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에 대하여
98' 이 재 현
 

1. 고려청자의 역사적 배경

우리 나라의 요업이 어느 시대에 창조되었던가 하는 그 기원은 아직까지 기록이 확실하지 못하여 알 길이 없지만 통일신라 경덕왕조의 기록을 보면 종래의 와기전(瓦器典)을 도등국( 陶燈局)으로 기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우리 나라의 요업은 그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며 기후 신라조정(其後 新羅朝廷)에서는 도등국(陶燈局)을 확윤(擴允)하여 한 관서로 승격시켜 도요사업을 통독한 것은 기간 요업이 상당히 발전하였으리라는 것을 말해 준다. 이 때의 도기에는 포문(布紋) 등이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나 이는 그릇을 굴때에 토기를 포물(布物)로 쌓거나 새끼로 묶어서 요에 넣었던 흔적이 남은 것이요, 문의(紋儀)로서 그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신라의 요업은 장족적(長足的)으로 발전하여 여러 가지 문의(紋儀)를 조각하고 도 유약(釉藥)을 사용하여 당대 당나라의 산품 삼채유(三彩油)와 비교 할 수 있는 제품이 생산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고적에서 출토된 것들이 당제품과 신라산품이 상린(相隣)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증거로 보아 우리 나라의 자기는 신당교역(新唐交易)이 은성(殷盛)하던 8세기 말엽을 도자공예의 발상기(發祥期)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도기의 예술적 발전은 역시 고려왕조에 이르러 일반적인 문화가 향상됨과 병진(倂進)하여 발달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즉 신라시대의 토기로부터 점차 발달하여 유약(釉藥)을 사용하게되고 색채와 광택을 발하는 제품을 산출한 것이 통일신라의 불교문화와 병진하였고 고려문화의 황금시대에 이르러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10세기에 이르러 갑작스러이 중보적(重寶的)인 존귀성을 인정받고 찬연(燦然)히 세계도예계에 등장한 고려자기는 당대 상류계급에 있어서 최상의 애완품(愛玩品)으로 선모(羨慕)의 대상이 되었지만 실은 그 지보(至寶)의 자기(磁器)가 어느 왕조시대에 어느 지방에서 출토되었던가를 명확히 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이로부터 이조 500년동안 이를 알려는 사람도 없고 찾는 인사도 없어 망치(忘置)되어 있었던 것이 한일합병후 개성 만월대 구지부근에서 습득한 한 조각의 파편이 되어 학자의 탁상(卓上)에 연구의 대상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2. 고려청자의 발생
 
청자의 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종전에 일본인 학자들은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순화4년(淳化四年)' 명항아리를 예로 들어 993년에 초보적이고 원시적인 청자로 출발하여 11세기에 들어서야 청자다운 청자를 만들기 시작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학문의 진전에 따라 이러한 학설은 잘못이라는 것이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1962년부터 국립박물관에서 우리 나라 도자기 가마터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를 시작하여 청자 가마에 대한 조사도 20년 이상 계속하고 있다. 그 결과 전남 강진군 대구면 일대의 청자 가마터 조사, 인천시 북구 경서동 녹청자 가마터에 대한 조사 등의 연구 진척으로 초기 청자를 새로운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가운데 중국, 일본 등지에서도 여러 조사가 진행되어 우리의 초기 청자발생에 대한 여러 가지 새로운 근거를 더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 서남해안에서는 초기 청자 가마가 많다. 그 대표적인 가마는 전남 강진군 대구면과 칠량면 일대에 있으며 이 밖에 평안남도 강서군 잉차면 이리 사기동, 황해남도 봉천군 원산리,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원흥리,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경기도 시흥시 방산동,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서리, 충남 서산시 성연면 오사리, 충남 보령시 천북면 사호리, 전북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전북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 전남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등이다. 이들 가마에서는 대접과 접시를 위주로 여러 가지 생활 용기를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대접 한 종류의 형태와 굽 모양이 중국 절강성 동북부에서 번조되는 월주요의 청자 대접과 거의 같다는 데 시점을 맞추어 본 것이다. 이 대접의 형태는 측사면이 직선으로 뻗고 굽다리가 낮고 그 바닥면이 넓다. 또한 굽고 난 다음에 잘 떨어지도록 그릇과 도지미사이에 내화토눈을 받쳐서 번조하였다. 중국 쪽 보고서에 의하면 위와 같은 소위 햇무리굽 대접 등은 8세기부터 번조하기 시작하여 10세기 전반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일본에서는 그때 이러한 햇무리굽 청자를 수입하여 사용하였으며 일부 그릇을 토기로 방제(倣製)한 것도 대략 10세기 중엽까지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에서도 중국 월주요청자의 햇무리굽 대접과 거의 똑같은 청자 대접을 후대에 만들었을 이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도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100년 뒤에 같은 것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3. 고려 청자의 시대구분

