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의 끝자락
순천

예로부터 "순천 가서 인물 자랑 말고, 여수 가서 돈 자랑하지 말라" 했다. 산수 빼어난 순천에 인물 좋은 이 많고, 번화한 항구이자 공업도시인 여수 살림이 튼실한 건 당연하지 않을까?
 소설 『태백산맥』의 주무대였던 것처럼 순천은 태백산맥의 끝자락에 놓여 있다.
순천은 본래 백제땅에 속한 감평군이었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승평군이 되었고, 고려 충선왕 2년(1310)에 순천부로 개편되어 처음으로 순천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당시 순천부는 여수현, 돌산현, 부유현 등을 거느렸으며, 조선 태종 13년(1413) 순천도호부로 승격돼 순천과 여수 지역을 포괄하였다.
 1949년에는 순천읍이 시로 승격되어 승주군과 분리되었다가 1995년 다시 순천시로 통합되었다.
 조계산은 높이는 884m이지만 우람하면서도 부드러운 산세를 간직한 순천의 명산이다. 산 자체도 호감가지만 무엇보다 조계산의 명성을 높이는 것은, 산의 이쪽 저쪽에 한치의 양보 없이 동등한 무게로 자리잡고 있는 송광사와 선암사이다.
 송광사는 고려 당시 불교계를 개혁코자 했던 보조국사 지눌이 송광사에 뿌리를 내리고 수선결사의 수행처로 삼은 인연으로 오늘날까지도 그 정신을 계승한 조계종 본산으로 자리 매김되었고, 선암사는 고려시대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적 요소를 가미하여 중국과는 다른 천태종을 내세운 대각국사 의천과 인연이 닿아 있다. 천태종은 조계종과 더불어 우리 불교사상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맑고 시원한 계곡을 따라 울울한 숲에 자리잡은 송광사가 활기 있고 역동적인 분위기라면, 선암사는 다독다독 살림살이를 매만지는 아낙네의 살가운 손길이 감칠맛나게 느껴진다. 이 두절은 요모조모 비교해도 쉽사리 우위를 가릴 수 없는 좋은 사찰들이다. 선암사에서는 조선시대 읍성의 원형을간직하며, 우리 옛 마을의 정취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낙안읍성이 가깝다.

 
아득한 기억의 저편
낙안읍성마을

 노릇한 초가지붕과 사립문, 정겨운 돌담과 고샅, 시렁에 매달린 메주와 마루 한 끝에 놓인 늙은 호박, 동틀녘에는 닭이 울고 저녁 해거름에는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붉은 노을 속으로 피어오르는 마을. 1960년대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초가지붕이 슬레이트나 양기와로 교체되기 전만해도 우리는 아주 오래도록 그렇게 살았다. 5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절의 일인데도 그런 마을은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만 그리움으로 묻혀 있다. 그러나 낙안(樂安)에 가면 그런 마을을 실제 만날 수 있다. 낙안의 기록은 마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 간다. 그러니까 낙안은 1,5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백제 때에는 파지성(波知城)이라 불렸고, 고려 태조 23년(940)에 비로소 낙안이라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주변의 여러 고을을 관장하는 행정중심지이자 남해안을 지키는 군사요지로 번화했지만, 1910년 일제의 행정개편으로 폐지되어 순천군에 편입되었다. 그후 주변의 편리한 도로교통을 따라 새로운 도시들이 성장하면서 낙안은 중심지 기능을 잃고 말았다. 그런 낙안이 민속마을로 지정된 것은 1983년 낙안읍성 옛터가 사적 제302호로 지정되면서이다.
 낙안읍성은 인위적으로 조성된 민속촌이 아니라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실제 마을이라는 점이 어느 민속 마을과는 다르다. 낙안마을이 낙안읍성마을로 불리는 것은 마을을 둘러싼 성곽 때문이다. 대개 성곽이라고 하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나 산기슭에 자리잡은 산성을 떠올리게 되는데, 낙안의 성곽은 산에 의지하지 않고 평지의 마을을 둘러싼 읍성이다. 본래 낙안읍성은 태조 6년(1397)에 흙으로 축성되었다고 한다. 이후 1424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돌로 다시 쌓으면서 성의 규모가 커졌는데, 『세종실록』에 의하면 당시 "둘레 2,865척, 높이는 9.5척, 여장이 420개로 높이가 2.5척, 옹성 없이 문이 세 곳이었고, 적대는 12개가 계획되었으나 4개가 만들어졌다. 성안에는 우물 2개와 연못 2개가 있었으며, 성밖의 해자는 파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문의 보호시설인 옹성이 설치되고, 여장은 모두 붕괴되었다.
 현재 읍성의 출입문으로 이용되는 동문에서 남문 사이의 성곽이 가장 온전히 남아 있는데, 이는 남해, 순천만을 통해 내륙으로 쳐들어오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성이므로 특히 왜구가 들어오는 남쪽 부분이 튼튼하여 지금까지도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짐작된다. 성의 북쪽 부분이 상대적으로 많이 허물어진 것은 왜적이 들어오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다소 약하게 지어졌으리라 여길 수도 있지만, 실제로 여,순사건 때 산속에 있는 사람들이 자주 마을로 넘나들면서 파괴된 것이라 한다.
 낙안읍성을 돌아볼 때는 동문으로 들어가 문 위의 낙풍루(樂豊樓)로 올라가서 성곽을 따라 한바퀴 돈 뒤 마을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특히 남문을 지나 성의 북쪽으로 돌계단이 이어지는 곳에서 내려다보는 마을정취가 가장 좋다. 민속자료로 지정된 가옥을 한채 한채 따져보다 보면 구수한 맛이 덜하게 되고, 또 마을 안의 민속주점들 탓에 한껏 마음과 시선을 주기 힘든데, 이곳에 올라보면 이런 단점이 묻히고 마을 전체의 푸근한 모습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이 자리에서는 낙안읍성마을을 둘러싼 자연경관도 매우 아름답게 조망된다.
 드넓은 낙안벌 너머로 북쪽은 금전산, 동쪽은 오봉산과 제석산, 서쪽은 백이산, 남쪽은 백이산 줄기에서 떨어진 옥산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땅은 넓고 백성이 많이 살며 한 지방이 평평하게 뻗쳐 있어 남방의 형승지로는 이곳이 제일이다"라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칭찬한 낙안 풍광 그대로이다.

