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의 이곳저곳...
 
 
98' 신현선
 

1.무등산

높고 낮은 등급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무등산은 높이가 1,187 m으로 웅대하면서도 어머니의 앞가슴과도 같이 포근한 산이다. 그러나 막상 산에 오르면 천왕봉 등 산꼭대기들이 기기묘묘하여 신비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특히 서석대와 입석대는 전국의 많은 사진작가들의 플래시 세례를 가장 많이 받았을 만큼 바위들의 자태가 압권이다.
 무등산은 면적이 자그마치 30.23㎢로 광주시와 전남의 화순, 담양에 걸쳐 있으며 고려 때는 서석산으로 부릴 다가 조선시대부터 무등산이라 부르고 있다. 육당 최남선은 "무등산의 규봉암, 입석대, 서석대의 3명소를 일컬어 금강산에도 여기에 비교할 경승이 없으며 특히 서석대는 마치 해금강을 산위로 옮겨 놓은 것 같다."고 격찬한 바 있다. 산에 오르면 계절에 따라 봄에는 진달래, 여름에는 산나리와 맑고 시원한 폭포,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눈꽃 등 그 절경이 보는 이의 감동을 자아내게 한다.
 무등산의 대표적인 사찰로는 중심사를 들 수 있다. 신라시대인 9세기 중엽 철감선사가 창건하였으며 4차례의 중수를 거쳤다. 6.25때인 1951년 거의 불타버려 국보 제211호, 제 212호인 금동석가여래입상과 금동보살입상도 이때 잃어버렸으며 지금의 건물들은 1970년에 지어졌다. 중심사에 남아있는 유물로는 9세기쯤에 만든 이 지방의 비로사나불을 섬기는 신앙이 있었음을 알리는 보물 제131호인 철조비로사나불좌상이 있다. 특히 대웅전 뒤편에 있는 오백전은 석가의 유교결집을 위해 모였던 오백명의 아라한을 뜻하는 오백나한과 석가의 열제자를 뜻하는 십대제자상이 모셔져 있다.
 무등산을 대표하는 것으로 또 수박을 들 수 있다. 무등산 수박은 추석이나 음력 시월에 생산된다. 보통의 수박들이 7월만에 생산 가능하도록 파종과 재배기간을 맞추지만 추석 절쯤에 수확할 수 있도록 맞추다보면 기온이 낮아져서 재배기간이 20일정도 길어진다. 무등산 수박은 대가 20㎏가 넘는 것이 많아서 과일중의 왕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크다. 한 덩굴에 여러 개의 열매가 맺는 것을 방지하고 그 중 가장 가능성 있는 것만을 남겨 온갖 정성을 다해 키우기 때문에 크기만큼이나 값도 비싼 편이다.
 
 
 

2.광주학생운동의 시발인 나주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이래 민족의 주체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생이다. 전국적인 항일학생운동으로 번진 이 사건의 발단은 지금의 나주 역에서 한 학생에 의해 점화된 것이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에서 광주간 통학 열차 속에서 광주중학교 일본인 생도 전중 ,복전,말길 3명이 광주여고보생도 박기옥을 희롱하므로 박기옥의 아우 광주고보생 박준채가 책망하자 일본학생들이 덤벼들어 싸움이 시작되었으나 역원의 제지로 일단 헤어졌다.
 이 학생 희롱사건이 발단이 되어 11월 3일 광주중학생과 광주고보생간에 대난투 연출후 시위가 벌어졌는데 차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149개교 15만 4천여명의 학생들이 민족주체성과 애국심에 불타 거국적인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신을 길이 빛내고 후배들에게 깊이 새기기 위해 나주고교 뒤편에 광주학생독립운동 진원비가 세워져 있다.
 

