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한국사의 바른 이해


1. 역사의 학습 목적


1-1. 역사의 의미


역사의 의미


(1) 역사의 학습 목적

  1) 역사의 의미

    ① 객관적 의미의 역사

      - 사실로서의 역사: 과거에 있었던 사실

      - 시간적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모든 과거 사건을 의미→역사란 바닷가의모레알과 같이 수많은 과거 사건들의 집합체

      - 랑케(L.Ranke): 역사를 객관적 사실  그 자체로 이해(실증 주의 사관)


    ② 주관적 의미의 역사

      - 기록으로서의 역사: 과거의 사실을 토대로 역사가가 조사  하고 연구하여 주관적으로  재구성한 것을 의미함

      - 역사가의 가치관과 같은 주관적인 요소가 개입됨 

      - 기록된 자료 또는 역사서 같은 의미 : 과거의 모든 사실을 대상 으로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들이 특별히 의미가 있다고 선정한 사실에 한정하고, 과학적 인식을 토대로 학문적 검증을 거쳐야 함

      - 크로체: 역사가의 다양한 해석 가능 (상대주의 사관)

      ※ E.H. Carr

  2) 역사 학습의 목적

     ① 역사 학습의 의미

         - 역사 그 자체를 배운다 : 과거 사실에 대한 지식 증가

         - 역사를 통하여 배운다 : 현재의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과 교훈을 배움 

     ② 역사 학급의 목적

         - 과거의 사실을 토대로 현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기름 →개인과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유용

         - 역사적 사고력과 비판력 함양 : 역사적 사실의 외면에 대한 파악에서 역사적 사실의 내면 이해로 발전→역사적 사건의 보이지 않는 원인과 의도, 목적을 추론 하는 역사적 사고력, 정당한 평가를 내리는 비판력 함양

 

 

 

1-2. 역사 학습의 목적


 

 

조선왕조실록           <보충>

 

실록이 완성된 후에는 특별히 설치한 사고(史庫)에 각각 1부씩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사고의 실록들이 병화에 소실되기도 하였으나 그때마다 재출간하거나 보수하여 20세기초까지 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의 4사고에 각각 1부씩 전하여 내려왔다. 정족산,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1910년 일제가 당시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하였다가 광복 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그대로 소장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대산 사고의 실록은 일본으로 반출하여 갔다가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어 현재 27책만 남아 있다. 적상산본은 구황궁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가져가 현재 김일성종합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1984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함께 보관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 정족산본 및 태백산본을 분리하여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27책, 기타 산엽본 21책을 포함해서 총 2,077책이 일괄적으로 국보 제 15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실록편찬시 이용되는 자료는 정부 기관에서의 보고 문서 등을 정리해 둔 춘추관시정기, 전왕 재위시의 사관들이 작성해 둔 사초(史草),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 일성록 등 정부 주요기관의 기록과 개인의 문집 등이었다. 특히 사초는 사관들이 국가의 모든 회의에 빠짐없이 참가하여 왕과 신하들이 국사를 논의, 처리하는 것을 사실대로 기록하는 동시에 그 잘잘못 및 인물에 대한 비평, 그리고 기밀사무 등을 직필(直筆)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사법(史法)이 매우 엄하여 사관이외에는 아무도 볼수가 없었으며, 기록의 진실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왕까지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세계적 기록유산으로서의 의의를 살펴보면 첫째, 조선왕조실록은 25대 군주의 실록이며, 472년간의 역사를 수록한 것이기에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으로 세계에서 가장 장구한 세월에 걸친 실록이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중국의 대청역조실록(大淸歷朝實錄)도 296년간에 걸친 실록에 불과하다.

  둘째, 조선왕조실록은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은 세계적인 역사서이다. 일본의 삼대실록(三代實錄)은 빈약한 것이고, 남원조(南院朝)의 대남실록(大南實錄)은 548권으로 편성되었다. 중국의 황명실록(皇明實錄)은 2,964권으로 된 대질이나 권수만 많을 뿐이지 기록내용은 소략하다. 조선왕조실록이 총 6,400만 자인데 대해 황명실록은 총 1,600만자에 불과하다.