고려자기의 시대구분은 청자를 중심으로 한다. 고려 초기에 강진의 해무리 굽청자가마는 점차 확산되고 다른 해무리 굽청자가마는 점차 없어지거나 지방의 조질 청자가마가 되고 녹청자가마도 생겨나게 된다. 강진가마에서는 청자의 질과 형태와 문양이 안정되고, 중국의 제반양식과 번조수법이 고려 적으로 변모해 나가 16대 예종 연간까지는 그 질과 양식에서 중국적인 것을 거의 청산한 단계에 이른다. 그러므로 고려 초에서 16대 예종까지를 전기로 한다. 17대 인종 대부터 고려자기가 고려 적으로 아름답게 세련되어 독특한 비색(翡色)청자를 완성하고, 18대 의종 때에는 상감기법과 문양구성이 가장 뛰어났으며, 청자,철채, 청자상감, 진사채, 연리문, 철채상감,철유, 흑유, 백자, 백자상감, 화금자기, 등 다종다양한 자기가 매우 세련되었으며 청자기와도 만들었다. 인종대에 이미 귀족간의 알력이 심화되고 의종 때 무신의 난이 일어나고, 이어 무신이 집권한 시대의 고려자기는 질과 양식이 퇴보하였지만, 몽고군이 침입하기 전까지는 고려자기의 모습에 커다란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몽고군이 침입하면서부터 급격히 퇴보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1123년부터 몽고가 대군으로 침입하기 직전인 1230년까지를 중기로 한다. 몽고침입 이후에 원종대와 충렬왕초까지 소수의 상품을 제외하고는 고려자기는 많이 퇴보하였으나, 중기의 모습이 아직 남아 있을 때이고 충렬왕 10년 이후로부터 화금과 진사설채가 다시 나타나고 새로운 기형과 문양이 생기고 청자의 질이 좋아지는 등 일시적 상황을 보이다가 다시 퇴보하여 고려말에 이르므로, 1231년 몽고침입부터 고려말까지를 후기로 한다.
 

