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

 

 


94305012  김 인철

 

◈ 序 言
  한국사상의 고대사분야 중 현재 크게 부각되고 있는 여러 쟁점들 중 하나가 발해의 성격규명에 맞춰진 남북국 시대로의 전개 그리고 그에 맞물린 신라의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평가로 귀결지을 수 있다. 즉 발해사의 입장을 강조하면 신라의 삼국통일의 의의는 축소될 것이고 신라의 삼국통일의 의의를 강조하면 발해사의 입지는 약화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보는 관점은 크게 긍정론과 부정론으로 대두되고 있다.
  먼저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보면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 가 멸망한 이후, 신라 경주 중심의 골품귀족은 三韓一統意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사실을 자기만족적인 입장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를 비롯하여 9세기 이전에 씌어진 여러 금석문에서 확인되고 있다. 고려 시대의 인식내용은 『삼국사기』에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은 신라계의 문벌귀족으로서 신라삼국통일이 갖는 긍정적인 의미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다. 한편 『삼국사기』의 이와 같은 인식내용은 조선시대 전기의 대표적 편찬사서인 『삼국사절요』와 『동국 통감』에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이와 같이 전근대사회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 은 조선시대 후기를 거쳐 근대적인 역사서술을 표방하고 있던 개화·일제시대로 이어지게 되었다. 다만 근대사회에서 제시된 신라의 삼국통일에 관한 견해 가운데 우리의 주목을 끄는 내용은 바로 일본인 학자에 의한 긍정론이다. 일찍이 일본의 역사학자 하야시 아리스케가 『조선사』에서 '신라 의 통일'로 정의한 이래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은 '신라의 반도통일' 등으로 정리하였으며, 일부 친일 사학자들은 근대사학의 미명 아래 그 내용을 비판 없이 수용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 학자들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한 의도는 그들의 당면한 전략목표였던 만주, 즉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의 범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滿鮮史觀에서 연유하는 달갑지 않은 사학사상의 유산이 었던 것이다. 다음에 살펴볼 내용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하여 회의적 또는 부정적인 입장을 표방한 인식경향이다. 이 경향은 민족사의 차원에서 발해 건국의 정당성과 발해사 서술의 당위성을 인정 하는 입장이다. 발해는 『삼국사기』에 북국으로 표현되어 그 상대인 신라가 두 차례에 걸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기록되었을 뿐, 조선 전기까지의 어느 역사서도 그 이상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발해의 멸망 이후  그 옛 땅에 대한 연고권을 상실한 전근대사회의 역사학이 보인 무관심과 인식능력의 한계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에는 근대사회의 지향으로 성격이 규정되는 생산관계에서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실학사상을 배태시킨 현실적 조건이 되었기 때문에 실학계열의 역사인식에서 일정한 변화는 불가피하였다. 특히 우리 나라의 역사 서술에서 이른바 통일신라와 상대적 관계에 있었던 발해도 당연히 그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계열의 역사학자인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신라삼국통일의 긍정론을 수용하면서도 발해의 역사를 신라사와 더불어 서술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시대상황 속에서 유득공은 「발해고」의 서문에서 『삼국사기』에 신라 중심의 삼국사만이 서술되어 있고, 발해의 역사가 배제된 사실을 고려왕조의 취약성과 결부시켜 비판함으로써 신라의 삼국통일에 회의론을 제기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한국사의 서술공간에 신라와 함께 발해의 자리도 인정하는 남북시대론의 단서가 열렸으며,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회의론적 인식의 시작은 한국사의 인식지평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19세기의 인물인 김정호는 『대동지지』에서 남북국시대론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신라의 삼국통일을 아예 언급치도 않고, 고려 태조에 의한 남북국통일론을 제기함으로써 고려를 최초의 통일왕조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역사인식상의 변화는 조선 후기에 싹트기 시작한 민족의식과 무관하지 않았으므로 개화기의 전통적인 유가사학자인 김택영도 그 내용을 수용하여 『역사집략』에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근대사학의 요체는 서술방법과 같은 형식의 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내용의 본질적인 전환에 있는 것이니 만큼 새로운 역사가의 등장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국 근대사학의 발달과정에서 이 과제는 신채호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그는 역사이해의 중심축을 민중과 민족에 두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먼저 사료로서 『삼국사기』의 봉건성과 사대성에 대하여 철저한 비판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료비판에 입각하여 신라삼국통일에 대한 회의론 마저 극복하고 부정론을 심화시킴으로써 역사인식의 전환에서 하나의 분기점을 이루었다. 