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학교 사학과 답사지역개관

장성군 ☞ 필암서원


전라남도 북부에 위치한 군. 동쪽은 담양군, 서쪽은 영광군, 남쪽은 광주 직할시, 북쪽은 전라북도 정읍군과 고창군에 접하고 있다. 장성은 백제땅, 신라땅을 거쳐 고려 성종 11년(992) 또는 현종 9년(1018)부터 지금과 같이 장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노령산맥이 긴 성과 같이 북서쪽을 가로막고 있어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장성을 장성답게 하는 것은 필암서원·고산서원·봉암서원 등 곳곳에 자리잡은 서원과 사우들이다.

호남 지방에서 유림의 고장을 꼽을 때면 흔히 '광나장창'이라고 하듯이 장성은 광주·나주·창평과 더불어 선비가 많고 학문이 성한 곳이었고, 경상도에서 안동 문장이 으뜸의 자리에 놓이듯이 전라도에서는 장성 문장이 첫째로 꼽혔다. 흥선 대원군도 조선 팔도에 관해 평하는 가운데 '호남팔불여(湖南八不如)'를 말하면서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이라 하여 역시 "학문으로는 장성 만한 곳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장성의 학문과 선비정신을 말해 주는 서원들, 그 가운데서도 황룡면 필암리에 자리 잡은 필암서원은 호남지방의 유종(儒宗)으로 추앙하는 하서 김인후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장성 사람들의 꼿꼿한 기질과 은근한 자존심의 바탕이 되어 온다.

광주 광역시 ☞ 광주 국립 박물관


전라남도의 중북부에 위치한 대도시. 1986년 11월 1일 직할시로 승격되었으며, 전라남도 도청도 아직 동구 광산동에 있다. 동쪽은 담양군, 서쪽은 광산군, 남쪽은 화순군, 북쪽은 장성군과 접하고 있다. 이곳은 백제 동성왕 20년 탐라정벌 때 이곳까지 왕이 행차한 기록이 보인다. 신라의 영역에 편입된 뒤 686년(신문왕 6)에 무진주라 하였고, 757년(경덕왕 16)에 무주로 고쳐 현 전라남도 지역의 중심치소로 삼았다.

그러다가 940년(태조 23)에 광주로 이름을 고쳤고, 966년(성종 15)에 자사를 두었으며, 고려시대에는 나주의 영군으로서 존재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1403년(세종 12)에 고을사람 노홍준이 목사 신보안을 때린 일로 무진군으로 강등되었다가, 1451년(문종 1)에 광주목으로 복구된 일이 있으며, 그 뒤에도 비슷한 사유로 1481년(성종 12)에 광산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501년(연산군 7)에 복구 등 강상죄와 연유하여 강등 당한 경우가 매우 많았다.

1895년(고종 32)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로 했을 때 나주부에 속했다가 이듬해 13도제 실시에 따라 1등군이 되어서 전라남도의 도청이 설치되고 나주를 대신하여 현재와 같은 전라남도의 중심지로 등장하게 되었다. 1914년 군 면의 통폐합 때 성내면·공수방·기례방·부동방을 광주면이라 칭하였다가 1931년에 이를 광주읍으로 개칭하고 다시 1935년에 광주부로 개칭하면서 나머지 지역은 광산군이라 칭하게 어 광주와 광산군이 분리되었다.

1949년에 광주부가 광주 시로 승격되어 시의회를 구성하였고, 1955년에는 광산군의 사방면·효자면·극락면과 석곡면의 일부지역이 편입되었다.

담양군 ☞ 소쇄원


전라남도 북단에 위치한 군. 영산강 최상류유역에 속한다. 동쪽은 곡성군, 서쪽은 장성군, 남쪽은 광주직할시와 화순군, 북쪽은 전라북도 순창군에 접하고 있다. '대의 고장' 담양의 대밭은 자그마치 우리 나라 대밭 면적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그 넓은 대밭에서 나는 지 좋은 대를 바탕으로 이 나라 제일의 죽세공업을 발달시켰다.

