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국가의 형성   



2-1. 고조선과 청동기 문화



1) 청동기의 보급



청동기 시대의 유적지

 

반달 돌칼

 

바퀴날 도끼

 

홈자귀

 

비파형 동검


거친무늬 거울

 

이 거울들은 다뉴기하문경(多뉴幾何文鏡) 중에서 조문경(組文鏡)으로 분류되는 고식(古式)의 청동 거울이다. 하나는 지름이 8.4cm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지름이 11.3cm인 원형인데, 큰 거울은 반 정도가 파손되었다. 원래 파손된 것을 부장(副葬)한 것으로 보인다. 작은 거울은 거울면이 편평하나 약간 볼록한 면을 이룬 것 같기도 하다. 뒷면의 무늬는 중간에 둥근 두 줄의 선(線)을 돌려서 안과 밖으로 구획하였다. 안에는 톱날 무늬 띠를 넣은 뒤에 둥근 선을 돌리고, 둥근 선 안에 다시 네모난 줄무늬를 몇 겹 새겼다. 밖에는 굵은 줄 무늬로 구성된 삼각형 톱날 무늬를 배열했다.그 사이는 반대 방향의 사선(斜線)으로 메꾸었다. 꼭지는 두 개인데, 안쪽에 돌려진 둥근 두 줄의 선 가까이에 부착되어 있다. 표면의 빛은 회백색이다.


미송리식 토기

 

민무늬 토기

 

붉은 간토기

 

고인돌

 

돌널무덤

 

돌무지무덤

 

세형동검



2) 철기의 사용


명도전

 

반량전

오수전

 

오수전은 전한(前漢) 무제(武帝;원수4년, 기원전 119년)때에 만들어져 그 후에도 약 700여 년 동안 계속 주조되어 당(唐)초기의 개원통보(開元通寶)가 제정(서기 621년)될 때까지 거의 중국의 표준화폐로서 통용되었다. 오수전은 무게가 5수(1銖=0.659g)이고 앞면에 "五銖"의 면문(面文)이 있다. 모양은 원형에 사각구멍이 뚫려 있고 주위 윤곽선을 두른 것인데 이러한 형은 이후 중국전의 기본형이 되었다.

주조는 처음에 각 군국(群國)에서 이루어졌으나, 한무제 원정(元鼎)4년(기원전 113년) 이후에는 한의 중앙정부가 독점적으로 주조하였고 오수전 이외의 화폐는 유통을 금지시켰다. 그 이후로 한나라 초기이래 혼란했던 화폐제도는 안정되었으며 많은 양의 오수전이 주조되었다.


거친무늬 거울

 

잔무늬 거울

 

거푸집

 

덧띠 토기


검은 간토기

 




3) 청동기  철기 시대의 생활


반달 돌칼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 고인돌

 


선돌

 


거석문화

 


4) 청동기  철기 시대의 예술


호랑이 모양과 말 모양의 띠고리 장식


반구대 바위 그림 탁본

 


5) 단군과 고조선


단군의 고조선 건국

1)고조선 성립

(1)단군의 건국 : 기원전 2333년, 도읍지 : 아사달

(2)생활 무대 : 요령 지방과 한반도 북부 지역

(3)제정 일치 사회 : 농경 부족(환웅)과 수렵 부족(웅녀)이 통합한 군장 사회

2)건국 이야기의 의의

(1)건국 기록 : 삼국유사가 가장 오래된 기록임

(2)홍익 인간의 건국 이념과 유구한 역사적 전통 시사

(3)국난 극복기마다 자긍심을 일깨워 줌.


단군왕검

 


환웅           참고

 

환웅시대는 부락사회 단계이다. 부락사회는 농경을 기초로 하여 정착생활에 들어감으로써 이루어짐은 앞에서 이미 밝혔다. 단군신화의 환웅에 관한 내용은 농경사회의 성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환웅이 풍백 . 우사 . 운사를 거느리고 곡물 등 360여 가지의 일을 관장했다는 것이다. 환웅이 관장한 업무에 곡물이 맨 먼저 등장한 점은 당시가 곡물을 매우 중요시한 농경사회에 진입했음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풍백 . 우사 . 운사는 기후와 관계가 있는 것인데 농경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바람 . 비 . 구름 등을 신으로 섬겼다. 따라서 풍백 . 우사 . 운사의 등장도 당시가 초기 농경사회였음을 알게 한다. 초기 농경사회는 바로 부락사회였던 것이다.


