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북경북지역개관

  경상북도

 慶尙北道 우리 나라의 동남부지방의 道로서 북쪽은 강원도와 충청북도, 서쪽은 충청북도와 전라북도에 접해있으며, 동쪽은 동해에 면해 있다. 동쪽은 태백산맥, 북서쪽은 소백산맥이 자연적인 경계를 이루어, 전체적으로 하나의 큰 분지 모양을 이룬다. 전반적으로 농업인구의 비율이 높은 편이다. 김천-구미-대구-영천-포항을 잇는 지역은 도시화․공업화가 진전되어 인구가 집중분포하며, 특히 포항은 철강을 비롯한 한국 중공업의 핵심지이다. 남북간의 거리가 약175㎞ 동서간의 거리가 약162㎞이다. 총면적은 1만9,447㎢로 남한의 도중에서 가장 넓다. 경상북도가 삼한시대에는 진한의 땅이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757년 (경덕왕16)에 나눈 9주중에서 상주(尙州)와 양주(良州)가 경상북도에 속했다. 그후 고려 태조 때에 동남도로 되었다가 995년 (성종14)에 영남도․영등도․산남도로 나뉘었으며,  1106년(예종1)에 다시 경상진주도로 합쳐진 후 몇 차례 개칭을 거쳐 1314년(충숙왕1)에 경주와 상주의 지명을 합친 '경상도'라는 명칭이 확정되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1407년(태종7)에 군사상의 이유로 낙동강을 경계로 좌도와 우도로 나눔에 따라 좌도의 대부분과 우도의 일부를 포함하게 되었고, 1594년(선조26)에 이를 다시 합쳐 성주 팔거현(八 縣:칠곡)에 감영을 두었다. 가명은 그후 달성(達成:대구)과 안동으로 옮겨졌다가 1601년(선조34)에 오늘날의 대구에 자리잡게 되었다. 1895년(고종32)에 전국을 23부로 개편할 당시 경상도에서는 대구․ 안동․ 진주․ 동래의 4관철부를 두었는데, 오늘날의 경상북도는 대구부와 안동부 이외의 동래부의 일부를 포함하였고, 1896년(고종33)에 전국을 13도로 개편함에 따라 경상북도를 떼어 대구에 관찰사를 두고 41개 군을 관할하게 하였다. 그리고 1914년 군면 폐합시에 대구는 1부와 22군으로 개편되었고, 1931년에 읍면제가 실시됨에 따라 같은 해에 김천․ 포항․ 경주․ 상주․ 안동, 1937년에는 영천․ 예천․ 감포, 1940년에는 대구 이외에 포항․ 김천이 시로, 안강․ 왜관․ 청도가 읍으로 승격되는 동시에 포항군이 영일군으로, 김천군이 금릉군으로 독립하였다. 1955년에는 경주가 시로 승격되는 동시에 경주군이 월성군으로 개칭되었고, 1963년에는 강원도 울진군이 편입되는 한편 안동이 시로 승격되었다. 1978년에는 구미시가 신설되고, 1980년에는 영주가 시로 승격되는 동시에 영주군이 영풍군으로 개칭되었다. 경상북도에 문화재는 국보 44점, 보물 232점, 사적 86개소, 천연기념물 42종, 중요무형문화재 7점, 중요민속자료 57점등의 국가지정문화재와 유형문화재 232점, 무형문화재 15점, 기념물 71점, 민속자료 87점등의 도지정문화재 및 문화재자료 229점이 있다. 문화재 총수는 전국의 1/4을 차지하고 있는데, 신라문화의 중심지인 경주지방은 국보․ 보물․ 사적이 유교문화의 중심지로서 역사와 전통이 오랜 안동지방은 유형문화재와 민속자료가, 울릉도는 천연기념물이 많다.



