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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상의 일반적 형식


부처님의 존상을 보고 일견하여 어느 부처님이라고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은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절을 순례하여야 생기는 것이나 차후에 그러한 능력을 가지기 위하여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는 존상의 실제 모양에 의하여 구별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머리에 쓰는 보관과 그 깨달은 진리를 상징하는 손의 모양(수인 : 手印 또는 인상 : 印相) 그리고 소지한 물건의 종류에 따라 각 존상의 특징이 있으므로 이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비로자나불 : 삼신불(三身佛)이라하여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이라는 용어가 있다. 비로자나불은 법신불이기 때문 에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원래 모습인 진리 자체를 상징하는 부처님으로서 손의 모양은 그림과 같이 두 주 먹을 오른손이 위로 가도록 아래위로 포개고 밑의 왼손 검지를 위의 오른손 주먹으로 감싼 지권인의 모습이다.

또는 주먹쥔 왼손을 오른손 전체로 감싼 모습도 많이 보인다. 삼존불을 모시는 경우에 좌우의 협시불로 노사나불과 석가모니 불을 모시는데 두 부처님이 모두 보관을 쓴 보살의 모습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다.


(2)석가모니불 : 입상일 경우에는 오른손은 시무외인, 왼손은 여원인을 하고 계신데 그림과 같이 시무외인은 손바닥 이 앞을 향하도록 가지런히 펴서 어깨까지 올린 모양이며, 여원인은 손바닥이 앞을 향하도록 하여 손 전체를 밑으로 늘어뜨린 수 인이다.

이 시무외인은 중생의 우환과 고난을 해소시키는 수인이며 여원인을 중생의 소원을 이루게 하는 수인이다.

그리고 좌상(坐像)일 경우에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손모양을 한 것이 통례이다. 항마촉지인은 그림과 같으며 좌상의 모 양은 결가부좌한 좌석의 자세에서 오른손을 풀어 무릎을 얹고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모양이다. 협시하는 보살은 기본적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다.

따라서 삼존을 모시는 경우에 왼쪽에 문수 보살, 오른쪽에 보현보살을 모시는 것이 원칙이지만 변형으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 살을 협시보살로 모시는 경우도 있다.


(3)아미타불 : 아미타불은 대개 미타정인(彌陀定印)의 수인을 하고 있는데, 이 미타정인의 손모양은 좌선 자세에서 양손의 검지를 꼬부려 손가락 끝을 엄지손가락 끝에 붙이되 검지손가락 등이 서로 맞닿도록 하는 상품상생인(上品上生印)을 비롯 하여 아래의 그림과 같이 아홉가지의 모양이 있다.

이것은 구품(九品)이라 하여 극락정포에 왕생하는 아홉 가지의 차별을 의미하는데, 상품․중품․하품을 각각 상․중․하로 세 분한 아홉가지이다.

협시하는 보살로는 관세음보살과 대제지보살이므로 미타삼존을 모시는 경우에는 왼쪽에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오른쪽에 대세지 보살을 모시는 것이 통례이다.


(4)약사여래불 : 약사여래불은 다른 불상과 달리 손에 약그릇을 들고 계시기 때문에 쉽게 식별할 수가 있다. 입상과 좌상이 동일한 양식이며 협시 보살로 왼쪽에 일광보살, 오른쪽에 월광보살을 모신다.


(5)미륵존여래불 :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에 이 사바세계에 내려오시어 중생을 제도할 미래의 부처님으로서 보살상으 로도 모시어 미륵보살이라고 하며 보통 탑으로 된 보관을 쓰시거나 손에 탑을 가지고 있는 모습으로 모신다.









◎ 안동에는 왜 전탑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일까?


