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거리 및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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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건진국시와 헛제삿밥


(93, 이종선)

여행이건 답사건 집을 떠난 사람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어디 가서 잘 것인가이고 그 다음 문제는 무얼 먹을 것인가이다. 그러 나 기왕지사 향토식을 맛보고자 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니라 때론 큰 기대가 된다. 그런데 경상도 음식은 짜고 맛없다는 사실은 경상도 사람만 모르고 전국이 다 아는지라 경상도 답사에서는 애당초 기대할 것이 없는데 그래도 '능교형'보다는 '니껴형' 음식 이 맛깔스러운 데가 있고 같은 '니껴형' 중에서도 안동에는 향토음식이 따로 있어서 그것이 이 지역답사의 한차례 먹거리가 된다 . 여기서 '능교형'과 '니껴형'에 대한 어휘 풀이를 해보자면, 경상도 방언의 “했능교?”와“했니껴?”라는 어미차이로 지역구분 을 나누어 소개한 글이 언젠가 『영남일보』에서 「'능교형'과 '니껴형'의 지역분포」라는 아주 재미있는 학술기사로 소개된 적 이 있다. 능교형과 니껴형이라는 말은 여기서 처음 나온 말이다. 능교형의 대표지역은 대구이고 니껴형은 안동을 비롯한 예천, 의성, 영양, 봉화, 영주 등이다.
법흥동 임청각에서 굴다리로 철뚝을 빠져 나오면 바로 눈앞에는 안동댐 보조댐이 나타나고 댐 건너편 산자락으로는 민속박물 관과 민속경관지가 있는데, 안동댐으로 수몰될 운명에 있던 건물 중 예안의 선성현(宣城縣) 객사(客舍), 월영대(月映臺), 석빙고 같은 준수한 건물들을 옮겨 놓았고 까치구멍집, 도툼마리집, 통나무집 같은 안동지방의 민가들도 옮겨와 야외 건축박물관을 만 들면서 바로 그 민가에서 안동의 향토음식을 팔고 있다. '죽은 집'이 아니라 '산 집'으로 그렇게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안동 답사 때면 여기 와서 헛제삿밥이든 건진국시든 안동의 향토식을 한 그릇 들고 가는 것도 좋을 듯 싶다.
건진국시는 건진국수의 사투리로 밀가루와 콩가루를 거의 같은 비율로 섞어 반죽해서 푹 삶았다가 국수가 물위에 뜨면 건져서 찬물에 헹구어 식혀낸다. 그래서 건진국수라 한다. 찬물에 받아낸 국수는 은어 달인 국물에 말고 그 위에 애호박을 썰어서 기름 에 볶은 꾸미를 얹은 다음, 다시 실고추와 파, 지단을 채썰어 고명으로 얹는다. 그 담박한 맛은 그야말로 양반음식이라 자랑할 만하다. 특히 안동 국수는 조밥 한 공기와 상추쌈이 함께 나오므로 매끈한 국숫발과 거친 조가 서로 맛을 돋우며 국수만 먹으면 배가 쉬 꺼져 허한 것을 보완해 준다. 그래서 안동 사람들은 타지역 국수를 먹고 나면 항시 서운타고 말하곤 한다.
헛제삿밥도 별미 중 별미이다. 본래 제사지낸 다음 음복하던 제삿밥을 그대로 밤참으로 애용하여 왔는데 요즘은 헛제삿밥이라 하여 별미음식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제사도 지내지 않고 향냄새를 배게 하여 먹는 제삿밥이라고 해서 헛제삿밥이라고 하는 것이 다. 헛제삿밥은 일종의 패스트푸드여서 사람마다 찬이 따로 나오는데 나물이 큰 반찬인지라 콩나물, 숙주, 도라지, 무나물 무침 등이 철 따라 서너 가지씩 나온다. 산적으로는 쇠고기, 상어, 문어가 오르며 탕국으로는 무(안동에서는 무꾸라고 한다)를 네모나 게 썰어 넣고 끊인 쇠고깃국이 나온다. 그런데 안동 헛제삿밥은 탕국이 사람마다 나오지 않고 상에 하나만 나와 시원스레 들이마 실 수 없다.
