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佛敎美術


(97, 박은미)

 

1. 序 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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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미술이란 불교적인 것의 미술적 표현이다. 즉 이는 불교의 장엄인 것으로 만약 역사적 유산으로서의 불교에서 그 예술적 인 것의 전부를 제외한다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할 정도로 불교정신을 표현함에 있어 불교미술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왜냐 하면 불교의 본질은 심오하여 언어사량(言語思量)의 피안에 있으므로, 그를 표현함에 있어 예술적 표현을 중요시하여 왔기 때문 이다. 상식적(常識的) 사량(思量)은 분석하고 예술적 표현은 종합한다고 한다. 여기 불교는 언어불급(言語不及)의 그 진체(眞諦) 표현하기 위하여 주로 종합·직관의 예술적 표현을 하여 왔다. 예컨대 불상(佛像)은 한마디의 법문을 하지 않고 있으나 명공신장 (名工巨匠)의 지극한 정성으로 조각된 자비스런 모습에서 법문 이상의 법문을 들을 수 있게 됨이 그것이다. 불교는 과거의 역사 에 있어 미술적 표현을 중요시하였고, 미술에 의하여 그 자신을 표현하고, 미술적 표현에 의하여 그 자체를 이해시킴에 성공하였 던 것이다. 불교미술의 참뜻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고 숭배대상을 제작하여 예배하며 또 불교의식(佛敎儀 式)을 행하기 위하여 조각(彫刻)· 서예(繪畵)· 건축(建築)과 같은 시각적인 형태로 표현한 미술을 불교미술이라 한다. 이는 예 배의 대상 또는 교화활동, 불교의식의 필요에 의하여 발생, 전개되었으며 이로 인해 불교미술은 불교의 성립과 동시에 시작되었 다고 볼 수 있다. 초기의 불교미술은 불상을 대신하여 불족(佛足)이나 법륜을 그려놓고 신앙하거나 보리수(菩提樹) 등의 상징적 대상물을 예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초기의 조형예술은 신앙의 2대중심인 불탑(佛塔)과 불상(佛像)으로 귀착되어 가는데, 이들 은 불교건축과 조각의 분야에서 당탑(堂塔). 당과 탑. 전당(殿堂)과 탑묘(塔廟)
가람의 중심에 자리잡고 수많은 장엄을 필요로 하게 됨에 따라 이곳에서 차차 불교미술이 발전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372년(소수림왕2) 고구려에 처음 불교가 수용될 때 순도(順道)가 불상과 경문을 함께 가지고 왔으며, 또 375년 에는 최초의 사원 肖門寺가 건립되었고, 이는 우리나라 불교사원의 시초가 된다. 이후 백제와 신라에서도 곧 불교미술의 조형활 동이 활발해져 통일신라와 고려시대까지 또한 조선시대에까지도 불교의 발전추이 및 사회적인 변화에 함께 다양한 발전과 변화를 거듭하면서 우리나라 고미술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Ⅱ 本 論