   안동에는 다른 지역에 없는 벽돌로 된 탑이 많이 모여 있다. 벽돌로 된 탑을 전탑(塼塔)이라고 하는데, 유독 안동에 모여 있어서 우리를 궁금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전탑을 흉내낸 석탑을 모전탑 (模塼塔)이라고 하는데 이것 또한 안동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 다른 지역에 별로 없는 전탑의 형식이 안동에서 주로 발견되고 또 주변에 그것을 흉내낸 탑들조차 많이 모여 있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에서 신앙과 예배 대상물의 핵심은 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사리(舍利)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탑의 가치는 더욱 커진다. 그런 의미에서 탑의 형태나 재료 그리고 자리잡은 위치는 특별한 뜻을 지닌다. 인도에서 사발을 엎어놓은 듯 둥글고 크게 쌓아올려 내부공간을 만들고 그 한가운데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해두고 예배하던 것이 중국에 전해져 높고 웅장한 목탑으로 발전하였고, 다시 불에 탈 염려도 없고 견고한 벽돌로 탑을 만들었다. 나중에는 축조되는 과정의 애로와 탑 안에서 예배하던 것이 생략되는 형식적 탑이 조성되면서 오늘날 같이 높고 장엄 형식을 갖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풍부한 화강암 석재의 견고함과 돌을 다듬어 장식을 할 수 있는 장점을 취하여 일반적 으로 석탑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이것으로 인해 '석탑의 나라'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그렇다면 유독 안동에서는 쌓기도 힘들고 재료도 손쉽지 않은 벽돌을 소재로 해서 만든 전탑을 조성했다는 것은 불교의 전래과정이나 재료의 어려움으로 보아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안동에 왜 전탑이 많이 모여 있을까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 우선 가설 몇 가지를 추려두고 거기에서 근거를 찾아봐야 하겠다.

   첫 번째로, 안동을 비롯한 경북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불교의 한 종파가 이곳에 전탑을 집중해서 유행시켰으리라는 가설을 들 수 있다. 부석사․봉정사를 비롯한 화엄종찰(華嚴宗刹)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서 첨단사상을 유학한 의상이 신진유학을 쫓는 여러 승려들을 모아들여 화엄종을 열게 되었는데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전탑 형식을 도입하여 집중적으로 탑을 조성하였으리라는 가설 이다. 그러나 의상이 창건하여 중심사찰로 썼던 부석사․봉정사등에서는 전탑이 존재하지 않고 그 밖의 사찰에서도 전탑이 유행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의상이 확립한 화엄사상은 말 그대로 중국에 의존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주체적으로 정립되어 있어 중국과의 교류에고 불구하고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당시 사정으로 봐서도 불교 종파에 의해 전탑이 도입 발전되었다는 근거는 희박해진다. 하지만 의상에서 비롯된 화엄종의 영향권 안에 있는 안동지역에서, 건립시기 또한 통일신라시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집중적으로 전탑이 축조되고 있어 좀더 규명할 필요가 있다. 당시 신라 불교의 중심인 경주에 유행하지 않던 전탑이 안동에 유독 널리 분포된 것은 경쟁 관계에 있던 안동지방 불교세력의 개성있는 조탑 양식이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보면, 안동지방 에 화엄종파의 특별한 의도가 드러난 것이 아닌가 추측을 해본다.

  두 번째로 소재성에 근거하여 훌륭한 화강암 석재와 벽돌 이외의 탑 재료를 구하기 어려워서 전탑을 세웠으리라는 가설이 있다. 비교적 구하기 쉬운 낙동강을 낀 퇴적암지대의 양질의 점토와 강모래를 이용한 벽돌을 사용하였을 것이라 추측되지만, 아직까지 벽돌을 구운 대형의 그 시대의 가마터가 발견되지 않고, 또 특별히 다른 지역에 비해 우수한 재료가 이곳에서만 존재한다는 주장을 할 수도 없는 것이기에 이 점에서 의문의 여지가 있다.

  세 번째로 풍수비보설(風水裨補說)에 특별히 영향을 입어 강안에 전탑을 집중해서 조성했으리라는 가설을 들 수 있다. 이 가설을 도선(도선;827~898)과 연결되는 풍수지리설에 근거한 이 지방 사찰의 창건신화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고, 풍수사상에 따른 비보사찰과 탑의 축조가 빈번히 등장 하고 있으며, 탑의 축조시기 또한 같은 시기에 겹쳐있어 이러한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그러나 강안에 집중되어 있는 점과 풍수지리설에 따른 전탑 축조라 하여도 꼭 벽돌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충분히 납득되지 않아 이 가설도 역시 의문의 여지가 있다.