 

 

제정일치

 

고대사회에서는 모든 민족이 그 집단의 큰 일을 결정하는  신의(神意)를 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공동생활을 영위하였던 것과 같이 모든 종교가 생활의 중심에 있었고, 신에게 제사하는 일이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 다. 따라서 신에게 제사하는 일은 그 집단의 장(長)이 주재(主宰)하여, 이 제사장이 정치의 수장(首長)을 거의 겸하였다


고조선           참고

 

 

고조선의 세력 범위



5) 위만의 집권


위만조선

 

나라 말년에 진승 등이 기병하여 온 천하가 진나라에 반기를 드니 연·제·조나라 지역의 백성 수만 인이 조선으로 피난하였다. 연나라 사람 위만이 상투를 하고 오랑캐 복장으로 와 그 왕이 되었다.”와 같이 사기나 위략에 의하면 위만이 연나라 사람이라 기록되어 있기에 기자 조선과 마찬가지로 위만 조선 역시 중국의 식민 정권이라는 주장이, 고대부터 우리 나라는 다른 민족의 식민 통치하에 있었다는 것처럼 일제 식민 사관에 물든 학자들에 의해 특히 강조되었다.

 그러나 사기 조선전에 “위만이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 상투를 틀고 이(夷)의 복장을 하고는 동쪽으로 갔다. …” 라는 기록처럼 조선인의 복식을 묘사했다든지, 또는 처음부터 국경 수비라는 중책을 맡겼다라든지, 또는 정권 교체 후에도 한 글자로 된 중국식 국호를 사용하지 않고 국호를 그대로 조선이라 했다든지, 중국과 강경하게 대치하면서 중국 관직명과는 다른 상·대부·장군·박사 등의 관직을 둔 것으로 보아 ‘연인 위만’은 ‘연나라 사람’이 아닌 ‘연의 세력권 내에 살고 있던’의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싶다. 즉, 연에 많이 거주하고 있던 동이족(조선족)이 진, 한 교체기의 혼란을 피해 이동하여 그 와중에서 유이민 세력을 배경으로 한 위만이 토착 세력과의 연합을 통해 단순히 정권 교체에 성공한 것이 위만 조선인 것이다.


 

왕검성

 

환국(BC.3898~ BC.2333)과 고조선이 중국의 하북과 요녕지역에 있었던 것을 알기 위해서 고조선의 '왕검성'의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고조선의 도읍지는 왕검성(王檢城)이며 평양(平壤)이라고 하는데 고대한국어로 대읍(大邑)을 의미하고 정치적, 종교적중심을 이루는 큰 취락을 뜻하므로 그 위치는 여러 곳에 있었다.

 

<사기>와 <한서>에는 위만조선의 도읍이 왕험성(王險城)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고조선의 도읍지가 요동군(遼東郡) 험독현(險瀆縣)에 있다고 전하므로 고조선의 도읍지가 왕검성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위만

 

위만은 중국 전한의 역사학사 사마천이 쓴 사기의 조선전에 최초로 보인다.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이 망하고 한이 들어서자 한의 고조는 노관을 연의 왕으로 봉했다.그러나 정치적 불안으로 노관이 흉노로 도망하자, 한은 연을 정벌하게 되었다.

 이 때, 위만은 연에서 무리 1천여 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망명하여 조선의 왕인 준의 신임을 받아 국경 수비의 임무를 맡았다가 망명자들의 힘을 모아 준왕을 몰아 내고 조선의 왕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를 두고 종래에 중국인 이주자들이 식민정권 운운하는 주장이 있으나, 최근에는 중국 동북지역에 동이족(조선족)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 후의 위만 조선의 경과로 보아 중국으로부터의 유이민과 토착 민족과의 연합 정권 또는 동이계 유이민들이 철기 문화를 기반으로 하여 위만 조선을 성립시킨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6) 고조선의 사회


8조의 법

 

소위 고조선의 "8조법금"이라는 것은 '반고'의 <한서(漢書).권28. 地理志. 燕條>

가 그 출전(出典)이며, "기자(箕子)"가 제정한 입법이라고 합니다,

그 법 조항은 아래와 같은데 8조항중에 3조항만이 전해옵니다


1 : 사람을 죽인자는 그 즉시 죽음으로 갚는다(相殺以當時償殺)

2 :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배상한다(相傷以穀償)"

3 : 도둑질한 자는 남자의 경우에는 몰입하여 그 집 종(奴)이 되고 여자는 계집종

을 만든다(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女子爲婢)속전코자하는 자는 50만전을 낸다(欲

自贖者人五十萬).



