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1. 고대의 정치



1-1. 고대의 세계


춘추전국시대

 

주 왕실은 동천과 함께 권세를 잃고 이에 대신하여 춘추의 5패 - 제(齊), 송(宋), 진(晋), 진(秦), 초(楚) -

라고 불리우는 패자가 천하를 호령하기도 하고 전국의 7응이라고 불리운 제후 즉 한(韓), 위(魏), 조(趙), 제(齊), 연(燕), 초(楚), 진(秦)이 정치를 전단하는 시대가 시작된다. 이러한 춘추전국시대의 나라들은 모두 주왕실의 제후들이었으나, 당시 정치가 문란 해서 주왕실의 위력이 제후들에게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공자, 노자, 맹자 등 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했으며 제지백가(諸子百家)라는 학술 사상이 발달했다. 대표적인 유파로는 유가(儒家), 도가(道家), 묵가(墨家), 법가(法家), 음양가(陰陽家), 명가(名家), 종횡가(縱橫家), 농가(農家), 병가(兵家), 소설가(小說家), 잡가(雜家) 등 10대가 있었다. 각 유파는 상호 논박하면서 사상적 발전을 이루었으므로 당시 학술 문화가 크게 발전하는 계기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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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주(周)나라 때 제후국의 하나로 중국 최초로 통일을 완성한 국가(BC 221∼BC 207)

이다.중국역사상 최초로 통일 국가를 이룩한 진의시황제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

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는 승상 이사에게 명하여 문자를 통일하고 도량형을 통일하는 등 모든 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장군 몽염에게 명하여 흉노를 토벌하고 만리장성의 대공사를 감독토록 하였다. 시황제는 자기의 정책을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세력을 철저히 단속하기 위하여 역사상 유례없는 이른바 분서갱유를 단행하였고, 아방궁의 건설과 여산릉의 공사 등으로 3백만명의 무상 노동 동원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재정을 조달하기 위하여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였다. 과중한 조세 부담과, 가혹한 법과 형벌로 온 천하는 마치 감옥과 같았다.

 진왕조의 지주 정권과 농민간의 모순은 시황제가 죽은 다음해인 B.C. 209년에 마침내

진승(陳勝). 오광(吳廣)이 반란을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반란을 신호로하여 각지에서는 진나라 타도를 외치는 반란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고 유방과 항우도 이때에 봉기하여 여러 제후들과 힘을 합쳐 진나라 타도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진나라를 멸망시킨 후는 유방과 항우가 천하를 다투게 된다. 유방의 진영에는 소하, 장량, 한신 등의 명참모.명장이 있어 유방을 잘 보좌하였고, 항우의 진영에는 범증이 자주계책을 진언하였으나 항우는 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홍문의 만남에서 유방은 죽음의 위기를 맞았으나 구사일생으로 모면하였고, 그후에도 여러번 위기를 맞았으나 명참모들의 계칙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처음 유방에게 불리했던 전세가 날이 갈수록 유리해져 유방은 마침내 궁지에 몰린 항우를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완전 고립시킴으로써 오강에서 최후를 마치게 한다


이 유방과 항우의 싸움은 소설 [초한지(楚漢誌)]의 무대이기도 하다. 엄격히 말할때 진나라 타도의 수훈 갑은 항우임에 틀림 없었으나 마지막 승리의 열매를 거둔것은 전한 왕조를 세운 유방이었다.

BC 10세기 목축으로 이름이 나 있던 대구(大丘)의 비자(非子)는, 주나라 효왕(孝王)으로부터 진읍(秦邑:甘肅省 淸水縣)에 봉해져 서융(西戎)의 방위를 맡음으로써 진을 일으켰다. 그 후 진은 BC 8세기 초, 주나라가 견융(犬戎)의 공격을 받을 때 유왕(幽王)을 도왔고, BC 771년 평왕(平王)이 동쪽 낙읍(洛邑)으로 천도하였을 때에는 이를 호위한 공으로 산시성[陝西省]의 서부 지역을 맡아 제후(諸侯)로 승격하였다. 이가 양공(襄公)이다.

 

진나라는 BC 7세기의 무공(武公) 때부터 정복지를 현(縣)으로 만들기 시작했는데, 현이라고 해도 그것은 명목일 뿐 실상은 읍과 다름이 없었다. 진나라는 간쑤성[甘肅省] 동부에서 웨이수이강[渭水] 연안을 따라 이동하다가 무공의 동생인 덕공(德公) 때에 옹성(雍城:陝西省 鳳翔縣)으로 이동하였다.


춘추시대의 진 BC 659년에 이르러 목공(穆公)은 백리해(百里奚)·건숙(蹇叔) 등을 등용해 정치를 혁신하고, 동쪽의 진(晉)나라와 싸워 하서(河西)의 땅을 빼앗았으며, 또한 서융 출신의 유여(由余)를 등용, 서방 이민족의 12국을 통합하고 영토를 1,000리에 이르도록 확장하여 서방의 패자(覇者)가 되자, 주나라 황실에서는 동고(銅鼓)를 하사해 경축하였다 한다. 그 후 하서 땅은 다시 진(晉)나라에 빼앗기는 등 진(秦)나라의 당면한 적은 진(晉)나라 였으므로 초(楚)나라와 손을 잡고 빈번히 진(晉)나라와 싸웠다. 진나라는 무공(武公)에서 목공(穆公) 때에 걸쳐 산시성 내의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여 관중(關中)의 땅을 통일하였다.


전국시대의 진 헌공(獻公) 때에는 순사(殉死)의 습속을 금지하고 BC 383년에는 동녘에 역양성(陽城:陝西省 臨潼縣 북동)을 구축하여 동방으로의 진출 의지를 보여주었다. BC 362년 효공(孝公)이 왕위에 오르자 위(衛)나라 사람 상앙(商)을 등용해 내정을 개혁하였다. 즉 종래의 혈연 존중의 인사를 고쳐서 공적에 따른 신분제도를 설정하고, 군사조직과 토지제도를 혁신하여 조세(租稅)를 공평하게 했으며, 병농(兵農)을 일치시켰다. 이때부터 종래의 읍(邑)과는 그 성격이 다른새로운 현(縣)이 생겼고, 군주권이 현내의 서민과 직결되었다. 이같이 하여 국력이 증강된 진나라는 위(魏)나라를 공략해 하서(河西)의 땅을 빼앗았기 때문에 위나라는 수도 안읍(安邑:山西省 解縣)에 불안을 느껴 대량(大梁:河南省 開封縣)으로 천도하였다. 진나라는 효공 때 수도를 셴양[咸陽]으로 옮겨 셴양은 진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로 남았다.

 

위나라의 대량 천도와 진나라의 국력 증강은 열국(列國)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열국은 연합전선을 펴 진나라를 관중(關中)의 땅에 봉쇄해 두려는 소진(蘇秦)의 이른바 ‘합종책(合縱策)’을 안출하였다. 이를 알게 된 진나라의 혜문왕(惠文王)은 공손 연(公孫衍)으로 하여금 ‘합종책’을

분쇄하도록 명하고, 장의(張儀)로 하여금 각국이 진나라와 단독강화를 맺게 하는 이른바 ‘연횡(連衡)’을 성립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책동이 진행되고 있는 사이에 진은 파(巴)·촉(蜀), 즉 쓰촨성[四川省]을 장악하고, 초(楚)나라로부터는 한수이강[漢水]의 상류를 빼앗았다. 이로써 진나라는 어느 때든지 초나라를 공격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하였다.


혜문왕은 BC 325년부터 공(公) 대신 왕호를 사용하였는데, 이로부터 다른 나라들도 모두 왕호를 쓰게 되었다. 소양왕(昭襄王) 때에 이르러 청두[成都] 부근에 운하를 열고 쓰촨의 옥야(沃野)를 개발하는 한편,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는 BC 278년에 대병력을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하여 수도 영()을 함락하고, 초왕 역대의 능역(陵域)이던 이릉(夷陵)을 불태워버렸다. 초나라는 허난[河南]의 진(陳:河南省 淮陽縣)으로 옮겨야 하였고, 뒤에 다시 춘(壽春:安徽省 壽縣)으로 옮겼다. 진나라 군대는 양쯔강[揚子江]을 건너 다시 구이저우성[貴州省]의 동부와 후난성[湖南省]의 서부도 공격하였다. 백기 장군은 북방의 조(趙)나라도 공격하여, 장평(長平)의 싸움에서는 항복한 조나라의 군사 40만을 구덩이에 생매장하고 수도 한단(邯鄲)에 육박하였으나, 초(楚)나라와 위(魏)나라의 원군이 투입되어 포위망을풀고 철수하였다.


이즈음 진나라는 서제(西帝), 제(齊)나라는 동제(東帝)라고 높여서 ‘황제’ 칭호를 쓰기도 하였으나 얼마 후 다시 왕호를 썼다. 소양왕이 위나라 사람 범수(范)를 등용한 뒤부터는 그의 건의에 따라 ‘연횡책’을 버리고 ‘원교근공(遠交近攻)’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이로부터 진나라는 마지막 마무리 작전에 들어갔다. 이와 같은 진나라의 형세를 살핀 주왕(周王) 난()은 열국을 ‘합종’하여 진나라를 칠 계획을 세웠고, 이를 안 진나라는 주나라부터 공격을 시작하자 난왕은 영읍(領邑) 30과 인구 3만을 바치고 항복함으로써 주나라는 멸망하였고, 7년 후에는 동주군(東周君)도 멸망하였다.


진의 통일 BC 247년에 즉위한 진나라 왕 정(政)은 어렸기 때문에 모태후(母太后)가 섭정했는데, 장성해서 친정(親政)을 시작하자 재상 여불위(呂不韋) 등을 제거하고 (李斯)와 같은 인재를 등용하였다. 그는 법가(法家)의 학자로서 이후부터 진나라 정치는 그의 의견에 따라 시행된다.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원교근공’ 정책을 써서, 진나라의 왕전(王) 등 장수들은 여러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어 BC 230년에는 먼저 한(韓)나라를 멸망시키고, 조(趙)·연(燕)·초(楚)·위(魏)·제(齊)의 순으로 6국을 통일하였다.


한나라가 멸망하고부터 제나라가 멸망하기까지는 불과 1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진왕 정은 황제가 되고, 이로부터 진나라는 황제가 죽은 뒤에 그 이름을 정하는 시호를 사용하지 않게 되어 그는 시황제(始皇帝)가 되고, 그 후의 황제는 이름 없이 2세·3세로 부르게 되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가 된 진나라는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여 전국을 36개 군으로 하고 각종 통제정치를 단행, 획일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다. 이른바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제가 완성된 것이다. 시황제는 다시 북쪽의 흉노를 쫓아내어 만리장성을 구축하고 남쪽은 광둥성[廣東省]·광시성[廣西省]에서 베트남 북부까지 정복하였다. 진나라의 위명은 해외에까지 뻗쳐, 중국의 다른 이름을 ‘支那(지나)·震旦(진단)’ 등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진(秦)이라는 음이 와전한 것이다. 그러나 시황제의 대외전쟁은 결국 국민의 부담이 되는 것이어서 만년에는 민심이 동요하자 극단적인 탄압정책이 시작되었다. 시황제가 죽은 뒤에는 2세 황제가 위에 올랐는데 환관인 조고(趙高)와 이사(李斯)의

불화로 조고가 이사를 죽이고 궁중의 권력을 장악했으며, 2세 황제도 살해하였다. 유군(幼君) 자영(子)이 진왕이 되어 조고를 처단했으나, 자영은 BC 207년 한중(漢中)에 들어온 유방(劉邦)에게 항복함으로써 시황제의 중국 통일 후 불과 3세, 15년 만에 진나라는

멸망하였다.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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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왕조는 기원전 202년 고조 유방이 건국해 220(연강 원)년 위의 조비에게 선양되기까지 약 400년 간 계속된 왕조다. 일반적으로 전한(기원전 202~9),후한 (25~220)으로 구분하고 그 중간에 신(8~23)이 존재한다. 또 전한은 서쪽 장안을, 후한은 동쪽 낙양을 도읍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서한, 동한으로 구분해 부르기도 한다. 삼국지의 서막은 후한 말기에 일어난 황건적의 난에서 비롯되는데, 먼저 후한 왕조의 역사를 보면,

전한은 15대 약 200년에 걸쳐 지속되지만 외척 왕망이 어린 황제를 옹립해 권력을 장악하고 서기 8년 황제 지위를 찬탈해 신왕조를 세우기에 이른다. 그러나 유교에 기반을 둔 이상적인 정치를 구현하려고 해 현실성이 결여된 정책을 펴게 된다. 토지정책, 경제정책, 대외정책 등이 모두 실패로 끝나 각지에서 한조 부흥을 외치는 의병이나 농민 봉기(적미의 난 등), 지방 호족의 반란이 잇따른다. 23년 왕망은 도성에 침입한 반란군에게 살해되어 15년 만에 신 왕조는 무너지고 만다. 이후 반란 세력 가운데 한 황실의 일족인 유수가 25년에 광무제로 즉위한다. 이것이 후한 왕조의 시작이다. 후한 왕조는 도읍을 낙양으로 옮기고 10여 년에 걸쳐 각지의 반란 분자들을 항복시켜 다시 천하를 통일한다


 

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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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국이 각기 건국 초기의 부족국가적(部族國家的)인 틀에서 벗어나 고대 민족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때부터 고구려·백제가 멸망하고 통일신라시대가 개막되기까지의 시기이다. 3국은 108년 중국 한(漢)나라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그 고지(故地)에 둔 한사군(漢四郡)의 세력이 강원도와 충청남도의 일부에까지 미치자 이에 눌려 긴 정체기(停滯期)를 보냈다. 313년 고구려가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을 차지하고 이어 대방군(帶方郡) 등 한반도에 깊숙이 뿌리 박았던 중국 세력을 몰아내면서 3국은 세력 신장(伸張)을 위한 각축(角逐)에 들어갔다.

3국 중 고구려와 백제는 고구려가 낙랑과 대방을 차지한 직후부터 마찰을 일으켜 369년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백제의 치양(雉壤:황해도 白川)을 침범하면서 본격적으로 층돌하게 되었다. 반격에 나선 백제 근초고왕의 태자 근수구는 더 북진하여 수곡성(水谷城:新溪)까지 이르렀고 이후 백제의 세력은 옛 대방지방을 석권하고 371년에는 평양성을 침공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하게 하는 등 양국은 깊은 적대관계에 빠지게 되었다. 신라는 백제가 369년 마한(馬韓)을 통일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해가는 동안에도 가야 제국과 왜인의 세력에 눌려 어려움을 겪다가 눌지왕(재위 417∼458) 때에야 낙동강 동안(東岸)의 여러 소국(小國)을 병합하여 서진(西進)을 시도하지 못하다가 450년 신라가 고구려의 변장(邊將)을 살해함으로써 양국관계는 악화되어 신라는 자주 고구려의 침범을 받게 되었다. 백제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 의해 옛 대방땅을 빼앗긴 데 이어 475년에는 국도인 한성(漢城)을 빼앗기고 남천(南遷)하여 수도를 웅진(熊津)으로 옮겨야 하였다.

이로부터 고구려는 한동안 그 판도가 아산만(牙山灣)에서 조령(鳥嶺)·죽령(竹嶺)을 지나 평해(平海)에 이르는 선으로써 백제·신라와 국경을 이루어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나 신라·백제의 동맹으로 남진이 저지되고 551년 이후에는 양국이 공격의 주도권을 잡아 신라가 죽령 이북의 10군(郡)을 빼앗고, 백제가 한성 및 남평양(南平壤:北漢城) 등 6군을 수복하여 잠시 호각세(互角勢)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553년 신라에서 백제가 수복한 남북한성 등을 탈취하여 신라·백제의 동맹관계는 깨어지고 이로부터는 신라의 국세(國勢)가 급상승, 이제는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을 맺어 신라와 대항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수(隋)·당(唐) 등 북으로부터의 침략을 물리치는 한편, 백제와 번갈아가며 신라를 공략, 신라와 당나라의 연락로를 차단하는 등 신라를 고립상태로 몰았다. 이에 신라는 당에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동맹관계를 맺고 그 힘에 의지하여 660년에는 백제, 66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기에 이르러 삼국시대는 동족의 공존(共存)이라는 민족의식의 싹을 보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삼국시대는 부족국가로서 출범한 이들 나라가 원시적 국가체제에서 벗어나 그 성장과정에서 받아들이기 시작한 철기문화(鐵器文化)를 소화하여 철제 농기구 사용의 일반화로써 농경생활을 확립시켰고 정치제도를 제정·정비함으로써 고대국가가 형성된 시기였다. 또한 불교가 전래 확산되어 유교윤리와 더불어 후대 정신문화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대륙문화를 흡수, 재창조하여 선진문명국의 위치를 굳힌 시기라고 할 수 있다.



5호 16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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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였던 유연의 침입으로 서진의 멸망(316년)하고 서진에 있던 팔왕중의 한명인 사마예가 옛날 삼국 지의 오나라 수도였던 건업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동진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지만 5호 16국의 시대는 306년으로 보고있습니다. 이때부터 흉노와 같은 이민족의 세력이 강성하여 5개의 나라 "흉 노,강, 저, 선비,강"이라는 이민족이 나라를 세웠고 한족의 정통권을 사수하기위해 16개의 나라 "남 량, 남연, 북 량,북연,서량,서진,성한,전량,전연,전조,전진,하,후량,후연,후조,후진"등으로 나뉘게 됨


 

율령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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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사회에서 국가조직의 운영과 주민의 지배를 위해 설정한 법제도.


제도적으로는 중국에서 먼저 성립되어 동아시아 세계로 확산되었다. 율령제에 입각하여 지배체제를 운영한 나라는 한국·일본·베트남 등을 들 수 있다. 서구의 경우에는 역사적으로 사법(私法) 관계의 법률이 먼저 발달한 것에 비하여 동양사회에서는 공법(公法) 부분의 발달이 두드러진다. 율령제는 율령격식(律令格式)으로 이루어진 체계를 갖고 있었다.


이중 '율'은 범죄 형법에 관한 금지규정을 뜻하고, '영'은 비형법규정의 국가제도 전반에 관한 것으로, 양자는 일체성을 갖는 2대 기본법이었다. 그리고 '격'은 황제의 조칙에 의해 수시로 이루어지는 명령으로 율과 영을 보충하거나 변경하는 역할을 했고, '식'은 율령을 시행하는 시행세칙에 해당한다.


이 네 법령이 체계적으로 자리잡은 것은 수(隋)·당(唐)대였다. 중국에서 성문화된 율은 전국시대부터 기본법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진(秦)은 법가(法家)의 사상을 채용하여 엄격한 법규정을 적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漢) 이후의 역대 왕조는 율과 함께 영을 편찬했다. 남북조시대를 거쳐 수·당대에 들면서 율령격식이 가장 완비된 형태를 띠게 되었다.


수는 개황연간(開皇年間:581~600)·대업연간(大業年間:605~616)에 율령을 편찬했고, 당대에는 624년(무덕 7)에 공포된 무덕율령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의 개편이 있었다. 이러한 법령들이 동아시아 세계의 다른 국가에게도 규범이 되었다.


한국의 경우 고조선에 범금8조(犯禁八條)가 존재했음이 알려져 있지만 현재에는 생명·신체·재산에 관한 3개 조항만을 알 수 있다. 이후 등장한 국가인 부여에서도 법률의 존재가 확인되고, 고구려에서도 법률의 적용이 엄격했다는 사실이 전한다. 즉 중국과 같은 형식의 율령은 아니지만 전래의 관습법에 기초한 법체계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앙집권적 국가체제가 정비되면서 중국의 율령을 수용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373년(소수림왕 3)에, 신라는 520년(법흥왕 7)에 각각 율령을 반포했다. 백제의 경우는 잘 알 수 없으나 신라보다는 이른 시기에 정비되었을 것이며,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매지권(買地券)에서 '부종율령'(不從律令)이라는 표현이 나오므로 현실사회에서 율령제가 시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율령은 267년 중국의 진(晉) 무제(武帝) 때 집대성된 태시율령(泰始律令)을 모법(母法)으로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경우는 모법을 비롯한 구체적인 내용을 추정할 자료가 없다. 그러나 후대 최치원(崔致遠)의 〈봉암사지증대사탑비 鳳巖寺智證大師塔碑〉에서 법흥왕이 율조(律條)를 반포한 해를 언급하고 있을 정도로 신라사회에서 큰 의미를 갖는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또 〈봉평신라비 鳳坪新羅碑〉(524)에서도 '전시왕대교법'(前時王大敎法)이라 하여 율령반포 사실을 전함과 동시에 장형(杖刑)의 사례가 보이므로, 당시의 율령이 상당히 갖추어진 형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는 이러한 전통을 이어, 귀족세력을 억누르고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던 무렵인 654년(무열왕 1)에 당의 율령을 참작하여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새로 제정하기도 했다. 또 문무왕의 유언에서 율령격식의 불편한 것을 개정하라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율령제가 갖추어진 형태로 시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805년(애장왕 6)에는 공식(公式) 20여 조를 반포한 사실이 있고, 〈삼국사기〉 잡지(雜誌)의 골품규정은 834년(흥덕왕 9)에 재확인된 법률로 추정되고 있다. 이렇게 통일신라시대에는 율령제가 전반적으로 시행되었으며, 그 대상은 국가체제나 사회 전반에 미쳤을 것이다. 687년(신문왕 7)의 문무관료전(文武官僚田) 지급이나 722년(성덕왕 20)의 정전(丁田) 지급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고려는 제도의 많은 부분을 신라로부터 이어받았고, 당이나 송(宋)의 제도를 수용하기도 했다. 체계적인 자료는 없으나 현재 확인되는 고려의 율령 편목(編目)은 당의 율령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후기에는 원(元)의 영향을 받았고, 말기에는 명(明)의 법률도 수용했다. 〈고려사〉에는 '형법지'(刑法志)가 있으며, 여기에 율 69개조, 영 2개조 등 고려 율령의 일부가 전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명률(明律)을 기본적으로 참고하여 활용했는데, 1395년(태조 4)에는 〈대명률직해〉가 간행되었다. 국가체제가 안정기에 들면서 자체적인 법전의 정비에도 주력하여 1471년(성종 2)에 〈경국대전〉이 반행(頒行)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속대전〉·〈대전회통〉 등의 법전이 편찬되었다.


브라만교

http://blog.naver.com/sum2005/60017640946

고대 인도에서 불교가 생겨나기 전에 베다성전(聖典)에 의거하여 브라만계급을 중심으로 발달한 종교로 특정한 개조(開祖)가 없는 종교이다. 브라마니즘, 바라문교(婆羅門敎)라고도 한다. BC3세기 무렵부터 브라만교가 인도의 토착적인 여러 요소를 흡수하면서 크게 변모하여 이룩된 힌두교와 구별하기 위해 서양 학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브라만교는 힌두교의 기반을 이루고 있으며, 넓은 뜻으로 힌두교라고 하면 브라만교도 포함된다.

BC 1500년 무렵을 중심으로 인도아리아인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인더스강유역의 펀자브지방에 진입하고, 더욱 동쪽으로 진출, 도아브지방을 중심으로 브라만문화를 확립한 뒤, 브라만계급을 정점으로 하는 4계급으로 이루어진 사성제도(四姓制度;caste)를 발달시켰다. 그들은 인도에 진입할 때 그들의 종교를 가지고 와서 발전시켰는데, 그때부터 BC500년 무렵에 이르는 동안 『리그베다』를 비롯하여 『사마베다』,『야주르베다』,『아타르바베다』의 4베다와, 베다의 주석 및 제사에 관한 규칙을 기록한 『브라마나』, 『아라냐카』, 그리고 철학서 『우파니샤드』등 계시성전(啓示聖典:ruti)을 편찬하였다. 그 내용은 복잡하고 다양하여 자연신 숭배, 종교의례, 주술은 물론, 높은 철학적 사변(思辨)까지 담고 있다. 이 종교의 본질은 다신교이며, 『리그 베다』에서 발단하는 우주의 유일한 근본원리의 탐구는 『우파니샤드』에서 그 정점에 이르렀다.

우주 유일의 근본원리로서 브라만(梵)과 개인 존재의 본체인 아트만(我)이 상정(想定)되며,결국 이 두 가지는 동일한 것이라고 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이 표명되기에 이르렀다.

 브라만교에서는 바르나 아슈라마라는 특이한 제도가 있는데, 바르나 구성원이 한평생에 반드시 거치는 단계(생활기:asrama)가 설정되어 있다. 즉 학생기·가주기(家住期)․임주기(林住期)·유행기(遊行期)의 4단계로 되어 있다. 브라만교는 후에 민간신앙을 받아들여 인도 국민 일반에 널리 교세를 떨치려 하였는데, 이것을 힌두교라고 한다.


 

카스트제도

http://dugok.x-y.net/kor-his/world/i-cast.htm

사성(四姓) ·계급 ·등급 ·족보 등으로 번역되지만 어느것도 딱 들어맞는 말은 아니다. 카스트라는 말은 포르투갈어 카스타(casta:혈액의 순수성 보존을 위한 사회적 說法이라는 뜻)가 인도-유럽계(系) 언어로 전화한 것으로, 인도의 바르나(varna) 즉 ‘색(色)’, 나아가서는 피부의 색을 나타내는 말에 해당한다. 카스트를 어떻게 정의하느냐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는데, 복잡한 인도의 사회와 역사, 그리고 카스트의 기원(起源) 등에 관한 제설(諸說)과도 관련되어,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마우리아왕조

http://210.104.182.2/%7Ehyung/bada3030/public_html/b2i3.html

인도 최초의 고대 통일제국을 세운 왕조(BC 317∼BC 180).

시조는 찬드라굽타이다.

마우리아라는 이름은 ‘공작(孔雀)’을 뜻하는 속어에서 유래된다고 전해지며, 한역(漢譯) 불전(佛典)에서도 ‘공작왕조’라 번역된다.

BC 4세기경, 인도의 마가다국은 난다왕조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BC 317년경, 찬드라굽타는 북서 인도의 인더스강 상류지역에서 군사를 일으켜 마가다의 난다왕조를 무너뜨리고 마가다 국왕이 되었다. 그는 인접 여러 나라를 평정하여 거의 인도 전역에 걸친 통일국가 마우리아제국을 형성하였다. 그의 통치는 24년 동안 계속되었고,

아들에 이어 손자 아소카가 왕위를 계승하여 36년간 통치하였는데, 이 시대가 왕조의 최성기로 알려져 있다.

치안과 조세징수를 포함한 광범한 행정권이 주어진 태수는 종속된 현(縣)의 장관으로 독립·자립의 지배자로서의 권한을 지닌 현령(縣令)을 임명했는데, 그것이 아소카왕 사후 제국의 분열과 붕괴를 가져온 중요 원인이 되었다.

아소카왕의 사망으로 세력을 잃고 BC 180년 최후의 왕 브리하드라타의 장군 푸샤미트라(슝가왕조의 시조)에게 멸망당하였다.


 

소승불교

http://dugok.x-y.net/kor-his/sys/sosungbuda.htm

소승은 열소(劣小)한 수레라는 뜻으로 많은 사람이 함께 타고 피안(彼岸)에 이를 수 있는 큰 수레가 아니라고 한다.

인도의 불교사를 보면, 첫째로 석가모니 재세(在世)의 BC 6∼BC 5세기의 근본불교와, 둘째, 석가모니 멸후(滅後), 갠지스강 유역에 교단을 넓히고 《아함경(阿含經)》 등의 원시경전이 성립된 약 2세기 간의 원시불교(여기에는 근본불교도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 셋째, 아소카 왕의 불교 귀의(歸依)로 불교교단이 급속히 발전 확대됨과 동시에 교단분열이 일어났던 부파(部派)불교, 넷째, BC 2∼BC 1세기경에 대두되기 시작한 대승불교로 대별된다.

대승불교는 부파 중에서 진보적 ·혁신적이었던 대중부(大衆部) 및 재가신자 집단, 즉 보살중(菩薩衆)이 중심이 되어, 그 당시까지 우세한 세력을 유지하던 전통적 ·보수적 불교에 대항하였던 종교운동이며, 그때 스스로를 대승(大乘)으로 자칭하고 기성불교를 소승으로 낮추어 불렀다. 따라서, 후자가 스스로를 소승으로 자칭하는 일은 없다.