  네 번째로 충분한 재력을 갖춘 토착세력과 중국을 비롯한 전조문화권(塼造文化圈)과의 빈번한 교류에 따른 벽돌공을 비롯한 장인들의 솜씨에 의해서 축조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








◎ 이야기 속으로...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애틋한 사랑이 숨쉬는 부석사)


 

  우리 나라 불교 화엄종을 처음으로 도입한 신라고승 의상대사(625-702)는 신라왕족의 신분으로 경주 황복사에 출가하여 20세에 불문에 귀의하였다. 그가 원효와 함께 당나라로 구법 유학길에 나선 시기는 진덕여왕 4년(650년)의 일로써 그의 나이 26세였다.

  처음 당나라로 떠난 길은 고구려 땅인 요동반도를 거쳐 들어가는 루트였으나 국경에서 고구려군의 검문을 받아 첩자혐의로 체포되어 고생하다가 귀국하였다. 이들은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지 않고 재차 시도하였는데 의상이 36세 되던 해에 원효와 함께 서해안 당항성(남양, 오늘날 경기도 화성군 해안 추정)에 다다라 당나라로 떠나는 무역선을 기다렸다.

  당나라에 들어가 화엄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시기는 그의 나이 46세가 되던 해이고 처음으로 세운 사찰이 강원도 양양 낙산사와 경북 영주 부석사이다. 의상이 당나라로 떠난 시기는 신라가 삼국통일 을 완수하던 시기였고, 백제가 멸망하면서 서해 바닷길이 열렸으나 아직 고구려는 건재하였던 때였으므로 이 위험한 고구려 내륙 루트를 이용하지 않고 뱃길을 택하여 중국 산동반도 등주로 떠났다. 그 당시 산동반도를 비롯한 황해 연안은 신라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신라방(신라주민 집단 거주지)이 있었고 여기에는 신라인들이 출입하는 사찰도 있었는데 의상이 잠시 머문 곳이 적산 법화원이다.

  의상대사에 관련한 중국 내 기록은 고구려 유민으로 당나라에 살면서 승려가 된 북송의 찬영이 저술한 송고승전에 전해오고 있으나 우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구체적 기록이 전해오지 않는다.   의상대사와 관련한 이야기는 부석사 창건 설화에 기록이 전하고 민간 전설에도 전해온다. 그리고 일본 경도 근처 고산사에는 10세기 작품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신라 여인상이 근세 발견되어 국보로 지정되었고, 이 여인상은 다름 아닌 의상대사와 슬픈 사연을 간직한 당나라 처녀 선묘라고 보고 있으며, 이 절에는 화엄연기라는 불교서적이 전해오는데 이 책에 의상과 선묘에 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의상이 원효와 함께 당나라 유학을 위해 도착한 곳은 서해안 당주계(신라시대 지명에는 당성, 당항성)이며 그들은 배를 기다리다가 산중에서 노숙하면서 밤중에 비를 만났다. 어둠 속에서 민가를 찾아 헤맸으나 찾지 못하고 움집을 발견하여 그곳에서 밤을 지냈다. 의상과 원효는 밤중에 갈증을 느껴 가까이 고인 물을 달게 마셨다. 먼 여행길에 지치고 피로하여 불편을 잊고 단잠을 잔 뒤 이튿날 날이 새면서 주위를 살펴보니 자신들이 잠을 잤던 그 자리에 해골이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 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하룻밤을 보낸 곳은 움집이 아니라 피폐해진 무덤 속이었다. 의상은 해골에 고인 물을 자신이 마셨다는 사실을 알고 구토하고 더러움을 느꼈으나 원효는 태연 작약한 자세로 오히려 환희에 젖어 있었다. 이튿날도 비가 멎지 않자 또 다시 무덤 속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밤중에 귀신이 나타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원효는 이틀동안 무덤 속에서의 체험을 통해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心生卽種種法生 心滅卽種種法滅"이라고 갈파하였다. 즉 "마음이 있어야 온갖 사물과 형상을 인식하게 되고 마음이 없으면 이러한 것들도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원효는 "어젯밤 무덤을 무덤이라고 보지 않고 토굴이라고 생각하여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었고, 자리를 옮겨 잠을 자면서 귀신을 만났지만 마음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 누구나 생각하기에 따라서 모든 사물의 형상이 다르게 보고 느끼게 되고 또 생각을 멀리하게 되면 무덤이나 토굴의 구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오직 내 마음 이외 무슨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깨달았으니 당나라에 가지 않고 경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의상은 더 배우기 위해서 홀로 외롭고 험한 길을 택하여 뱃길로 중국을 향했다.