"8조 법금"의 "8조항"을 다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책은 <환단고기>뿐인데 <환단고

기>는 위작(僞作)의 혐의가 걸려있는 책으로 우리나라 정통사학계에서는 아직 그

사료적가치가 인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래는 그 <환단고기>의 내용인데 참고삼

아 올립니다.


<환단고기/번한세가下>에 의하면 "금8조(禁八條)"는 "기자(箕子)"보다 164년전의

인물인 번조선(番朝鮮)의 시조 "기수(奇首) 서우여(徐于餘)"에 의해 반포된 것이

라하며 그 조항전문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습니다.


1, 사람을 죽이면 그 즉시 죽음으로 갚는다(相殺以當時償殺) :

2, 사람을 상해하면 곡식으로 갚는다(相傷以穀償)

3, 도둑질하는 자는 적몰하여 남자는 그 집의 종이되고 여자는 계집종을 삼는다

(相盜者男沒爲其家奴女爲婢)

4, 소도(성역)를 훼손하는 자는 가두어 둔다(毁蘇塗者禁錮)

5,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시킨다(失禮義者服軍)

6, 근면히 일하지 않는 자는 공공작업에 부역시킨다(不勤勞者徵公作)

7, 음란한 짓을 하는 자는 태형에 처한다(邪淫者笞刑)

8, 사기를 치는 자는 훈방한다(行詐欺者訓放) 스스로 속전코자하는 자는 비록

공표되는 것은 면하지만 백성들의 풍속이 오히려 그를 수치스럽게 여겨 (딸을)

시집보내려 해도 팔려갈곳 조차 없었다(欲自贖者雖免爲公民俗猶羞之嫁娶無所수)


 

 

2-2. 여러 나라의 성장


1) 부여


제천행사

 

부여, 고구려, 예의 제천의식은 각각 이름이 전하고 있으며, 그 시기가 가을걷이 이후인 점으로 보아 한 해 농사의 추수를 감사하는 제천행사였을 것이고, 삼한지역의 5월 제천은 씨를 뿌린 다음에 행하는 ‘풍요를 기원하는 제천의식’이었을 것이고, 10월의 제천은 북쪽지방의 제천행사와 같은 추수감사 의식이었다.


이들 제천의식은 당시 부족국가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모여 며칠을 계속해서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는 큰 축제였다. 이러한 제천의식에서 음악과 노래, 춤 등은 중요한 요소의 하나였을 것이다. 특히 삼한의 기풍제에서는 오늘날의 풍물놀이와 비슷한 놀이가 행해졌다. 이들 제천의식의 유습이 오늘날의 대동굿이나 별신굿 등에 남아 전한다


 

 

순장

 

고대 사회에서 부족장이나 왕이 죽었을 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을 함께 매장하여 죽어서도

생시와 같이 시중을 들고 생활하도록 하는 신앙적 계세 사상에서 비롯된 유풍이다.

즉, 종들을 함께 매장하거나 신하나 처까지도 매장하는 일이 있었다.

매장하는 방법은 산 채로 묻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죽여서 맺아하였으며,

부장품도 다수 묻었다. 순장의 유적은 이집트나 중국, 메소포타미아 등에서도 발견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여, 고구려, 신라, 가야 등에서 그 풍속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 고고학적 자료인 의성 탑리, 창녕 계성리 등의 고분(돌덧널무덤)과 양산 부부총,

고령 지산동 45호분, 순흥 읍내리 고분 등에서 순장으로 보이는 증거가 출토되었다.

