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羅의 佛敎 전래와 그 영향>


 

 

                                                        98305042  홍지영

 

1. 新羅의 佛敎 전래

  佛敎는 삼국의 국가체제가 정비될 무렵 전래되었다. 高句麗는 소수림왕 시기에, 百濟는 침류왕 시기에 그리고 新羅는 삼국 중에서 가장 늦은 법흥왕 시기에 이르러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공인되었다. 하지만 당시 사회는 이미 중앙집권적 왕국이 성립되어 씨족공동체 안의 폐쇄적인 것이 아니라 초부족적인 상태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씨족사회당시에 성립되었던 무속신앙이나 조상숭배 신앙만으로서는 새로운 국가의 사회생활을 이끌어 갈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전해진 佛敎가 고등종교이자 철학으로서 다른 여러 부족의 신화와 무속신앙을 포용하면서 보다 한 단계 높은 종교와 철학체계로 이들을 규합시켜 나갔으며 국가적인 발전단계에서 야기되는 인간사회의 갈등이나 모순을 한 차원 높은 수준에서 깨닫게 함으로써 부족적인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초부족적인 국가정신의 확립에 기여하여 새로운 고대왕국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렇게 韓國佛敎 역사상 佛敎가 왕권과 결합되어 국가적 색채를 띠게 된 것은 佛敎가 우리 나라에 전래된 삼국시대부터이고 그 삼국 가운데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이 바로 新羅 佛敎였다. 그 이유는 新羅가 삼국 중에서 문화수준이 가장 낮고 국가의 성장도 제일 늦어서 佛敎를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의 강화를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불법과 왕권과의 대립에 대한 자각 도 없이 佛敎는 왕실과 밀착되어 상호이용의 관계를 갖게 되었다. 왕실은 佛敎를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국왕을 부처와 동일시하거나 아니면 홍법의 전륜성왕으로 보려는 진종설화를 성립시켰다. 그리하여 법흥왕 시기에서 진덕여왕 시기까지 왕명은 모두 佛敎에서 따오는 佛敎王命 時代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新羅 佛敎의 발달과정

(1)이차돈의 순교
  新羅의 佛敎는 법흥왕 때에 이차돈의 순교로 인하여 공인하게 되었다. 이차돈의 순교는 高麗 <대각국사령통사비>에서는 법흥왕 14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되어 있으며 <三國史記> 新羅本記에서는 15년으로 되어 있지만 이것은 법흥왕의 기년이 1년 착오된 것에 연유되어 기록된 것으로서 정확 하게는 14년(527)이다. 이차돈의 순교는 왕이 佛敎를 펼쳐 보이려 하였으나 이곳 저곳에서 말이 많아 불법을 펼 수가 없자 이에 이차돈이 자신을 죽여 범상치 아니한 일이 일어나면 불법에 신령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하였다. 이에 이차돈의 목을 베니 붉은피가 나오는 대신 흰 피가 나옴으로써 반대하던 이들도 이상하게 여겨 불법을 시행하는 것에 반대하지 아니하였다. 이차돈의 순교전설이 생긴 배경에는 재래의 고유신앙을 받들던 씨족과 새로운 진보사상인 佛敎를 국교로 삼으려고 하는 법흥왕과의 사이에 벌어진 대립이었다. 佛敎를 공인시키기 위해 순교적인 활동을 한 사람이 나타나 법흥왕을 도와 모든 씨족들의 반대를 억제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법흥왕은 왜 佛敎 공인의 결단을 내렸을까. 우선 국내적으로는 모든 부족을 통일해야 하는 필요성에서 외래사상을 이용하려고 한 것이며 직접적인 동기는 8년(521) 百濟의 사신을 소개시키고 사신을 양으로 파견하여 조공한 것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무제의 佛敎에 의한 국가 통치적 현실이 법흥왕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이차돈의 순교는 종교적인 의미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말할 것도 없이 국가통일, 민족통일이라는 점과 그 흐름을 같이 한다는 면에서 정치사적인 의의 역시 크다. 新羅의 화백제도는 오늘날의 민주 주의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화백제도를 오늘의 의회와 성격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이다. 화백회의가 열리는 장소는 국가라는 커다란 목표를 두고 국정을 논의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각 지방의 호족세력들이 모여 각자의 이권을 다투고 논의하던 장소로 보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부족국가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시기였으므로 각 부족의 장은 그 부족을 다스리며 자신의 세력기반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왕이란 하나의 상징적인 인물이거나 가장 세력이 강한 부족장이 왕권을 쥐었던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여기에서 왕은 지방분권적인 정치적 힘을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구심점으로 마련하기 위해서 佛敎를 국교화 하려고 안간힘을 썼으며 이에 반대하는 호족들은 강력하게 이에 반기를 들고 대항하였다. 이와 같은 왕과 호족들간의 대립 속에서 돌파구를 마련한 것이 바로 이차돈의 순교라는 점이다.


