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에 대하여

                                                                                                  

 
95' 정문수
 
 

◎ 백성 고난속에서 퍼 올린 시문학 정수

다산(茶山)정약용(丁若鏞)이 남긴 수많은 저술과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우리는 고통과 좌절 속에서도 스스로를 굽히지 않을 때 학문과 예술이 활짝 꽃피울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린다.
 국토의 최남단, 전라남도 강진! 다른 볼거리도 많겠지만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초당이 자리잡고 있기에 강진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유배 기간중 방대한 저술

정약용은 18년간을 한반도의 끝자락 강진에서 실의와 울분을 달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한편, 본격적인 학문연구와 저술활동에 힘을 쏟았다.'목민심서' '경세유표'등을 비롯한 수많은 저작을 집필하고 경전에 대한 방대한 고증작업을 진행했다.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저서는 경전을 풀이하고 해석한 것이 2백32권이고 문집이 2백60여권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그 대부분이 유배기간에 이뤄졌다. 그는 그곳에서 당시 민중들의 생활을 직접 대면하고 체험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젊은 시절의 개혁적 정치성향과 비판의식을 더욱 예각화 구체화시킬 수
있었다.
 

 
불우한 시대 학술로 승화

다산은 조선후기의 위대한 학자일 뿐만 아니라, 시인이며 문장가로도 탁월하였다. 그의 문학적 성취 가운데 가장 정채로운 부분 또한 18년간의 유배지에서 이룩된 것들이다. 그런데 다산이 자신의 불행을 극복한 것은 그보다 더 심각한 사회적 고통을 발견하면서 그것을 현실의 한 부분으로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다산은 "개인의 감정이나 신변잡사를 토로하는 데 그치는 것은 시가 아니다"고 하였다.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한탄하고 실망하는데 머물지 않고 백성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그 아픔을 국가와 사회로 확대 승화할 때 참다운 시가 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사상과 학술의 방면에서 다산이 자신의 고통을 딛고 당대 사회의 모순에 더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시에 있어서도 자신의 비운을 극복하면서 주위의 구체적 현실을 인식하고 생생하게 작품화할 수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강진에서의 유배기간이 삶과 문학을 바라보는 새로운 안목을 얻게 해주었다. 그렇기에 다산은 "유민들이 길을 메우자 마음이 쓰라리고 보기에 처참해 살고 싶은 의욕마저 없어졌다"고 하며 거리와 들판에 버려진 백성들의 참혹한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 일련의 작품들을 창작했던 것이다.
 

