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입구
구례

넓디넓은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문은 따로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지리산 국립공원의 관문이라 할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구례는 지리산이 양어깨를 펴 포근하게 감싸고 수정같이 맑은 섬진강이 흐르는 퍽 기름진 땅이다. 때문에 삼국시대에는 이를 차지하기 위한 신라와 백제의 싸움이 끊이지 않았고, 왜구의 침입 또한 잦았으며, 지리산의 여느 곳보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컸다. 석주관 피아골 화엄사 천은사 연곡사 등에 전쟁의 흔적이 뚜렸하다.
 본래 백제의 구차례현이었던 구례는 통일신라 경덕왕 때 현재의 이름으로 고쳐져 곡성군에 속한 현이 되었으며, 고려 초에는 남원부에, 그 후 1895년 구례군이 되었고, 1897년 전북에서 전남으로 편입되었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각종 문화재가 산재한 대찰 화엄사, 아담하고 고즈넉한 멋을 잃지 않은 천은사, '부도의 전시장'이라 할만큼 뛰어난 조형미를 갖춘 여러 점의 부도를 간직한 연곡사 같이 각자의 개성을 맘껏 뽐내는 지리산의 유서 깊은 사찰들이 구례에 자리하고 있으며, 노고단을 거쳐 전북 남원으로 직접 연결되는 지리산 관광도로도 나있어 답사길이 더 수월해졌다. 게다가 윤문효공 시도비   매천사당   운조루   석주관의 칠의사묘 등 지리산 자락에 묻혀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자취를 더듬어볼 수 있는 많은 문화유적이 있어 구례 답사는 언제나 알차고 풍요롭다.
 

호남 양반가()
운조루

운조루(雲鳥樓)는 토지면 오미리 명당에 자리잡고 있는 대표적인 가옥으로 1776년 무관 유이주(柳爾胄, 1726∼1797)가 지은 가옥의 사랑채인데, 지금은 가옥 전체를 운조루라 부르고 있다. 운조루가 명탕터라 하여 손꼽히지만, 기실 눈여겨보아지는 것은 운조루의 건축구성이다. 운조루의 옛모습은 그 집안 대대로 전해오는 「전라구례오미동가도」(全羅求禮五美洞家圖)에서 살펴볼 수 있다. 1,000여 평의 대지에 건평이 100평이 넘는 보기 드문, 이 집의 전체 건물구성은 ㅡ자형 행랑채(24칸), 사랑마당 T자형 사랑채(손님을 맞는 내사랑인 귀래정이 6칸, 주인이 거처하던 외사랑인 운조루가 16칸) 사랑뒷마당, ㅁ자형 안채(36칸)안마당 부엌마당, 안사랑채 안사랑마당(현재 소실됨), 사당(2칸) 사랑마당의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한편 운조루는 지리산의 좋은 나무를 골라 가려서 지은 집답게 재목이 듬직하다. 사랑채 2칸은 가운데 기둥 없이 지었는데, 이는 목재가 넉넉하지 않으면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구조이다. 쪽마루도 통나무이고 딛고 올라서는 포석(鋪石)조차 통나무로 하였다. 건축물구조와 이들 가문이 소장한 여러 문서, 서화, 문구 등을 통해 조선 후기 호남지방 양반가의 생활상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운조루는 중요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돼 있으나, 보수나 관리가 소홀해 해가 다르게 쓸쓸해지고 있다. 운조루 뒤편의 베틀봉에 자리잡은 거북 형상의 산자락(왕시루봉에서 흘러내린 산줄기)에 집주인이었던 유이주의 무덤이 있다. 무덤 앞에 선 동자석의 표정이 퍽 재미있다.

