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사상과 개화사상(實學思想과 開化思想)》

95. 김은주

序論

本論 1.實學思想 2.開化思想

結論

序 論

朝鮮王朝의 지배원리였던 性理學은 16세기 이후에 이르러 점차 觀念哲學化되어 이른바 4단 7정 論爭으로 전개되어짐으로 경직화된 王朝體制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役割)을 수행하였다. 또한 壬辰倭亂 丙子胡亂 등으로 격심한 타격을 입은 조선왕조 지배체제는 그 체제를 유지하기에 급급해서 성리학 이외의 다른 이론 및 사상을 일체 용납하지 않았다. 성리학은 또 17세기 이후 예학(禮學)의 측면을 강조하여 禮 질서를 강요함으로써 전쟁 후 격심해진 사회변동(社會變動)을 저지 억제하려 한 것이며, 禮의 실천을 통해 身分질서의 유지, 동족집단의 결속, 가부장적 폐쇄성을 강화하여 양반층의 지배권을 옹호하고 민중세계를 중세적 지배질서 속에 묶어두려 한 것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강조된 禮論은 지배계급 자체를 심한 당쟁(黨爭) 속으로 몰아넣었고 반면 민중세계는 차츰 성리학적 문화의 굴레를 벗어나 문화영역을 넓혀 가면서 양반문화와 兩立되는 민중문화를 발전시켜 갔다. 실학은 조선왕조 후기의 이와 같은 문화적 분위기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변질되어가는 지배원리에 대항하여 실질적이고 비판적인 사상으로 대두되었던 실학사상은 개화사상으로 이어져 개화사상을 출현시키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19세기 중엽의 조선은 자본주의 열강의 파도가 밀어 닥치고 봉건체제 내부에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위기가 파국적으로 깊어져 가던 시기였다. 이와 같이 이미 수명을 다한 옛 것을 깨뜨리고 그것에 대신할 만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사상으로서 개화 사상이 형성되었다. 변화하고 발전하는 세계 속에서 도태되어가는 국가의 사상 문화 경제 사회 전반적인 문제를 극복하고자 대안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은 유사성을 가진다. 또한 김옥균 등의 개화사상이 1876년 2월,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이 있은 후 일본과의 접촉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고, 이전에 17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기에 걸쳐서 한국 사상계의 이채를 드러냈던 실학사상과 접하면서 그 골조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실학과 개화사상은 뚜렷한 연관관계를 가진다. 본론에서는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형성요인과 발전 등을 대략적으로 다루어보고 결론적으로 그 연관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本 論

1. 실학사상(實學思想)

1)실학 발생의 역사적 배경(實學 發生의 歷史的 背景)

실학사상을 발생시켰던 內在的 요인의 첫번째는 조선왕조가 직면하고 있었던 통치질서의 와해(瓦解) 현상에서 찾을 수 있다. 집권층의 벌열화(閥閱化), 전통적인 수취체제의 붕괴, 사회적 신분체제의 혼란, 농업 위주의 경제질서에 대한 도전 등은 조선왕조 전기의 통치질서가 와해되어 감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변동에 직면한 조선왕조는 전면적으로 본질적인 개혁이 요청되었으나 당시 대부분의 집권층은 이에 대한 명확한 개혁방안을 제시하지 못했고, 다만 그들에게 보장된 특권에 안주하며 경직된 통치질서를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이에 일부 진보적인 관료들과 재야의 지식인들이 국가체제를 강화하고 민생을 안정시킬 수 있는 새로운 개혁정치의 이념과 방법을 제시하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실학사상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실학이 발생하게 된 두번째 요인은 조선왕조의 지배원리였던 성리학의 半역사성이었다. 임진왜란 후 사회의 모든 분야에 걸쳐 부조리가 드러나고 새로운 변화가 나타남에 따라 전면적이고 본질적인 변화가 요청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운영의 지도원리였던 성리학은 그 합리적 수습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7세기에 이르러 성리학의 명분론은 당쟁을 합리화시키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고, 성리학의 예론 등은 당쟁에 빌미를 제공해 주기까지 했다. 그 때문에 성리학에 대한 반성과 반발이 일어나게 되었고, 성리학적 학문체계를 벗어난 학문의 형성이 요청되고 있었다.