 
당대 모순 속에 깊은 통찰

그 중에서 한 예를 들어본다. 강진에서 직접 목격한 충격적인 사건을 다룬 '애절양(哀絶陽)'은 그가 남긴 대표작중 하나다. 1803년에 강진의 갈밭마을에 사는 한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만에 군적에 등록되고 소까지 빼앗겼다. 이에 그 사람이 칼을 뽑아들고  "내가 이것 때문에 곤액을 당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생식기를 베어버린 사건이었다. 다산은 이 기막힌 사건을 역사적 철학적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다뤄 당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폭로하는 하나의 전형으로 그 의미를 확장시켰다.
 "이리여, 승냥이여!/삽살개 이미 빼앗아 갔으니/닭일랑 묶어가지마라/자식은 이미 팔려갔고/내 아내는 누가 사랴" 강진에 머물며 쓴 '전간기사(田間紀事)'의 일부다. 다산의 표현대로 당시 백성들은 '물과 불에서 울부짖으며 뒹구는' 참혹한 현실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시인은 아전들의 횡포를 이기지 못해 정든 고향과 삶의 터전인 농토를 뒤로 한 채 머나먼 유랑길에 나서는 한 가장을 등장시켜 분노에 찬 그의 말을 빌려 당대 사회의 모순된 것들을 날카롭게 형상화했다.
 이 시에서 시인은 민중의 극심한 참상과 고통을 노래했고, 곳곳에서 저주하며 원망하고 울부짖는 사람들의 모습을 예리하게 그려냈던 것이다. 이러한 다산의 비판정신은 '굶주리는 백성' '송충이' '여름날 술을 마시며' '용산촌의 아전' 등 그의 시편들 전체에 일관되어 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 오히려 그것을 더 넓고 깊은 학문·사상·문학의 세계로 심화 발전시킬 수 있었던 인물, 자신의 불행에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더 넓고 깊은 사회현실의 지평으로 끌어올렸던 인물-바로 여기에 정약용의 위대함이 있고, 그의 문학이 성취한 깊은 울림이 있다.
다산 정약용도 그림을 그렸다. 한국 사상사에 가장 찬연한 업적을 남긴 조선 실학의 최고봉 다산 뜨거운 애민 정신으로 전남 강진에서의 유배생활 18년을 꼿꼿이 견뎌내고 '목민심서'와 같은 역저를 집필했던 다산. 그 강진에서 다산은 그림도 그렸던 것이다.다산의 그림은 '사사로운 감정에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강인한 사상가였을 것이란 우리의 통념을 일거에 무너뜨린다. 두고 온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이 뚝뚝 묻어나는, 애틋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바로 '매화병제도(梅花屛題圖·1813·고려대박물관)' 매화꽃 핀 나뭇가지에 참새 두마리 그래서 '매조도(梅鳥圖)'라고도 한다.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해 보이지만 그 사연을 들여다보면 다산의 절절한 그리움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유배생활 13년째 되던 해 여름에 그린 이 매조도는 위쪽에 매화와 참새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 시 한편과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이 적혀 있다.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한지 몇 해후 부인 홍씨가 해진 치마6폭을 보내왔는데 너무 오래 되어 붉은색이 다 바랜 것이었다.
그것을 오려 족자 4폭을 만들어 두 자식에게 주고 또 그 나머지로 이 그림을 그려 딸아이에게 전했다. 부인이 보내준 비단 치마를 오려 딸에게 보내는 그림을 그리다니 유배지 삶의 곤궁함과 자식에 대한 그리움이 대체 어느 정도였기에 ….
전문가들은 다산의 내면 세계를 읽어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이 작품을 꼽는다. 그림 내용도 사연 못지 않다. 우선 저 먼데를 바라보는 새의 모습이 무척이나 안쓰럽다. 다산의 애틋한 부정(父情)이라고 할까 매화의 꽃망울이나 참새의 자세는 단아하고 깔끔하다. 봄날의 정겨운 시정(詩情)을 포착한 다산의 눈이 해맑고 차분하다.
 약간 서툰 듯한 필치는 오히려 유배지의 적요로운 풍경과 다산의 맑은 심성을 돋보이게 해준다. 뿐만 아니라 두고 온 고향, 두고 온 자식, 두고 온 조선 백성에 대한 그리움까지 이 모든 내면세계는 어떠한 꾸밈이나 가식도 없이 진솔하고 순수하게 표출되어 있다.
 유홍준 영남대 교수(한국미술사)는 "붓의 쓰임새가 단조롭고 먹빛과 채색의 변화도 구사하지 못했건만 화면 전체에 감도는 눈물겨운 애잔함이란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것" 이라고 상찬(賞讚)한다.
 봄 풍경을 타고 전해오는 아련한 슬픔 매조도의 감동은 그래서 깊고 그윽하다. 다산의 글씨도 마찬가지다. 이 서체는 그의 대표적인 행서체(行書體·정자체와 초서체의 중간) 단정하면서도 기우뚱한 서체는 상쾌하고 순수한 개성미와 다산의 강단(剛斷)을 잘 담아냄으로써 매화 참새 그림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다산의 인간적 체취가 흠씬 배어 있는 그림,매조도 지금 고려대박물관에 가면 그 애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