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


  751년(신라 경덕왕 15) 김대성(金大城)이 창건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김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세워서 신림 (神琳)과 표훈(表訓)을 청해 각각 머무르게 했다 한다. 그러나 이 절은 김대성의 개인적 발원보다는 나라를 수호하려는 국찰과 경덕왕의 원찰로서 창건되고, 경영되었 다고 추정된다.
 특히 토함산이 왜구의 침입을 막는 제일 관문으로 국토 방위상의 요충이었으며, 당시 경덕왕 때는 정치, 문화 등 각 방면에서 신라 최고의 융성기를 이룩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창건 이후 조선 중기까지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는다. 1703년(숙종 29) 종열 (從悅)이 석굴을 중수하고 굴 앞의 돌계단을 쌓았으며, 1758년(영조 34) 대겸(大謙)이 중수했다. 정시한(丁時翰)의 <산중일기>에 따르면, 1688년(숙종 14) 5월 15일 그가 이 곳을 찾았을 때에는 석굴의 상태에 이상이 없었고, 불국사와 그리고 골굴암(骨窟庵)과 함께 당시에 잘 알려진 순례 관광 경로였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방문하고 예술 작품을 남겼다. 정선은 1733년(영조 9)에 그린 <교남명승첩(嶠南明勝 帖)> 2권 중에 골굴과 석굴도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이 화첩은
석실 입구에 전실(前室)이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어 최근의 복원공사에서 목조 전실을 첨가하게 했다. 조선 말기에 와서 울산 병사 조순상(趙巡相)이 석굴을 크게 중수했다. 이로 인해 1962년 대수리 때 부근의 노인들은 이 절을 가리켜 '조가절 (趙家寺)'이라 지칭했다. 또한 그들의 어린 시절에는 향화(香火)와 공양이 그치지 않았다고 증언한 바도 있다. 그러므로 일본인들이 1907년경 한 우편 배달부에 의해 처음으로 이 절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1912년 조선총독부는 세 차례의 중수를 행했는데, 제1차는 1913-1915년, 제2차는 1917년, 제3차는 1920-1923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1912년의 중수를 위한 기초 조사에 따르면, '천장의 3분의 1이 이미 추락하여 구멍이 생겼고 그 구멍으로부터 흙들이 들어오고 있으며, 구멍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본존 불상까지 파손될 위험이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1차 중수는 거의 완전한 해체 및 복원공사였다. 당시 그들은 새로운 재료로 등장한 시멘트를 석조물 조립에 사용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도 석굴암 보존상에 큰 어려움을 남기고 말았다. 그 뒤 2차, 3차 중수가 행해졌으나, 결로(結露) 및 침수, 외부 경관의 손상에 대해 근본적인 시정은 불가능했다. 또한 1차 공사에서 잘못 배치된 상(像)들과 굴의 구조에도 아무런 수정을 가하지 못했다.
 1945년 8.15해방 후에는 거의 버려진 상태에 있었다. 비로소 1961년 조사가 이루 어졌고, 이 결과 1962년부터 1964년까지 전면적으로 중수했다. 석굴에 영향을 주는 자연 조건을 일일이 제거하고, 상의 배치에 대한 일본인들의 잘못을 수정했다. 또 이 때 수광전(壽光殿), 삼층석탑, 요사 등의 부속 건물과 유적 등도 보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