1.建築


불교는 원래 그 자체에 독특한 건축양식을 지니지 못하였으며 또 그 발생국인 인도의 것을 고집하지도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불 교가 각국에 유전(流轉)됨에 있어서는 그 도달된 지역의 건물이 그대로 불사(佛寺)로서 전용되었다. 우리나라의 불교건축은 크게 목조건축과 석조건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또한 석조건축으로는 크게 석굴사원과 탑파로 구분할 수 있다.
(1)木造建築
목조건축은 그것들이 어떠한 양식으로 건립되었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사지의 발굴을 통해 가람배치로만 짐작할 수 있다.
삼국시대 :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불교를 수용한 고구려는 평원군 원오리사지(元五里寺址), 평암 淸巖里寺址와 대동군 임원면 상오리사지(上五里寺址) 등이 대표적인 사지이다. 고구려에 이어 백제에 있어서는 특히 건축술이 발달되어 그 당시의 장 관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신라 황룡사의 9층탑을 건립하였다는 백제의 아비지(阿非知)나 일본 초기 가람의 장엄을 통해서도 백제 의 건축술이 탁월하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는 부여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와 동남리의 폐사지 및 금강사지(金剛寺址) 등의 대표적 백제사지를 통해 알 수 있다. 백제의 가람배치는 대부분이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이 많은데 익산(益山) 彌勒寺 址는 새로운 가람배치로 조사연구가 더 필요하다.
신라의 사원건축도 대략 고구려나 백제와 많은 유사점이 있다고 추정되는데, 황룡사의 조사에서 밝혀진 당탑의 배치가 이를 뒷 받침한다. 또한 이들 삼국의 불교건축에 있어서 가람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목탑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다. 초기의 목탑 은 3국 모두 중국에서 전래한 누각형식을 따랐으며 방형이나 다각의 다층탑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생각된다.
통일신라시대 :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에 세운 사찰은 사천왕사(四天王寺)·망덕사(望德寺)·감은사(感恩寺) 등이 며, 이어 계속 고선사(高仙寺)·불국사(佛國寺) 등 경주를 중심으로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이들 가운데 고선사를 제외한 모든 사찰은 금당 앞에 탑이 동서(東西) 두 곳에 세워지는 쌍탑식(雙塔式) 가람배치임이 밝혀졌다.
고려·조선시대 : 고려는 통일신라의 가람배치를 계승하였다. 초기에는 탑에 대한 배려가 높았으나 후기로 오면서 탑이 없는 절이 많이 생겼다. 고려의 가람은 산지 일탑일금당병열식(一塔一金竝列式)과 산지 쌍탑병열식(雙塔竝列式), 산지 무탑식(無 塔式)이 혼재한다. 조선시대는 고려 가람배치의 계승과 모방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목조건축은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 조사당의 정면 3칸, 측면 4칸의
주심포. 기둥머리 바 로 위에 받친 공포(貢包)
계통의 건물로 들 수 있다. 또한 1308년(충렬왕34)에 건립된 수덕사(修德寺)의 대웅전은 같은 주심포계통이면서 지붕추녀의 곡 선, 가늘고 긴 기왓골의 섬세한 모습 등은 고려 목조건축의 우수성을 실감하게 한다.
조선시대의 목조건축도 고려시대에 도입된 주심포양식과 다포양식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 두 양식은 도입된 직후에는 순수한 양식적 특징을 서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고려말부터 서로 혼합·절충되어 한국적인 목조건축으로서의 특징을 나타 내게 되었다.

(2) 石造建築

① 石窟寺院

석굴사원은 자연적이건 인공적이건, 암석으로 이루어진 석굴을 이용하여 법당을 삼는 것을 말한다. 삼국시대의 석굴사원을 살펴 보면, 고구려를 제외한 백제나 신라에서 발견되는데 백제는 공주 남산의 남혈사(南穴寺), 망원산의 서혈사(西穴寺), 북혈사(北穴 寺)와 동혈사(東穴寺) , 서산군 태인의 마애석불과 서산의 마애삼존불을 주목할 수 있다. 신라에는 수많은 석굴사원이 조영되었 는데,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경북 월성군 단석산 상인암(上人巖)의 석굴사원이다. 또한 신라에는 인공으로 축조한 석굴사 원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경주 석굴암으로서, 석굴암의 기본구조는 전실(前室)과 주실(主室)로 이루어져 있다.

② 塔婆

우리 나라는 일찍부터 '석탑의 나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전국 도처에서 생산되는 희고 견고한 화강암을 재료로 하여 우리나 라 특유의 석탑을 조영하기에 이른 것이다.

삼국시대 : 우리나라 석탑의 발생국이었던 백제 땅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과 충남 부 여의 정림사지탑을 들 수 있다. 미륵사지 석탑은 규모가 매우 커서 일찍부터 '동양의 대탑'이라 불릴 정도였다. 다층목탑의 각 부재를 모두 석재로 대용해서 건립한 것이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미륵사지 석탑에 비하여 규모가 작아졌고 세부의 변형도 있으나 그 모범이 목탑에 있었던 사실에서 미륵사지 석탑과 같은 계통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목탑을 모방한 백제석탑과는 달 리 신라의 석탑은 분황사 석탑에서 보는 바와 같이 벽돌탑에서 그 양식을 찾을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 삼국통일의 새로운 계기를 맞아 건립된 석탑으로서는 먼저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 을 들 수 있다. 이는 신라석탑 전형양식의 초기에 속한다.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은 8세기 중엽의 불국사 삼층석탑에서 웅대한 기 단과 주체를 이루는 탑신이 조화되어서 가장 세련된 양식으로 완성되었다. 한편, 통일신라 석탑 가운데 이상과 같은 전형적인 형 식외에도 특이한 형식과 의장을 갖춘 이형탑(異型塔)들이 조성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불국사의 다보탑(多寶塔)이다.

고려시대 : 고려시대의 석탑은 신라이래 전통양식을 계승하였으나 점차 지방적인 특색이 가미되었으며, 이는 개성 이북 에 조성된 고려양식의 탑, 신라의 옛땅인 경상도를 중심으로 하는 신라탑 양식의 석탑, 그리고 충청도·전라도를 중심으로 하는 백제탑 양식의 석탑 등으로 나누어진다.

