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사상에 대하여
 
 
94' 이현명
 

머리말

일반적으로 다산 정약용 하면 실학을 집대성하신 분이며,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목민심서로 알고 있다. 그러나 다산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러한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 말고도 지금에와 평가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많은 사상을 지니셨던 인물이다.   그의 사상을 살펴보면 먼저 정약용은 전 생애에 걸쳐 자연 과학 및 기술을 연구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그는 천문학·기상학·지리학·물리학·건축학·의학·농학 등 다방면에 걸쳐 조예가 깊었다. 또한 정약용은 이전 실학자들의 전통을 이어 받아 조선 봉건 사회의 무너져 가는 정치·경제 등의 제도와 고루한 유교 사상을 폭로하고 비판하였다. 토지 제도·정치 제도·조세 제도·종교·국방 문제 등에 대해서도 일련의 개혁 사상과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로써 그는 실학을 집대성하여 당시 학문의 최고 수준에 도달하였다. 또한 정약용은 18세기 말 19세기초의 뛰어난 자연 과학자이자 진보적 유물론자이며, 실학 사상의 집대성자였을 뿐만 아니라 대시인이기도 하였다.
 

▶다산의 생애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은 1762(영조38)년에 정재원(丁載遠)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부친에게서 글을 배웠고 부친의 임지를 따라 다니면서 학문을 닦았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학문에 뛰어났으며 10세에 경서(經書)나 사서(史書)의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장년이 된 후 관리로서의 길을 걷던 비교적 평탄한 시기도 있었지만, 그는 곧 여러 가지 시련의 시기를 겪게되고 결국 유배되는 입장이 되기도 한다. 남들에게 있어 가장 힘이 들고 침체하기 쉬운 유배기에 다산은 참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다. 그 대표적인 저서 목민심서도 그 시기에 저술된 것이다. 또한 1818년 유배가 풀리기까지 18년간 그는 경사(經史)에 걸친 전 학문을 체계화였으며, 이 때부터 정치 경제적 인식의 사상 적 기반이 되는 경서학(經書學)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귀양이 풀려 고향에 돌아온 다산은 학문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다가 1836년 2월 22일 고향 마현(馬峴)의 자택에서 75세를 일기로 자신의 저작물을 수록하였다.
 뒷날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는 <선생(茶山) 한 사람에 대한 고구(考究)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심혼(心魂)의 명예 내지 전 조선 성쇠존망에 대한 연구>라고 평가하였다. 저술로는 육경·사서에 대한 주해서군(註解書群)과 일표이서가 대표적이며, 이 밖에『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아언각비(雅言覺非)』,『대동수경(大東水經)』,『마과회통(麻科會通)』,『의령(醫零)』등 모두 500여 권에 달하는데, 이는『여유당전서』에 총망라되어 있다.
1910년(순종4년)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다산 정약용의 사상
 