삼보(三寶)사찰
송광사

 조계산의 서쪽 기슭에 자리잡은 송광사(松廣寺)는 사찰의 '큰집'이라 할 만하다. 무엇보다 송광사를 '큰집' 답게 하는 것은 송광사가 지니고 있는 우리 불교계의 가장 큰 종단인 조계종의 근본 도량이자 승보사찰이라는 명예이다. 승보사찰은 불교 교단을 이루는 세 가지 요소인 불(佛) (法) (僧) 가운데 승, 곧 훌륭한 스님이 많이 배출된 사찰을 말한다.
 송광사는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 고봉국사까지 열여섯 분의 국사(國師)를 배출하였다. 국사는 나라가 인정하는 최고의 승직으로 시대를 대표하는 승려를 일컫는데, 그런 국사가 한 절에서 열여섯 분이나 배출되었으니 세세손손 절의 자긍심이 될만하지 않겠는가. 본래 송광사는 신라 말 혜린선사에 의해 창건된 길상사(吉祥寺)라는 자그마한 절이었다. 이 길상사가 큰절로서 규모를 갖추고 새 불교사상의 중심지로 이름을 얻은 때는, 보조국사가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定慧結社)의 중심지로 삼은 고려 명종 27년(1197)부터 희종 원년(1205)에 이르는 시기이다. 정혜결사란 고려 후기 불교계가 밖으로 정치와 지나치게 밀착하여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안으로는 교(敎)와 선(禪)의 대립으로 혼탁해지자 보조국사를 중심으로 기존 불교계를 반성하고자 펼친 수행운동을 말한다. 보조국사 이후 참선과 지혜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라는 수행기풍은 조선 오백년을 거쳐 오늘날까지 우리 불교의 사상적 기둥을 이루고 있다.
 송광사라는 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송광의 송(松)을 파자(破字)하면' 十八公'이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펼친다는 뜻이니, 국사 열여덟 분이 배출될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이름 풀이대로라면 16국사 이후 국사에 해당할 만한 큰스님 두 분이 더 배출되지 않을까 싶다. 16국사의 영전을 모셨던 국사전의 내벽이 18칸인 것도 그런 상상을 현실감 있게 만든다.
 송광사는 보조국사 이후 2대 국사인 진각국사와 조선 왕조가 성립된 직후의 16대 고봉국사에 의해 각각 크게 중창되었으나 정유재란으로 절이 크게 불타고 승려들이 쫓겨나는 수난을 겪었다. 이후 인적이 끊겨 폐사 지경에 이르렀는데 임진왜란 전후에 서산대사와 쌍벽을 이룰 만큼 법명이 높았던 부휴대사(浮休大師,1543∼1615)가 들어와 송광사의 명맥을 다시 이었다. 이후 송광사는 헌종 8년(1842)에 큰 불을 만났으며 그 이듬해부터 철종 7년(1856)까지 다시 크게 중창되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파손되었다가 조금씩 복구 중창되었으며, 근래에는 대웅보전을 새로 짓는 등 대규모 불사가 있었다.
 현재 송광사는 건물 50여 동의 사찰로 작지 않은 규모이지만, 이미 고려 명종 때부터 건물 80여 동을 갖춘 대가람이었고, 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그 규모가 유지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건물이 많았기에 송광사에는 비가 오는 날에도 비를 맞지 않고 자유롭게 경내를 오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호남의 명산 조계산에 자리잡은 송광사에 이르는 길은 맑은 계곡과 시원한 솔숲,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고 포근한 주변 산세가 이어져 가벼운 산행 길로 안성맞춤이다.
 1925년 봄, 육당 최남선은 『심춘순례』(尋春巡禮)에서 송광사 가는 길의 기쁨을 "빽빽하여지는 송림과 철철거리는 계류와 둥글뭉수레한 멧부리가 유양불박(悠揚不迫)하게 짜놓은 동부(洞府), 조계산의 첫 인상은 드부룩함이었다. 무어랄 수 없어도 푸근한 생각이 나는 장자(長者)집 호정(戶庭)에를 든 것 같다"고 묘사하였다. 벌써 70년이 지난 송광사의 풍광이지만 최남선의 송광사에 대한 감동의 표현은 여전히 유효하다.