실학 발생의 세번째 요인으로는 조선 후기 사회의 경제적 변화와 발전을 들 수 있다. 이 시기는 농업경제 분야에 있어서 농민분해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으며, 그것을 주의 깊게 관찰한 실학자들은 농민분해 과정에서 출현한 상업적 농업경영자 및 '경영형 부농'의 이익을 대변하는가 하면 다른 일부의 실학자들은 토지의 농민적 소유를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으며 또 지주의 존재 자체는 인정한다 하더라도 소작조건의 개선 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한편, 실학사상은 그것과 깊은 관련을 가지면서 화폐 상품 경제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일정한 역할을 했다. 조선 후기의 경제적 변동은 바로 실학 발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실학 발생의 네번째 배경은 조선 후기의 사회계급면의 변동을 들 수 있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중세적 신분질서가 급속히 붕괴되고 있었으며 그것은 대체로 양반이 경제적으로 몰락해 가는 下向과정과 서민층이 신분상승을 꾀하여 성취하는 上向과정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회현실에 직면하여 실학자들은 신분의 하향과정에 놓여 있는 양반층의 생계 대책과 함께 상향과정에 들어선 서민층의 이익을 보장하는 문제에 주목하게 되었다. 실학자들은 이 사회현상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대책을 이론적으로 추구했고 그렇게하여 그들 자신의 독자적인 사상을 형성해 나갔던 것이다.

실학 발생의 다섯번째 요인으로는 조선왕조가 축적해 온 학문적 전통을 들 수 있다. 조선왕조의 성립 직후에 발전했던 궁정문화적 업적들은 실학자들에 의하여 일부 계승되고 다시 발전되어 독자적인 학문 영역으로 성립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 전기의 과학적 업적이나 실용적인 학문들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에게 참고된바가 적지 않았다. 실학 발생의 역사적 조건이 되고 있는 이상의 다섯 가지 측면들은 모두 조선 후기 사회가 가지고 있던 내재적 요인으로 파악할 수 있다.

한편 실학사상의 발생에는 이러한 내재적 요인과 함께 외래적 요인들도 영향을 미쳤다. 먼저 서학의 경우 17세기 이래 중국에서 간행된 각종 서학 서적들이 조선에 전래되어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읽히고 있었다. 이 때 전해진 서학서들은 수학 천문학 농학과 같은 과학기술 계통의 서적과 함께 천주교 교리서들이 있었으며 이러한 책들은 일부 실학자들의 학문 연구에 큰 자극제가 되었다.

명말 청초의 학술사상에는 강력한 민족의식과 민본의식 그리고 현실 개혁의식이 나타나고 있었으며, 이 특징들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역시 일정한 자극을 주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 후기의 실학은 고증학보다는 명말 청초의 학문경향에 좀더 가까운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실학의 발생에 외래적 요인이 일부 작용하고 있었지만, 그 역사적 조건은 조선 후기 사회가 가지고 있던 내재적 요인에서 우선적으로 찾아져야 할 것이다.

