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촌사회 서원의 전개와 교육활동에 대하여....
 
 
95' 이신용

머 리 말

서원이란 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제향(先賢祭享)을 위하여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자치운영기구로써, 중종 38년 (1543)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말 학자 안향(安珦)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경상도 순흥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것이 그 효시이다.
한편, 조선의 서원은 그 성립과정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기는 하였으나, 중국의 서원이 관인양성을 위한 준비기구로서의 학교의 성격을 고수하였음에 비하여, 조선의 서원은 사림의 장수처(藏修處)이면서 동시에 향촌사림의 취회소(聚會所)로서 정치적·사회적 기구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서원의 성립

조선초기에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의 운영을 시행하려는 의도가 있었지만 지방의 순화(醇化)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지방의 문화를 중앙의 성격과 어느 정도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공통된 바탕을 갖춘 교육기관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지방에 설치된 관학인 향교(鄕校)가 이를 담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획일적인 정치 속에서 지방문화의 균일한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고 조선 왕조의 집권적 노력 자체도 효율적이지 못하여 관학이 쇠퇴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치적이고 활동적인 서원이 설립되기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사실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나타난 자연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1) 사림의 성장과 서원의 등장

사림(士林)은 15세기의 집권세력이던 훈구(勳舊)세력과 더불어 고려후기의 사대부(士大夫)에서 분파(分派)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조선왕조는 사대부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건설되었으므로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한 사대부 출신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 정치의 실권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사대부라 하여도 조선왕조의 개창을(開創) 둘러싸고 성리학(性理學)에 충실한 일부 사대부들은 왕조교체가 의리도덕((義理道德)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이성혁명(異姓革命)에 참가하기를 거부하고 향촌(鄕村)에 내려가 교육과 향촌건설에 주력하였다. 이들의 후예를 흔히 사림(士林) 또는 사림파(士林派)라고 한다.
사림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成宗) 때부터이다. 훈구세력의 팽창을 막기 위해 성종의 발탁으로 김종직(金宗直)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이어서 그의 제자들이 다수 관직에 등용됨에 이르러서는 훈구세력에 강력하게 도전하는 세력을 이루었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과 대립은 연산군(燕山君) 4년 (1408)에서 명종 즉위년(明宗 卽位年) (1545)에 이르는 47년간 4차례에 걸쳐 일어난 사화(士禍)로 표면화되었다. 이때에 희생된 선비가 180여명에 달하였으며 그들 대부분은 명유(名儒)였다.  초창기 서원의 향사자(享祀者)들의 대부분이 이때에 피화(被禍)된 명현(名賢)들이었다.
사화로 인한 중앙정계로의 진출이 좌절된 사림들은 그들의 활로를 개척해주고 성장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교육(敎育)과 교화(敎化)를 표방함으로써 사림의 결집을 도모하고 향촌활동을 합리화 해줄 수 있는 구심체로서 서원을 만들어갔다.
 