(2)진흥왕 ~ 진덕여왕(佛敎王命時代)
  진흥왕은 자신의 이름을 사미 또는 승가를 뜻하는 삼맥이라 하였고, 그 만년에는 삭발 출가하고 법운이라 하였다. 이것은 진흥왕이 사실상 정·교 양면의 주재자로 군림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진흥왕은 자신의 두 아들의 이름도 전륜성왕설화에서 이름을 따 금륜과 동륜이라 하였다. 이것은 전세계를 통일하여 정법, 즉 불법으로서 통치할 속세의 이상적인 왕자 전륜성왕을 진흥왕이 스스로 꿈꾸고 新羅에 불법왕국의 실현을 기대하였던 시책의 한 표현이다. 또한 진흥왕 시기에 조직의 정비를 보았던 화랑제도도 이 전륜성왕설화와 관계  은 것이다. 당시의 화랑은 전륜성왕과 함께 하생하여 이 세계를 정화하여 이상적인 불국토를 건설할 것이라고 하는 미륵불의 화신이라는 신념이 있었다. 또한 실제로 화랑단체에는 한 구성원으로서 한 두 명의 승려낭도가 있어 화랑을 보좌하며 낭도를 선도하는 등 정신면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진평왕은 진흥왕의 뒤를 이어 新羅佛敎를 더욱 발전시켜 왕즉불 사상을 확립시킨 왕이다. 진흥왕 의 손자인 진평왕은 그 자신의 이름을 석가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백정이라 하고 왕비의 이름도 석가의 어머니 이름을 그대로 따서 마야부인이라 하였다. 진평왕의 아우 백반과 국반 등의 이름도 정반왕의 아우 백반등에서 따온 것이다. 이 진평왕 시기의 新羅王室은 바로 인도 가빌라국의 석가 왕실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이로써 新羅王室은 불경에 나타나는 찰제리의 진종설을 그대로 가져다 스스로의 골품을 佛敎的으로 성화시키고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것은 왕즉불사상 의 표현으로서 그들은 부족의 전통과 그 설화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불교설화를 끌어다가 부족설화 를 연장시키고 있었던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장녀로서 연호를 인평이라 고치고 634년에는 분황사를 635년에는 영묘사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新羅佛敎의 일방적 영웅으로 활약한 자장이 당에 들어가 법을 구하여 5년후 귀국하여 자장의 건의에 따라 황룡사 9층탑이 완성되었다.
  진덕여왕시기에 新羅는 처음으로 唐의 의관을 착용하여 唐의 제도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新羅가 唐制를 채용한 것은 김춘추가 唐에 들어가 百濟 정벌에 군사를 일으켜 줄 것을 요청하고 자세히 唐의 제도를 견문하고 돌아온 영향이라 한다. 무열왕이 즉위하고 그가 가장 마음에 둔 것은 唐의 협력으로 百濟와 高句麗를 공략하는 일이었다. 그로인해 군사를 일으켰지만 달성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뒤를 이어 문무왕이 즉위하여 唐君과 연합하여 百濟와 高句麗를 멸하고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이렇게 삼국시대의 新羅時代 佛敎는 진덕여왕 시기까지로 기술할 수가 있다.