※불가에서는 불ㆍ법ㆍ승을 불교 교단 형성의 세 가지 요소로 꼽는다. 이 가운데 한가지 비중이 크게 드러나 절의 특성을 이루기도 하는데, 송광사는 보조국사 지눌을 비롯한 16명의 국사를 배출하고 그 영정을 보관하고 있으므로 승보사찰, 통도사는 지장율사가 가져온 석가모니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모시고 있어 불보사찰, 해인사는 고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어 법보사찰로 불리며, 이들 세 사찰을 일러 삼보(三寶)사찰이라 한다.
 

▲청량각에서 천왕문까지의 진입 영역
 송광사 청량각
절 아래쪽 상가를 지나 계곡을 따라 한참 오르다보면 내를 가로지르는 멋진 누다리를 만난다. 송광사의 길을 여는 청량각(淸凉閣)으로, 막상 걸어 지나갈 때는 눈길이 가지 않지만 개울 쪽에서 보면 무지개다리 위에 서 있는 아름다운 정자이다. 잠시 앉아 다리쉼하며 송광사로 들어갈 마음의 준비를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청량각을 통과하면 계곡을 끼고 측백나무와 잡목숲이 나타나는데, 이 숲길은 시원스레 쭉 뻗어 올라간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 그늘을 만들지만 그다지 어둡거나 침침하지는 않아 마음이 밝아지는 기분 좋은 길이다. 그렇게 숲길에 취해 걷다보면 일주문과 함께 송광사 역대 고승과 공덕주들의 비를 모아놓은 비림(碑林)이 나온다.
 일주문은 기둥이 짧고 화려한 공포가 다소 버겁게 보이지만, 고색이 흐르는 단청과 일주문 양옆으로 낮게 질러놓은 담장에서 한결 품위를 느낄 수 있는 조선 후기의 건축물이다. 일주문에서는 '대승선종 조계산 송광사'와 '승보종찰 조계총림'이라 적힌 편액이 걸려 있어 송광사가 승보사찰로서 수선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단칸짜리 건물 두 채가 조그맣게 서 있다. 우리 나라 전통 건축물 가운데 가장 작지 않을까 싶은 척주각(滌珠閣)과 세월각(洗月閣)이다. 두 건물은 건축적으로도 그렇지만 종교적인 기능면에서도 여느 절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죽은 사람의 위패가 사찰에 들어오기 전 세속의 때를 깨끗이 씻는 장소인 것이다. 남자의 혼은 '구슬을 씻는다'는 뜻의 척주각, 여자의 혼은 '달에 씻는다'는 세월각에서 각각 세속의 때를 씻는다. 생전 인연을 끊으려는 남녀가 최후로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듯 건물모습에 조차 처연한 분위기가 풍긴다. 경내로 들어가려면 일주문을 지나 왼쪽에 위치한 능허교(凌虛橋)라는 무지개다리 위에 놓인 우화각(羽化閣)을 통과해 계류를 건너야 한다. 계류와 능허교, 우화각이 삼박자를 이루는 풍광은 경치 좋은 송광사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절경이다. 우화각 안에는 이 수려한 경치를 읊은 옛 시인 묵객의 한시가 빽빽이 걸려 있다. 임경당은 이름처럼 거울에 비추어볼 만큼 아름다운 □자형 건물로, 건물 일부가 계류 쪽으로 돌출되어 계곡에 기둥을 드리우고 있다. 지금은 종무소로 쓰인다.
 침계루는 사자루(獅子樓)라고도 불리는 정면 7칸, 측면 4칸짜리 중층 누각으로 스님들의 학습공간이다. 아래층 벽체에 환기를 위해 암기와 모양을 낸 꽃창에 드러난 명랑한 정서가 돋보인다.
 
