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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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사 유 적(先史遺蹟)

(97, 김모모)


Ⅰ. 序 論


원시사회에 대한 연구는 한반도에 인류가 나타난 때부터 최초의 고대국가 성립 직전까지를 시간적 대상으로 하는데 이와 관련 된 문헌자료가 거의 없다는 특성 때문에 대개 고고학적 접근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결과 역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원시사회에 대한 연구는 주변적인 것 또는 역사학 교육의 영역을 벗어난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원시사회에 대한 이해의 개괄적인 틀이 만들어진 것은 최근의 일이라 해방이후 1950년대까지는 일본인 연구자들이 연구성과를 답습한 주장들이 한국사 개설서에 실리는 수준이었고 고고학이라는 학문분야의 정체성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 변화하였다. 한반도에는 구석기와 청동기가 없었다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남북한 학계는 각기 거의 비슷한 시 기에 극복할 수 있었다. 비로소 원시사회 각 단계의 공백이 메워지고 대략적인 윤곽이 잡히게 됨으로써 1970년대 이후 특히 1980 년에 들어와 국토 곳곳에서 대규모 토목공사가 진행되면서 수많은 유적들이 기초적인 조사조차 거치지 못한 체 인멸되어 버렸으 나 한편으로는 비교적 대규모의 규제 발굴이 진행되기도 항 상당한 자료의 축척이 이루어지는 명암이 교차되었다. 이때부터 원시 사회에 대한 연구는 질적 양적으로 엄청나게 팽창하면서 본궤도에 진입 할 수 있었다. 발굴 건수가 증가, 전문 인력의 증대, 새 로운 이론과 방법론의 수용, 전반적인 편년체제의 수립 등이 이루어졌다.

Ⅱ. 本 論

1.구석기문화

구석기시대의 유적·유물이 새로이 발견되면서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1960년대 초의 일이다. 이를 시작으로 30 년간의 중요한 사건을 보면 1960년대 초의 새로운 구석기 유적의 발견, 1972연초의 덕천(德川) 승리산(勝利山) 유적에서 최초의 고인류 화석의 발견 그리고 1978년에 있은 전곡리 유적의 발견과 1980년대 초에 있은 북한 용곡동 유적에서 중기 홍적세 고인류 의 출현 정도일 것이다. 이렇게 구석기 연구역사는 매우 짧은 편이지만 그간 한반도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적의 수는 약 30여 개 소에 달하며 그중 전기 구석기에서 후기 구석기에 속하는 유적이 모두 발견되어 구석기 시대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중 그 유적의 성격이 파악되어진 대표적인 구석기유적으로는 함경도 웅기군 굴포리 유적, 평양 상원 검은모루 유적,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충남 공주군 석장리, 덕천 승산리 유적, 충북 제천군 점말동굴등이 있다.

함경도 웅기군 굴포리유적은 해방 이후 최초로 한반도 내에서 구석기가 발견된 곳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또한 구 석기에서 청동기에 이르는 층위가 중첩되어 있다는 점과 구석기문화에서도 2개의 다른 문화층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고고학적인 가치가 크다. 발견된 도구로는 긁개와 조각기 등의 석영제, 각혈암제 박편석기가 출토되었다.

평양 상원 검은모루유적은 그것의 연대가 40-60만년 전으로 발표됨에 따라 우리나라 역사의 상한선이 종래 생각했던 것보 다 수십 만년 상회한다는 의미에서 중요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여러 종류의 뗀 석기와 함께 수많은 홍적세 동물화 석이 발견되어 전기 구석기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제시되었다. 뗀 석기는 모루떼기 또는 직접 떼기 기술로 제작되었다. 동물화석 으로는 삼림성 포유류가 절반 이상이고 그 다음으로 초원성 또는 삼림초원성이 많다. 상원큰사슴, 상원갈밭쥐, 상원말 등 고생물 중에서 처음 발견된 종류도 포함되어 주목된다. 물소, 원숭이, 큰쌍코뿔소, 코끼리 등은 당시의 기후가 현재보다 더웠고, 습윤 하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들은 홍적세중기 초인 약 50-60만년 전으로 추정된다.