  셋째로, 조선왕조실록은 내용이 다양하여 가히 백과전서적 실록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사회, 경제, 학예, 종교 생활로부터 천문, 지리, 음악, 과학적 사실이나 자연재해나 천문현상과 동북아시아의 외교적 관계가 수록되어 있는 종합사서요, 국왕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의 생활기록이 담겨져 있는 민족문화서인 것이다.

  넷째, 조선왕조실록은 그 역사기술에 있어 매우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역사 기록물이다. 조선왕조 실록의 기초자료 작성에서 편술까지 담당했던 사관은 관직으로서의 독립성과 기술(記述)에 대한 비밀성을 보장받던 전문관료였다. 사관의 기록은 군주라해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었고, 비밀이 보장되는 제도가 이 실록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보장하였다.

  다섯째로, 활자로 인쇄 간행된 조선왕조실록은 한국 인쇄문화의 전통과 높은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역사서인 것이다. 조선은 세계적으로 금속활자를 가장 앞서 실용한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어, 활자개량에 힘쓰고, 각종 도서를 간행해 온 전통이 있었다. 여섯째, 조선말기까지 이들 실록이 완전하게 보존되어온 것도 세계적으로 유례를 보기 힘든 일이다. 선왕의 실록편찬사업이 끝나면 최종원고 4부를 인쇄하여 서울의 춘추관과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각지 깊은 산중에 소재하던 사고(史庫)에 보관하여 왔다.

  끝으로, 조선왕조실록은 일본, 중국, 몽고 등 동아시아 제국의 역사연구, 관계사 연구에도 귀중한 기본자료이기도 하다.


 

 

동국통감

조선 성종 때 서거정(徐居正) 등이 신라에서 고려 때까지의 역사사실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 활자본으로 56권 28책이다. 세조 때 시작된 편찬작업은 1476년(성종 7)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로 고대사 부분을 마무리짓고 1484년 편찬되었으며, 여기에 사론(史論)을 보충하여 다음해 57권의 《신편동국통감》이 완성되었다.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이후의 사서(史書)를 수집하고 거기에 담긴 사론을 계승함으로써 이전의 유교적인 사관을 발전시키고 있다.


  편년체(編年體)로 외기(外紀) ·삼국기(三國紀) ·신라기(新羅紀) ·고려기(高麗紀)로 나누어 서술하였는데, 외기는 단군조선에서 삼한까지의 상고사 부분이고, 삼국기는 삼국의 역사를 하나의 편년으로 묶고 무정통(無正統)의 시대로 서술하였다. 신라기는 669년(문무왕 9)부터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하는 935년(태조 18)까지의 역사이며, 고려기는 936년부터 고려 멸망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시대구분은 정통사상에 입각한 것이지만 서술에 있어서는 명분론적인 관점도 보인다. 신화와 전설적인 것이 배제되고 역사적 교훈을 주는 사료들을 발췌하여 서술하였으며, 고려기에서 세가(世家)와 열전 부분이 강화된 것은 정치의 주체로서 국왕과 신하를 중시하였음을 말해준다.


  기존의 사서에 있던 사론과 찬자의 사론이 아울러 실려 있으며, 군주와 신하의 명분을 중시하고 불교나 풍수지리설을 배격하였다. 즉, 이 책에는 모두 382편의 사론이 실려 있는데, 그중 178개는 기존 사서에서 뽑은 것이고 나머지 204개는 찬자 자신들이 써놓은 것이다. 이중 118개의 사론은 최부(崔溥)가 쓴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사론의 대부분은 사실을 고증한 것보다는 사실에 대한 포폄(褒貶)과 관련되는 것인데, 중국에 대한 사대명분(事大名分)을 중요시하는 입장이었다.