지리산의 대가람
화엄사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인도 승려 연기가 세웠다. 선덕여왕 11년(642) 자장이 중창했다. 장륙전(현재 각황전)과 화엄석경을 의상이 만들었다. 등등 여러 가지 창건설이 있었으나, 1979년 발견된 『신라화엄경사경』(新羅華嚴經寫經)에 의해 8세기 중엽 통일신라 경덕왕 때, 황룡사 소속의 화엄학 승려였던 연기에 의해 창건된 점임이 명확히 밝혀졌다.
 억불정책을 썼던 조선시대에도 성황을 이루었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도 7년 만인 인조 8년(1630)벽암 각성(碧巖 覺性, 1575∼1660)에 의해 중수되어 선종 대가람으로 인정을 받았고, 숙종 28년(1702) 장륙전이 중건되자 선교 양종 대가람의 지위를 얻었다. 이후 부분적인 중수가 있기는 했지만 이렇다 할 대규모의 중수는 없었다.
화엄사 가람은 4개의 공간으로 영역화되어 있다. 첫 번째는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보제루까지 이어지는 직선형 진입공간이다. 건물들이 조금씩 비껴서 있는데, 일직선 가람형태에서 느낄 수 없는, 절로 점점 깊숙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일주문은 화엄사 전체 규모로 볼 때 소박한 편이며, 금강문과의 사이에 화엄사 중창주 벽암스님의 부도비가 서 있다. 보제루는 승려와 신도들의 집회를 목적으로 지은 것으로 정면 7칸, 측면 2칸의 단아한 맞배지붕집이다. 천왕문 쪽에서 보면 2층 누각이나, 건물을 돌아 대웅전 쪽에서 보면 단층집이다. 보제로 앞의 당간지주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측되고, 당시에는 이곳에서부터 산문이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보제루를 돌아서면, 큰 앞마당을 가운데 두고 정면에 대웅전, 왼쪽에 각황전이 높은 석축 위에 장대하게 버티고 있다. 대웅전과 각황전은 화엄사의 중심축을 이루는 두 영역이다.
 앞마당에는 동서 오층석탑이 서 있는데, 석축 위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대웅전과 짝을 이룬 일금당 쌍탑 구조가 아닌 일금당 일탑 구조, 동오층석탑은 남향한 대웅전과 서탑은 동향한 각황전과 각기 짝을 이룬 구조가 아닌가 짐작된다. 동오층석탑 쪽에서 각황전을 마주한 채 올려다보고 있는 적묵당 또한 맞배지붕의 단아함이 돋보이는 집이다. 그러나 천은사의 보제루처럼 조용히 앉아 경내를 둘러볼 수 있도록 철책을 두르지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화엄사에서 중심이 되는 법당은 대웅전이다. 하지만 고건축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갖는 건물인데도, 더 당당한 위용을 갖춘 각황전으로 인해 조금은 관심권 밖으로 밀려난 신세이다. 화엄사를 화엄의 근본 도량답게 만드는 각황전은 그 뜻만이 아니라 규모로 볼 때도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불전으로, 고졸하면서 당당한 위용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두 건물을 받들고 있는 석축은 신라시대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바른층 쌓기를 한 장대석 위에 장방형의 돌들을 역시 바른층 쌓기로 하고 두꺼운 판석을 덮은 모습이 매우 아름다우며, 안정감 있다. 각황전 앞에 서 있는 석등의 위풍 역시 각황전의 웅장함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크다. 석등과 나란히 서 있는 원통전 앞 사자탑도 흥미로운 석조물이나, 쓰임새를 알 수가 없다. 노주(露柱)라고도 하고 감로탑이라고도 하는데, 일반적 의미로 전각 앞에 세운 탑인지 아니면 다른 용도로 세운 석조물인지 알 수 없다.
 원통전 창방 아래 토벽에 그려진 주악비천 산신 동자 나한상 같은 벽화는 채색과 묘사력이 뛰어난 작품으로, 원통전의 건물과 같은 시기인 조선 중기 때 그린 것이다. 화엄사를 위풍당당하게 하는 또 하나의 영역은 각황전 뒤쪽, 경내 서북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효대이다. 여기에 불국사의 다보탑과 함께 우리나라 이형석탑의 우수한 작품으로 쌍벽을 이루는 사사자삼층석탑이 있다.
화엄사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각황전 앞 석등을 의식한 듯 곳곳에 새로 조성한 석등이 눈에 띈다. 화엄사의 산내 암자인 구층암에는 10세기 무렵의 삼층석탑과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또 하나의 석탑이 있으며, 고려 초기의 석등과 배례석도 남아 있다. 매표소 입구와 매표소와 일주문 사이의 중간 산자락 언덕에 부도밭이 있  다.
화엄사 가을전경
▲동오층석탑
서오층석탑이 이중기단에 화려한 조각이 돋보이는 데 비해 동오층석탑은 단층기단에 아무런 장식도 없이 수수하다.
 여러 장의 석재로 지대석을 짜고 그 위에 4매로 된 하대석과 함께 우주와 탱주가 모각된 판석으로 중석을 세우고, 부연이 있는 4매석으로 겊어 갑석을 만들었으며, 한 단의 굄을 두고 탑신부를 받는 것으로 단층기단을 완성하였다. 5층의 높은 석탑이면서도 기단을 단층으로 하고, 각 부재도 세부적으로 간략하게 처리하여 무척 섬약해 보인다. 서오층석탑과 마찬가지로 9세기 무렵에 축조된 것으로 짐작된다. 높이는 6.4m이며, 보물 제132호로 지정돼 있다.

