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지방 민속 문화

 

 


98305003  김 정아

 

♣ 안동은...
  낙동강 반변천(半邊川)의 푸른 물줄기를 따라 안동, 영양, 봉화 땅을 누비면서 북부 경북지역을 순례하자면 낮은 언덕을 등지고 기품있게 자리잡은 반촌(班村)이 처처에 보인다. 퇴색한 고가 (古家)와 재실(齋室), 운치 있는 누정(樓亭)과 늠름한 서원(書院)들이 펼쳐 보이는 이 유서 깊은 옛 고을의 풍광은 조선시대 한 정경을 연상케 하는 명실공히 양반문화의 보고로, 달리는 차창 밖으로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답사가 된다.
  안동문화권에는 독특한 불교문화 유적도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삼층석탑이 전국적으로 유행되었지만 이 지역만은 전탑 양식을 고수하는 독자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첫째 둘째를 다투는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이 모두 여기에 건재하고 있으니 불교문화의 뿌리와 전통이 얼마나 깊은가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하회탈춤을 비롯하여 차전놀이, 놋다리밟기 같은 민속문화도 여느 지역이 견주기 힘들 정도로 잘 전승되어왔다. 서원마다 때맞추어 지내는 향사(享祀)와 내력 있는 종갓집에서 거하게 치르는 불천위(不遷位)제사는 안동문화권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무형의 문화유산이다. 이와 같이 안동문화권에 유교적·불교적·민속적 전통의 삶의 형식이 모두 보존되어왔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안동에서는 여러 갈래로 길이 뻗어 있다. 북쪽으로는 영주와 봉화, 동북으로는 도산을 거쳐 청량산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풍산을 거쳐 예천에 이른다. 남쪽으로는 일직을 거쳐 의성, 동남 으로는 길안을 거쳐 청송에 이르며, 동쪽으로는 임동을 거쳐 진보, 영양에 이른다. 이렇듯 경북 북부지방의 모든 고장이 안동과 통한다고 할만큼 안동은 이 지방의 중심지이다.
  뭐니뭐니해도 안동은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추로지향(鄒魯之鄕) 곧 '양반의 고장'으로 불린다. 그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안동이 사림의 고장으로 자리잡았고, 그 전통이 아직도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이래 안동은 살기 좋은 곳으로 여겨져 중소 지주층이 이주해 오는 수가 많았는데, 그들을 비롯해서 향리로 자리잡았던 이들이 신흥 사대부로 성장하면서 안동의 중심 사족을 형성했다. 이런 사족들의 바탕이 된 것이 조선 중기이래 형성된 동족마을이다. 안동의 대표적인 동족마을인 하회마을도 그런 내력을 지니고 있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널리 알려진 서애 류성룡을 배출한 풍산의 하회는 깊은 내력과 함께 마을의 풍광도 잘 보존되어 있어 민속마을로 지정되었다. 그 옆의 수려한 강과 산에 둘러싸인 병산서원은 많은 영남 선비들을 길러냈다.


♣ 하회마을, 하회탈, 하회별신굿
  하회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하회탈 공방을 만날 수 있다. 눈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간 양반탈로 유명 한 하회탈은 하회별신굿의 탈놀이 때에 쓰는 탈이다. 하회탈은 양반·선비·할미·초랭이·백정· 각시·부네·먹중·이매 등 9종이 전하지만 본래 12종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전해진 탈은 확실치는 않지만 고려 말엽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며 국보 제 121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려 말엽, 허도령이 탈을 깎느라고 목욕재계를 하며, 이르기를 탈이 다 완성될 때까지 절대로 방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허도령을 짝사랑한 마을 처녀 하나가 탈이 거의 다 완성 되었을 즈음 궁금증을 참지 못하여 엿보려고 방문을 살짝 열었더니 허도령은 그만 피를 토하며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때 허도령이 만들다 만 이매탈은 아직도 미완성인 채로 전승되고 있다. 방안 을 엿본 처녀도 번민하다가 마침내 죽으니, 마을사람들이 성황신으로 모시고 해마다 제를 올리게 되었고 이때부터 탈놀이가 시작되었다고 전해온다. 이 탈을 쓰고 하는 놀음이 중심이 된 하회별신굿 은 하회리·수동리·마령리에서 거행되었던 별신굿의 하나이다. 별신굿이란 3·5·10년마다, 또는 서낭신의 신탁이 있을 때 치르는, 마을의 안녕을 비는 마을제이다. 탈놀이는 제의의 일부로 서낭신 을 즐겁게 해주는 행사다. 이 지역에서는 "하회별신굿을 보지 못하면 죽어서 좋은 데로 가지 못한 다"고 할 만큼 사람들에게 일생의 큰 경험으로 여겨졌으며, 별신굿이 벌어지면 하회사람뿐 아니라 인근에서 사람들이 다 몰려와 마을은 거대한 축제의 장이 되곤 했다고 한다.
  별신굿은 음력 정초에서 대보름 사이에 벌어졌다. 먼저 산주가 서낭신에게 신의를 물어 별신굿을 할 것인가를 정한다. 굿이 정해지면 마을의 양반들에게 알리고 부정이 없는 목수에게 내림대와 서낭대를 만들게 했다. 한 해의 마지막날인 섣달 그믐날에 각 성받이 동민과 산주가 서낭당에 모여 15광대를 산주의 당내림으로 결정하고 동사에서 별신굿이 끝나는 날까지 합숙을 한다. 낮에는 연습 을 하거나 초청받은 큰 집에서 놀기도 한다.
  하회별신굿은 당내림, 탈놀이, 지신밟기, 모의혼례, 서낭제, 허천거리굿의 차례로 진행된다. 이중 탈놀이는 무동마당, 주지마당, 백정마당, 할미마당, 파계승마당, 양반·선비마당, 혼례마당, 신방마당으로 복원되어 전수되고 있다. 1928년까지 마을에서 벌이던 탈놀이는 일제가 '민족의 색체가 짙다'며 금지시켜 제대로 전수되지 못했다. 최근에야 총각 때 탈놀이에 참가한 적이 있는 이의 고증으로 복원하였으며, 중요무형문화재 제 69호로 지정되었다.
  하회 탈놀이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실제로는 하인인 광대들이 탈을 쓰고 양반이나 중의 허영과 체면을 질타하는 등 변혁적 성격도 지녔다. 또한 탈놀음의 형식이 전통 오랜 고식과 전형성을 갖추고 있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굿거리이자 민간 연희이다.