(3)新羅佛敎를 이끈 승려들
  삼국시대 新羅의 대표적 승려로서는 원광법사와  황룡사 9층탑의 건립을 건의한 자장을 들 수가 있다. 먼저 원광법사는 中國 <속고승전>과 <삼국사기>, <삼국유사>등에 전하고 있지만 서술된 내용 은 일치하지가 않는다. 원광법사가 25세에 儒敎를 배우기 위해 中國으로 건너갔지만 금릉에서 佛敎의 가르침을 받고 승려가 되어 성실, 열반, 반야 등의 불학을 배웠다. 그리고 長安에서 <섭대승론>을 강설하여 천하에 명성을 넓히게 되었다. 원광법사는 新羅의 승려로서 국가의 비상시 에는 사람들을 지도하였으며 세속오계를 제시하였다. 세속오계는 불교도로서 국민의 심득을 깨닫게 한 것으로서 첫 번째는 나라에 충성하고 둘째는 부모에 효도하며 셋째는 벗을 사귈 때에는 믿음으로 서 사귀고 넷째 싸움터에서 물러서지 말며 다섯째는 살생을 가려서 하라는 것이다. 다섯째에서 살생을 가리라 함은 육재일과 봄, 여름의 달에는 살생을 하지 말라는 것과 때를 택하며 기르는 짐승을 죽이지 말고 고기가 한 점도 되지 못하는 것은 살생을 금하라고 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수에 보낸 '을사표'를 제작했다는 점에서도 운광이 정치·외교적인 면에서 진평왕의 고문역할을 하였다는 것도 보여줄 수가 있다.
  자장은 심성이 곱고 슬기로워서 문사가 날로 풍부하여 세속에 물들지 않았다.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덧없는 세상의 시끄러움을 싫어하여 처자를 버리고 재산을 팔아서 원영사를 짓고 정진 하였다. 그는 수행방법으로서 작은 방을 지어 주위에 가시나무를 둘러치고 맨몸으로 그 안에 않아 움직이기만 하면 곧 가시가 찌르도록 하고 머리를 들보에 매달아 희미한 정신을 제거케 하였다. 그리고 조정에서 자리가 비어 여러번 그를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선덕여왕 시기에 제자들과 唐나라에 건너가 청량산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이상한 중으로부터 가사와 사리를 받았다. 율사가 당에 들어가니 태종이 칙사를 보내어 그를 승광별원에 있게 하였으나 그는 그러한 번거로움을 싫어하였다. 선덕여왕이 唐태종에게 율사를 돌려보내 줄 것을 간청하여 태종이 이를 허락하며 많은 예물을 주었다. 그가 돌아오자 모두가 환영을 하였고 왕은 그를 분황사에 주거하게 하고 극진히 대우하였다. 나라에서는 자장을 대국통으로 삼아 자장은 이를 맞춰 불법을 널리 전하였다. 그리고 중이 되기를 청하는 자가 계속해서 늘어나자 통도사를 창건하였다. 또 자신의 생가를 개조하여 원영사라는 절을 만들고 <화엄경>을 강의하였으며 조정에 건의하여 중국의 의관을 처음으로 입게 하였다.
  원광법사와 자장의 佛敎는 이처럼 광범위하게 中國文化와 교류하여 국제불교의 성격을 가지면서도 일면 국가관념의 확립이라고 하는 정신적 체질에서는 벗어나지 못하였다.

 

3.新羅佛敎의 영향
  新羅는 종교, 특히 佛敎를 통하여 민중들을 동원하였다. 고신라의 지배층은 佛敎를 수용하여 부족적 고대사회를 고대왕국으로 통합하였고 결국 부족적인 기반을 갖고 있는 귀족세력과의 타협 에서 불교를 받아들였다. 진골을 정점으로 한 최고 지배층에서 잡다한 유망민인 백제, 고구려, 말갈 등을 규합하고 통일전쟁에서 오는 막대한 인적, 물적의 피해로 인한 극심한 혼란을 막기 위해서 佛敎라는 정신적 지주가 절실히 요청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新羅는 佛敎전래로 인해 안정된 통일 국가를 이루는데 한 몫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佛敎의 전래로 인해 화랑도에 영향을 주었는데 원광법사가 화랑의 지도이념인 세속오계를 지었다는 것은 화랑도와 佛敎와의 관계를 단적 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화랑도 지도이념에는 이미 우리 나라에 들어온 儒敎의 정신도 깃 들어 있으니 화랑도의 세속오계 가운데 '친구간에는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표현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교와 재래의 우리 무속신앙이 주로 도덕적, 수양적인 뜻이 강했음에 비하여 佛敎思想은 애국적 정신, 즉 호국사상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당시의 다른 종교 와는 달리 화랑도에 끼친 영향이 아주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신라는 엄격한 계층사회였다. 다시 말해 성골을 정점으로 진골, 중류층, 최하층이 그것이다. 따라서 중류층의 대부분을 이루던 육두품의 중류층은 아무리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고 국가를 위하여 공훈을 세웠다 하더라도 장관과 같은 높은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고 겨우 6등급에 해당하는 아찬의 벼슬에 만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사람은 위로 향상하고자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 동물이다. 그래서 6등급 이상을 넘볼 수 없는 당시의 사회제도에 좌절과 절망을 겪어야만 했다. 바로 이 좌절과 절망에서 벗어나는 길을 그들은 佛敎에서 찾았고 특히 불사라는 형태를 빌어서 외부에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였다. 이렇게 新羅의 佛敎는 중류층인 육두품들에게 좌절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여 주었다. 비단 이러한 사실이 중류층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新羅에서 佛敎가 국교로 공인된 이후에 반란의 횟수가 현저하게 줄고 있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를 단적으로 알 수가 있다. 新羅에서 佛敎의 역할이란 불사 를 이룩케 하여 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겼다는 사실이외에도 新羅人들의 정서를 순화시켰다는 점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邊密耘                              《韓國과 佛敎》             호암출판사      (1989)
安啓賢                              《韓國 佛敎史 硏究》        동화출판사      (1986)
鎌田茂雄                            《韓國 佛敎史》             民方矣社        (1989)
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 (한영우 외)    《한국사 특강》
國史敎材編纂會                      《韓國史 槪說》             普文堂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