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령관문


 사적 제 147호인 이 관문은 고려 태조가 경주를 순행차 고사갈이 성을 지날 때 성주 세 아들을 차례로 보내어 귀순하였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 관문은 영남지방 과 서울간의 관문이며 또한 군사적 요새지이다.  삼국시대에는 이보다 동쪽의 계립령이 중요한 곳이었는데, 고려초 부터는 이곳 초참을 혹은 새재라 하므로, 조령이라 이름하여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하였다. 조선 선조 25년(1592)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유끼나가 가 경주에서 북상해 오는 카토오키요마사의 군사와 이곳 조령 에서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 것이라 생각했지만 신립 장군은 이미 때가 늦었으므로 충주로 후퇴하였다. 그후 충주에서 일어난 의병장 신충원이 오늘날의 제 2관문에 상을 쌓고 교통을 차단하여 왜병을 기습하였다. 이곳의 군사적 중요성이 재확인되자 군사시설을 서둘러 숙종 34년(1708)에 이르러서야 3중의 관문을 완성하였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 1관문을 완성하였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 1관문은 주흘관, 제 2관문을 조동문 혹은 조곡관, 제 2관문을 조령관 이라고 이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