그 기원에서 소승불교는 원시불교를 포함하여 말하는 경우와 직접 대승운동의 상대방이 되었던 보수적인 모든 부파만을 일컫는 경우의 두 가지 용법이 있다. 부파는 처음 불멸(佛滅) 100여 년 후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의 2파(根本 ·部)로 나뉘고, 그후 약 1세기 동안에 대중부 계통이 계속하여 그후 약 1세기 동안에 상좌부 계통이 분열하였다. 이 분열의 사정과 명칭은 제전(諸傳)이 일치하지 않으나, 북전(北傳)의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의 기록에 따르면 [표]와 같다. 이 [표]에서 새로이 성립한 18부파(枝末十八部)를 근본 2부와 합해 ‘소승 20부’라 한다. 그러나 남방소전의 《도사(島史)》에서는 불멸 후 약 100년 동안에 상좌대중부의 근본분열이 있고, 그후 약 100년 동안 대중부 계통의 5부, 상좌부 계통의 11부로 분열하여 도합 18부의 부파를 전하고 있다.

각 부파는 자파의 권위와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각각의 입장에서 종래의 성전을 편집 집대성하였는데, 이로써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이 성립되었다. 또한 이에 대한 해석 ·주석이 이루어지고, 나아가 깊은 이해에 의해 체계화되어 논서가 성립하였다. 이를 아비달마(阿毘達磨)라고 부르며, 논장(論藏)으로 총칭한다. 경 ·율 ·논의 3장은 각 부파에 의해 정비되었지만, 현재 전하는 것은 주로 스리랑카상좌부의 3장과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 속하는 논장에 지나지 않는다.

부파 중 가장 유력하였던 설일체유부는 《아비달마발지론(阿毘達磨發智論)》에 의해 일체의 법이 실유(實有)라고 주장하며(法體恒有), 그 법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실재한다(三世實有)고 하였다. 또한 법의 체계를 5위(位) 75법(法)으로 정비하였으며, 동시에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자기 일신의 정진, 덕목의 실천에 전념하였다. 또한 그 수행의 단계를 세분하였을 뿐 아니라 열반(涅槃)을 유여(有餘) ·무여(無餘) 열반으로 2분하여 수행의 구극에 도달한 아라한(阿羅漢)도 유여열반에 이를 뿐이라 하였다. 이러한 설일체유부의 번쇄한 교학은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에서 집대성되었다. 비바사는 광해(廣解)의 뜻으로 당시의 학자 또는 학파의 다수의 이견(異見)을 열거하여, 소승불교의 모든 문제를 망라하고 있는 것으로 후에는 불론의 연구 ·정리가 이 학파의 주된 과제가 되고 있다.

그 외 경량부(經量部)는 설일체유부의 삼세실유설에 대하여 과미무체설(過未無體說)을, 법체실유설(法體實有說)을 부정하고 가유설(假有說)을 주장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종자설로서 종자는 식물의 종자가 발아의 능력을 내장하고 있는 것과 같이, 우리의 업력(業力)을 업과(業果)로 이끄는 힘을 말한다. 우리의 업과를 일으키는 종자가 현세에서 내세까지 멸하지 않고 존속할 때, 이것을 세의식(細意識) 또는 일미온(一味蘊)이라 하며, 이것이 윤회의 주체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러한 종자 ·훈습(熏習)은 후세의 아뢰야식(阿賴耶識) 사상의 원류가 되는 것으로 주목된다.

또한 무루(無漏)의 종자는 범부(凡夫)에게도 내재하며, 이것이 계발되면 불타가 된다고 하는 것은 대중부의 심성본정설(心性本淨說)에 통하며, 대승불교의 불성론(佛性論)의 원류가 되고 있다. 이러한 경량부 계통에서 발달한 것이 하리바르만[訶梨跋摩]의 《성실론(成實論)》 및 바수반두[世親:320∼400?]의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이다. 특히 후자는 그후 인도 ·티베트에서도 깊이 연구되었으며, 소승불교의 전형적인 대표작으로 인정되었고, 중국에 전래되어서는 ‘구사종’이라는 일파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경량부는 설일체유부의 설을 비판적으로 수정하여 실유의 범위를 한정하였지만, 대개 상좌부의 실재론적인 법의해석(人無我 ·法有)과 실천의 자기 중심적 경향[自利]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공격도 완전히 이 두 가지에 집중되어 각각 법무아(法無我)에서 공(空)으로, 이타(利他)에서 자비(慈悲)로 발전하였으며, 보살(菩薩)사상이 형성되었다. 성불(成佛)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이 보살에 대해 소승불교에서는 성문(聲聞:석존의 가르침을 직접 들어 열반에 이르는 성자)과 연각(緣覺:스스로 깨달아 열반에 이르는 성자)이 이상적인 인간상이 되고 있다.

소승불교 중, 상좌부 계통은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라오스 등에 전해져 현재에도 민중 속에 확고한 기반을 잡고 있다. 한편 대중부 계통은 후에 대승불교로 발전하여 중국 ·한국 ·일본 등 북방에 널리 유포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종교철학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쿠샨왕조

http://210.104.182.2/%7Ehyung/bada3030/public_html/b2i4.html

기원 전후부터 5세기 중엽까지 존재한 북서 인도에서 중앙아시아에 미치는 왕조.

대월지(大月氏)가 서쪽으로 옮겨서 서(西)투르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북반부를 지배했을 때에 영지(領地) 안에 설치한 5제후(諸侯)의 하나인 귀상(貴霜:쿠샨)에서 발전하였다.

기원 전후 쿠줄라 카드피세스 때에 다른 4제후를 쓰러뜨리고 힌두쿠시 이남으로 진출하여 간다라를 지배하였다.

그 후 카니슈카왕은 사방으로 영토를 넓히는 등 쿠샨왕조 전성기를 이루어 간다라 미술 등 특색 있는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대승불교도 이 때 성립 발전하였다.

그러나 226년 파르티아 대신에 사산왕조가 이란에서 발흥하여 아프가니스탄을 병합하자 쿠샨왕조는 그의 번속국(藩屬國)이 되었다.

사산왕조의 세력이 이완되자 그 세력을 회복하였으나(기타라쿠샨왕조), 5세기 후반 에프탈에게 멸망되었다.

 

 

대승불교

 

http://www.mizii.com/jesusi/inlight/religion/buddhism/mahayana.htm

('큰 수레'라는 뜻의 산스크리트)

소승불교(小乘佛敎)와 함께 불교의 2갈래 큰 전통의 하나.

한국·중국·일본·티베트에 널리 전파되어 있다. 1세기 무렵 붓다의 가르침을 더욱 개방적이고 혁신적인 방식으로 해석하는 움직임으로서 나타났다. 이러한 새로운 경향을 시도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교조적인 보수파와 구별하면서 그들을 다소 얕보는 의미로 소승(小乘 hnayna)이라고 불렀다. 대승불교는 현재 스리랑카·미얀마·타이·라오스·캄보디아 불교의 중심인 상좌부(上座部) 계통과는 붓다의 본질, 불교도의 궁극적 목표에 대한 견해에서 차이가 난다. 상좌부 불교는 역사적인 고타마 붓다를 진리를 가르친 자로서 존경한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붓다를 초세간적(超世間的) 존재로 보며 역사적 인물로 나타난 붓다는 그 화신(化身)으로 규정한다. 불교도들이 추구해야 하는 목표가 소승불교에서는 아라한(阿羅漢 arhat)이라고 하는 깨달은 성인이 되는 것이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이를 편협한 이기적 추구라고 보고 깨달음에 이르렀으나 다른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성불(成佛)을 늦추는 보살(菩薩 bodhisattva)이 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해서 보살의 가장 큰 공덕인 자비(慈悲)가 원시불교에서 강조했던 지혜(智慧)와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된다. 보살을 통해 생기는 공덕은 중생들에게 옮겨질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고, 이러한 관념이 우리나라와 중국·일본의 정토교(淨土敎) 같은 타력적(他力的) 신앙활동을 이끌었다.

대승불교의 경전은 주로 산스크리트로 씌어졌는데, 대개 원본은 소실되고 티베트어나 한문으로 번역된 경전으로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간다라미술

http://blog.naver.com/thegoldenboy/60002089007

간다라불교미술이란 서기 2세기에서 3세기를 거치며 파키스탄 북부와 아프가니스탄 동부지역에서 활발히 창출된 미술들을 말한다. 서양의 고전적인 전통에서 기술이나 예술적인 특성들을 받아들인 간다라 미술은 우리나라의 석굴암에까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정도로 불교미술의 대표적 유파를 이뤘다.


 

 

굽타왕조

http://www.gnedu.net/php-bin/swebdata/%B0%ED%B5%EE%C7%D0%B1%B3/1%C7%D0%B3%E2/%BB%E7%C8%B8.%B1%B9%BB%E7/1%C7%D0%B1%E2/hs20020108051929/Homepage/gupta.htm

320년부터 550년경까지 북인도를 통일한 왕조. 이 시기는 고전 인도 문화의 전성기이다. 굽타왕조는 일반적으로 찬드라굽타 1세가 확립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으나, 그 성립과정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3세기 중엽 쿠샨왕조가 쇠퇴하여 북동인도가 그 지배에서 벗어난 후 작은 지방 지배자가할거하였을 때 그들 중에 굽타왕조가 마가다 지방(지금 비하르州)에서 시작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힌두교

http://100.naver.com/100.php?id=175603

인도교(印度敎)라고도 한다. 힌두교를 범인도교라 함은 힌두(Hindū)는 인더스강산스크리트 명칭‘신두(Sindhu:大河)’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도와 동일한 어원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BC 2500년경의 인더스 문명에까지 소급될 수 있으며, 아리안족의 침입(BC 2000∼BC 1500?) 이후 형성된 바라문교를 포함한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는 아리안 계통의 바라문교가 인도 토착의 민간신앙과 융합하고, 불교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300년경부터 종파의 형태를 정비하여 현대 인도인의 신앙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같이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었기 때문에 특정한 교조와 체계를 갖고 있지 않으며, 다양한 신화 ·성전(聖典)전설 ·의례 ·제도 ·관습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성을 통일하여 하나의 종교로서의 구체적인 기능을 가능케 하는 것은 카스트 제도이다. 이의 기원은 바라문에 규정된 사성(四姓: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제도이지만,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변천하여 현대의 카스트 제도에는 종족 ·직업 ·종교적인 제조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인도인의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도인은 힌두교로 태어난다고 하며 카스트 제도에는 엄격하지만 신앙에는 상당히 관용적이다.

고대 바라문교와의 차이점으로는, 바라문교가 베다에 근거하여 희생제를 중심으로 하며 신전이나 신상(神像)이 없이 자연신을 숭배하는 데 비하여, 힌두교에서는 신전 ·신상이 예배의 대상이 되고 인격신이 신앙된다는 점이다. 또한 공희(供犧)를 반대하여 육식이 금지되고 있다.


힌두교의 근본 경전은 베다 ·《우파니샤드》이며 그 외에도 《브라마나》 《수트라》 등의 문헌이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은 인도의 종교적 ·사회적 이념의 원천이 되고 있다. 또한 경전에 준하는 것으로 《마하바라타》 《라마야나》(라마의 기행)의 2대 서사시가 유명한데, 특히 전자의 일부인 《바가바드 기타》는 널리 애창되고 있다. 이 외에 《푸라나》 《탄트라》 《아가마》 《상히타》 등이 힌두교 각 파에서 존중되고 있다.


힌두교는 바라문교에서 많은 신관(神觀) ·신화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다신교 같아 보이지만, 신들의 배후에 유일한 최고자를 설정하고 그 신들을 최고신의 현현(顯現:權化)이라고 하여 교묘히 통일시키고 있는 점에서 일신교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푸라나》 문헌 등에 나타나는 트리무르티(三神一體)가 그 좋은 예이다. 이는 별도의 기원에 속하는 우주창조신 브라마, 유지신(維持神) 비슈누, 파괴신 시바의 세 신을 일체로 하여 최고의 실재원리로 삼는 것이다. 그 중 비슈누와 시바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힌두교의 대종파를 형성하였다. 비슈누파는 학문적 성격이 강하며, 비교적 사회의 상층부에 속한다. 비슈누는 인간과 동물의 모습으로 지상에 출현하는 것으로 신앙되고, 비슈누의 10권화(權化) 중의 라마와 크리슈나는 2대 서사시의 영웅이며, 이에 따라 비슈누파는 라마파와 크리슈나파로 나뉘었다.


비슈누파에 비하여 시바파는 사회 하층부에 세력이 있으며, 수행자의 고행 ·주술, 열광적인 제의(祭儀)가 특색이다. 또한 인도에서는 예부터 신비(神妃) 숭배가 성하여 브라마에게는 시라스바티(辯才天), 비슈누에게는 라크슈미(吉祥天)가 배우 여신으로 간주되며, 시바신의 배우 여신으로는 두르가 ·파르바티 ·우마 ·칼리 등 많은 이명이 있다. 이들 여신을 샤크티(여성적 창조력)라고 하며, 이들을 숭배하는 샤크티파도 있다.


힌두교의 특징적인 사상은 윤회(輪廻)와 업(業), 해탈(解脫)의 길, 도덕적 행위의 중시, 경건한 신앙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윤회와 업 사상은 민간신앙을 채용한 것으로 이미 고(古)우파니샤드에 보이며, 《마하바라타》에 이르러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인도인의 도덕관념을 키웠지만, 한편으로는 숙명론을 심어줌으로써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인간의 사후 운명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이 있었다. 신들도 업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다. 그러한 속박에서 해탈하는 방법으로서, 출가 유행(遊行)의 생활과 고행 또는 요가가 교설되었다. 고행은 주로 육체의 수련이며, 요가는 정신의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힌두교 사회에 있어 도덕관념의 기초는 바라문교의 법전에 규정되어 있는 달마(법 ·의무)이다. 4성(계급)제도와 4생활기(學生 ·家住 ·林住 ·遊行期)가 중심으로서, 자기가 소속하는 카스트에 따를 의무의 수행이 강조되었다. 최고신에 대한 바크티(信愛)와 그 은총은 능력 ·성별 ·직업 ·계급 여하에 관계없이 일반 민중의 구제를 위하여 가르쳐진 것이다. 또한 힌두교는 이슬람교그리스도교와 접촉하여 여러 가지 영향을 받아, 근세에는 브라마 사마즈(1828년 창립), 아리아 사마즈(1875년 창립) 등의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비베카난다(1863∼1902)에 의한 라마크리슈나 교단(1897년 창립)은 모든 종교가 하나로 귀일(歸一)한다고 하여 보편주의적 종교관을 보여주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많은 신자를 가지고 있다.


 

 

사산왕조 페르시아

http://blog.naver.com/fallinhosuk/140007774346


아르다시르 1세가 정복시기인 208∼224년에 세워 651년에 멸망한 중세 페르시아의 왕조


명칭은 이 왕조의 선조(先祖)이며 배화교(拜火敎:조로아스터교)의 제주(祭主)인 사산(Ssn)에서 유래한다고 하며, 왕조의 발상지는 옛날의 아케메네스왕조(페르시아제국)와 같이 파르스 지방이다. 따라서 이 왕조는 고대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왕조의 중세적 재흥(再興)을 나타내는 동시에 배화교의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신정국가(神政國家)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리고 이란민족의 전통적 실력을 가장 잘 발휘한 시대이기도 하다.


 

비잔티움 제국

http://byzantium.wo.to/

비잔티움 제국(Byzantine Empire)이라는 이름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신수도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 지금의 이스탄불)로 천도한 330년 이후부터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팔라이올로구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가 전사한 1453년까지를 일컫는 중세 그리스의 동로마 제국(Eastern Roman Empire) 문화권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로마 인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신의 은총과 영원한 로마의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그리스도교 국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서 스스로를 계속해서 '로마인'이라고 불렀다. 수도 비잔티움은 원래 고대 그리스가 세운 식민지였다. 이 지역은 유럽과 소아시아의 경계선에 있었고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330년 5월 11일에 이 곳을 '새로운 로마'로 정하고 이를 콘스탄티노플이라 명명한 후 수도를 옮겨온 뒤부터 동로마라는 새로운 영역의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을 때(395) 제국을 양분하여 동로마를 큰 아들 아르카디우스, 서로마를 작은 아들 호노리우스로 하여금 각각 통치하게 함으로써 동.서 로마의 분리는 결정적인 사실이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제도 일반에서는 로마적이지만 주민, 언어, 문화면에서는 그리스적이었고 콘스탄티노플은 일찍이 로마 제국이 완수한 적이 없었던 전략상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리스를 중심으로 소아시아와 이탈리아 해안의 여러 섬들을 포함하여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조직을 갖추고 그리스도교와 동방적 색채를 포함한 군주국가로서 완전히 성립된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의 과도기를 거쳐 헤라클리우스 황제(610-641 재위) 때였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은 행정과 학문에서 새로운 중심이 되었고 제국의 문화는 고전적 전통 및 중세 카톨릭 유럽과 소아시아의 이교 문화의 교차 지점으로서의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비잔티움과 게르만족의 관계는 반드시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야만족에 대해서는 세례만 인정하면 개방했고, 비잔티움 역시 문화의 기원이 다른 문화들인 슬라브, 아랍, 셈, 투르크 등의 문화와 끊임없이 접촉했다. 그러므로 비잔티움 사회는 초기부터 사회적, 문화적으로 유동성과 수용력이 대단히 큰 제국이었음이 분명하다. 비잔티움의 사회구조는 서유럽과는 극히 다른 유형에 속하며, 이는 역사가들의 흥미를 끌어왔다. 또 12세기까지 지중해 교역의 중심세력으로서 아랍인과 경쟁을 벌인 역사 역시 중세 서유럽 상업을 부활시킨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 12세기까지 비잔티움 제국은 중세의 국제정치무대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이었고 지중해 경제와 신앙, 학문, 문화의 중심지였으나 이후부터는 지나치게 광범위한 정복지의 영역이 오히려 새로운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여러 종족 간의 갈등, 종교적인 분열, 변방의 잦은 침입, 끊임없는 정복전쟁 등은 제국의 재정과 인력에 심각한 부담이 되었다. 결국 행정적 구조가 더 이상 정복지에서의 통제력을 확보하지 못하게 되어 제국은 마침내 붕괴 위기를 맞게 되었다.


 

무함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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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그분께 알라의 평화가 깃들길)는 기독교가 유럽에 완전히 정착하지 않았을 때인 기원후 571년 메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그 후에 바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존경받는 꾸라이쉬 족에 속한 그의 삼촌으로부터 길러졌다. 그가 성장함에 따라, 그의 정직함과, 관대함, 성실함이 널리 알려져 분쟁 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역사학자들은 그를 조용하고 명상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무함마드(그분께 신의 평화가 깃들길)는 깊은 종교적 천성의 소유자였으며 당시 사회의 부패를 오랫동안 혐오하였다. 메카 근처 빛의 산인 자발 알 누르의 정상 근처인 히라 동굴에서 종종 명상하는 것이 그의 취미가 되었다.


 

이슬람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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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불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알라의 가르침이 대천사(大天使) 가브리엘을 통하여 마호메트에게 계시되었으며, 유대교·그리스도교 등 유대계의 여러 종교를 완성시킨 유일신 종교임을 자처한다. 유럽에서는 창시자의 이름을 따서 마호메트교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위구르족[回紇族]을 통하여 전래되었으므로 회회교(回回敎) 또는 청진교(淸眞敎)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슬람교 또는 회교(回敎)로 불린다.


⑴ 알라와 《코란(쿠란)》: 알라는 다신교 시대부터 메카에서 최고신으로 숭배되어 왔는데, 마호메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모든 신을 부정하고 오직 알라만을 유일신으로 내세웠다. 알라는 만물의 창조주이며, 이와 동등하거나 비교될 존재는 없다. 모든 피창조물과는 엄격한 거리가 있으면서도 사람들의 경동맥(頸動脈)보다도 더욱 가까이 있다. 알라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주지만 아무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마음은 어디까지나 관대하고 자애에 넘쳐 잘 용서하고, 잘 들어 주고, 잘 보아 준다. 알라는 진리이며 빛이며 “동도 서도 알라의 것, 어느 쪽을 향해도 알라의 얼굴은 거기에 계신다. 골고루 존재하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코란 2:11)고 한다.


알라의 계시를 모은 것을 《코란》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마호메트가 말한 내용으로서, 그가 죽은 뒤 신도들이 수집·정리한 것이다. 현재의 《코란》은 650년경, 제3대 칼리프인 오스만의 명을 받들어 만들어진 표준본이다. 이 경전은 이슬람의 교의(敎義)·제도, 마호메트의 생애와 사상을 알 수 있는 근본 문헌이며, 무슬림들은 이것을 독송할 때마다 법열(法悅)의 경지에 빠져 감격의 눈물을 흘릴 만큼 힘과 미를 갖춘 것이지만 그 진가는 아랍어로 된 원전에 따르지 않고는 좀체로 이해하기 힘들다.


《코란》은 마호메트에게 계시된 바를 해설이 없이 모은 것이므로,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후세 학자들이 쓴 많은 주석서(注釋書)에 의존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슬람의 법학(法學)·신학(神學)의 최고 근원은 역시 《코란》에 있다.


⑵ 이슬람의 근본신조: 이 가르침의 정식 명칭은 ‘알 알이슬람’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유일 절대의 알라의 가르침에 몸을 맡긴다”는 말로서 즉 ‘귀의(歸依)’를 뜻한다. 그 가르침은 모두 명확한 아랍어로 계시되었고 마호메트도 이것을 아랍어로 전달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알라 이외에 신은 없다”는 것이 이슬람교의 신조이며, 후에 “마호메트는 알라의 사자(라수르)이니라”가 추가되었다. 이 성구(聖句:카리마)를 외는 일은 신도의 중요한 의무의 하나로 되어 있다.


알라의 가르침을 모은 《코란》에는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에 관하여 “믿음이란, 그대들의 얼굴을 동으로 또는 서로 돌리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란, 알라와, 최후의 날(최후 심판의 날)과, 천사들과, 여러 경전(經典)과, 예언자들을 믿는 사람이다” 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 모든 사항을 믿는 것을 ‘이만’이라고 한다.


또 오로지 알라만을 믿고 그 외에 아무것도 숭배하지 않으며, 예배·희사(喜捨)·재계(齋戒) 등의 근행(勤行)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만이 알라에 귀의하는 길인데, 이것을 ‘이슬람’이라고 칭한다. ‘이만’을 지닌 사람을 ‘무민’, 이슬람에 입교한 사람을 ‘무슬림’이라고 부르므로, 이것들 모두가 이슬람교 신자의 호칭이다.


⑶ 이슬람 신앙의 요소: 이슬람 신앙을 구성하는 요소는 다음의 셋으로 분석된다. 첫째는 ‘지(知)’인데, 이것은 알라의 계시를 잘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언(言)’인데, 마음으로 알고 또한 믿는 바를 말로 표현하는 일이다. 셋째는 ‘행(行)’인데, 이슬람교도로서의 의무(즉 5주 등)를 열심히 실행하는 일이다.


⑷ 오주(五柱): 무슬림에게는 실행해야 할 중요한 의무 다섯 가지가 있다. 이것을 오주(아르칸 알이슬람:Pillars of Islam)라 하며, 이들 의무를 다함으로써 알라에게 봉사하는 일을 ‘이바다트(奉化 또는 勤行)’라고 한다. 《코란》에서는 희사와 단식(斷食)을 중요한 봉사로 들고 있으나, 후세에 이르러 다음의 다섯 가지를 가리키는 것이 상례로 되었다.


① 증언 또는 고백(샤하다): “나는 알라 이외에 신이 없음을 증언합니다. 또 나는 마호메트가 알라의 사자임을 증명합니다”를 입으로 왼다. 신도는 어릴 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증언을 고백하게 되어 있다.


② 예배(살라트): 일정한 시각에 규정된 형식에 따라 행하는 예배를 말하며, 개인적으로 수시로 행하는 기도는 ‘두아’라고 부른다. 예배는 하루에 다섯 번을 일출·정오·하오·일몰·심야에 하며, 특히 금요일 정오에는 모스크에서 집단예배를 행한다. 예배를 드릴 때는 반드시 메카가 있는 쪽을 향하고 행한다.


③ 희사(자카트) 또는 천과(天課): 국가재정의 근간을 이루며, 비이슬람 국가에서는 선교기반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불가결한 무슬림의 의무중의 하나이다.


④ 단식(샤움): 성년인 무슬림은 매년 라마단 월간(月間:제9월) 주간(晝間)에 음식·흡연·향료·성교를 금하고, 과격한 말을 삼가며 가능한 한 《코란》을 독송한다. 단 음식은 흰실과 검은실의 구별이 안 될 만큼 어두워진 야간에는 허용된다. 라마단 월이 끝난 다음 새 달이 하늘에 떠오르면 단식완료의 축제가 시작되는데, 화려한 의상을 입은 군중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서로 축하하는 풍습이 있다.


⑤ 순례(하주): 모든 무슬림은 매년 하주의 달(이슬람력 제12월)에 카바 신전 부근 또는 메카 북동쪽 교외에서 열리는 대제(大祭)에 적어도 일생에 한 번은 참가할 의무가 있다. 능력이 없는 자는 하주를 못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 해에 따라 일정하지는 않으나 현재도 매년 약 20만 명에 달하는 신도가 하주에 참가하고 있다. 메카 다음가는 성지는 메디나에 있는 마호메트 묘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 예루살렘의 여러 성적(聖蹟) 등이 있으며, 또 시아파(派)의 무슬림은 알리의 묘(廟)가 있는 나자프, 알리의 아들 후세인의 묘가 있는 카르발라, 이란 동부의 마슈하드 등을 순례하는 사람이 많다.


⑸ 교도의 일상생활: 이슬람 세계는 많은 이민족을 포함하고 있어 그들은 각각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 사회의 요소는 지극히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대한 지역에 분포하는 많은 무슬림은 하나의 형으로 통일되어 공통의 생활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샤리아(이슬람법)로써 통제되어 있기 때문이며, 샤리아는 《코란》과 《하디스 Hadith》(마호메트와 그의 추종자들의 전설에 관한 서적에 사용되는 명칭)에 입각하여 제정된 이슬람법이다. 무릇, 무슬림된 자는 출생에서 사망까지 이 샤리아에 따라 생활하도록 요구된다.


인간의 행위는 5가지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① 반드시 행해야 하며 이것을 하면 보상을 받고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 것, ② 가상(可賞)할 행위로, 이것을 행하면 보상받으나 행하지 않아도 벌을 받지 않는 것, ③ 허용된 행위로, 이것은 행하여도 보상도 없고 벌도 받지 않는 것, ④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이것은 행하여도 벌을 받지 않지만 그래도 행하지 않는 편이 좋은 것, ⑤ 금지된 것으로 이것을 행하면 알라의 벌을 받는 것이다(하람, Haram:이슬람법 용어). 예를 들어 돼지고기를 먹거나 음주하거나 하는 일은 하람 ⑤에 해당한다. 그러나 하람에 대하여는 시대와 지방에 따라 의견의 차이가 있어 약간은 허용되는 경우도 있다.


중세 이래 모스크는 교도의 생활중심이 되어 왔으나 11세기 투르크가 각지에서 지배권을 장악한 뒤부터는 오로지 예배장소로만 되고, 그 밖의 기능은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스크를 생활의 중심으로 삼고, 한편으로는 샤리아에 따라 규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이슬람교도의 일상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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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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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문명의 산실, 아테네


그리스 본토의 남동부 살론만으로 향한 아티카 평야에 위치하며, 2개의 강을 끼고 서, 북, 동 3방향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남쪽은 아테네의 외항 피레우스로 향해 있다. 도시(부락)는 아득한 옛날에 비탈에 생겼었지만, 폴리스는 B. C 8세기에 성립하여 전 6세기에는 세계 최초의 민주정치가 행해졌고 BC 5세기 경에는 최고의 전성기인 페리클레스 시대를 맞이하였다.



소크라테스가 활약하고 파르테논 신전이 조성되었다. 그후 마케도니아, 로마의 지배 하에서 학문과 문예의 중심이 중세에는 완전히 쇠퇴하여 학문 높은 고대 유적도 파괴되었다.


그리스 독립후 아테네는 수도로 되었고 오늘날 명실 공히 그리스의 중심이 되었다. 고대 아테네 시가는 아크로 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링크모양의 수도였지만 현대 아테네는 아크로 폴리스의 북부, 동부는 시가지가 광대하다.


시의 중심은 산타크마 광장이고 도시경관은 남유럽에서 볼 수 있는 현대식 도시라고 볼 수 있다.

아테네에는 4백만의 인구가 밀집해 있고 (그리스 인구의 40%), 그로 인한 큰 도시로서의 문제점도 발생한다.


여름엔

숨막힐 듯한 더위와 공기오염 교통소음 특징없는 아파트 등 그러나 여유를 갖고 찾는다면 비교할 수 없는 신선한 지역을 볼 수 있다.

