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주요서원
인쇄술의 발달


(96, 황보연)

 

Ⅰ. 序 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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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는 인쇄판의 판면에 먹 또는 잉크를 묻혀 그 판면의 문자·기호·그림 등을 종이·비단 등에 누르거나 문질러 찍어내는 일, 또는 그 기술을 말한다. 인쇄판은 옛적의 목판·활자판을 비롯하여 근대의 평판·볼록판·오목판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우리 나라의 초기 인쇄는 목판인쇄에서 비롯되었다. 그 시기는 경주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무구정광대다라니경 無垢淨光大陀 羅尼經》목판권자본이 751년 (경덕왕 10) 무렵에 간행된 점으로 미루어 그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초기의 목판인 쇄는 본문 내용이 짤막한《다라니경》등의 불경을 소형판에 새겨 다량 찍어 납탑공양(納塔供養)한 데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목판인쇄는 꾸준히 발달했으며 그 유물로 1007년에 인쇄된《보협인다라니경 寶 印陀羅尼經》등이 보존되어 있다.
한편, 목판인쇄는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오직 한 책의 출판으로 국한되는 폐단이 있었기 때문에, 출판공정 의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고 필요한 책을 간편하게 찍어내어 공급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활자인쇄가 시 도되었다. 그 최초의 것은 11세기 중기에 북송(北宋)의 필승(畢昇)이 고안한 교니활자(膠泥活字)의 인쇄이다. 그러나 이것은 재 료가 흙이고 조판이 어려워 실용화되지 못하였다. 그 실패를 금속활자의 인쇄에서 최초로 성공시킨 것이 바로 고려의 주자인쇄이 다. 13세기 전기에 주자로《상정예문 詳定禮文》을 찍어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중 주자본을 다시 새겨낸《남명천화상송증도가 南明泉和頌證道歌》가 전하여지고 있다. 고려의 주자인쇄는 조선조로 계승되어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신 발 전을 하였다. 활자의 재료면에서 볼 때 동·연·철·나무·찰흙 등과 같이 그종류가 다양하며, 글자체의 면에서 볼 때는 더욱 뛰 어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본론에서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인쇄술을 주로 다루어 설명하였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신라시대의 인쇄술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Ⅱ. 本 論


1. 신라의 인쇄술 발달

우리 나라의 목판인쇄가 어느 때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인쇄문화사적인 관점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에 와서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같이 이른 시기에 그 발상을 보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겨레가 일찍부터 고도의 문 화를 소유하였기 때문이다. 신라시대에 간행된 목판본 중 오늘에 전래되고 있는 것은 1966년 10월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다. 이 경권(經卷)이 발견된 초기에는 고증에 있어서 엇갈린 견해가 제기되었으나, 학계에서는 그 간행 시기를 751년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다. 종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을 770년 무렵에 간행된 일본의《백만탑다라니경 百 萬塔陀羅尼經》으로 여겨왔다. 이《百萬塔陀羅尼經》은《無垢淨光大陀羅尼經》에서 4종의 다라니경만을 발췌, 길고 짧게 하여 도 합 8종으로 찍어낸 낱장의 인쇄물로서 초기단계의 불인·탑인의 날인방법과 같이 판목조각에 글자를 새겨 종이를 아래에 넣고 그 판으로 위에서 눌러 찍은 것이다. 글자새김과 글자체도 자못 유치한 편이다. 이에 비해《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비록 소형 목 판이기는 하나 판목에 본문과 다라나경의 경문을 완전하게 새겨서 평면으로 놓고 그 위를 문질러 찍어 목판인쇄술의 성격을 완전 하게 갖춘 초기의 것에 해당한다. 그 장정은 도서의 초기형태인 권자본이며, 판각술이 정교하여 글자체의 힘찬 필력을 제법 살려 주고 있다. 또한 먹색이 자못 진하고 묵간이 창연하다. 따라서,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서는 이《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인쇄술의 성격과 특징을 구비한 가장 초기의 목판권자본이 되며, 고졸한 가운데서 보여주는 정교도는 당시 우리 겨레의 고도로 발달하였 던 인쇄문화 수준을 여실히 입증하여준다.