1.철학사상

정약용은 학문의 목적이 나라의 부강과 일상의 실용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유학자는 추상적인 공리공담을 하는 것도 쓸모 없는 고증을 하는 것도 아니라, 시무에 밝아 실제적인 일을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실용지학', '이용후생'의 정신으로 과학 기술을 연구하여 실제에 적용하는 것이 선비들이 해야 할 진정한 학문이라고 여겼다.
 그는 이익의 자연 과학 연구 성과를 계승하고 서구 근대 과학이 이룬 성과의 일부를 취하여 자기 연구의 토대로 삼았다. 이에 따라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의 비과학성을 비판하고 지구가 둥글다고 하면서 '지전설'을 주장하였다. 또 그는 만조와 간조와 같은 현상, 우렛소리 등 자연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그것이 결코 신비적 현상이 아니라고 강조하였으며, 볼록 렌즈에 초점을 맞추면 불이 나는 현상도 물리학적으로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한강 배다리를 설계하여 공사를 완성시켰는가 하면, 수원성 축조법을 고안하고 여기에 기중기·활차·고륜을 이용하여 거액의 공사비를 절약하였다.
 선진적 자연 과학 지식과 기술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정약용이 진보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기본 바탕이 되었다. 그는 방대한 유교 경전들에 대한 이전 학자들의 비합리적인 주석들을 검토하였다. 실사구시의 입장으로 전면적인 검토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정약용은 유물론적 견해를 전개하였다. 정약용은 서경덕과 이익의 '기원론(氣元論)' 전통을 계승하고, 당시의 자연 과학 지식을 받아들여 유물론적인 자연관을 형성하였다.
 정약용은 지행 문제에서 '지선행후(知先行後)'와 '행선지후(行先知後)'는 모두 한 측면만을 말한 데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명백하지 못한 것은 모르는 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실천하지 않으며,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명백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지와 행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서로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한다. 먼저 알아야 실천하는 과정에서 더욱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이 그는 지와 행의 통일을 주장하였다.
 정약용은 인식론에서 긍정적인 견해를 내놓긴 했으나 관념론적인 요소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인간의 심을 육체적 기관으로서의 심과 사유 능력으로서의 심으로 구분하고, 사유 능력으로서의 심은 천부적으로 주어진다고 인정하였다. 특히 그는 인간의 도덕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실천을 중요시하면서도, 도덕 의식의 근본은 '천명'에 의해 심에 미리 주어진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윤리 도덕적 견해는 성리학적인 '인성론'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성적인 도덕 능력이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본래 선하다고 보았다.
 사람의 성이란 하늘이 준 것으로 영명하고 형체가 없으며 선과 덕을 좋아하고 악과 더러운 것을 싫어한다고 하였다. 기질도 본연에 속하므로 사람들은 성에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교육의 정도와 교양에 따라서 차이가 생긴다고 보았다. 그는 또 이전의 성리학자들이 '성(性)'의 품계를 정해 '상지(上智)'와 '하우(下愚)'로 구분하는데 반대하고 사람들의 성에는 품계가 없다고 하였다.
 정약용은 사람에게 성이 선천적으로 구비되었다고 보기는 하였지만, 성리학자들처럼 인·의·예·지의 도덕 규범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미리 구비되었다고 본 것이 아니라, 이성 도덕 능력만 선천적으로 구비되어 있고 구체적 도덕 규범은 도덕적 실천이 있은 다음에 생긴다고 보았다. 그러나 도덕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인성'에 선천적으로 구비되었다고 인정한 것이므로 관념론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실제로도 정약용은 삼강오륜을 바탕으로 한 봉건 도덕 질서와 가부장적 종법 제도를 옹호하고 합리화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정약용의 철학 사상에는 일부 무신론적인 부분도 들어 있다. 그러나 무신론적 사상은 완벽하지 못했다. 그는 비록 잡다한 미신과 잡술에 반대하면서도, 권력 있는 제왕이나 홀로 거처하는 학자들의 행동을 경계하기 위하여 상제나 귀신같은 존재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그가 상제나 신을 설정한 것은 어디까지나 신을 통하여 통치자들의 전횡을 억제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2.실학사상

그의 실학 사상은 주로 사회 개혁과 경제 개혁 그리고 국방 개혁에 관한 사상으로 표현되었다.
 첫째, 정약용의 사회 개혁 사상은 그의 사회·역사관 위에서 형성되었다. 그는 고대 사회를 이상화함으로써 군주제를 반대하고 민주 정치를 부르짖었다. 그는 이상적인 고대 사회가 이후 왕도(王道)와 예치(禮治)의 사회를 거쳐 패도( 道)와 법제(法制)의 사회로 변했다고 파악하였다. 이렇게 이상적인 정치가 무너지자 원래 백성을 위해 만들어졌던 국가와 법이 통치자가 백성을 수탈하는 도구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고대 사회를 모범으로 들어 봉건적 전제 통치를 부정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그의 민주·민권적 정치 개혁 사상은 「원목(原牧)」(통치론)과 「탕론(蕩論)」(역성혁명론) 두 편에 집중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는 사회의 법도 백성의 자유 의지와 직접적인 이익을 바탕으로 밑에서 위로 제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둘째, 정약용의 정치적 균권(均權) 사상은 경제 개혁론에도 반영되었다. 그는 지주가 토지세를 부담하고 군포법이나 환곡제를 폐지하며 공전과 균세를 실시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전과 균세로는 봉건 지주의 토지 사유제를 폐지할 수 없으며, 백성의 빈곤을 해결할 수도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러한 이유에서 그는 이전의 전제 개혁론을 계승하여 여전제(閭田制)를 주장하였다. 이 집단 농장제는 세 가지 기본 강령은 첫째, 여전제의 기초인토지 공유와 농자수전이고, 여전제 실행을 위한 구체적인 보증책의 둘째, 마을 단위의 공동 경작과 공동 수확, 셋째, 노동 일수에 따른 보수이다. 정약용의 여전제는 왕권국가의 소유제를 바탕으로 하여 그것을 개량한 것이다. 이는 당시의 조건 아래에서 토지 균분을 주장하는 것은, 대대로 토지를 요구해 온 농민들의 절박한 바람을 잘 반영한 것이다. 또한 여전제는 뒷날 반봉건적 민주주의 혁명에서 토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셋째, 정약용의 실학 사상 중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국방 사상이다. 그는 당시 무능하고 고루한 봉건 통치자들이 구미 자본주의 열강이 침략해 오려는 기미가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태평성세만 부르짖으며 부패타락하고 안일한 생활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국방을 소홀히 하여 무방비 상태에 놓이도록 한 데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에 그는 왜란과 호란에서 얻은 교훈을 총화하고 이전 실학자들의 사상을 계승하여 자신의 국방 개혁 사상을 내놓았다.
 정약용은 도탄에 빠진 백성의 생활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국방 문제를 해결하는 선결 조건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군포제'를 개혁함으로써 백성을 중간 수탈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여 병역 부담의 폐해를 시정하고, 또 환자법도 개혁하여 국가의 전시 식량 축적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백성에게 부과되는 병역 의무와 관련된 각종 폐해를 없애야만 백성이 군대에 기꺼이 복무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와 동시에 정약용은 군사 시설과 군사 장비의 낙후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성 구축의 기술적인 문제를 고찰하였다. 함선을 만들어 일상적으로 훈련하고 훌륭한 군사 무기를 제조하기 위하여 상공인에 대한 대우를 개선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런가 하면 '이용감'을 통하여 새로운 군사 무기를 외국에서 수입하고 그것을 모방하여 국내에서도 대대적으로 만들어 내자고 제안하였다. 그는 단순히 무기만 중요시한 것이 아니라 군대 제도와 전술 및 군사 훈련 등도 중시하였다.
 이와 같이 정약용의 국방 사상은 나라의 방위에 무관심했던 봉건통치자들을 크게 각성시키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외래 침략자에 대비해 백성의 힘을 동원하여 국방을 강화하고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가 여실히 반영된 것이었다.
 