2) 서원의 성립 과정

주세붕(周世鵬)이 1541년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이곳 출신의 유학자인 안향을 모시는 문성공묘(文成公廟)를 세워 배향해오다가 1543년에는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을 최초로 건립하였다. 그는 이를 기초로 유생을 교육하여 여러 명의 급제자를 내게 하는 등 서원체제를 갖추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백운동서원은 어디까지나 사묘가 위주였고, 서원은 다만 유생이 공부하는 건물만을 지칭하여 사묘에 부속된 존재에 그쳤다.
이러한 서원이 독자성을 가지고 정착, 보급된 것은 이황(李滉)에 의해서이다. 이황은 교화의 대상과 주체를 일반백성과 사림으로 나누고, 교화의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를 담당할 주체인 사림의 습속(習俗)을 바로잡고 학문의 방향을 올바르게 정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오로지 도학을 천명하고 밝히는 길밖에는 없으므로,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도장으로서 중국에서 발달되어온 서원제도가 우리 나라에도 필요한 것이라고 하여 서원의 존재이유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논리적 근거 위에서 그는 마침 풍기군수에 임명됨을 기회로, 우선 서원을 공인화하고 나라 안에서 그 존재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구하였다. 그는 그 뒤 고향인 예안에서 역동서원(易東書院) 설립을 주도하는가 하면, 10여 곳의 서원에 대해서는 건립에 참여하거나 서원기(書院記)를 지어 보내는 등 그 보급에 주력하였다.
따라서 조선 초기이래 계속되어온 향촌에서 사림활동의 구심체적 기구의 모색노력은 중종초 조광조 일파의 신진사류에 의한 문묘종사운동 및 새로운 교학체제 모색을 통하여 그 타당성을 인정받고, 마침내는 서원의 형태로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며, 이황에 의하여 정착, 보급되기에 이른 것이라 하겠다.
한편, 서원의 건립은 본래 향촌유림들에 의하여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국가가 관여할 필요가 없었으나, 서원이 지닌 교육 및 향사적(享祀的) 기능이 국가의 인재양성과 교화정책에 깊이 연관되어, 조정에서 특별히 서원의 명칭을 부여한 현판과 그에 따른 서적·노비 등을 내린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특전을 부여받은 국가공인 서원을 사액서원이라 하며 비사액서원과는 격을 달리하였다. 1550년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으로 명종이 백운동서원에 대하여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어필(御筆) 현판과 서적을 하사하고 노비를 부여하여, 사액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그 뒤 전국의 도처에 서원이 세워지면서 사액을 요구하여, 숙종 때에는 무려 131개소의 사액서원이 있었다.
 

