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지방서원의 발전


                                                ♠20022301    강동민

♠머릿말....


서원은 사림문화의 상징이자 꽃이었다. 조선의 사족은 도학을 바탕으로 가문을 유지하고 붕당을 이뤄 정치를 하였다. 사족들은 학행이 뛰어난 인물을 서원에 제사 모셔 모범으로 삼고 서원에서 성리학을 연구하고 가르침으로써 학파를 이루고 계승하였다. 그리하여 서원은 조선후기 사족들이 상민들을 성리학의 도덕과 가치로 교화하는 자율적 향촌 지배기구였으며, 사림 공론의 진원지이자 연결마디로 지방사족들이 중앙정치에 참여하는 발판 구실을 하였다. 서원은 사족의 가문 여론 정치의 장이었기 때문에 사회 변화로 사족의 위상이 변하고 붕당정치가 파탄함에 따라 그 위상과 기능도 바뀌었으며 사림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갔다. 그러나 사림들은 서원을 중심으로 지역단위에서 자율적으로 여론을 조성하여 지역사회를 이끌었고 필요할때는 자기 주장을 당당하게 중앙정치에 반영시키면서 공과 사의 조화와 자연과의 조화속에 개성있는 문화와 여유로운 삶을 누렸다.


♠서원의 성립과 발달


․서원의 유래

서원의 명칭은 중국 당(唐)나라 현종때 서적 편수처이던 여정전서원. 집현전 서원에서 유래하였으나 선현을 받들어 모시고 공부하던 본격적인 서원은 송나라때 나타났다. 사대부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이들이 전국에 글방을 만들어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그 규모가 커지면서 나라에서 서원이라는 이름을 내려 장려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세종때 서원이라는 명칭이 쓰여졌지만 강학기관과 사묘가 통합된 오늘날의 최초의 서원으로는 1543년(중종 38)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말의 학자였던 안향을 배향하고 학문을 강론하기 위해 세운 백운동서원이 최초였다. 그후 1550년 (명종 5)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직하면서 백운동 서원의 사약을 요청하여 이를 실현시킴으로서 과거준비기구라는 성격을 벗어나 자족의 자율적 기루로서 조선의 서원은 정립되어갔다.


 ․서원의 발달

초기의 서원은 교육 기능이 우세하였고 후기의 서원은 선현 기능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서원의 발생배경에서 나타나듯이 조선 시대 서원의 두 기능은 근본적인 목적을 위한 명목적 수단적 기능이 크며 실질적 기능은 사림의 향촌 지배와 세력 확대를 위한 기구에서의 정치적 사회적 기능이었 다 즉 초기에는 훈구 세력에 대항하고 세력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으며, 사림이 정권을 획득한 이후에는 각 당파와 가문의 이익을 지키고 위세를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변하였다. 또 그들의 이익을 지켜줄 조선 양반 사회를 유지하려는 향촌 지배 기구로서 역활을 하였다




♠영남지방의 서원


 ․영남지방서원의 특징

영남지방은 서원의 특성상 사족과의 연관성이 깊은 관계로 사림세력이 강하였다.때문에 타지방에 비하여 많은 수의 서원이 건립되었고 발전되어갔다.영남지역은 16세가 중반 퇴계*남명학파가 형성되어 동서분당시에는 같은 동인의 입장을 견지하였으나. 남북 분당시 좌도의 퇴계학파는 남인 우도의 남명학파는 북인으로 갈리면서 이후 학문적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였다 좌도의 퇴계학파는 인조반정*갑술환국*무신란을 거치면서 중앙정계에서는 실각하였지만 약300여 년간 재야 남음으로서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여 서인 내지 노론정권과 대결해 갔다. 그러나 우도의 남명학파는 인조반정을 계기로 중앙정계에서 몰락한 이후 독자적인 하나의 정파 내지 학파로서 존립이 불가능해 지면서 일부는 노론정권의 포섭책에 흡수되었고 나머지 일부는 좌도의 퇴계학파로 흡수되어 갔다. 이렇게 볼때 인조반정이후 영남지역은 좌도의 퇴계학파가 그 중심이었다 따라서 영남지역내 서원도 영남 남인계 서원이 그 중심이었다.

