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


  경상남도 진주시 성동·본성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축 평산성(平山城). 둘레는 약 4,000m. 촉석성(矗石城)이라고도 한다.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되어 있는데, 내성은 1,930척 외성은 1만330척이다. 현재 수문(水門)·암문(暗門)·장대(將臺)· 포루 (砲樓)와 촉석루 등의 건물이 남아 있는 이 성은 원래 백제시대의 거열성지(居烈 城地) 였다고도 전하며 고려 공민왕때도 7차의 중수가 있었다. 1593년(선조 26)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장계(將啓)를 올리고 7월 14일 진주성에 도착하니 전라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 조방장(助防將), 이계정(李繼鄭), 충청병사 황진(黃進) 조방장 정명세(鄭名世), 경기조방장 홍계남(洪季男), 경상우병사 최경회 (崔慶會), 복수의장(復讐義將) 고종후(高從厚) 등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전라순찰사 권율의 전령으로 그들이 일시에 흩어지니 불과 3,000여명만이 성안에 남았다. 당시 진주는 유일하게 보존된 전라도로 가는 길목이므로 이곳을 잃으면 군량을 보급하는 전라도지방을 방어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은 이성을 포위하여 일곱 차례에 걸쳐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진주성의 군관민들은 장렬한 항쟁을 하여 승리를 하였으니 이는 남강(南江)에 쌓은 성벽에 크게 힘입은 것이다. 이때의 성은 촉석성이었으며 지금의 내성에 해당된다. 촉석성은 하륜(河崙)의 성문기(城門記)에 의하면 석축한 성의 둘레가 4,359척, 높이는 15척이며, 문은 세 곳이니 의정(義正, 서쪽 단층)·지제(智濟, 북쪽 2층)·예화(禮化, 남쪽 단층)이며 남가에 연한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험준한 곳이다. 하륜의 소년시절에 이 성벽은 무너진 터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진주는 일찍부터 왜구의 노략이 있어 성벽을 다시 쌓는 일이 시급하였 으나, 이에 향인들이 옛터에 성벽을 축조하였으나 곧 무너지니 1437년(세종 19) 관민이 합세하여 완성시켰는데 그 모습이 웅장하였다. 성의 북쪽으로 3개의 못을 파서 연결하여 성에 접근하려면 어디서나 물을 건너야만 되도록 하였다. 1593년 6월29일 이 성벽에 의지한 큰 싸움에서 진주성은 왜군에게 함락된 바 있다. 외성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영(慶尙右道兵馬節度使營)으로 축성되었다. 1608년에 창원에서 옮길 것을 품의하여 윤허를 받고 축조한 것인데, 성벽높이 25척, 둘레 1만330척으로 대규모이다. 옛 북문과 신북문 및 남문에도 옹성(甕城)을 축조하고 근대전에 적합하도록 하였고 내성에 이어 지금 진주시를 포위할만한 넓이로 자리잡았다. 이 성의 외곽으로 물이 담긴 호(濠)를 파서 남강에 연결되도록 하였다. 내외성에는 내수문(內水門)·외수문 ·암문·척석문·서문(西門)·내북문(內北門)·촉석루·함옥헌(涵玉軒)·서장대(西將臺) ·포루·진남루(鎭南樓)·산성사(山城寺)·창렬사(彰烈祠)·충민사(忠愍祠)·화약고· 관덕당(觀德堂)·공신당(拱辰堂)·포정사(布政司)·군기고·중영궁(中營宮) 등이 있다. 이 성과 그 주변에는 선사시대 이래의 각 시대 유물들이 출토되는 고분과 유적지가 많이 있다. 특히, 진주성전투는 행주산성전투·한산도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