서원의 발달과 쇠퇴

서원건립의 초창기에는 정계가 전반적으로 척신계에 의하여 주도되었으나, 이황 및 그 문인들에 의한 서원보급운동으로 인하여 이미 관설에 준하는 교학기구로서 인정받고 있었다. 이것은 이황의 거주지이며 그 문인의 활동이 성하던 경상도지역에 전체의 반이 넘는 서원이 건립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또한, 척신세력으로서도 관학의 쇠퇴상을 더 이상 방치할 수만은 없는 단계에 이르러, 그 대체기구로서 서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향인물인 안향·정몽주·최충·최유길(安珦·鄭夢周·崔沖·崔惟吉) 등이 사림 이전의 고려시대 인물이었던 관계로 척신세력의 반발을 받지 않았던 것도 서원의 설립이 활발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이 시기는 서원의 내용면에서도 서원 발전을 위한 토대가 마련되고 있었다.
한편으로 서원은 선조 대에 들어와 사림계가 정치의 주도권을 쥐게 된 이후 본격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우선 양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선조 당대에 세워진 것만 60여개소를 넘었으며, 22개소에 사액이 내려졌으며, 현종 때까지는 꾸준히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지역별로는 초창기의 경상도 일변도에서 점차 벗어나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지역에서의 건립이 활발해졌으며, 한강 이북지역에서도 차차 보급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특히 황해도의 경우는 선조 연간 이례적으로 크게 증가하고 있었다.
이처럼 전국적으로 확산을 보게 된 것은 사림의 향촌활동이 보다 자유로워진 정세의 변화라든가, 특정 유학자의 서원보급운동에 의한 결과이기도 하였지만 보다 깊은 요인은 붕당정치(朋黨政治)의 전개에 있었다. 사림의 집권과 함께 비롯된 이 붕당은 그 정쟁의 방식이 학문에 바탕을 둔 명분론과 의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므로, 당파형성에 학연(學緣)이 작용하는 바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러한 학연의 매개체인 서원이 그 조직과 확장에 중심적인 몫을 담당하게 된 것이며, 따라서 각 당파에서는 당세 확장의 방법으로 지방별로 서원을 세워 그 지역 사림과 연결을 맺고 이를 자기 당파의 우익으로 확보하려 하였다. 반면 향촌사림으로서는 서원을 통하여 중앙관료와의 연결을 맺음으로써 의사전달과 입신출세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였기에 서원건립을 놓고 양자의 이해관계가 서로 일치하였던 것이다.
서원은 숙종 대에 이르러 166개소가 건립되는 급격한 증설 현상을 보였다. 또한 동일한 인물에 대한 중첩된 서원건립이 성행하였다.
제향인물에 있어서도 뛰어난 유학자이어야 한다는 본래의 원칙을 벗어나, 당쟁의 와중에서 희생된 인물이나 높은 관직을 지낸 관리, 선치수령(善治守令), 행의(行誼)있는 유생, 그리고 심지어는 단지 자손이 귀하에 되었다는 사실만으로써 추향(追享)되는 사례가 있을 만큼 남향(濫享)과 외향(猥享)이 자행되었다. 서원의 이러한 첩설과 남향은 이 시기에 당쟁이 격화되고 그 폐단이 표면화된 데에 원인이 있었다.
서원은 이제 학연의 확대를 기한다는 면에서보다는 정쟁에 희생된 자기파 인물에 대한 신원(伸寃)의 뜻을 보다 강하게 지니게 되었다. 또 붕당의 원리가 포기된 상태에서 외면적인 당파의 양적 확대에만 급급하여, 경쟁적으로 향촌사림을 포섭하려 하자, 자연히 서원조직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됨으로써 서원의 남설과 사액의 남발을 더욱 부채질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서원남설은 오직 당쟁문제로만 초래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17세기 후반 이후 현저해진 현상이기는 하지만 사족 사이에 동족 내지 가문의식이 강화된 결과로서 나타난 후손에 의한 조상제향처 내지 족적 기반 중심지로서의 서원건립이 자행되었던 것에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으나, 이러한 행위는 서원 본래의 취지에 벗어나기에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았고, 따라서 국가로부터의 통제를 받기에 이른다.
서원금지령이 내려진 숙종 29년 (1703) 에는 서원의 남설로 인하여 그 질적 저하가 수반되어 사회적인 폐단을 야기하였던 때이다. 또 점차 타락의 도를 더해 가는 당시 사림의 기강이나 능력으로 보더라도 더 이상 서원이 학문기구로 활용되기 어려웠기에, 서원은 날로 증가하지만 사문은 더욱 침체하고 의리 또한 어두워질 뿐이라는 서원무용론까지 대두하게 된 것이며 이것이 뒷날의 서원철폐의 명분이 되었다.
서원의 사회적 폐단은 건립과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지방관에게서 각출하는 구청(求請), 양정(良丁)을 불법적으로 모점(冒占)하여 피역시킴으로써 양정부족현상을 야기하여 양역폐를 격화시키는 폐단, 교화를 구실로 대민착취기구로 전락된 사실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당쟁의 격화로 서원의 정치적 비중이 커지는 속에서 중앙의 고관이 향촌의 1개 서원에 진신유사(搢紳有司)로 추대되어 일정한 상호보험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질적인 저하에도 불구하고 향촌사회에서 서원이 누리는 권위를 강대하였으며, 바로 이 점이 사회적 폐단을 야기할 수 있는 근본요인이었던 것이다.
서원문제는 인조 22년 (1644) 영남감사 임담(林 )의 서원남향에 대한 상소에서 처음 제기되었으며, 그 뒤에도 효종·현종 연간을 거치면서 간헐적이기는 하나 그 폐단을 논하는 상소로 인한 논의가 조정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서원건립이 허가제로 결정되었으나, 숙종 초까지만 하여도 남설로 인한 서원의 문란상은 심각하게 인식되지 않아서 아직은 서원옹호론이 우세하였고, 따라서 이 시기까지 마련된 서원대책은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서원에 대한 통제가 적극성을 띠기 시작한 것은 숙종 29년 (1703)에 이르러서 이다. 이때 전라감사 민진원(閔鎭遠)은 조정에 알리지 않고 사사로이 서원을 세우는 경우 지방관을 논죄하고 수창유생(首倡儒生)을 정거(停擧)시킬 것을 상소하였으며, 왕이 이에 찬동함으로써 서원금령이 강제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서원금령은 그 뒤에도 수시로 신칙되어서 1713년 말에는 특히 예조판서 민진후(閔鎭厚)의 요청으로 1714년 이후부터의 첩설을 엄금하고 사액을 내리지 않을 것을 결정하였으며, 숙종 45년 (1719)부터 왕이 하나하나 존폐를 결정하였고, 경상도의 경우에는 훼철이 단행하기까지 하였지만 곧 숙종이 죽어 중단되어버리고 말았다.
숙종 말년 이후부터 단행된 강력한 서원통제책은 계속된 정권교체로 큰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논의를 통하여 서원폐단에 대한 조야의 인식이 깊어지고 서원 통제론이 자리를 굳히게 된 것이며, 영조 17년 (1741)의 서원철폐는 여기서 이미 준비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조가 서원철폐를 단행하게 된 계기는 그의 탕평책(蕩平策) 실시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서원에 대해서도 그것이 노론·소론·남인 사이의 분쟁을 유발하고 정국을 혼란시키는 요인이 된다고 판단하고, 그 건립에 따른 시비를 근원적으로 봉쇄할 목적으로 탕평파의 협조를 얻어 1714년 갑오 이후 건립된 서원을 모두 훼철하게 하였던 것이다. 서원훼철과 같은 강경조처로 인한 서원금령의 강화는 지방관의 서원에 대한 물질적 보조를 거의 단절하게 함으로써 서원재정을 약화시키고, 끝내는 이를 메우기 위한 대민 작폐의 심화와 함께 서원재정 담당을 기화로 한 후손의 서원관여를 더욱 조장함으로써, 19세기 이후는 전국의 서원이 대부분 후손에 의하여 운영되고 또 건립되어지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한편, 서원건립이 중단된 것과 반비례하여 이미 교화의 방향을 상실한 사림층의 대민착취와 서원의 부패로 인한 민폐는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마침내, 실추된 왕권의 권위를 높이며 강력한 중앙집권하에 국가체제의 정비를 꾀하던 흥선대원군은 서원의 일대 정리에 착수하였다. 흥선대원군은 고종 1년 (1864)에 이미 민폐문제를 구실로 사원에 대한 조사와 그 존폐여부의 처리를 묘당에 맡겼으며, 1868년과 1870년에 미사액서원과 사액서원으로서 제향자의 후손에 의하여 주도되면서 민폐를 끼치는 서원에 대한 훼철을 명령하였다. 이어 1871년에 학문과 충절이 뛰어난 인물에 대하여 일인일원(一人一院 ) 이외의 모든 첩설서원을 일시에 훼철하게 함으로써 전국에 47개소의 서원만 남게 되었다.
 