2)실학의 특성

실학은 조선 후기의 독특한 사상체계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실학은 중세사회 해체기로서의 조선 후기 사회에서 형성되었음은 물론 조선 후기 사회의 개혁을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었던 학문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시대에서나 자신이 살고 있던 사회의 개혁을 시도하는 지식인 집단이 있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 실학이란 용어를 중세사회 해체기로서의 조선 후기의 역사적 소산물로 파악할 때 비로소 그 가진 바 성격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한편 실학은 유학사상에 기초하고 유학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상으로 파악될 수는 있을지언정, 중세 유학인 성리학과는 분명히 다른 학문체계로 파악되어야 한다. 성리학은 양반 사대부 중심의 이론이었고 관념철학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며 방법론에 있어서도 관념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실학은 학문의 목적과 연구 분야 및 방법론에 있어서 성리학과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 주고 있다. 즉 실학에서는 새롭게 등장하는 민중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들을 위한 학문체계를 형성하고자 했다. 그런가 하면 실학은 이기론으로 대표되는 관념철학으로서의 성리학이나 사장학적 특성과 결부된 관료지향적 학문과도 달라 그 연구 분야가 百科全書的인 경향(傾向)을 띠고 있었다. 비록 실학이 사변적 요소를 전혀 배제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실학자들은 경험적이며 실험적인 방법을 존중하고 있었다.

또한 실학은 조선 후기 사회의 발전에 직접적 영향을 줄 수 있었던 사상이었다. 실학자들이 주장한 제도개혁론은 그 일부가 국가의 정책에 반영되어 민중생활의 향상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실학자들이 제안했던 개혁안 중 정치와 토지경제에 관한 이론의 상당 부분이 당시의 벌열정치 하에서는 수용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실학사상이 가지고 있는 현실 개혁에 대한 기여는 제한적인 의미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실학은 공리공담이 아닌 실현 가능성을 내포한 사회발전을 위한 이론이었음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다.

3)실학의 연구분야

실학은 백과전서적 학문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성리학 중심의 전통적 학문체제에 대항하여 다른 학문분야의 가치를 성리학과 대등한 수준으로 향상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실학자들이 집중적으로 연구한 분야는 현실개혁을 위한 사회경제적 문제들이었다. 우선 농업과 농민문제에 크게 관심을 보인 이는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었다. 그는 일생동안 농촌에 살면서 농촌사회의 현실에 대한 지식을 기본으로하여 토지제도와 수취체제 행정 및 군사조직의 개혁에 관한 연구를 진행시켜 나갔다. 이러한 그의 연구는 「반계수록(磻溪隨錄)」에 집약되고 있다. 유형원의 학풍을 이어받은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토지제도의 改革을 통해 소농민에게 균등한 토지소유를 보장해 줄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는 17세기 이후 국가의 수탈(收奪)속에 화폐유통과 더불어 상업 고리대자본이 농촌에 들어와 농민을 토지로부터 이탈시키는 광경을 직접 근지농촌인 광주(廣州)에서 목격하였기 때문에 보다 현실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유형원 이익 등의 개혁사상은 정약용(丁若鏞 1762-1836)에 의해 集大成되었다. 조선왕조가 배출한 최고의 학자로 평가되는 정약용은 「경세유표(經世遺表)」「흠흠신서(欽欽新書)」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저술해서 중앙의 정부조직 및 刑政과 지방행정의 개혁을 논했다. 또한 田論이란 글에서 농민의 이해와 직결되는 토지제도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했는데 그의 개혁안은 여전제(閭田論)으로 축약되고 있다. 여전론이란 한 마을을 단위로 하여 토지를 共同所有 共同耕作하여 노동량을 기준으로 수확물의 분배를 제도화하는 개혁안이다.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의 실학자는 농업문제와 농민에게 관심을 두는 이들로 이른바 重農學派, 즉 經世致用學派라고 불린다. 이들의 토지개혁론은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을 본위로 한 것으로 토지소유와 경작을 일치시켜 독립된 자영농민을 기본으로 하는 이상국가를 건설하려 했다.