아테네에선 흥미로운 중동 문화와 서양 문화가 섞여있는 네거리를 볼 수 있다.


 

스파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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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라케다이몬(Lakedaimon)이라고도 하였다. 중심도시는 펠로폰네소스반도의 남동부 라코니아지방을 북에서 남으로 관류하는 에우로타스강의 중류 오른쪽 연안에 있었다.

〔성립과 발전〕


BC 13세기의 라코니아에는 아카이아인이 살았는데 BC 1000년 무렵 도리스인이 침입해 들어와 각 지방을 점거하였다. 스파르타의 중심시 지역에는 BC 10세기 때 도리스인의 마을이 4개 만들어졌으며, 정복된 아카이아인은 헤일로타이(heilotai;노예신분의 농민)가 되었다. 4개 마을은 오랜 세월에 걸쳐 패권을 다투었는데, 결국 BC 800년 무렵 집주(集住)에 의해 폴리스를 형성하고 질서를 회복하였다. 아기스가(家)·에우리폰가에서 각각 왕이 나오는 이왕제도(二王制度)가 생겨났으며, 시민은 스파르타인이라 하였고 도시국가(폴리스)의 주권은 장로회(長老會)에 의거하는 귀족에게 있었다. 폴리스가 성립할 때에는 전설적인 입법자 리쿠르코스가 지도적 역할을 맡았다 한다. 스파르타는 주변으로 세력을 뻗치기 시작하여 굴복한 사람들 가운데 아카이아인의 일부를 페리오이코이(perioikoi;반자유인)나 헤일로타이로 만들었으며 도리스인은 페리오이코이로 만들었다. 그러나 BC 750년 무렵 점령한 중심시 남쪽 약 8㎞에 있는 아카이아인의 마을 아미클라이는 중심시를 구성하는 제5의 마을로 받아들였다. 동부 해안지대를 제외한 라코니아의 모든 지역은 BC 700년까지는 정복되었으나, 스파르타는 그보다 일찍 BC 725년 무렵 서쪽에 이웃한 베세니아지방으로 침입, 제1차베세니아전쟁을 일으키고 약 20년에 걸쳐 중앙평원을 점령했으며 그 고장의 메세니아인을 헤일로타이로 만들었다. 또한 이 전쟁중에 스파르타의 귀족은 왕을 억제하기 위하여 에포로이(ephoroi)라는 관리단(官吏團)을 설치했다. BC 8세기 말에는 남이탈리아의 타라스에 식민지를 건설했으나 BC 669년 무렵 아르고스에게 크게 패한 뒤 메세니아인이 반란을 일으켜 제2차메세니아전쟁이 일어났다. 스파르타가 고전하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토지 재분배를 요구하였는데, BC 650년 무렵 메세니아의 모든 영토를 정복한 후 페리오이코이로 만들었던 사람을 제외한 메세니아인 모두를 헤일로타이로 만들고 토지의 재분배를 실시함으로써 스파르타인은 모두 토지소유자가 되었다. BC 7세기 후반의 스파르타는 외국인을 받아들이고 문화적·물질적으로 번영했다. 그러나 BC 7세기 말 북쪽에 이웃한 아르카디아지방 정복전쟁에 나섰으나 테게아싸움에서 실패를 거듭했으며 국내에서도 평민이 정권에의 참가를 요구하여 동요가 일어났기 때문에 BC 556년 에포로스(ephoros)의 킬론이 대외정책을 종래의 정복에서 동맹으로 바꾸고 테게아와는 스파르타 우위의 동맹을 맺어 펠로폰네소스동맹의 기초를 마련했다. 국내에서는 귀족정치에서 민주정치로 국가체제를 변혁함으로써 동등한 사람으로서의 전체 시민의 정치참가를 실현했고, 또한 스파르타인의 생활을 규제하는 이른바 <리쿠르고스제도>를 시작했다. 이것은 차츰 형태를 갖추어 토지의 양도·매매 금지, 시민의 생산노동 금지, 귀금속화폐 사용 억제와 철전(鐵錢) 사용, 외국인 추방, 시민의 매일저녁 공동식사, 만 6세부터 남자의 엄격한 집단훈련 등을 내용으로 하는 독특한 제도가 되었다. <스파르타교육>이라는 집단훈련제도에서 만 6세가 된 소년은 가정을 떠나 기숙사생활을 해야 했으며 만 29세 때까지 순차적인 연령별 4개 그룹에 소속되어 여러 가지 훈련을 받았다. 폴리스국가로서 없어서는 안될 강한 전사양성(戰士養成)이 목적이었으므로 읽고 쓰는 학습은 최소한으로 한정되고 엄격한 체육훈련이 되풀이되었다. 또한 검소한 옷과 식생활이 강제되어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한 절도행각까지도 훈련의 하나로 실행되었다. 이리하여 BC 500년 무렵의 스파르타는 약 8500㎢의 영토와 약 8000명의 스파르타인, 그 몇 배나 되는 반자유민과 십 수배의 노예신분의 농민을 거느리고 펠로폰네소스동맹의 맹주 지위를 획득하였다. 전체 스파르타인을 대표하는 에포로이를 최고관리단으로 삼고 민주정치·시민단의 분해를 막기 위한 리쿠르고스제도를 토대로 하여 반자유민과, 특히 노예신분의 농민 위압에 힘썼으나, 문화적으로는 급속히 쇠퇴하여 내세울 만한 문화가 없는 폴리스가 되었다.


 

〔패권과 쇠퇴〕


스파르타는 BC 6세기 중엽 이후 그리스 각지의 참주정치 타도를 위하여 군대를 보냈는데, BC 545년 무렵 라코니아의 동부 해안지대와 키티라섬을 아르고스로부터 빼앗고 BC 494년 무렵 세페이아싸움에서 아르고스군을 괴멸시켰다. BC 510년에 아테네의 참주 히피아스를 내쫓은 뒤에도 3차례나 아테네에 대한 간섭을 시도했는데, BC 5세기 초 페르시아전쟁에서는 헬라스연합군의 총지휘권을 장악하고 아테네 등과 함께 페르시아군과 싸웠다. BC 5세기 초에도 반란을 일으킨 메세니아인은 BC 464년 스파르타가 큰 지진의 참화를 당한 것을 계기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그 후 여러 해 동안 계속되다가 진압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원조를 바라면서도 아테네의 원군이 도착하자 그것을 거절했다. 이미 페르시아전쟁 때부터 싹트고 있던 아테네와의 대립관계는 이 사건으로 한층 격화되었으며, BC 457년의 타나그라전투에서는 양쪽 군대가 충돌하였는데, 두 나라의 전면전쟁으로까지는 발전하지 않았고 BC 451년 5년 동안의 휴전조약, BC 446년에는 30년 동안 화약(和約)을 맺었다. 그러나 날로 융성을 더해 가면서 황금기를 맞이한 아테네가 서부 지중해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을 때, 코린트의 식민지인 코르키라가 아테네와의 동맹을 원하게 되었다. 이는 코리키라 방면의 해상권을 아테네가 장악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에 대한 스파르타와의 충돌 또한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28년간(BC 431∼BC 404)이나 계속된 펠로폰네소스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스파르타는 BC 404년 승리를 거두고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했지만 그 억압적인 행동은 여러 폴리스의 반감을 초래하였고, 또한 펠로폰네소스전쟁 말기에 맺은 페르시아와의 동맹관계도 깨져 BC 4세기 초에는 코린트전쟁이 일어났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와 <대왕(大王)의 화약>을 맺고 이 위기를 극복했지만 BC 371년의 레우크트라싸움에서 테베에게 패하여 그리스의 패권을 잃었으며, 이듬해 메세니아가 독립을 되찾게 되자 스파르타의 영토는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또한 펠로폰네소스전쟁 뒤 리쿠르고스제도가 무너지게 되자 BC 4세기에 시민단의 해체, 토지소유의 집중, 스파르타인의 감소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BC 362년의 만티네이아싸움에서 테베는 다시 스파르타를 격파했다. 스파르타는 BC 337년의 코린트동맹에 참가하지 않고 BC 333∼BC 331년에 마케도니아에 대한 그리스의 저항운동을 조직했으나 실패, BC 3세기 중엽 무렵 스파르타인의 수는 700명, 그 중에서 토지소유자는 100명밖에 되지 않았다. BC 3세기 후반에 아기스 4세와 클레오메네스 3세는 과감한 개혁으로 조국의 부흥을 기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BC 220년에 처음으로 두 왕가의 밖에서 즉위한 리쿠르고스는 아기스집안의 왕 아게시폴리스를 내쫓고 이왕제도를 없애버렸다. 그가 BC 211년에 죽자 타렌툼의 용병(傭兵) 출신인 마카니쿠스가 리쿠르고스의 뒤를 이은 미성년인 펠로프스의 보호자로 정권을 장악, 참주적 지배를 단행했으나 BC 207년 만티네이아에서 아카이아동맹군과 싸우다가 죽었다. 이어서 에우리폰가 출신인 나비스가 펠로프스의 보호자가 되었는데, 그해 펠로프스의 죽음과 동시에 즉위, 스파르타의 마지막 왕으로서 참주적 지배를 단행하였고 클레오메네스 3세의 개혁을 실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정책을 강행했으나 BC 192년 암살되었다. 그해 스파르타는 아카이아동맹에 가맹하였지만 곧 이탈하고 그들과 자주 항쟁하였으며 결국 BC 146년 이후에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자유시의 자치가 인정되었고 특히 AD 2세기에는 상당한 번영을 되찾았으나 395년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인의 약탈로 인해 황폐해졌다. 13세기 중엽 무렵부터 황폐해진 스파르타는 1834년에 재건되었다. 오늘날 스파르티(Sparti;현대 그리스어명)는 인구 1만 5496(1991)의 라코니아평야의 농산물이 집산되는 지방도시이며, 또한 라코니아주의 주청(州廳) 소재지이다. 시가의 북북서쪽, 즉 주변과의 해발고도차가 22m인 낮은 언덕이 고대의 아크로폴리스, 그 남쪽의 평탄한 곳이 아고라의 흔적인데, 고전기(古典期)까지의 스파르타의 번영을 떠오르게 하는 것은 남아 있지 않다.


 

페르시아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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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는 BC525년까지 오리엔트를 통일하고, 이어 소아시아 연안에 있는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도시들의 반란(이오니아의 반란:BC 500∼BC 494)도 진압하였다. 다리우스왕은 BC492년 함대를 그리스 북쪽에 있는 트라키아 지방으로 보냈으나, 아토스곶(串)에서 난파하였다. 이것을 흔히 제1차 페르시아전쟁이라고 하는데, 이 때 페르시아가 노린 것은 트라키아였다는 점에서 페르시아전쟁에 포함시키지 않는 학자도 있다. 또한 트라키아는 페르시아의 세력권에 들어감으로써 목적은 일단 달성한 셈이다.


BC 490년, 제2원정에 들어간 페르시아 함대는 키클라데스 제도(諸島) 연안을 따라 에우보이아의 에레트리아시(市)를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키고, 이어 아테네 북동쪽에 있는 마라톤 평야에 상륙, 아테네시를 공격하였다. 이것은 이오니아의 반란 때 이 두 도시가 밀레토스를 도와준 데 대한 복수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페르시아군은 아테네의 중장병(重裝兵) 밀집대전술(密集隊戰術)에 패하여 아테네시 공략을 단념하고 스니온곶을 돌아 귀국하였다. 그 후 다리우스왕은 죽고 크세르크세스가 그 뒤를 이었다. 그는 페르시아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군대와 물자를 모아 헬레스폰토스 해협에 선교(船橋)를 걸고, 아토스곶에 운하를 판 뒤, BC 480년 해륙(海陸) 양면에서 그리스를 공격하였다.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는 중부 그리스로 가는 통로에 해당하는 테르모필레의 애로(隘路)를 지켰으나 내통자(內通者)가 생겨 돌파당함으로써 전원 전사하였다. 이 무렵 아르테미시온 해전(海戰)이 벌어졌으나 승패는 쉽사리 결정되지 않았다.


한편, 아테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대함대 건조 제안을 채택하여 페르시아의 재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이 함선에 탈 것을 설득, 아테네시 전면(前面)의 살라미스섬과의 사이에 있는 바다에서 페르시아 함대와 싸워 이겼다. 크세르크세스는 곧 귀국하여 마르도니우스에게 자기의 뒤를 잇도록 하였다. BC 479년 마르도니오스는 플라타이아이에서 그리스 연합군과 싸워 패하였고, 같은 해 그리스 함대는 소아시아의 미칼레전투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하였다. 이렇게 하여 세 번(또는 두 번)에 걸친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은 번번이 실패하고, 소아시아 연안의 그리스 도시들은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페르시아의 원정을 맞아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잘 싸웠으나, 그리스의 도시 중에는 페르시아에 항복한 도시도 있었다. 또한 아테네 안에서도 페르시아와 내통하는 자가 있었다. BC 480∼BC 479년 그리스군의 총지휘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스파르타였으나, 그 후로는 아테네가 대신 연합함대의 지휘권을 쥐고 있다가, 마침내 델로스 동맹의 맹주(盟主)가 됨으로써 그리스의 패권을 잡았다. 마라톤에서는 중산시민(中産市民)이 중장보병(重裝步兵)으로서 활약하였고 살라미스에서 무산대중(無産大衆)이 수부(水夫)로서 활약하여, 정치적 발언력이 그들에게까지 미쳐, 아테네의 민주화를 촉진하였다.


 

아테네의 민주정치

http://kin.naver.com/open100/entry.php?eid=zrX03DLGWbsgTRTSt%2BteWz3UZSL1r71r


에테네 민주정치 기구는 만 30세 이상의 모든 성년 남자 시민이 참여하는 민회와 각 부족당 500명씩 배당된 500인평의회 6000명으로 이루어진 민중 재판소 , 9명의 집정관 , 각 부족당 1명씩 배당된 장군으로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군을 제외한 나머지 직책들은 모두 선거가 아닌 추첨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아테네 인들은 만약 투표로 대표를 선출한다면 대대로 이름있는 집안 출신이나 부자들이 뽑힐 확률이 높을것이므로 모든 사람이 정치에 참여할수 있다는 민주정치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페리클레스의 연설에도 이러한 부분이 있습니다.


국가에 봉사할 능력이 있는 한 가난하다고 해서 무시당하면 안 된다고 하고 있으므로 그래서 페리클레스는 가난한 사람들이 돈을 버는 데 바빠서 민회에서 하는 토론에 참여하지 못할까봐 공무 수행에 대한 수당을 주면서 민회참여를 유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아테네 민주정치는 직접 민주 정치였습니다.


500인 평의회가 있었지만 중요한 일들은 반드시 민회의 의견을 물어야 했고, 모든시민이 민회에 참여할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테네 시민의수가 현대 국민의 수에 비해 훨씬 적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였습니다. 하지만 아테네 사람들이 전부 시민인것은 아니였습니다. 아테네에서는 30세이상의 남자 아테네 인만이 시민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고 여자 노예 외국인은 배제되었습니다. 특히 외국인이 아테네 인이 되기도 어려웠는데 페리클레스의 '시민권 법'은 양친이 모두 시민인 자에게만 시민권을 허락하고 있다는 것을 보아도 이를 알수 있습니다.


결국 아테네에서의 '시민'은 정치적 물질적으로 보상을 누릴수 있는 특권계층이었습니다.


 

헬레니즘 문화

http://blog.naver.com/scotkim1/100017620999

고대 그리스는 토착민들의 농경문화와 새롭게 이주해온 사람들의 유목문화라는 두 가지 토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크레타 문명을 일군 토착민들은 위대한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농경민이었습니다. 반면, 그리스 본토를 점령한 아리안(아키아이인과 도리아인)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숭배하는 유목민이었습니다.


위대한 어머니의 원리를 계승한 크레타의 문화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원리를 계승한 그리스 본토의 문화와 상당히 다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습니다.


사실 철학은 신화적 전통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그 전통을 합리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화 체계가 달랐던 크레타 문명권의 철학과 그리스 본토의 철학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크레타 문명권에 속했던 이오니아 지방의 자연철학이 위대한 어머니의 원리를 계승하고 있다면 그리스 본토의 고전철학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원리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오니아 태생의 탈레스, 아낙시만도로스, 아낙시메네스, 헤라클레이토스의 자연철학 속에는 위대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메아리친다면, 그리스 본토 출신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 철학 속에는 하늘에 있는 아버지(Heavenly Father)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여기서 잠시 위대한 어머니의 신화를 기억해보죠. 농경 문화의 신화 체계 속에서 위대한 어머니는 모든 생명을 낳는 자궁이자 모든 생명을 거두는 무덤입니다. 만물은 그녀에게서 생겨나 그녀에게로 돌아갑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녀의 품 안에서 삶과 죽음을 반복합니다. 때문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그녀와 하나입니다.


따라서 위대한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신화체계에서는 나는 그녀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또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녀에게서 나와서 그녀에게 돌아간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다시 말해 위대한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신화체계는 일원론적 세계관을 담고 있습니다.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자들은 물활론자들이라고 불립니다. 물활론(物活論, hylozoism)은 모든 물질이 그 자체 속에 생명과 신성을 갖고 있다는 철학적 입장을 말합니다. 물활론은 (hylozoism)은 그리스어의 '질료(質料)'를 의미하는 'hyle'와 '생명'을 의미하는 'zoe'의 합성어입니다. 다시 말해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자들은 물질과 정신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단 하나의 질료 혹은 원리에서 발생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스 본토의 철학자들은 어땠을까요? 여기서 잠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신화를 살펴봅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신화는 시간과 공간에 묶인 지상과 영원불멸한 초월적인 세계인 하늘을 구별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계신 곳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이 아니라 지금 이곳을 초월한 저 하늘입니다. 참된 세계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물질적인 세계가 아니라 아버지가 계시는 저 초월적인 정신세계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신화 체계는 물질과 정신, 내재와 초월을 구별합니다.  플라톤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상적인 세계 저 너머에 오로지 이성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이데아의 세계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에 따라 명멸을 반복하는 현상 세계 저 너머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영원불멸한 실체(substance)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늘에게 계신 아버지의 신화 체계가 세계를 지상과 하늘의 두 차원으로 나누듯,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서양 철학은 존재를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눕니다. 하나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영원불멸한 정신으로 존재하는 본질(essentia)이고 또 하나는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 안에 육체를 입고 존재하는 실존(existentia)입니다.


역사의 우연인지 아니면 역사의 필연인지, 아리스토텔레스는 미케네의 젊은 왕 알렉산더의 스승이었습니다. 알렉산더는 그 짧은 생애 동안 유럽과 레반트를 아우르는 방대한 제국을 건설합니다. 동시에 그는 모든 정복자들이 그랬듯이 자신이 정복한 지역을 통합시킬 신화 다시 말해 보편적인 세계관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헬레니즘 문화입니다. 그리고 이 헬레니즘의 기본 바탕은 알렉산더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지요. 헬레니즘 문화 속에서 레반트의 종교와 그리스의 철학은 하나로 어우러집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http://blog.naver.com/sjsinasea/40013395762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 또는 콘스탄틴 1세라고도 불린다.

부친 콘스탄티우스 1세와 모친 헬레나 성녀사이에서

나이수스라고 하는 지금 의 닛슈 시(세르비아 영내에 있다)에서 태어났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황제 퇴위 후 로마 제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로마 제국을 재통일시켰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을 공인한 황제 로서도 유명하다.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를 따라 갈레 리우스의 페르시아 원정에 참가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306년 아버지가 죽자 황제에 추대되었으나,

정통파 황제를 자칭하고 로마시를 근거지로 삼고 있던 막센티우스를 꺾어야 했고,

312년에야 정 식으로 황제 지위를 얻었다.


314년부터 로마 제국 동부를 차지한 황제 리키니우스와 대립하였으 나,

323년 고트 족의 침입을 막아낸 후 리키니우스를 격파,

로마 제국을 재통일하여 통일 로마 제국의 위대한 황제 가 되었다.


원래 콘스탄티누 스 황제는 태양신을 숭배하였으나

그리스도교에 깊이 경도하여 그 자신도 그리스도교도가 되어

313년 밀라노에서 리키니우스와 함께 밀라노 칙령(勅令, Edict of Milan)을 공포,

로 마에서의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당시까지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던 그리스도교 박해를 중지시키고

교회의 사법권 ·재산권 등을 우대하였다.


또한 북아프리 카 도나투스파의 분파(分派) 문제도 조정하였으며,

325년 니케아에서 공의회를 개최하는 등

교회 내의 분쟁, 교리(敎理) 논쟁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의 통치방식을 계승 발전시켜,

문무(文武) 관직의 기능을 완전히 분리하였고,

황제 고문회의의 권 한을 강화하여 중요한 정치에 관여시켰으며,

황제를 정상으로 하는 계급적 관료제도를 완비하였 다.

또한 상비군 제도와 변경의 둔전병(屯田兵) 제도에 의거하여 군제를 정비하였으며,

사르마티 아 인과 게르만 인을 변경지방으로 이주시킴으로써 야만족의 침입에 대처하였다.


행정적으로는 관 료와 군대의 유지,

오리엔트식의 궁정조직과 의례(儀禮)형식의 채용,

대규모 건축사업 등에 대한 지출이 증대하였기 때문에

각종 세금제도(금을 납부하는 형식으로)를 신설하였고,

솔리두스 금화 본위(金貨本位)로 화폐제도를 정비하게 되었다.


한편 이교적 색채를 불식한 그리스도교적인 도시 로서

비잔티움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라고 명명하였다(330).


콘 스탄티누스 대제는 군인, 통치자, 입법자로서 제1급의 인물로 꼽히고,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더불어 로마 제국의 재건자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동로마제국

http://203.230.71.23/%7Eitaly/italia/storia/vizantin.htm 

콘스탄티노플(=이스탐불)에 도읍한 동로마제국은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게 망할 때까지 약 1000년 동안 명맥을 보전하여 게르만, 로마세계 및 이슬람 세계와 정립하였다. 동로마제국은 수도의 그리스名 비잔비움에 의해 비잔틴 제국이라고도 불리고 또 그 중심이 그리스계 문화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리스 제국이라고도 불리어지고 있다. Justinianus the Great(527-565)는 서로마제국의 古土를 회복하기 위해 대원정군을 일으켜 반달 왕국을 멸하여 아프리카를 빼앗고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을 멸하고 서고트 왕국을 쳐 에스파니아를 빼앗아 그 이상을 실현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하여 법제사상 불후의 업적을 남기고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Nestorius(景敎)파를 이단으로 추방하여 종교계의 혼란을 구하고 그리스 정교의 교의를 확립시키고 St. Sophia사원을 비롯한 화려한 궁정과 공공건축물을 지어 帝室과 帝都의 위력을 과시하였다.


 동로마제국의 1000여년은 외환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비잔틴제국은 8세기에서 11세기에 이르기까지의 3백 수십년 동안은 발칸과 소아시아에 강력한 근거지를 두고 남북에서 침입해 오는 강적을 잘 물리쳤다. 11세기에 이르러 동으로부터 셀주크 투르크, 서로부터는 십자군에 고통을 받았는데, 특히 4회 십자군의 폭거이래 국력이 갑자기 줄어들었다. 이어서 오스만 투르크가 소아시아를 정복하고 발칸을 經略한 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 함락하여 여기에 1000여년의 동로마제국은 망하였다.


그리스에 중심을 두고 있던 동로마제국내에는 헬레니즘 문화의 전통이 강하여 동방적 요소와 융합하여 비잔틴문화를 발달시켰다.

곧 서유럽에 고전문화의 전통이 파괴된 뒤에도 비잔틴 제국은 그 전통을 잘 보존해 두었다가 제국 멸망 후 이탈리아에 전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일으키게 하는 큰 구실을 하였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은 1000년동안 중대한 포위를 10번이나 당하였으나 그때마다 잘 이겨내어 서남아시아세력의 유럽 침입에 대한 방파제가 되었다. 비잔틴문화 가운데 가장 특색인 비잔틴식 건물은 큰 Dome을 가진 집 주위에 작은 Dome를 가진 집을 배치하고 거기에 尖塔을 보탠 것인데 건물의 내부에는 모자이크의 벽화를 장식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수도에 건설한 성 소피아 사원이 그 대표작이다.


 

서로마제국

http://blog.naver.com/naibba123/100016500948

서로마는 476년에 멸망하게 되고 서로마는 그후 잉글랜드(영국),서프랑크(프랑스),



신성로마제국(독일)이 세워진다.



콘스탄니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 (터키의 수도인 이스탄불)에 도읍해서



비잔틴을 건설했다.



영토는 지금의 그리스,터키,일부중동지역



그리스문화를 이어왔던 동로마는 동양문화와 섞이면서 비잔틴 문화를 발전시켰다.



외세에 시달리면서도 나라를 이어나갔으나 십자군전쟁으로 인한 피해누적과



오스만 투르크의 침략으로 천년의 역사를 뒤로 한채 멸망하고 만다.


 

게르만족의 대이동

http://cafe.naver.com/cakorea.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411

http://w1.hompy.com/bootangas/sijak/2%C7%D0%B3%E2/2-1/%B0%D4%B8%A3%B8%B8/me2.htm

① 원인 : 4세기 말경, 아시아 계통의 유목 민족인 훈 족이 흑해 연안에 거주하고 있던 게

        르만 족을 압박하자 게르만 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② 결과

        ㆍ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게 되었다(476).

        ㆍ로마의 영토 안에 많은 게르만 족이 세운 왕국이 건설되었다.

        ㆍ유럽 세계의 변화 : 지중해 세계에서 유럽 세계로  변화하게 되었다.


 

크리스트교

http://blog.naver.com/jun20ok/40001728263

크리스트교의 성립


    * 유대인의 메시아 사상 * 로마 지배하의 유대 땅에서 예수 탄생


    * 유대교의 선민사상(배타적인 종족주의)과 형식적인 율법주의(계율주의)를 배격,


       사랑을 계명으로 민족·신분·빈부 차이를 초월한 보편적 종교로 세계에 전파됨




 

□ 크리스트교의 전파


ㄱ) 베드로·바울 등의 전도 - 교회 조직, 신약 성경 편찬


ㄴ) 로마제국 내의 포교


     * 로마의 다신교와 황제숭배 거부로 탄압 받음 - 비밀 집회


     * 밀라노 칙령(313년) - 콘스탄티누스황제, 크리스트교 공인


     * 니케아 공의회(325년) - 아타나시우스파의 삼위일체설을 정통교리로 확정


     * 로마의 국교화(392년) - 테오도시우스황제


ㄷ) 크리스트교적 세계관 확립 - 아우구스티누스, '신의 나라'



1-2. 고대국가의 성립



1) 고대 국가의 성격

 

 

연맹왕국

http://dugok.x-y.net/kor-his/sys/yunmengguk.htm

http://myhome.edunet4u.net/shilla/king/king1.htm

http://blog.naver.com/theorchids/40001528356


고대국가 성립 이전의 정치체제. 종래에는 한국 고대의 국가발전 과정을 ‘부족국가→부족연맹체국가→고대국가’로 발전해 왔다는 부족국가론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부족국가론이 지니는 개념의 모호성과 이론적 한계를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성읍국가→연맹왕국→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는 성읍국가론이 대두되었는데, 이같은 성읍국가들이 몇개 연합해서 성립된 것이 연맹왕국이다. 성읍국가는 여러 집단 가운데 우세한 집단을 중심으로 둘레에 성곽을 쌓고 각종 공공시설을 설치하여 하나의 독립된 국가를 형성한다. 이처럼 지연(地緣)을 중심으로 성립된 성읍국가가 외형적으로 확대되면서 연맹왕국 혹은 영역국가를 이루지만, 각각의 성읍국가는 여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중대한 사안이 있을 경우에만 연맹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성읍국가와 연맹왕국의 구분 기준을 단순히 외적인 규모의 변화에만 중점을 둠으로써, 국가형성 파악에 필수적인 내적인 사회관계의 변화와 같은 보다 본질적인 요소에 대한 접근을 고려하지 않은 한계가 있다.


 

 

고대국가

http://211.46.254.1/2003student/sbg/2_3.htm


고대국가는 일반적으로 원시공동체의 해체 결과로 발생한 계급관계 위에서 성립한 정치적 사회로 이해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상 고조선.부여, 그리고 삼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모두 원시공동체로부터 분화.족출한 小國(소국)을 모태로 삼아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 따라서 소국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고대사회의 구조를 밝히는데 관건적 의미를 지닌다. 소국은 아직 국가로 규정하기에는 미숙성이 엿보이는 그야말로 소국공동체일 따름이었다.

