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지역의 사찰에 대하여
 
 
98' 정대원
 

머리말

전남(全南)에는 이른바 사찰(寺刹) 21본산 가운데 5대 본산이 있으며 특히 선문(禪門)이 많다. 선문이라 하면 흔히 9산을 들지만 그 가운데 3산이 이 고장에 있으니 가히 선종(禪宗)의 탯자리라 할 만하다. 선문은 장흥의 보림사(寶林寺). 지리산의 보림사(寶林寺), 곡성의 보림사(寶林寺)등이다.
 뿐만 아니라 16국사를 낸 승보사찰 송광사를 비롯하여 유서 깊고 뼈대있는 큰 사찰이 많고, 비록 작고 쇄락하였으나 반듯한 법통을 지닌 사찰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사찰 본래의 기능을 갖는 전각들 이외에 전쟁과 관련된 건물들도 사찰의 경애에 건립되어 있다. 또한 기복신앙과 무속신앙에 따라 전각들도 부가되어 경내에는 수십 개의 전각과 요사체, 승방, 선방, 칠성각, 산신각 등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화엄사는 계곡에 위치한 사찰이지만 그런 대로 중심 측의 성격을 유지하면서 일주문, 금강문, 보제루, 양탑, 대웅전 등이 배치되어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송광사는 넓은 경역내에 축이나 대칭의 성격이 없이 무탑형식인 사찰이다. 특히 승보사찰(僧寶寺刹)로서 부족함이 없이 수많은 승방과 선방이 넓은 중정을 중심으로 위치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국사전과 조사당등은 사찰의 전각 중에서 품격과 고격을 갖춘 유구로 유명하다.
 대흥사는 다소 무질서 할 정도로 각종 성격을 지닌 영역들이 혼합되어 있는 사찰이다. 넓은 경역을 갖춘 사찰이지만 금당의 영역은 다소 좁게, 그 외에 천불전(千佛殿)을 중심으로 한 일곽 등 다소 산만하게 짜여 있어 어느 것도 원형에 가까운 모습은 아니다. 대흥사의 원래의 모습은 해탈문(解脫門) (현재의 침계루) 밑을 지나는 시냇물을 기준으로 남원(南院)과 북원(北院)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하나 그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이들 주요사찰 이외에도 전남지방에는 수많은 사찰과 암자가 있다. 이중 전통사찰로 등록된 사찰과 암자의 수는 76개소이며 이들 이외에는 신흥사찰로서 현대식 건물에 전형적인 사찰의 품격을 잃고 있는 것들이 수 없이 많다. 이들이 사찰로서 성격을 많이 잃고 있으며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주술적이고 기복적 신앙을 갖는 신도들에게는 위안처임을 부정할 수 없다.
 
 

전남지방의 사찰
 

1.전남지방사찰의 유래

전남(全南)은 백제가 삼한중의 마한 국을 국력신장으로 통합을 이루는 과정에서 동진에서 전래된 불교가 유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초기에는 위례성이 수도였던 만큼 그 당시 상황으로 보아 널리 포교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수도가 남쪽으로 점차 이동하면서 성왕 등을 비롯한 제왕들의 불교장려책으로 많은 사찰들이 지어지게 되었다. 전북(全北) 익산(益山)의 미륵사지를 비롯한 각종 석탑과 사지(寺址)가 이를 대변하고 있으나 전남에서는 불교유물(佛敎遺物)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존 사찰중(寺刹中) 영광군 불갑사(佛甲寺)나 나주군 다도면의 불회사(佛會寺)가 침류왕 원년(元年) 마라난타 창건이라 하나 근거가 희박하다.
승주군 선암사(仙岩寺)가 26대 성왕 7년(529) 아도화상(阿道和尙) 창건이라 하나 아도화상의 생존연대가 맞지 않아 문제가 있고 장성군의 백양사(白羊寺)가 30대 무왕(武王) 33년(633) 여환대사(如幻大師)사 창건하였다 하나 분명한 근거가 없다.
 그 이후 성왕 19년 왕이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어 열반경(涅槃經)을 가져오게 하는 등 불교진흥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한편 신라(新羅)는 선종(禪宗)이 성행하여 5교 9산으로 대별되어 불교가 발전하였는데 9산중 가지산문의 보림사(寶林寺), 동리산문의 태안사(泰安寺)등이 이 지역에 자리하여 불교진흥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의 불교종파(佛敎宗派)로는 화엄종을 비롯하여 자은(法相), 남산(戒律), 조계(禪宗), 천태, 법성, 열반, 시흥등 12종파가 있었다. 이 중에서 활약상이 큰 것은 조계종, 화엄종, 자은종, 천태종이었다.
 특히 전남에는 조계종이 현 송광사(松廣寺)를 근본도장으로 펼친 선불교중흥(禪佛敎中興)을 위한 정혜결사(定慧結社)와 화엄사상(華嚴思想)을 펼치기 위하여 천태종(天台宗)이 강진 만덕사(현 白連寺)를 중심으로 한 백연결사(白連結社)이다.
 이 운동은 고려불교 중흥의 대표적 양주류(代表的 兩主流)로서 전남이 중심이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책으로 인한 불교의 탄압으로 불교세력을 위축될 수밖에 없어 산지사찰(山地寺刹)로 그 명백을 유지할 수 있었다.
 