3.지리산

지리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먼저 이 산의 웅장함에 넋을 읽는다. 소백산맥 최남단에 우뚝 솟아오른 지리산은 면적 438.92㎢에 동서 60㎞, 남북 32㎞, 둘레 320㎞로 8백리에 이르는 광활한 산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남 구례군을 포함, 3개도 5개군에 걸쳐 있으며 지난 67년 1월 29일 국내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예로부터 지리산의 이름은 여러 가지였다. 봉래산(금강산), 영주산(한라산)과 더불어 신선이 내려와 살았다는 삼신산 (三神山)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 그리고 백두산으로부터 뻗어 내린 여러 줄기의 산맥이 남쪽으로 흘러와 그 정기가 솟았다는 뜻의 두류산(頭流山), '신성한 땅의 심오한 이치를 간직했다'는 뜻의 지리산, '특이하게 슬기롭고 지혜로운 산'이란 의미의 지리산 등 명산에 걸맞는 다양한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신라 때부터는 국가를 수호하는 다섯 산 가운데 하나인 남악으로 불린 지리산은 이 땅의 대표적인 영산으로 우리 무속신앙의 발원지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마치 남녘의 수호신처럼 버티고 선 지리산은 민족사의 격변기마다 영욕의 역사를 묵묵히 껴안아야 했던 산으로, 지금도 아물지 않은 상혼이 곳곳에 남아있다. 임진왜란과 일제 치하, 6.25 등 우리 민족의 시련기마다 역사의 격랑을 피해갈 수 없었던 지리산, 지아비를 기다리는 지어미처럼 다소곳이 가슴을 여민 이 산의 옷고름을 풀면, 그 속에는 기쁨과 슬픔이 함께 채색된 속살이 드러난다. 그래서 순결하되 생채기가 남아있는 이 산을 두고 이 땅의 숱한 시인묵객들이 때로는 저미는 아픔으로, 때로는 터질 듯한 환희로 노래했고 또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지리산의 사찰로는 화엄사가 있는데 화엄사는 노고단에서 시작돼 거대한 파도처럼 굼실거리며 들녘을 향해 내닫던 좌우능선이 걸음을 멈춘 지점에 자리한 화엄사는 주변의 수려한 산세에 화답하듯 장엄한 건축미를 자랑하는 고찰(古刹)이다. 지리산 영봉의 깊은 계곡에 안긴 채 옥계청류(玉溪淸流)의 빼어난 풍광을 거느린 화엄사는 경내에 국보 3점과 보물 5점이 있어 우리 불교문화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5천년고찰로 명성을 이어왔으며 그 이름에 걸맞게 연중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절이다. 화엄사 각황전(覺皇殿)은 장륙전(丈六殿)이란 이름으로 670년 (신라 문무왕 10년) 의상대사가 세운 법당으로 당시에는 사방 벽에 화엄석경을 새겼다는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장육전은 임진왜란 대 소실되고 , 지금의 각황전은 1699년(숙종 25년) 계파선사에 의해 중건됐다. 현존하는 목조건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인 각황전은 그 웅장한 외양(外樣)으로 관광객들의 시선을 압도한다. 각황전 앞 뜰에 서 있는 석등(石燈)은 높이6.3미터, 직경 2.8m으로 국내 최대규모의 석등이며 통일신라시대 불교 중흥기의 찬란한 조각예술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국보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각황전 왼편 효대(孝臺)라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4사자(獅子) 3층석탑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며 세운 탑으로 특이한 의장과 세련된 조각 솜씨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걸작(국보 제35호)으로 손꼽힌다. 한 걸음씩 백팔 계단을 올라, 의연한 노송이 병풍처럼 탑을 옹위하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아들한 세월의 벽을 뛰어넘어 연기조사의 효성이 오늘에 이른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화엄사 경내의 보물 가운데서도 대웅전양편에 서 있는 5층탑은 뛰어난 조형성과 섬세한 장식이 눈길을 끄는 신라시대 작품으로 각각 보물 제132호 (동), 보물 133(서탑)로 지정돼 있다. 이 밖에도 대웅전과 원통전 사자탑, 석경, 보제루 등도 각각 보물로 지정되어 있어 화엄사의 역사와 규모를 웅변해 준다. 낭랑한 독경 소리가 흐르는 계곡 물소리와 어우러져 산사(山寺)의 그윽한 정취를 더해주는 화엄사에서 관광객들은 불교 문화의 진수(眞髓)를 만끽하게 된다.
 지리산의 별미로는 산채정식이 있다. 심산유곡 지리산 일대에서 나오는 자연 산나물과 채소류를 주재료로 사용하는 산채요리는 남도의 음식을 즐기려는 외지인들이 꼭 한번은 시식해 볼만한 음식이다. 서른가지의 푸짐한 산나물을 맛볼 수 있는 산채백반은 공해에 시달리는 도시인들에게 새로운 미각을 느끼게 해주는데, 그 많은 산나물이 제각기 독특한 맛과 향을 지니고 있어 더욱 더 입맛을 돋군다.
 특히, 더덕구이는 영양이 풍부한 강정식품으로 맛본 사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자라선 주위에서 채취한 도토리를 갈아 만든 도토리묵도 산중의 별미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지리산 산채요리는 사계절 어느 때고 즐길 수 있는데, 새순이 돋는 봄철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4.돌산대교

길이 450m, 폭 17m의 사장교(斜張橋)인 돌산대교는 여수시와 여천군 돌산읍을 잇는 연륙교(連陸橋)로, 지난 84년 완공된 이후 여수를 찾는 외지인들이 꼭 다녀가는 관광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사장교로 알려진 이 다리는 80년 12월 착공돼 4년만에 완공됐으며, 주변의 아름다운 해상 풍경과 멋진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돌산대교 아래쪽에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지휘했던 거북선이 실물 묘형으로 건조돼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인근 바다에서 잡아 올린 갖가지 횟감을 즐길 수 있는 식당이 해안을 따라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어 항상 미식가들로 북적거린다.
 