헛제삿밥에는 간고등어가 성냥갑 반만하게 썰어 나오는데 이것이 또한 안동의 별미다. 본래 특산품이란 생산지에서 만들어내 는 것이지만 반대로 소비지가 역창출하는 예외도 있다. 간고등어가 바로 그런 대표적인 예다. 간고등어는 생산지는 별로 중요하 지도 따지지도 않지만 안동에 와야 많고, 또 안동시장에 와야 제맛나는 것을 구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안동은 내륙 중의 내륙인지라 뱃길이 닿지 않아 냉동시설이 없던 옛날에는 생선을 구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고등어에 굵은 왕소금을 잔뜩 뿌려 절여서 가져와야 상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 그렇게 만든 자반고등어는 안동 사람들의 밑반찬으로 애용되어 반의반 토막을 썰 어놓고 온 식구가 밥을 다 먹기도 한다. 전라도 음식으로 치면 밥맛 돋우는 젓갈 구실도 하는 셈이다. 그 간고등어 중에서도 뱃 자반이라고 해서 배에서 금방 잡은 싱싱한 놈을 곧장 소금에 절인 것은 진짜 별미이다- 대구에서는 이를 제자리간이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여기에 입맛을 길들인 안동 사람은 간고등어가 없으면 서운해하며 안동에만 틀어박혀 산 사람들은 생선은 간고등어 외엔 없는 줄로 알고 자란다.
안동의 향토음식 중 또하나의 진미로는 식혜를 꼽을 수 있다. 안동식혜는 보통 식혜와는 달리 찹쌀을 쪄서 여기를 물에 삭힐 때에 고춧가루를 헝겊에 싸서 넣어 붉게 물들이고, 무를 채썰거나 납작하게 썰어넣는다. 정월에 차게 해서 먹는 것이 좋은 전통 음료다.
안동은 유교문화의 본터인 양반고장이다.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보수적이어서 이 지방의 음식에는 옛날의 전통이 그대로 남아 있는 듯하다.


외골수 안동 양반

(93, 하세용)


경북 북부 특히 안동 일대의 퇴색한 고가와 재실, 운치있는 누정과 늠름한 서원들이 펼쳐 보이는 유서깊은 옛 고을의 풍광은 조선시대 한 정경을 연상케 하는 명실공히 양반문화의 보고로서의 모습을 여전히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이 지역을 안동문화권이라고 일컬으며 양반문화권으로 축약시키도 하지만 전통의 현재 생명력을 감안한다면 규모로 가 치를 판가름 할 수는 없다.
서원마다 때맞추어 지내는 향사(享祀)와 내력있는 종갓집에서 거하게 치르는 불천위(不遷位 : 4대 조상이전의 사회적으로 저 명한 조상의 제사, 제사는 원래 4대 이전은 모시지 않는다.)제사는 안동문화권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무형의 문화유산이다. 이와 같이 안동문화권에 유교적·불교적·민속적 전통의 삶의 형식이 모두 보존되어왔는데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북부 경북 지역은 흔히 양반문화의 보고로 불려지기도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 독특한 불교문화의 유산을 지니고 있다. 통일신 라시대에는 삼층석탑이 전국적으로 유행되었지만 이 지역만은 전탑양식을 고수하는 독자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첫째 둘째를 다투는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이 모두 여기에 건재하고 있으니 불교문화의 뿌리와 전통이 얼마나 깊은가 알 수 있다. 뿐만아니라 하회탈춤을 비롯하여 차전놀이, 놋다리밟기 같은 민속문화도 여느 지역이 견주기 힘들 정도로 잘 전승되어왔다.
