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보사찰(三寶寺刹)

 

 


98305039  한 상훈

 

  우리 나라 불교의 삼대사찰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通度寺), 합천 가야산의 해인사(海印寺), 전남 승주의 송광사(松廣寺) 셋을 가리킨다.
  삼보는 불교의 신행 귀의대상인 불(佛)·법(法)·승(僧)을 가리키는 말로서 통도사가 불, 해인사가 법, 송광사가 승에 해당한다. 통도사는 자장(慈藏)율사가 중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창건한 절이다. 그는 불경과 불사리(佛舍利)를 가지고 귀국하였는데,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할 목적으로 이곳 통도사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조성하였다. 그는 승통(僧統)이 되어 이곳 통도사의 금강계단에서 승니(僧尼)의 기강을 바로잡았다고 하는데,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고 하여 통도사를 불보사찰(佛寶寺刹)이라고 한다. 영원한 부처님의 법신(法身)을 상징하는 사리를 모셨기 때문에 통도사의 주법당인 대적광전(大寂光殿)에는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고 불단(佛壇)만 마련 하였다.
  해인사는 부처의 말씀을 기록한 대장경을 봉안한 곳이라고 해서 법보사찰(法寶寺刹)이라고 한다. 강화도에서 완성한 대장경은 보관의 어려움 때문에 조선 초기에 가야산 해인사로 옮겨졌다. 이곳은 풍수지리에 의하여 예로부터 승지(勝地)로 손꼽히는 곳이었고, 장경각(藏經閣)을 따로 지어 고려 대장경을 안치하게 된 것이다.
  송광사는 큰스님들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해서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고 한다.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智訥)은 이곳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도모하였다. 원래 팔공산의 거조사(居祖社)에서 이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뒤에 송광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 뒤 그의 제자였던 혜심(慧諶)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까지 16명의 국사가 연이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고 하여 승보사찰 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언제부터 삼보사찰이라는 칭호가 붙여지게 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중기 이후에 쓰여지게 되었다고 보인다. 오늘날 이 삼보사찰에 전통적인 승려교육과정인 선원 (禪院)·강원(講院) 그리고 율원(律院)의 세 기능을 다 집합시켜 놓았다는 뜻에서 총림(叢林) 이라고도 한다.
 

 