신채호의 부정적인 인식논리는 삼국시대에서 백제를 병합한 신라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로의 상황변화만을 인정하는 양국시대론 으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인식경향의 연장선상에서 일제시대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통사에서나마 '삼국시대와 남북국' 또는 '남북조'를 표제로 설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북한학계는 고구려·발해중심의 역사인식에 입각하여 심지어 신라보다 발해를 앞세우는 발해 및 후기 신라사로 정리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우리나라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다르게 나타났다. 이에 좀더 심화하여 부정론의 대표로 북한의 역사인식을 선정하여 기술하고 그에대한 비판, 신라의 삼국통일의 배경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이 지니는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Ⅰ. 북한의 역사인식
  처음 북한학계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하여 긍정론적인 견해를 보여왔다. 그러나 1962년판 『조선통사』상권에서 매우 새로운 인식틀을 제시하게 되었다. 제 6장 '신라에 의한 국토 남부의 통합과 고구려 고지에서의 발해국의 성립'은 발해의 역사를 민족사의 일부로 취급해야 할 당위성을 인정한 결과로 이해된다. 또한 발해국의 성립문제를 종래의 절의 단위에서 장의 단위로 격상시키는 동시에 그와 상대적 관계에 있는 신라의 삼국통일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국토 남부의 통합으로 축소시킴으로써 민족주의 사학계열의 부정론적인 인식과 궤를 같이 하였다. 이 시기의 북한학계는 신라에 의한 국토 남부의 통합이 갖는 한계성은 신라가당나라를 동맹자로 여기고 연합함으로써 야기된 역사적 과오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한 반면에 신라가 삼국의 전체를 통일 하려던 동기와 희망만큼은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이로써 60년대에는 발해사가 민족사의 차원 에서 올바르게 자리 매김 될 수 있었으나, 신라의 국토남부 통합이 갖는 역사적 부당성을 제대로 해석하는 데에는 아직 미흡하였다. 그러나 이 과제는 7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해결되었다. 신라와 발해를 병렬적으로 파악하는 60년대의 인식구도는 77년판『조선통사』상권에 그대로 계승 되었다. 다만 1962년판에서 독립된 단위의 장이었던 '신라에 의한 국토 남부의 통합과 발해의 성립'이 제 4장 '8∼9세기 봉건관계의 발전'속의 한 절로 격하되었음이 외견상 눈에 띄는 차이점 이다. 다시말하면 북한학계가 역사해석에서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기본논리의 하나는 대내적인 계급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대외적인 민족문제이다. 이 두 조건의 모순관계에서 우리나라와 그 인민의 발전이 역사의 올바른 도정이라면, 그와 반대의 경우인 봉건통치배와 다른 나라의 이해관계에 따라 나타난 역사현상은 비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이에 신라의 봉건통치배가 당나라의 세력을 끌여 들여 같은 겨레의 나라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사실은 반민족적 행위의 전형으로 파악될 뿐만 아니라, 봉건 통치배의 반역사성도 역시 통렬하게 비판될 수밖에 없었다. 주체사상에 입각하여 신라의 역사를 재해석한 북한 역사학계에서의 인식변화는 1979년에 출간된『조선전사』4권에 총화의 형태로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삼국시대의 신라를 전기신라로 규정하고, 여기에 제6장 '당나라 강점군을 몰아내기 위한 인민들의 투쟁'이란 표제의 장을 설정함으로써 역사의 주체인 인민을 비로소 전면에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인식내용을 지양시켰다. 즉 이시기의 북한 역사학계는 신라가 인민대중의 반 침략 투쟁에도 불구하고, 계급적 이해에 얽매인 봉건 통치배의 나약성과 사대굴종 사상으로 말미암아 국토의 남부를 통합하는 데 그침으로써 후기신라로 전환한 사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압록강 이북의 옛 고구려 땅에서는 그 유민에 의한 지속적인 반 침략 투쟁의 결과로서 발해국이 세워진 사실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구도의 설정은 신라의 국토 남부 통합과 발해의 성립을 인과적으로 설명하려는 종래의 인식방법에서 탈피하였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전기신라에서 후기신라로의 전환과 고구려 유민에 의한 발해국의 창건을 별개의 사실로 분리함으로써 두 사실의 사이에 개재할 수 있는 내적 연관성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한국사의 전개과정에서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부정은 물론, 국토 남부통합의 의미조차 희석시키는 반면에 발해국 창건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역사해석이 바뀐 것이다. 따라서『조선전사』5권은 '발해 및 후기신라사'로 구성함으로써 종래의 서술방법과는 달리 발해를 신라보다 먼저 서술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변화는 북한학계가 고조선-고구려-발해의 계승을 역사의 정통으로 인식체계를 수립하고, 고려를 최초의 통일왕조로 파악하는 인식논리의 필연적인 귀결인 셈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북한 정권의 현재성과도 무관하지 않는 역사인식으로 여겨진다.
