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품제와 화랑도가 신라사회에 미친 영향


 

 

 98305029 임희선

 

Ⅰ. 서 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운데 귀족사회의 실태를 자세히 보여주는 것은 신라의 골품제가 있으며, 특수 사회조직으로는 화랑도가 있었다. 골품제는 개인의 혈통의 존비에 따라 정치적인 출세는 물론, 혼인·가옥의 규모, 의복의 빛깔, 우마차의 장식에 이르기까지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 특권과 제약이 가해지던 것으로, 세습적인 성격이나 제도 자체의 엄격성으로 보아 흔히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비교되고 있으며, 이 제도는 신라의 국가형성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6세기초에는 이미 법제화되었으며, 신라의 삼국통일을 거쳐 멸망에 이를 때까지 약 4백년 동안 거의 변함없이 신라사회를 규제하는 대본으로서 기능, 작용하였다. 또한 화랑도는 신라시대의 단체정신이 매우 강한 청소년 집단으로서 교육적·군사적·사교 단체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신라의 삼국통일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골품제사회에서  발생하기 쉬운 여러 계층간의 긴장과 갈등을 조절, 완화하는 데도 이바지 하였다. 본론 부분에서는 골품제와 화랑도의 자세한 내용(기원, 성격, 역할등 )을 기술하여 한다.

 


Ⅱ. 본 론
1.골품제도
⊙ 골품제의 성립과정
  신라는 경주에 자리잡은 사로국의 6부를 중심으로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복속시키면서 성장 하였다. 그 과정에서 복속된 소국의 지배층 가운데 일부를 경주로 이주시켜 지배층인 6부에 편입 시키고, 다른 일부는 원거주지의 촌주로 삼아 복속지역 통치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6부체제를 특정 짓는 이 같은 신라 초기의 정치체제는, 지증왕대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6세기 초반에 해체되었다. 법흥왕7년의 율령반포는 6부체제가 해체된 뒤 왕을 중심으로 하는 일원적인 관료제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율령을 반포할 때 원래의 신라인과 경주 지역으로 이주해 온 지배층에 적용한 신분제가 골품제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관등제와 직결되어 있었다. 신라의 관등제는 경위(京位)와 외위(外位)의 이원적 체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골품제의 적용을 받은 경주인들은 중앙관직에 진출하여 경위를 지급받았다. 반면에 지방인들은 골품제 적용대상에서 제외된 채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못하고 외위만을 받았다. 법흥왕대에 정비된 골품제 삼국통일 전쟁을 겪으면서 크게 변화하여, 문무왕 14년(674)에는 경위와 외위의 상등관계를 정하고 양자간의 공식적인 교류를 인정하는 단일 관등체제를 형성함으로써 경주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골품제에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골품제의 계급구성
  골품제는 모두 8개의 신분층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골족은 성골과 진골로 구분되었으며, 두품층은 6두품에서 1두품까지 있었는데 숫자가 클수록 신분이 높았다. 그러나 이 가운데 3두품에서 1두품 까지는 기록에 전혀 보이지 않는데, 아마도 율령 반포 초기에 일반 평민을 3등분하였다가 현실적 으로 구분할 필요성이 거의 없게 되자 곧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성골은 골족 가운데서도 왕이 될 수 있는 최고의 신분이었다. 그런데 성골과 진골은 원래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였던 것은 아니다. 성골과 진골 모두 왕족 출신으로 원래는 진골만 존재하였다. 그러던 것이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 (銅輪)계의 후손들이 자신들을 다른 진골들과 구분하기 위해 성골이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성골 - 법흥왕 이래 진덕여왕대까지의 왕실만이 성골이 되었으며, 왕실이 자신들의 혈통을 신성시하기 위하여 노력하던 시기에 왕실혈족만을 구분하여 성골이라고 하였을 가능성이 있음, 신라왕실은 법흥왕이래 불교를 적극적 으로 수용. 왕실은 자신들이 석가모니의 일족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진덕여왕이후 자손이 없어 성골이 소멸되었다.
  

  진골 - 중앙귀족이나 왕족 등이 속한 등급. 성골과 진골은 실로 자신들이 특별하고 신성한 족속이라고 생각, 두품족과는 결혼도 하지 않고 골족내부에서만 혼인하여 혈통의 순수성을 보전하려 하였으며, 진골들은 자신들이 혈통의 신성함과 국가권력을 통해 확보한 기득권을 바탕으로 모두 고위직을 독점하고 사회경제적인 특권을 누렸다.
  

