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 도요지

 

▷ 강진 대구면 도요지(康津大口面陶窯址)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일대에 있는, 고려 시대의 청자 가마터. 사적 제68호이다. 대구면의 용운리․용문리․계율리․사당리․수동리 일대와 칠량면 삼흥리에 흩어져 있다. 이 곳은 양질의 고령토가 매장되어 있어, 일찍이 고려자기의 원료로 쓰였다. 대구면 일대의 요지는 특히 용운천을 중심으로 좌우에 집중적으로 남아 있다. 현재 용운리에는 65개소의 요지가 남아 있다. 용운 저수지를 설치하면서 3~5개의 가마가 물에 잠겨버렸고 삼흥리 가마터는 일부가 저수지에 잠겼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이 곳 대부분의 요지는 10세기에서 11세기에 걸쳐 성립된 요지도, 초기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용운리의 요지는 중국의 월주요․요주요․여요 등에서 보여 지는 청자의 양식과 비슷하다. 뿐만 아니라 통일 신라 시대 말기의 요지 흔적까지 엿볼 수 있어 청자의 기원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이 곳에서 발견되는 도자기 조각들은 완전한 고려청자의 색깔을 나타내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 계율리의 요지는 현재 40여 군데가 남아 있는데 용운리의 것과 마찬가지로 대체로 보존이 잘되어 있으며, 용운리의 것보다 약간 후기의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11~13세기의 양식화된 상감 청자 조각이 많이 발견되었고, 이는 대구면 내의 가마가 도자기를 굽기 위한 나무를 찾아 아래위로 옮겨 다녔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한편 사당리에는 45개소의 요지가 있는데 보존 상태가 좋지 않다. 그 중에서도 당전 마을의 요지는 청자가 가장 전성기를 맞이하였을 때의 것으로, 1914년 이 곳이 알려진 이후 이 곳을 파헤친 사람들이 많아 도굴의 피해가 심하였다. 이 곳의 요지는 대개가 12세기 전반에서 13세기에 이르는 것이며, 14세기의 것도 있다. 특히 12세기의 가마가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당전 마을에서 발견되는 도자기 조각들은 고려자기의 대표적인 것들로서,  아름답고 우수한 색깔과 상감 기법을 보여 주고 있다. 수동리는 사당리 남쪽의 들판에 있는 마을로, 6개소에 요지가 있다. 대체로 13~14세기의 것으로, 일부는 하천에 침식당하고 일부는 논밭으로 변하였다. 대구면 요지에서 출토되는 것은 주로 대접․접시․병․매병(梅甁)․잔․합(盒)․단지․기와․향로 등으로 다양하며, 기법 면에서도 철회(鐵繪)․흑유․백자․진사(辰砂)․철채․퇴화 청자 등 거의 모든 기법의 도자기 파편이 출토되었다. 무늬 역시 모란․국화․봉황․연꽃․앵무새 등 다채롭다. 이와 같이 대구면 일대의 요지는 고려 전 시대에 걸치는 가마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가마터 고려자기의 주산지요, 근원이 되는 곳이다. 전라 북도 부안군 보안면의 청자 요지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요지로서 고려자기의 연구에도 많은 도움을 주는 곳이다.

 

①고려청자도요지

 위치 :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고려시대 집단적으로 청자를 구웠던 곳은 강진과 전북 부안을 들 수 있다. 대구면 청자요지는 용운리, 계율리, 사당리, 수동리 일대에 18만여평에 국내 최대 규모인 183개소의 가마터가 집단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사당리 요지에서 생산되었던 청자는 청자문화가 최대 절정을 이루어 고려청자의 백미를 보임으로써 그 기법의 우수성이 세계에서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 처럼 유달리 강진에서 청자문화가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해상교통의 발달로 중국청자 기술이 도입되었고, 전국 다른 지역 비해 기후, 태토, 연료, 물, 해운 등 여건이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고려청자의 발상지 강진은 9세기부터 14세기에 이르기까지 청자문화를 주도해 오면서 천재적 예술성을 세계에 널리 선양하였으나 고려 말에 청자기법이 쇠퇴한 후 600백 년 동안 단절되고 말아 옛 가마터는 많은 사연을 간직한 채 대구면 산야에 후손들의 산 교육장으로 남아있다.