▲종고루에서 대웅보전까지의 중심 영역
송광사 국사전

 천왕문을 지나면 먼저 종고루가 앞을 가로막는다. 종고루 아래로 난 계단을 통과해야 절의 중심이 되는 대웅보전 앞마당으로 들어설 수 있다. 대웅보전 앞마당은 종고루를 기준하여 시계 반대 방향으로 약사전, 영산전, 지장전, 대웅보전, 승보전, 성보각으로 둘러싸여 있다. 약사전과 영산전은 대웅보전 앞마당 한귀퉁이에 자리한 자그마한 건축물들이지만, 건축적인 가치가 있어 각각 보물 제302호, 제303호로 지정돼 있다. 약사전은 규모가 작은 단칸 팔작지붕집이다. 내부 천장이 대들보 없이 공포와 도리로만 메워진 특이한 건축물이다. 약사전과 나란히 서 있는 영사전은 영조 13년(1737)에 중건되었으며, 약사전보다 크기만 좀 클 뿐 건물 생김새는 똑같다. 지장보살과 시왕을 모시고 있는 지장전은 원래 명부전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을   1988년 중창 당시 현재 지장전 자리로 옮겨 지으면서 정면 5칸, 측면 3칸짜리 맞배지붕집으로 증축하였다. 담 안쪽의 여러 건물들은 스님들의 수행공간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돼 있다. 대웅보전은 1988년 새로 지은 송광사의 중심 건물로, 108평(정면 7칸, 측면 5칸)이나 되는 크기와 亞자형의 이색적인 건물 평면구조가 눈길을 끈다. 내부의 불단에는 과거의 연등불, 현세의 석가모니불, 미래의 미륵불 세 분과 문수 보현 관음 지장 보살 네 분을 모시고 있으며, 천장은 닫집으로 꾸몄다. 대웅보전 왼쪽 뒤편에는 정면 5칸, 측면 3칸 단층 맞배지붕집인 응향각이 있다. 응향각을 지나 왼쪽으로 들어서면 관음전이다. 관음전은 원래 조선시대 왕실의 원당이었던 성수각(聖壽閣)이었다고 한다. 승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지붕집으로, 중창 이전에 대웅전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현재 자리로 옮겨 지은 것이다.
 성보각(聖寶閣)은 유물 전시를 목적으로 지은 누각형 이층건물이다. 1997년 10월 개관했는데 목조삼존불감 등 송광사에 있는 국가지정 문화재와 도지정문화재들을 모두 전시하고 있다.