농촌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이들 실학자 이외에 상공업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일단의 실학자들이 있다. 유수원(柳壽垣 1694-1755)은 「우서(迂書)」를 통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전반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했는데 특히 특권상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상업자본축적을 꾀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北學派로 불리워지는 박지원(朴趾源 1733-1805) 박제가(朴齊家 1750-1806)는 疓의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여 朝鮮의 후진성을 극복하려 했다. 이들은 상공업의 발전과 상품유통의 원활화, 기술혁신, 해외통상의 장려 등을 주장했다. 이들은 대개 특권층과 결탁한 서울의 육의전(六矣廛) 등의 특권상인과 都賈행위를 통한 대상인의 독점적 이익에 반대하고 大衆의 소비생활에 직결된 소영업 소생산자들의 자유로운 활동과 성장을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박지원은 文學藝術運動을 통해 상인 수공업자를 중심으로 하는 庶民의 세계를 신선한 구상과 대담한 사실적 수법(寫實的 手法)으로 표현하면서 革新的 기풍을 조성해 나갔다. 그러나 이는 정조대에 문예반정(文藝反正)으로 탄압을 받았다. 茶山은 북학파의 기술혁신 문제를 수용하여 農具 兵器 등의 광범한 기술개발을 강조하였다. 때문에 그의 시기상으로도 떨어지지만, 농촌 농업문제의 기본적 관점에서 기술개발문제를 수용하여 경세치용파와 이용후생파의 특성적 실학을 집대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일단의 실학자들의 관심을 사회경제적 문제에 둔 반면, 한편으로 민족의 전통과 현실의 당면한 문제에 대해 연구한 실학자도 있다. 우선 歷史分野를 보면 이수광(李杙光1563-1628)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을 들 수 있다. 그는 주로 전통적 사회와 정치에 대한 연구를 했다. 李瀷도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國史에 관해 상당부분 서술했는데, 그 제자인 안정복(安鼎福1712-1791)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열조통기(列朝統紀)」는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東史綱目」은 단군조선 이후 고려에 이르는 시기의 역사를 유교적 正統論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의 「海東歷史」는 국내외의 史書를 두루 참조하여 기전체(紀傳體)로 정리한 國史書이다. 이외에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이종휘(李鍾徽 1731-1786)의 「東史」를 들 수 있다. 이들은 史書를 통해 民族史를 서술함으로서 민족의 역사적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정통성 이론의 근거가 왕조사적 정통에 머물러 있고 민족적 정통성에 두지 않았다는데 한계성이 드러난다. 그리고 인문지리 역사지리 분야에서도 연구가 진행되었다. 일단의 실학자들이 사회개혁과 현실문제에 관심을 두었던데 반해 완당(阮堂) 金正喜 등의 소위 實事求是派는 실증적 연구방법을 계승하면서 金石 典故에 대한 학문에 주력했다. 그는 淸代 고증학(考證學)의 성과를 받아들이면서 차차 古文學에서 今文學으로 관심을 넓혀 갔다.

2. 개화사상(開化思想)

1)開化思想의 形成要因

개화사상의 내적인 요인으로 實學과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실학과 개화사상은 思想의 論理와 人的인 계보(系譜)에 있어서 상당히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우선 그 연관의 사상적 형태로서는 첫째로 실학의 이용후생과 실사구시의 논리, 둘째로 실학의 민족주의적 성격, 셋째로 실학의 민권사상, 넷째로 실학의 通商開國論, 다섯째 실학의 영업자유론 등이 개화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여섯째 土地問題에 대한 실학자의 開化的 구상이 개화사상가에 의하여 계승 발전되었다. 다음은 人的系譜를 살펴보면 실학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사상을 발전시킨 박규수(朴珪壽)를 들 수 있다. 그는 연암의 친손자로서 실학과 개화사상을 연결시켜 주는 교량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와 교우관계를 맺었던 인물로서 오경석(吳慶錫)과 유홍기(劉鴻基), 李東仁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의 지도아래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의 개화파 청년들이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박지원의 「연암집(燕巖集)」을 읽으며 平等思想과 利用厚生思想을 연구하였다. 阮堂 金正喜의 門下에 출입하던 신관호(申觀浩) 등도 실학과 時務의 學을 배워 實事求是派와 개화사상을 연결시켰다. 實學을 集大成한 茶山 丁若鏞의 門下에서는 정학연(丁學淵), 이강회(李綱會), 초의선사(艸衣禪師) 등의 實學思想家들이 배출되었고, 그들의 문하에서 南鍾三, 申正熙, 魚允中 등의 개화론자들이 배출되었다. 그런데 개화사상의 형성에서 중인층의 역할이 중시되어야 할 것이다. 상기의 실학자들은 中人出身의 人材들과 교유하고, 또 그들을 지도해서 일정한 사상적 영향을 줌으로써 종래 양반층의 실학사상을 중인층으로 넘어가게 하였고 이 중인들은 다음날 개화운동의 측면공작자로 활동함으로써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을 연결 짓는데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보여진다.

