)에는 중서문하성으로 회복되었다가 11년 다시 도첨의부로 환원되었고 18년에 문하부로 개칭되었다. 중서문하성(첨의부)은 이 시기에 도평의사사가 도당(都堂)이라 일컬을만큼 일원적인 최고 기관으로서 백료서무를 관장하였으므로 형식상 존재하였을 뿐이었다.



도평의사사

http://mtcha.com.ne.kr/korea-term/goryo/term53-dopyungyisasa.htm

http://dugok.x-y.net/kor-his/sys/ko-dopyungsa.htm

http://tutork.com/ss4-13.htm



고려 후기의 최고정무기관으로, 전기에 설치되었던 도병마사(都兵馬使)의 후신이며 도당(都堂)이라고도 한다. 도병마사는 989년(성종 8) 동서북면병마사(東西北面兵馬使)를 설치하고 중앙에서 이들을 지휘하기 위한 판사(判事)를 둔 데서 유래하며, 현종 초를 전후한 시기에 설치되었다.

  문종 때 관제가 정비되면서 판사(判事)는 시중(侍中)·평장사(平章事)·참지정사(參知政事)·정당문학(政堂文學)·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중에서 겸하고, 사(使)는 6추밀과 직사(職事) 3품 이상 중에서 겸했다. 부사 6명은 정4품 이상의 경(卿)·감(監)·시랑(侍郞)이 하며, 판관 6명은 소경(少卿;종4품) 이하로 했다. 또 녹사 8명은 갑과권무(甲科權務)로 했다. 이속(吏屬)으로는 기사(記事)가 12명, 기관(記官)이 8명, 서자(書者)가 4명, 산사(算士)가 1명이었다.


  도병마사는 판사 이하 판관까지 회의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양계의 축성 ·둔전 ·군사의 상벌, 국방과 군사문제 등을 주로 담당하고, 때로는 주진민(州鎭民)의 진휼 등 민생문제를 다루기도 하였다.


  현종 초에 설치된 도병마사는 무신란 이후 무신들이 집권하면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고종 말 이후 재추(宰樞)의 합좌기관으로 변질되어 종래의 부사와 판관은 없어지고 양부(兩府)의 재추가 모두 모여 국방과 군사문제뿐만 아니라 국사 전반을 의결하는 기관으로 변하였다.


  그리하여 원나라의 간섭으로 관제를 격하시킬 때 도병마사도 함께 격하되었다.  1279년(충렬왕 5) 이름을 도평의사사로 바꾸면서 종래 임시관청의 상설기관이 되었으며, 양부의 재추뿐만 아니라 삼사(三司)의 관원과 상의(商議)까지 참여하는 기구로 확대되었다.


  특히 고려 말에는 중앙의 관청과 지방의 안렴사(按廉使)에게 하첩(下牒)하고 왕지(王旨)까지도 경유하게 하는 등의 행정 기능도 담당하여 명실상부한 최고정무기관이 되었다. 이러한 행정업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관직을 신설 확충하였다. 원래 도평의녹사(都評議錄事)가 사무를 담당하다가 1352년(공민왕 1) 5군녹사(五軍錄事)가 이를 대신했으며, 뒤에는 6색장(六色掌)이 이를 담당하였다.


  창왕 때는 6색장을 이 ·예 ·호 ·형 ·병 ·공의 6방녹사(六房錄事)로 개편하고, 지인(知印) 20명을 둘로 나누어 10명은 중앙에 두고, 나머지 10명은 선차(宣差)로 삼아 지방에 보내 탐문하는 임무를 맡겨 중앙과 지방의 행정을 모두 관장하였다.


  기능이 강화되면서 회의에 참여하는 인원도 증가하여 창왕 때는 개성부(開城府) ·후덕부(厚德府) ·자혜부(慈惠府)의 판사와 윤(尹:長官)이 참여하고, 뒤에는 예문관의 관원도 참여하여 고려 말에는 70~80명에 이르렀다. 90년(공양왕 2)에는 관제를 정비하면서 상부의 회의기구에는 문하부(門下府) ·삼사(三司) ·밀직사만 판사(判事) ·동판사(同判事) ·겸사(兼事)를 삼고 나머지 상의 및 개성부 ·예문관의 관리는 겸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하부의 실무기구로서 경력사(經歷司)를 따로 설치하여 6방(房)을 총괄하게 하고, 경력(經歷:3~4품) 1명, 도사(都事:5~6품) 1명을 두었고, 매년의 공거(貢擧)와 잡업(雜業) 가운데 관직이 없는 자를 7~8품의 전리(典吏)로 삼고 서사(書寫)를 맡겼다. 조선 건국 후 관제개편 때에도 최고기관이 되었으나 1400년(정종 2)에 의정부로 개편되었다.


 

고려의 중앙 관제

http://myhome.shinbiro.com/%7Ehyun7301/jedo/center.html


고려 중앙 정치 제도는 당의 3성 6부제를 근간으로 했습니다. 다만 고려는 중서성과 문하성을 통합해 당과는 달리 2성6부의 체제로 변형해 운영한 것이 특색이지요. 다른 부분은 당과 운영 방식이 동일합니다.

<중서 문하성>은 초기에는 내사 문하성으로 부른 적도 있습니다. 중서성의 정책 기획 기능과 문하성의 심사 기능을 일원화한 최고 관청으로, 그 장관인 문하 시중이 수상이었습니다. 중서 문하성은 2품 이상의 최고급 관리인 재신과 3품 이하의 낭사로 구성됩니다.

-재신은 백관을 통솔하고 국가의 중요 정책을 의논·결정하는 일을 수행하였습니다

-낭사는 간쟁·봉박·서경의 기능을 맡았습니다.

   °간쟁은 국왕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

   °봉박은 부당한 조칙(왕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서경은 관리의 임명이나 법률의 개폐에 관한 인준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왕의 명령이 있을지             라도 무조건 그대로 시행되는 것은 아니었음 을 의미하지요.


낭사의 기능은 결국 왕권을 제한 하는 것입니다. 이는 최승로의 유교 정치 이념에서 살펴보았듯이, 고려 시대에는 유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 왕도 정치의 이념이 등장하면서, 무조건 충성 할 것이 아니라 왕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잡혔음을 증명하는 사례입니다. 왕도 정치를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글자 그대로 왕도(王道), 왕이라고 해 서 아무런 행위라도 가능한 것이 아니라 왕이 걸어야 할 길이 있다는 뜻입니다. 바른 길을 가도록 돕는 것이 신하의 도리 이므로 왕의 잘못에 대한 비판이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지요.


<상서성>은 행정부에 해당합니다. 성서를 장관으로 하는 6부는 실제 행정 업무를 분담했습니다. 명칭은 당의 예대로 이·호·예·병·형·공부라 해, 유교식 명칭을 사용했던 발해와 구별됩니다. 각 부별 구체적 업무 내용은 발해의 정치 테도 부분을 다시 복습하기 바랍니다. 6부는 아래로는 중앙의 여러 관청을 통괄 하고 위로는 국왕에 시정을 직접 보고하는 중앙 행정의 핵심 역할을 했습니다.


<중추원>은 2품 이상의 추밀과 3품의 승선으로 구성되어 하급 관리가 없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중서 문하성과 함께 국정의 책임을 맡는 중요 관청이었습니다.

추밀은 군국 기무 곧 군사 기밀 업무를 관장했고 승선은 왕명의 출납을 맡아 보았습니다.


<삼사>(三司)는 송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관청이었으나, 송의 삼사가 재정에 관한 전권을 가진 주요 관청임에 비해, 고려에서는 곡식과 화폐의 출납을 맡는 단순 회계 기관으로 비중이 송보다는 매우 낮았습니다. 중추원과 삼사는 송 의 영향을 받아 만들었지만 구체적 운영 방식은 송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어사대>는 감찰 기관으로, 풍속을 바로잡고 관리의 비행을 규찰하는 업무를 맡아, 신라의 사정부와 발해의 중정대와 같은 성격의 관청이었습니다. 또한 중서 문하성의 낭사와 함께 대성의 구성원을 이루었습니다.


<6부>에는 이·호·예·병·형·공부가 있었으며 하는 일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부 : 문관의 인사.

   호부 : 호구(인구조사), 조세, 재정.

   병부 : 국방 및 무관의 인사, 통신.

   형부 : 법률 및 소송.

   공부 : 건축과 영선(시설관리), 토목.


 

2) 지방 행정 조직의 정비

 

 

5도 양계

http://blog.naver.com/liferecipe/20011673326


지방의 행정 조직도 성종 초부터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전국을 5도와 양계로 나누었다. 5도는 상설 행정 기관이 없는 일반 행정 단위로서 안찰사가 파견되어 도내의 지방을 순찰하였다. 도에는 주와 군·현이 설치되고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북방의 국경 지대에는 동계·북계의 양계를 설치하여 병마사를 파견하고, 국방상의 요충지에는 진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군사적인 특수 지역이었다.


중앙에서 지방관이 직접 파견되는 것은 군.현과 진까지였다. 그러나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보다 파견되지 않는 속현이 더 많았다. 속현과 향.부곡 .소 등 특수 행정 구역은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조세나 공물의 징수와 노역 징발 등 실제적인 행정 사무는 향리들이 담당하였다.

향리는 원래 신라 말기의 중소 호족 출신이었는데 집권적 지배 체제의 정비 과정을 통하여 주민과 직접 접촉하는 행정 실무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토착세력으로서 향촌 사회의 지배층이었기 때문에 중앙에서 일시적으로 파견되는 지방관보다 영향력이 컸다.


 

 

고려의 지방 제도

http://myhome.shinbiro.com/%7Ehyun7301/jedo/side.html


성종 때의 유교정치 이념 채택은 지방 행정 조직을 갖추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처음 으로 지방관이 파견됨으로써, 중앙 정부의 통치력이 지방에 미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큰 행정 구역의 획정이 없이, 지방 행정의 중심이 될 열두 고을을 뽑아 12목이라 이름해 지방관이 파견되었기 때문에 완전한 체계를 이룬 것도 아니 었고, 모든 고을에 지방관이 파견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지방 호족 세력의 몰락이라는 측면에서 큰 의미를 가집니 다. 호족은 지방관을 보조하는 향리로 지위가 떨어지고, 새로이 마련된 향리 제도에 편입되어 이제는 역사 주도 세력의 지위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크고 작은 지방 행정 조직의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은 현종 때의 일이었습니다.

위에서 시사하는 바와 같이 고려의 행정 조직의 성격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불안정하다는 것입니다. 우선 큰 행정 구역에 서부터 통일된 체계를 세우지 못하고, 군사 행정 조직과 일반 행정 구역으로 이원화해 있는 점이 눈에 뜨입니다. 큰 행정 구역은 7개로 구분되었는데, 오늘날의 도(道)에 해당되겠지요. 그 중 2개는 군사 행정 구역이고, 5개는 일반 행정 구 역이었습니다.

양계는 국경 지역에 설치된 군사 행정 구역으로 동계와 북계가 있었으며, 지방 장관으로 병마사가 파견되었습니 다. 그 아래의 중간 행정 구역으로는 일반 군·현은 수가 매우 적고,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된 진이 대부분이었으며, 진에 는 진장(鎭將)을 파견했습니다.


5도는 일반 행정 구역으로 안찰사가 파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안찰사는 오늘날의 도지사나 조선의 관찰사(조선시대 에 8도에 파견된 지방장관)와는 달리, 하위의 행정 조직인 주·군·현을 직접 관장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안찰사는 대략 6개월 정도의 짧은 임기이므로 소신껏 지방 행정을 펼칠 수 없었고, 특별 행정 구역인 도호부나 목의 수령에 비해도 품계가 매우 낮아 지방 행정의 전권을 가진 존재로는 볼 수 없습니다. 안찰사는 왕명을 통해 지방 행정을 감찰하는 정도 의 임무를 수행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고려에서는 중앙 정부와 일반 군·현을 연결하는 큰 행정 단위인 5도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는 결론입니다. 이 점도 고려의 지방 제도의 불안정성을 나타내는 일례가 되겠지요.


각 고을에는 지방관을 보좌하는 향리 제도가 마련되어 호장·부호장의 향직이 있었고, 예전의 호족 세력이 여기에 편입되어 지방의 말단 행정을 담당했습니다. 이들은 대체로 지방의 실제 행정을 도맡아 처리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 이유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고을(속현)이 많고, 설사 지방관이 파견되는 경우에도 상피제도(연고가 있는 지역의 지방 관이 될 수 없음)와 임기제도(임기가 있어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지방관에서 물러나야 함)의 원칙이 있어, 지방관이 그 고장의 상세한 실정을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군·현 아래의 말단 행정 구역인 촌에는 토착 세결인 촌장을 통해 지배하고 지방관을 파견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라의 지방 제도와 다름이 없으며, 지방 행정 조직의 일반 원리에도 합치됩니다.


특별 행정 구역으로는 3경과 4도호부·8목이 있었습니다.

3경은 개경(송악:개성)·서경(평양)·동경(경주)을 가리키며, 고려나 그 이전 또는 이후에 수도로 정해진 도시들이어서 풍수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고려 후기에 남경 길지설이 유포되면서 동경 대신 남경 (한양)이 3경에 포함되기도 했습니다. 4도호부·8목은 성종 때 지방관이 처음 파견된 12목을 개편한 행정 구역으로, 특히 4도호부(나중에 5도호부)는 국방의 중심 역할을 맡은 곳이었습니다.

이들 특별 행정 구역은 지방 행정의 중심지로, 지방장관인 안찰사의 지시를 받지 않고 중앙정부와 수령이 직접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들 지역의 수령은 명칭도 일반 주·군·현과 달리 계수관이라 일컬어졌으며, 안찰사보다 훨씬 높은 품계의 관원들이 임명되어 그 중요성과 독자성을 느끼게 합니다.


고려 지방 제도의 불안정성 또는 미숙성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 주는 것은 지방관이 파련되지 않은 고을이 많다는 점입니 다. 지방 행정 조직 운영의 원리는 큰 행정 구역(고려의 5도)과 중간 행정 구역(주·군·현)까지는 지방관을 파견해 다스 림으로써 중앙 집권을 추구하고, 그 아래의 촌은 토착 세력을 통한 간접 지배 방식을 택하는 것입니다.

고려에서도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한다는 원칙은 세웠지만, 실제로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고을의 수가 더 많았습니 다. 주와 군 및 큰 현에는 지방관을 파견해 주현主縣이라 부르고, 주현의 지방관은 주변의 현들을 함께 다스렸습니다. 이 때에 지방관이 없이 이웃 주현을 통해 중앙 정부의 지시를 받는 작은 현을 속현屬縣이라 불렀습니다. 처음에 지방 세력인 호족들의 자치를 허용한 데다가, 지방관의 파견도 종합적인 체제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12목에서부터 차츰 지방관 파견 을 늘려 나가는 방식으로 지방 행정 체제를 정비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짐작됩니다.

신라 이래의 천민 집단인 향·부곡도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비슷한 경우인 소가 고려에 들어와 새로이 형성되었습니다. 향과 부곡은 농업에 종사했고, 소의 주민은 주로 수공업에 종사해 금·은·구리·철 등의 재료와 종이·먹·도자기를 비 롯한 공납품을 만들어 바쳤습니다. 천민집단의 고을은 명칭부터 일반 군·현보다 격이 떨어졌고 그 주민들도 천시되었다 는 점은 신라와 동일합니다. 일반 군현 중에도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곳(속현)이 많은데, 향·부곡·소에는 당연히 지 방관의 파견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려 후기로 갈수록 지방관의 파견이 증가해 속현의 수가 줄어들고, 천민 칩단도 차츰 양인 고을로 개편됨에 따라 중앙 집권 체제가 점차 강화되는 추세를 보였습니다.

향리는 일반 평민이나 천민집단의 조세·공물의 징수와 조역징발의 사무를 관장했으며, 일품군(一品軍)의 장(長)이 되기 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영향력 있는 향리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심관제도(事審官制度)와 기인제도(其人制度)를 실 시하였습니다.


 

 

병마사

http://www.mtcha.com.ne.kr/korea-term/goryo/term68-byungmasa.htm


고려시대에 양계(兩界) 지방에 설치한 지방 행정기구이다.989년(성종 8)에 처음으로 동·서북면에 3품직인 병마사 1명을 설치하여 국경을 다스리게 했지만 이 때는 행정관의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병마사가 군사적·민사적 기능을 가진 지방관으로 정착하는 것은 1029년(현종 20)이었다. 관직은 병마사(3품) 1명, 병마지사(兵馬知事:3품) 1명, 병마부사(兵馬副使:4품) 2명, 병마판관(兵馬判官:5~6품) 3명, 병마녹사(兵馬錄事;7~8품) 4명을 두었다. 그러나 병마사·병마지사·병마부사 등은 단일 관청에 설치된 상하 관직이 아니라 각기 서로 다른 지역에 설치된 것으로 자기 지역에서 장관의 지위를 누리기는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정식 병마사가 아닌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병마사로 통칭되었다.

  다만 병마사는 6부상서, 병마지사는 경(卿), 병마부사는 시랑(侍郞)·소경(少卿) 등이 주로 임명되었고, 병마사 가운데서도 동북면보다 서북면이 지위가 높은 경우가 많았다. 병마사는 6개월을 임기로 춘하번(春夏番)과 추동번(秋冬番)으로 구분되었고, 임명 시기는 대체로 1~2월과 7~8월이었다. 병마녹사도 임기가 6개월인데 서북 지방에서는 업무가 많아지면서 7명으로 늘렸다가 1039년(정종 5)에 정역(停役)의 폐단이 생기자 1명으로 줄이기도 하였다. 무신난 이후에는 무신들도 병마사에 임명되었고, 또한 양계의 방수장군(防戍將軍)들은 병마판관을 겸직했는데 1198년(신종 1)에는 병마부사까지 겸직하게 하였다. 병마사가 있는 곳에는 영(營)이 있고 아래에 영리(營吏)가 있었는데 주로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와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등에 설치하였다.


  그 뒤에 몽골의 침략을 받자 동북면병마사는 처음에 저도(猪道)에 두었다가 1258년(고종 45) 죽도(竹道)로 옮겼고, 서북면병마사는 대동강 유역의 석도(席道)에 두었다가 1269년(원종 10)에 가도(道)로 옮겼다. 그러나 동북면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서북면에 동녕부(東寧府)가 설치되어 양계가 그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1270년 이후에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다만 명주(冥州)가 쌍성총관부 밖에 있었기 때문에 동계안집사(東界安集使)를 파견하였는데, 1290년(충렬왕 16) 동녕부가 없어지면서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를 파견하여 불완전한 형태나마 양계가 복구되었다.


  충선왕 때 서북면에 평양도존무사(平壤道存撫使), 동북면에 강릉도존무사(江陵道存撫使)를 두었고, 1356년(공민왕 5)에 쌍성총관부를 회복하면서 강릉도존무사가 삭방도채방사(朔方道採訪使)를 겸직하게 하여 이 지역을 담당시켰다. 공민왕 말년에는 양계에 도순문사(都巡問使)를 두었으며, 1390년(공양왕 2)에는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를 설치하여 남쪽의 5도와 같은 민사적인 지방관을 두었다. 병마사는 민간의 이해를 처리하고, 수령의 현부(賢否)를 가리며, 억울한 일을 심사하고, 농상(農桑)을 장려하고, 군사를 무휼하고, 호강(豪强)을 막으며, 세공을 징수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또한 양계의 주·진(州鎭)을 총괄하고 수령을 감독했는데, 남쪽 5도(道)의 경우 원칙적으로 중앙에서 주·현으로 직첩(直牒)하면서도 계수관(界首官)을 중간기구로 활용했던 것에 반하여, 양계는 비록 2개의 도호부가 설치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도 다른 주·진과 마찬가지로 병마사의 직접 통제를 받았다는 데 특징이 있다.


 

 

속현

http://home.megapass.co.kr/%7Ehsg1000/a210f.htm

http://kr.dic.yahoo.com/search/enc/result.html?pk=15045800

http://tutork.com/ss4-15.htm



전한서(前漢書) 지리지(地里志)에 의하면 나라군(樂浪郡)의 속현(屬縣)으로 25현이 있었다.


전한(前漢)은 B.C 108년에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난하 서쪽에 나라군(樂浪郡)을 설치하였고, 다음해 B.C 107년에 요하(遼河) 동쪽 고구려 지역을 점령하여 요하 동쪽에도 나라군(樂浪郡)을 설치하였으며, 이어서 단단대령(單單大嶺) 동쪽 지방을 점령하여 단단대령 동쪽에 나라군(樂浪郡) 동부도위(東部都尉)를 설치하였다.


그후 B.C 87년에 동명(東明)의 공격으로 전에 위만조선 지역에 설치되어 있던 진번군과 임둔군이 궤멸되자 B.C 82년에 진번군과 임둔군을 폐지하고 진번군이 담당하던 행정을 나라군(樂浪郡)에 합쳤다. 그후 B.C 75년에 난하 서쪽에서부터 단단대령(單單大嶺) 사이에 설치되어 있던 나라군(樂浪郡)의 속현(屬縣)을 대부분 폐지하고(단, 태자하 이남에 설치되어 있던 나라군 속현 제외), 대릉하하류에서부터 단단대령 사이에는 전통 중국군현인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고, 난하 서쪽에서부터 대릉하하류 사이에는 전통 중국군현인 요서군(遼西郡)과 우북평군(右北平郡)을 설치하였다.


전한 때 폐지된 나라군(樂浪郡)의 속현(屬縣)은 후한 때 한반도에 다시 설치되었다.



「대무신왕(大武神王) 27년(A.D 44년) 가을 9월 후한(後漢)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 나라(樂浪)를 쳐서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秋九月 漢光武帝 遣兵渡海 伐樂浪取 其地爲郡縣 薩水已南屬漢」三國史記 高句麗本紀


「건무 20년 한 염사인 소마시 등이 나라군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광무제는 소마시를 한 염사읍군에 봉하고 나라군에 속하게 하니 사시절 조공하였다. 建武二十年 韓人廉斯人蘇馬諟等 詣樂浪貢獻 光武封蘇馬諟爲漢廉斯邑君 使屬樂浪郡 四時朝貢」後漢書 韓傳



위 문구는 후한(後漢) 건무(建武) 20년(A.D 44년)에 광무제(光武帝)가 고구려를 남쪽 방면에서 포위하기 위하여 군사를 보내어 살수(薩水:청천강) 이남 지방을 점령하여 그 곳을 나라군(樂浪郡)에 속하게 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무렵 청천강 이남 지방에 설치된 나라군의 속현은 조선(朝鮮), 수성(遂城), 둔유(屯有), 혼미(渾彌), 루방(鏤方), 사망(駟望) 등이다. 이 현들의 명칭은 전한(前漢) 때 폐지된 나라군(樂浪郡)의 속현 이름으로, 이 현들은 설치 몇년 후 곧 소멸되었다. 일부 사학자는 전한(前漢) 때 폐지된 나라군(樂浪郡)의 속현(屬縣)이 후한(後漢) 때 한반도에 다시 설치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여 나라군(樂浪郡)이 처음부터 한반도에 설치되었다고 주장하였다.