▲송광사의 문화재들
송광사에는 우리 불교사에서 차지하는 사격과 내력만큼이나 문화재가 수두룩하다. 국사와 전각 그리고 보물이 많다고 하여 삼다(三多)사찰이라 하기도 했다. 성보각에는 국내 최대의 사찰박물관답게 많은 문화재가 전시돼 있다.
 송광사의 문화재 가운데 국보로 지정된 것은 국사전과 목조삼존불광(木彫三尊佛龕, 제42호)그리고 고종제서(高宗制書, 제43호)이다. 높이 13.9m, 폭 7cm되는 목조삼존불감은 보조국사 지눌의 원불(願佛)이다. 이것은 지눌이 늘 지니고 다니던 나무로 만든 부처함으로, 닫으면 원통형이지만, 펼치면 가운데에 본존상, 좌우에 보현과 문수 보살이 각각 배치되는 구조이다.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는 모두 13점인데, 다음 다섯 책은 고려시대 목판대장경을 본보기로 삼아 조선시대 세조 때 다시 새겨 펴낸 목판본이다. 고려 숙종 때 대각국사 의천이 직접 감수한 「대반열반경소(大般涅槃經疏, 보물 제90호), (妙法蓮華經觀世音菩薩普門品三玄圓贊科文, 보물 제206호), 「대승아비달마잡론소」(大乘阿毗達磨雜論疏, 보물 제205호),(妙法蓮華經撰述, 보물 제206호),「금강반야경소개현초」(金剛般若經疏開玄 , 보물 제207호)그리고 고려문서 2축(高麗文書 二軸, 보물 제572호)이 있는데, 「수선사형지기」(修禪社形止記)와 노비첩이다.
이밖에 옛 승려들이 경권(經卷)을 말아둘 때 사용했던 정교한 죽공예품인 경질(經桎, 보물 제134호), 불경을 넣은 목함에 달아서 내용을 표시하는데 사용된 경패(經牌, 보물 제175호)43개, 의식이 있을 때 사용한 금동요령(金銅搖鈴, 보물 제176호)등이 있다. 최근에는 16국사 영정이 보물 제1043호로 지정되었다.
 건물 가운데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는 앞서 살펴본 하사당 약사전 영산전이 있다. 그 외 능허교 및 우화각, 보조국사비, 자정국사 사리함, 능견난사(能見難思), 금강저(金剛杵), 고봉국사주자원불(高峰國師廚子原佛), 팔사파문자(八思巴文字)등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송광사의 암자로는 천자암 감로암 불일암 인월암 오도암 등이 있는데, 송광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천자암의 뒤뜰에는 엿가락처럼 비비 꼬면서 자란 향나무가 있다. 보조국사와 그의 제자인 중국 금나라의 왕자 담당이 꽂았던 지팡이가 땅에 각각 뿌리내린 것이라고 전하는 이 나무의 나이는 800살이라고 한다. 마치 스승과 제자가 절을 하고 있는 모습처럼 서 있는 향나무의 이름은 쌍향수로, 높이 약      12.5m이며, 천연기념물 제88호로 지정돼 있다.
 비록 비공개 영역이 많은 송광사이긴 하지만 이렇게 송광사를 둘러보고 나면 육당의 말처럼 "둘러볼수록 큰 절, 옛 절, 갸륵한 절"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
 

조계산의 또 다른 라이벌
선암사

송광사가 우리 불교계의 최대 종단인 조계종의 근본 사찰이라면 선암사는 조계종 다음으로 큰 교세를 가진 태고종의 총본산이다. 선암사는 '산사'의 모범답안같이 청정하고 아름다운데 그 중에서도 특히 봄이 가장 아름답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고려 중기 선암사의 모습은 적막한 산골 속에 자리한 엄숙한 예배체였다. "적적한 시골 산골 속 절이요, 쓸쓸한 숲 아래의 중일세. 마음속 티끌은 온통 씻어 떨어뜨렸고, 지혜의 물은 맑고 용하기도 하네"라고 읊은 김극기(金克己:고려 명종 때의 문신)의 시구처럼,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선암사는 이러한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선암사는 통일시라 말기 도선이 호남을 비보하는 3대 사찰인 3암의 하나로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성왕 7년(529)에 아도화상이 세운 비로암을 통일신라 경덕왕 원년(742)에 도선이 재건하였다는 두 가지 창건 설화가 전해온다.
 고려 중기로 들어서면서 선암사는 선종 9년(1092)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크게 중창된다. 의천은 문종의 넷째 왕자로 출가한 뒤 국내외 여러 종파의 불교 사상을 두루 익혀 천태종을 개창하였다. 선암사를 중창할 때 의천은 대각암에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선종이 의천에게 하사한 금란가사, 대각국사 영정, 의천의 부도로 전하는 대각암 부도가 선암사에 전해오고 있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선암사가 자리잡은 조계산은 불교 개혁이 산실이 된다.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수한 송광사에서 보조국사 지눌이 기존의 타락한 불교계를 비판하며 정혜쌍수 내세우며 개혁불교를 부르짖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시기에 이웃한 선암사가 과연 어떤 입장을 취하였는지 관련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송광사가 사세를 떨침에 따라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리학을 정치 교육 이념으로 채택한 조선 왕조가 억불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한 조선 전기는 사찰들이 대단히 어려웠던 시기로 선암사 역시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후 선조 30년(1587) 정유재란으로 사찰이 거의 불타버리다시피 한 이후 부분적으로 중수되다가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 약휴(1664∼1738)에 의해 크게 중건되었는데 당시 선암사는 '교학의 연원' 이라 할 만큼 교학이 융성하였다. 이후에도 선암사는 크고 작은 화재를 만나 여러 차례 중창 불사되었다. 영조 35년(1759) 봄 또다시 화재를 당해 계특대사가 중창 불사를 하였는데, 화재 발생이 산강수약(山强水弱)한 선암사의 지세 때문이라 하여 화재 예방을 위해 영조 37년(1761)에 산 이름을 청량산(淸凉山)으로, 절 이름을 해천사로 바꾸었다. 그런데도 순조 23년(1823)에 다시 화재가 일어나자 해붕, 눌암, 익종 스님이 지휘하여 대대적으로 중창 불사를 하였으며, 이후 옛 모습을 되찾아 산 이름과 절 이름을 조계산과 선암사로 원위치하였다.
현존하는 선암사의 건물 대부분은 이때 지어진 것으로 당시에는 전각 60여동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8년 여,순사건과 1950년 한국전쟁의 피해로 많은 전각이 소실되고 지금은 20여동 만이 남아 있다.

