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마을
 
 중요민속자료 제 122호인 이 마을은 조선 전기 이후의 전통적 가옥과 존재와 영남의 명지라는 풍수적 경관과 아울러 역사적 배경, 별신굿과 같은 고려시대의 맥을 이은 민간전승 등이 현대 공업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그 전통적 경관과 함께 정신문화의 보존 발전이라는 차원에서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하회마을은 전국유수의 풍산유씨 동족마을이며, 그 터전은 낙동강의 넓은 강류가 마을 전체를 동. 남.서 방향으로 감싸 도는 명지이다.
  그 지형은 태극형 또는 연화부수형이라고 한다. 유시가 집단마을을 형성하기 전에는 대체로 허씨, 안씨 등이 유력한 씨족으로 살아왔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1635년 (인조13)의 <동원록>에도 삼성(蔘姓)이 들어 있기는 하나 이미 유씨의 수가 압도적 으로 많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그 이전에 유시등의 기반이 성립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유씨의 인향조는 8세 전서 종혜씨로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과 같은 유씨의 동족기반은 종흉조 유문룡, 유성룡 형제시대에 이룩된 것이다. 유운룡은 시조에서 14대의 종손이며 유성룡은 시손인데 모두 문중의 거봉이어서 이 두 계손들을 경암파, 서애파로 부르기도 한다.
  이 마을에서 유서 깊고 규모가 갖추어진 가옥으로서 보물 또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가옥들은 모두 풍산읍씨의 소유인데, 특히 그 중에서도 유운룡과 유성룡의 유적이 중추를 이루고 있어 유씨 동족마을의 형성시기와 역사적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마을을 감싸도는 화천(花川)은 낙동강 상류이며 그 둘레에는 퇴적된 넓은 모래밭이 펼쳐지고, 그 서북쪽에는 울창한 노송림이 들어서 있어 경관이 아름답다. 강류의 마을 쪽이 백사장인 데 반하여 건너편은 급준한 층암장벽의 연속이어서 어려 정대가 자리잡고 있어 승경으로서의 연모도 잘 갖추고 있다. 강류의 북쪽 대안에는 이곳 자연의 으뜸인 부용대의 점벽과 목연정, 화천서당이 있으며, 서북쪽에서 강물이 돌아나가는 즈음에는 겸안정과 상봉정이 자리잡고 있어 일련의 하회명구를 이루고 있다.  이곳 강의 최대폭은 대략 300m이며 최대수심은 5m에 이른다. 강 건너 인근과의 교통수단은 나룻배이다. 과거에는 음력 7월 보름에 부용대 밑에서 시회가 있었으며 시회와 아울러 유명한 줄불놀이가 벌어졌었다. 이 강상류화(江上流花)의 놀이는 하회별신굿과 함께 이 고장의 오랜 민간전승놀이이다. 별신굿에 쓰인 가면들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제작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되어 하회마을의 역사적 배경이 뿌리깊음을 말해 주고 있다.
 풍산으로 부터의 진입도로와 연결된 큰 강이 이 마을의 중심부를 동서로 관통하는데, 이 마을길의 북쪽을 북촌이라 부르고 그 남쪽을 남촌이라 부른다. 1988년 현재 남북촌의 총 가구수는 188가구이다. 이들 가옥 중 보물로 지정된 가옥은 보물 제306호인 안동양진당과 보물 제414호인 충효당이 있다. 또한 중요민속자료로는 하회북촌댁(제84호), 하회원지정사(제85호), 하회빈연정사(제86호), 하회유시주가옥(제87호), 하회옥연정사(제88호), 하회겸암정사(제89호), 하회남촌댁(제90호), 하회주일제(제91호) 등이 지정되어 있다.  이들 지정 가옥들은 모두가 유씨집안의 소유이다. 
양진당
   겸암 류운룡(1539 - 1601) 선생이 살았던 풍산류씨의 대종택이다. 당호인 양진당은 겸암 선생의 6대손인 영공의 호를 따랐다.
충효당과 함께 하회를 대료하는 이 집은 건축의 수법과 양식, 그리고 건물의 배치 등이 조선조 초, 중기 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자좌오향, 정남의 99칸 집이었으나 53칸이 남아있다.