☆ 충청북도

 우리 나라의 중앙 남부에 위치하는 유일한 내륙도이다. 이 지역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선삼한시대에 마한에 속하였던 지역이다. 그래서 충청북도 지역과 관련있는 진국과 마한을 살펴본다. 대동강 유역에 위만조선이 있을 때에 진국이 있었다는 것이 진국에 대한 역사의  첫 기록이다. 그 때의 진국은 중국에서 직접 금속문화를 들여오려 했으나 위만 조선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그러나 진국 사람들은 금속문화의 혜택을 많이 받고 들여온 이민과 유민 때문에 사회변화를 겪었다. 이 유민과 이민들이 가진 정치방법과 금속문화의 지식으로 토착사회와 결합하여 그 세력을 키워 나가게 되었다. 그래서 진국은 삼한으로 갈라졌고 충청북도 지방은 그 중에 마한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충청북도 지방은 점차로  백제의 땅에 들기 시작했다. 고구려가 중국 세력과 싸우는 과정에서 부족 연맹체를 형성할 즈음에 마한 54국의 하나로 진 임금이 다스리던 나라였던 백제가 위나라의 진한 침략과 같은 바깥의 압력과 자극으로 여러 부락을 결속하여 집권하는 정치형태를 가진 고대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백제는 고이왕 때부터 더욱 더 발전하여 국토를 지금의 경기도 광주 땅인 마한까지 점령하였다. 백제가 근초고왕 때에 이르러 국력이 더 강해져 북쪽의 고구려로 쳐들어가 고국원왕을 죽이고 남쪽의 마한을 멸망시켜 그 온 땅을 차지하자 충청북도 남부도 백제땅이 되었다. 한편으로 사로라고 하는 작은 부족국가였던 신라가 주위의 작은 나라를 정복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3세기쯤에는 옛 진한의 전체 땅과 변한의 일부 땅에까지 영토를 넓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반도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가 솥발과 같이 벌려서고 나라마다 정복전쟁을 활발히 벌임으로써 충청북도 지방은 세 나라의 각축장이 되었다.  고구려는 장수왕 때에 백제를 공략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더 남쪽으로 내려와 지금의  죽령과 조령으로까지 영토를 확대하였다. 고구려의 남진에 따라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금강 유역으로 수도를 옮기고 고구려의 남진에 불안해하는 신라와 혼인 동맹을 맺었다. 무령왕과 성왕 때에 이르러 국력을 회복한 백제는 신라와 우호를 두터이 하면서 고구려에 빼앗겼던   옛 땅을 회복하기에 힘을 기울였다. 이에 앞서 신라는 지증왕과 법흥왕 때에 이르러 급속히 발전하여 가락국을 멸망시키고 백제와 연결하여 고구려가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막았다. 신라는 국력이 법흥왕과 진흥왕 때에 이르러서 더 탄탄해져 나라 밖으로 팽창을 단행하였다. 단양 적성비가 말해 주듯이, 그 즈음의 신라에는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려는 북진정책이 생겨 고구려가 백제와의 심각한 대립 속에서 미묘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백제 성왕 29년인 551년에 고구려가 돌궐의 침입으로 국난을 겪는 동안에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이 한강 유역으로 나아가 백제는 남평양과 같은 한강 하류의 여섯 개 군을 빼앗고 신라는 죽령 북쪽과 지금의 철령인 고현 남쪽의 열 개 군의 땅을 빼앗았다. 이 때문에 백제는 잃은 땅을 되찾는 일에 실패하고 말았다.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더 악화되고 삼국의 분쟁은 더 치열해졌다. 고구려는 신라를 쳐서 청주까지 회복하였고 백제의 부왕은 8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모산성을 공격하고 다시 독산성을 공격하다가 크게 졌다. 이와 같이 세 나라가 서로 세력을 다투는 틈바구니에서 충청북도 지방은 고구려의 세력이 강할 때는 고구려의 영토가 되고 신라의 세력이 강할 때는 신라의 영토가 되는 운명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 충청도는 세 나라의 문화가 교류하는 지점으로도 중요했다. 고려시대 고종 4년인 1217년에 거란이 쳐들어왔는데 정군 병마사 최원새와 정군 병마사 김취려가 거란군을 제천까지 뒤따라가 박달재 싸움에서 크게 이김으로써 한반도에서 그들을 쫓아내었다. 그 뒤 고종 18년인 1231년부터 스물 몇 해 동안 6차례의 몽고 침입에 관리나 귀족이 도망쳤음에도 불구하고 지광수가 이끄는 노예군이 끝까지 성을 지키며 맞아 싸웠다. 고려가 몇 십년 동안 전란에 시달리며 사회, 경제 사정이 피폐해져 병력이 약해지고 국방이 소홀하게 되자 이번에는 왜적의 노략질이 극심해져 해안지대는 말할 것도 없고 삼남지방과  일부 중부지방까지 노략질을 당했다. 