  다음으로 강상윤리(綱常倫理)를 존중하는 사론이 많아 이를 잘 지킨 사람은 칭송하며, 군신·부자·남녀의 위계질서를 정립하고 현실적으로 성종과 사림(士林)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공리(功利)를 배격하고 절의(節義)를 숭상하는 사론이 많아 종래의 인물에 대해 지절(志節)과 업적을 구별하여 평가했으며 문무를 차별하고 이단을 배격하는 입장이 나타나 있다. 유교적이고 사대적인 입장을 표방하고 있다 하여 신채호(申采浩)는 그 가치를 폄하하였지만, 당시 자국의 역사에 대한 이해, 관심과 역사 서술방법의 진전, 민족문화의 정리라는 점 등에서 그 중요성을 지적할 수 있다.


사료   =   참고자료


역사가가 과거의 사실을 직접 관찰할 수 있는 범위는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역사가는 사료(史料)에 의거하여 과거를 간접적으로 관찰한다. 사료란 과거가 남긴 흔적이다. 이러한 사료의 종류는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분류할 수 있다.

가) 벙어리 사료와 말하는 사료 : 벙어리 사료는 역사 유물과 유적, 도구 등을 말한다. 이들은 역사적 사건의 단편이며 직접적 결과이나, 말이 없다. 이에 반하여 말하는 사료는 문자, 그림, 전승에 의해 전달되는 역사 증거이다.

나) 사서(史書)와 문서(文書) : 역사 연구의 실제에 직접 관련이 있는 필전 사료(written evidence)는 의도적 기록인 사서(histories)와 비의도적 기록인 문서(documents 흑은 record)로 구분된다. 전자는 후세인에게 증언하기 위한 사료이다. 역사가의 사서와 연대기, 전기, 자서전, 족보가 이에 속한다. 그러나 의도적인 사서는 저자의 편견이나 주관적 평가를 배제하기 어렵다. 후자의 문서는 근대 역사학이 발달하면서 사료로서의 비중이 커졌다. 오늘날 정부는 물론 개인과 단체들이 모종의 문서를 남기는데, 이들 문서는 미래, 즉 후세에 대한 배려 없이 기록되었다는 점에 사료로서의 강점이 있다.

다) 1차 사료 혹은 원사료(原史料)와 2차 사료 : 사료는 증거 능력의 강약에 따라 l 차 사료와 2차 사료로 구분한다.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이의 기록을 원사료라 하고, 역사가의 손에 의해 무질서한 원사료를 정리, 분류해서 체계화된 것을 2차 사료라 한다.

라) 제3의 사료 : 오늘날 정부와 사기업이 작성한 각종 통계도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료의 활용을 위해 역사 연구에서도 부분적으로 컴퓨터가 이용되고 있다.


 

 

서거정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로서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자는 강중(剛中)이다. 그리고 호는 사가정(四佳亭)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급제, 사제감직장(司宰監直長)을 지냈다. 1451년(문종 1) 사가독서(賜暇讀書) 후 집현전박사(集賢殿博士) 등을 거쳐 1456년(세조 2)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1457년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공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1460년 이조참의 때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에 올랐으며, 1464년 조선시대 최초로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 1466년 다시 발영시(拔英試)에 장원한 후 6조(曹)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1470년(성종 1)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고 달성군(達城君)에 책봉되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45년간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文風)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로 단종 폐위와 사육신의 희생 등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왕을 섬기고 자신의 직책을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아 조정을 떠나지 않았다. 당대의 혹독한 비평가였던 김시습과도 미묘한 친분관계를 맺은 것으로 유명하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편찬에 참여했으며, 또 왕명을 받고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국역(國譯)했다. 성리학(性理學)을 비롯, 천문 ·지리 ·의약 등에 정통했다. 문집에 《사가집(四佳集)》 저서에 《동인시화(東人詩話)》 《동문선(東文選)》 《역대연표(歷代年表)》 《태평한화(太平閑話)》 《필원잡기(筆苑雜記)》 《골계전(滑稽傳)》이 있으며 글씨에는 《화산군권근신도비(花山君權近神道碑)》(忠州)가 있다. 대구(大邱)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주희

