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제5주제: 해방전 김일성의 행적

  한국 현대사에서 김일성의 기록과 평가만큼 남북한 사이에서 "천당과 지옥을 넘나들은
인물"은 거의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된 근본 원인은 평양의 독재자 김일성이
자신의 본명을 감추고 남의 이름을 도용하면서 북한 통치를 시작했고, 북한의 관영매체,
어용학자들이 본격적으로 그의 업적을 과대포장하여 수십년간 해방전의 독립운동사와 북
한의 현대사를 1인 독재의 도구로 악용해 왔기 때문이다. 해방전 김일성의 진면목은 한
국의 북한전문학자들(김창순, 이영명)과 해외의 학자들(이정식, 허동찬, 서대숙, 스칼리피
노)에 의해 많이 연구되었고, 북으로부터 망명한 고위층(박갑동)에 의해 김일성의 정체가
하나 둘 벗겨지기 시작했다.
  필자는 (1) 우선 해방이전의 김일성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공산주의에 빠지는
과정을 살펴보고, (2) 김일성의 眞僞에 관한 그동안 국내외의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소개
하고, (3) 결론적으로 해방전의 김일성의 활약상과 한계를 서술하여 필자 나름대로의 잠
정적 결론을 내려 보고져한다.
  평양에 등장한 김일성은 과연 누구인가? 그의 생애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자료를 조
심스럽게 다루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특히 북한의 관영통신이 김일성의 행적을 너
무나 심하게 왜곡, 조작해 놓았기 때문이다. 우선 김학준교수의 『북한50년사』(동아출,
1995)를 중심으로 김일성의 어린 시절의 행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평양 근교인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 곧 오늘날의 만
경대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이 때는 이미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2년이 넘은 해였다. 아버
지는 1894년에 태어난 전주 김씨 김형직(金亨稷)으로, 먼 조상은 전라도에서 살았다. 김
형직은 18세에 첫 아이 김일성을 본 것이다. 북한당국은 지난 수십년 동안 김일성의 증
조부가 조선조 말기의 대원군 시절에 발생한 미국 상선 셔어먼호 사건에서 반미운동을
주도했으며, 김일성의 조부는 항일운동의 선봉이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사료
에서 증명할 수 없는 근거가 없는 조작이다. 그러나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 독립운동
에 약간 참여했던 것은 대체로 인정되고 있다.
  김일성의 어머니는 강반석(康盤石)이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보다 두살 위로 1892년
에 태어났다. 김형직은 1909년에 장가를 들어서 첫 아들로 뒷날 일성이라 불리우는 성주
(북한 관영 전기작가들은 成柱라고 주장하고, 국내의 북한 전문가들은 聖柱였다고 주장
함)를 낳았고, 둘째 아들로 철주(哲柱)를 낳았는데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 마지막으로
셋째 아들 영주(英柱)를 낳았는데, 이 셋째 아들이 오늘날 북한 부주석들 중에 한사람인
김영주 그 사람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김일성의 친가와 외가가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는 점이
다. 김일성의 출신지인 평안도는 조선 후기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곳이고, 그 지
방의 기독교도들은 그 시대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모두 지식인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김일성의 외가는 친가보다 더 독실한 기독교인들로 김일성의 외할아버지 강돈욱은 만경
대 일대에서 신임을 받던 교육자이자 장로교 교회의 장로로서 열심히 성경을 가르쳤다.
1992년 김일성은 회고하기를, 어머니가 자신을 교회로 데리고 다녔다고 했다. 김일성이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철저한 무신론자가 되었다는 점은 마치 칼 마르크스가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무신론자가 된 것을 연상하게 한다. 김일성은 무신론자
가 되었지만, 기독교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아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뒷날 북한에 세워
놓은 우상 숭배적 유일 체제는 외형적으로는 기독교의 모습을 닮고 있다.
  세계적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교수가 지적한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유사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카톨릭 교회와 공산주의는 모두 철저하게 유일신을 내세운다. 유일신 이외에
어떤 신도 섬겨서는 안된다. 만약 이단으로 단죄되면, 카톨릭에서는 파문을 선고받고 심
지어 화형에 처해지듯, 공산주의에서도 파문을 선고받고 공산당에서 숙청되며, 심지어 사
형된다. 카톨릭 교회나 공산주의는 정통적 도그마에 누구도 의문을 가질 수 없다. 북한의
경우, 김일성이 유일신이다. 수령의 경전이 주체 사상이다. 이 유일 사상에 의문을 품으
면 누구든지 정죄된다.