특히, 부여에서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제가들은 자신이 거느리던 노예 100여 명을 순장하기도

하였다. 신라에서는 지증왕 3년에 순장을 금한 기록이 있다.(<삼국사기>)

이로 미루어 그 이전 시대에 크고 작게 순장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특히 국가에서

이를 금한 것으로 미루어 민간 사회에서도 소규모로나마 순장이 행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노예의 노동력, 처첩, 신하 등의 인격이 중시되면서 순장은 점차 없어지고

토용 등 여러 가지 대용물이 부장되었다


 

 

영고

 

부여(夫餘)에서는 단군조선의 삼신영고(三神迎鼓)를 본받아 음력 12 월에 천제를

지내는 영고(迎鼓=맞이북)를 실시 하였다.

영고는,소도에 큰 나무(神樹=신수)를 세워 칼과 거울을 장치하고 북을 매달아

치면서 천군(天君,祭司長=천군,제사장)이 천제를 주관하였다.

이때에는 온 나라 사람이 연일 먹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었다


 

 

연맹왕국

고대국가 성립 이전의 정치체제로 종래에는 한국 고대의 국가발전 과정을 ‘부족국가→부족연맹체국가→고대국가’로 발전해 왔다는 부족국가론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부족국가론이 지니는 개념의 모호성과 이론적 한계를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성읍국가→연맹왕국→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는 성읍국가론이 대두되었는데, 이같은 성읍국가들이 몇개 연합해서 성립된 것이 연맹왕국이다. 성읍국가는 여러 집단 가운데 우세한 집단을 중심으로 둘레에 성곽을 쌓고 각종 공공시설을 설치하여 하나의 독립된 국가를 형성한다. 이처럼 지연(地緣)을 중심으로 성립된 성읍국가가 외형적으로 확대되면서 연맹왕국 혹은 영역국가를 이루지만, 각각의 성읍국가는 여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중대한 사안이 있을 경우에만 연맹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성읍국가와 연맹왕국의 구분 기준을 단순히 외적인 규모의 변화에만 중점을 둠으로써, 국가형성 파악에 필수적인 내적인 사회관계의 변화와 같은 보다 본질적인 요소에 대한 접근을 고려하지 않은 한계가 있다.


 

2) 고구려


삼국사기

 

지정 : 보물 525 호

위치 : 경북 경주군 안강읍 옥산리 옥산서원 정분 각

참고 : 고려인종 23년(1145년)에 왕명에 따라 김부식등이 고기유적과 중국의여러사료에서 뽑아 편찬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


 

 

주몽

 

성은 고씨(高氏). 이름은 주몽(朱蒙) 또는 추모(鄒牟), 상해(象解), 추몽(鄒蒙), 중모(中牟), 중모(仲牟), 도모(都牟)라고 기록되어 전한다. 즉 《국사 國史》 고구려본기를 인용한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에는 성이 고씨, 이름은 주몽이라 하였다. 특히 《삼국사기》에는 ‘추모’ 또는 ‘상해’라는 이름도 전하고 있다. 그리고 광개토왕릉비와 모두루 묘지에서는 ‘추모왕’이라 하였다.

또 백제에서 시조로 모신 동명에 대하여 《신찬성씨록 新撰姓氏錄》 등 일본문헌에는 ‘도모(都慕:일본음 쓰모)’라고 하였다. 이들 일련의 한자(漢字)표기는 모두 동명을 다른 글자로 표기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한편 중국문헌인 《위략 魏略》, 《후한서 後漢書》 부여전, 《양서 梁書》 고구려전에는 부여의 시조가 동명이라 되어 있고, 《위서 魏書》· 《주서 周書》· 《남사 南史》· 《북사 北史》· 《수서 隋書》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의 시조가 주몽이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동명을 시조로 모시는 전통은 부여에서 고구려와 백제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원래 동명과 고구려 시조 주몽은 다른 인물이었을 것이다.


 

 

옥저

 

함경도 및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에 위치한 옥저와 동예는 변방에 치우쳐 있어 선진 문화의 수용이 늦었으며, 일찍부터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각 읍락에는 읍군이나 삼로라는 군장이 있어서 자기 부족을 다스렸으나 이들은 큰 정치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옥저는 어물과 소금 등 해산물이 풍부하였고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었다. 그러나 고구려에 소금, 어물 등을 공납으로 바쳤다. 옥저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족의 한 갈래였으나 풍속이 달랐으며 민며느리제가 있었다. 그리고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가매장하였다가 나중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 공동의 무덤인 커다란 목곽에 안치하였다. 또 목곽 입구에는 죽은 자의 양식으로 쌀을 담은 항아리를 매달아 놓기도 하였다.