  이와 함께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두 기둥인 김유신과 김춘추의 역사적 평가도 흥미롭다. 이들에 대해 북한에서는 외세를 끌어들인 반민족적 '봉건통치배'라 규정하고 이에 대한 성토의 도를 높여 가고 있다. 이는 주체사상의 정립과 결부되어 나타난 역사인식으로서 북한 정권을 주체정권으로, 남한 정권을 미제와 결부된 반민족적 정권으로 간주하는 현재적 역사인식이 멀리 7세기사에까지 투영되어 '고구려=주체정권, 신라=반민족 정권'이라는 도식을 성립시킨 것이라할 것이다. 이러한 인식속에서 김유신·김춘추는 '반민족적 범죄행위'에 동참한 신라 '봉건통치배'의 일원으로서 매도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현재 북한에서 김유신·김춘추는 역사적 '반역아'로 평가받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북한의 역사인식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철저하게 현재적 관점에서 과거를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아마도 교과서나 각종 서적의 머리말과 장·절마다 본문에 앞서 김일성 교시라든지 김정일 유시의 영향인지 모르나 분명한 것은 그 직접적 원인이 어디에 있든 간에 궁극적으로는 경직된 유물사관과 주체사상으로 연결되며 그것은 또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예속된 역사학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역사학이 '교훈을 목적으로 하는 이상 어느 정도의 현재적 관점이랄까 현실반영은 필요하고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당시의 상황을 무시한 것이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예로「조선전사」에서는 발해와 통일신라의 통치 기구 및 군사제도 정비를 인민에 대한 봉건적 지배와 착취를 강화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설명하고 유교와 불교에 대해서도' 돈 있고 권세있는 놈들이 인민을 착취하고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데 써먹은 아편'이라는 논리로 일관함으로써 그것이 우리문화의 발전에 미친 영향을 배제하고 있다. 즉 편파적 역사서술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피지배층 중심의 역사관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각은 "인민대중은 사회역사의 주체"이며, "사회 역사적 운동은 인민대중의 창조적 운동"이라는 논점속에 그대로 담겨있다. 그리하여 지배층에 대해서는 시대를 막론하고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 놈의 죽은 노예소유자" "권세있는 놈들" "왕과 지주놈들" "반동적인 양반 지주놈들" "관리놈들"등의 용어를 통해 확인해 볼수 있다. 반면, 일반 서민과 천민의 활동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호적이고 관심 깊은 태도를 견재해 부족한 사료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량을 할애했는데, 예를 들면 망이·망소이의 난, 김사미의 난, 만적의 난, 임꺽정의 활동 등을 자세히 서술한 것이 그에 해당한다. 셋째, 전쟁사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외세와의 전쟁(대외투쟁)과 내부세력간의 충돌(계급투쟁)이 모두 포함된다. 그것은 이미 "우리나라의 력사는 우리 인민이 반동통치배들의 억압과 예속을 반대하고 외래 침략자들의 침입을 쳐물리친 투쟁의 력사"임을 천명한데에서 분명히 명시되어져있다. 그리하여 전쟁에 관한 서술이 매우 자세하며,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고구려와 수·당나라 사이의 전쟁, 고려와 요나라 사이의 전쟁, 고려와 몽고사이의 전쟁, 조선시대의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계급투쟁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봉건통치배들의 수탈로 비참한 생활을 하던 인민대중이 결국 봉기하게 된다는 논리를 견지함으로써 피지배층이 다수 참여한 반란·민란을 예외 없이 옹호하고 있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부족한 사료에도 불구하고 천민·노비·농민군의 활동상을 최대한 자세히 다루면서 반봉건적 계급투쟁임을 강조하고 있다. 넷째, 우리 역사의 중심 무대를 평양에 두고 있다는 사실 이다. 이러한 입장은 1970년대에 주체사상을 강조하게 되면서부터 매우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심지어 3·1운동이 평양지역에서 시작되었다고 서술할 정도로 전 시기의 역사해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삼국시대를 고구려사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평양성 건설과 천도를 중시해 "평양이 세계적인 도시이며, 평양성 건설이 고구려가 강대국가이며 경제 문화가 발전된 국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입장은 고구려의 후계 국가로 인식 되는 발해라든지, 오늘날의 개성과 평양을 2都체제로 운영했던 고려왕조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Ⅱ. 부정론의 비판적 접근