이런 여러방면에서의 전통을 고수할 수 있었던 힘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바로의 다른 지역과의 차별성을 지닌 양반의 성격이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역의 양반은 유달리 고집이 세고, 쉽게 꺽이지 않는 성격을 어려서 부터 교육 받는다. 그 교육내 용은 유교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조선 성리학의 태두인 퇴계선생과 그의 제자들은 이 지역을 학문적·정치적 친정집으로 삼고 조선왕조를 이끌어 갔으며 타 지역과는 다른 자긍심을 갖게 되면서 안동을 중심으로 한 독특한 양반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북부 경북문화권은 거출한 인물들의 관향(貫鄕)으로서, 또한 그들의 학문연구의 중심지로서 서원이 발달하였고 조선 유학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특히 안동 옆의 예안은 조선 유학의 대가로 군림하고 있는 퇴계 이황 선생의 고향이며, 말년에 학문 연구의 요람이었던 도산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퇴계 선생은 이 지역의 양반 문화권을 형성시킨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 데 그의 세계관과 생애를 살펴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퇴계선생의 이론은 조선 성리학의 초석이 되었고, 퇴계 선생의 이론의 분파가 가져온 조선의 정치적 소용돌이를 생각한다면 무척 큰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 분파중의 일부가 안동지역을 중심 으로 이른바 양반문화로 일컬어지는 이 지역의 색깔을 만들어 갔던 것이다.
퇴계 선생의 일생을 간단히 살펴보자면, 선생은 1501년 예안 온계리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일곱 달 만에 아버지를 여의어 홀어머니의 밑에서 자라났다. 타고나기를 학문을 좋아하여 선친의 책을 밤낮으로 읽었다한다. 자라면서 12세때는 숙부에게 논어 를 배웠고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며 스물살에는 벌써 주역을 홀로 탐구했다. 이때 건강을 해쳐 소화불량으로 평생 고생하 고 채식만 했다. 스물한살에 결혼하고, 스물셋에는 서울로 올라가 과거를 공부했는데 과거에 세 번이나 떨어져 크게 자책하다가 이 때 심경(心經)이라는 책을 읽고 크게 깨친바가 있었다. 결국 스물일곱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서른세살에 문과에 합격하여 외 교문서를 다루는 승문원 관리가 되어 비로소 벼슬길에 나서게 됐다. 과거 공부에 열중하는 동안 가정에는 부인이 둘째 아들을 낳 고 산후조리를 잘 못해 세상을 떠났고 전처 사후 3년 뒤 재혼을 하는 변고가 있었다.
이후 퇴계는 관리로서 출세길을 걸어 42세 때는 암행어사가 되고 43세엔 성균관 대사성에 이른다. 그 사이 모친상을 당해 고 향에 잠시 돌아온 적도 있었지만 평탄한 길이었다. 그러나 퇴계는 날이 갈수록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만 전념하고 싶어했다. 사 표가 수리되지 않아서 불려가 관직에 머무르기를 한 5년 더 하는 동안 무고로 관직이 박탈됐다가 복직되기도 하고 둘째부인마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다. 46세 때는 고향 시냇가에 양진암(養眞唵)을 짓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한다. 이때 토계(兎溪)를 퇴 계로 고치고 퇴거(退居)의 뜻을 다졌다. 그러나 48세때에 단양군수로 발령받아 다시 나갔고 이어 풍기군수가 되며 이때 조정으로 부터 백운동서원의 지원금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고 지방교육기관으로서 서원제도를 확립하는데 결정 적인 공을 세웠다. 그리고 군수직을 사직하고 50세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한서암(寒棲唵)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57 세에 도산서당을 짓기 시작하여 61세 때 완공했다. 이에 덕망 높은 학자로 전국에 알려져 각지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찾아와 가르 침을 받았다. 제자인 기고봉과 8년간 논쟁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은 퇴계학문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거듭되는 조정의 부름을 단호히 뿌리치지 못해 공조판서, 예조판서를 거쳐 69세에 우찬성이 될 때까지 부임과 사퇴를 거듭했고 물러나서는 도산서당에서 학문의 탐구와 교육에 힘썼다. 그리고 1570년, 70세로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성리학자로서, 뛰어난 이론가로서 『주자서절요(朱子書絶要)』, 『송계원명이학통론(宋季元明理學通論)』, 『심경후론( 心經後論)』, 『성학십도(聖學十圖)』 등을 지었고, 교육자로서 서애·학봉·월천·한강 같은 직접 제자와 율곡 이이 같은 간접 제자를 무려 360명이나 배출했으며, 빼어난 시인으로서 도산십이곡 (陶山十二曲), 매화음곡(梅花飮酒詩) 등 2천여 수를 남겼다.