청자도요지가 있는 대구면으로 가는 답사길은 들과 강과 바다가 조화된 남도답사 1번지의 풍광답게 서정시의 고향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영랑생가를 나와 읍내 시가지를 벗어나자마자 목리에서 탐진강을 건너야 한다. 이곳 목리(牧里)마을을 초지(草地)라고도 부르는데 소가 풀을 뜯는 지형의 강진지리 풍수에서 나온 지명인데, 강진 사람들은 우스갯말로 ꡒ강진 옴천면장할래, 목리 이장할래?ꡓ 물으면 ꡒ목리 이장!ꡓ 한다는 것이다. 그 만큼 옴천면이 작은 반면 목리가 큰 마을이라는 뜻이겠지.

 탐진강에 가로 놓인 다리 옆에는 초라한 비석 하나가 을씨년스럽게 서있는데, 이곳에 첫 다리를 놓게 줄을 댄 어느 정치인의 공덕비이다. 다리가 놓이기 전만 해도 자동차는 군동면 석교를 건너 20여 리를 돌아야 했고, 작은 농선에 의지하여 강 너머 너른 들녘을 일구어 왔는데, 선거 때마다 ꡐ미끼ꡑ로 내세워 침튀기다가 주민의 숙원이 해결되었다는 우리네 정치문화의 단면을 보노라니 입맛이 쓰다.

 강진만으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고, 칠량면소재지와 대구면소재지를 지나면 마량항에 닿기 못 미쳐 왼편으로 청자박물관이 보인다. 고려청자는 9세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1세기 말에는 은은하면서 맑은 비색과 유려한 형태, 화려한 문양이나 삼강기법에서 고려만의 독특한 특징을 보였는데, 강진 대구면 용운리, 계율리, 사당리, 수동리 일대에 관요형태의 대규모 가마가 설치되었다. 강진산 고려청자가 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것만 하여도 국보와 보물급에서 40여 점이 넘어 우리나라 도자기 생산의 본바닥이었음을 말해 준다.

 이곳에 고려청자 가마가 설치된 자연환경은 청자를 실어나르는 바닷길에 직접 닿고, 풍부한 흙과 연료가 제공되었으며, 사회적 환경은 코앞에 있는 청해진의 장보고가 동북아 해상을 장악하였고, 호남지방의 광활한 평야와 바다에서 얻은 경제력, 그리고 신라 말 강진 무위사, 장흥 보림사, 화순 쌍봉사, 곡성 태안사 등 선종불교의 차 문화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청자도요지에서는 옛 가마터와 청자의 몸매를 감상한 다음에 반드시 흙을 주물러 천년을 거스르는 나의 작품을 만들어 보라. 청자의 신비를 재현하고 있는 청자사업소에서 곱게 구워 집으로 보내주면서 당부한다.ꡒ청자는 진열장의 보물이 아니라, 밥그릇, 물잔, 술잔으로 쓰다가 금가고 깨어지는 생활용기ꡓ라고...