  두품 - 4두품 이상은 모두 지배층으로서 관직 진출의 권리를 부여받았고, 1∼3두품은 백성 또는 평민으로 간주하였다. 9세기 초엽에 1∼3두품은 소멸되었으며, 이시기 천신분은 대부분 노비신분의 세습·전쟁·포로· 형벌·채무·빈곤으로 인한 인신매매 등으로 노비가 되었다. 노비는 재산이어서 매매·상속·증여의 대상 이었으며, 인격이 부인되었다. 국역을 부담하지 않았으나  주인에게 노동력 수탈당하는 말하는 도구였을 뿐이다.

 

⊙골품제의 사회적 성격
  골품제도의 정치적 기능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정한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규정한 관동에 관한 규제이다. 이 관등제도는 신라에 있어 신분제도와 표리의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본래 관동은 성읍국가시대 부족회의에 있어서의 석차, 계층에서 원류한 것인데, 연맹왕국의 단계에 이르자 각기 다른 관제가 그대로 중앙 정부의 관제 속에 중첩되어 관직제와 관등제는 서로 구별할 수 없게 되었고 그 자체가 다원적인 성격을 띄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가 연맹왕국 단계에서 중앙 집권적인 귀족국가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연맹왕국시대의 다원적인 관료 조직을 청산하고 국왕을 중심으로 한 일원화된 관동체계를 정비되었다. 520년에 정비된 신라의 17등 관등제도는 골품제도와의 상관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이에 의하면 진골은 최고관등인 이벌찬까지 승진할 수 있으나, 6두품은 제 6관등인 아찬(阿 )까지, 5두품은 제 10관등인 대나마(大奈麻)까지, 4두품은 제 12관등인 대사(大舍)까지로 승진의 한계가 정해져 있었다. 이와같은 관등의 신분계급 적인 제 구분은 紫·緋·靑·黃의 네 가지 복색의 구분과 일치하고  있다. 물론, 신라는 삼국통일 직후에 6두품이하의 신분에 속한 사람들에게 중위제도라고 하는 일종의 특진의 길을 개방하기도 하였다. 즉, 6두품에게는 그 상한선인 아찬에 중위를 설정하여4중아찬에까지 오를 수 있도록 하였 으며, 5두품에게는 제 10관등인 대나마의 경우 9중 대나마까지, 제 11관등인 나마의 경우 7중 나마 까지 승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특진제도로서도 신분계급에 따라 제한된 관등의 상한선을 넘을 수 없었다. 또한 6정을 비롯한 주요군부대의 경우에도 그 최고지휘관인 장군은 급벌찬 이상 이면 될 수 있었으나, 진골에 한한다는 별도의 규정이 있었으며, 지방관직 또한 예외는 아니다. 주의 장관직인 도독이나 소경의 장관인 사신은 급벌찬 이상이면 가능하게 되어 있어 관등만을 본다면 6두품출신의 취임 가능성은 배제되지 않으나, 주의 차관직인 주조나 군의 장관직인 태수에 취임할 수 있는 최고의 지방관직이었으며, 도독이나 사신 모두 진골만이 할 수 있는 관직이었다.
  골품제도는 관직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도 많은 제약을 가해졌다. 그 중 혼인에 관한 제약인데 이는 같은 신분 안에서만 혼인이 허가되었다. 그러므로 수가 적은 최고신분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는 배우자를 얻는 일이 쉽지 않았다. 진덕여왕이 혼인하지 않은 이유가 실은 왕실 안에서 성골신분의 남성을 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같은 진골신분인 경우에도 김씨왕족은 뒤에 경주로 이주하여 온 신라에 병합된 군소국가의 왕족 후예와의 혼인을 꺼리는 관습이 강하였다. 신분에 따른 사회적인 제약은 혼인 이외에도 가옥의 크기에도 적용되는데, 이는 834년(흥덕왕9)의 규정에 따르면 진골의 경우라도 방의 길이와 너비가 24척을 넘지 못하며, 6두품은 21척, 5두품은 18척, 4두품과 평민은 15척을 각각 넘지 못하게 규정되어 있으며, 복색에 있어서도 제 5관등인 대아찬 이상, 제 9관등인 급벌찬 이상, 제11관등인 나마 이상, 그리고 제 17관등인 조위 이상이 각기 紫·緋·靑·黃色의 복장을 하였는데, 이는 신분에 따른 관등상한선으로 볼 때 진골·6두품 ·5두품·4두품에 각기 상응하고 있다. 이밖에도 우마차의 자재 및 장식, 기타 일상생활 용기들이 골품에 따라 각기 다르게 규정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신분 계급적인 신라사회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던 것이 최고의 특권을 누리고 있던 진골이었으므로, 골품제도는 결국 왕족의 일반 귀족과 평민에 대한 지배권을 합법화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었음을 알 수 있다.