◈ 송광사
  조계산(曹溪山,해발 887m) 안에 위치한 송광사는 불교의 삼보사찰 중 하나인 승보사찰. 이 승광사 는 불교의 보물로서 뿐만 아니라 한국의 불교·전통·역사를 대표할 만한 사찰이다. 신라 말기 창건된 이후, 천년의 불교 및 민족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곳이다.
  역사를 거슬러 볼 때, 보조국사 지눌스님을 비롯, 고봉(高峯)스님에 이르기까지 16명의 국사가 송광사에서 배출됐다. 국사, 즉 옛 봉건제도 속에서 국가로부터 승려에게 주어진 최고의 승직(僧職) 이자 그 시대의 국가를 대표할만한 고승을 16명이나 한 사찰에서 배출했다. 이는 송광사의 그 어떤 면모보다는 깊고 큰 명맥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증거다. 국내의 많은 절들이 각종의 보물이며 설화로 유명함을 표출하고 있는 가운데 송광사는 승보란 칭호에 걸맞듯이 '보물급 스님'들이 특히 많았다.
  국사칭호를 받은 보조(普照), 진각(眞覺), 청진(淸眞), 진명(眞明), 원오(圓悟), 자정(慈靜), 자각(慈覺), 기당(淇堂), 혜감(慧鑑), 자원(慈圓), 혜각(慧覺), 각진(覺眞), 정혜(淨慧), 홍진(弘眞)(이분들 15명 스님은 고려시대 국사) 고봉(高峯 조선시대 초 국사)스님 등 16명이 그 대표라 할 수 있다.
  송광사(松廣寺)는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12번지 조계산(曹溪山)에 자리하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이다. 절은 고려 중엽 보조국사 이래로 15분의 국사가 주석 했던 선종사찰이다. 그 전통과 사상은 8차례의 대규모 중창을 이루며 꾸준히 계속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승보종찰 (僧寶宗刹)'이라 부르는 한국의 대표적 삼보사찰 가운데 하나이다. 현재 60여 동에 이르는 가람은 먼저 그 입지조건으로 볼 때 전형적 산지가람을 이루고 있다. 해발 887m의 조계산 연산봉(連山峯)이 병풍처럼 절을 에워 쌓으며 남쪽의 계곡에서 흐르는 신평천이 사역을 휘둘러 북쪽으로 빠져나가 주암호에 이른다. 절은 이 같은 주위 산천을 배경으로 한 채 동쪽의 완만한 산줄기를 다듬어 서쪽을 바라보며 자리잡았다.
  절의 본래 이름은 길상사(吉祥寺)였다.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신라 말 혜린선사(慧璘禪師) 가 터를 잡고 산 이름을 송광, 절 이름을 길상이라 하여 창건했다. 이 무렵 가람은 100여 칸에 달하고 30∼40의 대중이 거주하였다 하는데, 이런 내용이 <송광사적비>와 <보조국사비명> 등에 보이는 길상사에 관한 창건 내용의 전부이다. 다만 '길상'이라는 절 이름이 화엄 제2회(會)의 설주(說主)인 문수사리(文殊師利)의 한문 옮김 말이므로 절의 성격은 화엄종 사찰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후 신라시대의 사정은 알려지지 않는다. 고려 인종 때 석조(釋照)대사가 퇴락한 당우를 중창할 뜻을 세웠으나 갑자기 입적하고 말아 길상사는 점점 기울고 허물어져 갔다고 한다. 길상사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智訥,1158∼1210)이 정혜사(定慧社)를 결성하고 그 수행처로 이 곳을 택하면서부터이다. 1182년(명종 12) 보조국사는 뜻을 같이하는 10여 명과 함께 타락한 고려불교를 정법불교로 바로잡기 위해 정혜결사를 서약했다. 그 뒤 8년이 지난 1190년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 다시 모여 정례결사문을 반포하고 본격적 결사운동에 들어갔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기 위해 보다 넓은 곳을 물색하던 중 제자 수우(守愚)의 말을 따라서 거의 폐허로 변한 이 곳 길상사를 수행처로 정했던 것이다.
  산세가 웅장하고 토지가 비옥하며 또한 울창한 수림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니 심성을 수양하고 대중을 수용할 최적의 자리였다고 본 것일까. 1197년(명종 27) 터를 새롭게 다지고 토목을 일으켜 가람 건립에 착수하였다. 워낙 규모가 컸던 탓에 공사는 시작한지 9년만인 1204(희종 원년)에 완공 되니 불당·승료·재당(齋堂)·창고 등 전각 80여 칸이 갖춰졌다. 그 해 10월 약 120일 동안의 경찬법회(慶讚法會)를 베풀어 성대한 낙성식을 봉행 하였고, 희종으로부터 산 이름을 '조계', 절 이름을 '수선사(修禪社)'라 하는 친필 사액을 받았다. 뒤에 절은 수선사에서 송광사로 바뀌었지만, 이렇게 해서 절은 고려 불교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며 제1차 중창되었다.