▷ 전기 - 발전기

9,10세기는 청자가 발생하고 백자도 일부 만들고 그 질이 자질(磁質)로서 완성되는 시기이다. 엄격히 말하면 이때의 청자와 백자는 현대에서 말하는 완전한 자기는 아니며 완전한 자기에로의 발전과정이다. 이때 청자,백자 이외에 흑유도 일부 특수한 지역에서 약간 만들어졌으며, 점차 고려도자기가 다양화되는 시기였다. 청자에는 청자의 기면(器面)을 파내어 상대적으로 파내지 않은 면을 두드러지게 보이는 대담하고 크게 나타낸 이형연판무늬가 등장하고, 음각문양이 나타나며 철화문(鐵畵文)과 퇴화문(堆花文)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초기청자와 같은 일운문굽백자를 생산한 백자요지로서는 경기도 용인군 인동면 서리와 반곡마을에 있는 가마자리가 매우 주목할만하다. 이 가마는 청자도 생산하였지만, 초기 백자가마로서는 유일한 것으로 청자 이외에 백자도 이미 9,10세기에 생산되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또한, 이 가마에서는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헤무리굽 밑층에서 안정되지 않았으나 기형과 태도등이 안정된 양질의 것이며, 백자는 기벽이 얇고 기형과 유약 태토가 보다 안정된 양질이다. 아직 단정할 수는 없어도 우리 나라 최초의 청자와 백자를 연구하는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이때까지 일인학자들이 초기청자 또는 원시청자로 불리던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순화사년명(淳化四年銘)항아리도 백자를 번조하려다 약간 담갈색이 비낀 조질 백자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1세기말에서 12세기초까지는 중국의 섬서성 요주요, 광주 서촌용,정요,자주요,수무요 등과도 교류가 있어 철화문과 퇴화문이 발전하는 등, 청자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백자, 흑유 등 여러 가지 도자기가 발전되며, 기형, 문양, 번조수법 등이 고려 적으로 세련되어 갔다. 강진의 가마는 점점 확대되어 대구면의 용운리, 계율리 일부, 사당리와 칠량면 삼흥리일대에서 사당이 전면돠 수동리일대로 확산되며,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과 진서면일대에도 청자가마가 생기고, 그 뒤 가마도 관요형태의 대규모의 청자요로 발전하였다.
 