  신라의 통일전쟁에 대한 북한 역사학계의 부정적 시각은 나름대로 일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 고구려 공격에 신라가 소극적이었다든지 그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한 것 등은 신라의 통일의지 를 의심케 하는 요소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결과를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비판적 시각이 가능하기 때문이 아닐까. 첫째, 신라가 외세(당나라)를 끌어들여 동족국가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는 반민족적 행위를 자행 했으므로 '통일'이라는 신성한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입장에 관해서이다. 사실 결과가 아무리 좋더라도 원인과 과정이 옳지 않다면 긍정적인 평가를 얻기 어려운 것이 역사이다. 더욱이 우리처럼 단일민족임을 강조해온 나라에서 반민족적인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이득을 취했다면 당연히 비판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먼저 입증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당시 고구려·백제 ·신라의 사람들이 삼국을 과연 동족국가로 인식했는가 하는 점이다. '반민족적'이라는 용어를 당시의 신라에 적용 하려면, 우선 '민족적'이라는 용어가 성립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그들이 '같은 민족' 혹은 '동족'이라는 개념을 가졌다고는 보이질 않는다. 물론 삼국은 혈통과 언어라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의 동질감을 가졌던 듯 하나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짙은 동족의식, 민족의식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그것은 구속력이 전혀 없는 다소 막연한 느낌에 불과 했다. 삼국은 수백년 동안 100여 회가 훨씬 넘을 정도로 치열하게 다투었다. 그 사이 적과 우방은 수시로 바뀌었다. 백제의 세력 팽창에 대항해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했고,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항해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었다. 또한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연계해 양공 작전을 펼쳤다. 이처럼 급변하는 정세속에서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삼국의 목표는 오직 하나, '생존'이었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살아 남으려는 동물적 본능이 정치·군사논리를 지배하고, 국가의 모든 정책을 좌우했을 것이다. 서기 660년, 황산벌 전투에서 장군 김흠순이 아들 반굴을 그리고 장군 품일이 아들 관창을 적진으로 뛰어들어 죽게 한 것은 바로 그 같은 이데올로기에 충실히 따른 것이라 하겠다. 이때 신라인에게 백제는 반드시 쓰러뜨려야 내가 사는 원수국가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것은 지난 수백년 동안 끊임없는 싸움이 만들어낸 당연한 결과였다. 더욱이 우리의 삼국은 중국의 삼국시대처럼 하나였던 나라가 나뉘어서 형성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다시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표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삼한시대 이래로 끊임없이 이웃의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면서 국력을 키워온 것이 곧 고구려·백제·신라의 건국과정이다. 이들에게 민족 이라는 개념이 있었을리 만무하다. 상황이 이러할 진데 민족의식이라는 오늘날의 잣대를 신라인 들에게 들이대는 것은 공정치 못한 일이다. 아니, 달리 생각해보면 오히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유민들을 흡수함으로써 비로소 우리 역사상에 민족이라는 개념, 동족이라는 개념이 탄생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해석일 것이다. 둘째, 신라가 만주지역을 상실하는 등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당나라에 빼앗겼으므로 통일이라고 하기 어렵다는 지적에 대해서이다. 사실적으로 백제의 영토는 모두 신라 차지가 되었지만, 고구려 땅의 대부분은 당나라에 귀속되었다. 그리고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후, 당나라에 귀속되었던 땅의 상당 부분은 다시 발해라는 새로운 왕조의 영토로 변했다. 많은 사람들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신라에 통합되었다고 말하기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 역시 당시의 상황을 홀시 한 채 현재의 가치관과 판단기준으로 과거를 재단한 결과라 할 것이다. 