 

2.대표적 사찰
 

1)송광사(松廣寺)

송광사는 신라말엽에 혜린(慧璘)대사가 처음 절을 세워 길상사(吉祥寺)라 불렀던 터였는데, 고려 인종때 석조대사가 재창(再創)하려다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뒤 거의 쓰러져가던 것을 1197년 보조국사가 재창작업에 착수, 9년만인 1205년에 준공을 보았다.
 보조국사는 처음에 정혜사(定慧寺)라 했는데, 희종이 즉위하자 사호를 수선사라 고쳐 부르도록 했으며 이때부터 조계종이 크게 융성하게 되었다.
 보조국사의 뒤를 이어 진각국사가 제2세 사주가 되었는데 이 절을 찾는 승려와 신도들이 너무 많아 다시 절을 증축했다. 이 적의 전성기에는 60여동의 대소 건물이 경내를 메우고 있었다 한다.
 이 절은 승보사찰답게 많은 고승(高僧)들을 배출했는데 그 중 16국사로 알려진 분들의 보조 지눌, 진각 혜심, 청진 몽여, 진명 혼원, 원오 천영. 원감 충지, 자정 일인, 자각 도영, 잠당, 혜감 만항, 자원, 자각, 각진 복구, 정혜, 홍진, 고봉 법장등이다. 이밖에도 부휴, 벽암, 취미등 이름난 대사들을 배출했다.
 

2)대흥사(大興寺)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에 자리잡은 사찰로 서산대사 때문에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원래 묘향산에 오래 머물러 있던 서산대사는 1604년 나이 85세에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의발을 대흥사에 보내 길이 보존하도록 부탁했었다. 그 이유를 묻는 제자들에게 세 가지의 이유를 들어 설명했는데, 그 첫 번째 이유가 주변의 산세로 보아 [만세토록 불훼의 땅인 까닭]이라고 예언했던 것이다.
 대흥사는 그 뒤의 병란에도 불타거나 부서지지 않고 원래 모습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대흥사는 544년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연대가 맞지 않아 믿을 수 없고 원효, 의상, 도선등이 차례로 세웠다는 설을 의존할 수밖에 없다. 신라 말에 세웠을 것으로 보는 것은 응진전(應眞殿)앞의 3층 석탑이 통일신라때의 작품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또 고려 때의 스님 신암, 총은, 성유등의 부도가 절의 앞마당에 있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있어 고려 때에도 큰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흥사는 13대종사(大宗師)와 13대강사(大講師)를 배출했는데, 이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의 인물들로 학풍을 이어받고 있다.
 

3)화엄사(華嚴寺)

화엄사는 국립공원 지리산의 남쪽 기슭 - 구례읍 마산면 황전리에 자리 잡은 삼십일대 본산의 하나다. 서기 544년(백제 성왕22년)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웠다고 전해진다. 처음 연기조사는 해회당(海會堂)과 대웅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을 세웠을 뿐이었는데 통일신라의 문무왕 때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화엄십찰(華嚴十刹)을 세우면서 큰 가람을 이룩하였다고 전한다. 이 당시의 절의 규모는 가람이 8, 암자가 81채 나 되었다.
 이보다 앞서 서기 643년 자장율사가 절을 증축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 뒤 신라 말엽에 도선 국사가 다시 고쳐 짓고 고려 때와 조선조에 몇 차례의 중수를 거듭했으나 임진왜란때 왜군들의 방화로 잿더미가 되고 수많은 보물들도 사라져 버렸다.
 임진왜란이 끝난 40여년 뒤인 서기 1630년 벽암선사가 중건작업에 착수하여 7년만에 공사를 마무리지었으며, 1699년부터 3년간에 걸쳐 계파선사가 각황전(覺皇殿)을 다시 세웠다.
 지금의 화엄사는 중심축상에 있는 일주문, 금강문, 천황문등 세문을 거쳐 들어가면 보제루와 종루가 나란히 서있고, 보제루를 돌아서 들어서면 정면에 대웅전과 왼쪽에 각황전이 높다란 언덕 위에 우뚝 솟아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언덕 위에는 그밖에도 나한전, 원통전, 영산전등 5동의 당우(堂宇)가 늘어 서 있고, 언덕아래 동쪽에는 스님들이 기거하는 적조당이 있다.
 이 절에는 각황전 앞 석등(石燈)등 3점의 국보와 4점의 보물, 1점의 천연기념물, 2점의 지방문화재를 비롯 수많은 사보(寺寶)가 있다.
 