공민왕 때에 와서는 더욱 심해져 조선왕조 초기에 이르기까지 왜구가 충청도를 침입한 것만도 마흔번이 넘었다. 조선시대에 행정구역은 팔도로 갈라졌다. 충청도는 그 하나로서 지금의 충청남도와 충청북도를 합친 지역이었다. 조선의 역사 속에서 충청북도와 관련된 중요한 사건과 이름을 떨친 사람을 차례대로 보면 1444년에 눈병이 난 세종대왕이 충청북도 초정리 약수터까지 행차한 기록이 있고 세조도 난치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속리산에 왔었다는 기록이 실록에 보인다. 명조 4년이니 1549년 정언의의 벽서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충청도는 청홍도로 이름이 바뀌기도 했다. 왜국이 선조 25년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키자 신입이 충주 달청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우기로 하고 탄금대로  군사를 이끌고 나갔으나 패하였다.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유명한 의병장으로 박춘무, 조현, 영규대사, 장지현 등이 있다. 이밖에 목사였던 김홍민과 이산겸, 조덕공, 이달과 같은 선비들이 의병을 모아 왜군을 토벌하였고 충의위 조웅은 충주에서 의사 500명을 모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정조 9년인 1785년에 역관 김범우는 서울 명례동(명동)의 자기집에서 카톨릭 신자를 모아 조선 교회를 창립하고 미사를 보다가 관원에게 들켰다. 같이 미사를 보던 이벽,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같은 남인 학자들은 양반출신이라 하여 풀려났으니 중인 신분인 김범우는 귀양가다가 고문의 상처 때문에 죽었다. 따라서 이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첫 카톨릭 순자가 되었다. 순조 원년 1801년의 신유사옥 때에 '황사영의 백서'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위기에 닥친 조선교회를 구하려고 글을 써서 북경주교에게 전하려고 하다가 들켜 처형되었다. 19세기 후반의 불안한 사회현실 속에서 동학이 교세를 확장시켜 나갔다. 그들은 곳곳에서 역적으로 몰려 죽은 교주의 억울한 죄목을 벗겨주고 동학 교도를 탄압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2대 교주인 최시형은 적국에 통문을 보내어 각 지방교도는 1893년 3월 10일까지 보은군 장내에 모이라고 명령하였다. 그렇게 해서 큰 부대를 만들어서 농성할 태세를 갖추었다. 군대가 동원됨으로써 해산은 하였으니 폭력을 제거하고 민생을 구하며 일본과 서양을 물리칠 의병을 일으키자는 대의를 내세우고 농성하던 보은 집회는 종교조직으로 정치활동을 펴 나가게 되었음을 보여 주었다. 임금의 외척과 탐관오리의 횡포로 백성의 원성이 높아지고 있을 때에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전라도 고부에서 일어났고 손천민이 청주에서 일어났으며, 이상옥이 보은군에서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민란의 책임을 모두 동학교도에서 돌리니 고종 31년 3월에 전봉준은 '보국안민'을 표방하고 네가지 강령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이 민란은 농민혁명의 성격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동학군을 진압하려고 청나라 원병을 끌어들였고 일본군도 그것을 구실 삼아 들어옴으로써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우리 나라는 1876년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음으로써 문호가 개방되고 조선의 근대화 운동이 전개되었고 일본이 한반도에서 청나라와 러시아의 세력을 밀어내고 침략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곳곳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충청북도에서는 을미사변이 나자마자 보은군의 무석봉을 선두로 하여 충주와 제천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가장 큰 것은 제천을 중심으로 한 유인석의 부대였다. 이 밖에도 여러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났지만 마침내 1910년 주군을 잃은 우리 민족은 1919년 3월 1일 다시 일어났다. 충청북도에서는 3월 19일에 괴산군에서 맨 처음으로 삼일운동이 일어났다


▣참고자료


 http://nongae.gsnu.ac.kr/~his/ds00-1.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