  둘째로, 카톨릭 교회는 일사분란한 상명하복의 체제를 가지듯이, 공산주의도 일사분란
한 상명하복의 체제로서 카톨릭 교회의 사제단에 비유된다.
  셋째로, 카톨릭 교회는 교황의 무오류성을 내세운다. 교황은 절대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공산주의도 교조의 무오류성을 내세우는데, 북한에서는 수령 무오류론으로 나타
나고 있다.
  넷째로, 카톨릭 교회는 미래의 천년 왕국을 내세우면서, 현재의 고통을 참으라고 설득
한다. 공산주의도 역시 천년 왕국을 제시하면서 미래의 천년 왕국으로 가기 위한 도정이
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역시 인민들에게 잘 참고 기다리라고 한다. 북한의 경우, 김일
성이 제시한 미래의 천년 왕국은 북한이 주도한 통일된 조선이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참으라고 인민들에게 강요해 왔다.
  이렇게 비교해 볼 때, 김일성이 이룩한 神政體制는 그가 어려서 체득한 기독교적 분위
기의 왜곡 현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는 기독교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인물이
다. 기독교, 카톨릭의 본질은 사랑이다. 예수는 타인, 이웃, 민족, 인류에 대한 사랑을 가
르쳤다. 이 사랑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덕목이 용서와 화해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본질은 증오이다. 증오의 논리 위에 서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 집권자들은 계급의 적이라
는 이름하에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귀한 인명이 희생되는 전쟁도 사양하지 않은 것이다.
  이제 다시 김일성의 어린 시절로 되돌아 가보자. 김형직은 김일성이 일곱 살이 되던
1919년에 만주로 이사해 주로 한인 동포를 상대로 의사 노릇을 했다. 1926년 김형직은
김일성의 나이 열네살 때 갑자기 사망했다. 그동안 김일성은 만주에서 「정의부」라는
독립 운동 단체가 운영하는 화성의숙에서 수학했다. 화성의숙의 숙장은 천도교 신자이면
서 민족주의자인 최동오였다. 최동오는 뒷날 상해임시정부의 간부가 되었는데, 그의 아들
이 대한민국에서 육군 소장과 외무부 장관 및 서독 대사를 역임하고 나중에는 월북한 최
덕신이다.
  김일성은 보통학교를 마치고 중국인 사립학교인 길림(吉林)성 길림(吉林)의 위원중학교
를 다닐수 있었다. 김일성이 이 학교에서 마르크시즘과 레니니즘에 접했으며, 공산주의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곧 공산주의 활동에 참여하여 중학교 2학년 때 퇴학을 당했고,
길림에 있는 감옥에 얼마 안되는 기간이지만 투옥되기도 했다. 이런 배경을 놓고 볼 때,
김일성은 어린 시절을 만주에서 지냈기 때문에 중국의 생활  풍습과 중국어에 상당히 익
숙해졌다는 점이다.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의 한 산하 조직에서 공산주의자로서 활동
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일성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기는 그가 스무 살이던 1932년에 일어났다. 그 해는 그의
어머니가 죽고 일본 제국주의가 괴뢰국 「만주국」을 세운 해였다. 그 해에 김일성은 남
만주에서 조선인들에 의해 조직된 작은 규모의 항일 유격대에 가담하였다. 이 유격대는
같은 해에 중국인 양징위(楊靖宇)가 지휘하는 「東北抗日聯軍」의 산하로 통합했다. 이
부대는 몇 해 안에 규모도 커지고 활동 영역도 넓어지게 되었다.
  김일성이 이 유격대에 가담하게 된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북한의 관영 전기 작가들
과 대한민국의 학자들간에는 커다란 의견의 차이가 생긴다. 국내에서는 成柱라는 이름은
거짓이고 김일성의 이름을 고의적으로 도용하기 위해서 그럴듯하게 위장했다는 것이다.
  북한연구소 김창순 소장은 "한국독립운동사에 있어서의 金日成,"(『解放前後史의 爭點
과 평가1』, 형설, 1990)이란 글에서 김일성은 실존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김소장은 김
일성에 대한 구체적 사료가 없으므로 김일성이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
은 김홍일, 이범석, 오광선 장군들도 김일성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고, 일제의 기록에도
김일성에 관한 문서가 없다는 것이다. 김소장은 홍범도 장군의 독립투쟁기록이 좀더 밝
혀져야한다고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결국 口傳上에 내려오는 김일성 장군은 中共黨 滿洲
省 軍事委員會書記 金楊寧 장군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보천보 전투에서의 김일성
을 평양의 김일성으로 인정하고 있다.
