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에 대하여


20000349  송종대


  고려는 대몽항쟁 이후 몽고 간섭을 1세기정도 받는 동안 국가 기반이 위태로울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였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이 권문 세족과 사찰이 국가의 경제 기반인 토지의 대부분을 점거한 것이였는데. 이로 인해 국가재정이 바닥나고 일반 농민은 극도로 궁핍한 상태에 빠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동안 고려의 통치이념이였던 불교는 그 영향력이 약해져만 갔는데, 사원경제의 발달로 불교계 자체가 사회경제적 모순을 일으켜 불교계안에서도 신앙결사 같은 움직임이 일긴 했지만 이미 이데올로기로서 불교는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이념이 등장하는 것은 필연적이였는데 이때 등장한 것이 13세기 말엽 고려충렬왕때 전개된 성리학이였다. 이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여 등장한 것이 신진사대부로서 이들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폐단을 초래한 주된 요인이 불교에 있다고 여기고 척불론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학인 성리학은 고려말기에 있어서 불교와 유교의 전환이라는 커다란 변동을 가져왔으며 유교를 국시로 하는 조선조를 성립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성리학은 우주 만물의 이치와 인간 사회의 문제를 이기론을 통하여 하나의 일관된 원리로 파악하는 새로운 유학이다 불교와 도교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기론을 중심으로 한 형이상학적 논리구조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또한 종래의 한당 유학이 지는 훈고학과 사장학의 틀을 벗어난 새로운 유학이라는 점에서 성라학의 사상 체계는 상당히 독특하며 그당시로선 획기적인 학문이였던 것이다.

  성리학의 기본이론인 이기론은 우주 만물의 생성과 변화가 모두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이(理)와 현상적이고 가변적인 기(氣)이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태극이나 도(道)로 표헌되며 기에 질서를 부여하는 통제자로서 물성을 기는 음양을 대체하면서 이의 주재를 받아야 할 존재이며 끊임없이 생멸하면서 물형을 결정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이기론을 바탕으로 인간의 심성을 설명한 인성론은 핵심인 성즉리(性卽理)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심성을 수양하여 도덕적 의무감인 천리를 보존하고 인간의 욕망인 인욕을 없애는 것이 인간이 맞닥뜨린 최대의 과제라고 보았고 천리의 구체적인 내용이 바로 삼강과 오륜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심성을 유지하는 실천방법이 거경궁리(居敬窮理)인데 거경은 자신이 도덕적 실천의 주체자임을 자각하는 방법이며 궁리는 객관적인 탐구를 통해 보편적 진리인 이의 의미를 체득하는 것이다.

  성리학이 추구하는 이러한 이상을 현실사회에 구현하는 방법이 사회윤리, 사회사상으로서의 예(禮)이며 그 이름에 따라 상하, 존비, 귀천이 나누어지는 명분론과 이는 하나로 평등하나 각각 나뉘어 차별성을 지닌다는 이일분수론에 의해 뒷받침된다. 명분론은 이름에 따라 상하관계에 나타나는 차별을 당연하게 간주하며 이일분수론은 모든 구성원은 각각의 직분을 가지고 유기적 관계속에서 전체사회를 구성하며 이러한 차별은 지주, 전호, 군신 부자, 부부관계등에 모두 적용된다는 세계관인 것이다.