담양의 서북쪽은 노령산맥의 갈래로 추월산이 솟는 등 산지를 이루고 동남쪽 또한 무등산과 잇닿은 산들이 이어진다. 그 골짜기마다에서 흘러나온 물길들이 담양읍을 감돌고 수북, 대전, 봉산, 창평, 고서 등을 고샅고샅 적셔서 기름진 들판으로 만들고는 영산강을 이루어 남서쪽으로 빠진다.

그 덕에 예전부터 담양땅에는 큰 지주가 많았고,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봉건 시대의 식자층이 꽤 두텁게 형성되었다. 중앙 정계로 나아갔던 그들은 나이 들어 벼슬에서 물러나거나, 더 흔하게는 16세기 조선 사회를 뒤흔들었던 사화의 와중에 권력에서 밀려나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각자의 연고에 따라 이곳 저곳에 정자와 원림(園林)을 꾸리고 자연에 묻혀 한 세월을 보냈다. 담양군 고서면과 봉산면 그리고 남면 일대에 점점이 흩어진 면앙정·송강정·명옥헌·식영정·소쇄원·독수정 등 그들이 이룩해 놓은 정자와 원림, 별서(別墅)들은 잇닿은 무등산 북쪽 자락의 취가정·환벽당·풍암정과 더불어 일대 정자 문화권을 이룬다.

그 정자와 원림들은 한거(閑居)와 수양과 은둔의 공간이면서 학문과 세상일을 논하는 토론의 장이 되기도 했고, 또 선비들이 모이는 곳이었던 만큼 자연스럽게 문학의 산실이 되었다. 요컨대 그것들은 조선 시대 지식인들의 총체적인 문화 활동의 터전으로, 그 위치나 꾸밈새는 그들의 삶과 정신세계를 또렷이 반영하고 있다.

화순군

  • ☞ 쌍봉사
  • ☞ 운주사

  • 화순은 전라남도의 한가운데쯤에 있다. 전라남도 중앙부에 위치한 군. 동쪽은 곡성군·승주군, 서쪽은 나주군, 남쪽은 보성군·장흥군, 북쪽은 광주직할시·담양군·곡성군에 접하고 있다.

    광주시에서 화순으로 오려면 너릿재를 넘어야 한다. 1971년에 터널이 완공되기 전까지 겨울이면 며칠씩 교통이 끊겼고, 그보다 더 전에는 대낮에도 산적이 나오는 험한 고개였다. 험한 것은 지형만이 아니었다. 화순 너릿재는 갑오농민전쟁 때 농민군이 무더기로 처형되었고, 1946년 조국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가하여 간 화순탄광 노동자들이 미군정의 총격을 받고 쓰러진 곳이며, 또 가까이는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 때 공수부대의 마구잡이 총질에 멋모르는 아이들까지 죽음을 당했던 통한과 울분의 고개이다. 너릿재 너머 화순군은 크게 화순과 능주와 동복이 합쳐진 곳이다. 이 세 지역은 서로 조금씩 다른 특성을 지니며 역사상 행정구역이 갈리고 합쳐지기를 여러 차례 했었다.

    한편, 남한에서 세 번째로 석탄을 많이 캐내는 화순탄광이 이곳에 있고, 개천물이 맑은 동복면 가수리에는 솟대와 목장승의 전통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남쪽의 이양면 증리에는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부도 가운데 첫손에 꼽히는 철감선사의 부도를 간직한 쌍봉사가 있고, 거기에서 멀지 않은 도암면 용강리, 대초리에는 천불천탑으로 유명한 운주사가 있다.

    나주시

  • ☞ 불회사
  • ☞ 돌당간
  • ☞ 향 교

  • 전라남도 나주군의 중앙부에 위치한 시. 시의 사방이 나주군에 둘러싸여 있다. '천년 목사 고을 나주' 나주를 들며 나며 길가에서 볼 수 있는 나주 사람들의 자부심이 담긴 구절이다. 말 그대로 나주는 고려 성종 2년(983)에 나주목이 된 이래 조선 고종 33년(1896)에 전라남도 관찰부가 광주로 옮겨지기까지 900여 년 동안 전라남도 지역에서 가장 큰 고을이었다. 그래서 전라도라는 이름도 전주와 나주를 합해서 만들어졌다.