▷ 중기 - 최성기

12세기 전반기는 고려청자 중에서도 순청자가 가장 세련되는 시기였다. 청자의 색은 처음부터 환원번조로 시작되었으며, 이미 11세기에는 완벽한 환원번조로 독특한 청자색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12세기 전반기는 그 절정기로서 이때 청자의 모습은 17대 인종왕릉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청자과형화병(靑磁瓜形花甁) 등 일괄유물로 대표된다. 1123년 북송 휘종의 사행의 일원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化奉使高麗圖經)>>에서 "근년이래 제작이 공교(工巧)하며 색택(色澤)이 더욱 아름답다."라고 한 것이나, 북송말경으로 생각되는 태평노인(太平老人)의 기록인 <<수중금(袖中錦)>>에 "고려청자의 비색이 천하제일"이라고 지적한 바와 같이, 반실투성(半失透性)의 빙렬(氷裂)이 거의 없는 우수한 비색유약을 완성하였다. 비색유약의 완성과 더불어 기형,문양,번조수법 등에 남아 있던 중국의 영향이 거의 사라지고 자연에서 소재를 받은 독창적 형태와 문향으로 고려 적으로 변형, 발전되며 독특한 세련을 보인 것이다. 이와 같은 청자의 세련은 12세기 중엽까지는 또 다른 의미의 진전을 보여 유약은 반실투성에서 조금씩 더 밝아지고, 새롭게 구상된 음각, 양각, 투각문양 등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러한 발전은 <<고려사>> 세가 11년초에 보이는 청자와(靑磁瓦)의 기록과,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당전마을에 산재하고 있는 청자와편(靑瓷瓦片)을 반출하는 요지에서 증명이 된다. 이 당전마을의 청자와편을 반출하는 요지에서 출토되는 파편의 유약은 인종릉에서 출토되는 파편의 유약은 인종릉에서 출토되는 일관유물인 1차비색완성기(12C 전반)의 것보다 유색이 조금 더 밝으며, 문양이 고려 적으로 보다 완숙한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발전이 있는 일면, 또 다른 일면에 획기적인 시문방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즉, 고려자기에 상감기법으로 문양을 나타내는 새로운 기법이 등장하였으며, 상감을 여러 가지로 응용한 것 또는 상감기법 외의 다른 여러 방법으로 문양을 나타내는 기법이 싹텄을 뿐 아니라, 이러한 여러 가지 기법이 완숙할 상태에 도달하였다.
 1159년에 죽은 문공유(文公裕)의 지석(誌石)과 함께 출토된 청자상감보상당초문대접(靑磁象嵌寶相唐草文大 )은 유약이 맑고 투명하며, 상감의 기법과 문양의 포치(布置) 등이 매우 발달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뭉공유묘 출토 대접을 만든 시기는 유약, 기형, 문양과 문양의 포치, 번조수법 등이 가장 아름답고, 고려자기의 기준이 되는 그릇들을 만든 때였다. 먼저 청자유약은 기포가 적고 비색이 밝아져서 문양이 잘 보이게 되고 빙렬이 있는 것이 많아진다. 기형은 그 선이 더욱 유려해지면서도 유연하여 그 시대 양식을 확실하게 지니게 된다. 문양은 사실적 문양을 도식화(圖式化)하고 양식화(樣式化)하였지만, 자연의 향기를 지녔으며 역시 시대양식을 분명하게 확립하고 있으며, 각 부위마다 적합한 문양을 개발하였다. 각 문양의 포치,구성은 먼저 주문양(主文樣)과 종속문양(從屬文樣)이 있어, 그릇의 넓은 주면에 주문양을 배치하고 구연부(口緣部)나 굽언저리 등 주문양을 상하에 종속문양을 배치한다. 주문양은 사실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공예의장의 성격으로 양식화되었지만, 회화적이고 여백을 많이 살려 자연이 지니는 맛을 잃지 않는다. 종속문양은 동일 패턴이 반복되는 공예의장이지만, 주문양에 비하여 매우 좁은 한정된 공간에 시문되어 주문양의 상하여백을 마무리해주는, 또는 공간에 안정감을 주는 구실을 하고 있어,   전반적 문양은 회화성을 갖춘 공예의장이나 그릇과 일체가 되어 상호 보완하는 입장에 있다. 이 시대가 문화적으로 매우 세련된 시기여서, 전술한 비색, 기형,문양뿐 아니고 그릇의 굽다리를 어떻게 깎느냐, 또 구울 때 그 굽다리에 어떻게 하여 눈 자국이 작게 남느냐 하는 문제 등이 예의 검토 실험되고 있다. 따라서 굽다리는 대체로 작게 하고 매병류 등 큰그릇은 안다리굽이 많고 보통 병류나 주전자 등 그릇은 굽이 조그마하고 낮으며 큰 것은 내화토(耐火土) 모래비짐눈으로 번조하고 일반 그릇은 규사(硅砂)눈을 받쳐 구워 굽이 작고 예쁘며 규사눈 자국이 작고 희게 보여 그릇의 바닥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제작하고 있음을 본다.

 