 

 

서옥제

고구려 때 사위를 머무르게 한 집과 제도.

사위집을 뜻하는 서옥은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 처음 나오는 말이다.

동이전 고구려조에 따르면 ‘처음 말로 혼인을 정하고, 다음에 여자의 집 대옥(大屋) 뒤에 소옥(小屋)을 지어

 서옥이라 부른다. 저녁에 사위가 여자집에 와서 문 밖에서 자기의 이름을 알리고 무릎을 끓고 절하면서

여자와 잘 것을 세 번 원하면 여자의 부모는 이것을 듣고 소옥에서 잘 것을 허락한다. 남자는 다음날

떠날 때 전백을 놓고 간다. 여자는 자녀를 낳고 자녀가 성장한 뒤에야 남자의 집에 살러간다’라고 하였다.

위지동이전에 나오는 이같은 제도에 대해 데릴사위제 또는 봉사혼(奉仕婚)으로 보기도 한다. 이 제도는

일반적으로 데릴사위제로 해석하고 있으나, 동이전의 기록으로 볼 때 남자는 여자집에서 계속 사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만 살 뿐 아니라, 여자도 자녀가 성장하면 남자집으로 오기 때문에 데릴사위제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고구려의 서옥제는 결혼식을 올린 여자가 자기 집에 머물러 있고 남자가 몇 번

처가에 살러 가는 풍속인 해묵이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제가회의

고구려의 귀족회의입니다. 제가회의는 왕권 견제 및 귀족 세력구축 성격을 나타냅니다.


 

고구려의 경우

건국신화와 제천(祭天)대회를 통해 천신(天神) 신앙이 고구려의 지배이념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제천대회의 이름은 동맹(東盟)이라고도 하고 동명(東明)이라고도 했다

. 제천대회의 제신은 분명 천신일 텐데 그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사의 명칭은 시조의 이름이었다.


이것으로 보아 천신에 대한 제사와 시조에 대한 제사가 동시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동명은 천제의 아들, 즉 천손이므로 천신을 제사하는 데 함께 배향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천대회는 ‘공회(公會)’로 기록되어 있다.

국가의 공식적 의례로 단순한 민속행사가 아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공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비단과 금은으로 몸치장을 해 대단히 화려하게 의례를 거행했다.


 

 

국동대혈

 

국동대혈은 대혈(大穴)·수신(隨神)·수혈(隨穴)·신혈(神穴)이라고도 하며 1983년 5월 집안현 문물조사대에 의해 발견되었고 그 위치는 집안현 태왕향 상해방촌(集安縣 太王鄕 上解放村)의 홍동자구(汞洞子溝)에 있다.

 국동대혈은 국내성(國內城-집안현 현성)에서 동쪽으로 17km 떨어진 높은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으며 대혈(大穴)에서 남으로 압록강까지의 거리는 400m 이다. 대혈은 암동(岩洞)인데 굴 어귀는 동남으로 향하였고 높이 10m, 너비 25m, 깊이 20m 이다. 큰 굴 어귀에는 평평한 대가 있는데 그 면적은 약 30 × 20 평방미터로서 능히 100여명이 활동할 수 있다.

 이 큰 굴에서 서쪽으로 약 100m 가량 올라가면 또 용암동(溶岩洞) 하나가 있다. 용암동의 어귀는 서쪽으로 좀 치우친 남향이고 동북쪽에 있는 동굴 어귀와 서로 통한다. 이 굴의 깊이는 16m 이고 너비는 20m 이며 높이는 6m 이다. 굴의 밑은 평평하고 굴의 천장은 궁형(弓形)으로 되어 마치 천교(天橋)와도 같으며 굴안은 약 110명 가량 수용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를 통천동(通天洞)이라고 부른다. 굴 앞에는 약 300 평방미터 가량 되는 개활지가 있고 주변은 유곡(幽谷), 기봉이석(奇峰異石)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구려 왕들은 바로 이 통천동 앞에서 수신(隨神)을 맞이하였다. 통천동이 바로 고구려 시기의 중요한 제사유지인 국동대혈이다. 해마다 10월이면 고구려 왕은 군신(群臣)들을 거느리고 통천동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때문에 국동대혈의 발견은 고구려 고고학의 아주 중요한 성취이며 고구려 민족의 제사, 신앙, 풍속 등을 연구함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3) 옥저와 동예