2. 고려시대 인쇄술의 발달

신라 말기의 인쇄문화는 고려로 접어들자 사찰에 의하여 계승,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신라시대 인쇄의 발상 보급에 큰 영향을 끼쳤던 불교가 고려로 넘어와 국가적 종교로 승격되자, 그 진흥책이 더 강구되어 사찰이 경향각지에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났고 종파가 점차로 확장되었으며 국민전체의 신앙도 날로 높아졌다. 따라서, 사찰의 불경간행이 또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그러 나 고려는 국초부터 거란·여진·몽고의 잇따른 외침, 그리고 잦은 내란을 겪는 사이에 그간 간행된 귀중한 전적을 비롯한 숱한 문화유산들이 소실되고 탕진되어버렸다. 탑 또는 불복(佛腹) 중에 간직하였던 간본들이 오늘에 전하여지고 있을 뿐이며,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이 1007년에 간행된 총지사판《보협인다라니경 寶 印陀羅尼經》이다. 이 경은 우리 나라의 독자적인 판본으로서 중국으로부터 경문(經文)을 도입하고 그것을 새겨 탑에 안치하는 불사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실제의 판각과정에서는 그것보다 월등하게 창의성을 발휘하여 독자적인 방법으로서 정서, 정각하였던 것이다. 우리 조상들의 슬기로운 지혜가 담긴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정각본(精刻本)이며, 당시의 간본 가운데 백미임을 자랑할만하다.
고려의 인쇄술은 해를 거듭할수록 발달하였는데, 때마침 북송에서도 10세기 말기에 동양 최초의 거질대장경인《개보칙판대장 경》이 판각되었다. 고려는 1011년(현종2)에 거란이 침입하자 대장경판각에 의한 불력으로 대국란을 타개하고자 거국적으로 발원 하여, 그 판각에 착수하였다. 이것이 바로 초조대장경이며, 1087년(선종4)에 이르러 일단락을 보게 되었다. 초조대장경은 571함 6,000권으로 거질의 한역정장(漢譯正藏)이다. 그리고 초조대장경 판각술의 우수성과 자주성은 고려전기의 인쇄문화연구에 있어서 종래 소홀히 하였던 특성의 일면을 되찾는 데 새로운 전기가 될 것이다. 이후 고려는 계속하여 속장경, 재조대장경 등을 판각하 였다.
재조대장경은 몽고군의 침입으로 부인사(符仁寺)에 소장되었던 초조대장경이 1232년(고종19)에 소실되자, 다시 이를 새겨서 佛力의 수호로 몽고의 외침을 물리치고자 2차로 판각한 漢譯正藏이다. 1236년부터 1251년까지 16년간에 걸쳐 완성시켰으며, 그 경판수는 무려 80,100여 판에 달한다. 이것이 바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다. 이 재조대장경은 초조대장경을 비롯한 송본·거란 본과의 대교는 물론 각종의 불경목록까지 두루 참고, 본문의 오탈(誤脫)·착사(錯寫)·이역(異譯) 등을 논정하여 교정 또는 보수 한 다음 복각한 것이다. 따라서, 판각의 정교도는 초조대장경보다 훨씬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본문만은 동양의 어느 한역대 장경보다 우수함이 국내외 학계의 정평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끊임없이 수입하여갔으며 불교전파의 초전으로 삼아왔다. 그리고 19세기 말기부터 20세기 초기까지의 사이에 간행한 축쇄대장경(縮刷大藏經)이라든지 신수대장경(新修大藏經)등이 모두 재조대장경을 정본(定本)으로 삼고, 송본·원본·명본 등으로 교합하였다. 이들 대장경이 현재 도처에 널리 보급, 이용되고 있으 니, 고려대장경의 우수한 본문이 온 세계의 불교문화 연구 및 발전에 끼친 영향은 크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방대한 팔만대장경판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원형을 보존하고 있어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되고 있다.