2). 통치방법



-현령(縣令) 등 중급관리만 한나라에서 파견하고 읍군(邑君), 읍장(邑長) 등 하급관리는 토착거수(土着渠帥)들로 임명하여 토착거수(土着渠帥)들에게 제한적인 자치를 허용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태조대왕기(太祖大王紀) 52년(A.D 146년)조를 보면, 태조대왕이 요동군(遼東郡)을 공격하였을 때 대방령(帶方令)과 나라태수(樂浪太守)의 처자(妻子)들이 고구려 군사에게 붙잡히거나 죽임을 당했다. 이를 보면 나라태수(樂浪太守)는 요녕지방에 있었고, 청천강 이남 지방에 있지 않았다. 즉 후한은 청천강 이남 나라군(樂浪郡)의 속현(屬縣)에 중급관리인 현령(縣令) 정도만 파견하고 고위관리인 태수(太守)는 파견하지 않았으며, 하급관리인 읍군(邑君), 읍장(邑長)은 토착거수들로 임명하였다.


-군사기구를 설치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기재된 "漢光武帝遣兵渡海伐樂浪取其地爲郡縣" 문구에 의하면 후한(後漢) 광무제는 고구려에 멸망한 최리 나라(樂浪) 유민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군사를 보내어 청천강 이남 지방을 점령하여 나라군(樂浪郡)의 속현(屬縣)을 설치하였다. 후한은 나라군(樂浪郡)의 속현(屬縣)을 설치한 후 청천강 이남 지방을 방위할 군사기구를 설치하지 아니하고, 본국에서 건너온 군사들로 나라군(樂浪郡)의 속현(屬縣)을 방위하다가 고구려의 대공세가 시작된 A.D 49년 이전에 본국에서 건너온 군사들을 모두 철수시킨 것으로 보인다.



3). 소멸



후한(後漢)이 A.D 44년에 청천강 이남 지방에 나라군(樂浪郡)의 속현(屬縣)을 설치한 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잠우락부(蠶友落部)의 대가(大加) 대승(戴升)이 A.D 47년에 1만여 구(口)를 이끌고 나라(樂浪)로 가서 한(漢)에 항복하였다는 문구 외에는 동천왕 20년(A.D 246년)까지 나라(樂浪)에 관한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를 보면 후한이 청천강 이남 지방에 설치한 나라군(樂浪郡)의 속현은 설치 몇 년 후 곧 소멸되었다.


일부 사학자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기 29년(A.D 246년)조에 나라(樂浪)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청천강 이남 지방에 설치된 나라군(樂浪郡)의 속현은 그후에도 상당히 오랫동안 존속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천왕기 29년(A.D 246년)조에 나오는 나라(樂浪)는 위(魏)나라가 A.D 238년에 대방군의 북쪽에 설치한 나라군(樂浪郡)이지 A.D 44년에 후한(後漢)이 청천강 이남 지방에 설치한 나라군(樂浪郡)의 속현(屬縣)이 아니다.


후한(後漢)이 청천강 이남 지방에 설치한 나라군(樂浪郡)의 속현은 왜 소멸되었을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고구려는 A.D 49년에 후한(後漢)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등지를 점령한 후 이를 지키기 위하여 A.D 55년에 요서(遼西)에 10성을 쌓는 등 국세가 매우 강성해져 있었다. 이때 나라군(樂浪郡) 속현(屬縣)의 읍군(邑君), 읍장(邑長)으로 있던 토착거수(土着渠帥)들이 고구려의 힘이 강성해지자 시류(時流)에 따라 고구려에 복속하고 나라군의 속현 현령(縣令) 말을 듣지 않으므로써, 청천강 이남 지방에 있던 나라군(樂浪郡) 속현(屬縣)은 저절로 소멸되었다.


그후 A.D 204년에 후한(後漢)은 고구려를 남쪽 방면에서 다시 포위하기 위하여 둔유현(屯有縣) 이남 황지(荒地) 황해도 지방을 점령하여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고 그곳에 함자(含資), 대방(帶方), 해명(海冥), 열구(列口), 장잠(長岑), 제해(提奚), 낙도(樂都) 등 7성(城)을 두었다. 이 성(城) 명칭은 낙도를 제외하고는 전한(前漢) 때 폐지된 나라군(樂浪郡)의 속현(屬縣) 이름이다.



「건안중에 공손강은 둔유현 이남 황지에 대방군을 두고 공손모와 장폐 등을 보내어 유민들을 수집하고, 군사를 일으켜 한과 예를 정벌하니 옛 백성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이후 왜와 한 (관련 업무는) 대방에 속하게 되었다.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 爲帶方郡 遣公孫模張敞等 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是後 倭韓遂屬帶方」三國志



그뒤A.D 238년경에 위나라는 공손씨로부터 대방군을 접수한 다음 그 북쪽에 나라군(樂浪郡)을 설치하였다. 위나라가 대방군 북쪽에 나라군을 설치한 것은 후한 광무제 때 청천강 이남 지방에 설치한 나라군(樂浪郡)의 속현이 A.D 49년 고구려의 대공세 때 모두 소멸되고 없었기 때문이다.



「景初中(A.D 237-239년)에 명제(明帝)는 비밀리에 대방태수(帶方太守) 유흔(劉昕)과 나라태수(樂浪太守) 선우사(鮮于嗣)를 파견하여 한국(韓國)의 여러 신지(臣智)들에게 읍군(邑君) 인수(印綬)를 주고 그 아래에는 읍장(邑長) 인수를 주었다. 그들의 풍속은 의책(衣幘을 매우 좋아해서 하호(下戶)까지 가짜 인수, 의책을 가지고 있었고, 1,000여 인이 군(郡)으로 찾아와 조알(朝謁)하였다. 부종사(副從事) 오림(吳林)이 한국은 본래 나라군(樂浪郡)이 통치하였으므로 진한(辰韓) 8국을 분할해서 나라군(樂浪郡)으로 한다고 하니 통역이 잘못되어 한의 신지들이 격분하여 대방군(帶方郡)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대방태수 궁준(宮遵)과 나라태수 유무(劉茂)가 군사들을 동원하여 이들을 정벌하다가 궁준이 전사하였다. 2군은 한을 멸망시켰다. 景初中 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 樂浪太守鮮於嗣越海定二郡 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 其次與邑長 其俗好衣幘 下戶詣郡朝謁 皆仮衣幘 自服印綬衣幘千有餘人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 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三國志 魏志 韓傳



이때 설치된 위나라의 나라군 속현은 후한 광무제가 청천강 이남 지방에 설치한 나라군의 속현과 거의 같은 현으로 추정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전한(前漢) 때 폐지된 나라군(樂浪郡)의 속현(屬縣)은 후한(後漢) 때 청천강 이남 평안도 지방이나 황해도 지방에 다시 설치되었다.


 

향리

http://cafe.naver.com/history7.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302

1. 고려 사회에서 향리는 사실상 지방 사회를 지배했던 호족과 같습니다. 조선 시대의 족보, [동국여지승람] 등의 자료를 보면 고려시대의 향리와 문벌귀족은 성씨상 같습니다. 지방에서는 향리로, 중앙에 진출하면 문벌귀족으로 행세했다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고려는 행정력이 약해서 모든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했습니다.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한 지역의 행정은 향리가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지방관이 파견된 지역이라 해도 향리로 대표되는 지방 세력이 강력했기 때문에 향리의 협조 없이는 어떤 업무도 처리되지 못 할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2. 이와 같은  고려시대 향리의 지위는 조선시대에 바뀌게 되는데, 이성무선생은 향리는 행정 사역인으로 격하되었다고 주장합니다.(1970) 모든 군현에 권한이 강화된 지방관이 파견되고, [경국대전]의 원악향리처벌규정 등은 향리의 지위가 약해졌음을 의미합니다. 또 향리 출신은 과거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게 제한한 것도 향리의 위상이 고려시대보다 약화되었음을 의미합니다.



3.이러한 설명은 현재 조선시대 사학계의 정설인데,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먼저 고려시대에 그렇게 강력하던 향리집단이 조선사회로 넘어오자 마자 수령에게 꼼짝 못하는 신세로 전락할 수 있었는가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왕조가 바뀌었다 해도 조선 초기에 중앙에서 지방 세력을 완전히 압도할 정도로 우월하지는 않았습니다. 향리의 약화가 역사의 대세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속도는 생각만큼 빠르지 않다는 지적입니다. 이러한 논리에서 조선 전기는 상식으로 알고 있는 조선사회와는 달리, 오히려 고려적인 분위기가 훨씬 강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이수건, 1983)  예를 들어, 조선시대 지방제도의 특징인 견아상입지(犬牙相入地), 월경지(越境地)는 고려사회에서 유래된 것이고, 이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존재했습니다. [동국여지승람] 의 연혁(沿革) 부분을 보면, 이러한 흔적이 드러나는데, 결국 조선이 건국했다해도, 고려시대의 지방 제도는 아직 그대로 였다는 주장입니다.


 이렇게 제도적으로 보면, 조선초기부터 향리의 역할이 축소되었다는 주장은 모순이라는 겁니다.


 한편, 고려시대의 불교행사인 팔관회는 지방 호족 세력이 주도했는데, 이들이 주도하던 문화행사는 조선시대에도 명맥을 유지합니다. 고려의 호족이 유교화해서 조선의 사대부로 완전히 변신했다면 이와 같은 비유교적 문화행사를 주도한 집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 부분에 착안해서, 향리가 이를 주도했다는 주장이 나오게 됩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지방의 연희 문화가 향리세력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이러한 연희를 주도할만큼 향리들의 세력이 충분히 강력했다는 것입니다. 조선 전기 지방사회에서 연희문화를 주도한 것이 향리이듯, 조선 후기의 문화행사도 향리가 주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4. 현재 남아있는 탈춤 연희의 대사들을 보면 지독할 정도로 양반에 대한 혐오감을 감추지 않습니다. 만약 양반이 그 내용을 안다면 광대들을 그냥 두지 않을 정도입니다. 양반에게 적대적인 문화행사가 개최되는데, 이들을 보호해줄 권력 집단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광대들을 보호하면서, 강력한 양반과 상대할만한 권력집단이라면 결국 향리 밖에는 없습니다. 향리들 또한 양반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으며, 지방 사회에서의 영향력 또한 뒤지지 않게 갖고 있습니다.



5.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과연 향리들이 고려시대에 비해 조선시대에 약화되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러했을지 모르지만, 지방마다, 시대에 따라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는 이미 제시했듯이 제도사의 변화라는 측면과 지방 사회에서 연희문화 등의 부분이 해당됩니다.



참고문헌:


이성무, [조선의 향리]{한국사연구}, 1970.


이수건, [한국중세사회사연구], 일조각 1998.


이훈상, [조선 후기의 향리] 일조각, 1990.


이태진 외 [한국사회발전사론] 한림과학원 총서, 일조각, 1992.


 

3) 군역제도와 군사조직


 

2군6위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11&dir_id=110104&eid=9bXJQYD95YsfvQ2TrvpW2QB9KpE5XJqN

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17a2947a


2군 6위는 고려시대 중앙군 군사제도를 의미하며

군현은 지방행정조직을 의미합니다


 

군사제도

고려 중앙군의 대표적인 편성은 2군6위(二軍六衛)였다.

6위는 좌우(左右) 신호(神虎) 흥위(興成) 금오(金吾) 천우(天牛) 감문(監門)을 말하는 것으로 각기 국도(國都)와 궁성의 방위 및 경찰 의장을 담당하였으며 때로는 변방에 투입되어 그 임무에 임하기도 하였다.

2군은 국왕의 친위군으로 6위(六衛)보다 상위에 잇는 군이었다.


 

군,현

고려시대에는 중앙의 관리가 파견된 행정구역을 의미합니다.


 

보한집

http://pinggoo.com.ne.kr/%BC%F6%C7%CA-%BA%B8%C7%D1%C1%FD.htm


문(文)이라는 것은 정도(正道)를 밟아 나가는 문(門)이기에 법도에 맞지 않는 말은 쓰지 않는다. 그러나 기운을 돋우고 말을 생동하게 해서 듣는 사람을 감동시키고자 혹 험괴(險怪)한 것도 말하게 된다. 하물며 시를 짓는 데 있어서랴. 시는 비(比), 흥(興)과 풍유(諷諭)를 근본으로 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기궤(奇詭)에 우탁(寓託)한 뒤에야 그 기운이 씩씩하고 그 뜻이 깊으며 그 말이 뚜렷하여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깨닫게 하고 깊고 미묘한 뜻을 드러내어 마침내는 올바른 데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 남의 것을 표절(剽竊)하든가 모방하여 지나치게 떠벌리는 것은 선비는 진실로 하지 않는 것이다.


- 좋은 문장의 요건과 시의 본질



 비록 시인들에게는 탁련 사격(琢鍊四格)이 있으나 그 중에서 취하는 것은 탁구(琢句)와 연의(鍊意) 뿐이다. 지금의 후진(後進)들은 성률(聲律)과 장구(章句)만 숭상하여 글자를 다듬을[琢字] 때는 반드시 새롭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그 말이 생소(生疎)해지고, 대구(對句)를 다듬는[鍊對] 데는 반드시 유사한 말로써 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 뜻이 졸렬(拙劣)해져서 웅걸(雄傑)하고 노성(老成)한 기풍(氣風)이 이로 말미암아 상실되는 것이다.


- 형식적 시에 대한 비판


- 서문에서




[어구 풀이]


   정도(正道) : 올바른 길. 바른 도리


   험괴(險怪) : 험하고 괴상함.


   비(比) : '시경(詩經)' 문체의 하나로서 비슷한 것을 이끌어다가 견주어 표현하는 비유법.


   흥(興) : '시경' 문체의 하나로 먼저 다른 것을 서술하고 거기서 연상하여 본론을 서술하는 은유법.


   풍유(諷諭) : 원관념은 숨기고 보조 관념만 드러내어 그 숨은 뜻을 넌지시 나타내는 표현 방법.


   기궤(奇詭) : 이상야릇함.


   우탁(禹託) : 함께 할 것을 부탁함.


   표절(剽竊) : 시나 글 따위를 지을 때, 남의 것을 따다 자기 것인양 씀.


   성률(聲律) : 음악의 가락, 한자의 발음규칙.


   장구(章句) : 가곡의 노랫말인 시조의 구절을 나타내는 말.


   졸렬(拙劣) : 잔졸하고 용렬함.


   웅걸(雄傑) : 영웅다운 호걸.


   노성(老聲) : 글이나 솜씨 따위가 착실하고 세련됨.


   시는 ∼ 근본으로 한다


       : 이것은 '시경' 문체에 해당하는 것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눈과도 관련된다. '비'라는 것은 비슷한 것을 견주어 표현하는 비유법이고, '흥'은 어떠한 것을 먼저 서술한 다음 거기에서 연상하여 본론을 서술하는 은유법이며, '풍유'는 풍자하여 비유하는 법을 뜻한다.


   비록 시인들에게는 ∼ 뿐이다


       : 시인들에게는 글을 다듬는 네 가지 방식이 있다. 탁구(琢句)·연의(鍊意)·탁자(琢字)·연대(鍊對)가 그것인데, 구절을 다듬고 뜻을 표현하는 탁구와 연의가 주요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구절이다.


   지금의 후진들(後進)은 ∼ 것이다


       : 문학의 형식적인 것만을 중시하는 현재의 문학가들을 비판하는 어조를 담고 있다. 이로 보아서 이 길의 작자는 형식보다 내용을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핵심 정리]


   연대 : 고려 고종


   작자 : 최자


   형식 : 비평적 수필


   성격 : 교훈적


   구성 : 문(文)을 문(門)에 비유하면서, 좋은 시와 문장의 조건을 제시하는 구성


   표현 : 설명적·비유적


   제재 : 문(文)


   주제 : 문학은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하다. 문은 정도를 밟아 나가는 문


   줄거리 : 시의 외적인 형식만을 추구하게 되면 시가 지닌 본질을 상실하게 되고, 문(文)은 정도(正道)를 밟아 나가는 문(門)이고,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비판적 해설을 한 비평 문학이다. 문학은 진리로 나아가게 하는 문이며, 도리에 어긋나는 말은 무가치하다는 것으로 문학의 본질을 규정하고 있다.




[감상의 길잡이]


최자는 '보한집' 서문에서 문학의 본질을 규정한다. 문학은 진리로 나아가게 하는 문이며, 도리에 어긋나는 말은 가치를 지닐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원칙론에만 매달리지 않고 문학의 실상에도 주의를 기울이는데, 독자의 감동을 유발하기 위해 수식을 하고 기발한 착상에 의지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그는 문학적 표현이 미묘한 뜻을 드러내어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하는 데 본뜻이 있는 것이므로 단지 수식을 위한 수식, 남을 모방하여 꾸미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문(文)은 도(道)로 나아가는 문(門)이라고 파악한 최자의 인식은 현대 문학 이론의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인식이다. 사물의 실재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정한 차례를 거쳐야 하는데 그것은 곧 학문에서 방법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에서도 사물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똑같이 일정한 방법이 필요하며 모든 문학 작품도 그 방법을 획득할 때만이 진실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방법이 집단적인 형태를 띨 때 문학의 장르(갈래)를 형성하게 된다. 최자는 이러한 인식을 '문이 도로 나가는 문'이라고 간명히 표현하고 있다.


 

 

4) 관리등용제도

 

 

고려의 과거제도

http://myhome.shinbiro.com/%7Ehyun7301/jedo/elevation.html

http://www.mtcha.com.ne.kr/korea-term/goryo/term125-jesulgoa.htm

http://www.mtcha.com.ne.kr/korea-term/goryo/term61-myunggyunggoa.htm


과거에는 문신을 선발하기 위한 제술과와 명경과가 있었고, 기술관 선발을 위한 잡과가 있었습니다. 그밖에 승과도 마련되어 승려를 등용했지만, 관리 선발과는 관련이 없으므로 엄격한 의미에서의 과거라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

제술과는 시·부·송·책의 한문학과 시무책(정책)으로 시험하는 최고 권위의 시험이었으며, 명경과는 유교 경전으로 시험했습니다. 잡과는 의학·천문학·음양 지리(풍수설)·율학·서학·산학 등 유학 이외의 기술학으로 시험했습니다. 고려시대의 과거 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무과가 없다는 점입니다. 무신은 정상적인 선발 방식으로 등용되는 것이 아니라 문과 출신자 중에서 전환되든가 용맹함이 있어 특채되든가 했으므로, 문신으로부터 멸시받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통 문신과 무신을 합해 양반이라고 하는데, 고려에서는 양반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지 못한 이유도 무신이 문신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았으므로 같이 불러 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무과는 예종 때 잠깐 실시되었으나, 문신들의 반대에 부딪쳐 폐지되었다가 고려 멸망 직전인 공양왕 때에 비로소 정식으로 실시되었습니다.


과거 제도는 관리를 채용하기 위해서 실시된 것이지만,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해서 모두가 관리로 임명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합격 인원에 비해서 관직의 숫자가 적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과거의 성적과 출신 문벌이 관직 임용에 크게 작용하였으며 귀족 가문의 급제자가 좋은 관직을 보임받고 승진하는 데에도 유리하였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습니다. 과거제 역시 귀족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운용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음서

http://cgi.chol.com/~edusong/technote/read.cgi?board=Allhistory&x_number=1027349647&r_search=%C0%BD%BC%AD&nnew=1

http://211.46.254.1/2003student/sbg/menu3_6.htm

http://corea1.hihome.com/polity/j1_5.html

http://mtcha.com.ne.kr/korea-term/goryo/term110-umsu.htm

http://myhome.shinbiro.com/%7Ehyun7301/jedo/auto.html

http://chang256.new21.net/board/reply.php?db=536&no=600&page=1



문음(文蔭)·남행(南行)·백골남행(白骨南行)·음사(蔭仕)·음직(蔭職)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관리들을 선발하는 제도로 과거제도가 있었으나, 일단 관인층을 형성한 자들은 그들의 지위를 자손대대로 계승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부분적으로나마 관직을 세습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였다.


997년(고려 목종 즉위)에 문무관 5품 이상관의 아들에게 음직을 주도록 하는 음서제가 최초로 생겨났으며, 1039년(문종 3)에는 전시(田柴)를 지급하는 공음전(功蔭田)의 제도가 마련되면서 고려의 문벌귀족사회를 형성하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음서의 범위는 고려시대에는 5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관리의 자제를 그 대상으로 하였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면 그 범위를 축소시키고 있다. 즉 《경국대전》의 이전(吏典) 〈음자제조(蔭子弟條)〉에 의하면 음직제수의 범위를 공신이나 2품 이상관의 자(子)·손(孫)·서(壻)·제(弟)·질(姪), 실직(實職) 3품관의 자손으로 제한하여, 실력에 의한 선발 시험인 과거의 비중을 높였다. 그러나 음서는 혈통을 중시하는 신분제사회의 속성을 띠면서, 실력을 중시하는 관료제사회의 속성을 대표하는 과거와 함께 조선 양반관료사회를 형성하는 하나의 축으로 기능하였다.