4)선암사(仙巖寺)

승주군 쌍암면 죽학리에 위치한 사찰이다. 사적지(寺蹟誌)에 의하면 529년 아도화상이 개산하여 비로암(毘盧庵)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신라 말기에 도선 국사가 절을 세워 선암사라고 불렀다고 하며 1092년 대각국사가 다시 절을 중건했다고 전한다.
 이 절은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지고 1660년에 중창했으나 다시 영조때 화재로 불타버려 1825년 해붕, 눌암, 익종등 3대사가 현재의 건물을 중건했다.
 절의 입구 계곡을 가로지르는 무지개대리인 승선교(昇仙橋)와 대웅전 앞뜰에 있는 두기의 삼층석탑등 보물이 있고 대웅전과 괘불, 금동향로, 도선국사직인통, 삼인당, 팔상전등의 지방유형문화재가 있다
 

5)도갑사(道岬寺)

영암군 군서면 월출산의 서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절이 도선 국사가 창건하고 그 위 조선조에 와서 수미(守眉), 신미(信眉) 두 대사가 창했다고 전해지는 도갑사이다.
 시적지에 의하면 661년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연대가 맞지 않아 믿을 수 없다.
 절을 중창한 것은 1457년인데 그때의 건물은 없고 그 보다 약산 늦은 1473년에 지은 해탈문이 남아있다. 수 년전까지도 조선조 후기에 지은 대웅전에 석가삼존과 육광보살의 금동상이 있었는데, 1977년 화재로 인하여 대웅전이 불타버렸고, 지금의 대웅전은 1979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절 안에는 5층석탑과 3층석탑이 서 있으며 대웅전에서 150m쯤 올라가는 곳에 있는 미륵전에는 보물 제89호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그밖에도 도선, 수미 두 대사의 비와 묘각화상비와 조선초기로 보이는 도선국사와 수미왕사의 영정이 있고 세로 4.7m, 가로 1.1m의 큰 돌구유(石槽)가 있다.
 

6)보림사(寶林寺)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에 있는 절이다. 신라 말엽 우리 나라에 선종이 도입되자 제일먼저 선종이 정착된 곳이기도 하다.
 보림사는 원래 원표대사가 세웠던 절인데, 759년에 장생표주를 세워 사역임을 표시했다고 전해진다. 장생표주는 지금의 장승이며, 보림사의 장생표는 신라통일 90년후에 세워진 문헌상 한국최초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장생표는 884년에 보조선사의 탑비를 세울 때까지  서 있어 그 사실이 비문에 적혀 있다.
 그러나 당시의 절은 암자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고 보림사를 실지 창건한 이는 염거의 제자인 보조체징(普照體澄)이다. 860년 종전에 있던 암자를 확장하여 이곳에 절을 세웠는데 금 160푼(分), 벼 2,000섬을 모아서 2년만에 준공시켰다. 그 뒤의 증측으로 한때 20여채나 되던 절이 6.25의 병화로 불타버리고 옛날 건물은 사천왕문이 남아 있을 뿐이고, 그 뒤 재건한 대적광전(大寂光殿)에 철조비로사나불좌상(鐵造毘蘆舍那佛坐像)을 모시고 있다. 불타버린 대웅전은 화엄사 각황전과 함께 우리 나라에 흔하지 않은 중층건물이었는데 근래에 복원하였다.
이 밖에도 원효사(元曉寺), 천관사(天冠寺), 백양사(白羊寺), 운주사(雲住寺), 미황사(美黃寺), 불회사(佛會寺), 백련사(白蓮寺), 만덕사(萬德寺), 불갑사(佛甲寺), 연곡사( 谷寺), 태안사(泰安寺), 천은사(泉隱寺)등이 있다.
 
 
 

맺는말

호남지방 하면 지금의 전라도 지방인데 그 지역은 옛날 백제가 자리잡고 있던 지역이다. 백제에 불교(佛敎)가 도입된 이후 불교는 점차 남하(南下)하면서 그 영향력이 증대되었고, 광주, 전남(光州, 全南)지역까지 교세가 본격적으로 성행되면서 고찰(古刹)과 대찰(大刹)이 지어지고, 명승(名僧)이 배출되는 등 찬란한 불교문화의 주역을 담당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