[청자와 상감문양]
12세기 전반 상감발생기의 청자요지(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당전마을의 청자기와를 반출하는 요지)에서의 상감문양은 기명(器皿) 일부지만 사실적인 문양으로 나타나며, 상감시문된 위치는 11세기 후반경이나 12세기초경의 기명에 음, 양각으로 시문하던 자리의 일부 또는 전면에 나타난다. 이 경우 내외면 중 일면시문으로 문양도 음, 양각문과 흡사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초기 상감상태에서 한걸을 나아가면 12세기 중엽인 상감 최성기에 이른다. 전술한 것처럼 처음의 상감문양은 기명의 내측이나 외측의 일면 가운데 처음 일부에, 점차 전면에 나타나다가 좀더 발전되면 내외면에까지 시문이 확대된다. 문양은 상감발생 초기의 사실적인 문양에서 도식화되기 시작한다. 그릇의 면을 분할하여 구도를 잡아 주문(主文)과 종속문(從屬文)을 구분 시문하여 상감되는 부위에 따라 여러 가지 문양이 새롭게 고안되어 이들 문양이 적절히 포치되어, 하나의 일정하고 통일된 구성과 조화을 이루게 된다. 문공유의 묘에서 출토된 보상당초문대접은 바로 상감 최성기의 작품으로, 이러한 완숙한 경지까지 도달하려면 상감발생기로부터 상당한 시일이 초과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상감의 발생시기는 12세기 전반인 것이다. 여기에 언급하는 상감발생기는 상감이 여러 가마에서 고안되어 일반화되는 처음 시기를 말하는 것이며, 특수한 지역 또는 특정한 기형에 예외적 또는 우발적으로 상감이 시문된 예는 12세기초는 물론이고 11세기 또는 10세기에도 가능할 수 있다. 실제로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서리의 백자, 청자가마 발굴에서는 10세기를 내려오지 않는 층위에서 서툴지만 특이한 상감을 한 파편이 발견되었고,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면 양지리에서도 10세기경 청자가마에서 흑상감파편이 발견되었다. 그밖에 11세기로 추정되는 청자에 상감이 들어간 예는 여러 가지가 있다. 또한 상감기법과 문양이 가장 세련된 12세기 중엽에는 상감기법 이외에 그 수효는 상감청자류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10세기경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화청자, 퇴화문청자와 그밖에 철채, 철채백퇴화, 철채백상감, 철유, 철유백상감, 백자, 백자상감, 백자철화문, 화금청자, 청자진사설채, 연리문자기 등이 함께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다. 특히, 산화동 안료로 환원번조상태에서 선홍의 발색을 성공시킨 진사설채는 중국보다도 2세기 이상 앞서 세계에서 가장 먼저이면서 절대로 붉은색을 자기 표면에 남용하지 않았다.
 

▷ 후기 - 쇠퇴기
 
17대 인종, 18대 의종대를 정점으로 아들답게 세련된 고려자기문화는 귀족사회의 혼란과 정치질서의 변이(變異)중에서도 계속 모습을 이어갔으나, 13세기초 몽고의 침입으로 커다란 타격을 받고 타락하기 시작하였다. 무신집권 이후 점차 그 폐단이 쌓여 13세기초부터는 고려자기에도 변화를 보여, 기형이 조금 둔해지고 굽도 조금씩 커지고 밝은 유약의 비색이 조금 어두워지면서 문양도 조금씩 퇴보해가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몽고의 침입으로 가속화되어 원종대와 충렬왕초에 매우 타락한 청자로 전락된다. 이때의 상황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는 1269년으로부터 1287년 사이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간기가 들어 있는 청자상감그릇들이다. 이들 청자기명들은 암녹색이 비낀 흐린 유약과 간혹 밝은 유약이 있으나, 그 빛이 뿌옇고 그릇의 유력한 곡선이 둔해지고 문양도 12세기 이래의 상감문양이 계속되고 있지만 퇴화된 상태로 거칠고 생략되었으며, 굽도 둔하고 모래받침이 조금씩 나타난다. <<고려사>> 세가 충렬왕조와 <<고려사>>열전 조인규전에는 고려에서 원나라 세조에게 화금청자(畵金靑磁)를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화금청자는 12세기 전반부터 극소수 만들어졌으며, 충렬왕 때에도 특별히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데, 양식적으로 보아 충렬왕 때에 만들어 졌다고 생각되는 것(청자상감화금원숭이토끼당초문편호, 청자상감화금당초모란문대접)을 통하여 상감청자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충렬왕 즉위 중반 이후에 일시적인 안정으로 청자의 유약이 약간 불투명하지만 비색유약이 그전보다 아름다워졌고, 문양도 그 이전부터 시문하던 문양을 그대로 사용한 예와 새로운 문양이 등장한 예가 있다. 그전부터 사용하던 문양도 다시 돌아가려는 상태였으며, 새로운 문양은 사실적으로 안정되고, 주문양에 조그만 이파리가 많이 달린 새로운 당초문과 봉황문이 등장하며, 종속문양이 여러 단으로 구성되며, 기형에도 항아리 등이 새롭게 등장한다. 이러한 변화는 충렬왕 중반 이후 원나라를 통한 중동지방과 서방문화의 유입으로 일부 기형과 문양, 번조수법 등에 조금씩의 변화를 보인 것 중 일부분니다. 그밖에 번조시에도 변화가 있어 상품은 환원번조하였으나, 하품에는 산화번조가 있으며, 시대가 내려갈수록 점차 환원이 보장되지 않아 청자의 색에 황색과 갈색을 머금게 되었다. 충렬왕, 충선왕 이후 잠시의 안정이 다시 끊어지고 또한 사회가 불안해져서, 14세기초를 조금 지나서 부터는 12세기 중엽경에 많은 종류의 도자기가 화려한 꽃을 피웠던 상태에서 주로 청자상감과 순청자기류만이 생산되었고, 14세기 중엽부터 질과 기형,문양, 번조수법이 극도로 타락하고 퇴보된 상태에 이르렀으며, 공민왕 때 상품청자가 일시 그 질이 향상되었으나, 다시 타락하여, 이러한 타락한 상태가 조선왕조로 넘어와 분청사기의 모체가 된다. 고려자기는 단군 숭배, 전통적인 토속신앙과 불교,노장,풍수도참 사상 등을 배경으로 청자를 주고 생산하고 세련시켜 12세기 전반에 비색순청자로서 유례가 없는 독특한 특색을 나타냈고, 12세기 중엽 유약을 밝게 발전시켜 청자상감으로서 다시 한번 꽃을 피웠다. 고려자기 중에서는 청자가 특히 많이 생산되고 세련되었다. 토기에서 청자로의 발전이행은 인류문화 발전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으나, 고려시대의 청자는 그 자연과 시대적 배경으로 더욱 많이 생산되고 가장 세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4. 고려청자의 특징