  제2차 중창은 수선사의 제2세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1234)에 의해서였다. 33세의 젊은 나이로 보조국사의 뒤를 이은 스님이 법석을 베풀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절이 비좁을 정도가 되었다. 이에 국왕 강종이 강당을 증축하게 하고 관원을 보내 공역을 도움으로써 2차 중창이 이루어졌다.
  조선초인 1395년(태조 4) 송광사의 제16세의 국사로 추존 되었던 고봉 법장(高峯法藏, 1350∼ 1428)이 절에 들렀다가 옛 모습대로 중창·복원할 것을 서원 하였다. 5년이 지난 1399년(정종 1년) 마침내 국왕의 도움을 구하여 절에 수륙사(水陸社)가 설치되었고, 이듬해부터 중창이 시작되었다. 1404년(태종 4)에는 불·법·승의 전당(殿堂)3∼4개소를 준공했다. 이후 고봉의 중창 의지는 중인(中印)선사에게 이어져 1420년(세종 2) 20여 명의 대중들과 함께 당우의 중건이 계속되었다. 안으로는 가람을 수리하고 밖으로는 사격의 신장에 힘쓴 결과 1424년(세종 6) 수륙사를 철폐하고 본연의 선종사찰로 되돌려 놓았다. 1427년(세종 9) 중창이 마무리되어 낙성식이 열리니 이 때의 가람 규모는 전부 90여 칸에 달했다고 한다. 이것이 송광사의 제3차 중창이 된다.
  그러나 200여 년이 못되어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전국의 국토가 왜군에게 유린되는 가운데 송광사 도 적지 않게 소실되었다. 더구나 전쟁의 와중에서 많은 대중이 피신하면서 절은 폐허와 다름없이 방치되었다. 이 때 복구의 기치를 든 인물이 응선(應禪)화상이었다. 1601년(선조 34) 수각(水閣)을 중수하고 1604년(선조 37)에는 천자암(天子庵)을, 1606년(선조 39)에는 보조암(普照庵)을, 1608년 (선조 41)에는 임경당(臨鏡堂)을 차례로 중건했다.
  이듬해인 1609년(광해군 1)에는 부휴(浮休,1543∼1615)선사가 머물며 조전(祖殿)·동행랑(東行廊) ·천왕문 등에 각각 책임자를 선발하여 그 보수와 증축을 맡겼다. 이러한 절의 제4차 중창은 그해 겨울에 모두 끝났다.
  지금의 절은 1983년부터 1990년에 이르는 8년 동안에 새롭게 중창한 모습이다. 창건이래 보조국사 의 제1차 중창으로부터 약 800년 동안 변화를 거듭하여 오늘날 제8차 중창의 가람이 들어선 것이다.
 1969년에는 조계총림의 방장 구산(九山)스님이 뒤를 이어 본격적 중창이 다시 시작되었다.   대웅전을 혜체 하여 원형 그대로 중정 북쪽에 옮겨 짓고 승보전(僧寶殿)이라 하였다. 본래의 대웅전 자리에는 규모를 넓혀 108평의 목조 대웅보전을 새로 지었고 그밖에 지장전·성보유물각· 목우헌 등 20여 동의 전각이 새로 들어섰다. 모두 60여 동의 전각과 요사가 가득히 들어찬 송광사는 명실공히 승보종찰의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 해인사
  소백산맥이 덕유산을 앞 두고 동쪽으로 뻗어 경상북도와 남도의 경계를 구획하면서 일대지맥을 형성한 곳이 가야산맥이다. 가야산은 옛부터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산신이 머무는 신령스런 산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는 해인사 안에 정견천왕사(正見天王祠)를 마련하고 정견모주를 위한 제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산신이 머문다는 가야산은 그 골이 깊고 궁벽하여 옛부터 전란(戰亂)의 화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일컬어졌다. 고려 때 판각된 대장경이 이 곳에 봉안된 것과 고려 고종이 1227년 '명종실록'을 해인사에 보관한 것도 다 그러한 까닭에 연유한다.
  범어로 '소'라는 뜻을 가진 가야산의 불연과 맺어진 해인사의 창건을 알려주는 문헌은 「가야산 해인사고적」 및 「해인사중창기」가 전해지는 가운데, 최치원의 「신라 가야산 해인사 선안주원 벽기」에서 그 시작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신림의 제자 순응이 서기 766년 중국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가 신라로 돌아와 애장왕 3년(802) 가야산에 해인사의 창건을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성목태후가 불사를 도와 진행해 나가다 순응이 갑자기 돌아가게 되자 이정이 그의 뒤를 이어 마침내 완성을 보았다고 전한다.