▲선암사 입구
선암사 승선교

 선암사로 가는 길은 조계산 전체에 고루 드리운 짙은 나무그늘로 인해 늘 상쾌하다. 마음속 먼지까지 깨끗이 씻어내줄 듯 맑게 흐르는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숲길은 숲을 이루는 나무들이 다채로울 뿐 아니라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어서 더욱 좋다.
 이 기분 좋은 숲길을 따라 약 15분 가량 오르면 오른편 길옆으로 하늘을 찌를 듯 장대한 측백나무로 둘러싸인 부도밭이 나온다. 부도 11기와 비석 8기가 줄지어 있는데, 부도는 대부분 팔각원당형이다.
부도밭을 지나 계속 가면 길가에 장승 한 쌍이 서 있는데 특이하게도 남녀상이 아니라 모두 남자상이다. 빼어난 조형미를 갖춘 갑진년(1904), 선암사 나무장승이후 정묘년(1987)에 새롭게 세워진 나무장승이다. 갑진년 나무장승은 1907년이래 70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킨 국내 최고의 나무장승이었다. 보통은 나무장승은 10년 정도 지나면 썩어버리는데, 이 장승은 조직이 치밀한 밤나무로 만들어져 쉽게 썩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사찰 수호업무에서 퇴직하여 경내의 설선당으로 옮겨져 보호받고 있다. 장승을 지나 계속 큰길로 걸어 올라가면 왼편에 계곡을 가로지르는 작은 무지개다리가 나타난다. 이 다리를 건너 모퉁이 길을 따라 돌면 반원형의 큰 무지개다리가 나오고, 이 다리를 밟고 건너면 강선루(降仙樓)로 향한다. 두 무지개다리 중 큰 무지개다리가 보물 제400호로 지정된 승선교(昇仙橋)이다. 작은 무지개다리에서 큰 무지개다리로 이어져 강선루에 이르는 길은 강선루로 직접 통하는 큰길이 생기기 전 선암사에 이르던 옛길이다. 이 길로 들어서야 비로소 반원형의 승선교가 물에 비치어 완전한 원형을 이루며, 강선루가 이 원 안에 들어앉은 듯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강선루는 누하 정면 1칸, 측면 1칸이지만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인 2층 팔작지붕집이다. 초창연대는 알 수 없으며 1930년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측면 기둥 중의 하나가 계곡에 빠져 있는 점이 특이하다. 강선루에서 뒤를 돌아보면 굽어 흐르는 계곡물 사이로 두 다리가 크고 작게 잇달아 있어 더 운치 있다. 강선루에 올라 둘러보는 경치가 더 멋지지만 오르지 못하도록 문이 잠겨 있는 경우가 많아 아쉽다. 강선루에서 한 모퉁이를 돌면 오른쪽 길옆으로 비껴나 있는 연못을 만난다. 길다란 타원형의 못 가운데에 알 모양의 섬이 있는 특이한 모습의 삼인당(三印塘)이다. 연못의 독특한 모습은 멋을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형태 안에 심오한 불교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다른 곳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삼인당에서 일주문으로 오르는 모퉁이에는 짙은 녹음과 어울린 야생차밭이 펼쳐져 있으며, 중간중간 어느 부도비의 잔재인 듯한 조각들을 볼 수 있다.