음서에 의해 선발된 관리들을 음관이라고 하는데, 원칙적으로 장자(長子)만이 받을 수 있었으나, 장자가 유고인 경우에는 장손이나 차자가 감등하여 음직을 받을 수 있었다. 음관을 제수받는 연령은 만 18세 이상으로 규정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15세를 전후하여 관직에 등용되었으며, 부와 조부의 정치적 배경에 따라 승진 속도에 차이를 보이기도 하였다. 음서제도는 혈통을 중시하는 문벌주의(門閥主義)가 여전히 명맥을 유지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음서제의 범위와 역할은 고려와 조선사회의 성격을 비교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2-4. 문벌귀족 사회의 성립과 동요


1) 문벌귀족 사회의 성립

 

 

신라6두품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11&dir_id=110101&eid=KTlgvOIDof2Vs0mOHVEetaPzu4NwXdnu


신라6두품은요

두품을 설명하려면 신라의 골품제도부터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신라의 골품제도는 성골과 진골, 6두품 이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6두품이 받는 차별은 대단했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6두품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신라의 17관등 중에서

6등급인 아찬까지의 벼슬만 할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성골, 후에 진골은 왕위에도 오를 수 있고 1등급 이벌찬까지의 승진

이 가능했기 때문에 6두품은 불만이 컸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불만을 밖으로 표출해 내지 못하고

정치와는 거리가 있는 불교나, 교육 방면에 종사하게 됩니다..


 

공음전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536&no=19

고려시대 5품 이상의 관리에게 지급한 토지.


977년(경종 2)에 지급하였던 훈전(勳田)에서 비롯되었으며, 1049년(문종 3)에 완성되어 실시되었다. 양반 전시와는 달리 자손에게 세습할 수 있는 토지로 음서제(蔭敍制)와 함께 고려 귀족 사회의 성격을 대표하고 있다. 공음전을 받은 자손으로 특별히 모반·대역죄를 짓거나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등의 죄를 제외하고는 상속받을 수 있었다.


일부에서는 공음전이 5품 이상의 관리만이 아니라 모든 관리를 대상으로 하여 그 가운데 특별히 공훈을 세운 사람에게 지급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측근세력

http://210.96.65.4/history/2-6.htm


 

2) 이자겸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


 

 

이자겸

http://myhome.shinbiro.com/%7Ehyun7301/inmul/moon/14.html

http://mtcha.com.ne.kr/koreaman/goryo/man94-ijagyum.htm



고려시대의 문신으로서 본관은 인주(仁州 = 경원(慶源): 지금의 仁川)이다. 할아버지는 중서령(中書令) 자연(子淵)이며, 아버지는 경원백(慶源伯) 호(顥)이다. 어머니는 평장사(平章事) 김정준(金廷俊)의 딸이고, 처는 문하시중 최사추(崔思諏)의 딸이다. 경원이씨는 이허겸(李許謙)의 외손녀 3명이 현종의 비(妃)가 되면서 세력을 얻기 시작했으며 이자겸의 할아버지인 이자연 때에 와서 외척가문으로서의 지위를 굳히고 문벌귀족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바탕으로 이자겸은 음보(蔭補)로 합문지후(閤門祗侯)가 되고, 1108년(예종 3) 둘째 딸이 예종의 비가 되자 익성공신(翼聖功臣)에 녹훈되고, 소성군 개국백(邵城郡開國伯)에 봉해졌다. 즉, 예종은 1108년(예종 3) 급사중(給事中)이었던 이자겸의 둘째 딸을 비로 맞아들여 연덕궁주(延德宮主)라고 했다. 연덕궁주는 1109년에 원자(元子:뒤의 인종)를 낳았으며, 1114년 12월에는 왕비가 되었다. 이자겸은 왕권의 안정을 위해 외척세력의 외호(外護)를 필요로 한 예종에 의해 선택되어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참지정사 상서좌복야 주국(參知政事尙書左僕射柱國)을 거쳐, 개부의동삼사 수사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司守司徒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고 수태위(守太尉)와 익성공신호(翼聖功臣號)가 주어졌으며, 이어 동덕추성좌리공신 소성군개국백 식읍이천삼백호 식실봉삼백호(同德推誠佐理功臣邵城郡開國伯食邑二千三百戶食實封三百戶)가 제수되었다.


  1122년 예종이 죽자 왕위를 탐내던 왕제들을 물리치고 연소한 태자(太子: 후에 仁宗)를 즉위하게 하여 양절익명공신 중서령서경유수(中書令西京留守)가 되고 부(府)를 설치하여 요속(僚屬)을 두게 되었다. 즉, 새 왕 즉위 후 협모안사공신 수태사 중서령 소성후 식읍오천호 식실봉칠백호(協謀安社功臣守太師中書令邵城侯食邑五千戶食實封七百戶)를 책봉받고 권력을 장악한 이자겸은 반대파 제거에 나섰다. 그해 12월 예종의 동생인 대방공(帶方公) 보()가 한안인(韓安仁) 등과 더불어 불궤(不軌)를 꾀했다고 하여 일당 50여 명과 함께 살해·유배되었고, 1124년(인종 2) 2월에는 최홍재(崔弘宰)를 유배보냈다. 세력을 굳힌 이자겸은 양절익명공신 중서령 영문하상서도성사 판이병부 서경유수사 조선국공 식읍팔천호 식실봉이천호(亮節翼命功臣中書令領門下尙書都省事判吏兵部西京留守事朝鮮國公食邑八千戶食實封二千戶)를 책봉받고, 숭덕부(崇德府)를 열어 요속(僚屬)을 두었으며, 궁을 의친궁(懿親宮)이라고 했다. 나아가 자제와 친족을 요직에 앉히고, 아들인 승려 의장(義莊)을 수좌(首座)로 삼아 불교세력과 유대를 강화했으며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비로 들여보냈다. 이와 같은 여러 조치를 통해 세력기반을 굳힌 이자겸은 남의 토지를 강탈하고 공공연히 뇌물을 받아, 그의 집에는 썩는 고기만도 항상 수만 근이나 되었다고 한다. 또한 사사로이 숭덕부의 주부(注簿) 소세청(蘇世淸)을 송나라에 보내 표를 올리고 토산물을 바치면서 지군국사(知軍國事)를 자칭했으며 이 직함을 왕이 직접 내려주도록 강청하기도 했다. 지군국사는 나라의 모든 일을 맡고 있다는 뜻으로 신하로서는 가질 수 없는 직함이었다. 이러한 이자겸의 전횡은 예종대 왕권강화책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유학을 바탕으로 중앙에 진출한 지방 신진관료들의 성장이 개경 문벌세력에 의하여 저지됨으로써 지배층 내부의 충돌이라는 문제도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자겸의 전횡을 꺼리게 된 인종과 신진세력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이자겸의 제거 계획이 추진되었다.


  1126년 2월 내시 김찬(金粲)과 안보린(安甫鱗)은 동지추밀원사 지녹연(智祿延)과 공모하여 왕에게 아뢰고, 상장군 최탁(崔卓)과 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 장군 고석(高碩)과 함께 이자겸과 그의 일당인 척준경(拓俊京;그는 당대의 실권자 이자겸(李資謙)의 아들인 지원(之元)의 장인 )을 제거하려는 거사에 나섰다. 약속된 날 밤 그들은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로 들어가, 척준경의 동생인 병부상서 척준신(拓俊臣)과 아들인 내시 척순(拓純) 등을 살해했다. 이를 알게 된 이자겸과 척준경은 무리를 이끌고 가서 궁성을 포위한 뒤 불을 지르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이에 놀란 왕은 두려워하여 이자겸에게 선위(禪位)하고자 했으나, 이자겸은 양부(兩府)의 의논을 겁내었으며 더구나 재종형제간인 이수(李壽)가 반대하여 저지되었다.


  그뒤 이자겸은 자신의 집인 중흥택(中興宅)의 서원(西院)에 왕을 연금하고 국사를 마음대로 처리했다. 그는 이씨(李氏)가 왕이 된다는 '십팔자도참설'(十八子圖讖說)을 믿고 왕위를 노려서 여러 번 왕을 독살하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자신의 넷째 딸인 왕비의 기지로 왕은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왕의 밀명을 받은 내의(內醫) 최사전(崔思全)이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를 떼어놓는 데 성공하여, 1126년 5월 척준경이 이자겸 일파를 제거했다. 이자겸은 그해 12월 유배지인 영광(靈光)에서 죽었다. 이후 척준경은 잠시 권력을 쥐고 발호했지만, 1127년 3월에 우정언(右正言) 정지상(鄭知常) 등의 탄핵을 받아 귀양가서 죽었다


 

이자겸의 난

http://cgi.chol.com/~edusong/technote/read.cgi?board=Allhistory&x_number=1027693139&r_search=%C0%CC%C0%DA%B0%E2&nnew=1

http://www.chungdong.or.kr/middroom/syshim/source/lee.ppt

  



고려 인종 때 이자겸이 왕위를 찬탈하려던 반란. 경원이씨(慶源李氏;仁州李氏)는 7대 80여 년 동안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어 권세를 누렸다.


이자겸은 딸을 예종의 비(妃)로 들여보내고 외손자인 대자 해(楷)를 인종으로 옹립함으로써 그의 확고한 세력기반을 다졌다.

실권을 잡은 이자겸은 자신의 세력에 가담하지 않는 이를 중상하여 제거하고 대신 그의 일족과 추종자들을 요직에 배치했으며, 벼슬을 팔아 세력을 확대했다.


권력의 남용으로 그들의 횡포가 심해지자, 하급관료 및 무장들인 김찬(金粲)·안보린(安甫鱗)·지녹연(智祿延)등이 주축이 되어 이자겸을 제거하려 했으나, 이자겸이 먼저 척준경(拓俊京)과 군대를 이끌고 침입하여 궁궐을 불사르고 인종을 독살하려고까지 하였는데, 이것이 이자겸의 난이다.

이에 이자겸과 척준경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고 횡포가 더욱 심해졌다.


인종은 척준경이 이자겸과 반목이생긴 틈을 다서 척준경을 회유하였고, 결국 척준경은 김향(金珦)과 함께 거사를 일으켜 이자겸을 제거하였다.


이 난으로 경원이씨의 외척세력은 몰락하고 왕정이 복고되었다



 

척준경

http://myhome.shinbiro.com/%7Ehyun7301/inmul/moo/12.html

拓俊京 ?∼1144(?∼인종 22) 고려시대 무신. 곡산척씨(谷山拓氏)의 시조이다. 계림공(鷄林公;숙종) 종자로 있다가 추밀원별가(樞密院別駕)가 되었다. 1104년(숙종 9) 임간(林幹)을 따라 동여진(東女眞) 정벌에 나서 공을 세워 천우위록사참군사(千牛衛錄事參軍事)가 되었고, 1119년 동북면병마사, 22년 위위경직문하성(衛尉卿直門下省), 23년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 이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가 되었다. 26년 김찬(金粲)·안보린(安甫鱗) 등의 거사를 계기로 이자겸(李資謙)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궁궐에 침범하였으나 왕의 밀지를 받은 최사전(崔思全)의 설득으로 뜻을 바꾸어 이자겸을 잡아 귀양보냈다. 이 공로로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의 호를 받고 문하시중에 올랐다. 이듬해 권세를 함부로 부려 인종의 미움을 받았는데 이자겸과 함께 궁궐을 침범한 죄로 정지상(鄭知常)의 탄핵으로 유배되었다.


 

김부식

http://www.koreandb.net/Sam/p151_01702.html

http://joungul.co.kr/story/story4/%C0%CE%B9%B0_19918.asp


김부식은 신라 왕실의 후예로 신라가 망할 무렵 그의 증조부인 위영(魏英)이 태조에게 귀의하여 경주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주장(州長)에 임명되었다. 그뒤 김부식 4형제가 중앙관료로 진출할 때까지의 생활기반은 경주에 있었다.


그의 가문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 근(覲)때부터였다. 그는 13, 14세 무렵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의 슬하에서 자랐으나, 4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중앙관료로 진출할 수 있었다.


4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하였다 하여 그의 어머니는 훌륭한 어머니로 매년 정기적으로 임금이 내려주는 곡식을 받았다. 더구나 4형제 중 부식과 둘째형 부일(富佾), 동생 부철(富轍) 3형제는 당시 관직 중에서 가장 명예스러운 한림직(翰林職)을 맡아 남들의 부러움을 샀고, 어머니 또한 포상되었으나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1096년(숙종 1)에 과거에 급제하여 안서 대도호부(安西 大都護府)의 사록(司錄)과 참군사(參軍事)를 거쳐, 직한림(直翰林)에 발탁되었다. 이후 20여년 동안 한림원 등의 문한직(文翰職)에 종사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발전시켰고, 한편으로 예종·인종에게 경사(經史)를 강(講)하는 일도 맡았다.


그는 자신이 공자·맹자의 학문을 종지로 받든다고 표방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교 윤리의 실천을 주장하였고 유교이념의 실현에 노력한 유학자였다. 즉, 이자겸이 인종 초년에 왕의 외조부 겸 장인으로서 참람한 행위를 하고, 예에 어긋난 일을 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였다. 또, 《삼국사기》의 사론에서 유교적 이념의 제시를 보여 주었으며, 예종·인종 때의 강경(講經)에서도 유교적 이념을 강조하였다.


정치가로서의 활동은 이자겸의 난을 거치면서 재상으로 승진한 때부터 관직에서 은퇴한 1140년(인종 18)까지에 이루어졌다. 이자겸이 제거된 직후에 두번째로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이때 사신 파견의목적은 송나라 고종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당시 송나라와 금나라의 정세에 대한 정확한 정보입수의 목적이 곁들여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를 감지한 송나라의 반대로 수도까지는 가지 못하고 중도에서 돌아왔다. 이자겸 일파의 정계축출로 인하여 승진이 용이해져 1130년 12월에는 정당문학 겸 수국사(政堂文學兼 修國史)로 승진되어 재상이 된 뒤 다음해 9월에는 검교사공참지정사(檢校司空參知政事)로, 그 이듬해 12월에는 수사공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守司空 中書侍郎 同中書門下平章事)에승진하였다.


 

묘청

http://dugok.x-y.net/kor-his/per/myochung.htm

http://mtcha.com.ne.kr/koreaman/goryo/man80-myochung.htm

http://myhome.shinbiro.com/%7Ehyun7301/sagun/5.htm



묘청(妙淸)은 서경의 중인데 뒤에 이름을 정심(淨心)으로 고쳤다. 인종 6년에 일관(日官)인 백수한(白壽翰)이 검교소감(檢校少監)으로서 서경을 분사(分司))하자 묘청에게 말하여 스승으로 삼고 두 사람이 음양비술(陰陽秘術)을 칭탁함으로써 뭇사람을 미혹케 하였다.


정지상도 역시 서경 사람으로 깊이 그 말을 믿고 말하기를, " 상경(上京)은 기업(基業)이 이미 쇠하여 궁궐이 다 불타 남은 것이 없으나 서경은 왕기(王氣)가 있으니 주장께서 옮기시어 상경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 하고, 근신(近臣) 내시랑중(內侍郞中) 김안과 더불어 꾀하기를, "우리들이 만약 주상을 모시고 서경에 옮기어 상경을 삼으면 마땅히 중흥공신이 될 것이니 홀로 일신의 부귀뿐이 아니라 자손의 무궁한 복도 될 것이다."라 하여 드디어 입에 올려 서로 기렸다.


근신(近臣) 홍이서 이중부 및 대신(大臣) 문공인·임경청도 따라서 화동(和同)하여 마침내 왕께 아뢰기를, "묘청은 성인이요 백수한도 그 다음가는 사람입니다. 국가의 일을 일일이 자문하여 행하고 그 진청(陳請)하는 바를 들어주지 아니함이 없으면 정사가 이루어지고 일이 성취되어 국가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두루 제관(諸官)에게 서명하기를 청하자, 평장사(平章事) 김부식, 참지성사(參知政事) 임원개, 승지(承旨) 이지저만이 서명하지 않고 글을 올려 아뢰니 왕이 비록 의심은 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이 역설하므로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묘청 등이 상언(上言)하기를, "신 등이 서경의 임원역(林原驛) 땅을 보니 이는 음양가가 말하는 대화세(大華勢)입니다. 만약 궁궐을 세워 이에 이어(移御)하시면 천하를 합병할 수 있을 것이요, 금나라가 폐백을 가지고 스스로 항복할 것이며, 36국이 다 신첩(臣妾)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드디어 서경에 행차하여 따라온 재추에게 명하여 묘청, 백수한과 함께 임원역 땅을 상보고, 김안에게 명하여 궁궐을 짓게 해서 독역(督役)이 매우 급하니, 때는 바야흐로 차고 얼어서 백성들이 심히 원망하고 탄식하였다.


서경의 부로(父老)인 검교태사치사(檢校太師致仕) 이제정 등 50인이 묘청 정지상의 뜻에 맞추어 표를 올려 존호(尊號)를 칭할 것과 건원(建元)할 것을 청하였다. 정지상 등이 왕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대동강에 상서로운 기운이 있으니 이는 신용(神龍)이 침을 토해 내는 것으로서 천년에 한 번 만나기 어려운 일입니다. 청컨대 위로는 천심(天心)에 응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바람(望)에 따르시어 금나라를 타도하소서."라 하였다.


왕이 어찌하면 좋은가 물으니 이지저가 대답하기를, "금나라는 강적이니 가벼이 하지 못할 것입니다. "라 하니 왕이 그만두었다. 임원개가 상서하여 말히가를, "묘청 백수한 등은 그 간사한 꾀를 부려 괴탄한 말로써 민중의 마음을 현혹시키고 있아오며, 한 두 대신과 근시하는 사람들도 그 말을 깊이 믿어 위로는 임금의 귀를 어지럽히고 있아오니 신은 장차 불칙한 변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묘청 등을 잡아와서 저자 거리에서 목을 베어 재앙의 싹을 끊어버리소서."라 하였으나 왕은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우정언(右正言)) 황주첨이 묘청 정지상의 뜻에 아부하여 또 친제건원(稱帝建元)할 것을 주청(奏請)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였다.


13년(1135) 묘청이 분사시랑(分司侍郞) 조광, 병부상서(兵部尙書) 유감, 사재소경(司宰少卿) 조창언·안중영 등과 서경을 거점으로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왕의 명령이라 속이고 (서경)부유수(副留守) 최재, 감군사(監軍事) 이총림, 어사(御史) 안지종 등을 잡아 가두고, 가짜 승선(承宣) 김신을 보내어 서북면병마사 이중과 그의 막료 및 여러 성의 수령을 체포해서 서경의 창고에 가두었으며, 무릇 개경인으로서 서경에 있던 자들은 귀천과 승속(僧俗)을 가리지 않고 모두 구속하였다. 그리고 병사를 보내어 절령(嶺)길을 끊고, 사람을 보내어 여러 성의 군병을 욱박질러 징발하였으며, 근도(近道)에서 기르는 말도 약탈하여 모두 서경으로 들여 갔다. 이들은 국호를 대위(大爲)라 하고, 건원하여 연호(年號)를 천개(天開)라 하며, 군대의 칭호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하였다..


(『고려사』권127, 열전40 묘청)


 

 

풍수지리설

http://namuwa.org/technote/read.cgi?board=8-1&y_number=20&nnew=2

http://cont111.edunet4u.net/2002/yjsgun11/Mm/Module/pungsu.htm

http://geo.new21.net/Home/%C1%DF%B0%A3%C7%D0%BD%C0/j1%C7%B3%BC%F6.htm


산세(山勢)·지세(地勢)·수세(水勢) 등을 판단하여 이것을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연결시키는 설. 약칭 풍수설·지리설이라고도 한다. 도성(都城)·사찰(寺刹)·주거(住居)·분묘(墳墓) 등을 축조(築造)하는 데 있어 재화(災禍)를 물리치고 행복을 가져오는 지상(地相)을 판단하려는 이론으로, 이것을 감여(堪輿:堪은 天道, 輿는 地道), 또는 지리(地理)라고도 한다. 또 이것을 연구하는 사람을 풍수가(風水家) 또는 풍수선생·감여가(堪輿家)·지리가(地理家)·음양가(陰陽家) 등으로 부른다. 그들은 방위(方位)를 청룡(靑龍:東)·주작(朱雀:南)·백호(白虎:西)·현무(玄武:北)의 4가지로 나누어 모든 산천(山川)·당우(堂宇)는 이들 4개의 동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하였고, 어느 것을 주로 하는가는 그 장소나 풍수에 따라 다르게 된다. 그리고 땅 속에 흐르고 있는 정기(正氣)가 물에 의하여 방해되거나 바람에 의하여 흩어지지 않는 장소를 산천의 형세에 따라 선택하여 주거(住居)를 짓거나 조상의 묘를 쓰면 자손은 그 정기를 받아 부귀복수(富貴福壽)를 누리게 된다고 믿었다. 이와 같이 풍수의 자연현상과 그 변화가 인간생활의 행복에 깊은 관계가 있다는 생각은 이미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에 시작되어, 그것이 음양오행의 사상이나 참위설(讖緯說)과 혼합되어 전한(前漢) 말부터 후한(後漢)에 걸쳐 인간의 운명이나 화복에 관한 각종 예언설을 만들어냈고, 그것은 다시 초기 도교(道敎)의 성립에 따라 더욱 체계화되었다. 한국 문헌에서 풍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의 탈해왕(脫解王)에 관한 대목에 왕이 등극하기 전 호공(瓠公)으로 있을 때, 산에 올라 현월형(弦月形)의 택지(宅地)를 발견하고 속임수를 써서 그 택지를 빼앗아 후에 왕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또 백제가 반월형(半月形)의 부여(扶餘)를 도성(都城)으로 삼은 것도, 고구려가 평양을 도읍으로 삼은 것도 모두 풍수사상에 의한 것이다. 삼국시대에 도입된 풍수사상은 신라 말기부터 활발하여져 고려시대에 전성을 이루어 조정과


민간에 널리 보급되었다. 특히 신라 말기에는 도선(道詵)과 같은 풍수대가가 나왔으며, 그는 중국에서 발달한 참위설을 골자로 하여 지리쇠왕설(地理衰旺說)·산천순역설(山川順逆說) 및 비보설(裨補說) 등을 주장하였다. 그는, 지리는 곳에 따라 쇠왕과 순역이 있으므로 왕지(旺地)와 순지(順地)를 택하여 거주할 것과 쇠지(衰地)와 역지(逆地)는 이것을 비보(裨補:도와서 더하다)할 것이라고 말한 일종의 비기도참서(記圖讖書)를 남겼다. 그 후 고려 때에 성행한 《도선비기(道詵記)》 등은 그 전체를 도선이 지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그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비기라 일컬어지는 예언서가 그의 사후 세상에 유전(流轉)되어 민심을 현혹시킨 일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그 사례가 많다. 고려 태조도 도선의 설을 믿은 것이 분명하여, 그가 자손을 경계한 《훈요십조(訓要十條)》 중에서, 절을 세울 때는 반드시 산수의 순역(順逆)을 점쳐서 지덕(地德)을 손박(損薄)하지 말도록 유훈(遺訓)하였다. 개경(開京:개성)도 풍수상의 명당(明堂)이라 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 <궁예전(弓裔傳)>, 《고려사(高麗史)》 <태조세가(太祖世家)>, 최자(崔滋)의 《삼도부(三都賦)》, 이중환(李重煥)의 《팔역지(八域志)》, 송나라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 명나라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 등에도 개경의 풍수를 찬양하였다. 즉 개경은 장풍득수(藏風得水)의 형국으로 내기불설(內氣不洩)의 명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첩첩으로 산이 둘러싸여 있어 국면(局面)이 넓지 못하고 또 물이 전부 중앙으로 모여들어 수덕(水德)이 순조롭지 못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비보하기 위하여 많은 사탑(寺塔)을 세운 것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것도 그 태반의 이유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것이다. 즉 개경은 이미 지기(地氣)가 다해 왕업(王業)이 길지 못할 것이라는 풍수가들의 의견에 따라 구세력(舊勢力)의 본거지인 개경을 버리고 신 왕조의 면목을 일신하기 위해 천도


를 단행하였다. 그 밖에도 《정감록(鄭鑑錄)》을 믿고 계룡산이 서울이 된다는 등 실로 풍수지리설이 국가와 민간에게 끼친 영향은 크다. 오늘날에도 민간에서는 풍수설을 좇아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운운하며 묘(墓)를 잘 써야 자손이 복을 받는다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다.