 한편「가야산해인사고적」에는 해인사 창건에 설화의 요소를 첨가해 놓았다. 양나라 보지공 (寶誌公)이 임종시에 제자들에게「답산기」를 주면서 고려에서 온 두 스님에게 전해줄 것을 유언 했으니 그들이 순응과 이정이며, 다시 공의 유언에 따라 두 스님은 신라로 돌아와 선정에 들어 아무런 잡념이 일지 않는 길지를 찾아 냈던 것이다. 이 때 애장왕의 왕후가 등창이 나서 어떤 약으로도 효험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선정에 든 두 스님이 오색실을 주며 궁전 앞 뜰에 심어져 있는 배나무에 한 쪽 끝을 매고, 다른 한 끝은 등창 난 곳에 대도록 시켰다. 과연 스님이 시킨대로 하자 왕후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고 대신 배나무가 말라 죽는 이적을 보였으니, 애장왕은 두 스님이 있던 절에 와서 전답 2천5배결을 바쳤다한다. 이러한 유래 속에서 해인사 창건의 의의는 해인이라는 절의 명칭에 응축되어 있다.
  해인이란 대방광불화엄경 중에 나오는 해인삼매라는 삼매의 경지에서 비롯한 것으로 화엄의 철학과 사상을 널리 펴고자 하는 의지에서 이루어진 화엄의 대도량인 것이다. 우리나라 화엄학은 신라시대 당나라 지엄의 문화에서 화엄을 공부하고 귀국한 의상이 문무왕 16년에 부석사를 세우고 화엄종지를 떠나가면서 시작됐다.
  그의 문화에 십대덕(十大德)을 비롯한 많은 화엄종장들이 배출되었고, 이들은 부석사, 화엄사, 범어사, 해인사 등의 화엄십찰을 창건했다. 화엄종찰의 해인사는 실제 법보종찰로 더 알려져 있다. 이것은 고려대장경의 보관으로 인해서다. 불서의 총집성을 중국에서는 대장경이라 불렀고, 이러한 책들은 서사로 전래되어 오다가 우리에게는 최초로 1011년에 고려의 현종이 대장경판을 새겨 부인사(符仁寺)에 두었고, 그때부터 대장경판의 조조(雕造)는 호국의 중요한 불사로 간주되어 각국에서, 그리고 중국의 몇몇 사찰에서는 앞을 다투어 조성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해인사에 소장된 대장경은 제1차 조조의 대장경이 아니다. 초기 부인사에 소장하였던 대장경판이 몽고병에 의해서 소실되었고, 제2차 조조 고려대장경이 현재 해인사에 보관하고 있는 소장본이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문종의 넷째아들 의천이 흥왕사에서 속장경의 조조를 실시하여 현본 대장경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는 점이다.
  경판의 재료는 제주도, 완도, 울릉도, 거제도 등지에서 많이 생산되는 백화라는 이름의 나무를 벌채해 와 3년 동안 바닷물에 담가두었다가 꺼낸다. 다시 그것을 같은 크기로 조각을 낸 다음 소금물에 삶아, 그늘에 말리고 그런 후에야 대패질을 해서 그 위에 경문(經文)을 붓으로 한자한자 써나가면, 그에 따라 글자를 새겨 나가게 된다. 마무리를 위해 경판의 두 끝에는 각목으로 마구리에 붙여 뒤틀리는 일이 없도록 하였고, 전체 판 위에다 가볍게 옻칠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네귀에는 동렬장식을 달아 놓는 것으로 모든 작업을 마감한다. 이러한 정상스런 과정은 고종 23년에 대장도감 이 설치되어 고종 38년의 16년이란 세월을 걸쳐 완성했다.
  대장경 주조는 나라를 지키고 외적을 물리치게 해달라는 민족의 단일된 염원이 서려있음에서 더 큰 의의를 찾기도 한다. 거기에다 오자 하나 발견할 수 없이 정치한 솜씨로 제작된 대장경은 그래서 우리만의 자랑이 아닌 세계의 보물로 남을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장경이 강화도 에서 해인사로 옮겨지게 된 것은 속장경을 조조한 의천이 한 때 해인사에서 장주할 생각을 했던 인연 깊은 곳이었다는 점과 여말선초(麗末鮮初) 극심한 왜구의 노략질 앞에 가야산의 그윽하고 신령스런 산세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되어졌기 때문이다.
  법보 사찰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의 위대함과 더불어 그것을 보관한 대장경 판전에 담긴 조상의 슬기가 또한 돋보인다. 대적광전 뒷편에 우뚝 솟은 장경각의 보안당에는 상하 60간의 대장경을 말끔히 정돈해 놓은 건물이 그것으로 이 건물의 양식은 원주의 중간부분을 가장 굵게 한 기둥의 수법이 고려건물의 특수성을 나타낸다.
  해인사의 수 차례에 걸친 화재에도 이 건물만은 재난을 면하였고 개방된 창문으로 날짐승이 침범하지 못하는 신령스러움 속에 양편에 뚫린 창문의 크기와 배열, 진열장치, 통풍, 방습 그리고 인경(印經)의 작업을 할 때 통행의 편의 등을 감안한 조상의 슬기는 생각할수록 감탄의 대상이 된다.

