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의 끝
해남

해남은 전라남도에서 가장 큰 군이며 전라남도의 남서쪽 끝에 있다. 그리고 북위 34도 17분 38초의 토말(땅끝), 우리 나라 육지의 끝이 있는 곳이다. 정치적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까닭에 이곳의 분위기는 비교적 변화가 더디고 점잖은 편이며, 해남의 바깥은 완도군과 진도군의 여러 섬이 깔린 다도해이다.
해남에는 우수영이라는 작은 항구가 있는데 지금은 작은 어항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우수영이 있던 곳으로, 해군기지를 말하는 우수영이 그대로 지명이 된 곳이다. 이곳과 진도사이는 조수의 흐름이 대단히 빠르고 우레 같은 해조음을 내므로 울돌목이라 불린다. 임진왜란 이순신 장군이 대승을 거둔 명량대첩이 이 곳에서 벌어졌으며, 이를 기념하여 숙종 14년(1688)에 세워진 명량대첩비(보물 제503호)가 우수영에 있다.
 해남 읍에서 곧장 남쪽으로 내려가면 해남 읍을 벗어나 얼마 지나지 않은 연동리에서 해남 윤씨 종가인 녹우당을 볼 수 있고, 조금 더 가면 대둔사(대흥사)가 있다. 녹우당은 전라남도에 남아 있는 민가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 된 집이기도 하지만, 이 집이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시조 시인으로 첫손에 꼽히는 고산 윤선도와 선비화가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가 살던 곳이기 때문이다. 집 앞의 유물전시관에서 윤선도의 친필 가첩과 윤두서의 그림 등 여러 가지 유물을 볼 수 있다. 대둔사(대흥사)는 장엄하리 만치 울창한 숲과 아름다운 계곡으로 유명한 두륜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통일신라 말기에 창건되었으나 조선시대에 서산대사가 의발을 전하고부터 크게 융성했으며 경내의 전각마다 추사 김정희, 원교 이광사, 창암 이삼만, 위당 신광호 등 조선 명필들의 글씨 편액이 걸려 있다. 또 조선 후기에 우리 나라 다도를 중흥한 초의선사의 자취가 밴 곳이기도 하다.

대흥사
대둔사
 처음 대둔사는 남쪽 바닷가 구석에 자리잡은 작은 절이었다. 절이 들어앉은 두륜산의 옛이름이 한듬이었으므로 절도 오랫동안 한듬사로 불렸다. 옛말에서 '한'이란 '크다'라는 뜻이고 '듬'이나 '둠'등은 '둥글다'라거나 '덩어리'라는 뜻을 가진다. 바닷가에 갑자기 큰산이 솟아 있으므로 그렇게 불렸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한듬은 한자와 섞여 대듬이 되었다가 다시 대둔(大芚)으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절도 대듬사, 대둔사로 바뀌어 불렸다. 한편, 대둔산은 중국 곤륜산(崑崙山) 줄기가 한반도로 흘러 백두산을 이루고 계속 뻗어 내려와 마지막으로 맺은 산이라 하여 다시 백두의 두(頭), 곤륜의 륜(崙)을 따서 두륜산(頭崙山)이 되었다. 두륜산의 대둔사의 이름 바뀐 사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일제 때 지명을 표기하면서 頭崙山 頭輪山으로 바뀌었고, 대둔사는 대흥사(大興寺)로 고정되었다. 절이 두륜사 대둔사(崙山 大芚寺)라는 이름을 회복한 것이 겨우 1993년, 그래서 사람들은 요즘도 대흥사라는 이름에 더 익숙하다. 일주문이나 천왕문에도 대흥사라고 적혀 있다. 대둔사는 창건 연대를 신라 말로 보았다. 이는 절 안에 있는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 된 응진전 앞 삼층석탑(보물 제320호)과 북미륵암 마애불(보물 제4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301호)이 모두 나말여초의 것임을 보더라도 대둔사는 나말여초에 창간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대둔사로 향할 때 먼저 가슴에 다가드는 것은 입구의 울울한 나무와 숲이다. 계곡 물을 왼편에 끼고 10리나 되게 이어지는 절 앞길은 아름드리 벚나무, 동백, 단풍나무등 장엄하고 장엄한 터널을 이룬 속으로 뻗어 있다. 피안교를 건너서 일주문을 지나면 곧 부도 밭을 만난다.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대둔사에서 배출된 역대 종사와 강사 스님들의 부도와 부도비가 나지막한 돌담에 둘린 채 가지런하다. 다시 해탈문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대둔사 가람이 펼쳐지는데 돌담에 둘린 건물들이 좌우로 늘어서서 얼핏보아 어디가 어딘지 모를 것이다. 이는 전체 경역이 네 구역으로 나뉘어 각각 건물들이 들어앉았고, 각 구역이 돌담으로 둘리어 떨어져 있어서 각각 독립적인 듯 보이기 때문이다. 절 안은 두륜산 골짝에서 흘러내린 물(금당천)을 경계로 하여 대웅보전이 있는 북원과 천불전이 있는 남원으로 나뉘고, 다시 남원 뒤편으로 뚝 떨어져서 서산대사의 사당인 표충사 구역과 대광명전 구역이 있다.
 보통 사찰들은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비해 대둔사의 경우에는 들어가는 입구가 서쪽이다. 그러나 해탈문에서 절 안을 바라보면 중심 축이 북원, 대웅전 쪽에 맞춰져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침계루를 지나 북원 안마당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대웅보전이 남쪽을 바라고 앉았고 그 좌우에 명부전과 범종각, 응진전이 나란히 있다. 마당 서쪽의 지붕이 첩첩한 커다란 건물은 승방인 백설당이다. 응진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은 이 절에 있는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으로 보물 제320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둔사 대웅보전
대웅보전은 고종 광무 3년(1899)에 불이 나서 다 타버린 후 새로 지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당당한 팔작 다포집이다. 정면 계단 아래 소맷돌에 얹힌 깐깐한 표정의 돌사자, 기단 위의 쇠고리 뒤에 새겨진 어벙한 돌짐승 얼굴이 눈에 띈다. 대웅보전 현판 글씨는 원교 이광사의 것이고 맞은편 침계루 현판도 마찬가지이다. 한편 백설당 지붕 밑에는 제주도로 귀양 가기 전 쓴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무량수각(无量壽閣)이라는 현판 이 걸려 있다.