경기도 연천 전곡리유적에서 몇 개의 타제석기발견을 계기로 한반도는 세계학자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되었다. 왜냐하 면 여기서 채집된 석기 중에는 동아시아에서는 매우 발견사례가 드문 아슐리안계통의 주먹도끼와 가로날도끼가 선을 보였기 때문 이다.

충남 공주군 석장리유적은 남한에서 발견된 최초의 구석기유적으로 국민의 관심을 끌었다. 이곳에서는 전기·중기·후 기의 구석기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전기.중기에 속하는 하위 층에서는 찍개문화전통의 석영제 석기가 출토되었다. 중기 구석기시 대에 속하는 것으로는 석장리 중위 층이 대표적으로 여기서는 긁개, 조각개 등 박편석기 계통의 석영제, 반암제 석기가 주체를 점하고 있다. 후기 구석기문화는 새기개·밀개의 석재가 다양해지고 특히 정교한 석기를 만드는 데 적합한 고운 입자의 석재를 선택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또한 주거지 내에서 예술품 및 동물의 털이 출토되었다.

덕천 승리산 동굴유적에서 동물화석은 168마리분 908점의 화석을 분류하여 25속 31종의 동물을 밝혀내게 되었는데 이 중에서 11종이 절멸 종으로 전체의 36%정도에 이른다. 2개의 어금니와 1개의 견갑골을 가진 인류화석은 고형(古型)의 호모 사피 엔스로 보이며 '덕천인'으로 명명되었다. 그 외에도 체질상 완전히 현대인으로 진화한 인류가 출토되었는데, '승리산인'으로 불 린다.

충북 제천 점말 동굴유적은 발견당시까지 북한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었던 홍적세 동물화석 유적이 남한 지역에서 발견 되었다고 하는 사실이 중요하다. 45종의 동물 잔존물이 확인되었는데, 이중 16종 즉 35.5%가 이미 절멸된 것이다.

2.신석기 문화

신석기시대 연구는 그 시작을 1910년으로 잡아 지금까지 약 80년의 연구사를 가지고 있다. 신석기시대 연구는 처음에 일본인 학자의 발굴조사와 연구에 의존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1945-1970년은 일본인 학자의 손에서 우리 학자의 손으로 넘어왔고, 1970 년부터 신석기 연구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기틀을 잡아가게 되었다. 또한 신석기 시대 편년을 체계화한 논문이 잇따라 나오게 되고 보다 체계적인 방법으로 신석기 유적의 발굴이 이루어지게 되며 연구주제도 다양화되었다. 1980년대부터는 방사성 탄소 연 대 측정 자료에 의한 한반도 신석기 시대 편년이 잡혀가게 되며, 「한국사론」을 통하여 신석기시대에 관한 연구가 체계화되고 중요한 연구 논점들이 정리된다. 신석기 시대유적의 수는 약150개소에 이르고, 한반도 전역에 균등하게 분포되어 있지는 않고, 주로 대동강·한강유역 및 그 인접도시를 포함한 서해안지역, 두만강유역을 포함한 동북해안지역, 그리고 낙동강 유역을 포함한 남해안 지역등 세 개 지역에 밀집 분포되어 있다. 이들 각 지역군 사이에 문화양상의 차이 또한 적지 않다.

서해안지역에는 토기의 기형이 곧은 아가리와 뾰족 바닥으로 이어지는 포탄 모양의 뾰족밑토기가 주류를 이룬다. 이곳 토기를 서한첨저유형토기(西韓尖底類型土器)또는 서한토기(西韓土器)라고 불린다. 서한토기는 표면에 장식무늬가 아가리부분, 몸체부분 그리고 바닥 가까운 부분 등 각각의 몸체부위에 따른 장식무늬의 유무와 무늬의 조합관계에 따라 3기로 뉘어진다. 제1 기는 B. C 5000-3500년, 2기는 B. C 3500-2000, 3기는 B. C 2000-1000년까지이다.

동북해안지역의 토기는 그릇형태에 있어 예외 없이 납작바닥인 점이 특징이다. 이곳 토기를 동한평저유형토기(東漢平 底類型土器) 또는 동한토기(東漢土器)라고 불린다. 이 토기는 함북 웅기군 서포항유적 발굴조사에서 층서적 상하관계가 잘 나타 나 있으므로 그에 따라 1기에서 5기로 세분되면 1기는 B. C 5000년경에서부터 시작되어 B. C 1000년까지 계속되었다.