 

3) 무신정권의 성립


 

 

정중부

http://www.realmani.com/cgi-bin/realmani/read.cgi?board=funstory&y_number=69&nnew=2

http://myhome.shinbiro.com/%7Ehyun7301/inmul/moo/10.html


본관 해주(海州). 인종 때 견룡대정(牽龍隊正)이 되고, 의종 초 교위(校尉)를 거쳐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1164년(의종 18) 왕이 무신을 차별하는 데 불만을 품고, 1170년 왕의 보현원(普縣院) 거둥 때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이 문신 한뇌(韓賴)에게 구타당하자 격분, 문신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어 의종을 폐하고 왕제 익양공(翼陽公) 호(晧:明宗)를 즉위시키는 한편, 의종과 태자를 유배시켰다. 이의방(李義方) ·이고(李高)와 함께 전왕의 사제(私第)를 분점(分占), 스스로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고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올랐으며, 이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문하평장사 ·서북면판사 ·행영병마 겸 중군병마판사 등을 지냈다.


1173년 동북면 병마사간의대부(諫議大夫) 김보당(金甫當)이 의종의 복위와 무신의 집권을 타도하려고 난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고 의종을 살해하였다. 이듬해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난을 일으키자 토벌, 문하시중이 되고 1175년 궤장(섟杖)을 하사받은 뒤 치사(致仕)하였다. 1179년 같은 무신인 경대승(慶大升)에게 일가족이 몰살되었다.



이의방

http://mtcha.com.ne.kr/koreaman/goryo/man93-iyibang.htm

고려시대의 무신으로서 본관은 전주(全州)며 1170년(의종 24) 산원(散員)으로  견룡행수(牽龍行首)로서 정중부(鄭仲夫) ·이고(李高)와 함께 무신란을 일으켰으며,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을 세운 뒤에 대장군 ·전중감(殿中監) 겸 집주(執奏)에 임명되고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책록되었다. 이고가 정권을 마음대로 하려 하자 1171년(명종 1) 그를 제거하였다. 이것은 이고가 무뢰배들과 법운사(法雲寺)의 승려 수혜(修惠), 개국사(開國寺)의 승려 현소(玄素) 등과 결탁하여 그를 제거하려는 모의를 하자, 이고를 먼저 죽였던 것이다. 그리고 정권을 장악하고 정중부와 타협하여 중방(重房)을 강화하여 고위 무신들을 끌어들이는 한편, 원래 문신들만 임명했던 지방관에 하급 무신을 임명하여 그들을 회유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1173년 문신 김보당(金甫當)이 의종의 복위를 내세워 난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의민(李義旼)을 통해 의종을 살해하였고, 위위경 흥위위 섭대장군 지병부사(衛尉卿興威衛攝大將軍知兵部事)가 되었다.

  1174년에는 귀법사(歸法寺)의 승려 100여 명이 공격해 선유승록 언선(彦宣)을 살해하자 직접 군사 1,000명을 이끌고 이들을 물리쳤고, 중광사(重光寺) ·홍호사(弘護寺) 등의 승려 2000여 명이 자신을 죽이려 하자 이들을 죽이고 여러 절을 불사르며 재산을 빼앗았다. 이때 서북면에서 조위총(趙位寵)이 난을 일으키자 상서(尙書) 윤인미(尹仁美) 등 서경 출신을 함부로 살해하여 인심을 잃었으며, 윤인첨(尹鱗瞻)을 원수로 삼아 토벌했으나 실패하였다. 이 상황에서 좌승선에 임명되자 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딸을 바쳐 태자비를 삼았는데, 이는 오히려 정치적 입장을 더욱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조위총 토벌을 위한 두번째 토벌군이 출동한 가운데 정중부의 아들 균(筠)과 승려 종참(宗)에게 살해되었으며, 형 준의(俊義)를 비롯하여 같은 세력인 고득원(高得元) 등이 죽었으며, 그의 딸도 태자비에서 축출되었다. 1176년에는 이의방의 문객들인 장군 이영령(李永齡), 별장 고득시(高得時), 대정 돈장(敦章) 등이 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정중부의 암살을 모의하다가 섬으로 추방당했다.


 

도방

http://www.mtcha.com.ne.kr/korea-term/goryo/term51-dobang.htm

http://cgi.chol.com/~edusong/technote/read.cgi?board=Allhistory&x_number=1027002463&r_search=%B5%B5%B9%E6&nnew=1


고려시대 무신집권기의 사병집단(私兵集團)이다. 원래 경대승(慶大升)이 자신의 신변보호를 위하여 설치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1179년(명종 9) 9월에 경대승이 정중부(鄭仲夫) 일당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후 정중부의 잔당에 의해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자기 집에 결사대 수백 명을 모아 긴 목침과 큰 이불로 침식과 행동을 함께 하였는데, 이 사병의 숙소를 도방이라고 불렀다. 1183년 경대승이 30세의 나이로 병으로 죽자 경대승의 도방도 자연 해체, 그 무리들은 섬에 유배되었다. 그 후 1197년 이의민을 죽이고  집권한 최충헌(崔忠獻)은 적대자들로부터 신변을 보호하려고 1200년(신종 3) 그의 사제(私第)에서 도방을 다시 부활시켰다.

  최충헌은 대소 문무관 ·한량 ·군졸 중에서 역강(力强)한 3,000여 명을 선발하여 6번(六番)으로 편제, 교대로 그의 사제를 호위하게 하고 그가 출입할 때에는 이를 모두 합쳐 호위하게 하였으니 경대승의 경우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광범위하고 조직적이었다. 이로부터 도방은 최씨 일문(一門)의 권력 유지를 위한 일대지주(一大支柱)가 되었다. 권신들에게 충성을 다하는 봉건적 가신(家臣)과 흡사했던 문객(門客)을 상층으로 하고 노복(奴僕)인 가동(家?)을 하층으로 하는 사병집단인 도방은 최우(崔瑀) 때에는 자기의 가병(家兵)을 내도방(內都房)으로, 최충헌의 6번 도방을 외도방(外都房)으로 한 내외도방(內外都房)으로 발전시키고, 다시 최항(崔沆) 때에는 36번(番)으로 확대 강화하였다.


  이 결과 관군은 무력하게 되고 용력(勇力)이 있는 자는 모두 최씨 정권의 사병이 되었고, 그들 사병을 양성하는 경제적 기반으로서 광대한 농장과 노비를 점탈(占奪)하였다. 도방은 임연(林衍) 부자의 전횡시대에 다시 6번으로 개편되었다가, 1170년(원종 11)에 임유무(林惟茂)가 피살되어 형식적이나마 왕정이 복고됨에 따라 폐지되었다.

 

 

교정도감

http://www.mtcha.com.ne.kr/korea-term/goryo/term29-gyojungdogam.htm

http://cgi.chol.com/~edusong/technote/read.cgi?board=Allhistory&x_number=1027089762&r_search=%B1%B3%C1%A4%B5%B5%B0%A8&nnew=1


고려시대 최충헌(崔忠獻) 이래 무신정권의 최고 정치기관이다. 교정소(敎定所)라고도 한다. 1209년(희종 5) 4월 권력을 농단하기 시작한 최충헌·최우(崔瑀) 부자를 살해하기로 모의한 청교역(靑郊驛:경기 개풍군) 역리(驛吏) 3명과 이에 관련된 승려들 를 색출하기 위해, 개경(開京)의 흥국사(興國寺) 남쪽 영은관(迎恩館)에 임시로 이 기구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그뒤 계속 존치되어 최씨정권의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데 이용될 뿐만 아니라 서정(庶政) 감시, 세정(稅政), 비위(非違) 규찰(糾察)과 제반 명령 하달 등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의 정치기구가 되었다. 무신정권의 최고 집권자가 겸임하는 교정별감을 두었으며, 이 직위는 최충헌·최우·최항(崔沆)·최의(崔)로 이어져 국정을 독단하였다.


  1258년(고종 45) 유경(柳璥) ·김준(金俊)이 왕권복고를 명분으로 삼아 최의(崔齊)를 살해하고 최씨정권을 무너뜨리고 계속 무신정권 아래서도 존속하다가, 1270년(원종 11) 임연의 뒤를 이은 임유무(林惟茂)가 원종의 밀명(密命)을 받은 홍규(洪奎)와 송송례(宋松禮)에 의하여  피살되어 무신정권이 끝남으로써 소멸되었다.


 

삼별초

http://www.nfc.co.kr/about/Middle_Ages/Middle_Ages&01/Middle_Ages&01a/Middle_Ages&01aa/

http://211.57.209.131/technote/read.cgi?board=oyms111&y_number=21

http://ganghwaro.com/end/sambulcho.htm


의종 24년(1170년) 무신(武臣) 정중부(鄭仲夫)의 난 이후, 무신간에 반복되는 정변(政變)은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부위병(府衛兵)도 쇠퇴해지자 권신(權臣)들은 자기 신변을 보호하고 나아가서 사회의 질서를 잡기 위하여 힘세고 용감한 자를 특별히 골라 야간 경비를 하게 하였다. 이것을 야별초(夜別抄)라 한다.

 처음에 최충헌(崔忠獻)이 정권을 잡은 후 시작된 야별초는 그의 아들 최우(崔瑀)에 와서는 지방까지도 파견하여 도적을 잡는 일도 하게 되니 그 수가 많아져 삼별초를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어졌다.

 삼별초가 처음 제주도에 들어온 것은 <고려사>원종 11년(1270년) 11월 기해일에, '삼별초가 제주도를 함락시켰다'고 하였으므로 그 이전 즉 10월 말경으로 생각된다.

 이 때는 삼별초의 주력이 진도에 웅거하고 있었으나, 崔瀣는 '그들이 이미 강화도에서 인마와 재물을 약탈하여 배에 싣고 진도로 남하할 때, 탐라를 점거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것은 아마 그들이 장차 진도를 해상활동을 전개하는데 있어서나 혹은 실패할 경우라도 제주도를 그들의 최후의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만큼 제주도는 당시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진도로 남하한 직후 그 일부를 제주도에 보내어 점거케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에서도 삼별초의 세력이 제주에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영암부사 김수를 보내어 군사 2백명으로 제주도를 지키게 하였고, 또 장군 高汝霖에게도 70(1000)명을 거느리고 들어가 심수와 함께 방어에 임하게 하였다. 이들이 제주도에 들어온 시기는 분명하지 아니하나, 고여림이 梁東茂 등과 함께 水軍을 이끌고 진도를 쳤었다는 <고려사> 원종 11년 9월 신축일의 기록을 참조하면, 9월 중순 경이될 것이며, 또 같은 해 11월 3일 전사하였으므로, 그들은 한달 남짓 제주도에 머무른 것이 된다.

 고종 18년(1231년)부터 몽고군의 침략을 받게 되었는데 그들과 싸우다가 포로가 된 고려군이 기회를 보아 탈출하여 오자 이들을 별도로 모아 몽고군과 싸우는 데 앞장서도록 하였다. 이를 신의군(神義軍)이라 하였고,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을 합하여 삼별초(三別抄)라 하였다. 그러므로 삼별초는 당시 특수정예군이었으며 그 직능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내 치안과 포도(捕盜), 금폭(禁暴), 형옥(刑獄)까지 담당하였다.

 둘째, 도성(都城)의 수위(守衛)와 최씨 정권의 친위대(親衛隊)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세째, 몽고와의 전쟁시 전위대(前衛隊) 역할을 담당하였다.


 

 

2-5. 대외 관계의 전개


1) 거란의 침입과 격퇴


 

 

정안국

http://mtcha.com.ne.kr/korea-term/goryo/term122-jungangug.htm

압록강 유역을 중심으로 세워진 발해 유민(遺民)의 국가이다.발해가 926년에 거란의 급습을 받고 멸망한 뒤 그 유민들은 거란군이 되돌아가자 곧 각 지에서 조직적인 항거를 시작했는데, 그중 가장 체계적으로 움직이며 구심점이 되었던 세력은 압록강 일대를 거점으로 한 대씨정권(大氏政權)이었다. 그들은 광복운동의 거점으로 압록강 중류에서 하류에 걸치는 압록부 일대를 선정했다. 압록부의 지세는 북쪽·동쪽·남쪽의 3방면이 험난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외부 공격을 막는 데 유리할 뿐 아니라, 압록강을 따라 내려가면 바다를 건너 중국과 통해 물자의 공급이 원활하므로 광복운동을 하기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 세워진 대씨정권을 원래의 발해와 구별하여 편의상 ' 후발해'라고 부르는데, 그 규모는 원래의 발해에 비할 수 없지만 대씨일족이 발해왕족이었다는 점에서 유민들을 결집하기가 쉬웠고, 좋은 지리조건으로 인하여 강력한 정치체제를 갖출 수 있었다.


  특히 옛 발해의 토지와 인민을 통치하기 위해서 거란이 926년에 세웠던 동단국(東丹國)이 내부사정으로 928년 통치기구와 많은 발해유민을 데리고 랴오양[遼陽]으로 옮겨간 이후에는 후발해의 세력이 더욱 강성해져서 발해국의 이름으로 중국 5대조(五代朝)의 후당(後唐)과 통교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런데 954년 7월 발해국의 추호(酋豪) 최오사(崔烏斯) 등 30여 명이 후주(後周)에 귀화했다는 기록 이후로는 후발해와 5대조와의 관계가 보이지 않는다. 그뒤 후발해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고, 5대 이후 전중국을 통일한 송(宋)에 알려진 것은 열씨정권(烈氏政權)의 정안국이다. 즉 970년에 처음으로 국왕 열만화(烈萬華)의 이름으로 송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때의 국명이 정안국이었다. 이로 보아 정안국은 954~970년에 열씨정권이 후발해를 이끌었던 대씨정권을 무너뜨리고 세운 국가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934년 7월 발해국의 세자라고 칭하는 대광현(大光顯)이 수만의 무리를 이끌고 고려에 투항한 데 이어, 같은 해 12월 발해 종실인 대진림(大陳林)이 후당(後唐)으로 투항했으며 938년 박승(朴昇)이 3,000여 호를 이끌고 투항했던 사실로 미루어보아 954년 이전에 후발해에서는 이미 내분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미 언급했던 최오사의 후주 귀화사건도 내분상태에 빠져 정권이 대씨에서 열씨로 넘어가는 사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열씨정권인 정안국은 여진인을 통하여 국왕 열만화의 이름으로 송에 방물을 바치고 국교를 맺었으나, 두나라가 긴밀한 관계를 맺은 것은 이 거란의 요를 치는 데 정안국의 힘을 빌리고자 한 데서부터이다. 즉 태평흥국연간(太平興國年間 : 976~983)에 송의 태종이 거란을 협공하자고 제의한 데 대해 정안국이 찬성한 이후부터 긴밀해졌다. 이때 정안국 왕의 성은 열씨가 아닌 오현명(烏玄明)의 오씨로 바뀌어 있었다. 왕의 성이 열씨에서 오씨로 바뀐 것은 이에 앞서 정안국에서 다시 한번 정권다툼이 벌어졌음을 뜻한다. 그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발해인 수만 명이 고려에 투항했던 979년(경종 4)으로 보인다. 즉 약 40년간의 열씨정권이 무너지고 새로 오씨정권이 세워져 송과 국교를 맺었으며, 국서에 대흥(大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해 독립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거란에 성종이 즉위하여 고려에 대한 견제의 일환으로 동북방면에 대해 적극적인 통치책을 쓰면서 정안국의 위기는 시작되었다. 983년(성종 2) 거란은 압록강 방면을 경략하여 하류지역을 제압하고 이듬해 압록강 방면에 있던 여진에 대한 경략을 시작했는데, 이 작전은 압록강 중류에서 하류에 걸친 지역에 자리잡고 동으로는 두만강 유역까지 그 종주권을 행사하며 해로(海路)로 송과 국교를 맺고 있던 정안국의 본거지를 공격하려는 작전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때 거란은 원정군의 규모에 비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985년 7월부터 압록강 방면을 다시 공격하여 작전개시로부터 반 년 후인 986년 정월에 정안국은 쓰러지고, 그곳에 거란의 4주(州)가 새로이 설치되어 행정력에 의한 통치가 강화되었다. 그러나 <송사 宋史> 정안국전에는 그뒤에도 동단국의 왕자가 989년 여진 사신편에 필마 등을 조공함에 이어 991년에는 다시 동단국의 왕자 태원(太元)의 이름으로 여진인을 보내어 표(表)를 올린 것으로 되어 있어 얼핏 정안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안국의 왕자로 되어 있는 태원이 〈문헌통고 文獻通考〉에는 대원(大元)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후발해국의 대씨 자손인 것으로 짐작된다. 즉 정안국의 오씨정권이 쓰러지자 거란군의 병화를 받지 않은 지역에 있던 대씨후손이 일시 정안국의 이름을 빌려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정안국은 986년 오씨정권이 무너지면서 멸망하여 발해유민의 부흥운동은 거기서 끝난 것으로 여겨진다


 

 

강동 6주

http://www.dgedu.net/student/tfokuk/html/text/go1016.html

http://cgi.chol.com/~edusong/technote/read.cgi?board=Allhistory&x_number=1026976099&r_search=%B0%AD%B5%BF6%C1%D6&nnew=1

http://leekcp.new21.org/b%20kh/f%20di/a/013%20gang6ju.htm

http://www.gnedu.net/php-bin/swebdata/%C3%CA%B5%EE%C7%D0%B1%B3/5%C7%D0%B3%E2/%BB%E7%C8%B8/1%C7%D0%B1%E2/es20010119135837/html/c11-1.htm

http://www.chungdong.or.kr/highroom/history/dictionary/%B0%AD%B5%BF6%C1%D6.html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B0%AD%B5%BF%206%C1%D6&sort=0&c=1&qt=df


강동6주는 994년(고려 성종 13) 평북 해안지방에 설치한 흥화(興化 : 義州)·용주(龍州 : 龍川)·통주(通州 : 宣川)·철주(鐵州 : 鐵山)·구주(龜州 : 龜城)·곽주(郭州 : 郭山) 등 6주. 건국 초 고려의 영토는 청천강과 박천강(博川江)에 머물고 그 이북 압록강 유역까지는 여진족이 거주하였으므로 고려의 북방진출에 큰 장애가 되었다. 993년 안융진(安戎鎭:安州)을 공격하였으나 고려의 항전으로 실패하자 거란군의 소손녕(蕭遜寧)은 고려측의 서희(徐熙)와 강화하여, 거란측은 고려왕의 입조(入朝)와 거란 연호의 사용을 조건으로 압록강 동쪽 여진의 거주지역 280리를 고려가 점유한다는 화약을 맺고 군대를 철수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는 994년 강동(압록강 동쪽)의 여진부락을 소탕하고, 이곳을 통치하기 위하여 장흥(長興 : 泰川)·귀화(歸化 : 미상)·곽주·구주·안의(安義 : 定州)·흥화·선주(宣州 : 宣川) 등에 성보를 쌓고 6주를 설치하였다. 그 결과 고려는 후삼국 이후 처음으로 압록강 연안에 진출하게 되고 군사·교통상의 요지를 확보함으로써 압록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선 확장의 길을 터놓게 되었다. 그 뒤 거란은 고려가 입조 등의 강화조건을 이행하지 않자 1010년(현종 1) 2차 침입, 1018년 3차 침입을 감행하여 강동6주는 격전지가 되었다. 특히 거란의 3차 침입 때는 강동6주에 구축된 성진(城鎭)의 전략적 기능에 힘입어 강감찬이 구주대첩(龜州大捷)으로 거란군의 고려침략을 종식시켰다. 천리장성은 고려시대 거란·여진 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여진족과의 국경에 쌓은 성(城). 고려는 초기부터 거란과 여진의 침입에 대비해 왔는데, 1033년(덕종 2)에는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이 장성을 쌓게 하였다. 성의 규모는 매우 컸으며 서쪽의 압록강 어귀인 흥화진(興化鎭)으로부터 맹주(孟州:孟山)·삭주(朔州) 등 성을 거쳐 정변(靜邊)·화주(和州) 등의 성에 이르고, 다시 도련포(都連浦)까지 이어지는 천여 리 되는 긴 성으로 높이와 폭이 각각 25자나 되는 석축이었다. 1044년경 완공되었는데, 유소는 그 공으로 추충척경공신(推忠拓境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이 장성은 그 뒤에도 오랫동안 고려의 북방 방어선으로 이용되었으며, 그 유적은 지금도 의주(義州)·정평(定平) 등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강조의 정변

 

http://myhome.shinbiro.com/%7Ehyun7301/sagun/2.htm

http://corea1.hihome.com/polity/j1_15.html


1009년(목종 12) 고려의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강조가 일으킨 정변. 경종이 죽었을 때 목종은 2세밖에 안되어 성종(경종의 사촌동생)이 왕위를 계승하고, 헌애왕후(獻哀王后)는 천추궁(千秋宮)에 살며 외척(外戚) 김치양(金致陽)과 추문을 일으키므로 성종은 김치양을 유배시켰다. 그 뒤 성종이 후손없이 죽자 목종(경종의 아들)이 즉위하였으나 신왕(新王)의 나이 18세임에도 모후인 천추태후(헌애왕후)가 섭정을 하게 되고 앞서 유배되었던 김치양의 소환을 종용함으로써 외척의 발호를 초래하였다. 이에 김치양의 전횡(專橫)이 시작되었으며 1003년(목종 6) 천추태후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목종은 후사 없이 병을 얻자 1009년(목종 12)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채충순(蔡忠順)에게 김치양의 음모를 말하고, 당숙 욱(郁)의 아들 대량군 순을 후계자로 삼아 사직(社稷)을 타성(他姓)에 넘기지 않도록 부탁하는 한편, 눈앞의 급변에 대비하기 위해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에게 돌아와 지키도록 했다. 이때 세간(世間)에서는 왕이 위독하여 이틈에 김치양 등이 나라를 빼앗으려 한다는 풍문이 나돌아 인심이 매우 흉흉하였다. 이윽고 왕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전해지자 강조는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오던 길에 왕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보고를 듣고 한때 주저하였으나, 부하 장수들과 회의한 후 다시 결심하고 우선 별장(別將)을 시켜 대량군을 맞게 하고, 자기는 개경(開京)으로 달려가 목종에게 퇴위를 강권(强勸)하고 대령군을 세워 왕을 삼았다. 이와 동시에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태호와 그 무리를 귀양보내는 한편 사람을 시켜 폐왕 목종을 살해했다. 이 정변은 거란의 제2차 침입의 구실이 되었다.