▲서오층석탑
화엄사 동오층석탑과 서오층석탑의 조각수법이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처럼 단순함과 화려함의 조화라는 미적 감동을 위해 대비를 이루고 있지 않나 짐작되지만, 일금당 쌍탑 가람의 형식조차 의심되는 시점에서 쉽게 판단 할 일은 아니다. 서오층석탑은 이중기단 위에 45층의 탑신부를 얹어 석탑의 기본구조를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상층기단과 하층기단, 1층 몸돌에 불교의 외호적 성격을 지닌 십이지상 팔부중상 사천왕상을 차례로 조각하여 장식적인 측면을 더하고 있다. 특히 십이지상을 석탑에 배치한 예는 그리 많지 않다. 고준하면서도 상하의 체감률이라든지 유연한 지붕돌이 잘 조화되어 경쾌하면서도 우아한 모습을 갖춘 서오층석탑의 높이 6.4m이며, 보물 제133호로 지정돼 있다. 석탑 남면 중앙에는 측면과 안상과 함께 윗면에 연꽃 3개가 예쁘게 조각된 배례석이 있다.

▲대웅전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물로는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는 대웅전은 보물 제299호로 지정돼 있다. 사적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인조14년(1636) 재건하였다고 한다. 대웅전은 높은 석축 위에 올라가 있고, 대규모의 4중 계단으로 연결돼 있는데, 석축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자리잡은 각황전과 비교해 볼 때 석축 가까이에 대웅전이 들어선 것은 앞마당에서 볼 때 중심건물인 대웅전이 상대적으로 왜소해보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한 방편이며, 대웅전 앞의 계단이 각황전 앞 계단보다 규모가 큰 것도 같은 이유이다. 기둥 사이 간격이 모두 같으며, 기둥이 높아 기둥의 배열이 매우 정연하다. 정면 기둥 사이에는 각각 세 짝씩의 문을 달고 그 위에 교창(交窓)을 냈다. 공포는 내외 삼출목으로 안팎 장식이 매우 뛰어나다. 내부는 우물천장으로, 주위의 외 둘레칸은 중앙 부분보다 한 층 낮게 만들었다. 중앙의 불단 위에는 비로자나불을 비롯한 세 분의 금동불을자형의 처마를 이룬 정교한 닫집 안에 모셨는데, 전체가 매우 장엄하다. 불단의 기둥을 조금 후퇴시켜 예불공간을 넓혔다. 법당에 봉안된 후불탱화(1757년)는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모신 비로자나 삼신불화이다.

▲각황전

대웅전에서 시작된 석축이 직각으로 꺾여 이어진 곳에, 현존하는 우리 나라 불전 가운데 가장 큰 규모에 속하는 각황전이 서 있다.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안정된 비례에 엄격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위엄과 기품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빼어난 건축이다. 본디 이름이 장륙전(丈六殿)이었던 건물로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인 숙종 25년(1699) 공사를 시작하여 4년만에 완공되었으며, 공사의 마무리와 더불어 숙종으로부터 '각황전'(覺皇殿)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고, 사격 또한 더욱 높아져 선교 양종 대가람이 되었다. 현재 국보 제67호로 지정돼 있다.
 