 

2.화랑도
⊙기원 및 제정
  신라는 4세기 중엽을 하나의 경계로 하여 급속히 국가체제를 정비해 갔다. 따라서, 촌락 중심의 청소년 조직은 그 성장·발전에 있어서 커다란 지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더욱이 중앙집권 체제의 정비와 더불어 신라사회에 점차 친족적인 사회조직이 생성, 강화되어 간 것은 그 추가적인 저해요인이 될 수박에 없었다. 6세기 들어 우경이 전국적으로 보급됨에 따라 빈부의 차가 생겨 촌락공동체간의 균형이 파괴되었으며, 군현제의 시행으로 공동체의 독자적인 성격마저 중앙정부에 의해 흡수되기 시작하여 종전청소년 조직은 발전하지 못하고 쇠퇴하여만 갔다. 이런 상태에서 중앙 정부에 의하여 제정된 것이 화랑도의 전신인 원화제도이다.
  화랑도는 처음에 남모(南毛)·준정(俊貞)두 미녀를 뽑아 아를 원화라 하였다. 이들을 중심으로 조직하여 300여 명의 무리가 모였으나, 이 두 여단장은 서로 시기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해 취하게 한 뒤 강물에 던져 죽여 버렸다. 이 일이 발각되어 준정도 사형 에 처해지고 그 무리들도 화목을 잃어 해산하였다. 그 후 나라에서는 귀족 출신의 외양이 잘 생기고 품행이 곧은 남자를 뽑아 곱게 단장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하여 받들게 하자 무리가 구름 같이 모여 들었다. 이로써 화랑도에는 그 지도자에 화랑이 있고 그 밑에 낭도가 있었는데, 초기의 화랑도는 조직도 미미한 것이었으나 576년 이후 국방 정책과 관련하여 이를 관에서 운영하게 되면서 총지도자 에 國仙을 두고 그 밑에 화랑이 있어 각각 문호(門戶)를 맡았다. 화랑도의 총지도자인 국선은 원칙적으로 전국에 1명, 화랑은 보통 3∼4명에서 7∼8명에 이를 때도 있었으며, 화랑이 거느린 각 문호의 낭도는 수천명을 헤아렸다.
  #설치연대-《삼국사기》에는 진흥왕 37년(576)이라 하였으나, 562년에 이미 화랑 사다함 (斯多含)이 대야성(大倻城)을 공격하여 큰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음으로 보아 신라는 이때에 이르러 이전부터 있었던 미비된 상태의 청소년 집단이던 화랑도를 국가조직 속에 편입시켜 무사단의 성격으로 강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 화랑도의 성격
  화랑도는 그 독특한 무사도로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삼국사기》에 수록된 화랑들의 전기를 보면 이 시대에는 화랑뿐 아니라 낭도나 일반 병졸에 이르기까지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무엇보다도 전사를 명예로 여기는 무사도의 정신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다만, 전쟁터에 있어서뿐 아니라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화랑집단의 성원들은 목숨을 가볍게 여겼으며, 이러한 무사도는 특히 화랑출신의 장군들이 모범을 보였다. 660년 백제를 치기 위한 원정군의 주요한 장수는 김유신을 비롯하여 그의 아우인 흠순과 품일등이었는데, 황산벌판의 싸움에서 품일과 김흠순은 신라군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하여 각기 아들인 화랑 官昌과 盤屈을 전사하게 하였다. 김유신은 그 뒤672년(문무왕 12)에 그의 아들 元述이 石門戰鬪에서 당군과 싸워 패전한 끝에 살아서 돌아오자 왕명을 욕되게 하였을 뿐 아니라 가훈을 저 버렸다는 이유로 그를 죽일 것을 왕에게 탄원한 적도 있다. 비록 원술은 왕의 비호로 목숨을 구하였으나 그 뒤로는 감히 아버지를 볼 수 없었으며, 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어머니를 만나려 하였으나 끝내 어머니가 화랑도의 집단수련을 통하여 배양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화랑도의 수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노래와 춤이었다. 본래 노래가 정신교육에, 특히 청소년 의 의기를 북돋우는 데 이바지하였으며 다른 민족의 청소년집단이나 전사조직과 마찬가지로 가무조 합으로서의 일면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화랑도의 노래와 춤은 그들의 명승지순례와 더불 어 놀이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물론, 화랑도의 국토순례라든지 노래와 춤이 어떤 실제적인 목적에서 떠나 다만 즐기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진 것은 아니었으나, 역시 놀이 의 성격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놀이의 사상은 直과 禮의 균형조화를 강조한 유교의 예악 사상과도 서로 통하는 바가 있는데, 화랑도의 인격형성이나 나가서는 그 세계관 형성에 이 놀이의 성격이 내포되어 있는 점은 흥미있는 사실이다.
  또한 화랑도는 불교의 미륵신앙과 결부되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 수령인 화랑은 도솔천에서 下生한 미륵으로 여겨졌을 뿐 아니라 그 집단 자체가 미륵을 쫓는 무리로 일컬어졌다. 화랑도 자체를 미륵신앙에 의하여 결합된 同信者 집단으로 보고 있기까지 한 것이다. 나가 화랑도가 가장 활기를 띤 600년을 전후한 시기에 특히 만이 만들어진 미륵반가 사유상이야말로 바로 화랑집단이 찾고 있던 미륵의 모습일 것이라는 견해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화랑도의 의의 (기능과 역할)