이런 소국이 고대국가로 이행하는 방법은 교역 또는 전쟁을 통한 소국가간의 통합이었다. 우리나라 고대국가들도 중심부 소국이 주변부 소국에 대해 부단한 통합작용을 전개함으로써 국가형성에 필요한 영역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한국사상에서 고대국가의 형성과 발전은 고조선으로부터 시작하여 삼국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동일한 과정을 시간차에 따라 필연적으로 경과하였다. 그러므로 고대사회의 구조, 특히 정치구조에서는 일정한 유사성을 간취할수 있다.

한국고대사회의 시간적 범위와 정치구조의 특정에 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는데 북한학계에서는 고조선, 부여, 그리고 진국을 고대노예소유자국가로 파악하는 한편, 삼국을 중세봉건국가의 중앙집권체제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시기구분은 삼국시기의 사회경제구성에 관한 이른바 노예론자와 봉건론자의 토론과정에서 삼국의 선행사회를 노예소유자국가로 규정함으로써 우리나라 역사에서 역사발전의 합법칙성이 계기적으로 관철된 데 대한 양자의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한편 남한학계는 고조선에서 신라 말까지를 고대사회로 보려는 관점위에서 고대국가의 발전과정을 연맹단계에 유의하여 다단계화합으로써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는데 귀족연합→전제왕권→귀족연립의 단계로 정치체제가 변화한 것으로 파악된다.

고대국가가 형성된 이후 해당사회의 상부구조에서는 일단 귀족합의체제의 유지와 대왕집권체제로의 지향이라는 두 경향이 병존했던 것으로 보아진다.


 

 

중앙집권화

http://blog.naver.com/reportblog/60015708670

http://blog.naver.com/this8423/120005698122


중앙집권화된 정치적 체계란 개인이나 집단에 권력과 권위가 집중되어 있는 사회를 말한다. 중앙집권화된 체계는 추방사회와, 국가로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두가지를 설명하기에 앞서, 서두에서 비중앙집권적인 체계와 관련해볼 때 중앙집권화된 체계를 다음과 같이 예측하고있습니다.

중앙집권화된 체계는,

[] 군단이나 부족들보다 더욱 인구밀도가 높을 것이다.

[] 등급, 혹은 계급으로 계층화되며 전문화된 사회적 역할과 직업을 갖고 있을 것이다.

[] 보다 더 생산기술들을 많이 사용하고 중앙집권적인 재분배에 기초를 둔 경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 지속적인 사회 정치적 집단이라는 점에서 보다 안정적일 것이다.

모톤 프리드 - 비중앙집권적인 체계와 비교할 때 중앙집권적 체계들이 기본적으로 불평등적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정치적 지위는 특정 계급이나 엘리트 집단에 의해 충원된다.


 

 

삼국의 건국 순서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13&dir_id=130603&eid=6ZokyHFQ0eAwYgfI%2BWUr24Yqqlu70aTw


신라는 기원전 57년 박혁거세가 경주 일대의 사로국에서 건국하였고,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부여 계통의 이주민과 동가강 유역의 토착민이 건국하였으며,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이 한강 유역의 위례성에 정착하여십제라는 나라를 세움에서 시작되었답니다.(나중에 백제로 바꿈) 따라서 나라가 세워진 순서는 신라→고구려→백제 이지요.

친구분이 말하시는 것은 아마 전성기인것 같습니다.

삼국시대의 전성기 판단 기준은 한강 유역의 차지 여부였는데요,세 나라의 전성기는 백제가 4세기에 근초고왕이 가장먼저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고구려를 쳐들어가 고국원왕이 전사까지 해서 첫번째이고, 고구려가 5세기에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영향으로 한강 유역을 차지하여 두 번째, 신라는 진흥왕이 6세기에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면서 세번째가 되었답니다.


2) 삼국의 성립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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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고구려의 수도인 집안시에는 유명한 광개토대왕릉비가 장대한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서 있다. 그「비문」의 첫 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의 터전을 잡을 때 북부여로부터 나왔는데,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이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내려왔으니 태어나면서부터 신성함이 있었다. 수레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는데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었다. 왕이 나루에 다다라 말하기를 "나는 황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딸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시키고 자라를 떠오르게 하라"고 하였더니,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자라가 떠올라 건너갈 수 있었다. 비류곡 홀본(졸본) 서쪽 산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인간세상의 왕위에 있는 것을 즐기지 않으니 이로 말미암아 (하늘이) 황룡을 내려보내어 왕을 맞이하게 되니 홀본의 동쪽 언덕에서 황룡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비문」에서 보듯이 고구려 사람들은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과 자신들이 북부여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다. 즉, 자신들이 남만주 지역에서 오래 전에 정착해서 발전해 온 사람들이 아니라 이주민이었다고 생각했다. 고구려의 주도세력도 역시 부여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부여가 고구려보다 북쪽이라는 것을 볼 때 고구려의 주민 구성은 북방에서 말을 타던 무리들이 내려와 압록강 유역에 정착하면서 살던 사람들과 융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가 부여의 후손임을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출신지였기 때문이 아니라 고구려가 당시 동방사회에서 큰 위치를 차지했던 부여의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것에서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추모왕(주몽)을 북부여 천제(天帝)의 아들로 알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한편 고구려가 건국되던 때는 고조선이 붕괴된 후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역에 부여가 상대적인 강국으로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를 이끌만한 강력한 국가는 없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나라도 무제가 죽은 후에는 외부의 확대정책을 포기하고 있던 터라, 만주 일대에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이와 같은 동방사회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등장한 고구려는 건국 직후부터 빠르게 만주와 한반도 북부 일대의 군소 국가들을 통합하였다. 졸본부여를 시작으로 행인국·북옥저 등을 통합했고 3대 대무신왕 시기엔 벌써 동방지역 최강의 국가로 자리잡게 된다. 이처럼 고구려는 부여의 혈통을 계승하고 고조선을 세웠던 역사적 경험을 이어 받아 강력한 국가로 급성장할 수 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단군신화의 흔적이 나타나고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단군신화의 내용과 밀접한 것은 고구려 사람들이 고조선의 정신세계를 그대로 계승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졸본성

http://blog.naver.com/candlep64/60006165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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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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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suntrack/40004757937

http://myhome.naver.com/itsphw/index2.htm


백제는 우리나라 고대에 한반도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고구려(高句麗), 신라(新羅)와 함께 이른바 삼국시대(三國時代)를 형성하다가 서기 660년 신라에 의해 멸망한 나라의 이름입니다.


백제는 나라의 이름, 곧 국호(國號)를 몇 차례 바꾸 었으며, 또 기록에 따라 여러가지 별명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는데 시대를 떠나서 가장 일반적인 이름은 역시 백제(百濟) 입니다. 백제라는 국호의 의미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설명이 조금씩 다릅니다. 먼저, 한국고대사 연구의 기초자료인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그의 형인 비류(沸流)가 다스리던 백성을 합쳐 더 큰 나라를 만들 때 비류의 백성들이 모두 즐거워 하여서 나라 이름을 백제로 고쳤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한편, 중국측의 역사서인 수서(隋書)에는 백제를 간략하게 소개한 [백제전(百濟傳)]이 있는데, 거기에는 처음에 백여 호(戶)가 바다를 건너[百家濟海] 남하하여 나라를세웠기 때문에 백제라고 하였다고 쓰여 있습니다.


백제의 국호에 대한 삼국사기와 수서의 설명 가운데 어느 쪽이 맞는 것인지는 아직 가려내기 어렵습니다. 양쪽 모두 설화에 입각한 설명이기에, 어쩌면 양쪽 모두 잘못된 설명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백제가 처음부터 백제(百濟)라는 국호를 사용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처음 나오는 백제의 국호는 십제(十濟)입니다. 조금 길긴 하지만, 백제의 건국과 관련된 삼국사기의 기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백제 시조 온조왕(溫祚王)의 아버지는 추모(鄒牟)로서 주몽(朱蒙)이라고도 하는데, 북부여(北扶餘)로부터 난을 피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졸본부여의 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단지 딸만 셋이 있었다. 왕이 주몽을 보더니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시집보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졸본부여의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잇고 두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을 비류라 하고 둘째 아들을 온조라고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가니 백성 가운데 따르는 자가 많았다.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땅을 바라보았는데, 비류는 바닷가에서 살고 싶어 하였다. 10명의 신하가 간언하기를 "생각컨대 이곳 하남(河南)의 땅은 북쪽으로 한수(漢水)를 끼고, 동쪽으로 높은 산악에 의지하며, 남쪽으로 기름진 들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큰 바다에 막혀있으니, 그 천혜의 험준함과 땅의 이로움은 좀체로 얻기 어려운 지세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만드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하였다. 그러나 비류는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가서 살았다.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하였다. 10명의 신하로 하여금 돕게 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하니,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의 홍가(鴻嘉) 3년이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었는데, 위례성으로 돌아와 보니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하였다. 마침내 비류가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 죽으니,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백성들이 올 때 즐거이 따라왔다 하여 나중에 국호를 백제(百濟)로 바꾸었다. 그 세계(世系)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扶餘)를 성씨로 삼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 온조왕 즉위년조. 위의 기록은 내용상 백제의 건국설화라고 하여도 무방한데, 고구려·신라의 그것과 비교한다면, 매우 특이하다고 할 만합니다. 즉, 백제의 건국설화-온조설화(溫祚說話)에는 묘하게도 신비라든가 기적과 관련된 부분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매우 사실적이고 소탈한 방법으로 백제 건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백제의 건국 설화가 뒤늦게 채록되었거나 중국화된 합리주의적 시각에서 채록되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백제의 건국설화가 고구려, 신라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욱 사실에 가깝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여하튼, 위의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백제의 국호는 애초 십제(十濟)였으며, 나중에 국력이 더욱 커지자 백제(百濟)로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십(十)에서 백(百)으로' 바뀌었다는 것인데, 이와 같은 설명이야말로 중국화된 시각, 곧 한자(漢字)에 입각한 해석이자 설명이라고 하겠습니다.


또, 그렇기에 인위적인 분위기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즉, 나라가 성장함에 따라 '십(十)'에서 '백(百)'으로 나라 이름을 바꾸었다는 설명은 마치 '백'을 염두에 두고 숫자논리에 입각하여 '십'을 지어낸 듯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기록은 중국에서 진수(陳壽)라는 이가 3세기 후반에 편찬한 역사서 삼국지(三國志)입니다.


중국 삼국시대의 역사를 정리한 삼국지에는 [한전(韓傳)]이라 하여 우리의 삼한(三韓)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한 부분이 있는데, 그중 마한(馬韓)에 속한 54개 소국의 이름을 열거하던 가운데 백제국(伯濟國)이라는 국호를 적어놓은 대목이 있어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백제(伯濟)와 백제(百濟)는 한자만 약간 다를 뿐 같은 음(音)으로 된 글자이며, 또 백제국의 위치가 한강유역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여러모로 백제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상당수의 학자들은 보통 백제국을 백제의 초기 단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백제국이 국력을 신장한 결과 국호를 한자 뜻이 더 좋고 세련된 백제(百濟)로 바꾸었다는 것이지요. 한편, 일본 정부에 의해 서기 720년에 편찬된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위례국(慰禮國)'이라는 명칭이 나오는데, 이는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한 백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대에는 도시의 명칭을 그대로 나라 이름으로 사용한 예가 적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위례국이라는 이름도 그다지 어색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만약 일본서기의 위례국이라는 표현이 어떤 근거를 가진 것임을 인정할 경우, 그것이 백제라는 국호보다는 앞선 시기의 국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도 될 듯합니다. 다만, 그것이 정식의 국호였는지, 아니면 별명과 같은 것이었는지는 아직 가리기 어렵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성왕(聖王) 16년(538)에 도읍을 웅진(熊津) 곧 지금의 공주지방에서 사비(泗 ) 곧 지금의 부여지방으로 옮기면서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다시 한번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부여'라는 국호는 다른 기록에 별반 남아있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국제사회에서는 물론 백제 내부에서도 그리 오래 사용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도읍을 옮길 때 국가 분위기를 새롭게 한다는 뜻에서 국호도 바꾸었지만, 백제라는 국호가 지니는 전통적 이미지가 이미 국내·외에 널리 퍼져있어 오래지 않아 환원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국호들처럼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매우 특징적인 명칭도 있었습니다. 바로 응준(鷹準)과 나투(羅鬪)라는 이름입니다.


고려시대의 저작인 제왕운기(帝王韻紀) 에는 "후대의 왕 때에 국호를 남부여라고 한 적이 있으며, 또 응준 혹은 나투라고 칭하기도 하였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응준과 나투는 모두 조류(鳥類)의 일종인 '매'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응준과 나투는 정식 국호라기 보다는 다른 나라에서 백제를 지칭할 때 사용한 일종의 별명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침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가 선덕왕(善德王) 14년(645)에 건립한 황룡사(皇龍寺) 9층탑의 제5층에 신라의 경계해야 할 적대국으로서 응유(鷹遊)를 적어놓았다는 기록이 있는바, 여기의 응유를 앞서의 응준과 같은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철기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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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 문화는 중국의 전국 시대 ( B.C. 4세기경 )에 한반도로 이주해 온 유이민에 의해서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다. 고조선의 멸망 ( B.C. 108 )으로 우리 나라 자체의 이주민 파동이 일어나면서 남부 지방에까지 철기 문화가 보급되었다. 철제 농구에 의한 농경의 발달로 경제 기반이 확대되고, 목축과 어로 활동도 활발하여 양산·김해·웅천 등지에 조개더미를 남겼다. 이 무렵에 씨족 공동체가 친족 공동체로 바뀌었다.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철기 문화에 기반을 둔 새로운 국가들이 성장하였다. 북쪽에서는 부여·고구려·옥저·동예가 일어나고, 남쪽에서는 마한 진한·변한 등의 삼한이 일어났다.



1) 철기 문화의 발전

→기원전 4세기 이후부터 철기 시대를 맞았다.


⑴ 철기 문화의 보급 시기 : 기원전 4세기경 이후,

기원전 1세기 경부터 철기 사용이 일반화됨


⑵ 전파 지역 :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방은 물론 남부 지방의

김해, 창원 등지에서도 유적.유물 발견


⑶ 유물과 유적

① 널무덤, 독무덤

② 유물 : 철제 무기(칼, 창, 화살촉),

철제 농기구(보습, 괭이, 낫)



⑷ 철기 문화의 영향

① 생산력 증대

② 정복 전쟁의 발생

③ 새로운 국가의 출현(부여,고구려,옥저,동예,삼한)


국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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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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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 무제는 고조선 지역에 4군(낙랑, 진번, 임둔)을 설치하고, 태수, 현령, 장사 등을 파견하여 토착 세력의 성장을 억제하는 한편, 소금, 철, 목재 등을 착취하여 갔다. 이에 고조선인들은 그들을 축출하기 위한 저항을 계속하여 마침내 한 군현은 축출되고 말았다., B.C.82년에 진번군은 낙랑군에 임둔군은 현도에 병합되었다. B.C.75년에는 현도군의 치소를 통구에서 만주의 흥경으로 옮기게 되었고 그 자리에고구려가 성장하게 되었다.

이에 낙랑군은 진번 땅에는 남부 도위, 임둔 땅에는 동부 도위를 각각 두었다.그 후 전한->신->후한으로 바뀌는 혼란기를 계기로 낙랑의 토착인 왕조가 반란을 일으켜낙랑 태수 유현을 죽이고 후한에 대항하였다. 이를 계기로 A.D. 30년 동부 도위를 철폐하고토착인 거수를 현위로 임명하여 자치에 맡겼다. 이러한 변동 과정에서 옥저와 동예가 자립하게 되었으며 고구려의 세력도 강성하기 시작하여 현도군의 치소는 태조왕 때 다시 무순으로 쫓겨났다.


3세기 초인 후한 헌제 때를 전후하여 한반도 남쪽의 진이 흥기하여 많은 조선인이 남하하자 요동 지방에서 세력을 펴고 있던 공손강은 지배 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진번 옛 땅에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여 미천왕 때 낙랑군과 대방군은 쫓겨나 한 군현은 소멸되고 말았다.


 

 

관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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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10여 관등이라 함은 고구려의 관등제도가 늦게까지 정립이 되지 않아 4~14개의 관등 이름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10여관등이라는 것은 10개가 조금 넘는 수의 관등 조직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백제의 6좌평 16관등이라 함은 님이 쓰신데로 좌평부터 극우까지의 16개 등급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6개의 부처의 장은 1등급인 좌평이 맡는 것으로 현재의 장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고구려의 관등 조직

고구려는 삼국 가운에 가장 먼저 정비된 관등조직을 성립시켰다. 고구려 관계 이름에 태대형, 조의두대형, 대형, 소형 등의 형(兄)과 태대사자, 대사자, 수위사자, 소사자 등의 사자(使者)가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렇게 성립된 관등 조직은 여러 차례 변하여, 3세기경에는 10개의 관등 이름이 보이고 있으며, 이것을 모태로 하여 대략 6세기까지 13관등제로 발달하였고, 그 뒤 최하위의 1등이 표면화하여 말기에는 14등급으로 완성되었다. 14등급 가운데 수상에 해당하는 1등계 대대로에서 2등계 태대형, 3등계 울절, 4등계 태대사자, 5등계 조의두대형까지는 최고 귀족들이 차지하여, 이들이 귀족 회의를 구성하고 중요 국사를 처리하였다. 그런데 수상인 대대로는 왕이 스스로 임명하지 못하고, 5부에서 대표자를 선거하여 3년에 한 번씩 교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이것은 옛날의 연맹장 선거의 유풍이 그대로 잔존하였던 것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백제의 관등 조직

백제의 관등 조직은 좌평에서 극오에 이르는 16등급으로 마련되었는데, 좌평 및 달솔까지의 제솔(諸率)과, 장덕으로부터 대덕까지의 제덕(諸德), 그리고 문독 이하로 3구분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1등계인 좌평은 6인을 두어 후세의 육조와 비슷한 행정 분담을 맡는 주요 관부의 장관이기도 하였으며, 또 12등계의 문독과 13등계의 우독은 백제 관제에 어느 정도 문무의 구분 관념이 있었던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수도를 부여로 옮긴 뒤에는 궁내 부서와 중앙 관서의 수가 22부에 이르는 정비를 보았으며, 재상은 투표에 의해서 선출되었고, 기타 모든 관서의 장도 3년마다 교대되었는데, 그것은 과거의 족장 선거의 유풍인 동시에, 현실적으로는 귀족 수의 증가라는 자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신라의 관등 조직

신라의 관등 제도는 6세기 초 법흥왕 때 17관등으로 완성되었다. 그런데 이 관등 명칭에 찬(瓚)이나 사(舍), 지(知)와 같은 족장적 의미를 간직한 것이 많은 것으로 보아, 종래의 여러 종유를 족장 명칭이 고대 국가에 이르러 하나의 관등 체제에 편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신라의 17관등은 일원적인 관등 조직이지만, 그것인 평면적인 구성이 아니라, 그 안에 몇 개의 획선이 그어져 있는 것은 신분 제도와의 연관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즉, 신라의 관등 조직은 골품 제도와 관련을 맺고 편성되어, 진골은 제 1관등인 이벌찬까지 승진 할 수 있었지만, 6두품은 제 6위 아찬까지, 5두품은 10위 대나마까지, 4두품은 제12위 대사까지밖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제한되어 있었다.

이 때, 6두품은 아찬에서 더 이상 승진할 수 없기 때문에 4중아찬까지의 중위(重位)가 마련되었고, 5두품의 경우에도 대나마에 9중나마가 설치되어, 신분에 따라 제한된 관등을 넘지 않고도 승진을 계속할 수 있는 방로(傍路)가 마련되어 있었다. 즉, 신라 사회는 골품에 따른 관등의 제한을 중위제로서 보완하였던 것이다.


 

 

대대로(大對盧)와 대막지리

고구려는 관계(官階)와 관직이 늦게까지 분화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었으며, 고구려의 관위(官位)가 4등급∼14등급까지의 큰 혼란을 빚고 있는 데에서 그 설명이 더 어려운 실정에 있다.

대대로는 분명히 명칭상으로 대로의 후신이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볼 때, 초기 고구려에는 좌·우보(左·右輔)라는 재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족적 전통은 신대왕 때 국상제가 나타나 비계루부 출신으로 임명되어 제도적 성장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4세기 말 이후, 절대 왕권의 성장 과정에 따라 그 지위가 유명 무실하게 되었으며, 5세기 말 이후 전제 왕권의 약화 과정에 따라 귀족 세력의 강화로 대대로가 나타났다고 보인다.

더구나, 7세기에 이르러 왕권이 약화되고, 수·당의 위협에 직면하여 귀족 회의의 의장격인 대대로써는 긴급한 상황에 대처할 수 없었다. 이에, 연개소문 부자로 이어진 대막지리가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대막지리는 군·국 정사를 총괄하는 강력한 실권자인 것이다.


 

 

좌평(左平) 제도

중앙의 정치 기구는 6좌평제를 기본으로 하였다. 백제는 이미 한성 시대에 내신, 내두, 내법, 위사, 조정, 병관의 여섯 좌평이 국무를 분담하였고, 제 1관품이 좌평이 그 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사비 천도 후에는 점차 국무가 복잡해져서 6좌평 이외에 내관 12부, 외관 10부의 22부가 증치되었다.

6좌평제는 그것이 곧 중국의 6전제는 아니더라도 그것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며, 또 22부의 명칭에도 주례(周禮)를 본뜬 6관의 이름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백제의 중앙 관제가 중국 제도에 서 큰 영향을 받았음이 나타난다.


 

 

관복제

http://dugok.x-y.net/kor-his/sys/boksek-bek.htm


(고이왕) 27년 정월에 내신좌평을 두어 왕명출납에 관한 일을 맡게 하고 내두 좌평은 재정에 관한 일을 맡고 병관좌평은 외방의 병마에 관한 일을 맞게 했다. 또한 6좌평은 모두 1품이요, 달솔은 2품, 은속은 3품, 덕솔을 4품 극우는 16품이다. 6월에 명령을 내려 6품이상은 자색을 입고 은으로 관을 장식하여 11품 이상은 비색을 입고, 16품 이상은 청색을 입도록 하였다.


 

 

사로국

http://dugok.x-y.net/kor-his/pla/saroguk.htm


뒤에 신라의 모체가 되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변진(弁辰)조에 진한 12국의 명칭이 보이는데, 그 가운데 하나로 나온다.


한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왕위에 즉위한 이후에 국호를 서나벌(徐那伐)·서라벌(徐羅伐)·서벌(徐伐)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들 명칭과 사로국은 동일한 의미로 이해된다. 사로국은 3세기 중반 무렵부터 진한 소국을 정복하거나 복속시켜 진한 지역의 맹주국(盟主國)이 되었고, 280년에는 사로국왕이 진한 세력을 대표하여 진(晋)에 조공하기도 하였다.


4세기 중반 이후 사로국의 영역팽창과 더불어 사라(斯羅)·신로(新盧)·신라(新羅)란 명칭이 쓰이다가, 503년(지증왕 4)에 신라(新羅)라는 국호가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엄밀하게 말해서 사로국이란 국호가 쓰인 시기는 신라가 경상도지역을 석권한 4세기 중반 이전에 경주를 중심으로 한 소국이었을 때였다고 할 수 있다.


 

 

이사금

http://blog.naver.com/jjang_jmh/140016275237

이질금(尼叱今:爾叱今)·치질금(齒叱今)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사금은 이금[齒理]의 방언으로, 신라 제2대 남해왕이 죽을 때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脫解)에게 "내가 죽은 후 너희 박(朴)·석(昔) 2성이 연장자로 왕위를 이으라" 하여 그후 김씨도 포함해서 3성이 연치(年齒)의 많음을 따라 서로 왕위를 이은 까닭에 이사금이라 하였으나 이설이 많다.


신라는 제19대 눌지왕(訥祗王) 때에 이르러 임금의 칭호를 마립간(麻立干)이라 고치고, 제23대 법흥왕(法興王)에 이르러서 왕이라는 칭호를 쓰게 되었다.


 

 

마립간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6&dir_id=601&eid=I1N3YzHvNGbLMlE7e%2F%2BiEB1YOQKX%2BP3L

http://dugok.x-y.net/kor-his/sys/maripgan.htm


첫 마립간이 내물 마립간은 남당이라는 곳에서 나라일을 보앗는데, 신하들은 관등에 따라 말둑을 세우고 그 뒤에 섰다 이리하여 왕을 마립간이 부르게 되었다.


 

 

호우명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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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

http://www.xasa.us/wiki/ko/wikipedia/e/e_/e_e_e_i__13.html


금관가야(金官伽倻) 혹은 본가야(本伽倻)는 가야 연맹체의 주요국으로, 2세기부터 3세기 사이까지 맹주 자리에 있었다가 이후 대가야와 아라가야에 그 자리를 물려주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금관가야는 9촌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수로왕이 통일했다고 하며, 43년 세워져 532년 멸망했다.


 

 

덧널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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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가야연맹

http://blog.naver.com/kosfamil.do?Redirect=Log&logNo=40018022949


 

 

김수로

http://ipcp.edunet4u.net/%7Ekoreannote/tv/tv08.htm


 

 

1-3. 삼국의 발전과 통치체제


1) 삼국의 정치적 발전


낙랑군

http://dugok.x-y.net/kor-his/pla/nakrang.htm


낙랑군은 대체로 위만조선의 고지를 중심으로 평남의 대부분과 황해도의 일부에 걸쳐 있었는데, 설치 당시의 속현(屬縣)은 조선(朝鮮) ·염한(余) ·패수(浿水) ·점제(泯蟬) ·수성(遂成) ·증지(增地) ·사망(駟望) ·둔유(屯有) ·누방(鏤方) ·혼미(渾彌) ·탄열(呑列) 등 11현이었다. 낙랑군의 치소(治所)에 대해서는 평양설도 있으나, 대동강의 대안(對岸)인 토성리(土城里)가 유력하다.


낙랑군은 한나라 소제(昭帝) 때인 BC 82년에 진번군을 병합하여 그 일부에는 새로 낙랑군 남부도위(南部都尉)를 분치(分置)하고, 그 관하에 소명(昭明) ·대방(帶方) ·함자(含資) ·열구(列口) ·장잠(長岑) ·제해(提奚) ·해명(海冥)의 7현을 두고 그 가운데 소명현(昭明縣:信川)을 남부도위의 치소로 삼았다. 또, BC 75년에는 앞서 BC 82년 현도군에 폐합되었던 임둔군의 고지(故地)도 병합하여 그 관할구역이 너무 광대하고 멀어서 단단대령(單單大嶺:함남 長津郡과 咸州郡 사이의 黃草嶺) 이동(以東)의 옛 땅에는 낙랑군 동부도위를 분치하고, 그 관하에 동이(東凋) ·불이(不而) ·잠대(蠶臺) ·화려(華麗) ·사두매(邪頭昧) ·전막(前莫) ·부조(夫租) 등 이른바 영동(嶺東) 7현을 두었다.


《한서(漢書)》 <지리지> 낙랑군조에 의하면 6만 2812호(戶), 40만 6748명, 25속현에 이르는 대군(大郡)이 되었다. 왕망(王莽)이 전한(前漢)을 무너뜨리고 신(新)을 세우자 낙랑군은 낙선군(樂鮮郡), 패수현(浿水縣)을 낙선정(樂鮮亭), 증지현(增地縣)을 증토현(增土縣) 등으로 고쳤으나,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일어나 왕망을 무너뜨리자 다시 옛 이름으로 돌아갔다. 후한의 광무제가 중국 중원(中原)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동란기(動亂期)에 낙랑군에서는 토착민(조선인)인 왕조(王調)가 낙랑태수 유헌(劉憲)을 죽이고 자칭 대장군 낙랑태수라 칭하며 군(郡)을 장악하고, 새로 일어난 후 한 정부에 복종하지 않았다.


그러나 30년 후한에서 새로 파견된 낙랑태수 왕준(王遵)이 군사를 이끌고 랴오둥[遼東]에 이르렀을 때 낙랑의 한인군리(漢人郡吏)들이 왕조를 죽이고 반란을 평정하여 낙랑군은 다시 후한 정부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해 후한은 낙랑군 동부도위를 철폐하여 영동 7현을 포기하고 그 곳의 토착민 거수(渠帥:우두머리)를 봉(封)하여 현후(縣侯)로 삼아 자치(自治)토록 하였다.


《후한서》에는 당시 낙랑군의 세력이 18성(城), 6만 1492호(戶), 257만 50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낙랑군의 지배에서 벗어난 영동의 7현(지금의 함남) 지방에서는 유력한 거수를 중심으로 하는 부족연맹체가 새로이 형성되어 부조현(夫租縣)을 중심으로 옥저(沃沮)라는 사회가 일어나고, 그 남쪽에는 사두매(邪頭昧:文川) ·불이(不而:安邊) 등을 중심으로 동예(東濊)라는 사회가 일어났다.