  김소장의 견해에 대해 반박한 이영명교수(성균관대 정치학)는 김일성에 대한 소문이
나타난 것은 30년 후반이 아니고 이미 20년대에도 김일성의 활동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
해져 오고 있다는 점에 분석의 초점을 맞추었다. 이교수는 김일성이 구전상으로 내려오
기를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이라는 말과 또 그가 말을 타고 東에 번쩍 西에 번쩍 날아
다닌다는 말이 꼭 붙어 다녔다는 점을 주목했다. 이교수에 의하면, 金擎天(본명 金光瑞)
이 바로 김일성으로서 일본 육사의 기병과 출신으로 20년대 전반기에 가장 출중하고도
세력이 컷던 부대라는 것이다. 이교수는 김소장이 주장한 김양녕이 김일성이라는 해석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다만 평양의 김일성이 南滿에서 金楊寧이 이룩한 중요한 업적
을 도용했다는 점에 동의했다. 즉 북한이 주장하는 김일성의 '혁명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작의 하나가 1932년 4월 25일의 유격대 창건이란 것이다. 이는 김양녕의 盤石工農義勇
軍 조직을 살짝 변형, 도용한 것이라는 김소장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분명한 점은 1936년 이래 보도된 김일성이란 구체적으로는 東北人民革命軍이 1936년초
에 「東北抗日聯軍」이 조직되고 여름부터 路軍制度가 실시됨으로서 東北抗日聯軍 第1路
軍 第2軍 第6師로 된 第6師長 김일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김일성의 대표적 업적이
1937년 6월 4일 普天堡 습격인 것이다.
  이교수는 第6師長 김일성이 1937년 11월 전사했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의 사망에 관해
서는 과거 남로당원으로 활약하였으나, 망명한 박갑동의 글, "평양의 '김일성'이 '보천보
습격'의 주인공일까,"(『해방전후사의 쟁점과 평가 1』)에서 이교수의 지적을 사실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교수의 주장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또 하나의 김일성이란 同名異人
이 그 부대의 지휘자가 되어 1939년초에 東北抗日聯軍 第1路軍 第2方面軍長으로 되었다"
고 주장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교수는 "북한의 김일성은 바로 이 김일성 부대(第6師
및 第2方面軍)의 一員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평양의 김일성은 바로 이 김일성의 직
계부하였다는 추론이 성립하게 된다. 이교수는 이 김일성 부대가 자행한 보천보 습격은
철저히 물자조달을 위한 약탈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김소장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김일성은 몇몇 전투에 참가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일제는 東北
抗日聯軍의 뿌리를 뽑아버릴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몰론 회유작전도 병행했
다. 일제에 투항하면 돈을 주기도 하고 처벌을 면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관동군의
2중작전은 효력을 발휘하여 투항자가 속속 출현했다. 1940년 2월 東北抗日聯軍 第1路軍
사령관 양징위도 마침내 관동군에 쫓기다 살해되었다. 관동군은 그의 배를 갈라 보았다.
그의 뱃속에는 나무 껍질이나 풀 따위가 남아 있을 뿐 곡물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극악
무도한 관동군이라도 양징위에 대하여 경의를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불교의
스님을 모셔다가 극락왕생을 비는 염불도 올리게 하고 묘를 만들어 주었으며, 좋은 비석
도 세워 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만주에서의 동북항일연군의 유격대원들이 얼마나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었나를 극명하게 증명한 사건이었다. 일본군에 끊임없이 쫓기면서 전투를
해야하는 상황에서 정상적인 보급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동북항일연군」도 살
아남기 위해서 일종에 共匪的 성격을 띄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김일성도 쫓겨다녔다. 그는 여섯명의 대원을 이끌고 두만강변을 따라 1941년 3월에 극
동 러시아로 탈출했다. 김일성은 곧 블라디보스톡 근처의 「오케얀스카야 야전학교」에
배치되어 군사훈련을 받았다. 최용건, 김책, 안길, 김광협, 서철, 최춘국 동지들도 이 지역
으로 살아서 나타났다. 일본과의 전쟁의 개연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판단한 소련 극동군
은 하바로프스키 근처의 비밀 기지인 브야츠크에 「88특별여단」을 창설했다. 이 부대는
「東北抗日聯軍」에서 활동중인 유격대원들과 조선인 유격대원들로 구성됐는데, 총인원
은 조선인 60여명과 중국인 1백여명에 소련이 40여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산하 4개 대대
가운데 김일성이 대위로서 제1대대장을 맡았으며, 강건이 제4대대장을, 김책이 제3대대
정치위원을 맡았다.