 서원이 조선중기 이후 재지사림들의 활동 근거지로서 나아가 붕당정치하에서 각 당파의 후방적기지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할 때, 그 건립과 운영은 중앙정계의 정치변동에 일정하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중앙정계에서 당파의 분립이 본격화 된 후 서원은 지역․당색에 따라 그 건립과 인적구성 및 운영 등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나타난다. 이러한 차이점은 크게 보면 영남남인계 서원과 서인(노․소론)계 서원으로 구분될 수 있다고 본다.


 운영의 면에서 보면 영남 남인계는 서원을 이황의 서원관에 바탕을 두고 향촌자치기구로 운영하였으며 서원이 향촌사회에서 일차적인 관심사였다 이에비해 17세기초까지 서원을 통한 향촌사회 운영이나 도학적 정통성에서 열세였던 서인계는 그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서원의 설립과 운영에 중앙관료가 적극 개입함으로써 정치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운영되었으나 집권세력으로 성균관을 장악하고 있어서 서원에 대한 관심이 남인에 비해 부차적이었을것이다. 초창기 영남지역내 서원의 설립및 그 운영에는 중앙권력이 개입하지 않았다. 인조반정이후 서.남인간에 정쟁이 점차 가열되면서 대표적인 서인계 서원의 경우 자파의 학문적 정통성의 화보및 집권의 명분과 연결되면서 중앙권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사례가 많았지만 영남 남인계 서원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 서립과 운영이 향촌자치적이었으며 관권이 크게 개입하지는 않았다. 인조반정 이후 점차 재야 세력으로 밀려나는 정치상황과도 무관하지 않겠지만 퇴계의 서원론에 영향이 컸다


 영남지방의 서원중 17세기 초반까지의 즉 초창기의 서원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일향 또는 일도사림의 공론에 의해 제향자의 문인*후손등의 합력으로 건립되고 운영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과정에는 지역적 범위나 정도의 차이는 있었는나 본현 내지 인근 지방관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다. 다만 18세기 이후부터는 이시기 원사가 남발되면서 나타난 일반적인 경향인 문중원사의 성격을 띠었다 18세기 이후 영남지역내 문중원사의 건립은 족력(族勢)난 읍력(邑勢)의 형세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으나 대체로 후손에 의해서 발의되어 직손 방손 외파(外派)및 향중(鄕中)내 각 문중의 도움을 받아 성사되었다.

 18세기 이후 영남지방의 서원은 서원을 매개로 한 향전이 타도에 비해 심각하였다. 향전은 이시기 전국적인 현상이었지만 영남의 경우 노론정권하에서 재야남인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고, 또한 사족의 향촌내 지배력이 비교적 늦게까지 유지되었다는 점에서 타지역에 비해 더욱 확산되고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영남 남인들은 인조반정*갑술환국*무신란을 거치면서 사실상 중앙정계로의 진출이 막히고 여기에 집권노론인 영남남인들의 견제책의 일환으로 향촌문제에 개입하는 상황에서 생존권의 차원에서 향촌사회에 대한 관심이 클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남지역에서 서원을 매개로 한 향전의 유형으로 특히 심각한 갈등과 향론분열을 야기시켰던 것은 당색간,신분계층간 및 각 문중간의 향촌내 주도권 장악을 위한 각종 비리등이었다.