후한의 말기인 환제(恒帝:147~167) ·영제(靈帝:168∼189) 때에는 한(韓) ·예(濊)가 강성해져 낙랑군의 토착주민들은 특히 진한(辰韓) 방면으로 많이 유입하여 낙랑군 둔유현(屯有縣:황해도 黃州) 이남의 땅은 황폐화하였다. 이때에는 중국 본토도 군웅할거의 동란기를 맞아 184년 요동태수(遼東太守)가 되어 독립적인 세력을 심고 있던 공손 탁(公孫度)은 현도군과 더불어 낙랑군도 그의 지배하에 넣었다.


이어 그의 아들 공손 강(公孫康)은 후한의 헌제(獻帝:196~220) 때에 낙랑군 둔유현 이남의 황폐한 땅을 분할해서 대방군(지금의 황해도 帶方郡)을 설치하여 낙랑군의 남부도위(南部都尉) 관할의 7현을 관할하게 하고, 군치(郡治)를 대방현(鳳山郡)에 두었다. 이로써 낙랑군은 설치 당시의 속현 11현만을 관할하게 되었다.


238년 공손씨가 3대의 공손 연(公孫淵)에 이르러 3국의 하나인 위(魏)에게 멸망당하게 되자 낙랑군은 현도 ·대방과 더불어 위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에 속하게 되고, 그 뒤 위나라가 서진(西晉)에 멸망하자 서진의 유주자사에 속하게 되었다. 이 당시의 낙랑군을 《진서(晉書)》 지리지에는 ‘통현(統縣) 6, 호(戶) 3,700’이라 하여 영토와 인구의 현저한 축소를 나타냈는데, 낙랑군은 11현에서 대동강 이북의 5현(余 ·浿水 ·泯蟬 ·增地 ·呑列)이 없어지고, 그 이남의 6현(朝鮮 ·屯有 ·渾彌 ·遂成 ·鏤方 ·駟望)만이 남게 되었다.


이 당시에 현도군도 낙랑군과 같이 영토가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는데, 두 군의 축소는 강성해진 고구려에 잠식되었기 때문이며, 고구려의 손이 미치지 않은 대방군만이 7현(옛 낙랑군 남부도위)을 유지하고 있었다. 311년 서진(西晉)의 국도 뤄양[洛陽]이 흉노족의 전조(前趙)에게 함락되는 등 중국 본토에 혼란이 일자 313년(고구려 미천왕 14) 고구려는 낙랑군을 공략해서 이를 함락함으로써 설치 421년 만에 낙랑군 대동강 이남의 땅도 중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국토로 회복되었다.


또, 고구려는 314년에 낙랑군 남부도위였던 대방군도 공격해서 얼마 후 이를 함락하였는데,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하면 이때 낙랑 ·대방의 두 군에 거점을 두고 있던 요동인(遼東人) 장통(張統)이 고구려 미천왕(美川王:乙弗利)과 연년(連年) 공방전을 벌이다가 민호(民戶) 1,000여 가를 이끌고 요서(遼西)의 모용씨(慕容氏:鮮卑族)에게로 귀속하였다 하여 낙랑과 대방에서 마지막으로 물러나는 한족(漢族)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태학

http://dugok.x-y.net/kor-his/sys/tehak.htm

태학(太學)을 세우고 자제(子弟)를 교육하였다.

                       ({三國史記}18 高句麗本紀6 小獸林王 2年)

  고구려·고려시대의 교육기관. 고구려에서는 372년(소수림왕 2) 전진(前秦)의 제도를 본떠 국립학교로서 중앙에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역사상 학교교육의 시초가 된다.   상류계급의 자제들만이 입학할 수 있 는 귀족학교였으며 경학(經學)·문학·무예 등을 가르쳤다.


  태학이 소수림왕대에 설치되었다는 것은 그만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소수림왕대는 백제의 공격으로 국왕(고국원왕)이 전사당하는 비운을 경험한 직후의 시점으로서, 국가의 재도약을 위해 여러 가지 개혁정책들이 취해지고 있었다. 불교 공인과 율령 반포와 함께 태학 설치가 이 때 취해진 대표적인 개혁조치였다. 그렇다면 태학은 소수림왕대의 개혁정책 추진에 활용할 수 있는 국가적 인재양성을 위해 설치된 국립 교육기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6부

http://kin.naver.com/open100/entry.php?eid=mSx2Z0T4sHISoMVWuJJG%2BCpNLW%2Ba5ST6


각각 4개의 사(司)로 나누어지고 판관인 낭중(郎中)과 원외랑(員外郎)이 책임을 분담하였다. 6부의 서열은 좌·우사로 분담하고 있는 까닭에 이·병·호·형·예·공부 순이다. 또 태상시(太常寺)와 국자감을 필두로 하는 9시5감과 상서성과 6부의 관계는 상서성과 6부가 상급 정무기관으로서 문서행정을 총괄하고 9시 5감과 같은 사무관청을 통괄하는 것이므로 둘 사이의 업무내용은 많은 차이가 있다.


 

송서

http://cafe.naver.com/krvsjp.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61

http://210.217.241.12/%7Egosa/cj/songsu.htm


《제기(帝紀)》 10권, 《지(志)》나라 30권, 《열전(列傳)》 60권, 도합 100권. 487년 남제(南齊) 무제(武帝)의 칙명(勅命)에 따라 심약(沈約)이 488년에 편찬을 완성한 것으로 송나라 60년(420∼478)의 역사를 기록하였으며, 중국의 사서(史書) 중 가장 권위 있는 25정사에 들어간다. 이 사서는 이미 462년 송나라 효무제(孝武帝)의 칙명에 따라 서원(徐爰) 등이 편찬한 것에, 그 뒤의 역사 등을 보충하여 완성한 것이다.


 

우산국

http://blog.naver.com/knightblack/11492548

학자들은 우산국의 ‘우산’이라는 이름이 무슨 뜻인지를 알려고 오랫동안 씨름해왔다. 어떤 이는 ‘우산’이 ‘울뫼’나 ‘우루뫼’라고도 읽힌다는 점에 착안해 ‘울타리처럼 둘러처진 뫼(:山)’라는 뜻으로 풀이했지만, 나는 ‘붉은 뫼’라는 뜻으로 풀이한다.


몽골 말로는 ‘울란’이 ‘붉은’이라는 뜻이고, 울릉도는 강원도나 경상북도에서 바라보면 - 햇빛에 물들어서 - 영락없는 ‘바다 위에 솟아오른 붉은 뫼’가 되기 때문이다.


이미『삼국지』「한전」에 실린 ‘우중국’이『삼국사기』의 ‘우산국’일지도 모른다는 견해가 나온 바, 둘이 한자만 다를 뿐 발음은 같으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산’은 ‘울’(붉은)이라는 말과 ‘산(山)’이라는 말이 합쳐진 이두라고도 볼 수 있다.


위나라에게 정보를 제공한 한(韓 : 삼한백제)의 사자가 울릉도를 ‘우중국’이라고 부른 까닭은, 그는 강원도나 경상북도 바닷가에서 울릉도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 섬이 ‘(햇빛에) 붉게 물든 뫼’로 보였기 때문이리라(마치 같은 침미다례 사람이라도 백제에 굴복하고 담로가 되었느냐, 아니냐에 따라 주선국州鮮國과 주호국 州胡國으로 나누어서 불렀듯이!).


어쩌면 울릉도에 사는 사람들도 - 마치 처음에는 나라 이름을 진(辰)이라고 지은 사람들이 나중에는 당나라가 지은 ‘발해(渤海)’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듯이 - 이 이름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나라를 ‘우산국’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아닐까?


 

병부

http://www.koreandb.net/KoreanKing/html/person/pki23023.htm#1.%20병부%20설치

법흥왕은 지증왕 때 일련의 개혁정치를 계승하여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로서의 통치체제를 완비하였다. 이같은 점에서 먼저 주목되는 것은 517년에 설치한 중앙관부로서 병부(兵部)의 존재이다.


신라에서 중앙관부로서는 병부가 제일 먼저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권을 왕이 직접 장악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즉, 517년에 비로소 설치된 병부는 눌지왕 이후에 등장하여 왕의 직속으로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장군과 같은 직책을 중앙관부로 흡수하여 재편성한 것이다.


 

율령

http://www.koreandb.net/KoreanKing/html/person/pki23023.htm#1.%20병부%20설치

520년에는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공복을 제정하였는데, 이때에 반포된 율령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7관등과 골품제도 등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율령제정의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왜냐하면 율령에 의하여 신라내로 통합된 이질적 요소들이 파악됨으로써 통치가 보다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법에 의한 이질적 요소의 강제적 해소는 상대적으로 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권력의 강화를 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 삼국 간의 항쟁

광개토대왕릉비문

http://blog.naver.com/histoyou/120008036168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을 잘 읽어보면 사용되는 단어나 역사적 사실에서 우리가 배워 알고 있는 삼국시대와 많이 틀립니다.. 근데 우리는 김부식이 수백년 뒤에 쓴 삼국사기는 믿으면서 실제 당시에 세워진(414년) 광개토대왕릉비문은 별로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이 비문은 고구려의 건국부터 시작해서, 광개토대왕의 업적, 수묘인(묘를 지키는 사람) 기사 등 어마어마한 내용을 담고 잇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한반도 남부지배설의 중요 근거가 되었던 소위 '신묘년 기사'란 것도 있죠.. 어느 학자는 이걸 그대로 해석해서 우리의 일본 지배로 바꾸어 해석 합니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하지만.. 조작 여부를 떠나 현재 남아 있는 비문 중 가장 오래된 광개토대왕릉비문의 탑본을 올립니다..


중원고구려비

http://100.naver.com/media.php?type=image&media_id=49826&id=141804&dir_id=1301021104

http://www.ocp.go.kr:9000/n_dasencgi/full.cgi?v_kw_str=&v_db_query=A1%3a11%2cA3%3a205%3b205&v_db=1&v_doc_no=00000266&v_start_num=1&v_disp_type=1

http://www.elifeplus.co.kr/n_pagesE/pageE_03.asp?ob_id=22292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기도 했지만 비의 중요성을 몰랐던 동네 주민들이 우물가의 빨래판으로 사용하기도 하여 발견된 당시 비문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석비는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내용 중 처음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여기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뜻한다.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제위(諸位)’·‘사자(使者)’ 등 고구려 관직 이름과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古牟婁城)’등의 글자가 보이고, ‘모인삼백(募人三百)’·‘신라토내(新羅土內)’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들이 쓰여 있어 고구려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는 비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에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웅진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13&dir_id=130503&eid=MuuBU8LfgINI0OWDpc4T5spA0SxJ0KMI


백제의 웅진 시대...



고구려군에 의해 한성이 포위되기 직전 신라에 원병을 요청 하러간 문주(文周)는 원병 1만명을 얻어 돌아왔으나 이때는 이미 개로왕도 전사하고 한성도 함락된 뒤였다. 이에 문주는 목협만치(木協滿致).조미걸취(粗彌桀取)의 도움을 받아 즉위한 후 웅진으로 천도하여 국가재건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웅진천도 초기의 백제의 정치정세는 매우 불안하였다.


안으로는 한성에서 남하해온 귀족들이 자체분열을 일으켜 국정을 좌우하던 병관좌평 해구(解仇)가 문주왕을 살해하였으며, 그 뒤를 삼근왕도 재위 3년으로 끝 나고, 동성왕이 즉위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한편 밖으로는 서해의 해상제해권이 고구려에 넘어가고 가야세력이 이탈해나가는 등 백제는 국제적 고립의 위기마저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한 이가 동성왕이었다.


그는 신라왕족인 이찬(伊찬) 비지(比智)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신라와의 동맹체제를 보다 돈독히 하였 으며 한편으로는 사씨(沙氏).연씨(燕氏).백씨(백氏) 등 신진지방세력들을 중앙정치에 등용하여 한성시대 이래의 세력과 의 상호견제와 균형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남제(南齊)와의 교통을 재개함으로써 국제적인 고립을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위사좌평 백가(백家)의 세력을 억제하려고 그를 가림성(加林城) 성주로 파견하였다가 도리어 그가 보낸 자객에 의해 피살되고 말 았다.


동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무녕왕은 백가의 난을 평정한뒤 나아가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을 물리치고 세력균형을 이루면서 양(梁)나라로부터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아 국제 관계상에서도 백제의 위치를 확립하였다. 한편 무녕왕은 유식자(遊食者)들을 귀농 시켜 생산력의 증대와 농민생활의 안정을 꾀하였고, 또 호남지역의 적극적인 개발과 가야지역으로의 진출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한강유역의 상실로 인하여 축소된 경제기반을 확대하는데 노력하였다.


이로써 무녕왕대에 와서 백제는 정국의 안정을 이룩하게 되었고 강국을 칭할 수 있는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호화롭고 풍부한 부장품들은 무녕왕대의 왕권의 신장과 국력의 성세를 보여주는 물적증거가 되는 것이다.



개로왕

백제 제21대 왕(455∼475). 근개루왕(近蓋婁王)이라고도 한다. 명(名)은 여경(餘慶), 초명은 경사(慶司). 비유왕(毗有王)의 맏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22대 왕인 문주왕(文周王)의 아버지이다. 472년에 북위(北魏)에 구원병 파견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내, 북위가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挾攻)할 필요성과 그의 성공가능성을 설득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백제 제21대 왕(455∼475). 근개루왕(近蓋婁王)이라고도 한다. 명(名)은 여경(餘慶), 초명은 경사(慶司). 비유왕(毗有王)의 맏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22대 왕인 문주왕(文周王)의 아버지이다. 472년에 북위(北魏)에 구원병 파견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내, 북위가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挾攻)할 필요성과 그의 성공가능성을 설득하였으나 실패하였다. 475년 고구려의 침입으로 한강유역 일대를 빼앗기고 개로왕은 포로가 되어 살해되었다. 이러한 백제의 패배에 대해 《삼국사기(三國史記)》 중 <개로왕 21년조>에서는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간첩으로 파견된 승려 도림(道琳)의 계략에 의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도림은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는 것을 이용, 왕의 신임을 얻은 뒤 개로왕으로 하여금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할 생각을 못하게 했으며, 화려한 궁궐의 축조 등 대대적인 토목역사를 일으키게 함으로써 국력을 피폐화시켰다고 한다. 또한 《삼국사기》 중 <도미전(都彌傳)>에 나오는 개루왕은 고구려 영토와의 위치로 보아 근개루왕, 즉 개로왕으로 보이는데, 이 내용에서 왕은 잔인한 방법으로 하층민의 아내를 빼앗으려는 폭군(暴君)으로 묘사되어 있다.


22담로

http://dugok.x-y.net/kor-his/sys/22damro.htm


백제의 행정구역 명칭으로, 원래 백제어 '다라', '드르'의 음차로서 '성(城)을 의미한다. 중국의 군현과 같은 기능을 가진 지방 지배 조직으로서, 왕족 출신의 자제 종족이 중심이 된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양서> 백제전에 따르면 전ㄱ구적으로 22개의 담로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담로는 지방 지배의 거점으로서 성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것을 중심으로 하는 일정한 통치영역을 의미하는 말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송서>나 <남제서>에 보이는 백제왕이 신하를 왕이나 후에 봉한 기사와 연관시켜 봉건영지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담로제의 실시시기에 대해서는 백제 건국초부터로 보는 견해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근초고왕대에 백제가 지배영역을 분정하고 있으므로 근초고왕대에 담로제가 처음 실시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같은 담로제는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계속 시행되었으나 백제가 사비천도를 전후하여 지방조직을 5방 1군제로 정비하면서 거기에 흡수도어간 것으로 보인다


사비성 천도

http://dugok.x-y.net/kor-his/eve/bek-sabichundo.htm


성왕은 백제의 중흥과 왕권강화의 목적에서 사비로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사비천도는 백제왕실의 자주적 결단에 의한 것으로서 여기에는 영민하고 과단성있는 성왕의 의지와 사비지역의 토착세력으로서 새로이 두각 을 나타낸 신진세력인 사씨(沙氏)의 강력한 지지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천도를 단행한 성왕은 왕귄강화를 위한 제반조처를 추진하여 나갔다. 우선 국호를'남부여(南扶餘)'로 개칭하여 부여족의 전통을 강조하고 중국 남조와의 빈번한 교류를 통하여 그 문물을 받아들이고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수하였다. 또 오부율(五部律)을 갖고 온 겸익(謙益)을 우대하여 백제적 계율종을 설립시 키고 16관등제와 22부제(部制)등 중앙관제를 정비하고 수도 5부와 지방통치조직으로서 5방(方).군(郡)제를 갖추어 지방통치력을 강화시켜 나간 것이 그것이다.


  사비천도 후 성왕대의 이러한 조처는 동성왕.무령왕.성왕으로 이어지는 이 시기의 정치가 왕권중 심으로 움직여진 것임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왕명을 봉행하는 22부가 그 핵심적인 기능을 하였다. 따라서 귀족들의 회의체인 5좌평제는 정치일선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백제의 중흥을 이룩한 성왕은 그의 필생의 사업으로서 한강유역 회복작전을 기도 하였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는 신라.가야군과 연합하여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당시 서북으로부터 돌궐의 위협과 귀족세력의 내분에 처해 있던 고구려의 위기를 이용하여 고구려군을 물리치고서 백제는 한강하류를, 신하는 한강상류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와 은밀히 결탁한 신라는 군대를 돌이켜 백제가 점령한 한강하류 지역마저 빼앗아버려 양군 간의 화호(和好)관계는 깨지고 말았다. 이에 격분한 성왕은 신라에 대한 보복공격을 단행하였다.당시 기로(耆老)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행된 이 정벌에서 성왕은 초기에는 우세를 보였으나 신라 원병의 증가와 신라 복병에 의한 성왕의 전사로 대세는 기울어지고 말았다. 이것이 유명한 관산성전투(管山城전투)이며 이 싸움에서 백제는 왕을 비롯하여 좌평 4명이 전사하고 사졸 3만여 명이 전사하는 대패를 입었다.


  신라정벌군의 출정이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단행된 것이므로 관산성 패전은 백제의 정국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그 결과 위덕왕 즉위 이후에는 귀족들의 정치에 대한 발언권은 증대되어 정치의 일선에 나서게 되었고, 이 시기에 대두되기 시작한 대성팔족(大姓八族)의 성립은 귀족 중심의 정치운영체제를 낳게 되었다. 이 것이 6좌평제였다.


  6좌평제는 사비시대전기의 5좌평제를 확대.개편한 것으로써 왕명의 출납.재정.의레.왕궁숙위.형옥.병마관계 사무를 관장한 최고귀족회 의체였다. 6좌평의 부상은 이것이 당시 정치의 중추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관산성 패전 이후 귀족 중심의 정치운영체제에 의해 위축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시도한 이는 무왕이다.


  무왕은 비록 익산에서 마를 캐며 살다가 귀족들의 정략적인 웅립에 의해 왕이 되었지만 실추된 왕권의 회복을 위해 일련의 조처를 추진하였다. 신라에 대한 공격의 단행, 익산 천도를 위한 황궁과 제석사(宰釋寺)의 건설, 거대한 미륵사(彌勒寺)의 창건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익산 천도가 실현되지 못함으로써 신도(新都) 경영을 통한 귀족세력의 재편성이라는 그의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진흥왕 순수비

http://linux.korea.ms.kr/%7Enote/class/read.cgi?board=moonwha1&y_number=9&nnew=1

신라 진흥왕이 국토확장과 국위선양을 목적으로 세운 기념비.

진흥왕대는 신라가 종전의 미약했던 국가체 제를 벗어나 일대 팽창,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때이다. 6세기 진흥왕은 재위 37년 동안 정복적 팽창을 단행 하여 낙동강 서쪽의 가야세력을 완전 병합하였고, 한강 하류 유역으로 진출하여 서해안 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하 였으며, 동북으로는 함남 이원지방에까지 이르렀다. 진흥왕은 이렇게 확대된 영역을 직접 순수하면서 이를 기념 하려고 이른바 순수비를 세웠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국보 33)·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 비(국보 3)·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 등 모두 4개이다. 또한 이러한 전승 기념비에는 정 복집단의 신통한 능력과 정복사업의 위업을 자랑하고 정복지의 백성을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다고 선전함으로써 피정복민을 회유하는 고대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선전의 역할도 하였다. 해서체로서 음각된 이들 네 비는 신라의 강역뿐만 아니라 신료(臣僚)의 명단과 소속부명·관계명·관직명 등이 기록되어 있어 진흥왕 당대의 금석문 자료로 서 이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화랑도

http://www.hwarangdoexperience.com/sub03.htm


신라때 청소년으로 조직되었던 수양 단체를 화랑이라 하였다. 국선도(國仙徒) ·풍월도(風月徒) ·원화도(源花徒) ·풍류도(風流徒)라고도 한다.

【삼국유사】에는 ‘무리를 뽑아서 그들에게 효제(孝悌)와 충신을 가르쳐 나라를 다스리는 데 대요(大要)를 삼는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처음에 군신(君臣)이 인재를 알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기어 사람들을 끼리끼리 모으고 떼지어 놀게 하여, 그 행실을 보아 거용(擧用)하려 하였다’ 하고, 이들은 ‘서로 도의를 닦고, 서로 가악(歌樂)으로 즐겁게 하며, 명산과 대천(大川)을 찾아 멀리 가보지 아니한 곳이 없으며, 이로 인하여 그들 중에 나쁘고, 나쁘지 아니한 것을 알게 되어, 그 중의 착한 자를 가리어 조정에 추천하게 되었다’고 그 설치목적과 수양과정을 적고 있다.   

 

이로써 화랑도의 설치는 인물을 양성하여 그 가운데 인재를 가려서 국가에 등용함을 목적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소기(所期)의 성과에 대해 【삼국사기】는 ‘현좌(賢佐:賢相)와 충신이 이로부터 솟아나고, 양장(良將)과 용졸(勇卒)이 이로 말미암아 나왔다’고 하였다. 그 설치연대에 대해서 【삼국사기】에는 576년(진흥왕 37)이라 하였으나, 562년에 이미 화랑 사다함(斯多含)이 대야성(大耶城:高靈)을 공격하여 큰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음으로 보아 신라는 이때에 이르러 이전부터 있었던 미비된 상태의 청소년 집단이던 화랑도를 국가조직 속에 편입시켜 무사단의 성격으로 강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단양 적성비

http://www.ocp.go.kr:9000/n_dasencgi/full.cgi?v_kw_str=&v_db_query=A1%3a11%2cA3%3a198%3b198&v_db=1&v_doc_no=00000259&v_start_num=1&v_disp_type=1

http://100.naver.com/100.php?id=42680&cid=AD1073625593215&adflag=1


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비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이 곳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1978년에 30㎝ 정도가 땅속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는데, 비면이 깨끗하고 글자가 뚜렷하다.


비(碑)는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가 좁고 얇다. 윗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양 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있고, 자연석을 이용한 듯 모양이 자유롭다. 전체의 글자수는 440자 정도로 추정되는데, 지금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로 거의 판독할 수 있다. 글씨는 각 행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잘 맞추고 있으며, 예서(隸書)에서 해서(楷書)로 옮겨가는 과정의 율동적인 필법을 보여주고 있어 서예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비문에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신라의 형벌 및 행정에 대한 법규인 율령제도 발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노역체제, 재산 분배에 관한 국법이 진흥왕 초반에 마련된 것과 적성 지방에 국한된 관습을 법으로 일반화하고 있는 사실 등이 그러하다.


비문 첫머리에 언급된 10인의 고관의 관등과『삼국사기』의 내용을 견주어 살펴볼 때, 비의 건립은 진흥왕 6∼11년(545∼550)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북방공략의 전략적 요충지인 적성지역에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인과 함께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비록 순수비(巡狩碑: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비)는 아니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고 있는 척경비(拓境碑: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가야연맹

http://www.gnedu.net/php-bin/swebdata/%B0%ED%B5%EE%C7%D0%B1%B3/1%C7%D0%B3%E2/%BB%E7%C8%B8.%B1%B9%BB%E7/1%C7%D0%B1%E2/hs20020108051929/Homepage/kaya-fact3.htm

http://kms4282.new21.org/e2k/ezboard.cgi?db=syber2&action=read&dbf=100&page=0&word=지도&oldword=지도&findstart=143&ftype=category&depth=1



가야는 초기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결집하고 있었다. 금관가야가 위치하고 있는 김해지역은 일찍이 풍부한 철의 생산지로 알려져 있었으며, 당시 철은 화폐로 쓰일 만큼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왜(倭)를 비롯한 한예(韓濊)와 중국 군현 세력들이 여기서 철을 수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 낙동강 하류에 위치하여 중국의 군현 및 왜 등과 경상도 내륙지역을 연결하는 교통 중심지였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으로 금관가야는 중국 군현으로부터 중국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지속적인  문화축적을 이루는 한편, 이를 내륙지역의 여러 국가와 왜 등에 공급하여 중계무역의 이익을 보면서 그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를 기반으로 가야연맹체를 형성하고 이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4세기 이후 낙랑군, 대방군의 소멸과 고구려의 남진이 본격화되면서 가야연맹도 커다란 변동을 겪었다.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왜, 가야세력과 동맹을 맺고, 신라는 이에 맞서 고구려와 관계를 맺었다. 400년 왜 세력이 신라를 공격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보기(步騎)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였다. 이때 고구려군은 신라 국경에 집결한 왜군을 격파한 다음 임나가야의 종발성까지 진격하였다. 고구려군의 침공을 김해를 비롯한 경남 해안지대의 여러 가야국들은 커다란 타격을 입고 쇠잔했으며, 일부 세력들은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던 경상도 내륙지방으로 들어갔다. 이로 인해 전기 가야연맹도 와해되고 말았다.


대가야

http://user.chollian.net/~prokhr/daegaya/


가야의 금관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B0%A1%BE%DF%C0%C7%20%B1%DD%B0%FC&sort=0&c=1&qt=df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B0%A1%BE%DF%C0%C7%20%B1%DD%B0%FC&c=2&sort=0&qt=df&fr_res=0&to_res=0



3) 삼국의 통치 체제



6좌평제

http://www.xasa.us/wiki/ko/wikipedia/i/i_/i_i__87.html


좌평(佐平)은 260년 고이왕 개혁 이후 백제의 최고위 관직이다.


내신좌평(內臣佐平) : 왕명의 출납을 관장

내두좌평(內頭佐平) : 창고 업무를 관장

내법좌평(內法佐平) : 의례에 관한 일을 관장

위사좌평(衛士佐平) : 숙위 군사를 관장

조정좌평(朝廷佐平) : 형벌과 감옥 사무 관장

병관좌평(兵官佐平) : 지방 군사업무 관장


대대로와 막리지

http://blog.naver.com/cyftlt/16354979


막리지가 제2위인 태대형이라면 그 정원은 다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제1위인 대대로는 1인이었을 것이다. 이는 대대로가 국정을 총괄하는 지위로서 3년에 한 번씩 교체한다거나 서로 상쟁하여 취임한다는 기록에서 충분히 추지할 수 있다.


막리지의 취임을 둘러싸고는 각 귀족 집단 사이에 이해 관계의 조정이 가능할 만큼 일정한 정원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같은 시기에 다수의 막리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고자묘지’의 고자(高慈)의 증조부인 고식(高式)과 연개소문의 조부 자유(子遊) 및 아버지 대조(大祚)는 대체로 평원왕대에서 영양왕대에 걸쳐 같은 시기에 막리지를 역임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세 사람이 차례로 시차를 두고 막리지를 역임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연개소문 가문의 예에서 추지되듯이 고구려 후기에는 각 가문별로 부직(父職)이 계승되어가는 측면을 고려하면, 자유의 막리지직은 대조에게 곧바로 세습되었을 것이며, 그렇다면 고식과 자유, 대조는 같은 시기에 막리지를 차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막리지의 권력 기반은 무엇일까?


먼저 군사권의 장악이 주목된다. 『당서』고려전의 경우 당의 병부상서에 비교됨은 막리지의 주요 직능 중에 군사권의 장악이 포함되었음을 암시한다. 『삼국사기』개소문전의 경우 연개소문이 천리장성의 축조를 감독할 지위에 있음은, 이 당시 연개소문이 군사권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또 연개소문의 부병 사열시 연개소문의 살해를 모의한 대신들이 참석한 것도 당시 연개소문이 거느린 부병이 사병(私兵)이 아니라 국가의 공적인 군대임을 암시한다. ‘고자묘지’, ‘천남생묘지’, 『당서』고려전을 보면 막리지는 단순히 군사권을 장악한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정을 오로지 관장하는” 정치적으로도 강력한 실권을 장악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막리지는 곧 태대형으로 대대로와는 별개의 관이다. 그런데도 막리지와 대대로가 서로 대응되거나 또는 양자의 정치적 성격이 서로 유사함을 보여주는 사료가 많은 것은 두 관이 밀접히 관련됨을 뜻한다.