 

◈ 통도사
  통도사는 신라 선덕왕 인평 3년 병신(丙申)에 자장율사가 당에 가서 청량산(오대산이라고도 함)의 문수상 전에 7일 정진하고 석존의 비라금점가사(緋羅金點袈裟)와 불정골(佛頂骨), 불지절(佛指節), 불사리(佛舍利), 패엽경(敗葉經) 등을 받아와 인평 13년에 왕과 함께 취서산 아래의 독룡지반 (毒龍池畔)못을 메우고 절을 지어 금강계단을 쌓고 가져온 사리의 3분의 1과 두골 가사를 봉안하게 되었다고 적혀있다.
  자장은 당의 청량산에서 기도 끝에 문수보살로부터 가사와 사리를 얻었을 뿐 아니라 문수보살은 이를 모실 자리 즉 통도사의 위치까지도 선정해 주었다 한다.
  온 서라벌의 환영을 받고 귀국한 그는 우선 국찰 분황사에서 대승론과 보살계본을 강술하여 신라불교의 맥박을 뛰게 하였고 그 후로 유학시절 문수보살에게 지시 받은 바를 행하기 위해 신라 산야를 헤매다니다 지금의 통도사 터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구룡소에 사는 용을 하늘로 승천시키고 못을 메워 '통제만법 도제중생(通諸萬法 度濟衆生) '의 통도사 대가람을 이룩해 놓았다.
통도사의 창건설화를 뒷받침하는 예로 지금도 경내를 돌다보면 손잡이가 달린 뚜껑이 땅위에 놓여 있는데 그것을 열어보면 1m쯤 아래로 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 과연 이곳이 못을 메워 이룬 곳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통도사의 가람배치는 조금 특수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들 가람의 배치는 법당에 준하여 상,중,하 세 지역으로 나누며 이를 상로전(上爐殿), 중로전(中爐殿), 하로전(下爐殿)으로 구분하고 있다. 상로전에는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명부전, 나한전 등의 당우가 속해 있다. 중로전에는 자장 율사의 영정을 모신 해장보각과 관음전, 용화전 등의 당우를 갖추고 있고, 하로전에는 일주문부터 시작되어 영산전 까지의 만세루와 범종각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외에 보광선원은 별개로 취급하여 또 하나의 구역을 형성하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에 이르기 전에 통도사 성보 박물관이 있다. 아담한 뜰에 금강역사상이 놓여진 이곳의 성보(聖寶)들은 원래 절안의 관음전에 보관했던 것을 만세루의 독립건물에 진열장을 마련하여 전시해오다 다시 이같은 박물관을 건립, 소중히 보관,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는 석가여래의 친착가사를 비롯하여 국내 유일의 오계수호 신장도, 팔금강정(八金剛幀), 구룡병풍, 삼신정(三身幀), 달마도, 감로정(甘露幀)등이 있다. 성보를 전시한 박물관 외에 통도사의 35개의 대소 당우는 그 자체로서 건축, 회화, 조각등의 역사자료가 되고 있다.
  용마루를 한자의 고무래 '정(丁)'자 모양으로 짠 대응전도 조선 중기의 대표적 건물로 보물 144호로 지정되어 있고 용화전, 응진전, 대광명전, 관음전, 약사전, 극락전, 불이문, 천왕문, 영산전, 만세루들도 조선건축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용화전 앞 바리대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봉발탑(奉鉢塔)은 보물 471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통도사와 관련된 역사유물은 통도사에서 약4km쯤 떨어진 하북면 백록리에도 있다. 보물 74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유물은 고려 의종 때인 1085년에 만들어진 것인데 통도사의 영역을 나타낸 비로서 그 이름을 통도사 국장생 석표라 한다.
  고려시대 사찰이 소유한 토지가 많았기도 했거니와 절땅을 신성히 여겼던 까닭으로 그 경계를 구분하여 사냥이나 벌목 따위를 금지시키기 위한 석표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