충효당
 서애 유성룡 선생의 종가이다. 평생을 청백하게 지내신 선생이 삼간 초려에서 별세한 후 문하생과 사림이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여 졸재 원지공을 도와 창건하였으며, 그 후 증손 익찬 선하공이 확장,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중기의 대표적인 사대부 집으로 현재 52칸이 남아있으며 전서체의 충효당 현판은 당대의 명필인 미수 허목공의 친필이다. 징비록등 서애 선생의 귀중한 저서와 유품은 1966년에 건립한 영모각에 보관, 전시되어있다.
남촌댁
  이 집은 유태하의 고택으로 충효당과 함께 남촌을 대표하는 집이다. 본래 대문가채,몸채, 사당, 별당, 정자 등으로 구성되었으나, 1953년 화재로 몸채와 정자가 소실되었다. 정자는 복원하였으나, 몸채가 없어 현재는 별당채에서 살림을 하고 있다. 대문가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으로 남향하였는데, 서축 2칸이 광이고 마루방 1칸, 다음에 대문간 1칸을 두고, 다시 광 3칸이 연달아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전면 북쪽터가 옛 몸채터로 주초들이 남아 있고, 왼쪽으로 보기원된 정자가 있다.
몸채 뒷담의 일각문을 들어서면 정면 북쪽으로 따로 쌓은 담장 속에 정면 3칸, 측면 1칸에는 사랑채가 있고, 동쪽의 임각문을 들어서면 별당채가 동북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북촌댁
 양진당과 북촌을 대표하는 가옥으로 경상도 도사를 지낸 유도성이 철종 13년 (1862)에 건립하였다. 안채, 사랑채, 문간채, 사당들을 두루 갖춘 전형적인 양반가옥이다.
 하회마을은 남촌과 북촌으로 나뉘는데, 양진당과 더불어 북촌을 대표하는 집이다. 마을 중심부 북촌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현주인 유영하의 고조할아버지 유도성이 1864년(고종 1)에 건축하여 수차례의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남향한 - 자형 대문간채와 ㅁ 자형몸채, - 자형 사랑간채, 그리고 서남향한 별당채로 구성되었다. 대문간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으로 서쪽 3칸이 광이고 대문간 1칸, 그 몸쪽으로 광 2칸과 외양간 1칸이다. 대문간을 들어서면 곧 사랑마당이 되는데, 이 마당에 남향한 ㅁ 자형 몸채의 전면 서쪽으로 작은 사랑채가 있고, 동쪽으로 사랑채, 그리고 그 사이에 두 사랑채의 온돌방에 불때는 아궁이를 둔 중문간이 자리잡고 있다. 동쪽의 사랑채는 중문간 동쪽으로 사랑방 2칸, 대청 1칸을 두었는데, 전면에는 반칸폭의 개방된 퇴를 두었고, 뒤로는 별장광과 안마당으로 출입하는 은폐된 통로를 두었다. 
 동쪽끝 1칸 대청의 ㄱ 자로 꺽인 북쪽에 1칸의 온돌방을 두었는데 이는 서고로 쓰이며, 이의 북쪽에 2칸의 돌아들어서는 중대문간이 자리잡고 있다. 작은사랑은 아궁이를 둔 중문간의 서쪽으로 1칸의 온돌방, 1칸의 대청을 두고, 전면에 반칸쪽의 개방된 툇마루를 두었으며, 북쪽으로 꺾인 곳에 1칸의 온돌방과 2칸의 온돌방을 두었는데, 대청과 연이은 방은 작은 사랑채에서 쓰지만, 2칸의 온돌방은 안채 부엌 아랫방인 것이다. 안채는 서북쪽 모서리에 4칸의 큰  부엌을 두고, 이의 동쪽에 정면 2칸, 측면 2칸의 안방을 두었는데 안으로는 4칸으로 나뉘었다.
 대청의 동쪽은 2칸 크기의 윗상방이 있고 이의 남쪽으로 반칸쪽의 툇마루를 두고 다시 1칸의 아랫상방이 있는데, 전자는 며느리방이고, 후자는 노모의 방이었다. 서 남향한 -자형 별당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온돌방과 대청, 마루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