 18세기 이후 영남지역에서는 이러한 남인과 노론의 당색간 대립으로 인한 향론분열과 맞물려, 이 시기 향촌사회에서 일반화되는 이른바 '신향 '의 등장으로 인한 신분계층간의 갈등문제가 심각하였다. 영남에서 신향의 핵심은 서얼이었다. 영남내 적서간의 갈등은 이전부터 있어 왔지만 18세기중반 이후 중앙정부의 서얼허통 조치로 더욱 격화되었다. 영조 48년(1772)에 통천(通淸) 태학(太學)서의 자치(字齒) 정조 원년(1777) 3월의 "서류들도 외방의 향임(鄕任)중 수임(首任)을 제외한 제반 등임(等任)에의 수용을 허용한다"는 조항을 포함한 庶類疏通節目(丁酉節目)은 영남사류들의 완강한 반발에 부딪쳐 제대로 시행되지는 못하였지만, 이후 양자간에 본격적인 향전으로 나갈 수 있는 전거가 되었다. 영남지방의 경우 중서허통 문제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에서 강경하게 대처하였지만 신향의 도전이라는 일반적인 추세는 막지 못하였다. 영남지역은 재지사족이 강한 만큼 서얼들도 타도에 비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영남의 서얼들은 영조조 이후 서얼허통을 요구하는 수백명 내지 수천명의 연명상소가 누차 상정되었을 때 이를 주관하고 있었고, 또한 순조조에는 그들의 역사를 정리한 {葵史}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시기별로 본 영남지역의 서원건립현황

․제 1 기(1543-1574)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소수서원)이 설립된 1543(중종 38)부터 이황을 배향하는 도산서원1574(선조7)이 설립되고 사림파가 분열한 동서 분당 전해인 32년간으로  이시기는 정치적으로 성종 이후 중앙정계에 진출한 사림파들이 훈구파와 대립하면서 세력을 확대해 가고 마침내 정권을 장악한 시기이다. 

소수서원(1550) 도산서원(1574)


․제 2 기 (1575-1649)

동서 분당이 된 1575년(선조 8)부터 1649년(인조 27)까지 75년간으로 이시기는 붕당 정치가 붕당 상호간의 견제 속에 비교적 건전하게 발전하여 아직까지 그패해가 그렇게 크지 않았던 시기이다.따라서 이 시기의 서원은 붕당 및 학맥에 따라 확산되어 나갔다.

삼계서원(1588) 도계서원(1610) 문단서원(1618)

․제 3 기 (1650-1713)

이시기는 1650년(효좀 1)부터 1714 서원의 사적 건립 금지령이 발표되기 전해인 1713(숙종39)까지로 64년간  제 2시기에 비하면 급속한 증가 현상을  보이던 시기이다. 이시기의 정치적 상황은 붕당 정치가 격화되어 앞서 유지되었던 붕당 정치의 건전한 비판 체제가 무너진 시기이다.서원의 급속한 확산은 이런 붕당의 대립 격화로 양반 사회에 있어서 같은 당파와 문중간의 보호와 결속이 무엇보다 필요했기 때문이다.

산암서원(1654) 수한서원(1661) 오계서원(1665)


․제4 기 (1714-1776)

1714년 (숙종 40) 서원의 사적 건립 금지령이 내려진 이후 1776년(영조52)까지 시기로 서원에 대한 통제 정책과 붕당에 대한 탕평책이 설립되어 이시기는 63년간으로 서원건설의 정체현상을 보이고 있다

도정서원(1723) 인산서원(1725) 문산서원(1735)


․제 5 기(1777-1870)

영조 이후 정조가 즉위한 1777년 부터 대원군에 의해 서원이 대규모로 철폐되기 이전까지 시기이다. 이 시기는 94년간으로 정치적으로는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 받았으나 그 후의 왕들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외척에 의해 세도 정치가 실시되었다.이에 따라 사회가 혼란하여 민란이 발생하였고 거기에다 서양 서력이 몰려옴에 따라 조선사회는 불안이 고조되는 등 봉건적 사회 질서가 무너지고 새 기운이 싹트는 변혁기라고 할수 있다.이시기에 서원의 설립이 줄어든 것은 설립의 통제 정책때문이라기 보다는 세도 정치로 서원이 더이상 정치적 기능을 상실하여 중앙 정치 세력으로부터 관심이 멀어진 결과로 보고있다.

고산서원(1839) 송천서원(1823)


․제 6 기 (1871- 현재)

이시기는 1871년 대원군에 의해 서원이 대규모로 철폐된 이후 현재까지로 서원의 건립보다는폐쇠된 서원의 복원이 활발하게 이루어 지고 있는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