서원의 교육 활동

서원은 어떤 일정한 기준에 의해 중앙에서 통제하여 설립했던 것이 아니고 사림들과 각 지방의 여건에 따라 달랐던 것이 일반적이므로 모든 서원에 총괄적으로 적용되는 원칙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서원의 설립의도나 교육목표가 당시 성리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점에 착안하여 서원 상호간의 공통점을 찾아 살펴보고자 한다.
 

1)교육 목표

서원은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출세를 지양하고 향촌에 은거하여 성리학의 탐구에 노력하던 사림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또 성리학 본래의 성격으로 본다면 서원의 교육은 선현을 본받아 자신을 도덕적으로 완성시키고자 하는 '법성현(法聖賢)'에 일차적인 목표를 두었다.
한편, 서원교육이 윤리적 도덕적인 면에서 성현을 본받고자 하는데 목표를 두었으나 현실적인 측면에서 당시 교육기관의 일반적인 목표인 관인양성(官人養成)도 무시할 수 없었다. 따라서 관학이 쇠퇴함으로 사실상 조정의 원조를 받아 관학을 보충하였으므로 관학의 주기능인 과거준비 교육도 실행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사림파들이 정계에 진출하여 복잡한 정치양태를 이루었던 것을 보면 서원이 관인양성을 교육목표로 삼았음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위의 두 가지 교육 목표, 즉 '법성현'과 '관인양성'은 유교의 교육목적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유교가 유입된 이래 두 가지의 교육목적을 설정하게 되는데 그 첫째는 성인군자를 목표로 하는 이상주의적 도덕파이고 다른 하나는 경학(經學)을 배워 과거에 응시하여 관인으로 등용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현실주의적 관료파(官僚派)가 그것이다.
이러한 이상과 현실의 이중적 목표는 서로 상충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점에서 일치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다만 사림파의 경향으로 보아 초기 서원교육의 목표는 이상적인 법성현이 강했을 것이고 후기로 가면서 정계진출에 대한 현실적 목표인 관인양성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2)교육 내용