▲천불전
 

천불전은 이전의 건물이 순조 11년(1811년)에 일어난 화재로 없어진 후 완호(琓虎)스님이 재건한 것이다. 정면과 측면이 모두 3칸 규모이며 지붕과 건물의 맵시가 매우 경쾌하다. 이 현판 글씨도 역시 원교 이광사의 것이며 현판 양옆의 용머리 장식과 앞쪽 분합문살을 가득 메운 꽃무늬 조각이 화려하다. 툭 터진 천불전 안 불단 한가운데는 목조 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그 주의에 옥돌로 만든 불상 천 개가 빽빽이 자리잡고 있다.

▲표충사
표충사는 절에서는 흔하지 않는 유교형태의 사당인데, 서산대사를 중심으로 그의 제자로서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활약했던 사명당 유정과 뇌묵당 처영스님의 화상을 함께 봉안하고 있다. 처음 표충사가 건립된 것은 정조 13년(1789)이지만, 지금 건물은 철종 12년(1861)에 다시 옮겨 지은 것이고 금물로 쓴 표충사 편액은 정조가 직접 써서 내려 준 것이다.

▲이밖에 대둔사에는 초의선사의 발자취가 어린 일지암, 보물로 지정된 마애여래좌상과 삼층석탑이 있는 북미륵암과 남미륵암, 진불암등 암자들이 딸려있다. 한편 고려 시대 종인 탑산사 동종(보물 제88호)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해남 윤씨
녹우당

해남 윤씨는 연안 이씨, 여흥 민씨와 함께 해남 땅의 큰 성씨로서 명문으로 꼽힌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시조 작가인 고산 윤산도와 그의 증손이며 선비화가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가 이 집안에서 난 사람이니, 녹우당은 그들의 자취가 밴 옛집이다.
 집을 향해 들어가다 보면 마을 어귀쯤 되는 곳, 오른쪽에 나지막한 둔덕이 꾸며져 있고, 대문 앞에는 높이 30m에 500년 묵은 은행나무가 서 있다. 집 앞쪽 너른 터 양쪽에는 이 집안에 전해오는 유물들을 전시한 전시관과 유물관리소가 있다.
 녹우당은 전라남도에 남아 있는 민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되었다. □자형을 이루며 안뜰을 둘러싼 안채와 사랑채를 중심으로 행랑채가 여러 동이 있고, 집 뒤편 담장 너머에 삼신재단이 있으며, 그 동쪽에 해남윤씨의 중시조인 어초은 윤효정과 윤선도의 사당이 있다. 집 전체의 규모 60여칸 가운데 집주인보다도 일하는 사람들에게 소용되는 공간이 더 넓어서 대지주 계층의 살림살이를 보여준다. 사적 제167호이다.

▲녹우당의 유래
윤선도는 42세 되던 인조 6년(1628)에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스승이 되었는데, 봉림대군은 나중에 효종이 된다. 효종은 즉위한 후 어린 시절의 스승이였던 윤선도를 위해 수원(水原)에 집을 지어 주었다. 1660년에 효종이 죽자 윤선도는 고향으로 내려오면서 수원 집의 일부를 뜯어 옮겨 왔다.
 그것이 지금 녹우당의 사랑채이다. 지금은 해남윤씨 종가 전체를 통틀어 녹우당으로 부르고 있으나 원래는 그 사랑채 이름이 녹우당(綠雨堂)이다.
※참고로 녹우당의 현판은 옥동 이서의 글씨이며 그의 글씨는 동국진체의 원조이다.
 

▲윤두서의 대표작이자 우리 나라 회화사상 가장 뛰어난 초상화로 꼽히는 윤두서 자화상.
  국보 제240호이다.
 

「금쇄동집고」(金鎖洞集古)「산중신곡」(山中新曲)등 윤선도가 직접 쓴 가첩(歌帖)들이 있고 사은첩(思恩帖, 인조와 봉림대군이 윤선도의 집에 쌀과 포등을 내리면서 보낸 사송장(賜送狀)을 모아 첩으로 만든 것)등이 있는데 일괄하여 보물 제482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정14년노비문권」(至正十四年奴婢文券), 이것은 고려 공민왕때 윤광전이 큰
아들 윤닥학에게 노비를 상속해 준다는 문서인데 이두문으로 쓰여 있으며 승주, 송광사 노비첩과 함께 희귀한 고려 시대의 문서이다. 보물 제483호로 지정되어있다.

▲『해남윤씨 가전 고화첩』은 윤두서의 작품들을 모은 것인데, 그가 죽은지 4년 뒤(1719)에 아들 윤덕희가 묶었다. 보물 제481호로 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