▲선암사 경내
승선교에서 강선루에 이르는 진입 부분이 선암사의 얼굴로 손꼽히지만, 경사지에 축대를 쌓아 여러 개의 단을 만들어 점진적으로 오르면서 각각의 단에 전각 20여동을 밀도 있게 나누어 배치한 공간구성 또한 허술하지 않은 절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한몫 한다.
 선암사의 일주문은 순박한 표정의 용조각이 장식된 소맷돌이 있는 돌계단 위에 굵은 배흘림 기둥 두 개가 화려한 공포를 인 모습의 다포식 단층 맞배지붕집이다. 일주문의 배흘림 기둥은 곧바로 낮고 작은 담으로 이어져 있다. 일주문 안쪽에 걸린 현판 기록에서는 산 이름을 청량산, 절 이름을 해천사로 바꾸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일주문에서 계단을 오르면 곧장 범종루로 이어진다. 일주문과 종루 사이의 공간이 좁기 때문일까? 흔히 일주문과 종루 사이에 배치되는 천왕문 금강문 인왕문 등이 없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누각인 범종루 밑으로 난 계단을 올라서면, 정면에 '六祖古寺'(육조고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정면 5칸, 측면 2칸 맞배지붕집인 누가 길게 모습을 드러낸다. 단청 없이 나무기둥 사이에 흰 벽을 두었는데, 퍽 단아해 보인다. 이곳은 강당으로 쓰이는 만세루이다.
 육조고사라는 현판을 이곳 선암사에 붙인 것은 중국의 선승 육조 혜능이 조계산에 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선암사가 조계산에 위치한 인연을 기리기 위해서인데, 육조(六祖)를 뜻하는 한자가 육조(六朝)로 달리 표현된 것으로 추측된다. 글씨는 서포 김만중의 아버지 김익겸(1614∼1639)이 썼다고 전해진다.
 만세루를 옆으로 돌아들면 대웅전과 설선당, 심검당이 만세루와 함께 안마당을 이루고 있는 대웅전 영역이다. 이곳에서는 앞마당에 서 있는 동서 삼층석탑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외관상 크기와 양식이 비슷한 두 기의 삼층석탑의 높이는 4.7m이며 보물 제395호이다.
 대웅전 앞마당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문화재는 괘불지주이다, 괘불을 높이 내걸 수 있도록 괘불대를 세우는 데 필요한 돌기둥인 이 괘불지주의 주인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괘불의 하나로 꼽히는 선암사 괘불(6.82×12.15m)이라 할 수 있다. 선암사 괘불은 석가모니 한 분이 비단 한 면 가득 차게 그려진 그림으로 대웅전 후불벽화 뒤쪽 나무함에 보관되어 있다. 1753년 제작된 이후 나라 안팎에 우환이 있을 때나 천재 지변이 있을 때, 또는 안전을 빌 때 내걸렸다.
 단아하면서도 정중함이 절로 우러나는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식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순조 25년(1825)에 중창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대웅전 석가모니불 뒤에 걸린 탱화는 비단에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불과 8대 보살, 10대 제자, 그리고 12명의 신장상을 그린 것이다. 가로 3.65m 세로 6.5m되는 초대형 영산회상도로 영조 41년(1765)에 제작되었다. 거대한 화면을 압도하게끔 석가본존불을 초대형으로 중상단에 배치하고 다른 협시상들은 상대적으로 작게 그려놓았다. 게다가 이 협시상들은 아래쪽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작아지고 있으며, 화면 전체에 걸쳐 녹색과 붉은색이 대비되어 강렬한 인상을 준다. 선암사가 소장한 문화재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불화라 할 정도로 절에는 눈여겨볼 만한 탱화가 곳곳에 많다. 대웅전을 비롯해 각 전각과 암자에 보관된 불화를 모두 합치면 100여 점이 된다고 한다.
 마당을 가운데 두고 설선당과 마주한 심검당 역시 중앙에 조그만 마당을 둔 □자형 건물로, 설선당과 유사하다. 환기창에 수(), 해()처럼 물과 관련된 글자가 장식처럼 투각돼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선암사의 지세가 산강수약하여 전각들이 빈번하게 불타자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이와 같은 처방을 한 것이고 한다. 선암사가 화재 예방에 신경을 곤두세운 흔적은 이뿐만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때는 산 이름과 절 이름을 물과 관련된 청량산과 해천사로 바꾸기도 하였다. 대각암 가는 길목에 있는 해천당도 그런 연유로 지어진 이름이라 생각된다. 똑같은 이유로 선암사에는 원래 석등이 없었다고 한다. 근래 경내 곳곳에 큼직한 석등들이 조성되었는데 절의 내력을 염두에 두지 않은 유행 타기가 아닐까 싶어 안타깝다.