송대 개혁사상의 뿌리는 결국 유교였으며, 이때 유교는 唐(당) 중기 이전의 유교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새로운 유학, 이른바 신유학이 송대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했고, 그 집대성은 주희에 의해 이루어졌다. 외래사상인 불교가 지배적인 위치를 굳혀가고 있을 무렵, 이에 대한 전통 지식인의 반발도 적지 않았다. 이들 반발세력의 관점은 당연히 전통적 유가의 입장이었으며, 불교에 대한 공격은 동시에 유교의 질적 변화를 촉구하는 계기도 됐다. 마침내 당의 韓愈(한유)(768-824)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학풍의 유가가 송대에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신유학의 집대성자로 불리는 주희는 1130년 江西(강서)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대부분 福建(복건)에서 진행됐기 때문에, 그곳의 고유명칭인  (민)자를 붙여 그의 학파를  學(민학)이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지식인과 같이 그는 과거제에 응시, 진사로 관직에 올랐다. 그는 일찍이 여진족의 金(금)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지만, 항전을 위한 장기적 준비도 또한 강조했다. 그는 강서의 지방관리로 임명되자 그 지역의 白 洞(백록동)서원을 다시 재건했는데, 이 서원은 송대의 4대 서원중 하나로 꼽힌다. 송대부터 서원은 본격적인 교육기관으로 자리잡았다.


朱喜(주희), 張橫渠(장횡거), 邵康節(소강절), 程明道(정명도), 程伊川(정이천)등의 관념론을 적절히 조화시켜 이를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되는 주희의 性理學(성리학)은 理(이)와 氣(기)의 관계를 집의 구조와 자재와의 관계로 설명하여 理學(이학)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유학의 형이상학적 측면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신유학이 불교의 영향으로 인해 도덕적이고 현세적이며 형이하학적인 원시유학과는 대조적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맹자를 유교의 정통으로 삼아 孔孟(공맹)사상의 뿌리를 선명하게 부각시켰다. 특히 맹자의 성선설에 입각하여 교육의 가치를 강조했으며, 그 구체적인 지침으로 三綱五常(삼강오상)을 강조했다.


주희는 1200년에 사망했지만, 유학에 대한 그의 입장은 이후 정통적인 것으로 확립됐다. 마침내 1313년 경에 이르러 유교경전에 대한 그의 해설, 즉 朱子學(주자학)이 모든 과거시험의 기준이 됨으로써 그의 입장은 더욱 확고 부동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중국문화의 경직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부작용도 낳았다.


 

 

통감강목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은 송나라 주희가 사마광이 지은『자치통감』에 대해, 춘추(春秋)체재에 따라 사실(史實)에 관하여 큰 제목으로 강(綱)을 세우고 그 사실의 기록을 목(目)으로 구별하여 편찬한 중국의 역사서이다.


세종은 이 책을 애독하여 집현전 문신에게 훈의(訓義)를 만들게 하는 한편, 세종 20년(1438)에 이를 간행토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강(綱)에 사용한 큰 글자는 수양대군(후의 세조)에게 명하여 주조한 병진자로, 중간글자와 작은글자는 갑인자로 찍어『훈의자치통감강목』을 간행하였다.


이 판본은 총 139권 권19하(下)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뒤에 간행된 책들은 병진자의 원래 활자를 쓴 것이 없고 거의 목판본으로 바뀌었는데, 이 책은 그 유일한 활자본으로 보물 제5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책 맨 끝장에 ‘옥연묵장’이라는 인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경북 안동에 있던 옥연재라는 서애 유성룡 선생의 서재에 소장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통감기사본말

 

남송(南宋)의 원추(袁樞) 편저. 42권. 사마 광(司馬光)이 지은 《자치통감(資治通鑑)》의 기사를 항목별로 분류해서 안배한 것이다. 종래 중국 사서의 기술방법이던 《사기(史記)》와 같은 기전체(紀傳體)나 《자치통감》 같은 편년체(編年體)는 한 사건의 추이(推移)를 파악하는 데 불편하여 이와 같은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기사본말체라고 하는 새로운 역사 기술방법을 창안하여, 사건별로 정리해서 그 발생과 결과를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의 기술방법은 후세의 사서편찬에 영향을 끼쳤다.


