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정치의 변질과 당쟁의 심화

 


  98305046  이 강 모

 

  조선 초기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지배해 온 사대부 계급은 주로 勳舊 세력에 의해 움직여 왔다. 조선 초기에는 왕권 강화와 제도 정비가 급선무였으므로 士林派가 중앙정계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으나 성종 이후 조선 왕조가 안전의 발판을 굳히고 지방까지 성리학이 영향을 미치면서 사림들이 서서히 중앙 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사림학자 들은 경학에 능한 道學者로서 관학자들과 학문적인 경향 정치의식 경제적 기반도 같지 않았다. 즉, 사림학자들은 성리학의 이념에 보다 충실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이를테면 경제적으로는 地主一佃戶制를 정착시켜 중소지주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향약과 사창제 (社倉制)를 실시하여 신분적인 향촌공동체를 강화하려 하였다. 또 그들은 현재의 안정된 사회 토대 위에서 부국강병보다는 의리와 도덕이 충만한 사회의 건설을 추구하려 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이상 에 맞지 않게 세조를 보좌한 훈구세력들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사림세력은 점차적으로 붕당의 정치 세력을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대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성종 때에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사림 세력과 훈구세력간의 정치적 입장은 서로 달랐어도 양세력간의 직접적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사림세력이 점차 세력을 성장시켜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훈구세력은 왕으로부터 견제를 받고 있어 어느 정도 양 세력간에 정치적인 균형과 조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산군 즉위와 더불어 사림은 그 세력을 더욱 더 성장시켜 나아갔으며 훈구세력에 대한 공격을 서슴치 않았다. 결국 이들 두 세력은 士禍로  폭발되었다.
  최초의 사화는 1498년 연산군 4의 무오사화(戊午士禍)이다. 이는 金馹孫의 史草사건이다. 김일손 이 사관으로 있을 때 그의 스승인 金宗直이 세조를 비난하고 폐위된 단종을 추모하려는 의도에서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의 士草에 올렸다. 이 士草가 성종실록(成宗實錄)편찬때 발견되어 왕과 훈구세력에 의해 김일손이 처형당하고 김종직의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剖棺斬屍)시켰다. 이것이 무오사화이다. 무오사화가 일어난 뒤 6년 뒤 연산군 10년 (1504)에 또 甲子士禍가 일어났다. 연산군 은 사치와 향락을 일삼아 財政의 낭비가 심하였다. 이때 財政보충책으로 훈구대신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려 하였는데 훈구대신인 府中派들의 반대가 완강하였다. 이때 궁중과 관계가 깊었던 任士洪등 일파가 이 상황을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 즉 그들은 연산군의 生母尹氏의 폐출사사 (廢黜賜死) 사건을 들추어내어 연산군을 충동, 훈구파와 잔여 사림파를 박멸시켰으며 이때 김굉필 (金宏弼).정여창(鄭汝昌)등이 극형에 처형 해 졌다. 연산군 재위기간중 두 차례 사화를 일으켜 훈구와 사림의 양 세력을 탄압한 연산군은 그의 실정으로 인해 축출되었으며 유신들의 추대를 받은 중종이 왕위에 즉위하였다. 중종은 연산군의 폭정을 감안하여 儒敎理想政治를 구현하려고 士林派의 소장학자인 조광조(趙光祖)를 重用하였다. 왕의 깊은 신임을 얻은 趙光祖는 유교적인 도덕국가 건설을 그의 정치목표로 삼고 피폐해진 향촌을 안정시키기 위해 향약(鄕約)을 보급하여 유교적 도덕국가를 확립시키려 했으며 또한 현양과(賢良科)를 실시하여 사림을 대거 중앙 관리로 등용 시켰다. 급진정책을 추구한 사림정치는 훈구세력에게 큰 위험을 주었다. 훈구세력이 중종반정공신에 대량으로 책봉되고 막대한 공신전을 받게 되자 사림세력은 위훈삭제(僞勳削除)와 공신전의 몰수를 주장하였다. 중종은 처음에 조광조를 등용하여 그의 이상적인 정책을 따랐으나 점차 조광조의 독선 적인 정치이념에 염증을 느꼈다. 이에 훈구세력의 협조를 받아 조광조 일파의 사림세력을 제거 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중종 때에 등용된 사림세력이 몰락하여 큰 타격을 받았으며 이 사건을 己卯士禍라 한다. (중종14년,1519)
  明宗즉위년 (1545)에 또 한차례의 士禍가 일어났다. 이것은 중종의 두 이복 왕자를 둘러싼 외세간 의 대립이 정잼으로 표면화된 것으로 인종과 명종의 왕위계승문제를 에워싸고 인종의 외세인 尹任 중심의 大尹과 명종의 외세인 윤원형(尹元衡)중심의 小尹의 대립으로서 중종의 뒤를 이어 인종이 즉위한자 大尹이 승리를 거두는 듯 하였으나 인종이 1년만에 사망하자 다시 명종이 즉위하자 대윤은 대윤에 대한 보복으로 大尹은 비롯한 대윤일파에게 화를 입혔다. 이를 乙巳士禍라 한다.