  김일성은 이 무렵 자신의 유격대원이었고, 자신과 함께 극동 러시아로 탈출해 온 김정
숙(金貞淑)과 결혼했다. 김정숙은 1942년 2월 16일에 브야츠크 야영에서 첫아들을 낳았는
데 그가 바로 정일, 소련 이름으로는 유라였다. 김정숙은 1944년에 둘째 아들을 낳았다.
소련 이름으로는 슈라였는데, 1947년에 평양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익사했다.
  극동 러시아의 빨치산 생활 가운데 중요한 전기는 1945년 7월에 이루어졌다. 「88특별
여단」에 속한 조선인 전사들이 중국인 전사들과 소련인 전사들로부터 분리된 「조선공
작단」을 결성했는데, 김일성이 단장으로 뽑힌 것이다. 그들은 일본군과의 전투를 계획하
던 가운데 한달 뒤인 8월 15일 일제의 패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
  김일성의 해방이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직도 규명되지 않은 의문점이 많이 있다. 우
선적으로 규명되어야 할 점은 이영명 교수가 주장했듯이, 평양의 김일성은 第1路軍 第2
方面軍長 김일성이 지휘하는 부대의 일원었는가?에 대한 의문점이 풀려야 한다. 필자의
능력으로는 이 문제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제공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직도 러시아
정부와 중국 공산당이 북한의 김정일 정권과의 미묘한 외교적 관계 때문에 비밀문서의
공개를 꺼리고 있고, 또한 북한의 김정일 정권이 신성불가침한 수령 김일성의 생애에 관
해서는 서방측에게 공개하기를 전면으로 거부하고 있으므로, 불행하게도 김일성 연구에
서 확실한 결론은 북한 공산정권의 붕괴이후를 기대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필자는 김
일성에 관해 잠정적으로 다음의 두가지 결론을 내리고져 한다.
  첫째로, 평양의 김일성은 자신의 이름을 변조하면서 까지 김일성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서 그 이름이 가지는 권위를 도용하려 했으므로, 독립투사 김일성은 실제 인물로 존재했
다고 보아야한다는 점이다.
  둘째로, 평양의 김일성은 상관인 김일성의 사망을 목전에서 확인했으므로 죽은 자가
다시 평양에 나타날 수 없다는 점을 확신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평양의 김일성이가 도
용한 김일성은 해방전에 이미 사망했다는 잠정적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런 결론을 재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는 지난번 9월호에서 서술했듯이, 처음으
로 등장한 김일성의 모습과 그를 본 평양시민들의 반응에서 잘 엿볼 수 있다. 1945년 10
월 14일 평양시민들은 "민족의 영웅" 김일성 장군의 환영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공설운동
장에 나갔다. 33세의 젊은 김일성이 연단에 오르자 "저자는 가짜다"라는 어느 평양시민
의 외침뒤에 그 커다란 소란이 발생하자, 당황한 소련군 경비병들이 주변을 진정시키면
서 이 소란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이렇게 평양에 입성한 김일성은 처음부터 가짜라는 의
혹을 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양의 김일성이 중국 공산당 산하의 「東北抗日
聯軍」의 일원으로 일본군에 대항한 유격대 활동을 했다는 점을 국내외의 학자들은 대체
로 인정하고 있다. 다만 이 부대의 활동상은 양민에 대한 약탈, 방화, 살인도 저지르면서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장 추악한 행위, 즉 공비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현재적 시점에서 김일성의 해방이전의 행적이 주는 교훈과 의미는 무엇인가? 이점이
평양의 김일성이 가짜냐? 진짜냐? 하는 한국사회의 수십년에 걸친 논쟁보다 더 역사적
의미가 있는 점이다. 해방전 김일성은 만주에서 컸고, 중국 공산당이 조직한 「동북항일
연군」의 영향하에 공산주의자로 양육된 인물이다. 김일성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의 主流
에 속하는 핵심적인 인물이 아니었으나, 어쨌든 해방전 항일운동의 조그만 역할을 했다
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한국사가 편견과 굴절없이 객관적으로 진일보하기 위해서
김일성에 대한 보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연구작업이 필요한 시점에 있다.
 

선택 97년 10월호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