 대웅전 오른편에서 대웅전을 향해 서 있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촐한 맞배지붕집은 지장전이다. 명부의 10대왕이 모셔졌으며, 규모는 크지 않지만 선암사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화려한 조각상들이다.
 대웅전 왼편에 대웅전을 등지고 있는 건물은 응향각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는 선방이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가정집 같이 낯익다. 대웅전 영역을 벗어나 대웅전보다 한 단 높여 쌓은 축대의 계단을 오르면 불조전 팔상전 원통전 장경각이 배치된 원통전 영역으로 들어선다.
 불조전과 팔상전이 나란히 앞쪽에 자리해 있으며, 두 건물 사이로 독특한 형태의 원통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선암사 경내에서 가장 개성적인 건물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전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 정방형을 이루는 몸체에 중앙 한 칸만 합각지붕을 내밀어 전체적으로 자형 평면을 이루게 하였다. 내부도 특이하여 보가 없는 무량 구조이며, 불단이 설치된 중앙 세 면에 벽을 두르고 문을 달아 마치 집 속에 또 하나의 집을 지어놓은 것 같다. 건물 정면 어칸의 창호는 화려한 꽃창호이며, 꽃창호 아래쪽 청판에는 계수나무 아래서 방아 찧고 있는 달나라 토끼 두 마리와 파랑새를 장식해놓아 눈길을 끈다. 원통전은 조선 현종 원년(1660)에 초창하여 숙종 24년(1698)호암대사가 중수하였으며, 순조 24년(1824)에 재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통전의 두켠에서 왼쪽으로 비켜난 곳에 각종 경전을 보관하는 장경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3칸짜리 팔작지붕집인 장경각에서는 특히 돌계단 소맷돌 부분에 조각된 해태와 사자상이 눈여겨볼 만하다. 원통전의 뒤켠 오른쪽으로는 응진전 달마전 진영당 미타전 산신각이 모여 있는 응진전 영역이 있다.
응진전 영역은 마당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약간씩 밀려들어가면서 배열되어 있는데, 대문에서 볼 때는 가지런하게 보이는 것이 독특하다.
 그밖에 경내에는 창파당과 천불전 등의 전각이 있는데 대웅전 영역 왼편에 자리한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증설된 건물들이다. 창파당은 종무소와 강원으로 상용되는 □자형 건물로, 현대적 건축재료를 많이 쓰고 외벽을 유리창으로 마감한 것이 눈에 띈다.
 선암사에서 독특하게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대각암 가는 길의 해천당 옆에 자리잡은 뒷간이 그것이다. 입구에 '뒤간'이라고 쓰인 간판이 걸려 있는데, 왼쪽에서부터 읽어 '깐뒤'로 애교스럽게 불리곤 한다. 예로부터 가풍(家風)을 알려면 화장실과 부엌을 보라고 했는데, 크고 깊은데다 깔끔하고 냄새도 없으면서 고풍스러운 아름다움까지 겸비한 자형의 이 뒷간이야말로 단아한 선암사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다. 바닥의 짜임도 우수하고 내부를 남녀 구분한 것이나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도록 2열로 배치한 점도 눈에 띈다. 가장 안쪽에 앉아 벽면을 보면, 바깥 숲 속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벽의 아랫부분에 실창이 나있기 때문이다. 이 실창은 환기구 역할도 한다. 허물어지기 직전의 건물을 최근 새로 짓다시피 보수하였는데, 본래 '뒷간'의 장점을 잘 살린 채로 보수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절집 화장실로 꼽히는 뒷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