고려의 속장경은 漢譯正藏에 대한 동양 학문승들의 신구찬술(新舊撰述)인 제종의장(諸宗義章)과 소초(疏 )의 장경을 말하며, 그 편찬 간행사업이 문종의 넷째 왕자인 의천(義天)에 의하여 계획, 실행되었다. 그는 1085년(선종2)에 미복차림으로 송나라에 들어가 각지를 순방하면서 장소 3,000여권을 수집하여 돌아왔고, 그 뒤 국내에서는 물론 요(遼)와 일본에서까지 두루 수집하여 4 ,000권의 장소목록인《신편제종교장총록 新編諸宗敎藏總錄》3권을 1090년에 엮어냈다. 한편 흥왕사(興王寺)에서는 교장도감(敎藏 都監)을 설치하고 보문의 오류와 결락을 바로 잡으면서 판각에 착수하였다. 그 판각의 시작과 마침, 그리고 그 규모에 관한 기록 이 문헌에 자세히 적혀 있지 않아, 그가 죽을 때까지 완간되었는지의 여부는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완간문제 가 어떻든 간에 동양 학문승들의 장소를 집대성하여 정장과 쌍벽을 이루게 한 것은 다른 민족이 감히 시도하지 못하였던 큰 업적 이라 할 수 있다. 속장경의 현존 원격본으로서는 일본 도다이사도서관(東大寺圖書館)소자의《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 大方廣佛 華嚴經隨疏演義 》를 비롯하여 다이도큐문고(大東急文庫)소자의 정원본《화엄경소 華嚴經疏》와 국내의《주인왕호국반야경 注仁 王護國般若經》등이 알려지고, 그 복각본으로서는 송광사를 비롯한 몇몇 곳에 여러 종이 전존되고 있다. 그 원각본을 인쇄문화사 적인 시각에서 살펴볼 때 판각의 독자적 성격과 우수성은 초조대장경 및 재조대장경의 正藏과 비할 바가 아니다. 속장경은 이미 간행된 책을 중간(重刊) 또는 복각(覆刻)한 것이 아니고 달필의 서예가가 판각용 정서본을 마련하여 철저하게 교감한 다음 정성 껏 초각(初刻)한 조본(祖本)인 점에서 그 특징이 부각된다. 그 판각술의 우아정교도는 당시 고도로 발달하였던 인쇄문화를 잘 뒷 받침해준다.
고려의 금속활자인쇄는 1126년 뒤 얼마 안되어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 왕릉에서 나왔다는 복활자가 1921년에 발굴 되어 덕수궁 왕궁박물관에 소장되었는데, 이 활자의 금속성분을 분석한 결과 해동통보의 것과 같은 것으로 밝혀졌다. 서체도 123 2년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기 전에 찍은《남명천송증도가 南明泉頌證道歌》의 모습을 담고 있다. 또한 강화도 피난 때《고금상정 예문 古今詳定禮文》28부를 찍었는데, 실물은 전하지 않지만 고려의 재상이었던 이규보의 문집에서 그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리 고《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은 1372년 백운화상이 지은 책으로《直指心體》라고도 하며, 이 책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로 찍은 책이다. 이 책은 조선말기 서울에 근무했던 프랑스 대리공사 골랭드 뿔랑시(Coll in de Plancy)가 귀국할 때 가지고가 현재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972년 '세계도서의 해' 기념행사인「책의 역사」전시회에 출품되어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이 책의 마지막장에는 인쇄시기인 1337년, 인쇄장소인 청주목 흥덕사, 금속 활자인쇄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서양에서 독일 구텐베르크(Johann Gutenberg)가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찍었다는「 세계의 심판」보다도 무려 70여 년이나 빠른 것으로 우리 선조들의 인류문화사상 제일 먼저 금속활자를 발명한 우수한 민족이라 는 사실이 세계적으로 인정되었다.