고구려 후기의 대대로는 “3년에 1번 교체”하는 관으로, 귀족 세력 간에 상쟁하여 취임한다. 그러면 대대로의 취임에 도전하는 자는 누구일까? 우선 관의 서열로 볼 때 제2위의 태대형을 제외하고 다른 관을 생각하기는 곤란하다. 이 시기의 관등은 단순한 위계상의 문제가 아니라, 각 귀족들의 세력 기반의 여하에 따라서 획득되었을 것이기에 고위 관등에 오른 자는 그만큼 큰 세력 기반을 갖고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대대로의 취임이 “서로 병사를 거느리고 다투어 이긴 자가 취임하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군사권을 장악한 막리지, 즉 태대형이 유리한 입장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대대로에 취임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관이 태대형, 즉 막리지임을 전제하면 당시의 임기 3년의 대대로는 다수의 막리지 사이의 역학 관계에 따라 교대로 선출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 경우 “국정을 총괄하는” 대대로의 권력은 대대로의 직이 갖는 그 자체의 고유한 정치적 위상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막리지로 대표되는 귀족 집단들 간에 세력 조정을 거친 이후 대대로에 취임한 자가 갖는 자신의 세력 기반 내지는 막리지 간의 합의에 기초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대대로의 임기 3년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3년이 임기가 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대대로의 임기가 정해져 있다는 것은 3년마다 대대로의 선출 과정을 통해 귀족 세력 간에 다시 세력 조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고구려 후기의 대대로는 막리지에서 선출되며, 또 그것은 임기를 갖는 관이기 때문에, 막리지와 대대로는 서로 오르고 내리는 관계에 있다. 연개소문의 아버지 대조가 대대로 혹은 막리지로 혼동되어 나타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관등제

http://blog.naver.com/reportblog/60015001053


관등은 지배기구의 운영에 참가하는 관료의 정치적 등급을 표시하는 것이다. 특정관직에 취임할 수 있는 자격이 관등에 따라 규정되고 있었으므로 관등제는 관료적 운영의 기본틀이면서 관료 개인의 신분등급을 표시하는 기능 또한 가지고 있었다. 다만 삼국에서의 관등제는 관료 개인의 능력보다는 신분제의 규정을 강하게 받은 것이면 운영된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의 관등제는 여러 단위정체체들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그 족장세력을 등급구분하는 기준으로 성립되게 되었는데 따라서 여러 족장세력들이 본래 갖고 있던 관제들이 그대로 중앙관제 속에 복합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왕권의 성장과 지배기구의 발전에 따라서 관제가 분화되고 관등제가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집사부

http://cafe.naver.com/cliosatam.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544


집사부(執事部)는 신라 시대의 최고 행정 기관으로 국가의 기밀 사무를 맡아 보았는데,


651년(진덕여왕 5) 품주를 개칭하여 설치하였다. 집사부의 장관은 진골 출신의 중시로,


그 아래 전대등(뒤에 시랑으로 고침), 대사(뒤에 낭중으로 고침), 사자 각 2명, 사 14명이 있었다.


집사부는 국가의 기밀 사무를 맡았던 만큼 왕의 지배를 직접 받았으며, 따라서 화백 회의와


귀족 세력의 대표자격인 상대등과는 대립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통일 직후 왕권이 전제화되었을 때에는 집사부의 권한이 강화되었고, 그 반대로 상대등의 권한은 약화되었다.


집사부의 장관인 중시직에는 왕과 가까운 왕족이 임명되었고, 그 임무는 왕권을 옹호하는 행정적인


대변자인 동시에 정치적 책임자의 역할을 하였다.


중시는 747년(경덕왕 6)에 시중으로 격상되었고, 829년(흥덕왕 4)에는 집사부가 집사성으로 승격되었다.


이것은 집사성이 점차 여러 관부를 총관하도록 기능이 확대된 데서 생긴 변화였다.


촌주

http://tutork.com/ss3-37.htm


통일 신라 시대의 촌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자연 촌과 행정 촌이 그것이다. 우선 10여 호 가량의 혈연 집단이 거주하는 자연 촌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 촌 몇 개로 편제되는 행정 촌이 있었다. 촌주는 이 행정 촌의 우두머리였다. 그러므로 행정 촌의 촌은 시골이란 뜻의 촌이 아니라 현 아래 예속된 말단 행정 구역으로서,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촌주로 임명되었다.


   농민들은 촌에 거주하면서, 촌주를 통해 집단적으로 국가의 지배를 받았다. 이 목적


을 위하여 촌주가 자연 촌 단위로 민정 문서를 작성하였다. 천민들은 따로 향·부곡에 살았다.


  촌의 주민 구성은 지금 남아 있는 민정 문서에 의하면, 농민과 노비들 뿐이다. 그러나 촌에 거주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촌주는 비교적 많은 전답을 보유하고 있어서 일반 농민과는 다른 신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토착 세력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이 촌주 외에는 다른 지배층의 신분의 사람들이 촌에 거주한 흔적은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방령

http://mtcha.com.ne.kr/korea-term/bagjai/term19-bangryong.htm


웅진 도읍기부터 방이라는 행정구역의 실체가 나오는데, 사비도읍기에 이르러 완비된 5방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도읍 밖의 지역을 중 ·동 ·남 ·서 ·북의 5개의 방으로 나누고, 각 방은 6~7개 내지 10개의 군(郡)을 관할하고 700인 이상 1200인 이하의 군사를 통솔하였다고 한다. 정원 1명으로 달솔(達率)의 위계를 가진 자가 맡았으며, 방좌(方佐)가 그를 보좌하였다. 당나라《한원(翰苑)》에 인용된 《괄지지(括地志)》의 기사에 따르면 방은 중국의 도독(都督)과 같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중국에서는 도독이 동진 성립 이후 지방통할의 최고 군사관화했다고 하므로 방령 또한 행정적인 임무와 아울러 최고 군사관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방령의 실체는 《일본서기(日本書紀)》 554년(흠명 15)조에 나오는 ‘동방령(東方領) 물부막가무련(物部莫哥武連)’과 《삼국사기》 660년(태종무열왕 7)조의 ‘웅진방령군(熊津方領軍)’ 등에서 확인된다.


서당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11&dir_id=110101&eid=D%2BhG4jb1EkT%2FxjncuRNsAwgTsW2Ei4hY


9서당은 수도(경주)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인, 백제인을 비롯하여 말갈족, 보덕국까지 포함시켜 편성한 특수부대의 하나였습니다. 다른 나라 출신까지 포함한 것은 민족융합정책의 일환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9서당


녹금서당 - 신라인


자금서당 - 신라인


비금서당 - 신라인


백금서당 - 백제인


청금서당 - 백제인


황금서당 - 고구려인


흑금서당 - 말갈인


벽금서당 - 보덕성민(고구려인)


적금서당 - 보덕성민(고구려인)


 

 

1-4. 대외항쟁과 신라의 삼국 통일


1) 고구려와 수  당의 전쟁


돌궐

http://cafe.naver.com/alfow.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90


돌궐은 흉노 선비 유연의 뒤를 이어 변방의 대초원 지역을 통치한 중국의 고대민족이다. 역사적으로는 그것을 "흉노별종(匈奴別種)"이나 "평량잡호(平凉雜胡)"의 계열로 분류하였으나, 근대에는 그것을 "적종(狄種)"으로 분류하는 학자들도 있다. 사실상 그것은 고대에 흉노 이북 지역에 살던 정령(丁零)의 한 갈래로 후대의 고차(高車) 철륵(鐵勒)과 동족이다. 그들의 언어는 알타이어계 돌궐어족에 속한다. 6세기 초엽에 금산(金山, 지금의 알타이산) 일대에서 유목생활을 하였는데, 돌궐은 금산의 모양이 투구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돌궐어로 투구를 "突厥"이라 한다)


주대에 돌궐은 유연족에 종속되어 노역을 하면서 제련업에 능하였기 때문에 "유연의 제철공(柔然鐵工)"이라는 칭호가 있었다. 토문(土門)이 돌궐 부락의 추장이 되면서 돌궐 부락은 나날이 강성해졌다. 552년에 토문은 유연을 격파한 후 스스로 이리칸(伊利可汗)이라 칭하고 돌궐칸국(突厥汗國)을 세웠다. 555년 목간칸(木杆可汗)은 유연족의 세력을 완전히 없애고 악이혼하(鄂爾渾河) 유역의 우도근산(于都斤山, 지금의 몽고 국경내의 杭愛山 동쪽 줄기) 일대에 도읍을 정하였다. 그리하여 동으로 요해(遼海, 지금의 遼河 유역), 남으로 사막 이북, 서로 서해(西海, 지금의 里海), 북으로 북해(지금의 바이칼호)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함으르써 북방 초원에 웅거한 강대한 민족이 되었다.


돌궐이 흥성하자 그 남쪽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하고 있던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는 서로 먼저 돌궐과 화친을 맺어 지원을 얻고


자 하였다. 북주 말기 수대 초기에 돌궐의 귀족들은 왕위 계승 문제로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수 문제(文帝)는 이 때를 틈타 이간책을 쓰면서 원교근공(遠交近攻: 먼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함) 이강화약(離强和弱: 강자를 버리고 약자와 화친을 맺음) 정책을 펴서 돌궐의 여러 칸들 사이에 서로 죽이도록 전쟁을 유도하였으며, 그 결과 돌궐칸국(突厥汗國)은 동돌궐(東突厥, 北突厥이라고도 함)과 서돌궐(西突厥)로 분열되었다.


분열 이후 동돌궐의 통치자 사발략칸(沙鉢略可汗)은 서돌궐의 압력과 거란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수나라와의 적대 관계를 해소하고 신하라 칭하며 조공을 바쳤다. 그리고는 수 문제의 윤허를 얻어 부락을 남으로 이주시키고 수왕조 경내의 백도천(白道川, 지금의 내몽고 후허호트시 북쪽)에 기거하였다. 수왕조의 후원으로 동돌궐의 각 부락은 서로 연합하여 서돌궐을 격파하고 다시 강대해지기 시작하였다. 뒤에 동돌궐의 칸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소칸(小可汗) 염간(染干)은 578년에 패배한 후 장안으로 도망갔다. 수 문제는 염간을 계민칸(啓民可汗)으로 삼아 삭주(朔州)에 대리성(大利城, 지금의 내몽고 淸水河縣 경내)을 수축하도록 하고 의성공주(義成公主)를 계민칸에게 시집보냈다. 계민칸은 수왕조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면서 대리성을 근거지로 삼고 고비사막 북부의 대초원을 다시 지배하게 되었다. 계민칸이 죽은 뒤에 동돌궐과 수나라의 관계는 다시 긴장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에 거란 해(奚) 실위(室韋) 철륵(鐵勒) 고창(高昌) 토곡혼(吐谷渾) 등의 부족이 잇달아 동돌궐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중원지역의 많은 백성들도 수 양제(煬帝)의 폭정을 견디지 못하고 줄지어 북으로 도망가 동돌궐에 귀순하였다. 이에 동돌궐은 전례없는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수왕조 말기에는 농민봉기를 일으킨 무리들과 각종 지방 할거 세력들도 모두 연이어 동돌궐과 밀접한 관계를 수립하였다. 당왕(唐王) 이연(李淵)도 군사를 일으켜 수왕조를 배반한 후에는 동돌궐에게 신하라 칭하면서 무력 지원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왕조 수립 초기에 동돌궐의 왕위를 계승한 힐리칸(署利可汗)은 여려 차례 당나라를 공격하여 수도 장안을 위협하였다. 그러나 힐리칸의 끊임없는 대외 원정 전쟁으로 그들의 속국이던 회흘(回紇) 설연타(薛延陀) 등과 같은 철륵의 여러 부락들이 잇달아 배반하고, 거듭된 폭설과 재난으로 많은 가축들이 죽어 백성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으며, 귀족들도 서로 시기하고 난을 일으켜 국세는 나날이 쇠퇴해갔다. 당 태종(太宗)은 동돌궐이 안팎으로 곤경에 처한 때를 이용하여 630년 동돌궐을 대대적으로 토벌하였다. 이에 힐리칸이 사로잡히고 나머지 부락들도 모두 당나라에 투항함으로써 동돌궐칸국은 멸망하게 되었다.


동돌권칸국이 멸망한 후 대부분의 동돌궐인들은 북쪽의 설연타부(薛延陀部)나 서쪽의 서역 일대로 이주하였으며, 나머지 10만여명은 당왕조에 귀순하였다. 641년 당 태종의 명으로 칸이 된 돌궐 귀족 아사나사마(阿史那思摩)는 돌궐인들을 거느리고 그들의 옛 영토로 돌아가 정양(定襄, 지금의 내몽고와 林格爾 서북부 일대)에 도읍을 정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돌궐 귀족 곡발(斛勃)은 스스로 차비칸(車鼻可汗)이라 칭하고 돌궐의 옛 영토를 지배하였다. 650년 당 고종(高宗)은 군대를 파견하여 금산(金山)에서 차비칸을 격파하였다. 이 때부터 돌궐의 옛 영토에 기미부주(羈 府州)를 설치하고 선우대도호부(單于大都護府, 지금의 내몽고와 林格爾 서북 土城子)와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符, 지금의 내몽고 국경내 杭愛山 동쪽, 뒤에 여러 차례 남쪽으로 이주하였음)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7세기 말엽 동돌궐은 귀족 골돌록(骨 祿)의 영도 아래에서 다시 부흥하였으나 얼마 못가서 745년에 새로 흥기한 회흘(回紇)에게 멸망되었다. 그들의 영토는 모두 회흘에게 넘어가고 백성들도 대부분 회흘의 각 부로 들어갔다.


수대(隋代)에 서돌궐은 여러 차례 동돌궐의 공격을 받아 세력이 날로 약화되었다. 당대 초기에 이르러 통엽호칸(統葉護可汗)이 통치하면서 세력이 점차 강성해져 10만여명의 정예 병사를 거느리고 서역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형세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통엽호칸이 죽은 후에 서돌궐은 통치 집단의 분열로 쇄엽천(碎葉川, 지금의 楚河) 동쪽의 오돌돌격부(五  擊部)와 쇄엽천 서쪽의 노실필부(駑失畢部)로 나누어졌는데, 이를 십성부락(十姓部落)이라 한다. 이와 동시에 서역의 여러 나라들도 잇달아 배반하고 떠났다.


당 태종 초기에 아사나하노(阿史那賀魯)가 십성부락을 통일하였다. 659년 아사나하노가 쇄엽천에서 당나라 군대에게 대패함으로써 마침내 서돌궐칸국은 멸망하였다. 당왕조는 그 지역에 기미부주(羈 府州)를 설치하여 관리하고 안서대도독부(安西大都督府(지금의 신강성 庫車 일대)에 귀속시켰다. 이에 일부의 돌궐인들은 즁갈분지(準 盆地)와 중앙아시아 각지로 흩어졌는데, 그들 중에서 대부분은 나중에 회흘족의 구성원이 되었고, 나머지 일부는 서쪽으로 이주하여 아프카니스탄와 중앙아시아에 가색니(伽色尼)왕조 새이주돌궐(塞爾柱突厥)왕조와 오스만돌궐(奧斯曼突厥)왕조를 세웠다.


돌궐족의 최고 통치 집단은 아사나(阿史那)씨를 핵심으로 하는 군사 귀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들은 비교적 완비된 관제와 법률을 가지고 있었다. 칸국 안의 남자는 모두 병사이다. 어떤 지역에서는 농업과 상업이 비교적 발달하여 화폐가 출현하기도 하였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그들의 경제적 주체는 줄곧 유목 경제였다.


돌궐 정권은 200여년간 북방의 대초원을 통치하면서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였다. 중국 북방의 여러 민족 중에서 문자로 된 역사 기록은 돌궐인들이 창제한 돌궐문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중원과 주변의 거란 실위(室韋) 해(奚) 철륵(鐵勒) 및 서역 여러 나라와의 경제 문화 교류를 통하여 사회적 발전을 촉진시켰으며, 중원 왕조와 상술한 각 민족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킴으로써 중화민족의 형성에 불멸의 공헌을 하였다.


문제와 양제

http://www.tgedu.net/student/cho_sa/chap4/4-1/4-1-2/con3-1-3.htm


문제는 고구려의 요서지방 선공에 자극 받아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입(598년) 하였으나, 요하에 이르러 질병과 장마로

후퇴하였고, 양제는 돌궐족을 복속시킨 다음 113만 대군을 이끌고

육지와 바다, 양쪽으로 침략하였다.


살수대첩

http://www.jungsan.es.kr/Cy_edu_source/6/1/나라를%20지킨%20조상들/살수대첩과을지문덕.htm


612년(영양왕 23)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백만 대군을 살수에서 맞아 크게 싸워 이긴 싸움. 589년 수나라가 통일하자 고구려는 국제적인 세력관계의 균형을 모색하기 위해 돌궐.백제.왜와 연결하였고, 그 결과 수나라와 고구려가 대결하게 되었다. 중국을 통일한 수의 양제는 돌궐과 연합하여 대항할 우려가 있는 고구려를 미리 정복하여 후환을 없애려는 의도 하에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여 왔으나, 을지문덕 장군의 전술전략에 휘말려 대참패를 당하고 돌아갔다. 그 후에도 양제는 2차례나 더 침공해 왔으나 실패하였으며, 이로써 수나라는 멸망하게 되었다.


안시성

http://dugok.x-y.net/kor-his/pla/ansisung.htm


당시 인구가 10만 명 정도였던 고구려 영지로, 고구려가 요하(遼河)유역에 설치하였던 방어성들 가운데 전략적으로 요동성(遼東城) 다음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소재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여 《금사》 지리지에 따라 만주 개평(蓋平) 동북의 탕지보(湯池堡)라 하기도 하고, 《이계집(耳溪集)》 또는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 따라 만주의 봉황성(鳳凰城)이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창다철도[長大鐵道]의 하이청[海城] 남동쪽에 있는 잉청쯔[英城子]로 추정하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본래 이름은 안촌홀(安寸忽)이다. 안시성은 자연적으로 험준한 요새였으며 주변에 병기의 주원료인 철광석 산지와 곡창지대가 있었다. 신성(新城:지금의 만주 푸순[撫順] 부근)과 건안성(建安城:지금의 만주 가이핑[蓋平]) 중간에 자리잡고 있어 안시성의 방어는 요동지역의 여러 성들을 방어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 압록강 북쪽의 오골성(烏骨城)·국내성(國內城)을 비롯하여 전국의 성을 수호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하였다.


645년(보장왕4) 당나라 태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쳐들어와 요하 일대의 개모성(蓋牟城)·비사성(卑沙城)·요동성·백암성(白巖城)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전략적 요충지인 안시성을 구하기 위해 고연수(高延壽)·고혜진(高惠眞)이 이끄는 고구려·말갈 연합군대 15만 명이 출병하였으나 당나라 군대에 패배하였다. 그때까지 함락되지 않은 안시성에서 마침내 최후의 격전을 벌이게 되었을 때, 성주 양만춘(楊萬春/梁萬春)은 군사와 주민들의 힘을 일치단결시켜 당의 침략을 물리쳤다. 이것이 유명한 ‘안시성 싸움’이다. 고구려 멸망(668) 후 검모잠(劒牟岑)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부흥운동의 요동지역 중심지가 되었으나 671년 7월 당나라 군대에 함락되었다


백암성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dt_iphoto&query=%B9%E9%BE%CF%BC%BA&sort=0&c=1&qt=df


2)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사비성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11&dir_id=110101&eid=9FkQh8nmi%2FI78W7reToi%2BvIUbAzzx6pg


보시다시피 금강(옛 백마강 or 백강)을 끼고 있는 요새지인데다 넓은 들도


끼고 있어 굉장히 좋은 위치였습니다. 이는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면서


물이 풍부하여 농사짓기에 안성맞춤이었다는 이야기로 한 나라의 수도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입니다.



유적지라면.. 부소산성(부여글자 옆의 산- 백제 수도 방위성개념 정도),


청산성(오른쪽으로 약간 위, 작은 산 역시 방위성 역할), 금성산성(현 부여


시가지 바로 오른쪽 산). 유명한 낙화암(궁녀 뛰어내렸다고 전해진 곳, 물론


역사적으로는 구랍니다.), 부여 왕궁터도 있고..천왕사지, 정림사지, 군수리사지,


궁남지, 망해정지, 능산리고분군이 있고 절로는 고란사, 청룡사등이 있습니다.



흔히 부소산성이 사비성이라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이 산성은 백제 수도


사비를 보호하는 방위산성의 역할을 맡았을 뿐, 수도자체는 아닙니다.


수도는 평야에 넓게 치밀한 계획에 의해 세워져 있었고 그 면적은 매우 넓습니다.



부여나성이 있는데 이 성의 목적은 수도 외곽을 지키는 방위시설입니다.


현재는 그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있지만 원래는 그 둘레만 84km에 이릅니다.


돌로 쌓은 석성보다 강하다는 판축기법으로 쌓아올린 든든한 토성이지요.


그러나 정확한 수도의 면적은 알수 없으나 대략적인 사비성의 인구로 대충


추정은 가능합니다.



기록에는 1만호, 다시말해 사비의 인구가 약 5만이라 하는데..말이 되지 않죠.


이 사실은 나당연합군이 대략 사비 다 때려부수고 약탈, 방화, 강간 별짓 다하고


수뇌부들 왕창 끌고가고 그러고 한참 뒤에나 끄적끄적 대충 조사한 것이니..-_-;;


실은 족히 수십만에 달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수도의 덩치도 상당했겠죠.


주류성

http://mahan.wonkwang.ac.kr/jm/juru.htm


백제 말기의 성. 나·당 연합군이 부여의 부소산성(사비성)을 함락하자 백제의 유장(遺將)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이 이 성을 근거지로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의 증원군과 신라의 연합군에 의하여 이 성도 함락되어 백제의 부흥운동은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하여, 충남 서천군 한산(韓山)이라는 설과 충남 청양군 정산(定山)이라는 설 및 전북 부안군 상서면의 위금암산성(位金巖山城)이라는 설이 있다.


임존성

http://cafe.naver.com/sudongds.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78


 


▶ 지 정 별 : 국가지정문화재(사적)

▶ 지정번호 : 제 90 호

▶ 위 치 :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 지정년월일 : 1963. 1. 21

▶ 시 기 : 삼국시대

▶ 문화재 내용

  임존성은 대흥면 봉수산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성 주위가 약 2.4㎞의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산의 표고는

  483m이다.  

  성벽의 높이는 약 350㎝이며 너비는 약 350㎝ 인데 남쪽의 성벽외면은 석축으로 되었으나 내면은

토석 혼축으로 내탁을 하였다.

남쪽 성벽에 수구를 설치하고 있으며 이곳 수구로 성내 물을 유도하기 위하여 깊이 90㎝, 폭 60㎝의 도랑이나 있다.

그 위에는 넓적한 판석을 덮고 있으며 수구의 크기는 폭 70㎝, 높이가 30㎝이다.

이 성의 특징은 네 모서리에 축조를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다른 곳보다 약 2m정도 더 두텁게 내탁하였으며 성의 높이도 약간 더 높게 축조되었다.

성의 주문은 남문지로 추정되는데 문지 근처는 두터우며 좌우에 성문의 일부로 추정되는 석축구조가 보이고 북문지로 추정되는 곳도 남아 있다.

성내는 평평하게 경사를 이루고 또한 남벽 내에선는 백제시대 토기편과 기와편이 간혹 눈에 띄고 있으며 계단식으로 된 건물지가 보인다.

이 성은 서천의 건지산성과 함께 백제 부흥군의 거점이었다는 사실이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본래 이 산성은 주로 북쪽에 대한 방어를 목적으로 하여 구축된 산성으로 보이며 원래는 백제시대에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축조한 것으로 또한 대흥산성이라고도 한다


백제의 부흥운동

http://kms4282.new21.org/e2k/ezboard.cgi?db=syber2&action=read&dbf=96&page=0&word=지도&oldword=지도&findstart=0&ftype=category&depth=1

http://www.hanilgo.hs.kr/hanil/mun_hoa/2mon/buan/buan_13.htm

http://cafe.naver.com/dolnoja.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368



백제부흥운동의 전개 과정


서기 661년 부여성이 함락되고 난 뒤 웅진성에서 의자왕이 잡혀 많은 백제인들과 함께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인질이 되어 잡혀간 지 1년 후였습니다. 복신 장군은 강서의 군사들을 모아 백제의 진현성을 탈환하게 되었습니다. 백제의 부흥운동에 나선 것이죠.


잠깐 복신이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알아볼까요? 그는 백제 무왕의 조카인 동시에 의자왕의 사촌 동생이었습니다. 아하 그래서 백제왕국의 재건에 발벗고 나선 것이군요.


복신은 도침과 함께 주류성을 근거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바로 이곳 주류성 백제 부흥운동의 근거지가 울금산성이라는 것이죠. 이곳 울금산성에 집결한 백제인들은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왕자 부여 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한편 일본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동시에 서북부 지방 백제 유민들의 호응을 얻어 한때 사비성까지 쳐들어가는 성과를 얻었습니다. 당나라 장수 유인원이 지키는 사비성을 포위하자 당나라에서는 유인궤를 급히 파견하여 구원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백제부흥군의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복신은 임존성으로 퇴진하였습니다


이때 복신은 "당과 신라가 백제 사람들은 다 죽이고 땅은 신라에게 주기로 약속하였다 하니, 어차피 죽을 몸이라면 싸우기나 하자."는 격문을 내걸고 백제유민들의 호응 아래 여러 차례 나당 연합군을 격파하였습니다.



복신을 주축으로 한 백제부흥군은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는 틈을 타서 옹산성, 사정성, 진현성 등을 공격하여 이를 탈환하였습니다. 그밖에 신라군이 금강 상류를 통하여 내려보내는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니 나당연합군은 한때 곤궁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신은 도침과 반목하여 도침을 죽이는 한편, 자기의 세력을 믿고 장차 부여 풍까지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거짓 병을 핑계로 누워 있다가, 부여 풍이 문병 오는 것을 기다려 잡아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아챈 부여 풍이 먼저 부하들을 이끌고 가서 복신을 죽였습니다. 이와 같은 백제부흥군 지도부의 분열로 인한여 전후 4년에 걸친 백제부흥운동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부안 지역을 배경으로 울금산성에서 백제를 재건하려 사년 동안이나 노력하였지만 그것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버리고 이 풍요로운 땅, 소박하고도 세련된 문화가 자리잡았던 이 땅은 신라인들의 외면 속에서 잠시 잠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곳 백제 땅에서 조용한 새벽을 두드리며 아침을 열어보려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었습니다. 백제 부흥운동이 좌절된 지 약 230여 년만의 일입니다.


서기 892년 신라 서남 해안의 비장이었던 견훤은 벼슬을 그만두고 무리를 이끌고 무진주의 수부인 지금의 광주지방을 탈환하고 백성들에게 자신이 백제 의자왕의 원한도 풀겠다고 선언하여 민심을 모아 지금의 전주 지방인 완산주로 진출해, 마침내 892년에 후백제를 건국하였습니다.