개화사상의 外在的 要因에는 淸末의 洋務思想과 日本文明開化論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우선 양무운동의 사상이 영향을 주었다는 구체적인 예증인 위원(魏源)의 「海國圖志」와 정관응(鄭觀應)의 「易言」, 황준헌(黃遵憲)의 「朝鮮策略」 등의 영향도 지적될 수 있다. 이러한 책들의 영향으로 개화 사상가 중에서 온건적 입장을 내세우는 민영익(閔永翊), 김윤식(金允植) 등의 親淸的 勢力이 등장하였고 이들에 의해 東道西器思想이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日本의 明治維新以後 일본측으로부터 일본 資本主義 韓國侵略의 지도적 이념가였던 복택유길(福澤諭吉)의 文明論之槪略 學問에의 권유 등의 영향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이의 영향으로 金玉均, 朴泳孝 등의 급진개혁파가 형성되어 개화를 표방하는 사상적 전개를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계열은 사상자체의 성격으로 보아 淸末의 洋務運動보다 한 단계 후에 나타난 변법적(變法的)인 성격의 것으로 보다 진보적인 입장에 있었고, 정치적으로 친일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와 같이 개화사상의 형성요인에는 내재적 측면 뿐만 아니라 외재적 측면도 중시 되어야 할 것이다. 개화사상이 발전과정에서 외래사상이 끼친 영향을 중시한다고 해서 결코 타율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시대가 급변할 때는 많은 외래사상을 섭취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개화사상은 후기실학사상의 近代指向的 萌芽를 내재적으로 계승하고 19세기 후반이라는 역사적 상황에서 외재적 요인에 자극되어 근대적 변혁을 지향하는 민족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즉 개화사상은 박규수에 의해 선포되고 오경석에 의해 촉진되었으며 유홍기에 의해 정치의식화 되고 김옥균에 의하여 정치운동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開化派의 形成

초기 개화파의 형성에는 박규수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박규수는 1874년에 우의정을 사퇴하고 한거생활을 하면서 그의 사랑방에 출입하는 젊은 양반의 자제들에게 조부 박지원의 연암집을 강의하기도 하고 중국에 왕래한 사신들이나 역관들이 전하는 신사상을 알려 주기도 했다. 이 때 양반 소장파들로는 김홍집(金弘集), 金允植, 어윤중(魚允中), 金玉均, 朴泳孝, 서광범(徐光範), 洪英植 등이 있었다. 그러나 박규수의 생존 중에는 그 문하에 모인 양반소장파가 차차 사상적으로 결속되었지만 정치적결사로서의 성격을 갖추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1877년 박규수가 세상을 떠나자 북경에 10여회나 왕래한 바 있고 박규수의 知友였던 역관 오경석은 한의사인 그의 盟友 유홍기에게 북경에서 가져온 신서를 제공하여 세계의 새로운 동향을 연구시키고, 젊은 소장파에게 목적의식을 가지고 접근시켰다. 이때의 신서로는 魏源의 「海國圖志」 등이 있었다. 1879년에 오경석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이제는 유홍기가 김옥균가 만나게 되고 그는 그 후로부터 초기 개화파의 사상적, 정치적 지도자로서 갑신정변에 이르기까지 그 支柱的 존재로서 위치를 점하였다. 한편 유홍기가 김옥균에게 서울교외에 있는 奉元寺의 개화승 李東仁을 소개하게 되었고 그가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유력한 동지가 되었다. 이들은 빠른 시일 안에 국가를 근대적인 체제로 개혁해 보려고 여러면으로 활동하였다. 외세의 도전에 대응하여 국가의 독립을 견지하기 위해 외교교섭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열강의 외교사절들과 폭넓게 접촉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에는 급진적인 면이 많아 유교적이고 士族的인 인사들은 뜻을 달리하여 분리되어졌으며 또 당시의 사회도 그들의 사상과 행동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되지는 못했다. 때문에 일반국민들로부터 경원시 되고 비판까지 받게 되었다.