역사의 발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먼저 당시의 영토의식, 영토개념에 접근해야 한다. 신라의 만주 지역 병합은 지금 우리의 소망일지 모른다. 고구려는 광개토왕 때 신라를 도와 신라 영토 내에서 장기간 군사활동을 벌였 으며, 또한 신라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장수왕때 에는 신라의 수도에 고구려 군사가 주둔할 정도였다고『일본서기』「웅략기」는 전한다. 이러한 상황은 삼국이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당시의 국가와 영토개념이 지금 우리의 생각 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가능했다. 신라에게 만주지역은 애초부터 관심 밖이었다. 신라의 관심은 오로지 국가보존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가능하다면 신라로서도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이라고 하는 중국 최대의 제국과 국운을 걸고 정면 대결해야 하는 일 이었다. 한반도의 중·서부지역에서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던 신라였다. 그런 신라에게 만주 지역 병합은 너무 지나친 요구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기준 삼아 신라의 통일전쟁을 평가하는 것은 너무 인색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당신 사람들에게 '나라'란 곧 왕조를 의미하였다. 그런데 왕조의 기준은 영토가 아닌 왕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왕이 죽고, 왕실이 몰락 했다면, 그것은 곧 나라의 멸망을 의미하였다. 중국 한나라의 왕실과 성이 다른 왕망이 즉위해 신을 세웠다가 다시 왕족인 광무제가 한을 재건했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후한이라 하여 전한과 구별 하였다. 삼국시대 체제·세력·지리적으로 중심이 되었던 왕조는 위나라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단지 한나라 왕족의 일파인 유비가 세운 나라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촉한을 정통왕조로 여겨왔던 것이다. 이처럼 고대의 국가개념의 핵심은 왕실에 있었다. 그런데 신라는 비록 고구려의 영토를 모두 병합하진 못했지만, 고구려의 왕족인 안승과 고구려 재건투쟁의 주역들을 흡수함으로써,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고구려를 신라에 병합하였다. 그것은 발해가 지리와 문화적으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사실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Ⅲ. 신라의 삼국통일이 지니는 의의
  신라의 삼국통일은 결과적으로 불완전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 민족사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높다 할 것이다. 첫째, 고구려·백제·신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체제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신라의 통일을 계기로 하나의 체제, 하나의 문화를 누리는 가운데 뚜렷한 국가공동체 내지 민족공동체를 형성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나중에 통일신라의 지배체제가 붕괴되면서 고구려와 백제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으로 인해 또 한번의 삼국시대를 맞이하기도 했으나, 이번에는 (후)삼국 모두 통일을 당연한 과제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 정복전쟁이 일단락 됨으로써 국력이 배가되어 국제사회에서의 국가 경쟁력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과거 고구려의 경우 에도 중국 측의 왕조가 부담스럽게 느낄 정도로 강한 군사력을 자랑했고, 또 실제로 수 차례의 대 규모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그 힘을 실증해 보이기는 했으나, 그것은 지리적 조건과 전략·전술에 의존한 군사 분야에서의 힘에 한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의 통일 이후에는 평화로움 속에서 전쟁 으로 인한 인적·물적 피해가 최소화함으로써 정치·경제가 매우 안정되었으며, 그것은 곧 국제사회 에서 신라의 위상을 높이는 기반이 되었다. 셋째, 하나의 국가체제 속에서 국민의 응집력을 기반 으로 자랑스러운 문화의 꽃피웠다는 점이다. 서로 비슷하면서도 각기 독특한 기술·문화를 가꾸어온 삼국의 사람들이 하나의 체제하에서 결속됨으로써 이제 더욱 세련되고 풍요로운 문화의 꽃피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더욱이 통일이 가져다준 평화는 한동안 기술·문화의 발전을 가속시키고 신라 사람 들로 하여금 다양한 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하였다.