♣ 안동설화
  이 고장에는 역사적 인물에 관한 설화, 자연물관련설화, <아기장수설화>, 장자못유형설화 및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는 여러 유형의 민담과 영남지방의 시정잡배인 방학중·정만서 일화가 널리 퍼져 있다. 길안면의 용소(龍沼)는 <아기장수설화>가 간직된 곳이다. 월성이씨 가문에 아기장수가 태어났는데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가 시렁 위에 올라가 웃고 겨드랑이에 날개까지 달려 있어 집안이 멸족될 까 두려워한 부모는 의논하여 아기를 죽이고 말았다. 그 뒤 건너편 산에서 용마가 나타나 곤두박질로 물에 빠져죽으니, 이후로 이물은 하루에 세 번 색깔이 변하며 매우려 하여도 홍수가 나 메운 흙을 쓸어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아기장수를 태울 용마가 빠져죽은 곳을 용소라 하게 되었고, 월성이씨는 점차 멸망하게 되었다 한다. 이밖에도 <공민왕설화>·<풍수 남사고설화> ·<시정잡배 갈로덕섭이설화>·<용동기설화>·<우남촌설화>등이 전한다.


♣ 안동의 특징
  안동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유학의 중심이자 선비의 고장으로 이름높았다. 임진왜란 때의 두 거장인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이 이곳에서 태어나 각각 큰 전란을 맞아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전란 이후 퇴계 이황은 이곳에 도산서원을 열어 조선 유학의 큰 맥인 영남학파를 이루었다. 안동 인근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양반 기와집도 적지 않다. 흔히 말하는 '대쪽 같은 선비기질'의 본거지가 안동이 된 까닭은 이황의 뒤를 잇는 유수한 유학자들이 안동을 거점으로 경북 일원에 유교 습성을 전파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는 안동지방에서는 "대추 한 개 먹고 요기한다"거나 "열끼 굶어도 내색을 안 한다"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선비 정신이 일반 사람들에게까지 전해졌다. 요즘도 안동 시내를 걷다보면 두루마기 차림에 갓을 쓴 노인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 안동의 특산물
 
 안동의 최고 특산물은 안동포(布)다. 삼베의 일종인 안동포에 대하여 시인 이동순은 시「안동포」 에서 "남정네 하나 없는 빈 고향집/ 밤을 새며 어매는 삼베를 짰다/ 그 봄에도 낙동강은 다시 푸르 르고/ 아배는 전선에서 소식 없었다"며 전쟁의 상처를 노래하였지만, 실제로 안동포를 짜는 것 자체가 엄청난 노동이 아닐 수 없었다. 안동지방은 삼베 길쌈이 예로부터 성했기 때문에 타 지방 처녀가 시집오길 꺼릴 정도였다. 안동포가 안동의 특산물이라며 청포도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명산 이다. 그렇다고 경산 지방의 포도만큼 자랑할 만한 정도는 아니지만 안동 지방의 부수입을 알맞게 채워주는 정도는 된다. 청포도가 안동의 자랑이 된 것은 시인 이육사 때문이다. 일제 때의 저항 시인인 이육사는 안동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