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의 경제적 기반(書院의 經濟的 基盤)》

96. 권의석

序論

本論 1.書院奴婢 2.書院田 3.現物經濟

結論

序 論

조선 초기 儒, 佛의 교체는 치국 이념의 교체인 동시에 종래의 불교 시설과 사원(寺院)소유의 田民이 유교적인 시설 내지는 사족의 경제적인 기반으로 탈바꿈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15세기 이후 조선왕조는 억불정책과 더불어 향촌사회의 지배세력이 불교적이고 음사(淫祀)적인 이족(吏族)에서 유교적인 재지사족(在地士族)으로 넘어가자 불사(佛寺)는 황폐일로를 걷게 되었다. 그리하여 각 읍마다 인정하는 寺刹만이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고 그렇지 못한 사원(寺院)들은 징수(徵收)되어 향교(鄕校)등 관부시설(官府施設)로 전용(轉用)되기도 하고, 사족에 의하여 書堂, 書院등으로 대체되기도 하였다. 그 사찰소유의 토지와 노비는 官府로 몰수되기도 하였지만 특히 在地土豪의 영점(影占)된 바가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즉 사족의 경제적 기반 구축에 있어서 폐사(廢寺)의 시설과 田民이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조선왕조가 인적, 물적인 기반을 사원에서 확보하여 왕권을 확립하려는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조선 중기 書院의 설립은 재지사족세력(在地士族勢力)의 향촌지배체제(鄕村支配體制)확립을 위한 노력(努力)의 일단이었다. 이는 15세기 士族들에 의해 행해지는 유향소(留鄕所), 사마소(司馬所) 설립 등 일련의 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즉 15세기 사족들이 지향하는 향촌질서(鄕村秩序) 확립을 위한 유향소 復立運動은 훈구파들에 의한 관권 주도형으로 전환되고 무오(戊午), 갑자사화(甲子士禍)를 거치면서 일대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사림파의 성장이라는 시대적인 대세는 어쩔 수 없었다. 이후 조광조 일파가 중앙정계에 등장하면서 새로운 향촌질서 확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유향소 대신 향약(鄕約)의 보급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후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거치면서 사림파가 중앙정계의 중심적인 정치세력화 하면서 경상도 풍기군(慶尙道 豊基郡)에 최초의 서원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후 16세기 사림은 경쟁(競爭)적으로 서원을 설립하였으며, 서원은 그들의 근거지화하여 조선왕조 사회에 있어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 서원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원이 어떠한 경제적 기반 위에서 설립되었고 시대진전에 따라 그 경제규모가 어떻게 변화되어 나갔는가가 밝혀져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또한 조선 후기 사회의 경제적인 문란의 일부분을 차지하는 원생(院生)과 원노(院奴)의 증가로 인한 국역(國役) 담당자의 감소, 서원전의 확대로 인한 국가 조세수입의 감소 등으로 인한 위정자와 서원과의 관계변화에 있어서도 중요하다. 여기에서는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서원노비, 서원전, 현물경제 등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本 論

1. 서원노비(書院奴婢)

서원을 경영하는데 있어서 인적인 하층 구조 즉 원직(院直)과 노비는 서원 수직(守直), 전토의 경작 및 각종 사역에 從事하여 그 중요한 일면을 담당한 세습되는 재산(財産)으로서 서원전과 함께 서원경제를 구성하는 2대 재산이었다. 이러한 원노(院奴)는 16세기 서원 설립 초에 일정하게 정해진 액수(額數)가 없고 단지 국가에서 서원에 사액(賜額)을 내리는 경우 서적·전답과 함께 지급되었다. 그 후 서원의 설립이 증가되면서 그 폐해가 점차 노출되자 국가는 효종 당시에 서원의 노비 수를 한정했다. 서원 노비 수를 사액서원 7명 미사액서원 5명으로 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명문상의 것이었지 실제로 서원에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서원의 노비는 지방관의 조치(措置), 서원자체 경제력으로 인한 매득(買得) 또는 출산(出産)등으로 인해 시대의 진전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에 있었다. 이들 노비는 서원내의 사역뿐만 아니라 서원전의 경작 등 각종의 생산분야에 종사하였고 또 외거노비의 경우는 서원 소용(所用)의 물품(物品)을 上納하거나 혹은 일정한 신공(身貢)을 上納하여야 했기 때문에 노비는 서원내 경제적 기반으로 지대한 영향(影響)을 미쳤다. 그래서 서원자체의 노비에 대한 관심도 또한 상당하였던 것이다. 17세기 이후 조선왕조는 사회, 경제 질서가 서서히 파탄되어 가고 또한 주기적으로 닥치는 흉년, 기근으로 유랑민이 대량적으로 발생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서원에 있어서도 서원所用의 작물 혹은 신공을 바치지 못하는 노비의 대량적인 도망(逃亡)이 발생한다. 이것은 시대가 내려오면서 더욱 심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서원 노비의 대량적인 도망이 서원 경제에 있어 커다란 타격을 가하는 것이 아니었겠으나 서원에 있어서의 도망 노비 색출(索出)은 엄격(嚴格)하였다.