조선시대 : 조선시대의 석탑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고려말의 경천사 십층석탑과 같은 양식을 보이는 서울 원각 사지 삼층석탑이다. 이는 규모도 매우 크고 탑신 전면에 화려한 조각을 새긴 특이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2. 彫刻

우리나라 불교미술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건축에 이어 조각이라고 볼 수 있다. 불상은 불교도들의 직접적인 숭배대상이므 로, 불상 출현 이후 신앙의 중심이자 불교미술의 핵심을 이루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국시대 : 삼국시대에 제작된 불상은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낭산의 삼체석불 삼화령, 미륵삼존불 등이 있는데, 이 외에 독립된 상으로 크고 작은 금동불이 있다. 그리고 반가사유보살상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불상은 신비성(神秘 性)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반면 이 시대의 불상은 중국불상의 모방적(模倣的) 성격을 많이 지니고 있었으므로 아직 불상에 대 한 자주적(自主的)인 의지(意志)가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삼국시대에 반가상이 많이 조성되었다는 것은 미 륵신앙의 영향이 큰 것으로 이는 일부 특수층에서 불심을 자기 마음으로 하려는 자력적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통일신라시대 : 통일신라의 불상으로는 7세기 후반의 준위석을 아미타삼존불, 사천왕사지 출토 사천왕전, 황복사탑출토 금제불상, 감은사지 전래의 석조아미타·미륵보살, 굴불사 사면석불 등으로 들 수 있다. 통일신라의 불상이 이상세계를 향한 깊 은 사색을 통하여 사실적 조화미의 극치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신라인들은 불상에 대한 귀의의 감정과 불심을 스스로의 것으로 하고자 하는 조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 : 고려시대의 불상은 대작을 많이 남긴다는 사실과 눈꼬리가 길게 옆으로 돌아가는 등 괴상한 표현에서 그 특 징을 살필 수 있다. 고려불교는 선(禪)·교(敎)의 융화를 기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였으나 잠재적으로 선교의 대립은 그 뿌리가 깊 이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밖으로 나타난 고려불교의 사회적 양식은 대중불교, 의식불교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고 려 일대에 걸쳐 성행한 각종 불교의식 행사들은 그를 일러주고 있지만 이와 같은 고려불교가 요구하는 불상은 귀의감정의 대상으 로서의 불상이 주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불상의 개성미(個性美)로서는 고려불상으로서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 이라 하겠으나 일반적인 불상 조각상의 의미에서 보면 신라불상에 비하여 훨씬 뒤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 조선시대의 불상은 새로운 양식의 발전도 없고 개성미도 사라지고 그저 재래의 격식을 따라 불상을 제작하였 을 따름이라 한다. 불상에 대한 불심을 따르려는 자력적 의미도 결여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불상은 형체만 있지 그 마음은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繪畵