동북지역과 남해안지역으로 연결하는 중간지점에 위치한 오산리유적의 조사는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이곳 은 한국 신석기시대 유적으로서는 이례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여러 개의 신석기퇴적층이 층서적 상하관계를 이루고 있고, 각 층에서는 각 지역의 특징적인 뾰족밑·납작밑·덧무늬토기 등이 출토되고 있어 비단 동해안 선사문화의 구명뿐만 아니라 한국 신 석기문화의 전반적인 흐름을 파악하는데 유용한 잠재력을 지닌 것으로 판단되었다. 오산리 하층에서는 종래 베일에 싸인 신 자료 가 출토되었을 뿐 아니라 주변지역과의 관계규명에 중요한 단서가 제시되었다. 이곳에서 점과 선을 배합하여 상반부에만 국한하 여 장식한 무늬 장식토기류와 함께 민무늬토기류가 출토되었는데, 민무늬토기류는 수적으로 우위를 차지한다. 바닥에는 활엽수의 잎맥이 분명히 찍혀 있는 것이 많다. 이처럼 그릇 바닥에 잎맥이 찍힌 것은 세계의 신석기 지역 중 시베리아의 연해주 및 일본 열도 등 동아시아 태평양연한 지역에만 국한되어 출토되는 것이 주목된다.

남해안 지역에 있어서는 부산시 영도 섬이 있는 동삼동유적이 중요하다. 여기서 나타난 층서 관계를 기준으로 볼 때 토기군 상호간의 특성을 달리하는 여러 종류가 5기로 세분되는 각분기의 주체를 이루고 있다. 이들 토기를 일괄하여 남한 유형토기(南韓類型土器) 또는 남한토기(南韓土器)라고 불린다. 이것은 B. C 5500년에서 B. C 1000년까지 지속되었다.
신석기시대의 생활경제는 대부분의 유적이나 강가나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나, 석기의 주종이 어구(漁具)류라는 점에 서 어로(漁路)에 의존하였음을 알 수 있다. 후기에 들어서면서 농경이 시작되었지만 그 이전은 채집경제라 할 수 있으므로 필요 한 탄수화물의 공급원으로는 도토리가 큰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도토리가 확인된 신석기시대 유적으로는 암사 동,미사리,오산리 등이 있다.

서울 강동구 암사동유적에서 수십 채의 움집터가 확인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것이 우리 나라 신석기시대 연구상 얼마나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가를 보여준 중요한 유적이다. 한강의 가는 모래토적층에 있는 이 유적은 현 강변을 따라 기다란 취락지 군을 형성하고 있다. 이곳에는 두 개의 수혈저장시설, 네 개의 적석유구, 두 개의 화덕자리가 있고, 이밖에 빗살무늬토기편 약 3 000개, 뗀 석기 30개, 뼈파편 및 고종자 약간이 채집되었다. 또한 암사동 빗살무늬토기의 양상은 같은 시기의 다른 지역과 비교, 또는 빗살무늬토기 상호간의 시기적 선후관계 구명에 중요한 기준자료로서 활용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층서적 상하관계 자 료뿐만 아니라 이제껏 이곳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저장고시설이나 공동취사장시설이 확인됨으로써 당시 생활양상 구명에 새로운 지식이 제공되었다. 또한 이번에 발굴된 토기류를 통하여 이지역 신석기초기 단계의 토기양상 구명에 기준적 자료를 얻었을 뿐 아니라 이를 통한 당시의 규율·습관의 일면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경기도 하남 미사리 일대에 위치한 이곳은 조사결과 유적이 신석기시대로부터, 청동기시대, 원삼국시대에 걸친 집단취 락지였음이 확인되었다. 즉 이곳은 복합유적이다. 유적이 있는 한강 중류일대는 강안을 따라 해발 50m 내외의 나지막한 야산 또 는 구릉이 이어지고 있으며, 이들 구릉과 야산 사이에는 여름철의 집중호우로 인하여 주변 화강암산야의 풍화토가 퇴적되어 형성 된 충적평야가 발달해있다. 이러한 지형적인 조건으로 이 일대는 농경에 유리한 비옥한 농토를 이루고 있는데 ,현재에도 많은 부 락이 들어서 있다.


