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남도를 아는가!
 전라남도
 

▲선사시대의 전라남도
한반도의 남서쪽에 위치한 전라도는 굴곡이 심한 리아스식 해안이다. 이런 지형을 배경으로 해상능력이 발달한 지역과 호남평야와 나주 평야를 흠뻑 적시는 여러 강들로 인해 풍요로워 질 수 있었고 이런 자연환경과 풍요로운 생산물로 인해 여러 지역으로부터 침탈의 대상이 되었던 곳이다. 하지만 아직 정복전쟁과 정치 지배구조가 확립되지 않았던 이 시기에 이곳에서 생산되는 풍족한 생산물은 지역 주민의 것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오랜 시간이 경과하면서 자연히 이 지역 사람들은 자연의 섭리에 가깝게 살아온 사람들이며, 순하고 정이 많은 사람으로 자라게 되었고, 풍족한 자연환경으로 다른 어느 지방보다 문화적 깊이가 있는 주민들이 이 지역에 살게 되었다.
 이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지석묘의 분포나 그들의 군지상은 바로 그런 예일 것이고, 이러한 배경에서 마한이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마한은 삼한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세력 규모가 제일 컸고 북방 고조선과는 성격이 다른 문화로 한민족 고유한 전통을 형성해 가면서 바다를 통한 중국과의 교류를 모색하는 단계까지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농업을 주로 한 이들의 문화는 오랜 기간 독자성을 유지하여 왔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 민족문화의 뿌리를 형성하게 되었고, 전라도 지역은 바로 이러한 마한 문화의 중요한 거점이었던 것이다.

▲독창적인 고대사의 터
전라남도에서 백제의 문화유적을 찾기란 힘들다. 백제가 호남지역을 그 예속 하에 두면서 정치 문화적인 지배력을 강화하고는 있었지만 과거 독자적이고 토착적인 기반 위에 존속했던 이 지역 민의 의식 자체까지는 장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 중의 하나가 대형옹관묘로 대표되는 영산강 문화이다. 남도지역에서 3세기부터 대형옹관묘가 성행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4∼6세기초의 영산강유역의 옹관묘는 거대한 분구 안에 대형의 전용 옹관을 여러 개 안치하고 금동관과 같은 중요한 유물을 부장 했다. 일반적으로 대형옹관묘와 같은 대규모의 고분들은 소규모로 분리된 여러 집단들이 강력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통합하는 본격적인 고대국가 단계에서부터 축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상당한 규모의 독립된 정치체제가 구성되지 못한 사회에서는 대규모의 고분은 만들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후 이 지역은 상층문화의 갈등으로 분열하고 후백제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역사적 소외
호남의 소외 역사는 무엇보다 풍부한 농업 경제력과 해로의 발달로 인한 침탈과 경계의 목적 이였다는 측면에서 찾아 볼 수 있겠다. 먼저 통일신라시대의 장보고의 해상세력은 마한 백제의 전통을 잇는 이 지역세력에 단면이었고 결국 경주 세력에 의해 장보고는 '전라도의 섬' 출신이라는 이유로 배척 암살 당하는 운명이 된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막강했던 과거의 백제 세력과 해상세력을 결집하여 장보고 이후 90년만에 신라의 수도 경주를 공격하고 바로 김우징의 7대 손이었던 김부를 옹립 경순왕으로 삼았다. 이 같은 역사의 흐름은 후대 신라계 인물들에 의해 편찬된 정사의 기록 속에서 희석되어 버리고 말았지만 이후 고려 시대에서도 마한·백제·후백제로 이어지는 친신라 셰력과의 대립은 계속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권이 그의 후손들에게 내렸다는 '훈요십조'는 호남 차대의 기록으로 이러한 대립의 흔적을 보여준다. 훈요십조는 지금까지도 호남인의 지역 차별의식의 효시로 거론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훈효십조의 내용은 고려 초의 상황을 반영하는 자료이기보다 후대에 와서 양대 세력간의 갈등 내용을 살피는데 유용한 자료가 된다.
 태조 왕권은 후백제 세력의 강한 반발에 대하여 위기감까지 느꼈던 인물임이 분명하지만 한편으로는 막강한 후백제 세력을 회유 포섭하는데 주력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점차 고려왕실의 중심세력이 경주 계열화되면서 이에 수긍하지 않았던 전라도 세력의 견제 수단으로 훈효십조가 현종부터 문종 때에 부각된 것이다. 고려왕권의 정권이 신라계열의 문신 세력에 의해 장악되면서 점차 중앙 정치무대에서 도태되어간 전라도세력은 무신 집권기를 맞으면서 다시 한번 정계진출의 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많은 세력은 여,몽연합국에 가담하여 같은 지역 내 대립하는 성향을 보였다.

▲근·현대사의 꽃잎
깊은 문화의 저력과 자부심, 풍요로운 생산물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비교적 정치적으로는 그 역할을 구사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오랜 질서와 냉대 속에 존재했던 호남지역은 우리의 근·현대사 과정에서 다른 어느 시기, 어느 지역보다도 의미 있게 부각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이었을까?
 한국 근·현대사 과정에서 발휘된 호남지역의 반외세 민중적인 움직임들이 이젠 앞선 시대와 다르게 지배계층 중심에서 벗어나 그들에 의해 침탈과 핍박을 받았었던 소농민 민중계층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실학시대 이후 사회구조가 재편되고 의식적 변환이 진전되는 과정에서 호남의 민중세력들은 타지역과는 다른 조직적 역량과 방향감을 갖고 그 선봉에 나섰던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반봉건 민중으로 상징되는 동학농민운동은 한말부터 일제하의 의병항쟁과 광주학생운동 5·18광주 민주화 운동 등 반외세 민족운동의 좌·우익 논쟁으로 사장되어 버리긴 하였지만 민중조직운동의 현장들이 호남에 수 없이 있어왔음을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저항은 힘없는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힘이 있는데도 무시할 때 반발하고 저항할 수가 있는 법이며, 힘이 없는 자는 무시 받아도 저항할 생각을 아예 못하는 것이다. 전라도 사람들의 저항 정신이 오히려 값질 수 있는 것은 원래부터의 기질 섞인 반골습성에서 나온 것이라기 보다 이러한 힘과 자존심의 바탕에서 비롯될 수 있었다고 믿어진다.
따라서 우리는 오랜 역사의 과정 속에 굴절되고 희석된 우리 지역의 역사를 재 구조적으로 조명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