▷ 대구면청자도요지

 강진의 고려청자 요지는 대구면 일대와 칠량면 삼흥리에 산재해있다. 1914년 이곳 고려자기 요지가 널리 알려진 이래 세계에서 도자기에 관심 있는 학자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강진 청자 요지의 핵심은 대구면이다. 대구면 중에서도 용문천인데 상류는 용운리로, 동북쪽 산골짜기에 정수사가 있으며, 요지는 정수사 밑 운곡마을로부터 용문천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해변에까지 산재해 있다. 용운리 가마는 몇 개소를 제외하고는 10세기 후반경으로부터 11세기 중엽까지 사이의 초기 요지로 중국의 월주요, 여요와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파편들이 각 요지에서 산견된다. 한편 계치 골짜기를 지나 용문천 하류의 넓은 들을 지나면 사당리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고려청자의 절정기를 맞았던 곳이다. 고려시대에 가장 양질의 청자를 굽던 유일한 관요지인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출토 청자에는 국립 박물관 소장의 청자기와가 있어 명성이 높다. 이상이 대구면 일대의 청자도요지에 대한 소개이고, 청자에 멋을 알기위한 청자에 기본적인 것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토기에서 자기로의 이행은 커다란 혁신이었다. 자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릇을 만드는 바탕흙이 점토에서 자질(磁質 ,白土)로 바뀌고 유약은 회유(灰釉) 대신 장석계 유약이 쓰이게 된다. 또한 높은 온도로 환원염 번조를 하기위한 등요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제반 여건들은 이미 통일 신라 말에 축적되었으며 그런 기반 위에 중국 청자 기술의 영향을 받아서 9세기 중엽 이후 청자가 만들어진다. 고려청자는 주로 서남 해안에 분포되어 있는 가마에서 만들어 졌는데 특히 전라도 지방에 많은 가마가 밀집되어있다.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은 청자의 주산지로 유명하다. 특히 부안에서는 청자뿐 아니라 세련된 고려백자도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이 두 가마에서 생산된 청자는 양질(良質) 청자로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을 중심으로 한 귀족과 왕실에서 사용하던 것이다. 양질 청자는 정선된 바탕흙에 비취색의 유약을 입힌 청자로서 초기에는 중국 당 오대 송나라의 도자기나 금속 그릇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중국 절강성의 월주요 청자의 푸른 유약색과 장식의 섬세성 월주요 청자의 인각부조를 모방한 반양각무늬 하북성 정요와 자주요의 문양이나 기형등과 유사한 양식이 고려청자에도 나타난다. 양질 청자 가마는 전라도 강진, 부안 외에도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충남 서산군 성연면 오사리 등지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양질 청자에 비해 인천시 북구 경서동과 전남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에서는 '녹청자'로 불리는 거친 청자도 제작되었다. 이것은 통일 신라시대의토기 바탕흙을 정선하여 그 위에 고화도의 회유를 입힌 것으로 녹갈색이나 황갈색을 된다. 녹청자는 통일신라시대 말부터 지방수요층을 대상으로 하여 지방가마에서 구워 낸 것이다. 일반적으로 예술적 가치를 지닌 청자로 평가되는 것은 색깔 형태 문양 등이 매우 아름답고 제작기법이 정교한 양질 청자이다. 양질청자는 초기에는 중국 도자기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12세기부터는 고려적인 특징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섬세하고 부드러운 곡선의 조형미를 지니게 된다. 11세기말에서 2세기 전반에 걸쳐서는 이러한 특징을 갖춘 상형청자(象形靑磁 동물이나 식물 및 인물모양의 청자)가 널리 제작되어진다. 이처럼 다양하고 세련된 기형을 지니면서 푸른색의 유약은 광택이 은은하고 안정감을 주는 반투명의 비취색을 띠게 된다. 기형과 유약이 절정에 이른 시기에 고려자기를 대표하는 상감청자가 등장한다. 상감기법은 처음에는 나전칠기와 금속공예에 사용되던 기법으로서 고려사기장인의 창의에 의해 최초로 고려도자기에 이 기법이 응용된 것이다. 상감청자의 출현으로 고려청자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였고 유약은 얇고 투명해져서 파르스름한 유약을 통해 상감무늬가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고려청자는 대체로 아무무늬도 없는 소문이거나 음각, 양각, 투각, 퇴화 등의 무늬가 다양하게 펼쳐진다. 12세기전반기에 상감무늬가 나타난 이후에는 상감청자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진사채가 곁들여 지기도 한다. 무늬의 소재는 연당초, 모란당초, 운학, 포류수금 등이다. 또 흔히 접할 수 있는 그릇모양으로는 표주박모양병 주전자.참외모양 병, 향로, 탁잔, 꽃병, 매병,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정병, 연적 등을 비롯하여 일상생활용기인 대접접시 등이 있다. 고려자기는 동양 도자사에서 매우 독자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1231년 몽고의 침입 이후부터 쇠퇴하여 조선 초기의 분청사기로 계승되어진다.