2. 서원전(書院田)

서원전은 서원의 설립과 함께 발생되었다. 즉 최초의 서원으로 알려진 백운동서원 설립시(중종38년)에 설립장인 주세붕이 「 思有書院 不可以無田」이라 하여 「立田 立寶米」하였다는 기록이 죽계지(竹溪誌)에 보이고 또 同 서원에 사액(賜額)되기 이전인 명종 2년 2월의 백운동서원 립의(立議)에 30결에 달하는 전답(田畓)이 보유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서 확인(確認)될 수 있는 것이다. 그 후 書院位田은 서원 설립초기의 목적 즉 국가의 각문흥학정책(名文興學政策)에 부응하여 지방 재지사족들의 자제를 교육한다는 측면에서 이들을 공액(供額)하기 위해 學田으로 설립된 것이다. 이러한 서원의 學田은 사액서원에 한해서 서원전 소재 방백(方伯)의 令으로 면세(免稅)되는 것이 당례(常例)였다. 초기 서원에 있어서 명목상 면세전(免稅田)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 후에 내려오면서 부터 사액서원 3結, 미사액서원은 無免稅로 확정되었다. 서원은 시대의 진전에 따라 매득·면역·납상(買得 免役 納上) 또는 관의 조치로 급격히 서원전을 확대해 나갔다. 또한 이러한 사액서원의 田畓은 면세의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書院位田의 면세는 사액서원은 「삼결위한」(三結爲限)으로 면세한다는 규정이 있기까지는 대체로 수령의 명으로 면세되는 것이 상례였다. 이것은 구령과 서원과의 관계 즉 서원 설립에 있어서 지방관의 힘이 상당히 작용하였으며 서원설립 이후에는 서원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士族과 수령과의 상호 연관하에 향촌사회를 장악(掌握)하는 것과 일련의 연관이 있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서원에는 가급(加給), 특급(特給)의 형식으로 免役田이 지급되는 경우도 있었다.

3. 현물경제(現物經濟)

서원경제에 있어서 토지경제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국왕이나 지방관들에 의해 조치(措置) 되는 서원유생들의 공액(供額)을 위한 각종 어물람(魚物鹽) 등의 현물공여(現物供與)인 것이다. 조선 시대 지방관들의 서원에 대한 현물공여는 하나의 상식으로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지방관들의 서원에 대한 현물공여는 특히 주목되며 또한 공여품목은 紙, 酒, 生, 치(雉), 鷄, 太, 米, 고모필(羔毛筆), 魚物, 鹽 등으로 서원에 필요한 물품을 망라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또한 중요한 것은 書籍인데 이는 사액과 동시에 국왕이 하사하는 것이 식례(式例)로 되어 있었다. 지방관의 서원에 대한 현물공여는 지방관과 서원 사림과의 緊密한 상호협조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지방관들은 향촌사회를 掌握하고 있던 在地士族을 수령은 무시할 수 없었고 또 그들의 협조에 의해 수령의 지위가 유지된다는 입장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結 論

이상에서 미흡하나마 서원의 경제적 기반 즉 寺院田民의 서원으로의 이속(移屬) 및 서원노비, 書院位田, 現物經濟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서원과 사원 이 양자의 관계는 15세기 儒 佛交替의 시기에 鄕村社會의 지배세력이 불교적이고 음사(淫祀)적인 吏族에서 유교적인 在地士族으로 넘어감으로서 국가가 名邑마다 인정하는 사찰(寺刹)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그렇지 못한 사찰은 官府의 시설(施設) 또는 在地士族의 액당(額堂), 제사(齊舍), 정사(精舍) 등으로 탈바꿈하는 시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양자의 상호이해의 관계로서 연결되는 것이다.

서원의 인적 자원이 되는 노비는 설립 초기에는 대부분 관의 조치(措置)에 의존(依存)하였다. 이후 서원의 설립이 증가하면서 그 폐해가 점차 노출되자 국가는 노비의 수를 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명목상의 것이었지 실제에 있어서는 노비의 수는 증가하는 추세에 있었다. 이 노비는 서원경제의 큰 목을 담당하고 있었다.서원전은 지방관의 令으로 면세되는 것이 상례이었고 수령들의 제공(提供)과 노비들의 개간으로 서원전은 큰 일대촌으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한편 서원은 어람(魚鹽) 및 現物을 지방관의 조치 또는 서원자체의 경제력으로 확보하고 있었다. 당시 지방관의 서원에 대한 현물공여는 하나의 상식으로 되어 있었다. 이는 지방관과 서원 사림과의 밀접한 상호 협조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당시 향촌사회를 장악하고 있던 사족을 수령은 무시 할 수 없었고 또 그들의 협조에 의해 수령의 지위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사족들은 자신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 참 고 문 헌 *

유홍렬, 조선후기사상사논공, 일조각, 1980

이수환, 「영남지방 서원의 경제적 기반」, 영남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