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영랑 김윤식
「모란이 피기까지는」
강진

전라남도 서남쪽 바닷가에는 육지로 오목하게 파고 들어온 강진만이 있다. 강진 땅은 육지의 갈피로 깊숙이 스며든 바다에 살을 붙이듯 만을 둘러싸고 있다.
조선 태종 17년(1417) 이전까지 강진이라는 고을은 없었다. 강진은 도강 현과 탐진 현을 합친 후, 두 현의 이름을 한자씩 따서 만든 지명이다.
 월출산 동쪽을 휘돌아 풀티재(草嶺)를 넘어 강진으로 들어서노라면 월출산은 여러 겹의 연극 세트가 정연하게 이동하듯이 산봉우리의 움직임이 마치 유장한 군무를 펼쳐 보이는 것 같다.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봄을 맞는 남도에서는 북쪽에 월출산, 남쪽에 구강포와 바다, 거기에 뜬 늘푸른 섬들과 갯벌 그리고도 산과 하천, 평야를 고루 담은 강진 땅의 풍광은 손꼽힐 만큼 두루 화창하다. 1930년대에 활동한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김영랑의 서정도 그 가운데서 익었다. 강진읍 남성리에 영랑의 생가가 있다. 칠량면 남쪽에 바로 붙어 있는 대구면은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과 함께 고려청자의 주요 생산지였다. 청자가 처음 빚어지던 10세기 무렵부터 최성기에 이르었던 12세기를 걸쳐 14세기 무렵까지 각종 청자를 구워 내던 가마터가 180여 군데나 널려 있다. 여기서 생산된 청자는 바닷길을 통해 개경으로 상납되었다. 1986년부터 강진군이 운영하고 있는 고려청자 사업소 강진요에서 청자 제작과정을 재현하고 있다. 월출산 남쪽 사면을 쳐다보며 시작된 강진 여정은 빛으로 가득한 바다에서 그 유쾌한 절정을 맞을 것이다. 다시 구강포 서쪽 기슭에 있는 만덕산 자락의 다산초당과 백련사에서 강진의 여정은 마무리가 된다.
 다산초당은 뒤에서도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다산 정약용이 18년에 걸친 유배 생활 가운데 10년을 보낸 곳으로, 개인적인 시련 속에서도 사색과 탐구, 저술을 쉬지 않았던 그의 자취를 되새겨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남도는 그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곳이다.
 