3. 조선시대 인쇄술의 발달

조선시대의 목판인쇄는 활자인쇄보다는 비중이 작았으나, 활자인쇄는 인출 부수에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전국에서 요구되는 책을 넉넉히 공급하여줄 수 없었기 때문에 목판인쇄가 촉진되었다. 더욱이 조선조의 건국이념인 숭유우문정책을 적극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유교경전을 비롯한 역사·시문 계통의 서적을 전국적인 규모로 펴내어야 했다. 중앙관서의 서적원 등에서 유교 경전등의 책을 찍어 냈고, 지방감영에서는 명에 의하여 책판을 새겨 중앙으로 보냈으며 고려본, 중국본, 중앙관서에서 간행한 책 을 복각본으로 발간하기도 하였다. 세조때는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한문불경과 한글로 번역한 불경을 발간하였는데 이 책이 《간 경도감본》이다. 국왕 및 왕실판은 국시에 위배됨을 알면서도 공덕을 쌓고 수복기원과 죽은이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간행한 불서 로서 정성껏 새겨 우아하고 정교하다. 서원판은 크게 활기를 띠지 못하였고, 사가판은 고려때와는 달리 불서가 거의 없고 문집, 족보등을 찍어 냈는데 자비로 값싸게 새겼기 때문에 인쇄가 거칠다. 방각본은 언제부터 책을 찍어 팔았는지 확실한 기록은 없지 만 16세기 임진왜란 이전에 서울에서 시작되어 전쟁 뒤 각 지방으로 확산되어 책이 간행되었다고 추정된다.
조선시대의 활자인쇄는 고려의 기술이 직접 이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즉 고려시대의 금속활자가 조선시대로 이어졌으나 개 국초기에는 발전을 보지 못하고 왕권이 안정된 1403년(태종3)에 주자소를 설치하고 금속활자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 대명률직해》·《공신녹권》을 나무활자로 찍어냈다. 그러다가 나무활자를 아비자로 하여 해감모래거푸집을 써서 놋쇠를 부어내 게 되었다. 1403년에 처음으로 계미자(癸未字)를 가지고 중국의 고전과 《동국약운 東國略韻》찍었다. 세종은 왕위에 오르자 민 본정치를 하려는 뜻으로 많은 책을 찍어냈는데, 활자로 찍어낸 책만도 소리·음악·아악·문학·중국문학·농사·의약·역사·중 국역사·유학·불교·교육·법전·병법·중국법·천문·수학·지리·지도 등에 걸쳐 100가지가 넘고, 나무판으로 찍은 것은 더 많다. 활자도 7가지나 부어내는 등 기술향상에도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세종은 인쇄에 매우 큰 관심을 보여 활자부어내기· 판짜기·종이만들기 기술에 대한 연구가 어느 때보다도 깊이 이루어졌다. 세종은 계미자의 뒷면이 송곳같이 만들어져 밀초에 꽂 아서 판짜는 데 어렵고 잘 움직이므로 이를 고치려 했다. 그리하여 활자의 모습을 네모나게 고치고, 사이에 대나무쪽과 종이를 끼워 넣는 방법을 고안해내게 했다. 이천·장영실·김빈등은 밀초를 별로 안 쓰고도 판을 짤 수 있게 했다. 또한 노인들을 위해 서 14 18㎝크기의 납활자를 만들어 책을 찍어내게 했으며 좋은 종이를 만들기 위해 일본의 닥나무를 기르도록 귄하고, 여러 가지 종이의 원료를 찾아내어 쓰게 했다. 활자로 찍어내는 책은 300 벌쯤 되었고, 나무판으로 찍는 책은 300∼1,000벌에 이르렀다. 책력은 해마다 5,000∼1만 벌을 찍었다. 이러한 책은 나무판을 새겨 찍었고, 지방 감영에서도 다시 찍어 나누어주게 했다.
1434년의 갑안자(甲寅字)는 조선시대에도 여러 번 고쳐 부어냈고 모자라는 글자를 더 부어내서 쓰기도 했다. 활자의 금속은 놋쇠가 가장 많이 쓰였는데, 이 놋쇠는 유기·엽전·무기를 만드는 데도 쓰였기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에는 부족할 때가 많았다. 따라서 나무활자로 직접 책을 찍기도 했고, 무쇠활자를 부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납활자는 1436년에 세종이 만들게 한 다음에는 납이 귀해서 더 쓰지 않았던 같다. 나무활자는 18세기에 이르러 성씨마다 족보를 찍을 때 많이 쓰였고, 조선 말기에도 쓰였다. 그밖에 옹기활자와 흙활자를 만들어 쓰기도 했다. 옹기활자는 찰흙을 빚어서 흙칼로 활자모습으로 자르고 길이방향으로 바늘이나 철사로 구멍으로 뚫어서 높은 온도로 구운 다음에 철사나 삼실을 꿰어서 판 위에서 움직이지 않게 고안한 것이다. 찰흙활자는 낮은 온도로 구어낸 것으로 알려진다. 