관학이 국가적 통제와 과거에 구속된 교육이 행해진데 비하여 서원의 그러한 통제와 구속에서 벗어나 학문을 위한 학문을 교육하였다. 그리하여 교육내용은 소학(小學)과 가예(家禮)를 입문으로 삼고 사서 - 대학·논어·맹자·중용(四書 - 大學·論語·孟子·中庸), 그리고 오경 - 예기·춘추·시경·서경·역경(五經 - 禮記·春秋·詩經·書經·易經)을 근본으로 삼았다.
이렇듯 각 서원의 교과목이 사서오경(四書五經) 등의 성리학에 관계된 책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그 외의 것은 이단시(異端視)되었다. 특히 소학과 사서오경은 각 서원의 공통적인 필수과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서오경을 통해서 윤리학적 체계를 갖춘 다음에 각 서원에 따라 가예, 심경, 근사록, 사기, 사장(家禮, 心經, 近思錄, 史記, 詞章) 등은 현실적 목표에 부응하는 교과로서 과거응시를 목적으로 설치된 것인데 이것은 서원이 현실적인 관리등용의 목표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과거준비 교육은 서원이 정치적 목적과 긴밀한 관계를 갖게되는 후세에 이르러 더욱 긴요한 과목이 되었다.
 

3)교육 방법

서원의 교육 방법은 주자(朱子)의 방법론을 따르고 있었다. 그것은 첫째 입지(立志), 둘째 정진노력(精進努力), 셋째 공부함양, 넷째 궁리(窮理) 즉 격물치지(格物致知), 다섯째 역행독서(力行讀書) 등이다.
서원에서 유생들에 대한 학습활동은 항상 거주하는 유생들의 자발적인 공부와 이들에 대한 교수(敎授) 및 정기적으로 개설되었던 강회 등을 들 수 있다. 교수는 강(講)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강이란 배운 글을 소리 높이 읽고 의리(義理)로 문답하는 전통적인 교수 방법이다. 강에는 매일 실시하는 석강(席講), 보름마다 실시하는 강(講), 매월 실시하는 월강(月講)으로 구별된다. 강은 단순히 암송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리(文理)를 터득하는 일에 중점을 둔 활동이다. 강을 받는 데는 일정한 절차가 있는데 이것을 강의(講義)라고 하며, 강의는 1:1의 대면학습이기 때문에 능력별 수업이 가능하고 인격적 교류가 이루어 질 수 있었다. 강을 통한 학업의 성적평가는 대통, 통, 약통, 조통, 불통(大通, 通, 略通, 粗通, 不通)의 5단계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독서한 교과의 뜻과 응용에 밝고 요지를 잘 알며 구절을 자세히 알고 설명과 발표에 막힘이 없는가를 평가기준으로 삼았다.
 