    나주를 큰 고을로 만든 것은 영산강이었다. 담양 용추봉에서 시작된 영산강은 나주 땅을 북동에서 남서로 굽이굽이 가로지르고 무안과 영암 사이로 빠져나간다. 영산강 유역에 끝없이 펼쳐진 나주평야는 전라남도 제일의 곡창으로, 나주의 풍년은 전라남도의 풍년이었고 나주의 흉년은 곧 전라남도의 흉년이었다. 또 강은 물자와 사람을 실어 나르는 물길이 되어 주었다. 오랜 옛적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증명하듯, 나주 땅 전역에는 청동기 시대의 유물인 고인돌이 즐비하다.

    나주는 백제 때 발라(發羅), 통일 신라 때는 금산(錦山) 또는 금성(錦城)이라 불렸다. 신라 말에는 견훤이 이 지방을 중심으로 후백제를 세웠고, 그가 완산(지금의 全州)으로 진출한 후에는 후고구려 궁예의 부하였던 왕건이 수군을 이끌고 영산강을 타고 들어와 이곳을 점령하고 나주로 이름을 고쳤다(903년).

    고려가 세원진 후, 성종은 이곳에 전국 12목 가운데 하나인 나주목을 두었고 현종 2년(1011) 거란군의 2차 침입 때는 왕이 이곳으로 피난을 와 10여 일 동안 임시 수도가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나주는 여전히 중요시되어 세종 2년(1420)에는 이곳에 진을 두었고, 고종 32년(1895)에는 나주목이 나주군으로 되면서 전국 23부의 하나로 나주 관찰부가 설치되었다.

    나주땅을 이야기할 때는 나주읍과 함께 또 하나의 중심인 영산포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주변에 배를 띄울 만한 물도 없는데 포구라니, 내력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영산포라는 이름에 잠시 어리둥절해질 것이다. 영산포는 1975년까지 배가 드나들던 진짜 포구였다. 지금은 상류에서 쓸려 내려온 토사로 바닥이 높아지고 상류와 중류에 나주·장성·담양·광주호가 만들어져 수량이 준 데다가 영산강 하구둑이 완공되어 배는 영 못 다니게 되었다.

    나주 시내에는 고려 때 세워졌다는 돌당간이 있고 조선 성종 때 세워진 향교 안에는 대성전의 위엄이 여전하다. 독무덤이라는 독특한 묘제를 가진 반남면의 고분군은 삼국 시대에 이 땅에 상당한 세력을 지닌 독자적인 정치체가 존재했음을 말해 준다. 한편 나주 운흥사터와 불회사 그리고 이웃한 무안군의 총지사터와 법천사의 사찰장승들은 우리 나라 돌장승의 진수를 보여준다. 㐀㐀

    영암군 ☞ 왕인박사 유적지


    전라남도의 서해안에 위치한 군. 옛 이름은 월나·낭주이고 동쪽은 장흥군, 서쪽은 서해안의 좁은 만, 남쪽은 해남군·강진군, 북쪽은 나주군과 접하고 있다.

    나주땅을 가로질러 온 영산강은 영암땅의 서쪽 경계를 이루며 흘러 서해로 몸을 푼다. 삼국 시대 이전에 마한의 땅이던 영암은 백제 때 월나(月奈)군이라 불렀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 영암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고려 성종 14년(995)에 낭주(郎州)로 개칭되었다가 고려 현종 9년(1018)부터 다시 영암으로 불렀다. 서호면과 금정면을 비롯한 이 지역 전체에는 830여 기에 이르는 고인돌들이 퍼져 있고 서호면 장천리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마을 터가 발견되었다. 영산강 줄기를 따라 나주벌과 이어지는 평야지대를 바탕으로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살이가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또 나주의 반남면과 잇닿은 영암의 시종면과 신북면 일대에는 5세기 이전 마한 토착세력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독널무덤들이 많다.

    삼국 시대부터 통일신라와 고려 시대를 거치는 동안 영암은 줄곧 중국과 일본을 잇는 국제 항구 구실을 했다. 백제 사람으로서 일본으로 건너가 활약한 왕인도 영암 출신으로 역시 이곳의 상대포에서 일본으로 떠났다고 전해진다.

    진도군 ☞ 용장산성


    전라남도 서남단 해남반도의 남서쪽에 위치한 군. 동남쪽은 완도군, 동북쪽은 명량해협을 건너 해남군, 서쪽은 황해, 남쪽은 제주해협, 서북쪽은 신안군의 여러 섬들과 접하고 있다.