고려청자는 은은하면서 맑고 명랑한 비색, 유려한 선의 흐름과 탄력이 있는 생동감있는 형태, 조각도의 힘찬 선을 지니고 기물과 일체가 된 회화적이며 시적인 운치가 있는 상감문양, 세계에서 최초로 자기에 붉은색을 내는 구리의 발색기법을 창안해냈으면서 한두점 악센트로 강한 색을 쓰는 이외에 모든 색을 담담하게 구사하며 언제나 같이 호흡하고 일체가 되려 하는 것 등이 그 특색이며 아름다움이다.
 또한, 자연연스러운 선과 세련된 형태, 요란하지 않으면서 운치 있는 문양 등이 고려 청자의 특색이다. 중국 청자가 색이 짙고 탁한데 비하여 고려 청자는 은은하고 투명한 비취색을 띠고 있다. 또한 세계에서 최초로 동(銅)으로 자기에 붉은 빛깔을 내는 기법을 청자에 응용하였다. 그러나 붉은 빛깔을 쓰더라도 현란하게 되지않도록, 전체적인 은은한 색을 해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강조점으로만 사용하였다. 고려 청자는 12세기 전반기부터 맑은 비취색과 세련된 모습으로 그 미적, 기술적 수준이 최고 절정에 다다른다. 청자가 투명한 비취색을 띠기 시작한 것은 11세기말부터이며 이 시기부터 청자의 형태 또한 세련된 미적 감각을 보이고 있다. 또한 중국적인 느낌을 주는 문양들 이 사라지고 한국 특유의 독특한 문양들이 나타나고있다. 12세기 전체를 통틀어 순청자가 우수한 품질을 계속 유지하는 한편으로 12세기중엽에서는 상감기법과 문양에 있어서 가장 세련된 시기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4세기 중엽부터는 청자의 생산이 점차 줄어들게 되고 대신 분청사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 참고 문헌 】

1.『高麗 靑磁』,  정양모 著,  빛깔있는 책들200,  대원사,  1998년
2.『고려 자기』  브리태니커 사전,  계몽사, 1993년
3.『고려청자의 역사적 배경』  http://www.yahoo.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