4)교육적 의의

서원의 교육적 의의를 살펴보면 첫째로 사학(私學)의 재흥(再興)을 들 수 있다.
서원은 조선시대에 나타난 사학이지만, 그 사학의 전통은 고려시대 그리고 멀리는 삼국시대에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건국 당시에는 고려말의 사학이 관학에 흡수되어 지방에 향교를 세우고 전국적으로 유교 이념을 보급하여 유교사회의 건설을 촉진하였다. 그리고 조선초기의 지방유지들은 자기 향토의 발전을 위해서 향교의 설립과 육성에 적극 협조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이르러 관학이 쇠퇴하기 시작하여 관학의 교육기능이 상실되어 갔다. 그것은 관학이 기존 관료 자제들의 출세를 위한 도구로 전락되어 감으로써 그 자체의 한계성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또한 15세기 후반에는 중앙집권적인 왕권강화와 지배이념인 유교의 보급이 어느 정도 실현된 단계였으므로 관학에 대한 기대가 점점 약화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사학인 서원이 설립됨으로써 저하된 교육기능을 담당하고 학풍(學風)을 쇄신(刷新)하게 된다. 그것은 사학파(私學派)들이 유학을 내포적, 철학적으로 탐구하려는 자세를 지녀 기존의 관학파(官學派)의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경향과 대조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서원은 향촌사회의 교화라는 교육적 의의를 갖는다.
관학의 쇠퇴로 향촌에 대한 교화기능을 맡았던 향교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시기에 사학인 서원이 창건되기 시작하자 서원은 지방에 위치하는 특수성을 바탕으로 향촌을 교화시키는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서원은 지방의 최고 지성인들의 모임으로서 지방의 고등 교육기관이면서 지방문화의 중심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국가에서 주도했던 향교(鄕校)나 향약(鄕約), 유향소(留鄕所)에 못지 않게 학문적이고 도학적인 분위기로 성리학의 발전에 기여함과 동시에 여러 가지 의식을 예의와 질서로 엄숙히 하여 성대하게 함으로써, 그 지방을 교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향촌의 교화는 주로 문자와 의식 및 향약의 보급 등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따라서 서원은 다시 향교가 맡고 있던 도덕적 기능을 맡게 되고 그에 따라 국가로부터 비호를 받았다.
셋째, 서원에서는 향약을 입약(立約) 보급하여 지방민을 교화했다. 즉 향약을 세울 때는 처음부터 서원에서 입약하고 의정(議定)하였으며 그 임원도 서원에 모여 선정하였다. 향약의 재정을 담당하는 사화를 반드시 서원 유생이 담당토록 하였고 매월 강약(講約)도 서원에서 행하였다. 따라서 향약의 운영이나 조직은 모두 서원에서 이루어졌으며, 또한 서원이 향약의 보급을 담당했던 것이다.
 
 

맺 음 말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서원은 조선 중종 38년 풍기 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추념하는 백운동서원을 세운 것을 시초로 하여 16세기 중엽 이후 크게 융성하였다.  그 후 서원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모하게 되었지만, 청년자제들은 모아 학문과 지행(志行)을 연마하여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중추적 교육기관이며 지방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조선 초기의 교육이 성균관, 사학, 향교(成均館, 四學, 鄕校) 등 관학 기관을 중심으로 전개된 반면에 중기 이후에는 서원이 등장하여 교학의 기능을 주도하였으므로 향촌 사회의 서민층까지 교육의 기회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서원은 초창기의 긍정적인 출발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특권적 신분의 명리(名利)에 의해 피해를 주기도 하여 결국 대원군에 의해 서원 정리가 단행되어 전국에 47개만 존속하기에 이른다. 이는 또한 서원의 설립 목표인 선현존숭(先賢尊崇)과 후진양성(後進養成)이 퇴색되어 선현을 빙자하여 무위도식의 근거지가 되고 교육이라는 구실로 당파를 조성하여 정치적으로 혼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재정낭비 등의 피해를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서원에 대한 평가는 정치, 경제적인 측면만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육기관으로서 당시 교육체계의 역학적 구조에서 나타난 소산이며 전통적인 사학(私學)의 맥을 이어 향촌사회를 교화하였으며 쇠퇴해 가는 관학을 대신하여 조선조 교육을 진작시키는 등의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 참 고 문 헌】
1.『조선중기사림정치구조연구』, 최이돈,  일조각,  1994
2.『한국사의 이해』, 송병기 외,  신서원,  1991
3.『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이덕일,  석필, 1998
4.『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이덕일, 석필, 1997
5.『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웅진출판, 1994
6.「서원의 성립배경에 대한 사적 고찰」,구영희, 성균관대학교 교육 대학원 교육학과 역사교육전공, 1984
7.「조선 후기 서원의 발달과 교육적 기능」,  김정실, 숙명여자 대학교 교육 대학원 역사교육전공,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