    진도는 제주도와 거제도를 이어 우리 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다. 그래서인지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 섬이라는 느낌이 별로 없고, 대부분 200∼400m 안팎의 나지막한 구릉이며 땅이 기름져 농사가 성하다. 땅이 기름지다고 해서 옥주(沃州)라 불리기도 했고 '한해 농사 지어 삼년을 먹는다'는 말까지 있다. 농사가 잘되니 일부러 애써서 바닷일을 할 필요가 없었던 까닭에 섬이지만 오히려 해산물이 귀해서 '해변산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요즘도 진도에서 난 농산물 씨앗이나 약초는 타지에서 성가가 높은데 그중 구기자가 가장 유명하다. 그밖에 자연산 돌미역과 화끈한 홍주가 진도의 특산물로 꼽힌다.

    그러나 사실상 진도를 진도로 만드는 '특산물'에는 노래, 놀이, 굿, 그림의 전통 등 무형의 것들이 더 많다. 오늘날 진도에서는 강강술래, 남도들노래, 씻김굿, 다시래기 등 네 종목이 국가 지정 중요 무형문화재로, 또 진도 만가와 북놀이가 전라남도 지정 무형문화재로 되어 있고 그 기능을 보유한 인간문화재도 10여 명에 이른다.

    한편, 진도는 고려 시대부터 드문드문 유배지로 쓰였는데, 조선 시대에 와서는 영조 때의 전라감사가 "진도에 유배자가 너무 많아서 섬사람들이 그들을 먹여 살리느라 굶어 죽을 판이니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고 건의를 했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귀양을 왔다. 당시의 귀양객들은 대부분 중앙 정계의 당파싸움에서 밀려난 양반 식자층이었으니 학문과 사상이 깊은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노래나 글, 그림으로 실의와 시절을 달랬고 서당을 열거나 개인적 교분을 통해 진도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소양을 전파했다. 진도에 유달리 서화예술이 발달한 데는 그 영향이 컸다.

    해남
  • ☞ 미황사
  • ☞ 대흥사
  • ☞ 녹우당

  • 전라남도 남서부에 위치한 군. 동쪽은 강진군, 서쪽은 신안군과 진도군, 남쪽은 완도군, 북쪽은 영암군과 접하고 있다. 땅의 모양이 반도 꼴을 하고 있으므로, 해남군에 속한 13개 면은 한 군데(옥천면)을 빼고는 모두 바다와 닿아 있다. 들쭉날쭉한 해안선이 군 전체를 두르고 있으며, 거의 바닷가에 이르러서야 두륜산이니 달마산이 있을 뿐 평지가 많고 해안을 따라 간석지도 많다.

    해남 읍에서 곧장 남쪽으로 내려가는 827번 지방 도로로 들어서면 해남 읍을 벗어나 얼마 지나지 않은 연동리에서 해남 윤씨 종가인 녹우당을 볼 수 있고, 더 가다가 807번 지방 도로 들어서서 끝까지 가면 대흥사(대둔사)가 있다. 녹우당은 전라남도에 남아 있는 민가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 된 집이기도 하지만, 이 집이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시조 시인으로 첫손에 꼽히는 고산 윤선도와 선비화가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가 살던 곳이기 때문이다.