불화(佛畵)란 불교신앙의 내용을 압축하여 표출(表出)한 것으로 불탑(佛塔), 불상(佛像), 불경(佛經)과 더불어 불교신앙의 대상 이 되는 것이다. 불화는 불교조각인 불상과 같이 불·보살상 또는 각종 신중상, 고승대덕의 형상 등을 그리기만 하지만 고래의 전설, 교의, 신앙 등에서 주제를 구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불화는 불상과 같이 예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한편
도해. 글로 된 설명을 보충하기 위하여 그림을 넣어서 풀이함. 또는 그런 틀이나 책자
또는 장엄을 목적으로 하는 그림으로 양분되어진다. 한국의 불화는 우리나라의 가장 전통적 회화라 할 수 있다.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 불교회화는 사원의 건립과 함께 등장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삼국의 오랜 사원에는 불교회화가 봉안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고구려에 있어서는 일본에 건너간 화사들, 그 중에서도 담징(曇徵)의 영향을 받은 것 으로 생각되는 일본(日本) 법륭사금당(法隆寺金堂)의 벽화가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고구려 무용총의 공양포나 쌍영총의 행렬도 , 장청리 고분의 예불도 같은 고분벽화에서 불교회화의 소재를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에 있어서는 부소산 절터에서 발견된 사원벽화의 파편 및 무녕왕릉 유품이나 부여 능산리 고분벽화의 청장도에 나타난 연화문등에서 백제불교회화의 발달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에 있어서 금관총이나 천마총, 고령의 벽화고분, 순흥의 벽화고분등에서 발견된 연꽃무늬를 통해 당시의 화적을 다 소 짐작할 수 있다. 통일신라에서는 황룡사의 노송도(老松圖), 분황사의 천수대비(千手大悲), 관음보살도(觀音菩薩圖)와 단속사 의 유마상(維摩像)을 그린 솔거(率居)는 너무나 유명하다. 이밖에도 경주 남향사의 미륵상, 흥륜사 벽에 정화(靖和)와 홍계(弘繼 )가 그렸다는 보현보살 벽화 등이 기록에 보이고 있다.
고려시대 : 고려시대는 역대를 통하여 많은 사원을 건립하였으므로 수많은 불화가 조성되었으며 또한 불교회화의 면모를 알 수 있다. 우선 벽화로는 영주 부석사의 조사당벽화를 주목할 수 있는데 범천·제석천의 정적이고 유려한 선묘와 사천왕상의 힘찬 동적인 구성과 표현력 등은 고려불화가 지니는 격조 높은 예술성을 잘 반영하고, 아미타여래도가 있는데 중생을 제도하고 있는 아미타여래의 활기찬 모습이 화려하면서도 박력있는 필치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시대의 불화의 특징을 간단히 요약하면 재료면에서 고가의 금색을 즐겨 사용했다는 것과 그 외에도 다양한 채색을 개발함으 로써 섬세하고 화려한 이상적 불교회화의 경지를 개척하였다.
조선시대 : 조선시대의 불화양식은 고려시대와는 현격한 차이를 지니면서 조선 특유의 불교 존상화로서 정착되었다. 그 것을 고려의 불화가 국력의 뒷받침 아래 화려한 고가의 채색과 함께 감상화 위주의 불화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에 비하여 조선 의 불화는 보다 거대해지고 있으며, 평민 위주의 신앙화(信仰畵)로서 정착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조선초기의 불화는 고려 불화 에서 보이던 복잡하고 화려한 묘선이 많아 간명해 지긴 하였으나 아직도 섬세하고 우아한 화풍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는 무위사 벽화와 약사여래삼존도에서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불교회화는 새로운 양식 변화를 갖는다. 임진왜란 당시 왜인들이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다. 초토화된 사원이 그나마 다소 복구 또는 중창되어 영·정조시대에 이르러 불교미 술이 새로운 발달을 보이는데 사찰에 정해지는 대부분의 불화는 이 시기의 것이다. 고려불화가 추존과 협시보살과의 고단 구 성. 주존을 훨씬 돋보이게 그림의 상방(上方)에 부각시키고 기타의 제존은 주존의 대좌하방에 작게 배치하는 구도법
이 점차 무시되고 화면에는 보살·사천왕 등의 많은 구성인물이 등장하게 된다. 또한 색깔면에서도 변화했으며, 고려 시대에 비 해 섬세도 역시 떨어진다.

Ⅲ. 結 論


우리의 미술사를 통해볼 때 불교의 영향은 매우 컸다. 이는 소략한 문헌기록상으로나 현존하는 조형작품을 통해서도 넉넉히 짐 작된다. 다만 어떠한 미술도 그 지방의 미술이 타지역 또는 다른 나라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채 독자적으로 전승 발전하 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한국미술의 주류를 이루는 불교 미술 역시 외례종교인 불교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 의 고유사상이나 전통 속에서 조화를 이루면서 출발되었다고 생각된다. 이것이 차츰 오랜 세월 속에서 한국적 모습으로 정립된 것이므로 여기에 불교 사상의 영향은 우리 미술 전반에 걸쳐 끈질기게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불교미술은 4세기 후반 불교의 도 입과 함께 신앙대상의 요청에 의해 급속도로 발달되었다. 그것은 멀리 북쪽의 고구려에서부터 시작하여 반도의 중앙 백제에 전파 되었고, 신라는 가장 늦게 수용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유물은 백제와 신라의 구토에 치우쳐 있고, 또 그 대부분이 신라의 영 토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는 통일의 영광이 신라에 돌아갔다는 사실로써 이해된다. 이는 결코 지리적 인성의 문제만 으로 돌릴 것은 아니고, 오히려 신라가 지니고 있었던 종교적 사상성에서 그 영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신라는 미륵이란 이상적 부처를 인간의 생활속에서 발견하려 했고, 또 이를 정립하여 나갔다. 이와 함께 반도 내에서 일찍부터 그 자리 를 형성했던 불교 미술은 실로 불교가 지니고 있는 깊은 사상성에 의해 차츰 그 자산을 장엄했고, 오늘날 우리 민중의 가슴속에 흐르고 있는 한국적 미의식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즉 조형문화재로서의 불교미술에는 한국적 맛을 풍기고 있 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한국의 불교미술』, 장춘식, 1997, 민족사.
『한국의 불교미술』, 홍윤식, 1996, 대원정사.
『한국민족 대백과 사전』, 1991, 한국정신문화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