  서기 699년에 의상이 중국 땅을 밟은 곳은 산동 반도 북쪽 등주였는데 그는 독실한 불교신도 집에서 잠시 머물렀다. 이 집에는 아름다운 처녀 선묘가 살고 있어 훗날 신라승려 의상과 인연을 맺게 되지만 의상이 여자를 멀리하므로 두 사람은 끝내 만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다.

  의상이 적산에 있는 법화원으로 옮겨 머무는 동안 아침저녁으로 탁발을 나설 때는 선묘가 멀리서 의상을 바라보면서 흠모했다고 한다. 선묘가 절 밖에서 의상이 나오는 것을 기다려 마음을 전하려 했으나 의상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 후 의상은 이곳에서 서쪽 멀리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떠났으며 근처 종남산에서 화엄경을 설법하는 지엄대사의 문하에 들어가 10년간 삼장(불교의 기본이 되는 경․율․논)을 배웠다.

  지엄은 의상에게 귀국하면 널리 화엄종을 보급할 것을 당부하였고 의상은 유학을 마치고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의상이 신라로 돌아가기 위해 등주 항구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은 선묘는 자기가 손수 지은 법복을 전해주고자 바닷가로 갔으나 이미 의상을 태운 배는 항구를 떠나고 있었다. 선묘는 마음속으로 그리워하는 의상에게 법복이 무사히 전달되도록 마음속으로 빌면서 배를 향하여 던지니 법복은 무사히 의상 품안으로 떨어졌다.

  선묘는 평소 독실한 신도로써 의상을 그리워하면서도 의상이 불법을 공부하여 득도하고 무사히 귀국하도록 부처님에게 빌었다. 의상이 떠나자 함께 따라 갈 수 없게 되어 선묘는 자신이 용이 되어 달라고 하늘에 빌면서 황해바다에 몸을 던졌다. 하늘이 이에 감읍하여 선묘는 용이 될 수 있었고 용이 된 선묘는 의상이 탄 배를 호위하면서 신라까지 무사히 보살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신라에 돌아온 의상은 뜻하는 일이 잘 이루어지는 것은 이상히 여겼지만 나중에서야 용이 된 선묘의 보살핌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의상이 귀국 후 처음 세운 절은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이고 그 다음이 태백산 근처 봉황산 아래 지은 부석사이다. 문무왕의 부름을 받고 경주에 내려가 명산대천에 사찰을 지으라는 분부를 받고 절터를 정한 곳이 곧 부석사이다. 그는 문무왕 10년(676년)에 이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했으나 이미 이곳에 와서 절을 짓고 사는 5백여명의 다른 종파의 불승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의상은 마음속으로 부처님에게 어려움을 호소하자 갑자기 하늘에서 바위로 변한 선묘의 용이 나타나 3일 동안 공중에 머물면서 반대하는 불승들을 향하여 내리칠 듯 위협하니 그들은 두려워서 달아나고 종국에는 굴복하여 새 절을 짓는데 협조하게 되었다.

  어리고 착한 선묘의 넋이 용이 되어 의상을 보호하고 불법을 지키는 수호용이 된 것이다. 선묘가 바위가 되어 땅에 내려앉은 바위를 부석이라 하고 선묘의 도움으로 지어진 이 절의 이름을 부석사 라고 지었다. 현재 부석사에 선묘와 관련한 전설이 전하는 곳은 부석, 선묘각(선묘상을 모신 사당), 선묘정, 석룡이다. 절 동쪽에는 선묘정이 있고 서쪽에는 가물 때 기우제를 지내던 식사용정이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아래 묻혀 있는 석룡은 절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는데 아미타불 불상아래에 용머리가 묻혀있고 절 마당 석등 아래에 꼬리가 묻혀있다고 한다. 근세 이 절을 보수할 때 비늘이 새겨져 있는 석룡이 묻혀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며 그 당시 무량수전 앞뜰에서 절단된 용의 허리부분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원정군으로 참전한 이여송이 우리 나라 명산을 찾아다니면서 인재가 태어날 곳에는 지맥을 많이 끊었다고 하며 그 무렵 이 절의 석룡의 허리가 짤렸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신라시대 원효와 요석공주의 이야기처럼 의상과 선묘낭자의 사랑은 애틋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로 우리 가슴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