1. 순청자

 순청자는 상감이나 다른 물질에 의한 장식무늬가 들어가지 않는 청자를 말한다. 음각,양각,투각기법으로 장식된 청자들과 동․식물 등을 모방해 만든 상형청자등도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순청자는 고려시대초기부터 점차로 세련되어 12세기 초에는 그 정점에 이르며 12세기 중엽이후 상감청자가 만들어지는 때에도 꾸준히 제작되었다. 그 절정기인 12세기 초 중기의 순청자는 바탕흙이 매우 정선되었으며 유약속에 작은 기포가 가득 차 있어 반투명하며 이러한 유약과 바탕흙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표면이 비취색이라고도 일컫는 청록색을 띠며 유약에는 빙렬이 없다. 또 경직된 윤곽선을 지닌 중국 고동기의 영향에서 벗어나 점차 부드러운 선을 띠는 단정한 고려적인 형태를 나타내게 된다.


2. 상감청자

 청자에 상감기법으로 문양을 나타낸 것을 상감청자라 한다. 상감청자란 바탕흙으로 그릇모양을 만들고 그 표면에 나타내고자 하는 문양이나 글자 등을 파낸 뒤 그 패인 홈을 회색의 청자 바탕흙 또는 다른 백토나 자토로 메우고 표면을 고른 후 청자 유약을 입혀 구운 청자를 말한다. 이렇게 해서 구워내면 회색을 바탕으로 흑,백의문양이 선명하게 돋보이게 된다. 상감기법에는 정상감과 역상감의 두 가지가 있다. 정상감은 앞에 이야기 한방법으로 상감무늬를 나타낸 것이며 역상감은 이와 반대로 나타내고자 하는 문양이외의 여백을 파고 백토나 자토로 상감하는 방법이다. 감기법은 청공기에 상감으로 문양을 나타낸 것에서 비롯되었지만 이처럼 도자기에 상감한 것은 우리나라 고려시대에 처음 나타난 것이다. 고려시대 청자에 상감으로 문양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대략12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며 가장 세련미를 보인 시기는 12세기 중엽 무렵이다. 특히 1159년에 죽은 문공유의 무덤에서 출토된 상감청자는 정교한 기법과 짜임새 있는 문양의 구도 맑고 투명한 유약 등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절정기 상감청자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상감청자는 1231년 몽고 침입이후 서서히 퇴락하여 문양이 도식화되어 버린다. 고려 말에는 보다 간편하게 무늬를 표현하기 위하여 무늬를 찍어내는 인화기법까지 생겨난다. 상감청자의 인화기법은 조선시대 분청사기로 이어지게 된다.


3. 철화청자

 고려청자의 일종으로 청자 바탕흙으로 그릇을 빚고 표면에 흑색의 산화철을 주성분으로 한 안료로 그림을 그립니다. 그리고 그 위에 청자 유약을 입혀 구워낸 자기를 말한다. 환원염 번조의 고려청자와 는 달리 대개 산화염 번조였기 때문에 일부의 예를 제외하고는 황갈색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 대개의 경우 유약이 얇고 바탕흙속에 모래 등의 불순물이 섞인 것이 많아 표면이 매끄럽지 못하다. 철화청자는 중국 송, 원나라의 자주요 계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11세기 초에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번조 수법이나 기형 문양에서 그 영향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고려 말까지 계속된다. 초기의 청화청자는 조그만 접시나 바래기 등의 안쪽면 사방에 세로선을 긋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성기(盛期)에는 병종류에 당초무늬를 주로 하여 모란 무늬 이형 초목무늬 새무늬 버들무늬 시명 등이 그려지며 말기에는 간단한 당초무늬가 그려진다. 그릇모양은 매병과 광구장경병 주전자, 기름병 등이 많으며 발색이나 문양 등에도 전형적인 고려청자와는 다소 차이가 난다. 드물게 중국의 매병 모양이지만 무늬가 간결하고 필티가 활달하거나 아니면 중국적인 문양이면서도 소박한 필치와 구도에서 고려적인 특징이 엿보이는 것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