 

 

귀주대첩

http://user.chollian.net/~makcbg/a13gang.htm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B1%CD%C1%D6%B4%EB%C3%B8&sort=0&c=2&qt=df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B1%CD%C1%D6%B4%EB%C3%B8&c=3&sort=0&qt=df&fr_res=0&to_res=0


1010년 (현종1)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에 침입했다. 이 때 강조가 나가 싸우다 지자, 신하들은 왕에게 항복하기를 권했으나, 끝내 이에 반대하고, 하공진을 적에게 보내어 설득시켜 물러가게 하였다. 그가 서경 유수에 임명되었을 때, 거란은 다시 고려를 괴롭히기 시작하여  거란이 고려의 강동 6주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을 거절하자, 1018(현종 9) 거란은 다시 10만의 군사로 쳐들어왔다. 이 때 70세였던 그는 20만 군사를 이끌고 흥화진으로 진군하여 거란군과 싸웠다. 여기서 그의 군사들은 큰 밧줄에 쇠가죽을 꿰어 삽교천(의주 동쪽의 큰 냇물) 상류의 물을 막고, 부근의 산속에 숨어있다가 적군이 나타나자 갑자기 막았던 강물을 터놓아 적군을 무찔렀다.  그러나 적장 소배압은 나머지 군사들을 이끌고 황해도까지 밀고 내려왔으므로  이들과 싸움을 벌여 물러나게 하였다. 도망치는 적군을 공격하여 귀주에서 완전히 쳐부수었는데, 이것을 귀주 대첩이라고 한다. 그 후 거란은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하였다.  뒤에 강감찬은 추충협모안국공신의 호를 받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자연과 글을 벗하여 조용히 살았다. 서울시 관악구에 있는 낙성대는 그가 태어난 사적지이다. 저서로는 '낙도 교거집(樂道郊居集)','구선집(求善集)' 등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84세로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 크게 장사를 지내 주었다.


 

 

양규

http://myhome.shinbiro.com/%7Ehyun7301/inmul/moo/7.html

楊規 ?∼1011(?∼현종 2) 고려시대 무신. 목종 때 형부낭중(刑部郞中)으로 도순검사가 되었으며,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聖宗)이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자 완강히 저항했다. 이에 거란군은 포위를 풀고 통주(通州;지금의 평안북도 宣川)에서 고려의 주력부대를 격파하고 남진하였다. 현종의 철병교섭으로 거란군이 철병하게 되자 구주방면에서 돌아가는 거란군을 지키고 있다가 무로대(無老代;지금의 義州地方)에서 2000여 명을 죽이고 포로를 구출했으며, 이어서 석령(石嶺)·여리참(余里站)·애전(艾田) 등지에서 싸웠다. 이때 거란군사가 갑자기 밀려들자 구주별장(龜州別將) 김숙흥(金叔興)과 더불어 싸웠으나 진중에서 전사하였다. 24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에 추봉되었다.


 

 

천리장성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C3%B5%B8%AE%C0%E5%BC%BA&sort=0&c=1&qt=df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C3%B5%B8%AE%C0%E5%BC%BA&c=2&sort=0&qt=df&fr_res=0&to_res=0

http://www.ysemra.net/%7Ework/sar61/61-12/chol.htm

http://yushin.or.kr:8080/bbs1/read.cgi?board=c_relic4&y_number=3&nnew=1


고려시대에 거란과 여진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 서쪽의 압록강 어귀에서 위원, 흥화 등 13성을 거쳐 함경 남도 영흥에 이르는 긴 성으로, 1033년(덕종 2년)에 유소에게 명하여 쌓기 시작하여 1044년(정종 10년)에 이르러 완성하였다. 이 장성은 그 뒤에도 오랫동안 고려의 북방 방어선으로 이용되었으며, 지금도 의주를 비롯한 여러 곳에 그 유적이 남아 있다.


 

 

척경입비도

http://www.satam119.com/gurim/kuksagrim.htm


윤관이 9성을 개척하고 비석을 데우는 장면을 조선 후기에 그린 것이다


 

 

2) 여진정벌과 9성 개척


 

 

별무반

http://www.mtcha.com.ne.kr/korea-term/goryo/term67-byulmuban.htm

http://cgi.chol.com/~edusong/technote/read.cgi?board=Allhistory&x_number=1027145731&r_search=%BA%B0%B9%AB%B9%DD&nnew=1


고려시대 여진을 정벌하기 위해 조직한 군대를 말한다.  여진은 거란의 지배를 받았지만 동여진 완옌부[完顔部]의 강성과 비례하여 고려에 대한 침략행위가 더욱 심해졌다. 1104년(숙종 9) 여진이 함경도 정평(定平)의 장성(長城) 부근에 출몰함을 계기로 정면 충돌하여, 2차례에 걸쳐 판동북면행영병마사(判東北面行營兵馬使) 임간(林幹) · 추밀원사(樞密院使) 윤관(尹瓘)을 보내어 막게 하나 모두 실패하였다.

  이에 윤관의 건의로 정규군(正規軍) 외에 별무반을 조직하였다. 양반 ·승려 ·이서(吏胥) ·상인(商人) ·노예 등을 동원하여, 신보(神步:보병) ·신기(神騎:기병) ·항마군(降魔軍:승려)과 연호군(烟戶軍:노예)으로 나눠 조직하였다. 신기군은 문무산관(文武散官)으로부터 서리(胥吏) ·상인 ·복례(僕隷) 및 주부군현(州府郡縣)에 있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말을 가진 자는 이에 소속되었다. 신보군은 과거를 보지 않는 20세 이상의 장병들로 이루어졌다. 항마군은 사원에서 노역이나 사원전(寺院田) 경작에 종사하는 수원승려(隨院僧侶)를 징발한 것이 특징이다.


  보병을 신보(神步) ·도탕(跳) ·경궁(梗弓) ·정노(精弩) ·발화(發火) 등의 특기부대(特技部隊)로 편성하여 정규군(府兵)과 함께 훈련을 받게 하고, 병기 ·병술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였다. 1107년(예종 2) 10월 윤관(尹瓘)을 원수(元帥)로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하여 출병한 고려 17만 대군은, 함흥평야의 여진족 소굴을 급습하였다. 적 5천을 죽이고 5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350개 부락을 수복하고 함주(咸州:함흥) 등에 동북9성(함주(咸州) ·영주(英州) ·웅주(雄州) ·복주(福州) ·길주(吉州) ·공험진(公咽鎭) ·숭녕(崇寧) ·통태(通泰) ·진양(眞陽)의 9성을 설치하였다. 그뒤 여진은 9성의 환부를 요청하며 강화를 요청해오자, 조정은 9성을 지키기 어렵다 하여 1년 반만에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동북 9성

http://www.mtcha.com.ne.kr/korea-term/goryo/term57-1-dongbug9sung.htm

http://cgi.chol.com/~edusong/technote/read.cgi?board=Allhistory&x_number=1027350259&r_search=%B5%BF%BA%CF9%BC%BA&nnew=1

http://davide97.new21.net/technote/read.cgi?board=s_3&y_number=9&nnew=2


고려가 1107년(예종 2) 동북면 새외지역에 거주하는 여진족을 쳐부수고 1108년에 그 지역에 쌓은 9개의 성(城)이다.


  9성이 어느 성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는데, 이는 설치될 때의 9성과 여진에 돌려줄 때의 9성 명칭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길주(吉州)·복주(福州)·공험진(公鎭)·통태진(通泰鎭)·진양진(眞陽鎭)·숭녕진(崇寧鎭)을 가리키며, 진양진·숭녕진 대신 의주(宜州)·평융진(平戎鎭)을 꼽기도 한다.


  여진족은 본래 만주의 지린 성[吉林省]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연해주 방면에 산거(散居)하던 종족이다. 이들은 발해시대 이후 점점 남쪽으로 퍼져나와 신라말·고려초에는 동북방면으로 함경도 일대와 서북방면으로 압록강 남안(南岸) 평안도 일대에까지 흩어져 살게 되었다. 고려는 국초부터 이들과 관계를 맺었는데, 동북 방면의 여진을 동여진(東女鎭) 또는 동번(東蕃)이라 하고, 서북 방면의 여진을 서여진 또는 서번(西蕃)이라 불렀다. 여진족은 그들의 사회적·경제적 필요에 따라, 또 대륙의 정세변화에 따라 고려에 조공(朝貢)하여 필요한 물자를 교역하기도 하고, 때로는 변방을 침략·약탈하기도 했다. 태조 이래 여진부락은 꾸준히 내투(來投)하여 동여진의 많은 부락은 고려의 기미주(羈州)로 존재하게 되었고, 문종 때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내부(來附)하여 고려의 군현으로 편제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런데 11세기 중반 이후 북만주의 쑹화 강[松花江] 지류에 살던 생여진의 완옌부[完顔部]가 세력을 키워 두만강 유역까지 진출하면서 여진지역에 변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완옌부는 고려에 부속하고 있던 갈라전(曷懶甸) 일대의 여진부락을 경략하고, 계속 고려에 내투하는 여진인을 추적하여 1104년(숙종 9) 정주(定州)의 장성(長城) 부근까지 이르러 주둔했다. 이에 고려와 완옌부 여진은 2번 충돌했는데, 고려가 패하고 강화를 맺었다.


  고려는 패전의 원인을 적은 기병(騎兵)인 데 비해 아군은 보병이 주축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별무반(別武班)을 편성했다. 별무반은 기병인 신기군(神騎軍)과 보병인 신보군(神步軍) 및 특별부대, 승병으로 조직된 항마군(降魔軍)으로 이루어졌다. 1107년(예종 2) 12월 윤관(尹瓘)을 원수(元帥),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하는 17만 대군은 정주관(定州關)을 떠나 여진족을 소탕하면서 갈라전 일대를 점령했다. 고려군은 먼저 영주·웅주·복주·길주 등 4주에 성을 쌓았다. 다음해 2월에는 함주를 대도독부(大都督府), 위의 4주와 공험진을 방어주진(防禦州鎭)으로 편제하고, 이어서 3월에 의주·통태진·평융진에도 성을 쌓아 9성으로 삼았다. 이것이 이른바 윤관의 9성이다. 이어서 이곳에 남쪽지방의 민호(民戶)를 사민(徙民)하여 채웠다. 〈고려사〉 윤관전에 기록되어 있는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에 의하면 함주에 병민(兵民) 1,948정호(丁戶), 영주에 1,238정호, 웅주에 1,436정호, 길주에 680정호, 복주에 632정호, 공험진에 532정호, 합계 6,466정호가 사민되었다. 민지(閔漬)가 편찬한 〈동국편년강목 東國編年綱目〉에는 6만 9,000호로 기록되어 있는데 신빙성이 약하다. 이와 같이 고려가 여진 거주지역을 점령하여 그곳을 양계(兩界)의 행정체계인 주(州)·진(鎭)으로 편성하고 민호를 사민한 것에 대하여, 전통적인 북진정책의 실현인 동시에 농업사회의 내적 팽창에 따른 적극적인 영토확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여진족들은 완옌부를 중심으로 결속하여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한편으로는 강화를 청하면서 9성을 돌려달라고 애원했다. 고려 정부에서는 9성 환부문제를 의논하고 거주지를 빼앗긴 여진인이 먼 곳의 여진인까지 끌어들여 고려를 계속 침입하면 군사의 상실도 많을 것이며, 또 개척한 땅이 크고 넓으며 9성의 거리가 요원하고, 이로 인해 적이 복병을 두어 자주 왕래하는 사람을 초략(抄掠)하는 일이 잦다는 것, 또 국가가 다방면으로 군사를 징발하면 중외(中外)가 소란스러우며 기근과 질병으로 백성들의 원망이 일어난다는 것 등을 이유로 하여 여진에게 9성 지역을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9성을 설치한 지 1년 5개월 정도가 지난 1109년 7월에 고려군은 9성에서 철수를 시작했다.


  9성에 대해서는 그 설치된 지역이 어디였는가가 큰 쟁점이 되어왔다. <고려사> 윤관전에는 그가 여진족을 제압한 뒤 여러 장수를 보내 지계(地界)를 획정했는데, 동으로는 화곶령(火串嶺)에 이르고 북으로는 궁한이령(弓漢伊嶺)에 이르며 서로는 몽라골령(蒙羅骨嶺)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그가 임언(林彦)을 시켜 전공을 기록하게 한 영주청벽기에는 "그 지방은 300리인데, 동으로는 대해(大海)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개마산(蓋馬山)을 끼었으며 남으로는 장주(長州)·정주(定州)와 접했다"고 되어 있다. 또 위치설정의 한 지표가 되는 공험진에 대해서는 〈고려사〉 지리지에 "혹 공주(孔州)라고도 하고 혹 광주(匡州)라고도 하는데, 일설에는 선춘령(先春嶺) 동남 백두산 동북에 있었다고도 하며, 혹 소하강변(蘇下江邊)에 있었다고도 한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해석하는 방법에 따라 의견이 갈리는데, 대개 ① 공험진의 위치를 두만강 북쪽으로 잡아 그 이남으로부터 정평(定平)까지의 함경도 일대에 걸쳐 있었다는 설, ② 길주 내지 마운령 이남부터 정평까지 주로 함경남도 일대로 비정하는 설, ③ 함관령 이남 정평 이북의 함흥평야 일대로 보는 설의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③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학자들이 제기한 것으로, 실지조사를 실시하여 9성의 각각을 특정지역에 비정하기도 했으나 식민사관 입장에서 9성의 범위를 좁히고자 하여 억지로 함흥평야 일대에 비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②는 영주청벽기 등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는 한백겸(韓百謙)·정약용(丁若鏞) 등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주장으로 일부에서 계속 지지하고 있다. ①은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 조선 초기에 편찬된 관찬문서에 나타나는 것으로 최근에도 이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연구가 발표되고 있다. 완옌부 여진족이 더욱 성장해 금나라를 세운 것은 고려가 9성에서 철수한 지 6년 뒤의 일이다. 고려가 9성지역을 확보하지 못한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완옌부 세력의 발흥에 있었다고 하겠다.


 

 

강화산성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B0%AD%C8%AD%BB%EA%BC%BA&sort=0&c=1&qt=df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B0%AD%C8%AD%BB%EA%BC%BA&c=2&sort=0&qt=df&fr_res=0&to_res=0


 

 

3) 거란족의 토벌과 몽고와의 전쟁


 

 

박서의 귀주성 전투

http://blog.naver.com/blacken628.do?Redirect=Log&logNo=80012242421


1219년 서북면원수(西北面元帥) 조충(趙沖),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김취려(金就礪), 지병마사(知兵馬使) 한광연(韓光衍) 등이 이끄는 고려군은 몽고군원수(蒙古軍元帥) 합진(哈眞), 동진(東眞)의 장수 완안자연(完顔子淵) 등의 지원을 받아 강동성(江東城)에서 항쟁하던 거란족(契丹族)을 토벌하게 되었다. 이후 몽고제국(蒙古帝國)은 고려에 압력을 가하고 무거운 공물을 요구하였는데,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불쾌하게 생각하여 불화가 싹텄다.


그런 가운데 1225년에 몽고제국의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고려에 왔다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변에서 살해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몽고제국에서는 이 사건이 고려인들의 소행이라고 생각하여 고려에 대한 군사적 행동에 돌입하였다. 몽고제국은 1231년부터 1259년 강화(講和) 때까지 전후 6회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다. 고려는 1270년 원종(元宗)의 출륙환도(出陸還都) 때까지 무려 40여년간 몽고의 침입에 저항하였다.


몽고제국(蒙古帝國)은 칭기즈칸[成吉思汗]대부터 쿠빌라이칸[忽必裂汗]대에까지 서하(西夏), 금(金), 남송(南宋), 토번(吐蕃), 호레즘(Khorezm)왕국, 러시아 크림반도(Krym Pen 半島) 등을 공략하여 정복하였고 중앙아시아와 서유럽을 평정하여 그들의 말발굽이 거치는 곳은 굴복하지 않는 적(敵)이 없을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대제국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막강한 몽고의 군사력이 40년 동안 즐기차게 공격해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고 지속적인 항쟁을 펼쳤던 유일한 나라가 바로 고려(高麗)였던 것이다.


1231년에 몽고 장수 살례탑(撒禮塔)이 20만 대군으로 침입해오자 고려의 최고 실권자 최이(崔怡)는 곧바로 전시체제(戰時體制)를 선포하여 몽고족(蒙古族)이 해상전투에 약하다는 데에 착안, 강화도(江華島)로 천도(遷都)를 단행하였다. 당시 최씨무신정권은 몽고의 침입에 대응하여, 일차적으로 강화를 지키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각 지방에는 방호별감(防護別監)을 파견하여 침입 예상지역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였다. 군민(郡民)으로 하여금 산성이나 섬으로 들어가 몽고군의 공격에 대항하게 하였다. 이러한 전술은 산성이나 섬에서의 생활대책을 마련해 주지 않은 상태에서 강행되었다. 대규모의 부대동원에 의한 전면전(全面戰)은 회피하였고, 필요에 따른 소규모 유격전(遊擊戰)을 전개하는 데 불과하였으며, 몽고군의 철수를 외교적 노력으로 달성하고자 하였다. 최씨무신정권의 이러한 소극적인 대책으로 인해, 전투의 대부분은 관인(官人)의 지원없이 군민(郡民)의 자력으로 수행되었다. 몽고의 기병(騎兵)을 맞아 군민(郡民)이 물리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었다. 군민(郡民)이 입은 피해는 엄청났다. 그렇지만, 전국의 곳곳에서 몽고군의 침략을 맞아 군민(郡民)이 필사적인 항쟁을 벌여 몽고군에 타격을 주는 전투가 수없이 전개되었다.


살례탑(撒禮塔)의 몽고군 주력부대가 함삼진(咸新鎭)을 넘어 귀주성(龜州城)으로 진격해오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박서(朴犀)는 삭주분도장군(朔州分道將軍) 김중온(金仲溫), 정주분도장군(靜州分道將軍) 김경손(金慶孫) 등과 더불어 주위의 군민(軍民)을 모두 성안으로 집결시키고 방어전(防禦戰) 태세에 들어갔다. 몽고군은 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서문, 남문, 북문을 공격했다. 몽고군이 포차(砲車)를 동운하여 성랑 200간을 파괴하고 성루를 넘어오려 하자 고려의 관군과 민병들은 필사적으로 항전, 적의 공격을 막아냈다. 몽고군이 성밑에 이르러 싸움을 걸자 김경손(金慶孫)이 결사대 12명을 이끌고 성밖으로 나가 용전분투(勇戰奮鬪), 몽고병(蒙古兵) 1백여명을 참살하고 성안으로 돌아왔다. 몽고군이 다시 포차 30대를 발사하여 성랑 50간을 박살내자 박서(朴犀)가 철사줄로 엮어서 이를 수리하고 몽고군의 진입을 막아냈다. 12월에 이르자 몽고군이 다시 포차로 성을 공격했으나 고려군이 역시 포차로 맞대응하므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채 인명피해만을 입고 퇴각했다.


이후 살례탑(撒禮塔)은 박서(朴犀)에게 사람을 보내 항복을 종용했으나, 박서는 단번에 이를 거절하였고 몽고의 사절을 목베어 성밖으로 내던졌다. 몽고군은 운제(雲梯)를 이용해 성을 함락시키려 하였지만 박서가 대우포(大牛砲)를 이용해 운제를 박살내자 적군은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박서를 비롯한 고려의 관민(官民)은 귀주성(龜州城)에서 1개월 이상을 버티며 임기응변(臨機應變)식의 결사항전(決死抗戰)을 펼쳐 몽고군에게 치욕의 패배를 안겼다. 그러나 1232년 1월에 후군지병마사(後軍知兵馬使) 최임수(崔林壽), 감찰어사(監察御史) 민희(閔曦)가 와서 강화조약(講和條約)이 맺어졌음을 알리고 싸움을 중지하라는 어명(御命)을 전하자 박서는 하는수 없이 성문을 열고 몽고군에 항복하였다. 이때 몽고군의 한 노장(老將)이 말하기를 "내 소싯적부터 말안장을 배개삼아 전쟁이 일어나는 곳은 사방 어디에도 발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으나 이와 같이 대규모 공격을 받고도 쉽게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전하는 장수를 일찍이 보지 못하였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구체적인 강화교섭을 위해 고려가 화안공(和岸功) 정(程)을 몽고(蒙古)에 보냈을때에 쿠빌라이칸[忽必裂汗]이 귀주성 혈전(龜州城血戰)에 대해 감탄하며 말하기를...