 


민며느리제

장래에 혼인할 것을 약속하면, 여자가 어렸을 때 남자 집에 가서 성장한 후에 남자가 예물을 치르고 혼인을 하는 일종의 매매혼이다


 

과하마

말을 타고 과일나무 밑을 지날 수 있다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키가 작은 말을 뜻한다.


반어피

바다표범의 가죽


철자형과 여자형 집터

 


 읍군, 삼로

 


족외혼

고대 군장 국가 중의 하나인 동예, 이 국가는 같은 씨족끼리의 혼인은 엄격히 금하였고

다른 부족과의 혼인, 즉, 족외혼을 장려하였는데요.

족내혼을 금지한 이유라 함은 근친상간으로 인한 유전적인 치명적 결함을 막기 위함이라는 것인데

그 당시의 고대 사람들이 과연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가 의심스럽습니다.

또 동서양을 막론하고 순수한 혈통을 위해 근친상간이 흔히 행했던

옛 사람들의 보편적인 의식과는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족외혼을 장려했던 것은 다른 부족과의 교류를 통해 세력 확장과 친선 관계 유지에 그 목적이 있다고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왜 그렇게 엄격히 굳이 족내혼을 금지했을지가 궁금합니다.

 

 

책화

동예에 있었던 일종의 사유 재산 보호를 위한 벌칙이 있었다.

동예에는 씨족 간의 경계이거나 지역 간의 정치 구획인 읍락 사이의 경계를

중시하였다. 만일 이 같은 경계를 침범하여 수렵, 어로, 경작을 하거나 하면

침범자 측에서 소, 말, 노예로 배상하게 하였다.

이 같은 풍속은 지역 주민의 생활 안정과 재산 보호를 위해서 존재한 벌칙이었다.

오켠대, 이러한 풍속은 사유 재산, 지역의 분화, 법률의 발달 등 당시 사회상의

일면을 알려 주고 있다


 

 

4) 삼한(한)


마한

 

위지(魏志)에 이렇게 말했다. "위만(魏滿)이 조선(朝鮮)을 공격하자 조선왕(朝鮮王) 준(準)은 궁인(宮人)과 좌우 사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서쪽 한(漢)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고 했다."

또 견훤(甄萱)이 고려(高麗) 태조(太祖)에게 올린 글에, "옛적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뒤를 이어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났으며, 백제(百濟)는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최치원(崔致遠)은 이렇게 말했다. "마한은 고구려(高句麗)이고, 진한(辰韓)은 신라(新羅)다."(<삼국사기三國史記>본기本紀에 의하면 신라新羅는 먼저 갑자甲子년에 일어났고, 고구려高句麗는 그 뒤 갑신甲申년에 일어났다고 했다. 여기에 말한 것은 조선왕朝鮮王 준準을 가리킨 것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동명왕東明王이 일어날 때에 마한馬韓까지 차지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고구려高句麗를 마한馬韓이라고 부른다. 지금 사람들은 혹 금마산金馬山이 있다고 해서 마한馬韓을 백제百濟라고 하지만 이것은 대개 잘못된 말이다. 고구려高句麗 땅에는 본래 읍산邑山이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마한馬韓이라 한 것이다)

사이(四夷)·구이(九夷)·구한(九韓)·예맥(穢貊)이 있는데, <주례(周禮)>에 직방씨(職方氏)가 사이(四夷)와 구맥(九貊)을 관장(管掌)했다고 한 것은 동이(東夷)의 종족이니 곧 구이(九夷)를 말한 것이다.

<삼국사(三國史)>에는 이렇게 씌었다. "명주(溟州)는 옛날의 예국(穢國)이었다. 야인(野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穢王)의 도장을 얻어서 바쳤다. 또 춘주(春州)는 옛날의 우수주(牛首州)인데 곧 옛날의 맥국(麥麴)이다. 또 혹은 지금의 삭주(朔州)가 바로 맥국(貊國)이다. 혹은 평양성(平壤城)이 맥국이다."