  사화의 원인과 사정은 각각 다르다 하여도 본질적으로 그것은 신구세력 간의 대립이고 진보세력과 보수세력간의 대립이다. 여러 차례에 걸친 사회적 타격 속에서도 성리학은 깊이 연구되었고 서원의 발달과 함께 유명한 학자들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사화를 통하여 사림세력이 훈구세력에 의해 큰 타격을 받았지만 오히려 그 세력은 선조 때부터 정치의 주도권을 잡아갔다. 그들은 권력장악후 그들 사이에 붕당이 분기되어 자체경쟁과 대립이 심화되었다. 사림파의 정계 장악으로 관직에 오를 자격자는 많아졌으나 관직은 한정되어 있어 필연적으로 당파의 분열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붕당 대립의 직접적인 발단은1575년(선조8) 이조전랑직(吏曹銓郞직)을 둘러싼 김효원과 심의겸의 반목 에서 비롯되었다. 전랑직은 그 직위는 낮았으나 인사권을 쥐는 직책으로 판서나 국왕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고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면 공의 에 붙여서 선출하였으므로 관료들 간의 집단적인 대립의 초점이 되었던 것이다.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동인은 허엽 이영수로 되었고 심의겸을 중심 으로 한 서인은 박순이 영수가 되어 대립이 본격화 되었다. 처음에는 동인이 우세하여 서인을 공격하였으나 동인은 다시 서인에 대한 감온 양론으로 갈라져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분파되어 임진왜란 이전에 남인, 서인·북인 삼색이 형성되었다. 임진왜란이후 광해군은 북인의 추대를 받아 즉위한다. 따라서 북인이 모든 실권을 잡게 된다. 광해군이 서인에 의해 쫓겨나고 대신 서인의 옹립을 받은 仁宗이 왕에 즉위한다. 또한 효종때에도 송시열들 서인들이 집권을 하게 되며 현종 즉위후 효종의 母后인 趙大妃의 복상 문제를 놓고 서인의 기년설(1년)과 남인의 2년설(2년)이 대립하게 되지만 결국 서인의 주장이 채택됨으로써 정권에는 변동이 없게 된다. 그러다가 1674년 (현종15)효종의 비 인선왕후의 상을 당하자 남인은 기년설을 서인은 대공설(9개월)을 주장하게  되며 이번에는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어지게 됨으로써 정권의 교체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숙종대에 이르러 남인이 별로 신임을 받지 못하여 다시 서인이 재 등용된다. 서인은 남인의 제기를 막으려고 남인을 철저히 탄압하고 이때부터 붕당정치의 기본이 무너지고 상대세력을 인정하지 않는 一黨 전제의 추세가 나타난다. 이때 서인은 남인의 처벌을 놓고 송시열을 비롯한 강경파로 老論과 윤증을 비롯한 온건파의 少論으로 분열되어 남인·북인·서론·노론의 사색당파가 대두되었다.
  송시열이 사사되는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다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숙종 20년 왕에 의하여 다시 서인이 재등용 된다. 이때 서인의 보복으로 남인은 재기 불능상태로 전락되고 만다. 이를 갑술옥사(甲戌獄事)이라고 이때부터 노론과 소론이 대립의 중심을 이루게 된다. 영조 때에는 노론의 장기 집권으로 인한 왕권의 약화 정치세력이 편중으로 인한 사회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탕평책(蕩平策)을 실시하여 정치세력의 균형을 이루었다. 정조 또한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했다. 그 결과 당쟁은 완화되고 정치세력간에 균형이 이루어져 왕권이 신장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러나 영·정조의 탕평책에도  불구하고 당쟁의 근본은 해결되지 못하였다.
 영조 말부터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한 南人, 小論중심의 時派가 형성되고 또한 그의 죽음을 당연히 여기는 老論중심의 벽파로 나누어져 대립양상을 보이다가 純組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왕권이 약화되어 세도정치라는 파행적인 정치형태를 낳았으며 이는 대원군에 들어서야 완화되었다.
 이렇듯 더욱 피폐해졌고 계속되는 당쟁으로 인해 국가를 위한 이념보다 학벌, 문벌, 지방의식으로 연결되어 국민을 분열시키고 국가, 사회발전에 지장을 초래했다. 그러나 조선의 붕당정치는 서로 간의 견제 속에서 발전한 정치형태라고 볼 수 있으며 지금은 사림 정치라는 개념으로 조선 중 · 후기의 정치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개설』 보문당, 199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 민족사』항하사,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