 

 

◈ 結 言
  지금까지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지 못했다? 라는 의문적인 주제를 놓고 부정적인 견해로써 북한학 계의 동향을 서술하였고 그에 대한 비판과 신라의 삼국통일이 지니는 의의를 서술하였다. 현재 남한학계의 경우는 이제까지 긍정론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극소수의 부정론적인 시각도 보여지고 있다. 이는 현재 우리의 상황. 즉 남북이 양단된 채 국토의 협착, 인구의 과밀, 산업구조의 미성숙 등에서 오는 국가·민족적 진통 속에서 신라에 의한 통일보다는 고구려에 의하여 삼국통일이 이루어 졌었더라면 우리의 현재는 얼마나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어 졌을까 라는 가정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공통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가정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가정을 하지 않기 위하여 역사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음을 알아야할 것이다.
  역사를 보는 기본 시각을 역사관이라 한다. 여기에는 우리의 역사라는 따뜻한 가슴도 필요하지만 철저한 객관성과 고증을 필요로 하는 차가운 머리도 필요한 것이다. 비록 신라의 삼국통일이 고구려 의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지 못한 그래서 고려·조선으로 이어져 북진정책이라는 역사적 인연을 만들고 현재에까지 고구려를 그리워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지만 그 시대에 존재했던 정치·경제· 사회·문화 등의 차가운 현실인식이 바탕이 되지 못한 따뜻한 가슴에 의한 논리로는 역사를 서술할 수 도 역사가 존재해야 하는 그 당위성 마져도 의심케 할 것이다. 국사는 어머니와 같다. 모진 풍파를 많이 겪은 우리의 어머니는 그 사이에 한쪽 눈과 한쪽다리를 잃으셨다. 그래서 어머니를 모시고 밖에 나갈라치면 가끔은 남의 눈이 신경에 거슬리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를 속이고 남의 눈을 속일 수는 없지 않은가. 어머니의 초상화를 만들 때 두눈을 예쁘게 그려 넣고 두 다리를 멋있게 그려 넣거나 긴 치마로 다리를 가리는 방법은 옳지 않은 방법이다. 그것은 또한 역경을 이겨온 어머니의 삶 자체에 대한 왜곡·부정일 것이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어머니의 자식들은 역경을 꿋꿋이 이겨오신 그분의 삶과 자식들을 훌륭히 성장시킨 그 사실을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상권에 수록된 삼국통일의 의의 부분을 삽입하며 이 글을 끝낸다.

 『삼국 통일은, 그 과정에서 외세의 협조를 얻었다는 점과, 대동강 이남의 통일에 그쳤다는 점에서 한계성이 있다. 그러나 신라가 당의 세력을 무력으로 축출한 사실은 삼국통일의 자주적 성격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삼국통일은 민족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고구려, 백제 문화 전통의 수용과 경제력 확충으로 민족 문화는 다양하게 발전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이호영.「신라삼국통일에 관한 재검토」.『사학지』. 단국대학교 사학회.(1981)
* 신형식.「삼국통일의 역사적 성격」.『한국사연구』. 한국사연구회편(1988)
* 안병우·도진순. 북한의 역사인식. 한길사(1990)
*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국사편찬위원회. 교육부(1999)
* 김기섭. 주제별로 풀어쓴 한국사강의록. 가람기획(1998)
* 한국사(9). 통일신라. 국사편찬위원회(1998)
* 한국사(3).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 한길사(1994)
 * 역사문제연구소. 남·북 역사학의 17가지 쟁점. 역사비평사(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