 

 

원추

 

원추의 약력과 《통감기사본말》의 편찬 동기


 


원추(袁樞, 1131-1205)의 자는 기중(機仲)이고, 남송의 건주(建州) 건안(建安, 현재의 복건) 사람이다. 효종 때 예부시에 응시하여 사부(詞賦)에 제1등으로 진사에 합격하여 온주판관(溫州判官)으로 임명되었고, 후에는 예부시관(禮部試官)이 되었다.


 


건도(乾道) 9년(1173) 엄주교수(嚴州敎授)로 나갔는데, 이 직은 학관(學官)의 일종으로 경문(經文)으로 학생을 가르치는 한가한 직무여서 여유있게 글을 쓸 수가 있어서 《통감기사본말》42권을 저술하였다.


 


뒤에 국사원(國史院)의 편수관으로 임명되어 국사전(國史傳)을 나누어 편찬하였고, 또 공부시랑겸국자제주 등의 직을 역임하였다. 영종(寧宗) 때 우문전수찬(右文殿修撰) 강릉지부(江陵知府)가 되었다. 개희(開禧) 원년에 75세의 나이로 죽었다.


 


《송사》〈원추전〉에는 “원추는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평소 즐겨 읽었는데 내용이 너무 방대한 점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사건별로 구별해 그 내용이 연결되도록 하고, 이것을 《통감기사본말》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원추는 《자치통감》을 즐겨 읽었고《자치통감》의 내용과 사마광의 사상적 관점을 예찬하였다. 그러나 그 또한 옛 사람을 맹목적으로 믿지는 않고, 과감히 《자치통감》을 개편하였는데, 그가 창조정신이 풍부한 사학자였음을 엿볼 수 있다.


 

 

 

문치주의

 

예(禮)와 덕(德)을 바탕으로 하는 유교 정치이념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지배 형태의 통칭.


동양의 역대 왕조에서는 유교를 주된 정치이념으로 삼았는데, 유교 정치사상에서는 예와 덕에 의한 위로부터의 도덕적 교화를 통치의 근본원리로 삼았다. 이에 문치주의는 원리적인 측면에서 유교 정치이념의 실현수단인 예와 덕을 바탕으로 민(民)을 교화시키고 국가를 지배·운영해나가는 구체적인 실현형태였다.


따라서 도덕적 교화를 구현하는 구체적인 정치이념으로서의 문치주의는 예치주의(禮治主義) 혹은 덕치주의(德治主義)와 상통한다. 이러한 문치주의는 하(夏)·은(殷)·주(周) 나라 이래 보편적인 유교의 정치이념으로 간주되었다. 〈예기 禮記〉 제법(祭法)에서는, 문왕(文王)은 문치에 의해, 무왕(武王)은 무공(武功)에 의해 백성들의 고통을 해소했다고 해, 문치를 무공과 대응되는 것으로 파악했다.


또한 〈한서 漢書〉 육가전(陸賈傳), 〈자치통감 資治通鑑〉 당기(唐紀) 등에서도 역대의 통치자들이 문치와 무공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많은 고심을 했음을 잘 알 수 있다. 대체적으로 천명(天命)을 상실한 포악한 군주를 토벌하는 방벌(放伐)이나 난의 평정시에는 무공을, 수성(守城)할 때는 문치를 위주로 했다. 따라서 방벌과 같은 혁명론에서 의미하는 무공은 왕도(王道)에 대립하는 패도(覇道)와는 그 개념을 달리한다.


대체로 유가에서는 법(法)을 패도의 수단으로 인정했을 뿐, 유교 정치이념의 지향점인 이상적인 도덕정치 즉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수단으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문치주의를 표방하는 일반적인 국가정책으로서는 인정(仁政)을 베풀고 학교를 세우고, 과거를 실시하고 숨은 현자를 등용하며, 절의(節義)를 표창하고 농상(農桑)을 권장하며, 문헌을 정비하고 사서(史書)를 편찬하며, 예악(禮樂)을 제정하고 하늘과 조상에 제사를 지내는 것 등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동양의 역대 왕조는 예와 덕을 전제로 하는 원리적·이상적인 측면의 문치주의를 왕조의 정통성과 중세적 지배질서의 유지를 위한 가부장적 전제권력의 도구로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