5.천하 제일 향일암 일출
 
해맞이는 장엄한 의식이다. 새해 첫날이면 전국 각지의 해맞이 명소에 몰리는 인파를 보인다. 저마다 소망을 기원하며, 자연이 전해주는 희망의 메시지를 온 몸으로 맞이하고자, 정갈한 마음으로 신새벽 일출과 마주하는 의식은 언제나 의미심장하다. 굳이 정월 초하루가 아니더라고, 일상의 삶이 조금씩 무기력해지고 새로운 자극과 충동이 필요하다고 생각되거든 주저 없이 일출의 명소로 달려간다. 그곳에서 자연이 베푸는 무한대의 기(氣)를 받아들여 삶의 에너지로 충전한다.
 여수에서 돌산대교를 거쳐 남동쪽으로 25㎞쯤 달리면 여천군 돌산읍 율림리 임포 마을에 닿는다. 가는 길도 낭만적이지만, 마을에 도착해서 바다와 마주서는 순간의 시원스런 기분은 섬 여행의 또 다른 묘미라 할만 하다. 예전에는 한적한 어촌이었던 임포 마을은 최근 들어 물밀 듯이 찾아드는 관광객들을 위해 숙박시설과 음식점이 크게 늘면서 약간은 번화한 모습으로 변했다. 그러나 선착장에 올망졸망 매여 흔들거리는 어선들과 부둣가에 앉아 갓 잡아 올린 해산물을 매만지는 아낙네들의 모습은 여전히 변함없다.
 기암절벽과 동백나무를 비롯한 아열대 식물의 울창한 수림이 장관을 이룬 마을 뒤편 금오산(金鰲山)은 멀리서 바라보면 거북의 형상을 쏙 닮았는데, 이 산의 정상 부근에 자리한 향일암은 신라 선덕여왕 13년(644) 원효대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암자다.
 
 

6.최익현과 지장암(指掌巖)

면암 최익현 선생의 친필 '기봉강산 홍무일월(箕封江山 洪武日月)'의 8자는 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우리 나라 서남해의 고도인 흑산면 천촌리에 있는 손바닥 바위에 새겨져 있다. 또한 면암 최선생적려유허비는 선생의 고매한 애국정신과 후학양성을 위한 인자함을 잊지 못해 1924년 9월에 문하생 오준선 임동선 등이 뜻을 모아 지장암 바로 앞에 세운 것이다.
 선생은 1833년 음력 12월 순조때 경기도 포천현 내북면 가거리에서 동중추 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존명은 익현 자는 찬겸 호는 면암이다. 당시의 거유 화서 이항로 선생에게 글을 배웠고 22세때 반궁에서 수업했으며 1855년 춘도기 명경과 순통으로 급제했다. 그후 사헌부지평, 사간원정이조정랑을 거쳐 승정원동부승지에 임명되었고 이때 대원군의 세도를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귀양갔다.    1876년 1월 고종 13년 왜선이 강도에 들어와 강화수로조약을 강요하자 선생은 도끼를 매고 광화문에 나가 "왜적을 물리치지 않으려면 신의 목을 베라"고 엎드려 상소했다. 이것이 유명한 오불가척화의소(五不可斥和議疎)이며 목숨을 건 애국충정에도 불구하고 천리나 떨어져 있는 외로운 섬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1879년 3년여의 귀양 끝에 모든 관적을 사양하고 고향에 은거했으나 을사보호조약으로 나라의 주권이 박탈당하자 1906년 73세의 노령에도 항일의병을 일으켜 무력 항쟁하다 붙잡혀, 적지인 대마도에 갇히는 몸이 되었고 쌀한톨 물한모금 마시지 않고 굶어 순절했다.
 면암은 이곳 흑산도 귀양 중에도 진리에 큰 서당을 세워 후학들을 가르쳤고 천촌리에 옮긴 뒤로는 일심당이란 서당을 건립하여 마을사람들의 개화는 물론 많은 후학들에게 애국애족의 자주정신을 심어주었다. 선생이 친필로 써서 손바닥 바위에 새겼다는 '기봉강산 홍무일월'이란 글도 우리 나라가 이미 오랜 옛날부터 있었고 독립된 대한제국임을 강조하여 쓴 글이다. 또한 지장암 앞에 세운 유허비의 내용도 비록 유배의 몸일지라도 나라를 걱정하고 후학들을 가르쳤던 공적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면암선생이 진리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서당샘이라는 조그만 우물을 파서 마셨는데 귀양 집의 초가지붕이 스레트로 개조되었고 우물만이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서당샘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이유는 면암선생이 골라낸 그 물맛이 뛰어나기 때문으로 지금도 동네사람들이 소중히 간직하는 샘물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