"고려(高麗)는 정관(貞觀) 18년 당황(唐皇) 태종(太宗)이 백만대군으로 침입하여 안시성(安市城)을 60여일간 공격했으나 그 성주인 양만춘(楊萬春)이 뛰어난 지략과 끈질긴 항전으로 당군(唐軍)의 공격을 잘 막아내어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고 들었다. 내 지금 구주성(龜州城)에서의 일을 생각하니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임을 알겠도다."


라고 하였다.


쿠빌라이칸[忽必裂汗]의 이같은 발언은 고구려(高句麗)와 고려(高麗)가 동일한 국가이고 고려(高麗)가 곧 고구려(高句麗)의 승계를 받아 건국된 나라라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다


 

 

최우

http://myhome.shinbiro.com/%7Ehyun7301/inmul/moo/15.html

http://mtcha.com.ne.kr/koreaman/goryo/man103-choiu.htm


?∼1249(?∼고종 36) 고려 후기 무신정권 집권자. 훗날 이(怡)로 개명. 본관은 우봉(牛峰). 충헌(忠獻)의 아들이다.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있다가 1219년(고종 6) 최충헌이 죽자 뒤를 이어 교정별감이 되어 축적하였던 금은보화를 왕에게 바치고, 일찍이 아버지가 탈취한 공사(公私)의 전민(田民)을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며, 한사(寒士)를 많이 등용하고 아우 향을 귀양보내는 등 인심을 얻기 위해 크게 노력하였다. 21년 참지정사(參知政事)·이병부상서(吏兵部尙書)·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가 되어 집권자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이 무렵 몽고의 침입에 대비해 의주(宜州;지금의 德源)·화주(和州;지금의 永興)·철관(鐵關;지금의 鐵嶺) 등 북변 여러 요지에 성을 쌓게 하였다. 25년 사택에 정방(政房)을 설치하여 문무백관의 인사권을 장악하였고, 27년 서방(書房)을 두고 문객 가운데 명유(名儒)를 소속시켜 삼번제로 숙직하게 하였다.이것은 도방(都房)과 더불어 최씨정권의 대표적 숙위기관(宿衛機關)이었다. 한편 마별초(馬別抄)를 조직하여 최씨정권의 호위를 맡게 하였고, 야간순찰과 도둑을 단속하기 위해 야별초(夜別抄)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훗날 삼별초(三別抄)가 되어 최씨정권의 사병집단으로 경찰과 전투 임무를 맡았다. 32년 몽고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개성사람들을 강화(江華)로 피난시키는 한편 왕에게 강화천도를 단행하게 하였다. 34년 천도의 공으로 진양후, 42년 진양공이 되었다. 43년 국자감을 짓고, 양현고에 쌀 300곡(斛)을 시납하는 등 장학에 힘쓰는 한편 강화에서 대장경 재조(再雕)에 착수하여 그가 죽은 2년 뒤인 51년에 완성하였으며, 해서·행서·초서에도 능하였다. 말년에는 차츰 횡포와 사치가 심해져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샀다. 죽은 뒤 공신당(功臣堂) 벽위에 도형(圖形)되고 강종(康宗) 묘정에 배향되었으나, 최씨정권이 몰락한 뒤 도형이 제거되고 배향도 폐지되었다. 시호는 광렬(匡烈).


 

 

살리타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BB%EC%B8%AE%C5%B8&sort=0&c=1&qt=df

http://cont2.edunet4u.net/%7Esypark/goru04.htm


 

 

용장성

http://dugok.x-y.net/kor-his/pla/yongjangsung.htm

http://hiskjn.com.ne.kr/kjne/e102.html


◇ 소재 : 전라남도 진도군 내면 용장리

◇ 고려시대의 석축산성으로 사적 제126호


  현재 용장산 기슭에 약간의 석축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고 성내에 용장사지(龍藏寺址)와 행궁지(行宮址)가 남아 있다. 축성연대는 1270년 6월 이후이며 삼별초의 대몽항쟁 근거지였던 곳이다. 용장산성(龍藏山城)은 성의 둘레가 13km에 이르는 거대한 산성이었다.


현재 성안에는 남북 9단 동서 3단의 석축과 건물터, 우물등이 남아있다. 용장성은 몽고에 무릎을 꿇은 고려 조정에 반발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며 난을 일으킨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게 패해 제주도로 퇴각하기까지 원종 11년(1270) 8월부터 9개월 동안 항몽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삼별초는 이곳에서 부서를 정하고 관부를 열었으며, 궁궐과 성곽을 쌓고 몽고 침략자와 개경정부에 반기를 들어 왕족인 승화후(承和候)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여 왕실과 대립되는 정권을 세웠는데, 이때 쌓은 성이 용장산성이다.


고종 18년(1231), 몽고 사신 저고여가 제 나라로 돌아가다가 압록강 너머에서 피살된 사건을 빌미로 시작된 몽고의 침입은 이후 30여년 동안 여섯차례나 계속되며 경주까지 내려가 황룡사 9층 목탑을 불태워 버리는 등 우리나라 전역을 휩쓸었다 몽고군의 첫번째 침입이 있은 다음, 당시 고려의 실권을 잡고 있던 최씨 무신정권의 최우는 고종 19년(1232)에 강화도로 조정을 옮겨 해전에 약한 몽고군에 대항했다.



이후 고려는 육지로 나와 환도하고 항복하라는 몽고에 맞서 40여년 동안을 끈질기게 강화도에서 버텼다. 애초에 최우에 의해 조직된 야별초에서 비롯된 삼별초는 점차 무력해진 정부군을 대신하여 항몽기간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전투병력이었다. 삼별초는 강도(江都, 강화도)를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을 뿐더러 자주 본토에 상륙해 각지에서 몽고군과 맞붙어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최씨정권을 비롯한 비롯한 무신세력이 몽고에 대한 결사항전을 주장했던데 반해 왕을 중심으로 하는 문신세력은 출륙(出陸)하고 친조(親朝)하라는 몽고의 요구를 받아들여 빨리 강화를 맺고 몽고의 힘을 빌려서라도 무신세력에게서 권력을 뺏어 오기를 바랐다. 고종 44년(1257)에 최항이 죽고 이듬해에 최의가 피살되어 최씨 정권이 무너지자 고종은 태자 전(나중의 원종)을 몽고에 들여보내 일단 강화의 실마리를 잡는다.



원종이 즉위한 후 직접 태자(나중의 충렬왕)를 데리고 몽고에 들어감으로써 강화는 더욱 확실해진다. 마침내 원종 11년(1270) 무신세력을 대표하는 임유무가 죽음으로써 끝까지 출륙환도에 반대하던 무신정권이 완전히 몰락하자 왕은 개경으로 돌아갔으며(5월 27일) 삼별초는 해산명령을 받고 명부를 압수당했다.



그동안 누구보다 격렬하게 몽고에 저항하던 삼별초가 반발한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배중손을 지도자로 한 삼별초는 새 왕을 받들고 관부를 구성하고 관리를 임명하는등 적에게 항복한 고려조정에 대립하는 정권을 세웠다(6월 1일). 반란을 일으킨지 사흘 뒤, 삼별초는 1,000여 척의 배에 재물과 인원 등을 싣고 남쪽으로 떠났다.



삼별초는 용장성에 터를 잡은 후 산성을 개축하고 성안의 용장사를 궁궐로 삼고 각종 건물을 짓고 왕을 황제로 칭했다. 오랑(五狼)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왜에 국서(國書)를 보내 자신들이 유일한 정통 고려 정부임을 표명하기도 했다. 이들이 진도로 온 것은 해전에 약한 몽고군과 맞서 싸우는데 적합했으며 섬이 크고 땅이 기름져서 오래 버티더라도 자급자족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명량해협은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거두어진 조세를 개경으로 가져가기 위해서는 꼭 지나가야 할 이동로였다.



한편, 삼별초가 오기 전에 이곳에는 원래 용장산성이 있었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백제시대 이래 고군면 고성리에 있던 읍성을 용장성으로 옮겼으며, 명량해협과 벽파진의 지리적 중요성으로 보아 그 전부터도 누대에 걸쳐 거듭거듭 성을 쌓고 보수했을 것이다. 삼별초는 진도로 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남해 일대와 인근의 섬은 물론 전라도와 경상도 남해안을 공략하고 전주와 밀양등 내륙깊은 곳까지 세력을 넓혔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조운을 차단당한 개경 정부는 경제적으로 타격을 받았다. 삼별초 진도 정부는 친 몽고적인 왕실에 비판적인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받아 왕 온을 알현하러 오는 사람도 많았고, 개성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진도로 이주하거나 투항하려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몇 차례의 진도 공격에 실패한 여몽 연합군은 삼별초가 용장산성에 든 지 아홉달이 지난 원종 12년(1271) 5월 1일, 고려 장수 김방경과 몽고 장수 홍다구를 지휘관으로 하여 병선 400여척과 군사 1만명을 이끌고 대규모 총공세에 들어갔다. 10여일 동안 벌어진 격렬한 싸움에서 삼별초의 임금 온은 쫓기다가 죽임을 당했고 배중손도 섬 남쪽 남도포의 남도석성쪽으로 퇴각했다가 전사했으며 동쪽의 금갑진으로 퇴각했던 김통정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제주도로 건너갔다.



진도 정부가 패한 후, 진도에서는 1만여명의 남녀가 포로로 잡혀갔다. 제주도로 옮겨간 김통정 휘하의 삼별초도 자주 본토의 전라도와 경상도를 공격하는등 고려 정부를 괴롭히며 2년 가량을 버텼으나 마침내 원종 13년(1273) 2월에 여몽연합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이처럼 삼별초가 3년 가까이 버틴 것은 그들 자체가 매우 전투에 뛰어나기도 했지만 남도 각처의 민심이 이미 외적과 결탁하여 자기들을 쥐어짜는 고려정부를 떠나 삼별초 반란군에 호응하였음을 반영한다. '삼별초의 난'이 모두 진압된 후 고려 왕실은 완전히 몽고의 종속 정권으로 전락한 채 100여년을 보내게 된다. 이 동안 고려 왕들은 원나라에 가서 청소년기를 보내다가 원의 공주에게 장가 든 후 고려로 와서 왕이 되어야 했고 왕족과 고관들 사이에서는 몽고식 옷차림과 변발이 유행하기도 했다. 지금 용장성 안에는 석축으로 이루어진 건물자리들이 모두 12개 남아 있고 그 주변에 모두 420m에 이르는 토성이 둘려 있다.



1350년 왜국의 극심한 침략으로 육지로 피난한 이후 용장성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뒤 세종 초기에 다시 귀향하게 됨으로써 기록이 보이게 되는데, 이에 의하면 성의 둘레는 3만 8741척, 높이 5척이라 나와 있으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이 성은 임준면 남동리에 있는 남도석성(南桃石城)과 함께 삼별초의 대몽항쟁의 유적지로 좋은 자료이며 축성연대가 확실하다는 점, 고려왕실과 대립되는 궁전이 건립되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황룡사9층탑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C8%B2%B7%E6%BB%E79%C3%FE%C5%BE&sort=0&c=1&qt=df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C8%B2%B7%E6%BB%E79%C3%FE%C5%BE&c=2&sort=0&qt=df&fr_res=0&to_res=0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C8%B2%B7%E6%BB%E79%C3%FE%C5%BE&c=4&sort=0&qt=df&fr_res=0&to_res=0


 

 

김윤후

http://211.57.209.131/technote/read.cgi?board=oyms111&y_number=23

http://dugok.x-y.net/kor-his/per/kimyunhu.htm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의 승장(僧將). 일찍이 승려가 되어 백현원(白峴院)에서 수도(修道)하다가 고종 19년(1232) 몽골이 침입하여 처인성(處仁城:龍仁)을 공격하자 몽골 장군 살리타이[徹禮塔]를 쏘아 죽이고 그 공으로 상장군(上將軍)에 임명되었으나 사양, 뒤에 섭랑장(攝郞將)을 거쳐 충주산성방호별감(忠州山城防護別監)이 되었다. 이때 재차 몽골이 침입하자 군민을 독려, 70여 일 동안의 전투 끝에 이를 격퇴하였다. 서울을 개경(開京)에서 강화도(江華島)로 옮긴 뒤 그는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이 되고, 뒤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에 임명되었으나 그 때 동북면은 이미 몽골의 수중에 들어갔으므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원종 때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수사공 우복야(守司空右僕射)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배중손

http://myhome.shinbiro.com/%7Ehyun7301/inmul/moo/5.html

http://www.baessi.com/menu04/menu04_04.htm

http://www.hongnong.es.kr/history/e/h09sambeulcho.htm

http://myhome.naver.com/hodram99/ks/baejoong.htm

http://mtcha.com.ne.kr/koreaman/goryo/man81-bejungson.htm


裵仲孫 ?∼1271(?∼원종 12) 고려 원종 때의 장군. 서반의 장군인 동시에 가장 유력한 삼별초의 지휘관이어서 항쟁이 계속되는 동안 수령으로 추대되었다. 1270년(원종 11) 몽골을 방문하고 돌아온 원종이 출륙환도(出陸還都)를 단행하고 삼별초에 대해 강화도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삼별초가 이를 거부하자 왕은 강제로 해산명령을 내렸다. 이에 삼별초는 원종을 폐하고 승화후 온(承化侯溫)을 새 왕으로 옹립하고 정부를 수립하여 저항을 시작하였다. 배중손 등은 본토와의 교통을 차단하고 주민과 병사의 이탈을 막은 뒤 국고(國庫)를 접수하고 진도로 본거지를 옮겨 성곽을 구축하고 궁전을 짓는 등 장기항전태세를 굳혔다. 고려군의 지휘관 김방경(金方慶)이 몽골군과 연합하여 공략을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71년 5월 홍다구(洪茶丘)가 몽골의 대군을 이끌고 출동하여 김방경·흔도(欣都)의 연합군과 합세하여 진도를 함락시켰고, 배중손도 이때 전사한 것으로 짐작된다.


 

 

2-6. 고려후기의 정치변동


1) 원의 내정 간섭


 

 

쌍성총관부

http://blog.naver.com/boco86/140015980129

고려시대에 원(元)나라가 화주(和州 : 함남 永興이라고 주장하지만)에 둔 통치기구로서, 1258년(고종 45년) 11월 몽골의 별장(別將) 산길(散吉)·보지(普只) 등이 이끈 군대가 동여진(東女眞)을 경유하여 장성(長城) 이남에 침입, 화주에 이르렀을 때, 동북면의 주민들은 동북면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의 인도로 저도(楮島)에 들어가 지키다가 죽도(竹島)로 이동하였다.  조휘(趙暉)·탁청(卓靑) 등이 등주부사(登州府使) 박인기(朴仁起), 화주부사 김선보(金宣甫) 등을 처치하고,  동북면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을 죽였다.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내놓으며 몽골에 투항하자, 몽골은 이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쌍성총관부"를 두고 조휘를 총관, 탁청을 천호(千戶)에 임명하였다.  


    한편, 1269년(원종 10) 서북면병마사의 기관(記官, 최탄(崔坦) 등이 당시 고려정부의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하고 원종의 동생 안경공(安慶公) 창(峻)을 세우자, 임연의 목을 벤다는 구실로 한신(韓愼)·이연령(李延齡) 등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최탄은 서경을 비롯한 북계(北界)의 54성(城)과 자비령(황해도 서흥군에 있는 고개라고 하지만) 이북 서해도(西海道)의 6성을 탈취하고 원나라에 투항하여 서경을 "동녕부"로 삼았다.


   고려는 이 두 사건이 큰 원인이 되어 몽골에 굴복하여 태자(太子)의 친조(親朝)와 개성 성곽 철폐를 약조하고 몽골의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약 100년 존속하면서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즉, 쌍성총관부 총관은 조휘의 아들 양기(良琪), 손자 돈(暾), 종증손(從曾孫) 소생(小生)에게 세습되었다.


   1356년(공민왕 5)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유인우(柳仁雨)를 동북면병마사에 임명,  대호군 공부보(貢夫甫), 종부령 김원봉(金元鳳), 강릉도존무사(江陵道存撫使) 이인임(李仁任) 등과 함께 이 지역을 공략하게 하였는데 이때 조휘의 증손자인 총관 조소생과 천호 탁도경이 반격했으나 조휘의 손자인 조돈(趙暾)과  천호 이자춘(李子春:이성계의 아버지)의 협력으로 탈환하여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화등(和登) ·장정(長定) ·장예(長預) ·고문(高文) ·선주(宣州) ·선덕(宣德) ·원흥(元興) ·영인(寧仁) ·요덕(耀德) ·정변(靜邊) 등지를 수복하였으며  화주목(和州牧)을 설치하였다.

   위의 내용이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국사시간에 고려정부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지금의 강화도로 천도하여 39년간 항쟁하였다고 배웁니다. 더불어 몽골의 침입으로 전 국토가 유린당하여, 황룡사 9층탑이 불타고, 불국사가 소실되었다고 배웁니다. 하지만, 몽골이 수전(水戰)에 약하여 강화도는 넘지 못했다고 합니다.  전 국토가 이미 몽골의 수중에 넘어간 상황에서 정부만 강화도에 있었다는 것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은 이미 말할 바가 있습니다만, 더욱이 이상한 것은 이미 몽골의 수중에 넘어간 화주지역에 몽골이 직할령을 설치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다루가치(일종의 총독)등이 파견되어 통치하였을텐데, 굳이 쌍성총관부를 설치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시 동북면과 서북면이 모두 몽골과의 전쟁의 최전방이었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이곳을 넘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는 몽골이 이미 전 국토를 장악하였으므로, 굳이 이들의 항복으로 쌍성총관부와 동녕부를 설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동북면과 서북면의 몽골의 투항으로 몽골에 넘어간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전 국토가 몽골의 수중에 있던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몽골의 침입에 버티고 있었던 사실을 말해줄 뿐입니다.


 

 

동녕부

http://www.mtcha.com.ne.kr/korea-term/goryo/term56-dongnyungbu.htm

http://kr.dic.yahoo.com/search/enc/result.html?pk=12705300


1270년 원나라가 고려의 서경(西京)에 설치한 통치기관이다. 1269년(원종 10) 서북면병마사의 기관(記官) 최탄(崔坦) 등이 당시 고려정부의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하고 원종의 동생 안경공(安慶公) 창(峻)을 세우자, 임연의 목을 벤다는 구실로 한신(韓愼)·이연령(李延齡) 등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최탄은 서경을 비롯한 북계(北界)의 54성(城)과 자비령(황해도 서흥군에 있는 고개) 이북 서해도(西海道)의 6성을 탈취하고 원나라에 투항하였다.

  원나라 세조는 때를 놓치지 않고 1270년 자비령으로 경계를 삼아 그 이북의 지역을 모두 원나라 영토로 만들고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한 후, 최탄을 동녕부총관(摠管)에 임명하였다. 이에 원종은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에 가 세조에게 자비령 이북 지역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관철되지 않았고, 1275년(충렬왕 1)에는 동녕부를 동녕부총관부로 승격시켰다.


  1290년(충렬왕 16년)에 원나라 동북지역인 만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세조의 동생 내안(乃顔 )의 잔당들과 합단(哈丹)의 무리들이 고려에 처들어오고 그것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고려의 끈질긴 요구를 받아들여 이 지역을 고려에 돌려주고, 동녕부를 요동(遼東)으로 옮겼다.


  그리고 만주의 요동으로 이동한 동녕부를 공민왕 때 정벌하였다. 이것은 1368년(공민왕 17)에 원나라 순제(順帝)는 주원장(朱元璋)의 군대에게 쫓기다가 죽고, 그 뒤를 이어 기황후(奇皇后:고려인) 소생인 소종(昭宗)이 즉위하였으나 소종도 주원장의 군대에 쫓겨 외몽골에 있는 화북(和北)으로 도망쳐 간신히 원나라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와 같은 국제 정세의 변화를 간파한 공민왕은 먼저 원나라의 연호(年號) 사용을 정지하고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제정한 관직명을 개정하는 한편, 명나라와도 통호(通好)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원나라의 지배를 벗어나 역대 조상의 숙원인 북진정책을 강행하여 고구려의 구강(舊疆)을 회복하려는 의사표시였다.


  이즈음에 원나라의 평장사(平章事) 기새인티무르[奇賽因帖木兒; 기철의 아들이자 기황후의 조카]가 원나라 유민을 모아 동녕부에 웅거, 그의 부친 기철(奇轍)이 고려에서 참형당한 것에 대한 원수를 갚는다고 고려의 북변을 침입하였다. 고려에서는 1369년 12월에 이성계(李成桂)를 동북면원수(元帥), 지용수(池龍壽)를 서북면원수로 삼아 군사 1만 5,000을 주어 원나라의 동녕부를 치게 하였다. 이성계는 1370년 1월에 동북면에서 황초(黃草), 설한(雪寒)의 두 영(嶺)을 넘고 압록 ·파저(婆猪)의 두 강을 건너 동녕부의 동지(同知) 이오로티무르[李吾魯帖木兒]가 지키는 우라산성(于羅山城)을 포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지용수와 합세하여 랴오둥[遼東]의 중심지인 랴오양[遼陽]을 공격하여 성을 빼앗았다.