그밖에 바가지활자는 급할 때, 보충하여 쓰기 위해 새겨서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금속활자로 이름난 것은 계미자(1403), 경자자(1420), 갑인자(1434), 진양대군자(병진자, 1436), 석보상절 한글자(1477), 강희 안자와 한글자(1455), 흥무정운자와 한글자(1455), 정란종자(1465), 갑전자(1484), 병자자(1516), 한호한글자(1580), 훈련도감자 (주로 나무자, 1603∼54), 현종실록자(1677), 한구자(1677), 운각무쇠자(1684), 운각나무자(1688), 기영나무자(1792), 생생나무 자(1792), 규장각자 (1792), 정리자와 한글자(1795), 장혼나무자(1810), 전사자(1815), 학부나무자와 한글자(1895) 등이 있고 갑 인자·강희안자·진양대군자·한구자들은 여러 번 되풀이해 쓰였다. 일본말 교과서를 찍은 활자로 이로파 왜언자(1492)가 있으며 몽골어·만주어·중국어를 가르치기 위한 나무판 책도 여러 가지가 나왔다. 한국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원나라를 거쳐서 타브리 즈로 퍼져간 것으로 알려지며, 종이 만드는 법은 8세기 때 고선지 장군에 의해 타슈켄트로 전해진 것으로 알려진다. 근대에 들면 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일본을 거쳐 다시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Ⅲ. 結 論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한국의 인쇄는 8세기초에 목판인쇄술을 시작으로 고려시대 금속활자인쇄술로 이어져 조선시대까지 계속 적으로 발전하였다. 목판인쇄술은 글자가 만들어지고 책을 제작할 단계까지 발달하면서 처음에는 글을 옮겨 베꼈으나 잘못 베끼 거나 줄을 빠뜨리는 일이 발생하자 목판에 새기게 되면서 발달하였다. 신라시대에 판각된《無垢淨光大陀羅尼經》을 시초로 고려 의《초조대장경》,《재조대장경》,《속장경》이 판각되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목판인쇄는 불경의 판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대내적으로는 불교국가를 이상으로 하는 신라왕조의 자주적 토대를 굳건하게 다지려는 국가정책과 영합하여 불교문화를 훌륭하게 한 데 기인하고, 대외적으로는 당시 동양에 있어서의 문명국의 위치라는 것이 불교문화의 깊이 여하에 따라 좌우되었던 만큼 국제적인 경쟁정책과 호응하여 그 문화를 더욱찬란하게 꽃피게 한 데서 말미암은 것임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활자인쇄 술은 목판인쇄보다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며 금속기술이 발달해야 했다. 이에 금속기술이 발달한 고려시대에 활자금속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활자인쇄는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여러주제분야에 걸쳐 필요한 책을 고루 찍어 널리 반포하여 학문을 발 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특히 민간에서까지 활자를 다양하게 만들어 인쇄하게 되어 서민문화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이바 지함으로써 문화사적인 면에서 그 의의가 크게 평가된다.
이러한 인쇄는 인류의 두뇌·학문·과학 및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급진적으로 발전하여 오늘날에 있어서는 전자·광선·자력 등으로 인쇄물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식 연활자가 출연하기 이전에는 오로지 목판과 활자판의 인쇄가 인류문화를 발전시 키는 원동력 구실을 하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우리 나라의 목판과 활자인쇄술은 세계에서도 인정하는 뛰어난 문화재이 다.


☞참고문헌☜


『한국사의 이해』, 송병기외, 1991, 신서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브리태니커 세계대백과사전 18』.
『한국사 6』, 국사편찬위원회, 1975, 탐구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