3.청동기문화

청동기시대란 인류가 처음으로 청동주조 기술을 알게 되어 청동기를 생산하게 됨으로써 인류문화 발전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 게 되고 그 이전의 석기시대와는 본질적으로 구분이 된 시대이다. 이러한 청동기 시대를 일제시대는 석기시대에서 바로 철기 시 대로 뛰어 넘었다는 주장이 지배해왔다. 그러나 1950년대 북한에서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 토기와 성격이 다른 소위 무문토기가 출토되어 청동기시대의 주장이 대두되었다. 1914년과 1917년에 두 차례에 걸쳐 김해 패총이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이 당시 금석병용시대라는 모호한 개념이 설정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부터 앞에서 말한 북한의 토기에서는 그 개념이 부정되었고, 남한 에서는 1960년대에 들어와 비로소 일제시대의 금속병용시기의 개념이 폐기되고 청동기 시대 개념이 설정되었다.
한국의 청동기문화는 중국의 수원-요령지방, 나아가서는 시베리아 지역의 미누신스크 청동기문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안드로노보, 카라스크, 타가르기로 이어지는 미누신스크 청동기 문화중 카라스크문화(B. C 1200-700)는 몽골계의 농경문화로 청 동단검, 청동단추 등의 청동기가 대표적이며 무덤양식으로는 돌널무덤을 채용하였다. 한편 타가르문화는 돌로 덮은 나무 곽을 무 덤으로 이용하였고, B. C 4세기경에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들 청동문화는 B. C 7세기경에 이르러 수원 청동문화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주(周)를 동천(東遷)시키기까지 하면서 만주·몽골일대에 타가르-스키타이-오르도스계통의 북방청동문화를 퍼뜨 렸다.
한편 요동지방에는 일찍이 카라스크문화의 영향을 받아 비파형의 독특한 청동단검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가 번성하였다. 이중 대표적 유적인 남산근 유적에서 서주 말, 춘추 초의 청동기가 출토됨으로써 그 연대가 B. C 8-9세기에 해당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 그런데 한반도 내에서 이러한 비파형의 요령식 동검이 발견됨으로써 이 지역과의 관련성뿐만 아니라 청동기시대의 상한설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따라서 이상 두 지역과의 관계를 고려해 볼 때 현재까지의 자료로는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대체로 B. C 10세기경부터 시작되 었다고 볼 수 있다. 이때부터 청동기의 유입과 생산이 점차 본격화되면서 B. C 3세기에 접어들어 한국식동검이라 할 수 있는 세 형 동검이 완전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새로이 철기가 청동기를 대체해가기 시작하였다.

Ⅲ.結論


선사유적에 대한 의문을 노력으로 점차 베일이 벗겨지고 있지만 아직도 문제점이 많다. 구석기에는 덥고 습윤한 것을 화석의 발견으로 알아냈으나 비슷한 시기 지질 층의 중국과는 자연환경이 다르게 나왔다. 신석기 시대에서는 토기형식을 가지고 그 동안 신석기의 편년을 하였지만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치와 패총의 동일 층위에서 공반되는 토기 형식의 다양성을 무시했다. 청동기 시대는 진정한 청동기 시대라면 자체 내에서 주동이 시작되어 장인집단에 의한 생산이 이루어져야하고 그것이 보편적으로 사용되 어야 하겠으나 당시의 청동기란 금속 자체가 귀중한 물품이고 또한 신분에 관계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 소유의 한계가 극히 제한 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문제점을 풀고, 각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내적인 충실한 연구와 발굴이 필요한 것과 같이 인접지역의 연구도 병행되어야 우리 문화의 진정한 계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 고 문 헌☜


『韓國先史考古學史』, 崔夢龍외, 1992, 까치출판사.
『舊石器遺蹟』, 崔武藏, 1986, 例文出版社.
『韓國古代文化의 흐름』, 임효재, 1992, 집문당
『한국역사입문』, 한국역사연구회 엮음, 1995, 國史大事典 民衆書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