  그러나 추위와 기근으로 더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부근 주민들에게 고려에 귀순할 것을 권고하고 회군하였다. 동녕부를 정벌만 하였을 뿐 장기적으로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처럼의 정벌은 아무 효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결국 랴오허[遼河] 동쪽의 땅은 명나라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탐라총관부

http://mtcha.com.ne.kr/korea-term/goryo/term145-tamrachonggoanbu.htm

고려시대에 원나라가 탐라에 설치한 관청이다. 1273년(원종 14)에 원나라가 탐라를 근거지로 항쟁을 벌였던 김통정(金通精)의 삼별초군(三別抄軍)을 토벌한 직후, 그 잔군(殘軍) 토벌과 항복민에 대한 초무(招撫)를 위해서 탐라도에 설치한 탐라국초토사(耽羅國招討司)에서 비롯되었다. 원나라는 삼별초의 항쟁이 있기 이전부터 탐라를 일본과 남송(南宋)의 정벌을 위한 전초기지로 여기고 있다가, 삼별초의 항쟁을 계기로 탐라를 원의 직할령으로 삼고자 탐라국초토사를 설치했다. 원은 탐라국초토사를 곧 탐라국군민도 다루가치 총관부[耽羅國軍民都達魯花赤摠管府]라고 명칭을 바꾸고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관리하게 하는 동시에 탐라를 주로 목마장(牧馬場)으로 이용했다. 1284년(충렬왕 10)에 다시 관청명을 탐라국군민안무사(耽羅國軍民安撫司)로 바꾸었다. 1294년에는 원에서 세조가 죽고 성종이 즉위하면서 고려의 요청을 받아들여 탐라를 고려에게 돌려주었다. 그리하여 고려는 탐라를 제주로 고치고 목사(牧使)를 파견하게 되었지만, 이후에도 원나라가 공마(貢馬)를 계속 요구했다. 1300년에 원은 다시 탐라군민총관부를 설치했는데, 고려가 경상도의 합포만호부(合浦萬戶府)나 전라도의 전라만호부의 예에 따라 탐라를 고려에 소속시키고 진수기관(鎭守機關)인 만호부로 바꾸어줄 것을 원에 요구함에 따라 탐라만호부로 이양하는 조처가 취해졌다. 그러나 이후에도 탐라가 여전히 목마장으로 사용됨에 따라, 원·명(明)이 교체되는 1374년(공민왕 23)에는 제주말을 명나라로 보내는 문제를 둘러싸고 말·소의 사육을 맡아온 목호(牧胡;몽골의 牧子)들이 반란을 일으켜 고려의 조정에서  최영(崔瑩) 등을 중심으로 전함 314척, 군사 2만 5605명으로 제주로 보내 토벌하게 하는 사태도 벌어진 바 있다


 

 

다루가치

http://211.57.209.131/technote/read.cgi?board=oyms111&y_number=22

http://www.mtcha.com.ne.kr/korea-term/goryo/term45-darugachi.htm


다루가치는 <진을 치는 사람>, <일을 처리하는 관리>, <지방 관청의 장관>이란 뜻의 몽고의 관직이다. 즉 몽고가 점령 지역에 두는 관원으로서, 일종의 민정 감찰관이다. 몽고는 1차 침입때, 철군에 앞서 서경을 비롯한 서북면 지방의 40개 성(또는 14개 성)에 72명의 다루가치를 분치하고, 이듬해에 요동으로 철수하였다.


또, 몽고는 고려 국사 전반을 간섭하는 다루가치를 개경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대개 고려에 의해 피살되었으며, 결국 몽고는 다루가치를 고려에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2) 공민왕때의 개혁 정치

 

 

권문세족

http://corea1.hihome.com/polity/j1_47.html

http://blog.naver.com/dalezing/140013913468

고려 후기의 사회를 주도한 세력은 권문세족이었다. 무신 정변에 의해 문벌 귀족이 몰락하고 무신이 집권층이 되었다가 무신 정권이 붕괴한 이후에는 권문세족이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대두하였다. 이들은 무신 정권 이후 정국 변동과 관련되면서 성장하여 출신 성분이 매우 다양하였다. 이를 구분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전기 이래의 문벌 귀족 가문 : 경주 김씨, 정안 임 씨, 경원 이씨, 안산 김씨, 철원 최씨, 해주 최씨, 공암 허씨, 청주 이씨, 파평 윤씨.

② 무신 정권 시대에 무신으로 득세한 가문: 언양 김씨, 평강 채씨

③무신 정변 이후 능문능리의 신관인층으로 성장한 가문: 당성 홍씨, 황려 민씨, 횡천 조씨

④ 대원 관계 속에서 신흥 세력으로 성장한 가문 : 평양 조씨

이들 권문세족은 높은 관직을 독점하고 자신들의 지위를 세습시켜 나갔다. 뿐만 아니라 막대한농장과노비를 소유하여 경제적인 부를 축적해가면서 사적인 이익들 확대시켜 국가의 제도를 통한 지배층 전체의 공동 이익을 짓밟았다. 그리고 사전 개간, 겸병 등의 방법으로 민전이나 국가의 공전을 침식함으로서 국가 재정을 궁핍하게 하고 전시과 체제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전민변정도감

http://211.57.209.131/technote/read.cgi?board=oyms111&y_number=27

http://mtcha.com.ne.kr/korea-term/goryo/term118-junmindogam.htm


고려 후기에 토지 및 노비에 관한 행정을 정비하기 위해 설치하였던 특별기구.


무신정권이 국정을 농단(壟斷)하던 중기 이후, 고려의 전정(田政)은 무신을 배경으로 한 권문(權門) 때문에 문란해져 국가재정과 직결되는 공전(公田)은 불수조(不輸租:免稅地)의 특권을 가지는 사전(私田)으로 변화하여 농민을 귀족의 경작자로 삼는 병작반수제(竝作半數制)의 확대를 이루어 국가재정은 극도로 약화되어 갔다.


1260년 원종(元宗)이 즉위한 전후를 기해서 몽골의 강력한 내정간섭으로 왕권이 약화되자 몽골 세력을 등에 업은 권신세력도 공전을 대대적으로 사전화하고, 여기에 딸렸던 농민(良人)을 겸탈(兼奪)·천례화(賤隷化)함으로써 국가의 재정적 기반은 무너져 갔다.


전민변정도감은 이러한 전정의 문란을 시정·개혁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1269년(원종 10)에 처음으로 설치한 이래 1288년(충렬왕 14)·1291년(충렬왕 17)·1362년(공민왕 11)·1381년(우왕 7)·1388년(우왕 14) 등 여러 차례 설치되어 전정의 개혁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 개혁시도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충렬왕 때에는 막대한 토지를 겸탈한 환관(宦官) 등 왕의 측근 및 원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권신들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실패를 거듭하였다.


 

 

이문소

http://blog.naver.com/hesbs/120006067401

1280년(충렬왕 6) 일본 원정을 목적으로 처음 설치 되었던 정동행성은 일본 원정이 실패하자 원나라에 하정사를 파견하는 의례적인 기구로 바뀌었다가, 1299년에는 다시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는 기구로 변하였다.

정동행성은 비록 형식적인 기관이지만 원나라의 제도였기 때문에 관리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하는 경우가 많았고, 원 황실이나 원나라에 항거하는 죄인을 투옥 했는데 실제 처벌은 고려 정부에 넘기거나 원나라로 보내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동행성의 장에 해당하는 좌승상에는 항상 고려 왕이 임명되었으나, 원의 관인으로 충당되어야 할 직책인 평장정사와 좌·우승, 참지정사는 대개 공석으로 두었다. 이러한 운영으로 본다면 정동행성은 고려의 내정 간섭 기구로 보기는 어렵다. 정동행성은 오히려 고려 내에 행성을 두고, 고려 왕을 좌승상에 임명함으로써 원 제국 내에 있어서 고려의 위치를확정해 두자는 의례적 기구로서 보다 큰 의의가 있다고 보여진다.

또한 정동행성에는 이문소·유학제거사·의학제거사·조마소·도진무사·권농사 등의 속관이 있었다. 특히 이문소는 여·원 관계와 관련하는 범죄를 단속하는 일을 했으나 차츰 부원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로 변했다. 한편, 고려에 대해 불평과 불만을 가진 세력들은 이 정동행성을 원의 내지에 설치된 여러 행성과 마찬가지의 체제로 개편하도록 주청하는 이른바 입성(立省)을 책동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반민족적 책동들은 고려의 상하 군신이 일치 단결하여 반대 운동을 전개하여 저지되었다. 결국 정동행성은 1356년(공민왕 5) 반원 정책을 추진하면서 폐지되었다


 

 

공민왕

http://www.koreandb.net/KoreanKing/html/person/pki50031.htm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B0%F8%B9%CE%BF%D5&sort=0&c=3&qt=df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B0%F8%B9%CE%BF%D5&c=4&sort=0&qt=df&fr_res=0&to_res=0

http://www.kayajang.com/%B0%A1%BE%DF%C0%E5/%C3%B5%BF%AC%B1%E2%B3%E4%B9%B0/cgi-bin/%B5%A5%C0%CC%C5%B8/%B0%F8%B9%CE%BF%D5.htm



1330(충숙왕 17)∼1374(공민왕 23)

고려 제31대왕

재위 1351∼1374

본관은 개성(開城)

이름은 전, 초명은 기(祺), 몽고식 이름은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 호는 이재(怡齋), 익당(益堂).

충숙왕과 명덕태후 홍씨(明德太后洪氏)사이의 둘째아들이다. 비는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며, 그밖에 혜비이씨(惠妃李氏), 익비한씨(益妃韓氏), 정비안씨(定妃安氏), 신비염씨(愼妃廉氏)가 있다.

일찍이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하여졌으며, 1341년 원나라에 가서 숙위(宿衛)하였으며, 1344년 충목왕 즉위년에 강릉부원대군에 봉하여졌다.

1349년 원나라에서 노국대장공주를 왕비로 맞이한 2년 뒤, 원나라가 나이 어리고 외척의 전횡으로 국정을 문란하게 한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그의 뒤를 잇게 함으로써, 공주와 함께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14세기 후반,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대륙정세의 변동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고려의 중흥을 꾀하여 많은 개혁을 추진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적극적으로 원나라에 반대하는 정책을 펴 몽고적 잔재를 제거하고, 잃어버린 국토 회복을 위한 북진정책을 실시하였으며, 대내적으로는 고려왕실을 허약하게 만든 친원파를 제거하고, 국가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일곱 차례에 걸친 제도 개혁을 실시하였다.

즉, 원나라가 쇠퇴해지자 원나라 배척운동을 일으키고, 1352년 변발·몽고식 의복 등의 몽고풍속을 폐지하였으며, 1356년 몽고의 연호·관제를 폐지하여 문종 때의 제도를 복구하는 한편, 내정을 간섭하던 원나라의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하고, 원나라의 황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리던 기철일파(奇轍一派)를 숙청하였으며, 100년간이나 존속해온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폐지하고 원나라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하였다.

1368년 명나라가 건국되자, 이인임(李仁任)을 보내어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遼東)에 남아 있는 원나라의 세력을 공략하였으며, 2년 뒤 이성계로 하여금 동녕부(東寧府)를 치게 하여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점령, 국위를 떨쳤다.

그리고 내정에 있어서는 1352년 그동안 인사행정에 폐단이 많았던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귀족들이 겸병한 토지를 원래의 소유자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시키는 등의 개혁정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홍건적 및 왜구의 잦은 침입과, 1363년 찬성사 김용(金鏞)의 반란, 1364년 충선왕의 셋째아들 덕흥군(德興君)옹립을 내세운 친원파 최유(崔濡)의 반란 등으로 국력이 크게 소모되기도 하였다.

더구나, 1365년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왕은 실의에 빠져, 모든 국사를 신돈(辛旽)에게 맡기고 불공에만 전심하였다. 그러나 정권을 장악한 신돈은 실정을 거듭하고 왕을 해치려 하므로, 그를 수원으로 귀양보낸 뒤 처형하였다.

그뒤 1372년, 명문자제들로 구성된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고, 1373년 모니노(牟尼奴)에게 우(禑)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하였다.

그런데 자제위 소속 홍륜(洪倫)이 익비를 범하여 임신시키자, 그것을 은폐할 의도로 홍륜과 밀고자인 환관 최만생(崔萬生) 등을 죽이려다가 도리어 그들에게 살해되었다.

공민왕은 그림과 글씨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인 화가로 꼽히기도 한다. 작품으로는 〈천산대렵도 天山大獵圖〉가 있다. 능은 현릉(玄陵)으로 경기도 개풍군 중서면에 있다.


 

 

반원자주정책

http://www.cyberschool.co.kr/html/text/khis/khis325.htm

14세기 후반 중국 대륙에서 원나라가 명나라로 교체되는 어수선한 시기를 이용하여

공민왕은 반원 자주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먼저 원나라를 믿고 횡포를 부리던 기철 등의 국내 친원 세력을 쫓아내었고,

원의 내정 간섭 기관이었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였지요.

그리고 쌍성 총관부를 공격하여 철폐하고 철령 이북 땅을 되찾았으며,

인당으로 하여금 요동 지방을 공격하도록 하였습니다. 또 원의 간섭으로 격하되었던

고려의 관제를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고, 몽고의 풍속을 일체 금지 시키는 등

반원 자주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지요.


이와 같이 공민왕은 대내적으로는 개혁을 추진하여 권문 세족의 힘을 누르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먼저 무신 정권 시대 최우가 설치하였던 정방을 없애 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무신 정권 이후 인사권을 장악하여 왕권을 약하게 만든 정방을 없앰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고, 또 정방을 폐지함으로써 공민왕이 직접 인사권을 가지고

권문 세족에 대항하는 신진 사대부를 기용하려고 한 것이지요.

이래서 신진 사대부가 고려 말의 유력한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권문 세족과 인연이 없는 신돈을 전민변정도감의 판사로 임명하여 권문세족들이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의 소유주에게 넘겨 주거나 양민으로 해방시켜 주었지요.

양민들이 많아지게 되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대상이 많아져 국가 재정이 튼튼해 지고,

권문 세족들은 토지와 노비가 줄어들어 힘이 약해지게 되지요.


공민왕은 반원 개혁 정치를 추진해 나가기 위해서 밖으로는 원의 세력과 싸워야 했고,

안으로는 권문 세족을 누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원의 압력으로 왕권 강화가

어려웠고, 원의 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권문 세족들이 왕권을 견제하여 공민왕은 뜻대로

개혁을 이룰 수가 없었지요. 그러다가 마침내 권문 세족의 반격으로 신돈이 제거되었고,

공민왕까지 권문 세족에게 암살됨에 따라 개혁 정치는 중단되었지요.


그러나 공민왕 때 크게 두각을 나타낸 신진 사대부 세력은 그 후 개혁을 꾸준히 추진하였고,

그 과정에서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세워졌지요.


 

 

신돈

http://100.naver.com/100.php?id=101518

http://www.mtcha.com.ne.kr/koreaman/goryo/man82-sindon.htm

http://www.shinjongwoo.co.kr/name/sa/data/saa1-98.html


고려 말의 승려로서 본관은 영산(靈山)이며 속성은 신(辛)이고 자는 요공(耀空)이며, 법명은 편조(遍照)이다. 돈(旽)은 퇴속하여 고친 이름이며 호는 청한거사(淸閑居士)이다. 어머니인 계성현(桂城縣) 옥천사(玉川寺) 사비(寺婢)의 아들이다. 노비가 중이 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그의 아버지가 영산의 유력자였기 때문에 승려가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원명(金元命)의 추천으로 궁중에 드나들었으나 "나라를 어지럽힐 자는 이 중이다"라는 이승경(李承慶)의 비난을 받았으며, 정세운(鄭世雲)으로부터 죽음의 위협도 받았다. 이러한 충돌은 이미 이때 신돈이 정치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음을 의미하며, 특히 이들이 홍건적 침입 때 활약한 무장(武將)임을 고려한다면 신돈의 역할이 무장세력을 견제하는 입장이었다고 짐작된다. 그는 당시 무장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배척하던 인물들이 사라진 다음에 비로소 정치표면에 나설 수 있었다.

 즉. 1364년 머리를 기르고 유랑 걸식하는 두타(頭陀)가 되어 다시 왕을 찾아오자, 공민왕은 '청한거사'라는 호를 주고

사부(師傅)로서 국정을 맡았다. 1365(공민왕 14)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죽은 뒤 공민왕은 그녀를 추모하여 불사(佛事)에만 전심하였다. 모든 정치는 신돈에게 맡겼으며 그는 진평후(眞平侯)라는 봉작까지 받아 가며 정치개혁을 단행하였는데, 그의 개혁정치는 고려 내부의 혼탁한 사회적 적폐(積弊)를 타개,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즉, 왕은 그가 "도(道)를 얻어 욕심이 없으며, 또 미천하여 친당(親黨)이 없으므로 큰 일을 맡길 만하다"면서 신뢰했다. 이에 대해 신돈도 '세상을 복되고 이롭게' 할 뜻이 있음을 아뢰고, 비록 참언이나 훼방이 있더라도 자신을 끝까지 믿어줄 것을 청하여 왕으로부터 "사(師)는 나를 구하고 나도 사를 구하리라"는 다짐을 받았다. 공민왕은 신돈이야말로 서로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권문세족의 영향에서 벗어나 소신껏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해 많은 권력을 부여했다. 그는 1365년 5월에 최영 등 무장세력을 비롯하여 이인복(李仁復)·이구수(李龜壽) 등 많은 권문세족을 물러나게 했고, 인사권을 포함한 광범위한 안팎의 권력을 총괄했다. 이렇게 강력한 권력을 갖게 되자 중국에서는 권왕(權王)으로 알려졌고, 관료들에게는 영공(令公)으로 불렸으며, 그가 출입할 때에는 왕과 같은 의례가 행해졌다.

 그가 실시한 변혁으로는 첫째, 내재추제(內宰樞制)의 신설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선발된 일부 재신(宰臣)과 추밀(樞密)이 궁중에서 나라의 중대한 일을 처리하도록 한 변칙적인 제도였는데, 권문세족이 중심이 된 도평의사사의 확대에 따른 왕권의 약화를 만회할 수 있는 기구라는 데 의의가 있었다. 둘째, 1366년 5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했다. 이 기구는 부당하게 겸병당한 토지와 강압에 의해 노비가 된 사람들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이 제도의 실시로 권문세가들이 탈점했던 토지와 인민을 그 주인에게 돌려준 경우가 많아 "성인이 나타났다"는 찬양을 받기도 했다. 셋째, 국학인 성균관의 중영(重營)이다. 그는 1367년 5월에 숭문관(崇文館) 옛 터에 성균관을 중영할 때 직접 그 터를 살피고, "문선왕(文宣王:孔子)은 천하만세(天下萬世)의 스승"이라고 하면서 이 사업에 적극성을 보였다. 이 사업은 뒤이어 시행되는 5경4서재(五經四書齋)의 분리 및 과거3층법(科擧三層法)의 채택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성리학의 전래·확산 및 신진사류의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균관의 중영을 전후한 시기에는 이색·정몽주·이존오·이숭인·정도전·권근·윤소종·임박 등 신진 문신세력이 등장하고 있었다. 신돈에 대해 이들은 대체로 현실을 인정하고 참여하여 자기성장을 이루어나갔고, 신돈도 그들과의 적극적인 협조를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신돈의 정치·사회·경제 개혁의 단행은 당시 지배층의 많은 반발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특히 권문세족은 신돈의 개혁으로 그 기반을 위협받고 있었고 자신들에 대한 비판세력으로서 신진사류가 성장하자, 신돈이 〈도선비기 道詵秘記〉를 근거로 평양천도론까지 제기했을 때 그를 제거하기 위해 적극 나서게 되었다. 1367년 10월에 신돈에 의해 밀려난 전(前) 시중 경천흥(慶千興)과 지도첨의 오인택(吳仁澤)을 비롯해 그를 소개했던 김원명 등 전직·현직 고위관료들이 밀의하다가 발각되었고, 1368년 10월에는 김정(金精)·김흥조(金興祖)·김제안(金齊顔) 등이 신돈을 죽일 것을 모의하다가 계획이 누설되어 실패했으며, 그후에도 신돈을 제거하려는 권문세족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1369년경부터 국내외의 정세가 여러모로 그에게 불리해졌다. 즉 개혁정치의 부작용이 격화된 데다가 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신돈의 존재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원(元)·명(明) 교체기에 즈음하여 만주에 있던 동녕부(東寧府)의 정벌 단행으로 무장들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또한 불교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였던 신진사류와 승려인 신돈과의 융화에 한계가 뚜렷이 나타났으며, 집권 말기에 그가 처첩을 거느려 자식을 낳고 주색에 빠지자 비난이 높아졌다.

 영록대부집현전대학사(榮祿大夫集賢殿大學士)가 되어 1369년(공민왕 18)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로 왕을 유혹, 서울을 충주(忠州)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스스로 오도도사심관(五道都事審官)이 되려다 왕의 불신을 받았다. 그러자 왕을 살해하려는 역모(逆謀)를 꾸며 권력을 되찾으려 하였으나 발각되어 수원(水原)에 유폐되었다가 1371년에 처형되었다.


 

 

공민왕의 영토수복


http://hiskjn.com.ne.kr/kjne/j107.html


 

 

성균관

http://blog.naver.com/eduteacher74/20006054125

한국 최고의 학부기관으로서 '성균'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충렬왕 때인 1289년에 그때까지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을 '성균'이라는 말로 개칭하면서부터이다. 충숙왕대인 1308년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었고, 공민왕대에는 국자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362년에 다시 성균관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조선 건국 이후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존속되어, 1395년부터 새로운 도읍인 한양의 숭교방(崇敎坊) 지역에 대성전(大聖殿)과 동무(東)·서무(西)·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양현고(養賢庫) 및 도서관인 존경각(尊敬閣) 등의 건물이 완성되면서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성균관은 태학(太學)으로도 불리었으며, 중국 주나라 때 제후의 도읍에 설치한 학교의 명칭인 '반궁(泮宮)'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성균관에는 최고의 책임자로 정3품직인 대사성(大司成)을 두었으며, 그 아래에 좨주(祭酒)·악정(樂正)·직강(直講)·박사(博士)·학정(學正)·학록(學錄)·학유(學諭) 등의 관직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교육제도는 과거제도와 긴밀히 연결되어서, 초시인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儒生)에게 우선적으로 성균관에의 입학 기회를 주었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개국 초에는 150명이었으나, 1429년(세종 11)부터 200명으로 정착되었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을 상재생(上齋生)이라 하였으며, 소정의 선발 시험인 승보(升補)나 음서(蔭敍)에 의해 입학한 유생들을 하재생(下齋生)이라 하였다. 성균관 유생은 기숙사격인 동재와 서재에서 생활하였으며, 출석 점수 원점(圓點)을 300점 이상 취득해야만이 대과 초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유생의 생활은 엄격한 규칙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자치적인 활동기구로 재회(齋會)가 있었다.유생은 기숙사생활을 하는 동안 국가로부터 학전(學田)과 외거노비(外居奴婢) 등을 제공받았으며, 교육 경비로 쓰이는 전곡(錢穀)의 출납은 양현고에서 담당하였다. 유생은 또한 당대의 학문·정치현실에도 매우 민감하여 문묘종사(文廟從祀)나 정부의 불교숭상 움직임에 대해 집단 상소를 올렸으며, 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권당(捲堂:수업거부) 또는 공관(空館)이라는 실력행사를 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 학문의 전당으로서 관리의 모집단으로 주요한 기능을 한 성균관은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교육재정이 궁핍화하고 과거제도가 불공정하게 운영되면서 그 기능이 약화되었다.1894년의 갑오개혁은 성균관의 역사에서 중요한 굴절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갑오개혁이 단행되면서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근대적인 교육개혁이 추진되면서 일정한 변모를 겪게 되었다. 성균관은 개화의 흐름 속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유학과 도덕을 지켜 나가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며, 1946년 성균관대학의 설립으로 그 전통은 계승되었다. 1785년(정조 9)에 편찬된 《태학지(太學志)》에는 성균관의 건물 배치도 및 성균관 제도의 변천과정, 유생의 활동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어서 조선시대 성균관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된다.