    완도군 ☞ 청해진 유적지


    전라남도 남단 해역에 위치한 군. 완도본도를 비롯한 60여개의 유인도와 143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은 고흥군·여천군, 서쪽은 해남군·진도군이 바다 건너 있고, 북쪽은 해남군·강진군·장흥군과 접하고 있다. 고려 초기에 비로소 완도라고 불리게 되었으나 지방행정 단위로 파악되지 못하고, 탐진군에 속하고 있었다. 완도라는 지명은, 풀과 나무가 무성하여 왕골풀과 같다 하여 완도라고 하였다는 설과, 또는 옛날부터 수목이 무성하여 궁궐을 짓는 데 쓰이는 재목과 사슴 등 귀한 짐승이 많아 국원으로 정한 것인데 원도가 완도로 와전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모두 확실하지 않다. 완도 지역은 자연 환경이 좋고 아름답지만 워낙 남쪽 바다에 멀리 떨어져 있어서 역사적으로 각광을 받은 적이 없었다. 게다가 통일 신라 흥덕왕 3년(828)부터 13년 동안 지금의 완도읍 장좌리 장도에 설치된 청해진을 거점으로 당대의 무역 왕으로 군림하던 장보고가 신라 조정에서 보낸 자객에게 암살된 뒤에는 주민이 모두 벽골군(김제)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북서쪽의 해남 반도가 찬 북서풍을 막아 주고 부근에 난류가 흐르므로 완도군의 기후는 따뜻한 해양성이다. 그 덕에 섬마다 갖가지 아열대 식물이 무성해서 어디나 새파란 생기가 가득한데 완도항에서 바로 건너다 보이는 주도의 상록수림과 보길도 예송리의 상록수림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강진군
  • ☞ 다산초당
  • ☞ 청자 도요지

  • 전라남도 남부에 위치한 군. 옛이름은 도강·도무·양무·탐진 등이다. 동쪽은 장흥군, 서쪽은 해남군, 남쪽은 강진만, 북쪽은 영암군과 접하고 있다. 조선 태종 17년(1417) 이전까지 강진이라는 고을은 없었다. 강진은 그 전까지 영암군에 속하던 도강현과 장흥부에 속하던 탐진현을 합친 후, 두 현의 이름을 한자씩 따서 만든 지명이다. 그때 도강현 소재지에는 전라도 병마 도절제사영이 설치되었고 바닷가 마량에는 수군 만호진이 두어졌다. 육군과 수군이 주둔했던 당시의 흔적은 오늘날 옛 도강현이 있던 자리에 병영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대구면은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과 함께 고려 청자의 주요 생산지였다. 사당리·계율리·용운리 등에는 청자가 처음 빚어지던 10세기 무렵부터 최성기에 이르렀던 12세기를 거쳐 14세기 무렵까지 각종 청자를 구워 내던 가마터가 180여 군데나 널려 있다. 여기서 생산된 청자는 바닷길을 통해 개경으로 상납되었다. 요즘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국보급의 고려 청자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1986년부터 강진군이 운영하고 있는 고려청자 사업소 강진요에서 청자 제작 과정을 재현하고 있다.

    장흥군 ☞ 보림사

    전라남도 남부에 위치한 군. 동쪽은 보성군·고흥군, 서쪽은 강진군·영암군, 남쪽은 완도군, 북쪽은 화순군과 접하고 있다. 현재는 길이 많이 뚫렸지만, 장흥은 산지가 많은 곳이라서 오랫동안 교통의 오지를 면하지 못했었다.

    탐진강 상류인 가지산 남쪽에는 신라 구산선문 가운데 가지산파의 중심 도량이던 보림사가 있다. 일주문과 천왕문을 뺀 절 건물이 모두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졌고 지금은 너른 절터에 대적광전과 대웅전 등이 복원되어 있는데, 국보로 지정된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삼층석탑·석등, 보물로 지정된 보조선사 체징의 부도와 부도비, 동부도와 서부도 등이 예전의 기상과 위엄을 묵묵히 전해 온다.

    승주군 ☞ 낙안읍성 민속마을


    전라남도 동남쪽에 위치하는 군으로 백제 때에는 감평군이었다가 신라때에 승평군(昇平郡)으로 고치고, 995년(성종 14년) 승주에 곤해곤 절도사를 두었으며, 1036년 (정종 2년)에 다시 승평군으로 개칭하였다. 1309년(충선왕 1년)에 승주목으로 승격, 1310년 순천목으로 개칭하였다가 부로 강등(降等)하였으며, 1413년(태종 13년)에 도호부를 설치하였고, 세조때에 진(鎭)을 설치, 효종때에는 현(縣), 뒤에 부(府)로 승격하였다.

    1948년에 군이 되었고, 1985년 순천시가 생김에 따라 군 명을 승주라 하였으나, 1996년에 순천시와 통합하여 순천으로 개칭되었다.

    * 참 고 문 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답사 여행의 길잡이』,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돌베개, 1995

    사학과 97춘계고적답사 답사일정표 답사지역도 답사지역개관
    답사도움글 답사기획기사 답사부록 답사여행의 길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