  당시 신라 조정이 화랑도 제정을 서두른 것은 핵심이 되는 군대를 보충할 수단으로써 그것이 당장 필요했을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이를 통해서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화랑도는 이처럼 궁극적으로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교육기관의 임무를 띠고 출발한 제도였으나, 법률로서 제정된 정식 국가기관은 아니었다. 이 것은 종전에 있어서의 촌락 공동체적인 청소년 조직의 전통과 중국 율령(律令)의 도입을 통해서 배운 관청조직의 원리를 교묘하게 결합시켜 만든 일종의 반관반민(半官半民) 성격을 띠는 조직체였다.
  화랑도는 삼국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진흥왕 때 제정되어 삼국통일을 이룩할 때까지 한 세기 동안에 걸쳐 크게 활기를 띄었다. 화랑도는 이 중대한 시기에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다. 고구려와 백제를 상대로 하여 100년이라고 하는 오랜 기간에 걸쳐 전쟁상태에 돌입해 있던 신라의 국가적 위기에 화랑도는 전사단으로서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들은 사태가 중대한 때에는 곧바로 군부대에 배속되어 작전에 동원되었으며, 수련기간이 끝난 뒤에는 국가의 정규부재인 당(幢)·정(停)에 편입되어 정식 군인으로서 활동하였다. 화랑도의 무사도가 화랑집단의 구성원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평민층에까지 널리 퍼져서 시대정신의 구현에 이바지한 것은 이 때문 이다. 그러나 화랑도는 다만 군사적인 면에서만 신라 국가에 이바지한 것은 아니었다. 화랑도조직은 매우 의협심이 강한 집단으로서 약한자를 도와주는 제 서슴지 않았고, 때로는 사회질서의 안녕을 위하여 마을의 야경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화랑도의 역할은 이런 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화랑도가 제정되어 크게 활동하던 시기는 바야흐로 골품제도라고 하는 신라 고유의 신분제도가 확립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던 때였는데, 화랑도는 이러한 신분계층사회에서 발생하기 쉬운 알력이나 갈등을 조절, 완화하는 데도 부분적으로나마 기여하였다. 그것은 화랑도가 진골귀족을 비롯하여 하급귀족, 일반평민 출신 등 여러 신분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그 집 자체는 어디까지나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을 강조하는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Ⅲ. 결론
  화랑도는 엄격한 골품제의 신분제 사회에서 발생하기 쉬운 계층간의 알력이나 갈등을 조절 완화 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사회조직의 바탕 위에서 신라가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을 키워 나아 갔으며, 삼국통일이 어려운 시기에는 강한 무사도정신으로 나타나 국난을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통일 후 나라에 태평 시대가 계속되면서 쇠퇴하여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그러나 그 정신은 소멸되지 않고 고려와 조선에 이어 내려오면서 국난을 맞을 때는 의병 등의 의기 로 치솟았다. 또한 골품제도는 신분계급에 따라서 관등과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상한선을 규정하여 놓았으나, 한편 어떤 관직에 취임할 수 있는 상당 관등을 단일 관등군으로 묶어 놓은 점이 특이 하다. 이는 신라의 관직체제가 관등체계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규제하고 있는 신분체계에 의하여 성립, 규제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골품제는 공복의 빛깔, 착용할 수 있는 옷감의 종류, 관의 재질, 요대 및 신발의 재질, 가옥의 규모, 수레에 사용하는 장식품의 종류, 일상생활의 용기까지도 골품에 따라 차등 있게 구분하였다.

 

 

참고문헌

李基白            『신라정치사회사 연구』                      一潮閣      1990
李基東            『신라골품제 사회와 화랑도』                 普文堂      198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7(삼국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1997
李基東            『신라사회사 연구』                           普文堂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