  이러한 논리구조를 가진 성리학은 조선이 건국되면서 새로운 통치이념으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왕조의 성립과 더불어 각종 법전이 제정되고 특히 세종시애에 훈민정음의 창제를 비롯한 학술문화의 창달은 또한 그 근본원리에 있어서 유학, 즉 성리학을 기저로 하는 것으로서 민족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였다. 또한 유교사상에 입각한 시정으로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고 성종대에 이르러서는 문물제도가 확립되고 유교사상이 서민에게까지 보급됨으로서 조선왕조 5백년의 기반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조선에 완전한 성리학적 질서가 확립되기란 쉽지않았었는데 바로 성종이후 사림과 훈구의 대립에서 비롯된 사화로 인하여 지연되었던 것이다. 본래 고려말에 등장한 신진사대부들은 정몽주중심의 온건개량파와 정도전중심의 급진개혁파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사림은 전자, 훈구는 후자와 맥을 같이한다. 훈구는 이성계등의 신흥무장세력과 결탁하여 왕조개창에 성공하고 누대에 걸친 특권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반면 사림은 왕조개창에 소극적이던 정몽주계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들은 성리학적 명분이 취약했던 세조의 왕위찬탈 및 국방강화책등으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기득권을 가진 훈구를 견제하며 학문진흥정책의 실시등을 추진하면서 그 존재가치가 인정되어 성종때 다수의 사림이 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사림은 이상정치를 추구하는 성리학자들로서 주로 삼사에 진출하였는데 삼사는 왕과 문무백관의 잘잘못에 대해 간쟁과 논박을 하고 경연을 담당하는 기관으로서 이는 당시 기득권층이였던 훈구와의 갈등을 불러 일으켜 오게 한 배경이 되었다. 이들은 연산군 4년부터 명종즉위년(1545)에 걸쳐 벌어진 훈구와 사림간의 정치적 충돌이 바로 사화였다. 사림은 계속해서 화를 당하였지만 16세기 후반에는 주도적인 정치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렇게 될 수있었던 기반은 향촌사회에서 자신의 세력을 재기할수 있었던 조직체인 서원과 향약을 통한 향촌자치제의 실현때문이었다. 특히 서원은 양반자제들을 지식인으로 키우는데 이바지 하였고 정치여론을 집단화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결국 사림은 16세기이후 정치주도세력으로 자리잡을수 있었는데 아울러 성리학에 대한 연구수준이 높아지면서 여기에대한 이해의 차이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인해 16세기 중반부터 서원을 중심으로하는 학파가 형성이 되었는데 여러학파가 있었지만 크게 퇴계이황을 종장으로한 영남학파와 율곡이이를 종장으로 한 기호학파로 나누어진다.

  퇴계이황의 사상은 주자성리학에 대한 이해와 심화와 훈척과 투쟁하면서 생긴 구체제에 대한 재야 사림으로서의 비판의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이황사상의 기본특성인 ‘이귀기천’ 이의 자발성, 이기이원론적 사고에 의한 도덕성과 수신의 강조는 훈척을 공격하는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퇴계는 이의 자발성과 독자성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기묘사화이후 무너진 성리학적 공도를 확고히 하여야만 유교적 이상정치를 실현할수 있다는 당대적 과제를 이론적으로 실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퇴계는  도덕 수양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심성론 정립에 심혈을 기울였다.

  율곡이이의 사상은 정권을 담당하고 현실을 주도하면서 개혁해가는 사림의 입장에서 이루어졌다. 이이의 사상은 퇴계보다 상대적으로 기의 기능을 중시하였으며 구체적으로도 여러 개혁책을 제시하였는데 같은 성학을 주장하면서도 퇴계는 군주자신이 성학을 따르자고 제시한 반면 그는 신하가 군주에게 성학을 가르쳐 기질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하여 신하의 적극적인 역할을 상대적으로 강조하였고 이(理)는 사물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관념적 존재나 원리이고 기는 구체적 사물로 드러나는 질료적 존재로 규정하였다.

  이이는 본연지성과 사단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연지성은 기질지성 가운데 이만을 가리키는 개념일 뿐이고 사단은 칠정가운데 순수하게 선한 감정만을 지칭하는 것이라 하여 본연지성을 기질지성에 포함시키고 칠정은 사단에 포함시켰다. 이러한 율곡의 이기설과 심성론은 퇴계의 성리설을 논리적으로 보완한 것으로 이후 율곡학파의 학자들에게 전승되어 퇴계의 성리학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의 양대산맥을 이룬다.

  이와 같이 주자중심의 성리학적 세계관은 조선사회에 완전히 뿌리내리고 성리학은 지배사상의 지위를 확고히 차지하였다. 하지만 주자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불교, 양명학, 도교등의 사상을 이단으로 금지 탄압하였다. 즉 사변적인 요소가 강화되고 이단에 대한 배척이 심해지면서 교조화되고 탄력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성리학은 조선이 성립될 때부터 지도 이념이였고 이후 기득권층인 사대부들로 인하여 지속적으로 발전해왔으며 조선초기 국가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명분에 너무 치우친 나머지 실리를 추구하지못하는 경향을 보임으로서 국가발전에 오히려 저해하는 요인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것은 중국의 명,청 교체기때 한창 발전하고 있는 청을 배척하고 성리학적인 명분론에 의거하여 멸망해가는 명에게만 집착한 결과 청의 침략을 받아서 왜란이후 또다시 국토가 유린당하는 사태에 이르게 한것만 봐도 알수 있겠다.  그리고 이후에도 중국에서조차 사라져가는 성리학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다른 모든 학문들을 이단으로 규정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조선의 근대화를 더디게 만든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