結 論

본론에서 살펴봤듯이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개화사상이 형성되어졌다고 볼 수 있다. 다시말해 조선 사상사에서 실학사상이 차지하는 위치는 주자학이 봉건적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활력을 점차로 상실하고 개화 사상으로 탈바꿈하기에 이르는 중간기에 유교적 전통 사상을 답습하면서 그 가운데서 점차로 근대적 요소를 낳았던 사상 체계이다. 따라서 실학사상은 근대 조선에 있어서 개화사상의 원류가 된다고 할 수 있으며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는 실학 사상에서 현저히 나타나는 바와 같이 지도(地圖) 지전설(地轉說)과 같이 지도에 대한 신지식에 의거하여 화이사상(華夷思想)의 명분론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청국에 대한 <事大>와 <倭夷> 및 <洋夷>에 대한 자주적인 입장을 주장했다.

둘째로는 앞의 이야기와 관련되지만 자주적 개국론이다. 즉 쇄국에 의한 고립주의에 반대하여 개국에 의한 해외 통상과 청국 및 유럽의 과학 기술을 도입하여 利用厚生에 사용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개화파는 이미 1875년의 일본에 의한 운양호사건과 그것에 잇따른 강화도 조약이 있기 이전부터 자주적 개국을 주장했던 바로서 부강하기 위해서는 외국의 뛰어난 과학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셋째로는 생산력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이미 그 질곡으로 되어 있는 낡은 제도와 질서의 개혁을 요구하는 경세사상 이다. 실학사상은 그 당시의 역사적 제약 가운데서 봉건 제도의 틀 안에서의 개혁 사상이고, 개화사상은 이미 봉건제도의 틀을 뛰어넘은 부르조아 개혁 사상이였지만 공통된 점은 변동하는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고 생산력과 그것을 담당하는 민중의 입장에 서서 그 발전을 저해하는 기성 질서를 개혁한다고 하는 민주적 자세이다. 넷째로는 봉건적 지벌과 문벌에 반대하여 농민과 상인의 자식이라도 有才有學하면 묘당(벼슬자리)에 오르고 공경의 자식이라도 無才無學하면 종이 되어도 한이 없어야 한다는 능력 본위의 인재등용과 놀고 먹는 양반도 농업 상업 기술 등의 생산적 직분에 임해야 한다고 하는 萬民皆勞의 사상이다. 이것은 개화 사상에 이르러 인간평등의 사상으로 발전했다. 다섯째로는 국내 시장의 형성에 있어서 그 커다란 장벽이었던 교통수단의 정비에 관한 주장이다. 박지원의 <車制>, 박제가의 <통상선의(通商船議)>, 김옥균의 <治道略論>, 박영효가 한성 판윤 때 설치한 <治道局> 등은 일련의 계승 관계에 있다고 볼 수가 있다.

여섯째로는 주자학적 속박에서의 인간 이성의 해방이다. 이것을 전제로하여 비로소 근대적 과학 정신은 육성된다. 실학파에 있어서의 백과전서적 지식은 당연히 그 후에 있어 각 분야별로 분화 발전될 근대과학과 사상의 모체가 되는 것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실학 사상 가운데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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