<회남자(淮南子)>주(注)에는, "동방(東方)의 오랑캐는 아홉 종류나 된다"고 했다.

<논어정의(論語正義)>에는 "구이(九夷)란, 1은 현토(玄토), 2는 낙랑(樂浪), 3은 고려(高麗), 4는 만식(萬飾), 5는 부유(鳧臾), 6은 소가(嘯歌), 7은 동도(同屠), 8은 왜인(倭人), 9는 천비(天鄙)이다"라고 했다.

<해동안홍기(海東安弘紀)>에는, "구한(九韓)이란, 1은 일본(日本), 2는 중화(中華), 3은 오월(吳越), 4는 탁라(탁羅), 5는 응유(鷹遊), 6은 말갈(靺鞨), 7은 단국(丹國), 8은 여진(如眞), 9는 예맥(穢貊)이다"라고 했다.

 

 

변한

 

 

진한

삼국사기에는 진한지역의 옛 고조선 사람들이 신라를 건국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2002년 혹은 2003년에 MBC에서 방영된 한글날 특집 방송에 따르면,

2천년전 현 남한지역에 있던 삼한중 마한은 고조선의 유민들이 세운게 맞지만

진한은 중국의 진한교체기때 건너온 중국인들이 세운 것이기에,

진한(辰韓)이라 하면서도 진한(秦韓)이라 한다고 하더군요.


두번째의 진(秦)은 진시황의 나라 '진나라 진' 글자입니다.

진나라 사람들이 건너와서 세웠다하여 진한이라 했다는거죠.

중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건너오자 마한이 동쪽땅을 떼어주어 세워진게

진한이라고 합니다.


 

마한 목지국

마한 목지국은 처음에 성환 · 직산 · 천안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나 백제의 성장과 지배 영역의 확대에 따라 남쪽으로 옮겨 익산 지역을 거쳐 마지막에 나부 부근(오늘날의 대안리, 덕산리, 신촌리, 복암리)에 자리 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을 칭하던 국가 단계의 목지국이 언제 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근초고왕이 마한을 병합하는 4세기 후반까지는 존속하였고, 그 이후에는 백제의 정치 세력 하에 있는 토착 세력으로 자리 잡았을 것으로 보인다.


 

천군과 소도

소도는 신성(神聖) 지역이므로 국법의 힘이 미치지 못하여 죄인이 이곳으로도망하여 오더라도 그를 돌려보내거나 잡아갈 수 없다.'


삼한에서는 정치적인 지배자 세력인 군장 외에 제사를 주관하는 천군이라는 종교적 권력자가 따로 있었습니다.[이른바 제정분리사회였다고 하죠.]소도는 그 군장이라는 정치적 세력의 권한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농경과 종교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신성구역이었다는군요.

한 해의 농사가 잘되기를 빔과 재앙이 있을까 없을까를 좌우하는

종교적으로 신성한 영역 내에서 사람을 잡아 형벌을 가하는 [소위 불경(?)스러운] 행위는 제사에 부정을 타리라는 믿음에 기인하여 도둑이 성행케 해버린 폐단이겠죠.


 

구야국

구야국은 가야연맹 이전에 존재했던 연맹체 국가인 변한 12연맹국 중 하나입니다.

그 위치는 오늘날 김해 즉 금관가야가 있었던 곳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금관가야의 전신이 구야국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야국은 삼국시대 이전 연맹왕국시절 국가가 맞습니다


 

사로국

 

사로국이란 말은 진한 열두 나라 가운데 하나로 중국사서에 적혀 있다. 광개토왕 비문에서 경주는 신라성(新羅城)으로 표기되어 있다. 냉수리 삼면비에는 사로 아닌 사라(斯羅)라고 하였으며, 나라이름으로 쓰인다. 신라의 다른 이름으로 서라벌·서나벌·서야벌(徐羅伐·徐那伐·徐耶伐)이 있는데 ‘벌/불’이 옛말에서 ‘성’이면서 ‘나라’의 뜻도 지녔으므로 ‘사로국’이란 말의 본디 모습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