정약용의 마음
다산초당

사람의 마음에 새겨지는 아름다움 가운데 그 중 큰 것은 아름다운 사람과 그 사람의 아름다운 자취일 것이다. 강진 땅의 남도다운 아름다움은 다산 정약용의 자취로 하여 그 빛을 더한다.
 강진군 도압면 만덕산 기슭에는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이고 다산학의 산실인 다산초당이 있다. 다산(茶山)은 차나무가 많았던 만덕산의 별명으로, 정약용의 호 다산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졍약용은 장장 18년에 걸친 강진 귀양살이 가운데 10년을 다산초당에서 지내며, 언제 끝났지 알 수 없는 자기 생애의 한겨울 속에서 동백꽃처럼 붉게 학문과 사상을 피워 올렸을 것이다.
 정약용이 사학(邪學,천주교)에 물든 죄인이라는 죄명을 덮어쓰고 강진에 귀양 온 것은 순조 1년(1801) 11월이었다. 그가 처음 강진에 도착했을 때, 촌사람들은 서울에서 벼슬을 하다가 '대역죄'를 짓고 귀양 온 선비에게 겁을 먹고 앞다투어 달아날 뿐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다. 이후 강진읍 동문 밖에 있던 주막집 노파의 인정으로 겨우 거처할 방 한 칸을 얻은 정약용은 그 오막살이 주막의 뒷방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지극히 선비다운 당호를 붙이고 만 4년을 지냈다. 사의재란 생각, 용모, 언어, 동작의 네 가지를 의로써 규제하여 마땅하게 해야 할 방이라는 뜻이다. 다산은 "누구 하나 말 걸어 주는 사람도 없던 그 시절, 나는 겨를을 얻었구나" 하고 스스로 위로하며 상례(喪禮)를 연구하며 침식을 잊었다고 하였다.
1805년 겨울부터는 강진읍 뒤의 보은산에 있는 고성암 보은산방에 머물며 주로 주역을 연구했고, 그 다음해 가을부터는 강진 시절 그의 애제자가 된 이청(李晴)의 집에서 기거했다. 마침내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 귀양살이 8년째 되던 1808년 봄이었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오솔길 가에는 대나무와 소나무가 빽빽해서 대낮에도 그늘이 짙다. 제법 긴 비탈을 한동안 오르노라면 길가에 무덤이 하나 보이는데, 윤단의 손자이며 정약용의 제자였던 윤종진의 무덤이다. 여기서는 동그란 눈과 손가락이 앙증스러운 자그마한 동자석 두기가 말간 얼굴로 참으로 인상 깊다. 그곳을 지나 좀더 가팔라진 비탈길을 따라 주변이 어둑어둑하도록 동백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올라가면 곧 다산초당이다. 하지만 다산초당은 초당답지 않게 매우 크다. 이는 페허가 되었던 옛터를 다시 크게 복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초당에 걸린 '다산초당' 현판과 동암에 걸린 '보정산방'(寶丁山房,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 현판은 모두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새긴 것이다. 그중 '다산초당' 현판은 추사의 글씨를 여기저기서 집자해 만든 것이지만 '보정산방'은 김정희가 중년쯤 되었을 무렵 일부러 쓴 것 인 듯, 명필다운 능숙한 경지를 보인다. 김정희는 정약용보다 24년 연하였지만, 평소 정약용을 몹시 존경했다.    한편 동암에는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다산동암'이라는 현판도 함께 걸려 있다. 그 시절 정약용은 다산초당에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병들지 않은 것이 없는" 이 땅과 그 병의 근원을 깊이 들여다보았으며, 젊었을 때는 물론 벼슬하던 번거로운 시절에도 늘 마음에 두었던 실학과 애민(愛民)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을 것이다.
"군자가 학문을 하는 것의 절반은 수신(修身)을 하기 위함이요 절반은 목민(牧民), 즉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다.   -『목민심서』序文

푸른 하늘에 학이 날고...
고려청자가마터
 

고려청자는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도자기사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대구면은 전라북도 부안의 보안면 유청리와 함께 고려청자 생산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는 180여 군데의 가마터가 발견되었다.
 우리 나라 전역에서 발견된 옛 가마터가 400여군데 인 것에 비춰 볼 때 이곳은 우리 나라 도자기 생산의 본바닥이었다고 할 만하다. 가마터들은 정수사 근처에서부터 남서로 비스듬히 흘러 강진만으로 들어가는 용문천을 따라 밀집해 있는데, 이 일대의 가마터들에서는 고려청자가 처음 만들어지던 때의 것으로부터 화려한 전성기를 거쳐 쇠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까지 고려청자의 발전과정 전반에 걸쳐 만들어졌던 모든 기법, 기형, 색깔의 청자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대구면은 땔감으로 쓰는 나무와 질 좋은 도자기 흙이 풍부했고, 가마를 만드는 데 적당한 경사지가 있었으며 제품을 운반하는데 뱃길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청자의 주 생산지가 될 수 있었다. 또한 이곳은 위치상 월주요 등 중국 남방요 도자 기술의 영향을 받기 쉬운 곳이었다. 길 사정도 좋지 못했던 때에 청자를 수레에 싣고 덜그럭거리며 나를 수는 없었으므로, 뱃길이 있느냐 없는냐는 요즘 생각하기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물론 여기서 만들어진 청자들은 개경과 강화도의 고려 지배층에게 납품되었다. 이후 우리 나라 도자의 주류는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따라 분청사기, 백자로 이어진다. 대구면의 청자 가마터들은 사적 제68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사당리 당전마을 가마터 안에 있는 강진요에서는 600년 동안 단절되었던 청자의 맥을 이으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