 
3. 문학사상

정약용의 유산 중 가장 빛나는 것은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훌륭한 것이 바로 선진적인 문학 이론이다. 그는 문학이 조국과 인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약용은 이런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자기의 문학 창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모방주의와 형식주의를 배격하였으며, 문학은 항상 민족의 실생활을 토대로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문학적 견해를 바탕으로 정약용은 2천 4백여 수에 달하는 시를 창작하였고, 다양한 형식의 산문 문학 작품을 창작하였다. 그것들은 모두 사실주의적 그림처럼 그 시대를 진실하게 보여 주어 비판적 사실주의 문학이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정약용의 시들은 우선 당시 농민들의 비참한 처지를 적시하여 불합리한 봉건 사회의 현실을 보여 주고 있다.
 당시 무고한 농민들의 비참한 처지를 보여 주면서, "가죽마저 벗겨가고 뼈마저 갉아 내는" 봉건 통치자들의 죄행을 폭로하고 있다. 정약용의 작품은 현실을 비판하는 것뿐 아니라 불합리한 현실을 바로잡아 보려는 정신이 힘있게 반영된 점이 특징이다.
 그러나 정약용은 자기 작품들에서 봉건 사회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하였다. 그가 구상한 이상적인 정치는 유교적인 '왕도 정치'였다. 따라서 이와 어긋나게 행동하는 악질 관료나 중간 착취자들은 비판받지만, 봉건 제도 자체는 부정되지 않는다. 그의 시들은 이와 같은 제한성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부패한 봉건 사회의 현실을 여러 모로 폭로하고 나라의 부강과 백성의 구제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봉건 시대 말기의 사실주의 문학이 발전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맺는말

사회적으로 안정되지 못했던 시기의 인물인 다산 정약용은 오늘날에 와서도 높게 평가할 만한 많은 일을 했다. 그의 여러 사상들 중에 가장 으뜸으로 뽑을 수 있는 실학사상만 보아도 그러하다. 봉건적인 제도의 폐해와 통치자들의 사대주의를 비판하고 애국적이며 진보적인 사회개혁안을 제시하고, 조선 봉건 사회의 무너져가는 정치·경제 등의 제도와 고루한 유교사상을 폭로하기도 했다. 이는 다산이 백성이 전시에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수호할 것이라는 '자기 보위'사상을 제기하였고, 또 그것을 상술한 '여전제' 실시와 결합시켜 '병민 일치'·'병농 일치'를 실현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도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볼 수 있다.
 다산은 훗날 개화사상과 애국계몽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등 자본주의적·민주주의적 사회형태를 예견하는 자산계급 계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참 고 문 헌 】
 1. 『실학파의 철학사상』, 주칠성, 예문서원, 1995
 2.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상)』, 조동걸·한영우·박찬승, 창작과비평사, 1994
 3. 『한국의 실학사상, 강만길』, 삼성출판사, 1994
 4. 『정 다산 연구의 현황』, 강만길, 민음사, 1986
 5. 『실학연구 입문』, 역사학회, 일조각,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