설립년도 1289년

설립목적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



한국 최고의 학부기관으로서 '성균'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충렬왕 때인 1289년에 그때까지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을 '성균'이라는 말로 개칭하면서부터이다. 충숙왕대인 1308년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었고, 공민왕대에는 국자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362년에 다시 성균관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조선 건국 이후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존속되어, 1395년부터 새로운 도읍인 한양의 숭교방(崇敎坊) 지역에 대성전(大聖殿)과 동무(東)·서무(西)·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양현고(養賢庫) 및 도서관인 존경각(尊敬閣) 등의 건물이 완성되면서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성균관은 태학(太學)으로도 불리었으며, 중국 주나라 때 제후의 도읍에 설치한 학교의 명칭인 '반궁(泮宮)'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성균관에는 최고의 책임자로 정3품직인 대사성(大司成)을 두었으며, 그 아래에 좨주(祭酒)·악정(樂正)·직강(直講)·박사(博士)·학정(學正)·학록(學錄)·학유(學諭) 등의 관직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교육제도는 과거제도와 긴밀히 연결되어서, 초시인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儒生)에게 우선적으로 성균관에의 입학 기회를 주었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개국 초에는 150명이었으나, 1429년(세종 11)부터 200명으로 정착되었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을 상재생(上齋生)이라 하였으며, 소정의 선발 시험인 승보(升補)나 음서(蔭敍)에 의해 입학한 유생들을 하재생(下齋生)이라 하였다. 성균관 유생은 기숙사격인 동재와 서재에서 생활하였으며, 출석 점수 원점(圓點)을 300점 이상 취득해야만이 대과 초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유생의 생활은 엄격한 규칙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자치적인 활동기구로 재회(齋會)가 있었다.

유생은 기숙사생활을 하는 동안 국가로부터 학전(學田)과 외거노비(外居奴婢) 등을 제공받았으며, 교육 경비로 쓰이는 전곡(錢穀)의 출납은 양현고에서 담당하였다. 유생은 또한 당대의 학문·정치현실에도 매우 민감하여 문묘종사(文廟從祀)나 정부의 불교숭상 움직임에 대해 집단 상소를 올렸으며, 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권당(捲堂:수업거부) 또는 공관(空館)이라는 실력행사를 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 학문의 전당으로서 관리의 모집단으로 주요한 기능을 한 성균관은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교육재정이 궁핍화하고 과거제도가 불공정하게 운영되면서 그 기능이 약화되었다.


1894년의 갑오개혁은 성균관의 역사에서 중요한 굴절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갑오개혁이 단행되면서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근대적인 교육개혁이 추진되면서 일정한 변모를 겪게 되었다. 성균관은 개화의 흐름 속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유학과 도덕을 지켜 나가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며, 1946년 성균관대학의 설립으로 그 전통은 계승되었다. 1785년(정조 9)에 편찬된 《태학지(太學志)》에는 성균관의 건물 배치도 및 성균관 제도의 변천과정, 유생의 활동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어서 조선시대 성균관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된다.



 

 

3) 신진사대부의 성장

 

 

과전


http://kr.dic.yahoo.com/search/enc/result.html?pk=10954700


고려말에 과전법(科田法)에 따라 문무양반·현직 관리 및 군인들에게 준 토지. 1391년(공양왕 3)에 종래의 전시과(田柴科)를 개혁하여 수조권만 갖게 하였다. 대체적으로 휴한농업(休閑農業)의 지양과 연작농법의 일반화라는 생산력적인 지반 위에 성립된 과전법은 전국 토지의 대부분을 국가수조지로 편성하고, 극히 일부분만 관인층을 비롯한 소수 공역자(公役者)에게 수조권(收祖權)을 위임하였으므로 수조권적 토지지배 관계보다도 개별소유권 중심의 토지지배관계를 기본바탕으로 하여 운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과전법에서는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신분제적 측면이 전대에 비하여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그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과전은, 첫째 중앙에 거주하는 관인의 기본적인 생활보장을 위하여 설정된 전형적인 신분제적 분급수조지로서, 고려 전시과의 일반전시(一般田柴;科田) 및 한인전(閑人田)·구분전(口分田) 계열의 속성을 이어받은 것이며, 둘째 국가수조권의 일부를 사인(私人)에게 위임하여 수조권자가 타인 소유지에 대한 그 수조권을 직접 실현하도록 설정한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가장 보편적인 유형으로, 고려 후기 사전(私田)의 토지지배 관행을 답습한 것이었다. 그러나 과전은 원칙상 그 절수자(折受者)가 자격을 상실하는 때에는 국가에서 환수하도록 규정되었다는 점에서 고려 후기 녹과전(祿科田)의 계열을 이어받은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고려 때의 과전 18과는 다음과 같다. [제1과] 재내대군(在內大君)∼문하시중(門下侍中)은 전(田) 150결, [제2과] 재내부원군(在內府院君)∼검교시중(檢校侍中)은 130결, [제3과] 찬성사(贊成事)는 125결, [제4과] 재내제군(在內諸君)∼지문하(知門下)는 115결, [제5과] 판밀직(判密直)∼동지밀직(同知密直)은 105결, [제6과] 밀직부사(密直副使)∼제학(提學)은 97결, [제7과] 재내원윤(在內元尹)∼좌우상시(左右常侍)는 89결, [제8과] 판통예문(判通禮門)∼제시판사(諸寺判事)는 81결, [제9과] 좌우사의(左右司議)∼전의정(典醫正)은 73결, [제10과] 육조총랑(六曹摠郞)∼제부소윤(諸府小尹)은 65결, [제11과] 문하사인(門下舍人)∼제시부정(諸寺副正)은 57결, [제12과] 육조정랑(六曹正郎)∼화녕판관(和寧判官)은 50결, [제13과] 전의시승(典醫寺丞)∼중랑장(中郎將)은 43결, [제14과] 육조좌랑(六曹佐郎)∼낭장(郎將)은 35결, [제15과] 동서 7품(東西七品)은 25결, [제16과] 동서 8품(東西八品)은 20결, [제17과] 동서 9품은 15결, [제18과] 권무산직(權務散職) 10결이다.


 

 

녹봉

http://blog.naver.com/hesbs/120006934192

http://nhs1970.new21.org/highhis1/data/4nokbong.htm#[고려]

고려 시대에는 1076년(문종 30)에 전시과제도(田柴科制度)와 함께 녹봉제가 크게 정비되었다. 그러나 건국 초기부터 비슷한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

 즉, 후삼국 통일 이전에 태조가 문경지방에서 귀순해온 고사갈이성주(高思葛伊城主) 흥달(興達)과 그 세 아들에게 청주록(靑州祿)·진주록(珍州祿)·장천록(長淺祿)을 주었으며, 신절(臣節)을 제의해온 연산매곡인(燕山昧谷人) 공직(傾直)에게 백성군록(白城郡祿)을 주었다고 한다.

 이들에게 주어진 녹의 성격을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신라 말기에 시행되고 있었던 녹읍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귀부한 신라의 경순왕에게 매년 천석의 녹을 주었으며, 그를 따라 온 신하들에게도 전록(田祿)을 주었다.

 이것은 그들에 대한 특별한 예우이며, 일반관료들에게 주어진 녹봉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또한, 광종이 즉위 후 건국 초기의 공역자(功役者)들에게 일정한 양의 곡식을 내려 예식(例食)으로 했다는 것도 건국공로자들에 대한 논공행상으로 보인다.

 관료전반에 녹봉을 지급한 것은 965년(광종 16)에 비롯된다. 즉, 당시 내의령(內議令 : 內史門下省의 장관) 서필(徐弼)은 광종이 중국계 귀화인들에게 신하들의 제택(第宅)을 빼앗아주는 등 그들을 후대하던 처사에 반발해 “녹봉의 나머지를 모아 조그마한 집을 마련했으니 넓은 제택을 왕에게 바치겠다.”라고 상소한 내용에서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 때의 녹봉제도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당나라의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전면적으로 관제를 정비하던 성종 때에 와서 점차 확충되었으리라 보인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침입을 당한 뒤에 늘어난 군수(軍需)의 조달로 백관의 녹봉이 부족하게 되자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빼앗아 이에 충당하려 하였다. 이것을 보면, 고려의 관제에 있어 녹봉제가 일반화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덕종 때 좌복야(左僕射) 이응보(異膺甫)에게 사도(司徒)의 직을 겸하게 하고, 우복야 김여탁(金如琢)에게 사공(司空)을 겸하게 하면서 이에 따른 녹봉을 추가했다는 사실이 있다. 또 같은 해에 외관록(外官祿)으로서 동경관록(東京官祿)에 대한 녹봉기록이 보인다.

 즉, 유수(留守) 250석, 판관(判官) 130석, 사록(司錄) 70석, 장서기(掌書記) 60석, 법조(法曹) 30석 등 이었다. 정종 때는 백관에 녹패(祿牌)를 내려주고 있다. 이와 같이 고려 초기의 녹봉제는 단편적인 사료에서 실시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며, 제도의 전면적인 실태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1) 문종 녹봉제

 1076년(문종 30)에 관제 개혁 및 토지제도를 확충정비해 고려 왕조의 통치조직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 때 관료체제의 정비작업의 하나로서 녹봉제 정비도 있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좌창(左倉)에 세입으로 들어오는 쌀·조·보리 모두 13만9736석13두를 과(科)에 따라 주되 중앙에는 비주(妃主)·종실·백관, 지방에는 삼경(三京)·주(州)·부(府)·군(郡)·현(縣)의 관리에게 녹봉을 주어 염치를 기르고, 그 밖에 잡직·서리·공장 등 직역을 가진 모든 자에게는 상봉을 주어 농사를 대신하게 했는데, 이를 별사(別賜)라고 하였다.

 한편, 서경관록(西京官祿)은 서경 대창(大倉)의 서해도세량(西海道歲粮) 1만7722석13두로써 했으며, 그 밖에 외관록은 반은 좌창에서, 반은 외읍(外邑)에서 충당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로써 이 때에 정비된 녹봉제의 대체적인 내용은 ① 비주록(妃主祿), ② 종실록(宗室祿), ③ 문무반록(文武班祿), ④ 권무관록(權務官祿), ⑤ 동궁관록(東宮官祿), ⑥ 서경관록, ⑦ 외관록, ⑧ 잡별사, ⑨ 제아문공장별사(諸衙門工匠別賜)로서 역(役) 3백일 이상자의 9항목으로 되어 있다.

이들 녹봉제 중에서 가장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문무반의 것이었다. 이것을 문종 30년에 경정된 전시과제도와 대비해보면 몇 가지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첫째, 전시과에는 시토사(試討史)·시서예(試書藝)가 있으나, 녹봉제에는 시륙상서 좌우상시(試六尙書左右常侍) 이하 시제대묘승(試諸大廟丞)까지 거의 각 품직에 망라되어 있다.


시직(試職)은 고일품(高一品)은 행(行), 하일품(下一品)은 수(守), 하이품(下二品)은 시직이라는 송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규정된 품보다 2품이나 낮은 품관이 관직에 임용되었을 때 적용된 관직이었다.


그러므로 시직관의 녹봉은 정직보다 일등 혹은 그 이하의 녹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시직이 유독 녹봉표에만 많이 보이고 있어 전시과표의 단순한 누락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둘째, 문종조 관제에 보이는 중서문하성의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상서도성(尙書都省)의 지성사(知省事), 중추원의 판원사(判院事)·지원사(知院事) 등이 녹봉표에 보이지 않는 점이다.


단순한 누락이나 혹 겸직 등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셋째, 품계와 녹봉의 등급은 일치하는 경우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같은 품관이라 하더라도 녹봉의 등급에는 여러 등급이나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수가 있다.


넷째, 녹봉액의 기준이다.


최고 녹봉액은 종실록의 공(公)으로 460석10두인데, 당나라의 경관품록 7백석과 대비하면, 고려는 15두1석, 당나라는 10두1석이므로 같은 양의 녹을 받고 있다. 제2등 녹봉액은 경관 종1품으로서 3성의 장관과 종실의 후(侯)가 각기 4백석을 받고 있어 당나라의 종일품록 6백석과 녹봉액이 같다.


그러나 1등급·2등급의 녹봉액 이외에는 당나라의 것과 대부분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관(貞觀) 2년의 녹봉제에는 중앙관제의 경우 정종(正從)의 품계 18과로 나누어 일정한 차등을 두고 지급하고 있는데, 고려 문종 때는 47등이라는 복잡한 등차로 세분되고 있으며, 차액에도 일정한 비율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권무관록(權務官祿)은 임시관서의 성격을 띠는 제사(諸司)·도감(都監)의 실무직에 종사하는 준품관적(準品官的)인 관직이다. 권무관(權務官)의 녹봉은 최고 60석에서 최하 6석에 이르기까지 10등급이 있다.


외관록은 ≪고려사≫ 식화지 외관록의 기록에, 덕종 원년, 문종조(文宗朝), 숙종 6년, 인조조(仁宗朝)로 구분되는데 문종조와 인종조라고 된 부분은 명종대의 사실로 밝혀지고 있어, 문종조의 녹봉제와 대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앙관의 녹액보다 낮은 등급의 녹봉을 받고 있거나, 또 삼경(三京) 중에서도 서경의 유수는 같은 품관이면서도 늘 상위의 녹봉을 받고 있어 차이를 보이는 등의 특징이 있다.


서경관록 및 동권무관록은 서경의 토관과 그에 따른 권무관록으로서 문종 30년에 서경토관은 최고 246석10두, 최하 8석, 권무관은 최고 40석, 최하 8석10두로 규정되어 있다.


비주록(妃主祿)은 여러 원주 및 귀숙비(貴淑妃)·공주·궁주(宮主)에게 주는 녹으로 문무반과 비교하면 최고가 8등에 해당하며, 종삼품급에 준하고 최하의 녹봉은 정4품관에 준한다.


종실록은 종실의 공(公)·후(侯)·백(伯) 등 봉작에 따라 6등작으로 되어 있다. 공은 고려의 최고녹봉액인 460석10두를 받는데, 당나라의 정일품관의 녹 7백석에 해당한다.


동경관록은 최고액은 빈객첨사(賓客詹事)가 3백석으로 최하는 약장승(藥藏丞) 4석으로 되어 있다.


잡별사(雜別賜)는 이속을 중심으로 한 말단 원리(員吏)에 대한 보수로서, 1년 이상 근무자, 3백일 이상, 180일 이상의 3단계로 나누어 별사미(別賜米)란 명목으로 되어 있다.


제아문공장과 3백일 이상 역사자(役事者)에게는 역시 별사미란 명목으로 좌창에서 지급되지 않고 해당관서의 공해전(公力田)에서 거둔 도미(稻米) 중에서 급여되고 있다.


(2) 인종 녹봉제


문종 30년(1076) 녹봉제의 정비 이후, 예종 16년(1121)에 주진장상장교록(州鎭將相將校祿)이 정비되었다. 이것은 당시 심각해진 여진(女眞)에 대한 북변의 군사적 위협과 관련되었을 것이다. 그 뒤 인종조에 다시 대규모의 녹봉제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 때 재정비된 녹봉제는 문무반 및 권무관·동궁관·비주·종실록이며, 새로 확대된 것이 치사관록(致仕官祿)이다.


치사관록은 이전에도 보이기는 하지만 이 때에 와서 완비된 것으로 보인다. 인종녹제(仁宗祿制)에서 문하시중 이하 어사대부 등에 이르기까지 6등급으로 규정되어 있다.


아마도 정4품 이상에게 치사록(致仕祿)이 주어진 듯하며, 예외는 있으나 당제와 같이 현임록(現任祿)의 반을 원칙으로 한 것 같다. 중앙관록은 문종 때와 비교하면 뚜렷한 변화가 보인다. 녹봉지급의 등급이 47등급에서 28등급으로 줄었다.


이것은 그 동안 관제의 정비작업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비주록에서는 왕비가 새로 추가되고 제원주가 빠졌다. 종실록(宗室祿)은 문종 때의 6등작에서 5등작으로 줄고, 최고인 국공(國公)은 녹봉제 최고봉인 6백석이며 당나라의 정일품관보다 훨씬 웃돌고 있다.


권무관은 문종 때보다 일등이 줄어 9등으로 되고 관직수도 감소되고 있다. 동궁관록도 문종 때의 13등급에서 11등급으로 줄었다. 최고 3백석을 받던 빈객첨사와 다음 2백석을 받던 소첨사(少詹事)가 보이지 않고, 첨사부승(詹事府丞)에서 시작되고 있다.


녹봉제의 실태를 보면, 첫째, 관리임용과 녹봉지급의 기준은 매년 3월 전에 차출해 그 해 6월 전에 임용되면 녹봉의 전액을 주고, 6월 뒤에 부임하게 되면 녹봉의 반액을 급여하며, 3월부터 6월 전에 차출해 10월 전에 취임하면 반록(半祿)을 주고, 10월 뒤에 임용되면 그 해의 녹봉은 전혀 지급하지 않는다.


둘째, 녹봉지급 시기는 원칙적으로 일년에 2회 반록되었던 것 같고, 매년 정월 7일이 정기반록일의 하나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 일정한 시기를 찾기 어렵다.


셋째, 녹봉을 받는 관리에게는 녹봉의 사령서라고 할 수 있는 녹패(祿牌)를 내렸다. 예외가 있으나 원칙적으로 인일(人日)인 정월 7일에 의식을 치르고 내려주고 있으며, 동시에 반록도 행해지게 되었다. 넷째, 녹봉의 품목은 쌀·조·보리 등이 중심이고, 백은(白銀)을 내리는 경우도 있었다.


다섯째, 녹봉을 지급하는 장소인 좌창은 문종 때에 우창과 함께 설치되어 충선왕 즉위 초에는 광흥창(廣興倉)으로 개칭되었다. 좌창은 10만여 결(結)에서 수납한 조세를 보유하는 큰 국고로서 약 14만석을 저장하고 있었다.


여섯째, 녹봉에 소요되는 양곡세입량은 문종 때의 기준으로 하면 1년에 13만9736석13두와 서경관록을 위한 서경대창(西京大倉)의 1만7722석13두를 합친 15만7천여 석이었다. 물론 이들 세입양곡은 국고수조지(國庫收租地)에서 들어온 것이다.


고려 말에는 50만결의 토지 중에서 10만결을 녹봉의 재원으로 계상하고 있어 전국 토지의 5분의 1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 녹봉의 다른 재원으로서 제아문공장과 3백일 이상 역자(役者)의 별사(別賜)는 군기감·중상서(中尙署) 등의 공해전 수입으로 충당되어 정규관료와는 구별되고 있었다. 또한 외관록의 경우도 문종 녹제 이후 숙종 6년에는 외읍의 공해전이 재원으로 전용되고 있었다.


(3) 후기의 녹봉


무인 정권기에 접어드는 명종대에 좌창이 비어서 전목사(典牧司)·장작감(將作監)의 백금이나 포를 녹봉으로 전용해 충당하였다. 더욱이 몽고 항쟁기에 들어 녹봉은 물론 국가재정에 위기를 맞게 되었다.


1257년(고종 44) 백관에게 녹봉을 지급할 수 없게 되자, 녹과전 제도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식으로 실시하게 된 것은 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된 뒤인 1272년(원종 13)이었다. 물론 녹과전의 지급은 녹봉의 감소를 보충하기 위한 것이며 따라서 관리들은 녹봉과 겹쳐서 받게 된 셈이었다. 수급자는 문무양반에게만 국한되었다.


충렬왕 때에 원나라의 일본 원정에 따르는 전비·군량의 부담으로 창고가 허갈되어 녹봉의 재원은 부족하였고, 심왕(瀋王)이 설치되면서 그 녹봉까지 감당하게 되어 녹봉지급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공민왕 때는 왜구의 침입으로 녹전(祿轉)·조운(漕運)이 불통해 일부의 녹봉은 중단되기까지 하였다. 이 시기에 정치개혁이나 토지경제의 재건을 위한 노력과 더불어 녹봉제의 정비에도 관심을 보였으나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마침내 1388년(우왕 14)에 360석을 받아야 할 재상의 녹봉이 20석도 못하게 되었다는 조준(趙浚)의 상서가 있었다. 1391년(공양왕 3) 과전법의 제정으로 군국(軍國)의 당면한 수요와 더불어 국가의 재정기능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조선왕조와 관련되는 것이었다.


[조선]

 조선 시대의 녹봉제는 새 왕조가 출발하기에 앞서 재정적 기반이 구축되어 있었다. 고려 공양왕 3년 과전법(科田法)을 공포해 관료들에게 관직의 높고 낮음에 따라 분배하였다. 아울러 국가재정의 파탄으로 거의 정돈상태에 빠졌던 녹봉도 재원을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녹봉의 재원이 어느 정도 배정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당시 전제개혁론자 조준이 동서양계(東西兩界)를 제외한 6도의 간전 50만결 중 녹봉을 위해 10만결을 좌창에 소속시키도록 건의한 것을 보면 적어도 녹봉제를 재정비할 수 있는 재정적 기초를 확립한 것으로 생각된다.

 (1) 초기의 녹봉제

 1392년(태조 1) 문무백관의 직위를 정하고 새로운 관료체제를 정비하였다. 이들에 대한 녹봉의 지급은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 부전녹봉조(賦典祿俸條)에 의하면 “1품부터 9품까지 18과로 나누어 반사(頒賜)하되, 삼사(三司)에서 녹패를 분급해 광흥창에서 지급하도록 한다.” 하였다.

 고려 문종 때 47과에서 인종 때 28과로 개정되었다가 조선 건국 초에 18과로 정비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녹봉제 내용은 찾아볼 수 없고, 최초의 녹봉제 내용은 1407년(태종 7) 정월 좌정승 하륜(河崙)이 그 증감상정을 계청해 백관녹과가 경정(更正)된 데서 알 수 있을 뿐이다.

 내용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