이후 궁예가 세운 후고구려 그리고 기존의 신라와 더불어 후삼국을 형성하여 서로 쟁패를 다투었습니다. 특히 927년에는 신라의 수도 경주를 침공하여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세웠고 또 고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후백제는 그 세력이 강성하여 갔습니다. 그러나 930년 후백제는 고려와의 안동전투 등에서 크게 격파되면서 주도권은 고려에게 넘어가고, 이어서 934년 웅진 이북(지금의 공주)의 30여성을 빼앗기면서부터 대세는 고려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후백제에서는 왕위 계승으로 인하여 내분이 일어나 아들 신검, 양검, 용검 등이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하고 정권을 탈취하였습니다. 이에 견훤은 3개월 뒤에 탈출하여 고려에 항복하였고 신라 경순왕도 935년에 고려에 항복하여 1000년 사직을 끝맺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936년 고려 태조는 10만 군으로 후백제를 공격하여 신검 등의 항복을 받아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고, 이리하여 후삼국시대는 끝나고 새로이 고려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고구려의 부흥운동

http://ict.cein.or.kr/ict_content/cai/cew0005/koguryo/map/revival2.htm

http://kms4282.new21.org/e2k/ezboard.cgi?db=syber2&action=read&dbf=93&page=0&word=지도&oldword=지도&findstart=0&ftype=category&depth=1


먼저, 한반도 내의 부흥운동을 보면, 당의 지배 정책에 대한 반발은 670년 태대형 고연무가 정병 1만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당으로 진격하자 당시 신라는 사찬 설오유를 보내어 부흥군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670년 4월 검모잠은 궁모성에서 군사를 일으켜 부흥군을 이끌고 한성으로 가 근거지로 삼고 앞서 신라에 귀부한 안승을 맞이하여 고구려 사직을 잇는 국왕으로 추대, 신라에 구원을 청했다. 이에 당황한 당은 672년 7월 고간, 이근행이 이끈 4만의 병력으로 평양에 와 주둔 부흥군 토벌에 나섰다. 고구려 부흥군은 672년 8월에 한시성, 마읍성에서 크게 패하고, 673년 호로하에서 크게 패하자 남은 군사들은 신라로 달아나고 안승 역시 재차 부흥군을 이끌고 신라로 돌아갔다. 이로써 대동강 이남에서의 부흥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그 유민은 신라에 통합되고 말았다. 다음, 요동 지방에서의 부흥 운동을 보면, 이 지역 역시 고구려 멸망 후 안동 도호부 관할에 속했다. 당시 압록강 이북 지방의 32성 가운데 당에 항복한 성은 11개성에 불과했다. 이 때, 당 고종은 반당적 고구려 유민을 선무하기 위하여 보장왕을 요동 도독 조선왕으로 봉하고(677), 안동에 살게하면서 그 지역 고구려 유민을 진무하도록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항복하지 않은 11개 성 등지의 고구려 유민을 거느리고 말갈과 함께 항전을 꾀하다가 사천성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그 잔민들은 하남 등 여러 주로 분산, 이주당하였다. 이후 당은 보장왕의 손자인 보원을 686년 조선왕을 봉하였다가 다시 충성국왕으로 봉하여 안동의 고구려 유민을 통솔하도록 하였으나 그도 역시 부흥 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자 그 대신에 보장왕의 아들 덕무를 안동 도록으로 삼아 고구려 유민을 통할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안동 도독의 직책이 고려왕에 맡겨졌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고구려인의 정치적 역할이 강화되었다고 간주, '소고구려국'이 요동 지방에 건국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어쨌든 요동지방의 고구려 유민은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천문령 전투에서 당군을 몰아 내고 발해를 건국하자 고구려 유민은 대조영을 중심으로 집결하게 되었다.



흑치상지

http://mtcha.com.ne.kr/koreaman/bagjai/man36-hugchisangji.htm


660년(의자왕 20) 나당(羅唐)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달솔 겸 풍달군장(達率兼風達郡將)으로서 임존성(任存城:大興)을 근거로 패잔병 3만여 명을 모아 나당연합군에 반격을 개시, 백제부흥운동 초기의 중심인물이 되어 200여 성을 수복, 군세를 떨쳤다. 이에 위험을 느낀 소정방은 9월초 의자왕과 귀족들을 끌고 장안으로 철수했다. 그 후 백제군 내부에 분열이 생기고(풍왕이 복신을 죽이는 것) 나당연합군이 총공격을 해오자 주류성(周留城)이 함락되었으며, 백제군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그때 당나라 고종(高宗)이 보낸 사신의 초유(招諭)를 받고 유인궤(劉仁軌)에게 투항, 임종성 공략 때 당나라 군사에 끼어 참전, 이를 함락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당나라에 가서 좌령군원외장군양주자사(左領軍員外將軍佯州刺史)가 되고, 678년(당 의봉 3) 토번(吐蕃) 정벌에, 681년(당 개요 1) 토번의 잔도(殘徒) 찬파(贊婆) 토벌에 참가, 그 후 돌궐(突厥)의 정벌에 공을 세웠다. 하원도경략대사(河源道經略大使)를 거쳐 연국공(燕國公)의 작위를 받고 연연도대총관(燕然道大摠管)에 올랐으나, 이를 시기한 주홍(周興) 등의 무고로 조회절(趙懷節)의 역모사건 때 옥사했다. 즉, 장안으로 옮겨간 흑치상지는 664년 웅진도독부의 웅진성 성주로 백제 땅을 다시 밟았으나, 672년 신라의 공격으로 웅진도독부가 완전 해체되면서 조국을 떠나게 되었다. 당으로 돌아간 그는 양주자사가 되어 678년 토번(티벳)을 정벌전에 나섰다. 당군은 토 번군의 용맹한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패퇴하였으나 오직 흑치상지만이 결사대 5백을 이끌고 토번군을 무너뜨렸고 이후 계속된 토벌전에서 기마대를 이용하여 번번히 토번을 제압하였다. 이어 돌궐 제국을 제압하고 서경업의 난을 평정하여 당의 중앙아시아 지배를 확고하게 하였으며 이런 공로로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마침내 연국공의 작위와 식읍 3천호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당제국의 영웅으로 이름을 날리던 그에게 죽음이 다가왔다. 687년 돌궐 정벌에 나섰던 그는 동료장수였던 찬보벽의 패전으로 죄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게다가 간신 주흥이 흑치상지(黑齒常之)가 조회절 반란사건에 가담했다고 무고하는 바람에 체포되어 주홍에게 잔혹한 고문을 당한 뒤 689년 10월 9일(양력 11월 26일)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60세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였다. 9년 뒤 장남 흑치준(黑齒俊)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는 신원을 신청하였고 측천무후로부터 좌옥검위대장군으로 추증받아 명예를 회복하였다. 그리고 1년 뒤 측천무후의 조칙으로 그의 유해는 왕족과 귀족들만이 묻히는 북망산으로 이장되었다. 그의 묘지명에는 "죽은 좌무위위대장군(左武威衛大將軍)검교좌우림위 상주국(檢校左羽林衛 上柱國) 연국공(燕國公)흑치상지는 일찍이 어려서부터 지체있는 집안에서 교육을 받았고 군사일을 많이 경험하였다. 장수로서 군대일을 총괄하게 되어 비로서 공적을 펴게 되었다. 옛날에 뜬소문을 받아가지고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윽한 분함을 머금고 목숨을 바쳤으니 의심스러운 죄가 분간이 되지 않았도다. 근래에 조사를 해보니까 일찍이 반대되는 상황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허물이 아닌 것 같다. 진실로 깊이 민망스러우니 마땅히 원통함을 풀어주어서 무덤에 가 있는 혼이라도 위로해 주어야겠다.  그래서 총장을 더해서 무덤을 빛나게 해주어야겠다고 하여 좌옥금위대장군(左玉錦衛大將軍)에 추종하고 훈봉을 주었다. 


복신

http://mtcha.com.ne.kr/koreaman/bagjai/man22-1-bogsin.htm


 의자왕의 종제(從弟)이며, 무왕의 조카이다. 660년(의자왕 20) 나당(羅唐) 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좌평(佐平)으로 임존성(任存城:예산)에서 항전하였고 백제가 망하자 승려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周留城:韓山)을 근거로 부흥(復興) 운동을 일으켰다.

  일본에 볼모로 가 있던 왕자 부여 풍(扶餘豊)을 옹립, 일본의 원병을 데려오게 하여 사비성(泗城)을 점령한 당군을 포위, 막대한 손해를 주었으나 당장(唐將) 유인궤(劉仁軌)의 원군에 쫓겨 임존성으로 퇴각하였다. 이듬해 스스로 상잠(霜岑)장군이 되어 다시 출격, 나당연합군에 큰 타격을 주었으나, 내분이 생겨 도침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당군에게 운송하는 군량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주둔하던 부대가 662년 웅진 동쪽에서 당군에게 패하자, 복신은 진현성(眞峴城)에 군사를 증원하여 지키게 했으나 나당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그러던 중 부여풍과의 사이가 나빠져 굴방(窟房)에 누워 그가 문병오기를 기다려 죽이고자 했으나 이를 알아챈 부여풍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뒤 주류성이 함락되고 나머지 세력이 모두 항복함으로써 4년에 걸친 백제 저항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일본 사료(史料)에는 그의 성(姓)이 귀실(鬼室)로 되어 있다


도침

http://mtcha.com.ne.kr/koreaman/bagjai/man16-1-dochim.htm


백제 후기의 승려이자 백제부흥운동가가로서 전북 부안의 개암사를 창건한 묘련(妙蓮)의 수제자이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자 백제의 왕족이던 복신(福信) 등과 함께 일본에 볼모로 가 있던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왕으로 추대하여 독립된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도록 하였다. 그는 주류성(周留城:지금의 한산)을 중심지로 하여 백제의 재건이라는 목표 아래 복신과 함께 부흥운동을 펼쳐나갔다.

  승려임에도 스스로를 영군장군(領軍將軍), 복신은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 이름짓고 서북 각 부(部)의 유민들을 규합하여 대흥임존성(大興任存城:지금의 예산)에 자리를 잡고 기세를 떨쳤다.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가 동이(東夷)를 평정하여 당나라의 연호를 해외에 펴려 한다며 그에게 사자를 파견하였으나, 도침은 굽히지 않고 오히려 사자를 옥에 가두는 등 담대하게 대처하였다. 또한 유인궤에게 “당나라가 백제인들은 노소(老少)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인 뒤에 신라에 넘겨주기로 약속하였으니 어찌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겠는가?”라고 전할만큼 기세가 등등하였다.


  백제부흥군은 한때 수도 사비성 함락을 눈앞에 둘 정도로 세력을 넓혔으며, 지라성(支羅城:지금의 대전 부근), 사정성(沙井城), 옹산성(甕山城), 진현성(眞峴城) 등에 자리를 잡고 신라군이 금강을 통해서 웅진(熊津:지금의 공주)과 사비(지금의 부여)로 식량을 운반하는 통로를 끊어 나당연합군을 궁지에 몰아넣기도 하였다. 백제부흥군의 투쟁으로 어려움에 처한 유인궤는 유인원(劉仁願)의 군대와 합세하여 공격하였지만 큰 타격을 입었고 결국 당나라 황제에게 요청하여 신라군의 지원을 받았으나 역시 크게 패하였다. 그러나 부흥운동을 이끌어오던 복신과의 사이에 반목이 커져 죽음을 당하였다. 지금도 충남 부여군 은산면(恩山面)에서는 도침과 복신 등을 추모하는 은산 별신제를 이어오고 있다.


검모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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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림성(水臨城)에서 태어났다. 대형(大兄) 벼슬에 있다가 나라가 망하자 670년(문무왕 10) 고구려의 유민(流民)을 규합하여 궁모성(窮牟城)에서 대동강 남쪽으로 진출하여 당(唐)나라의 관원과 승려 법안(法安)을 죽인 뒤, 사야도(史冶島: 덕적군도 중의 소야도)에서 안승(安勝)을 맞아 왕으로 옹립하고, 한성(漢城: 재령)을 근거지로 삼아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신라와 협조하여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기에 힘쓰다가 안승과의 사이에 알력이 생겨 안승에게 피살되었다.


안승

http://blog.naver.com/lawnbook/60016209240


안승(安勝)

생몰년 미상. 고구려 왕족. 보덕국왕(報德國王)·안순(安舜)이라고도 한다.

연정토(淵淨土)의 아들, 또는 보장왕의 서자, 혹은 외손자라고도 하며 고구려 멸망 후 서해의 사야도(史冶島)에 피신하여 있었는데, 670년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킨 검모잠(劒牟岑)에 의하여 추대되어 한성(漢城:지금의 황해도 재령 부근)에서 왕으로 즉위하였다.

소형(小兄) 다식(多式)을 신라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여 문무왕은 그를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이어 당군의 압박을 받게 되자, 이에 대처하는 방안을 둘러싸고 검모잠과 대립하게 되어 그를 죽인 뒤 무리를 이끌고 신라로 투항하였다.

신라는 안승 집단을 금마저(金馬渚:지금의 익산)에 안치하였다.

674년(문무왕 14)보덕국왕에 봉해졌으며 680년에는 문무왕의 질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

683년 경주로 초청되어 소판(蘇判)의 관등과 김씨(金氏)성을 부여받고, 수도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의 근거지인 보덕국과 격리된 채 신라 중앙귀족이 되었다.

보덕국은 684년 그 주민이 반란을 기도하다가 진압되어 소멸하였다.



 

3) 신라의 삼국 통일

 웅진도독부

http://www.chungdong.or.kr/highroom/history/dictionary/%BF%F5%C1%F8%B5%B5%B5%B6%BA%CE.html


백제 멸망 후 당(唐)나라가 백제의 옛 땅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하였던 행정관청.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나라가 백제 땅에 설치한 5도독부 가운데 중심위치였던 지방지배조직이다. 664년(문무왕 4) 당은 웅진도독부 밑에 7주 51현을 두어 백제 왕자 부여융(扶餘隆)을 도독으로 임명, 백제 유민을 무마하려 하였으나, 671년(문무왕 11) 신라의 세력에 의하여 쫓겨났다


안동도호부

http://dugok.x-y.net/kor-his/sys/andongdoho.htm

668년(문무왕 8)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그 영토를 9도독부(都督府) ·42주(州) ·100현(縣)으로 나누고, 이를 관장하기 위하여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를 도호부사로 삼아 통치하도록 하였다.


신성주(新城州) ·요성주(遼城州) ·가물주(哥勿州) ·위락주(衛樂州) ·사리주(舍利州) ·거소주(居素州) ·월희주(越喜州) ·거단주(去旦州) ·건안주(建安州)의 9도독부를 두었는데 당나라의 동방 전초지(前哨地)로서 고구려의 옛 땅을 병탐하기 위하여 설치했다.


그러나 신라가 이에 크게 반발하자 동맹관계였던 두 나라는 이를 두고 여러 해 싸움을 벌였고 이에 합세하여 고구려 유민들도 곳곳에서 일어나 대항하자 당은 676년 평양을 버리고 도호부를 요동(遼東)의 고군성(故郡城:瀋陽省 遼陽)으로 옮겼으며, 이로써 고구려 멸망 후 8년 만에 신라는 고구려의 옛 영토의 일부를 통치하게 되었다. 677년에는 신성(新城:瀋陽省), 705년에는 평주(平州) ·요서군(遼西郡) 등으로 옮겼으나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계기로 756년(경덕왕 15) 폐지되었다.


계림도독부

http://dugok.x-y.net/kor-his/sys/gerimdodokbu.htm


663년(문무왕 3), 신라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면서 문무왕을 계림주 대도독(鷄林州大都督)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이것을 무시하여 고구려·백제의 유민(遺民)과 함께 당나라의 세력을 물리치고 국토를 통일하였다.


이 도독부 제도는 당나라가 다른 나라에 침입하면 설치하던 기관으로, 당시 백제 고지(古地)에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고구려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다.


나  당 전쟁

http://imagebingo.naver.com/album/image_view.htm?user_id=bluelife0826&board_no=19601&nid=3002

http://blog.naver.com/lawnbook/60016254629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신라까지 당나라 영토에 편입시키려고, 663년(문무왕 3)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라 칭하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이라고 했다.


신라는 고구려 유민(遺民)들의 부흥운동을 배후에서 부추겨 당군에 대항하게 하고, 백제 지역에 주둔한 당군을 공격하는 양동작전을 구사하면서 정면 대응했다. 670년 3월 고구려 유민군 1만 명과 신라 군대 1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먼저 당군을 공격함으로써 나당전쟁이 개시되었다. 이후 신라는 백제지역에 주둔한 당군을 공격하여 80여 개의 성을 빼앗기도 했다. 당의 장군 설인귀(薛仁貴)가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지역으로 향하였으나 도중에 신라 수군에게 격파당했다. 671년 당군과 말갈군이 압록강 남쪽 깊이 쳐들어와 다음해 7월에 평양을 점령한 다음, 곧이어 8월에는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점령하면서 신라를 위협했다.



674년초 당 고종(高宗)은 신라가 고구려 유민군을 배후에서 도와주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해버렸다고 하여 문무왕 대신 그의 아우 김인문(金仁問)을 신라왕으로 삼고, 수십만의 군대를 보내 신라를 치게 했다. 675년 9월에 설인귀가 신라의 숙위학생(宿衛學生)이었던 풍훈(風訓)을 향도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천성(泉城)에 쳐들어왔으나 실패했다. 또 그해 9월말 당은 이근행(李謹行)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20만 군을 매초성(買肖城)에 주둔케 하고 총력을 기울여 신라에 대한 공세를 취했으나 신라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크게 격파당했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군마 3만 380마리와 3만여 명분의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당군과 신라군은 그후에도 크고 작은 전투 18차례를 벌였고, 676년 11월에는 기벌포(伎伐浦:금강 하구) 앞바다에서 설인귀가 이끄는 수군과 신라의 수군 사이에 마지막 격전이 벌어졌다. 여기서도 신라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결말이 나면서 나당전쟁은 끝이 났다(기벌포 해전).


당나라는 그해 안동도호부을 요동으로, 웅진도독부을 건안성(建安城:지금의 개평)으로 옮기면서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갔다. 신라는 676년 나당전쟁의 승리로 임진강에서 함경남도 덕원을 연결하여 실질적으로 이남의 영토를 차지 할 수 있었다.


매소성

http://www.gnedu.net/php-bin/swebdata/%B0%ED%B5%EE%C7%D0%B1%B3/1%C7%D0%B3%E2/%BB%E7%C8%B8.%B1%B9%BB%E7/1%C7%D0%B1%E2/hs20020108051929/Homepage/maesosung1.htm

http://dugok.x-y.net/kor-his/pla/mesosung.htm


이제까지 이 성의 위치에 대해 경기 양주군 주내면(州內面)의 양주산성설과, 주내면 남방리(南方里)의 남방리산성설이 있었다. 그러나 1984년부터 실시된 역사편찬위원회의 실측조사결과 경기 연천군 청산면(靑山面) 대전리(大田里)의 대전리산성이 매소성의 터임을 확인했다. 현재 남아 있는 이 성터는 둘레 670m, 넓이 1,960m2 이며, 한탄강에 임하는 천험의 요새이다.


백제 초기에 축성된 이성은 백제→고구려→신라로 주인이 바뀐 역대의 격전지이다. 또, 675년(문무왕 15) 당나라 장군 이근행(李謹行)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매소성으로 쳐들어오자, 신라군이 이를 크게 격파하여 전마(戰馬) 3만 380필과 많은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린 싸움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이 전투에서 패한 당나라는 그들의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성(遼東省)으로 옮기고, 신라는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의 땅을 차지하게 되어 이로부터 통일신라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기벌포

http://dugok.x-y.net/kor-his/pla/gibulpo.htm


 금강 하구에 해당하며, 사비성(泗姐城)을 지키는 중요한 관문이다. 의자왕 때에 좌평 성충(成忠)이, “만일 외국 군대가 백제를 침범하는 경우 육로에서는 침현(沈峴:충남 대덕군 마도령)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水軍)은 기벌포 연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뒤에 좌평 흥수(興首)도 같은 말을 할 정도로 백제의 국방상 요지였다.


요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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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에 도착하여 우선 백탑을 구경하였다. 요양하면 [백탑]할 정도로 백탑은 요양의 명물이다. 8각으로 된 13층 짜리 탑은 높이가 71m나 되는 거대한 건조물이다. 탑신과 처마의 벽돌과 기와에 백회를 발라 하얗기 때문에 백탑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백탑이 목적이 아니라 옛날 고구려 성인 요동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록을 찾아보고 현지에서 물어보아도 요동성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의 요양이 옛날 요동의 정치적 수도이고 최대의 격전지인 요동성인데 지금은 큰 도시로 변해 성은 그 흔적조차 없어져 버린 것이다. 이처럼 철저하게 없어진 고구려 유적이지만 다른 어떤 성보다도 그 구조가 잘 알려져 있다.

사라진요동성터 :요양의 상징인 백탑근처가 고구려의 요동성터였다 


1953년 평안남도 순천군 용봉리에서 발견된 고구려 고분벽화에 요동성의 성곽도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지상에서 지워진 역사가 무덤 속에서 살아난 것이다. 성곽도 중앙에 내성과 외성으로 된 2중성벽을 가진 주성(主城)이 있고, 인접하여 남쪽과 동남쪽에 조그만 외성의 형태가 보이게 배치했는데, 내성 안에는 골기와를 얹은 이층집과 삼층 누각이 그려져 있다. 외성 내부에는 서쪽문 좌우에 단층집이 한 채씩 그려져 있고, 그 오른쪽 밑에 해서(楷書)로 '요동성(遼東城)'이라고 내리 쓴 묵서가 있다.


고구려 멸망 후 요동성은 재탈환 되었다 

백 요동성은 원래 옛 조선의 땅이었으나 한나라 땅이 된 뒤 양평(襄平)이라고 했고, 고구려가 다시 되찾아 요동성이라고 했다. 이 요동성은 요동 뿐 아니다 요서진출을 위한 최대의 요충지였고 1차 방어의 요충지다. 광개토태왕 14년(404년) 연나라 왕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요동성을 쳐들어 왔을 때 성안의 고구려인들은 훌륭하게 무찔렀다. 영양왕 23년(612년) 수 양제가 113만 3800명(외형적으로는 200만, 군량수송 맡은 군사는 그 두 배)이라는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을 때도 이 요동성은 함락시키지 못했다. 고구려 국운이 다 되어 당 당태종의 침략을 받았을 때도 막강한 대군을 12일 동안이나 막아내다 지원군이 끊어져 무너진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당나라 대군의 집요한 공격에 무너졌던 요동성은 그 뒤 다시 탈환하여 고구려가 망한 뒤에도 조국 광복을 위해 끝까지 싸운 장한 성이다. 668년 평양이 무너지고 왕이 당나라로 잡혀갈 당시 압록강 이북에 있는 성 가운데 당나라가 깨트린 성은 불과 3개, 중앙정권이 무너지자 항복한 성이 11개, 그래서 당나라가 장악한 성은 모두 14개였다. 그러나 11개 성이 항복하지 않았고, 7개 성이 자리를 옮겨 항거하는 등 18개 성이 독립운동에 나섰다. 평양성이 무너질 당시 압록강 이북에서 항복하지 않고 계속해서 싸운 11개 성을 보면, 북부여성, 절성(節城), 풍부성( 夫城), 신성, 도성( 城), 대두산성(大豆山城), 요동성, 옥성(屋城), 백석성(白石城), 다벌악주(多伐嶽州), 안시성인데, 요동성은 재탈환되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1-5. 남북국 시대의 정치 변화


1) 통일신라의 발전


9주 5소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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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행정 조직은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하여 중앙 집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군사·행정상의 요지에는 5소경을 설치하여, 수도인 금성(경주)이 지역적으로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고, 각 지방의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하였다. 또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주의 장관을 군주에서 총관(뒤에 도독)으로 바뀌어 군사적 기능을 약화시키는 대신 행정적 기능을 강화하였다.

주 밑에는 군이나 현을 두어 지방관을 파견하였고, 그 아래의 촌은 토착 세력인 촌주가 지방관의 통제를 받으면서 다스렸다.  또 향, 부곡이라 불리는 특수 행정 구역도 있었다.


 한편, 지방관의 감찰을 위하여 외사정을 파견하였고,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상수리 제도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김흠돌의 모역 사건

http://www.koreandb.net/KoreanKing/html/person/pki23031.htm#2.%20김흠돌%20반란%20진압


신문왕대는 태종무열왕대부터 시작된 신라의 중대왕실의 전제왕권이 확고하게 자리잡힌 시기이다. 왕이 즉위하던 해에 왕의 장인인 김흠돌을 비롯한 파진찬(波珍飡) 흥원 (興元), 대아찬(大阿飡) 진공(眞功) 등의 모반사건이 있었으나 모두 평정하였다.


김흠돌의 반란은 왕권전제화의 계기를 만들어주었던 것으로서 반란의 원인은 상세히 알 수 없으나 신문왕비인 그의 딸이 아들을 낳지 못한 사실 또는 모반사건 바로 전에 진복(眞福)이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된 사실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이 사건에는 많은 귀족이 참여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대해서 신문왕은 주동자뿐만 아니라 말단 가담자까지도 철저한 숙청을 가하였다. 더구나 문무왕 때 상대등이던 이찬(伊飡) 군관(軍官)도 이 반란의 모의사실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반란사건에 대한 불고지죄(不告知罪)는 군관과 같이 막중한 지위에 있던 귀족을 숙청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이유로 보이지만 신문왕은 이 기회에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하려는 의도에서 과감한 정치적 숙청을 단행함으로써 전제왕권의 확립을 꾀하였다. 이러한 신문왕의 의지는 두 차례에 걸쳐 전국에 반포된 교서(敎書)에 잘 반영되어 있다.


682년에 동해에서 얻었다는 만파식적(萬波息笛)도 위의 모반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즉 만파식적에는 김흠돌의 반란과도 같은 일체의 정치적 불안을 진정시키려는 왕실의 소망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제왕권하의 신라의 평화를 상징하여주는 것이었다.


김흠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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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흠돌(金欽突)

?∼681(신문왕 1). 신라통일기의 장군.

가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딸이 신문왕비가 된 것을 보면 왕과 가까운 혈족이었을 것이다.

김유신(金庾信)·김인문(金仁問)을 도와서 고구려 정벌에 큰 공을 세운 대표적인 장군이다.

661년(문무왕 1) 7월의 고구려 원정군 편성에 김인문·김진주(金眞珠)와 같이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참여하여, 김유신을 도와 시이곡정(始飴谷停)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백제 잔민의 반란 진압이 급선무였고, 또한 군량미 보급이 주임무여서 중도에서 회군하였다.

668년 6월에 대아찬(大阿飡)으로서 그는 김인문·김흠순(金欽純)·천존(天存)·문충(文忠)·진복(眞福)·지경(智鏡)·양도(良圖)·개원(愷元) 등과 함께 대당총관(大幢摠管)이 되어 전국의 총관과 병마를 동원한 가운데 고구려 정벌을 떠났다.

그해 9월에 평양성을 함락하였으며, 출정의 공으로 파진찬(波珍飡)이 되었다. 곧이어 소판(蘇判)으로 승진되었으나, 그뒤의 기록은 없다. 딸이 신문왕비가 되었으나,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681년(신문왕 1) 8월에 파진찬 흥원(興元), 대아찬 진공(眞功) 등과 모반을 꾀하다 주살되었다. 곧이어 그 딸도 폐출되었으며, 신문왕은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모반죄목은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김군관(金軍官)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신문왕의 교서 내용뿐이다.

즉, 왕의 장인으로 역모를 하였으며, 이를 고발하지 않았다고 병부령인 김군관이 처형된 것을 보면 상당히 큰 사건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무엇보다도 신문왕의 전제왕권 확립이나 제도정비 및 율령정치 구현의 한 과정에서 나타난 사건인 것만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특히,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불휼국사(不恤國事)나 수명망구(授命忘軀) 등 7세기 이후 더욱 강화된 유교정치이념의 확립과 투철한 국가관이라는 사실이다.




김흠돌은 김유신의 조카로 김유신의 뒤를 이어서 가야파의 우두머리입니다(그리고 화랑의 우두머리).

그런데 신문왕은 귀족들의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야파가 장악하고 있던 화랑을 폐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김흠돌이 화랑을 동원해서 반란일으켰지만 실패했습니다.


원래 김흠돌은 신문왕의 장인이었죠. 즉 김흠돌의 딸이 신문왕의 왕비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왕궁에서 쫒겨났다 합니다.


김흠돌의 반란은 왕권전제화의 계기를 만들어주었던 것으로서 반란의 원인은 상세히 알 수 없으나 신문왕비인 그의 딸이 아들을 낳지 못한 사실 또는 모반사건 바로 전에 진복(眞福)이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된 사실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사건에는 많은 귀족이 참여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대해서 신문왕은 주동자뿐만 아니라 말단 가담자까지도 철저한 숙청을 가하였습니다. 더구나 문무왕 때 상대등이던 이찬(伊飡) 군관(軍官)도 이 반란의 모의사실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하였죠.

반란사건에 대한 불고지죄(不告知罪)는 군관과 같이 막중한 지위에 있던 귀족을 숙청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이유로 보이지만 신문왕은 이 기회에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하려는 의도에서 과감한 정치적 숙청을 단행함으로써 전제왕권의 확립을 꾀하였습니다. 이러한 신문왕의 의지는 두 차례에 걸쳐 전국에 반포된 교서(敎書)에 잘 반영되어 있죠.


682년에 동해에서 얻었다는 만파식적(萬波息笛)도 위의 모반사건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즉 만파식적에는 김흠돌의 반란과도 같은 일체의 정치적 불안을 진정시키려는 왕실의 소망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제왕권하의 신라의 평화를 상징하여주는 것이 된 거죠.