▲사사자삼층석탑

효대(孝臺)로 이어지는 각황전 뒤쪽의 계단길은 퍽 운치 있다. 일단 경내 건물이나 배치구도에서 보는 장대하고 호쾌한 멋에 견줄 때 울울한 동백숲 사이로 난 이 길은 호젓하다. 송림에 둘러싸인 효대에서는 특히 지리산의 청아한 산수를 감상할 수 있는데, 특이한 모습의 석탑과 석등이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사사자삼층석탑이라고 불리는 이 탑은 기본적으로 이중기단을 갖춘 삼층석탑의 기본형을 따르고 있으나 상층기단에 해당하는 부분에 독립된 네 마리의 사자를 각 귀퉁이에 앉히고 그 대각선 중앙에 합장한 스님상을 세웠다. 이러한 독특한 형태 때문에 사사자삼층석탑이라 불린다.
 삼층석탑 앞에 있는 석등 역시 사사자삼층석탑 못지않게 특이하다. 길쭉한 네모의 배례석을 놓고 화사석을 받치는 간주석(기둥 세 개)안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공양하는 모습의 인물상을 배치하였다. 차를 공양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석탑의 건립 년대는 통일시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이따금 불국사 다보탑의 수법이나 우수성과 더불어 이야기되곤 하는데, 신라시대의 사사자석탑으로는 유일한 예이다. 높이는 5.5m이며, 국보 제 35호로 지정돼 있다.

 
구한말 조선의 양심
매천사당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은 구한 말, 절조 있는 삶과 죽음으로 일생을 마친 우국지사이자, 투철한 비판의식과 역사의식을 보인 역사가이다.
 그를 기리는 사당인 매천사(梅泉祠)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건물과 유물관 등만이 조촐하게 남아 있다. 비록 주목할 만한 유형의 문화재는 없으나, 구한 말 나라가 혼란한 상황에서 민중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우어준 매천의 저항정신을 되새기는 뜻에서 찾아 볼 만하다.
 전남 광양군 봉강면 석사리에서 태어난 황현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고종 20년(1883)왕의 특명에 의해 실시된 보거과 첫 시험에 응시하여 우수한 성적을 얻었는데, 시골사람이라는 불합리한 이유로 자신이 2등으로 밀려난 사실을 알고서 잇달아 있는 시험을 모두 내쳐버리고 귀향했다. 이후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는 못하고 고종 25년(1888) 생원회시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뒤 청나라와 일본의 경쟁, 고종의 어지러운 정치, 명성황후의 독점적인 세도정치 등 부패가 극심한 세태를 보고는 구례로 내려와 역사와 경세학 등 독서와 시문 짓기에 열중하였다. 그 사이 갑오농민전쟁 갑오개혁 청일전쟁을 비롯하여 이듬해 명성황후시해사건, 아관파천 등이 잇달아 일어나자 그는 어지러운 세태를 후손들에게 바로 알려주기 위해 경험하거나 보고들은 이야기들을 『매천야록』(梅泉野錄), 『오하기문』등의 책으로 남겼다.
 1910년 8월 22일 나라가 일본에 강제로 합병되었다는 소식을 한 달 뒤 전해들은 그는 절명시(絶命詩)와 유서를 남긴 채 많은 아편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 다음은 그의 유서 내용이다. "이씨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이씨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명분은 없다. 다만 500년 동안 선비를 양성했던 나라에 목숨을 바친 선비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스스로 떳떳한 양심과 평소에 독서한 바를 저버리지 않으려면 죽음을 택하는 편이 옳다. 너희들은 지나치게 애통해하지 마라."비장히 목숨을 끊었지만, 역시 인간적인 고뇌가 없진 않았던 듯"약을 마실 때 입에서 떼기를 세 번이나 하였다"고 한다. 대한제국이 멸망하였으나 대관들은 나라 운명을 걱정하기보다는 일본으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을 받는 데 혈안이었다. 권력자도 정치인도 아닌, 그저 부패한 세상을 피해 지리산 자락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평범한 선비인 그였지만 배운 이로서 멸망한 나라에 목숨을 대고 있음을 부끄러워한 그는 자결로써 시대와 대관들에 대한 항변을 한 것이었다.
"새와 짐승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찡그린다./무궁화 이 세상이 망하고 말았구나./가을 등 아래 책 덮고 옛일 생각하니/세상이 글 하는 이 되기 참으로 어렵구나......"(「절명시」絶命詩)중 세 번째 수)
 그러나 그도 양반으로서의 세계관은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일까? 그는 갑오농민전쟁에 대한 원인을 지배세력의 부정부패에 있었다고 지적하면서도 농민군의 행동을 반역으로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천야록』은 붓끝의 엄정함, 풍부한 자료의 수집과 인용, 문장이나 표현의 뛰어남 그리고 고종시대의 역사책이 갖는 한계를 보완해주는 한국근대사의 귀중한 자료로서, 500년이라는 긴 역사를 가진 한 왕조가 어떻게 망했는지를 교훈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