녹읍

http://ipcp.edunet4u.net/%7Eedusong/%C7%D1%B1%B9%BB%E7/%C7%D1%B1%B9%BB%E716.htm#녹읍


신문왕은 귀족이 소유한 녹읍을 페지시킴으로써 전제왕권을 강화하고 조를 등급에 따라 나누어 주는 관료전을 지급하였다.


국학

http://blog.naver.com/damule1/5798377

국학은 우리민족의 고유의 정신을 뜻합니다. 중국의 유교나 인도의 불교는 외래의 정신으로 국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국학의 뿌리는 5천년 전부터 있었던 한민족 고유의 정신문화인 '선도', '풍류도', '신선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 선도정신과 철학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 바로 천부경입니다. 천부경의 '인중천지일'. 즉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라는 천지인 사상'은 국학의 결정체이며 핵심인 것입니다.


선도문화는 바로 인간이 하늘과 땅과 연결된 존재를 깨닫고, 하늘과 땅에 이로운 삶을 사는 것을 궁극적이 목적입니다. 중국의 선도문화는 장생불사나 오래 사는 방법에 치우쳐 있는 것과 그 근본 목적에서부터 차이가 있습니다.


5천년 전 조선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 이화세계는 바로 선도문화의 바탕에서 나온 것입니다.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중심철학이었고, 선도수련은 나라를 이끄는 젊은 인재들을 교육하는 중요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고구려의 조의, 백제의 무절, 신라의 화랑 등 나라를 이끈 엘리트들은 민족 고유의 국학인 선도수련을 연마한 선인들로서 백성들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진골귀족과 6두품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11&dir_id=110101&eid=NSdnm0Bv1RFH%2F%2B42pxtAKRuzSDz%2F%2BPje


진골


진골은 왕족으로서 성골과 함께 최고 계급으로 부계와 모계 가운데 한쪽은 왕족이고 한쪽은 귀족일 때 성립한다. 태종 무열왕부터 혜공왕 때까지의 왕이 진골 출신이었는데, 진골 신분은 제5관등 대아찬 이상의 최고 관등으로 오를 수 있으며, 6두품에 비하여 사용하는 기물, 복색, 집의 크기에 대한 제한이 적었다. 중대에 오면서 이들은 장관직, 장군직을 독점하고 국가로부터 식읍이나 녹읍을 받았으며 사병을 양성하고 사원을 경영하여 재산을 도피시키는 등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하대 진골 귀족의 비대는 왕권의 약화와 진골 귀족간의 왕위 쟁탈전을 불러 일으켰다.


6두품


6두품은 두품층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 의복·그릇·수레·가옥 등의 모든 면에서도 진골보다 더 많은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진골신분과 함께 신라 중앙귀족의 한 축을 이루었고, 학문과 종교부문에서 뛰어났다. 그러나 신라 하대 진골귀족간의 왕위쟁탈전이 치열해지고 중앙과 지방의 정치적 혼란이 극심해지자, 그 활동기반도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 이에 이들은 신라 골품제의 모순점을 비판하고 반신라적 입장을 취하거나, 세속을 피해 은둔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건국되면서 대거 고려정부에 진출하여 골품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보다 수준 높은 관료문화를 형성하는 주역이 되었다.



 

2) 발해의 건국과 발전


장문휴

http://mtcha.com.ne.kr/koreaman/balhai/term5-1-jangmunhyu.htm

발해의 장군으로서 732년(인안 13) 무왕의 명령을 받아 수군을 이끌고 산둥[山東] 반도에 있는 당(唐)의 국제무역항 등주(登州)를 공격해, 자사(刺使) 위준(韋俊)을 죽이는 등의 성과를 올려 당의 동방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를 계기로 나당 연합군과 발해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본래 이 사건은 발해 무왕의 대외팽창에 위협을 느낀 동북만주의 흑수말갈(黑水靺鞨)이 발해와 우호관계를 단절하고 당과의 연결을 꾀하여 발해를 위협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흑수말갈이 당과의 연계를 희망하자, 당은 이들의 거주지인 헤이룽 강[黑龍江] 유역에 흑수주(黑水州)를 설치하고 이들로 하여금 발해를 견제시키려 했다.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무왕은 흑수말갈의 정벌을 결정했다. 그러나 무왕의 동생 대문예(大門藝)가 발해와 당 사이에 전면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흑수말갈의 정벌을 중지시키려다가 실패하고 당으로 망명하자, 당은 대문예를 좌효기장군(左驍騎將軍)에 임명하여 예우하고 발해의 송환요구를 거절했다. 이로 인해 당에 대한 강경책으로 돌아선 발해는 수군을 동원하여 등주를 공격했다. 당은 대문예로 하여금 유주(幽州)의 군대를 이끌고 발해의 서변을 공격하게 하고, 신라에 원군을 파견하도록 요청했다. 발해의 세력증대에 위협을 느끼던 신라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733년(성덕왕 32) 군대를 동원하여 발해의 남쪽 변경을 공격했다.


  그러나 당과 신라의 공격은 발해의 반격과 추운 기후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후 이들은 상당기간 상호교섭 없이 긴장 관계를 유지하다가, 문왕 때 이르러 발해에 속해 있던 말갈족 세력이 동화되고 문물정비에 힘쓰면서 대외정책에서 온건한 태도를 보이자 다시 평화관계를 회복하고 교역을 시작했다.


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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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성국

http://cafe.naver.com/aoohana.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21



해동성국 : 당시 중국에서는 발해를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을 가진 '해동성국'이라

        고 불렀다.



 

3) 남북국의 통치 체제


집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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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부(執事部)는 신라 시대의 최고 행정 기관으로 국가의 기밀 사무를 맡아 보았는데,


651년(진덕여왕 5) 품주를 개칭하여 설치하였다. 집사부의 장관은 진골 출신의 중시로,


그 아래 전대등(뒤에 시랑으로 고침), 대사(뒤에 낭중으로 고침), 사자 각 2명, 사 14명이 있었다.


집사부는 국가의 기밀 사무를 맡았던 만큼 왕의 지배를 직접 받았으며, 따라서 화백 회의와


귀족 세력의 대표자격인 상대등과는 대립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통일 직후 왕권이 전제화되었을 때에는 집사부의 권한이 강화되었고, 그 반대로 상대등의 권한은 약화되었다.


집사부의 장관인 중시직에는 왕과 가까운 왕족이 임명되었고, 그 임무는 왕권을 옹호하는 행정적인


대변자인 동시에 정치적 책임자의 역할을 하였다.


중시는 747년(경덕왕 6)에 시중으로 격상되었고, 829년(흥덕왕 4)에는 집사부가 집사성으로 승격되었다.


이것은 집사성이 점차 여러 관부를 총관하도록 기능이 확대된 데서 생긴 변화였다.



향 소 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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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었던 특수한 하급 행정 구역. 대체로 전쟁 포로의 집단적 수용지거나, 또는 본래 일반 군·현이었던 곳이 반역 및 적에의 투항 등 중대한 범죄로 인해 그 격이 강등되어 생겨난 것으로 짐작된다.

  향(鄕)과 부곡(部曲)의 주민들은 대부분 농경에 종사하였다. 소(所)는 고려 시대에 들어와 처음 발생하였는데,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금, 은, 동, 철 및 자기, 종이, 먹 등 특정 공납품을 생산하는 곳이었다. 향·부곡·소의 주민들은 일반 양민과 달라서, 대체로 그 신분이 노비나 천민과 유사한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향·부곡·소는 고려 후기 무신 정권기, 망이·망소이의 난을 계기로 명학소가 충순현으로 승격되는 사례에서 보듯이, 사회 발전에 따라 점차 해방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다 조선 초, 양인 증가 정책과 함께 완전히 소멸되고 면·리제가 정착된다.


상수리제도

http://blog.naver.com/easyfly/120002122964


상수리 제도 : 지방 세력 억압책

* 지방 세력가들을 교대로 서울(경주)에 머무르게 한 제도


9서당 10정

http://cont111.edunet4u.net/2002/yjsgun11/Mm/Module/seodang3.htm


9서당


  서당은 통일 전인 진평왕대부터 있어 왔는데, 삼국 통일 후인 신문왕 때 고구려, 백제, 말갈, 보덕국의 피정복민까지 포함하여 편성된 것이다. 이들은 왕경에 주둔, 국왕에 직속된 특수 부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9서당은 중앙 군단으로 옷의 색깔에 따라 부대 명칭(자금서당, 비금서당, 흑금서당 등)을 구분하였다. 이렇듯 9서당을 나라별로 옷깃의 색깔을 달리한 이유가 무엇인지, 즉 통일 후 삼국민 사이의 상호 신뢰성과 동질성 회복이 요구되는 시대적 상황에서 보면, 9서당을 융화정책의 차원으로 보는 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10정

  10정은 신라 지방군의 주축으로 9주에 하나씩 설치되고 다만 지리적으로 국방상 요지인 한주에만 2정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10정은 통일 신라의 주가 군사적인 조직과 결합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한주에 설치한 2개 정의 위치가 한강 이남인 이천(이천 : 남천장)과 여주(여주 : 골내근정)였다는 사실을 보면, 신라의 변방 지역인 패강 지대는 군사적인 면에서 경시된 일면을 알 수 있다.


말갈족


http://www.ysemra.net/%7Edeuckgi/200061/home/26%B1%E8%BC%F6%C1%A4/%B9%DF%C7%D8/%B8%BB%B0%A5%C1%B7.htm

퉁구스족의 한 갈래로 중국 동북 지방에서 살던 유목 민족. 중국 주나라 때는 숙신, 한나라·위나라 때는 읍루, 남북조 시대에는 물길로 불리다가 삼한과 수·당 시대에는 말갈이라고 불렸다. 시베리아, 중국 동북 지방, 우리 나라의 함경도 지방에 걸쳐 살았는데, 고구려 건국 후에는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다. 고구려가 망한 뒤 대조영이 세운 발해에 예속되었고, 발해가 거란에게 망하자 말갈족의 중심 세력은 거란에 딸리어 여진이라 불렸다.


발해의 중앙관제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11&dir_id=110101&eid=TkMUPkHE6Yknt5q7JMyfIS91Dx5Cp85c

http://cafe.naver.com/dolnoja.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372


정당성이 실제적으로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선조성과 중대성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선조성은 왕의 비서 역할을 했고


중대성은 정책의 입안을 했습니다..



정당성이 중요한데요, 정당성에는


좌사정과 우사정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당나라 같은 경우에는 안 나눠져 있거든요..


좌사정과 우사정이 3부씩 나눠서 맡았는데요..


각부는 무슨일을 했냐면



충부 - 인사(관리임용) /  인부 - 재정 /  의부- 관례, 제사/ 지부- 국방/ 예부- 형법/ 신부- 건설


이런 식으로 나눌 수 있겠네요.. 


그밖에 중정대는 관리 감찰 업무를 했습니다..


관리들이 비리가 있나 없나 감시하는 역할이죠..



그리고 문적원은 서적을 관리하였구요..



마지막으로 주자감은 최고 교육기관으로 오늘날의 대학과 같습니다..


5경 15부 62주

http://mtcha.com.ne.kr/korea-term/balhai/term4-5gyung15bu62ju.htm


10대 선왕(宣王:재위 818∼830) 때 5경 15부(府)의 행정구역이 완성되어 국도(國都) 상경(上京)을 중심으로 한 5도(道)의 교통망까지 정비하였는데, 5경 ·5도의 제도는 부여(扶餘)의 사출도(四出道), 고구려의 5부(部) 제도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인다.


   5경은 상경(上京:龍泉府)을 중심으로 중경(中京:顯德府) ·동경(東京:龍原府) ·남경(南京:南海府) ·서경(西京:鴨綠府)이다.


  15부는 동평부(東平府)가 있고 속주(屬州)로는 이주(伊州) ·몽주(蒙州) ·타주(蕣州) ·흑주(黑州) ·비주(比州)의 5주가 있었다. 막힐부(盞爲府)는 막주(盞州)와 고주(高州)의 두 주(州)가 속주(屬州)로 있었다. 부여부(扶餘府)에 속한 속주(屬州)와 속현(屬縣)은 부주(扶州)에 4현 선주(仙州)에 3현 등 2주 7현이 있었다. 솔빈부(率賓府)는 속주(屬州)로는 화주(華州)·익주(益州)·건주(建州)의 3개 주가 있었다. 회원부(懷遠府)는 달주(達州)·월주(越州)·회주(懷州)·기주(紀州)·부주(富州)·미주(美州)·복주(福州)·사주(邪州)·지주(芝州)의 9개주를 관할하였다. 정리부(定理府)는 정주(定州)와 반주(潘州)의 2개주를 관할하였다.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는 속주로 용주(龍州)·호주(湖州)·발주(渤州) 등 3주가 있었다.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는 노주(盧州)·현주(顯州)·철주(鐵州)·탕주(湯州)·영주(榮州)·흥주(興州) 등 6주를 관할하였다.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의 속주와 속현으로는 경주(慶州)에 6개현, 염주(鹽州) ·목주(穆州) ·하주(賀州)에 각각 4개현 등 4주 18현이 있었다.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의 속주에는 옥주(沃州) ·정주(睛州) ·초주(椒州)의 3주가 있었다.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는 신주(神州)·환주(桓州)·풍주(豊州) 및 정주(正州)를 관할하였다. 장령부( 長嶺府)는 하주(瑕州)와 하주(河州) 2개의 주를 두었다. 안원부(安遠府)의 속주(屬州)로는 영주(寧州)·미주(?州)·모주(慕州)·상주(常州)의 4개 주가 있었다. 안변부( 安邊府)는 안주(安州)와 경주(瓊州)를 두어 다스렸다. 철리부(鐵利府)는 말갈의 일곱개 부족 가운데 하나인 철리부족이 살던 땅에 발해가 설치한 15부 가운데 하나로서 그 밑에 광주(廣州)·분주(汾州)·포주(蒲州)·해주(海州)·귀주(歸州), 의주 (義州) 등 6주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 외에 부(府)에 속하지 않는 주(州)가 있었는데 독주주(獨奏州)는 62주의 하나이나, 다른 주와 같이 부(府)에 속하지 않는 상경(上京)의 직례주(直隷州)와 같은 행정구역이다. 그 아래에는 영주(落州) ·동주(銅州) ·속주(涑州)의 3개 주가 있었다.



 

4) 신라 말기의 정치 변동과 호족 세력의 성장

상대등

http://www.koreandb.net/KoreanKing/html/person/pki23023.htm


이러한 국가권력, 즉 왕권의 강화를 단적으로 나타낸 제도가 바로 법흥왕대에 비로소 설치된 상대등이다. 상대등은 수상과 같은 존재로서 531년에 이찬(伊飡) 철부(哲夫)가 최초로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상대등은 신라의 최고관직으로서 대등으로 구성되는 귀족회의의 주재자였다.


이러한 상대등이 설치된 배경은 왕권이 점차 강화되어 왕이 귀족회의 주재자로서의 성격을 탈피하게 되자 왕 밑에서 귀족들을 장악할 새로운 관직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김헌창의 난

http://linux.korea.ms.kr/%7Enote/class/read.cgi?board=qna&y_number=862&nnew=1


822년 신라 헌덕왕 때 웅천주(지금의 공주) 도독 김헌창이 일으킨 난. 김헌창은 신라 헌덕왕 때의 왕족이다. 그 는 태종 무열왕계로서, 태종 무열왕의 6세손이었던 그의 아버지 상대등 김주원은 785년 선덕왕이 죽었을 때 당연 히 왕이 될 신분이었다. 그러나 김경신의 정변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명주(지금의 강릉) 지방으로 물러났 다. 김경신이 원성왕이 되고, 그 뒤를 이어 그 후손이 신라를 통치하는 동안에도 김헌창은 아버지 김주원과는 달 리 중앙에서 활약하였다. 807년에는 시중이 되어, 원성왕의 후손 가운데 당대의 실력자인 상대등 김언승에 버금 가는 실력자였다. 그런데 김언승이 당시의 왕인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헌덕왕이 된 뒤로, 시중직에서 밀 려났다. 그 뒤로도 그는 헌덕왕파의 견제를 받아 813년에는 무진주(지금의 광주) 도독, 816년에는 청주(지금의 진주) 도독, 821년에는 웅천주 도독이 되는 등 지방으로만 내몰렸다. 웅천주 도독이 된 이듬해, 김헌창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신라 헌덕왕의 조정에 반항하여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김헌창이 그의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부당하게 생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고 기록하고 있다. 무열왕계였던 아버지 김주원과 다른 김씨 왕족이었던 원성왕의 왕위 다툼이 제1차 왕위 계승 전이었다면, 김헌창의 반란은 원성왕계 귀족들과 무열왕계 귀족들 간에 벌어진 제2차 왕위 계승전이었으며, 크 게 보아서는 신라 하대에 계속된 숱한 왕위 계승전의 하나였다. 김헌창의 난은 양대 귀족 세력의 1차 대결이 있 은 지 37년이 지난 뒤 다시 일어난 제2차 대결로, 반란 세력은 순식간에 무진주· 완산주(지금의 전주)·청주·사 벌주(지금의 상주) 4개 주를손 안에 넣고, 국원(지금의 충주)· 서원(지금의 청주)· 금관(지금의 김해) 등 여러 군· 현의 수령들을 항복시켰다.

이렇게 하여 한때 신라 9개 주 가운데 4개 주를 점령한 김헌창은, 충청·전라의 거의 전 지역과 경상도의 서부와 남부를 장악하여, 경주를 포위한 형세였다. 청주 도독 향영은 도망하여 퇴화군(지금의 밀양)으로 갔으며, 한산· 우두 ·삽량·패강· 북원 등지에서는 반란군을 맞아 수비를 강화하였다. 완산의 최웅은 경주로 도망하여 헌덕왕에 게 보고하였다. 헌덕왕은 왕도를 수비하게 하고, 장웅·위공·제릉 등에게 반란군을 격퇴하게 하였다. 일길찬 장웅이 선발대로 나가 도동현에서 김헌창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뒤이어 잡찬 위공과 파진찬 제릉은 삼년 산성(지금의 보은 지역)을 공격한 뒤, 속리산에서 김헌창의 군사를 격멸하였다. 균정이 성산에서 승리한 뒤 웅진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김헌창은 자살하였다.

이렇게 원성왕 직계 후손들이 힘을 합쳐 난을 진압하였다. 그 3년 뒤 김헌창의 아들 범문이 또다시 고달산적 수 신 등과 난을 일으켰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무열왕 후손들은 신라의 왕위 계승 쟁탈전에서 완전히 밀 려났다.

신라 하대에는 신라 왕위 계승에서 중요한 기준이 되었던 골품 제도가 붕괴되어 갔으며, 왕위 계승을 위한 진골 귀족 세력의 분열이 극심하였다. 그 결과 신라 하대 155년 동안에 무려 20명의 왕이 교체되는 혼란상을 보여 준 다.


초적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536&no=730


난민(亂民), 즉 농민 반란의 폭동군. ‘초망(草莽)의 적’이라는 뜻이다. 초적이라는 말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 11년(819) 3월조의 기사에 처음 보인다. 그 뒤 ≪삼국사기≫·≪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등의 문헌에 도(盜)·도적·서적(西賊)·남적(南賊)·토적(土賊) 등과 함께 나타난다.


초적의 활동은 신라 말기에서 후삼국에 이르는 시기와 고려 무신 정권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9세기 말 신라의 중앙 정부는 재정이 궁핍해지자 지방 주·군에 조세를 독촉했고, 농민들은 국가와 호족에게 이중 수탈을 당하였다. 또한 흉년과 전염병 등 자연 재해가 겹쳐 농민들은 소극적인 유망민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초적으로 변해 난을 일으켰다. 죽주(竹州)의 기훤(箕萱), 북원(北原)의 양길(梁吉)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고려 시대에는 특히 무신 정권기에 도탄에 빠진 농민들과 천민들이 무신들의 하극상의 풍조에 자극되어 자신의 신분 해방을 위해, 또는 지배자의 압박과 수탈에 항거해 대규모의 항쟁을 벌이게 되었다. 운문(雲門)의 김사미(金沙彌), 초전(草田)의 효심(孝心), 동경(東京 :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의 패좌(厄佐) 등이 구체적인 사례들이다.


초적의 규모는 1203년(신종 6) 초적 패좌의 무리 중에서 1천여 급을 참하고 250여 명을 사로잡았다고 한 것이나, 마산의 초적이 최우(崔瑀)에게 정병 5천여 명으로 몽고병의 격퇴를 돕겠다고 제의한 것으로 보아, 수십명에서부터 5천여 명 이상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운문산·마산·관악산 등의 초적 둔소는 천연의 요새로 공부(貢賦)·공문서 등을 쉽게 탈취할 수 있는 주요 간선도로를 낀 입지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초적은 일정한 성곽이나 군현을 행정적으로 지배하면서 그것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유격 전술을 썼으므로 관군이 토벌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여러 군·현민 중 그들과 관계를 가진 자가 많아서 관군의 동정을 잘 알아 토벌군이 패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초적은 1231년(고종 18) 몽고 침입 때, 스스로 항몽 대열에 참여해 활약하기도 하였다. 몽고 침입 후 최우의 강화 천도의 이면에는 초적을 비롯한 지방 반민들의 저항 활동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정권 유지를 위한 탈출의 의미도 있었다. 초적과 최씨 정권은 몽고 침략을 방어하는 대열에서는 협동이 가능하나, 상호 공존할 수 있는 집단은 아니었다.


강화 천도 후 각처의 초적들은 대몽 항쟁과 함께 반정부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정부가 몽고와의 야합 하에 화평이 이루어져 개경으로 환도하자, 반개경 정부·대몽 항쟁을 표방하는 삼별초의 반란에 호응하였다. 그러나 삼별초의 몰락으로 고려에서의 대규모 민란은 사라지고, 조선 왕조가 성립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태조 때부터 초적이 기록에 보이나 후기에는 거의 쓰이지 않고 적도(賊徒)·적배(賊輩)·도적 등으로 많이 쓰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高麗史, 高麗史節要, 江華遷都의 背景에 關해서(金潤坤, 大丘史學 15·16合輯, 1978), 抗蒙戰에 參與한 草賊에 對하여(金潤坤, 東洋文化 19, 1979), 三別抄의 對蒙抗戰과 地方郡縣民(金潤坤, 東洋文化 19, 1979), 高麗 武臣政權下에서의 慶州民의 動態와 新羅復興運動(金晧東, 民族文化論叢 2·3合輯, 1982).


호족

http://www.jeri.or.kr/jries/web/go/soc/his/%BF%F631.htm


신라 말 고려 초에 있었던 지방세력.

신라 말기 진골귀족 내부 정쟁으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독자적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대개 정권다툼에 패배하여 지방에 정착한 중앙의 귀족, 지방의 토착세력인 촌주(村主), 해상세력·지방군사세력 및 초적(草賊)·군도(群盜)를 세력기반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이러한 독립세력은 사회변동을 주도, 신라 왕조의 존립을 위협하였고 신라사회의 골품제(骨品制)를 타파함으로써 중세사회로의 발전을 이루는 구실을 하였다. 호족 출신 왕건(王建)은 고려왕조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호족들을 회유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호족 세력은 고려 성종 이후 중앙집권화정책이 강화됨으로써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이때 중앙집권화정책에 순응한 일부 호족들은 중앙의 관리로 편입되어 중앙의 문벌귀족으로 성장하였으나 대부분은 지방에 남아 향리로 전략하였다


 

 

5) 후삼국의 성립


견훤

http://www.wonbuk.es.kr/learn/교과서속인물/html/person/pge40001.htm


성은 이(李)씨이었으나, 뒤에 견씨라 하였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상주 가은현(加恩縣: 지금의 문경)의 농민출신으로 뒤에 장군이 되었다. 《이비가기 李碑家記》에서는 진흥왕의 후손인 원선(元善)이 아자개라 하였는데 확인하기 어렵다. 어머니의 성씨는 확실하지 않다. 두 부인을 두었는데, 상원부인(上院夫人)과 남원부인(南院夫人)으로 전해질 뿐이다. 견훤은 장자이며, 동생으로 능애(能哀), 용개(龍蓋), 보개(寶蓋), 소개(小蓋)와 누이 대주도금(大主刀金)이 있었다.


그런데 《고기 古記》에는, 광주(光州)의 북촌에 한 부자가 살았는데, 그 딸이 지렁이와 교혼(交婚)하여 그를 낳았다고 한다. 이것은 어머니의 가문이 광주지역의 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양길

http://dugok.x-y.net/kor-his/per/yanggil.htm

 양길(良吉)이라고 쓰기도 한다. 출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889년(진성여왕 3)에 정부의 부세 독촉을 계기로 상주지역의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의 세력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초적(草賊)이 일어났을 때, 북원(北原: 강원 원주)에서 봉기 세력을 이끌었다.


  왕을 칭한 견훤(甄萱)으로부터 비장(裨將) 벼슬을 받기도 하였으나, 892년 기훤(箕萱)의 밑에서 투항해 온 궁예(弓裔)를 거느리면서 그 활약에 힘입어 강원도 일대에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894년에 강릉으로 진격한 이후 독자적인 세력을 키우고 국왕을 자처하게 된 궁예를 제거하기 위해, 899년(효공왕 3) 충주 등지의 10여 성주(城主)들과 함께 비뇌성(非惱城)으로 진군하였으나 오히려 습격당해 패배함으로써 휘하 세력이 대거 궁예에게 흡수되었다.


   그 후의 행적은 알 수가 없다. 초적(草賊)을 지휘하여 신라의 붕괴를 촉진하였으나, 새로운 사회를 개척할 역량을 지니지 못하였으며, 같은 무리와의 세력 다툼 속에서 제거되었다.


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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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는 892년 북원(北原:原州)의 적괴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어 그의 신임을 얻고 강원도 각지를 공략하는 한편 수년간 자기의 세력을 부식(扶植)하고 임진강(臨津江) 일대를 공취하여 차차 독자적 기반을 닦아 898년에는 송악군(松岳郡:開城)에 웅거하여 자립의 기초를 세웠다. 이 무렵 왕건(王建:고려 태조)이 궁예의 휘하로 들어왔으므로 그에게 철원태수(鐵圓太守)의 벼슬을 주고 북원의 양길에게 대항하게 하여 그 땅을 빼앗고 901년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국호를 고려라 하였다.


당시 궁예는 신라에 의하여 망한 고구려를 대신하여 복수한다고 호언하며 서북지방의 인심을 모으려 하였다.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였으며 신라의 관제를 참작하여 관제를 정하고 국가의 체제를 갖추었다. 이듬해 국도(國都)를 철원으로 옮기고 성책(聖冊)이라 개원(改元)하였다가 911년 국호를 태봉이라 고치는 한편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라 개원, 914년 다시 정개(政開)라고 고쳤다. 궁예는 철원을 중심으로 하여 강원 ·경기 ·황해의 대부분과 평안 ·충청의 일부를 점령함으로써 신라나 견훤(甄萱)의 후백제보다도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리하여 태봉은 계속 신라의 북쪽을 침범하는 한편 왕건으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서남해 방면으로부터 후백제를 침공하게 하여 진도(珍島) ·고이도성(皐夷島城)을 격파하고 금성(錦城:羅州)을 점령하였다.


이리하여 국토가 넓어짐에 궁예는 대규모의 궁궐을 건축하고, 오행사상(五行思想)을 믿어 신라의 금덕(金德)에 이기고자 자기를 수덕(水德)으로 하였으며, 또한 스스로를 미륵보살(彌勒菩薩)이라 칭하며 일상의 기거동작을 부처와 같이 위용을 갖추게 하였다. 원래 성격이 괴상한 궁예는 점차 전제적인 군주로 변하여 호화스런 생활을 하면서 잔인성을 나타내어 간언(諫言)하는 자를 박살(撲殺)하고 드디어는 그 부인 강씨(康氏)까지도 잔학하게 죽여 폭군으로 타락하였다. 민심이 날로 이탈하고 측근자들은 전전긍긍하게 되어 마침내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 부장 4인이 의논하여 민중의 신망을 얻은 왕건을 새 왕으로 추대하고 궁예를 쫓아내니 그는 부양(斧壤:平康)에서 백성들에게 살해당하였다. 궁예는 원래 승려 출신으로 정권을 잡은 뒤에도 모든 기거동작을 불교식으로 하여 그가 남긴 석등롱(石燈籠)이나, 팔관회(八關會)를 개최한 일 등은 뒤에 고려에도 영향을 끼쳤다.


후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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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간 :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의 시대, 견훤이 스스로 왕위에 오른 892년부터 후백제의 신검이 고려에 항복한 936년.




2. 후삼국의 구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