그의 학문의 명성과 후학들의 지역 지배력은 무척 컸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양반다운 행세를 하려면 퇴계의 학문을 바탕으로 한 석학이 되든지 퇴계와 혈연적 관계가 있어야 양반으로서의 존중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퇴계 선생의 행적처럼 관직보다는 학문 탐구에 열중하는 양반으로서의 자세를 보여주어야 했다.
그뒤 학봉(鶴峯) 김성일(金成一) 선생과 서애(西 ) 류성룡(柳成龍) 선생은 퇴계 선생의 가장 큰 두 제자로 꼽혔고, 그 둘의 제자들 사이의 대립은 이 지역의 성격을 읽을 수 있는 많은 사건을 일으켰다. 예로 3차에 걸쳐 일어난 병호시비는 학봉과 서애를 좀더 퇴계선생에 접근 시킬려는 제자들의 대립을 보여준 것인데 자존심과 체면 싸움은 의성 김씨와 풍산 류씨의 집안 싸움뿐만 아니라 안동 유림 전체가 이 시비에 휘말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 사건은 분파의 싸움이 아니라 고집의 대립이었다고 할 수 있 다. 안동 사람들을 안동 갑갑이, 안동 답답이, 안동 외고집, 똥고집 등으로 부르는 이유를 여기에서 엿볼 수가 있다.
흔히 안동 지역의 양반을 현실해결능력이 없는 비생산적인 계층으로 몰아가는 경우가 많다. 특히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떠 올리며 그들을 매도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렇지만도 않다. 조선 말 세도정치의 주인공들은 같은 안동 김씨이긴하되 그 시대 에 안동 지역에 남아있던 안동 김씨들하고는 많이 다르다. 안동 김씨는 先안동과 後안동으로 나뉘어 지며 서로 시조가 다르다 후 안동 김씨들이 서울의 장동(壯洞)에서 크게 번성한 장동 김씨들이며 그들이 바로 세도정치의 주인공이다.
안동 양반에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세조찬탈 또는 무오 갑자사화 때 수절(守節)하여 낙향한 사람들이 많다는 점, 둘 째 문중의 중흥조는 본인이나 그 자체가 문과에 올라 가문을 빛낸 사람들이라 점, 셋째 문중에 퇴계의 문하생으로 석학이 된 분 이나 넷째, 임진·병자 양란 때 의병을 일으킨 분이 있다는 점 등, 공통적 성격이 있는데 네가지 모두를 갖추고 있거나 적어도 한가지는 가지고 있어야 이 곳에서는 양반이었다.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정국이 노론 전권시대로 들어가면 안동의 퇴계학파 남인계열은 출세의 길이 끊어지면서 오직 학문만으로 는 자신들의 위세를 유지할 수 없었고, 경제력도 많이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양반일 수 있는 근거는 위의 네가지에 여전 히 기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네가지 공통점을 내새우며 양반으로서 위치를 유지해가고 있었다.
특히 퇴계 선생이후의 풍토 즉, 관직의 획득보다는 진정한 학문의 탐구로의 자세는 여전히 그들의 의식속에 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제시대 항일의병과 애국계몽운동,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이며 세상에 대고 큰 소리쳤던 것이다. 안동 양반들은 언 제나 당당했다. 안동 출신 항일의병에는 권세연, 김도화, 김흥락, 강육 등이 있었으며 협동학교를 설립하면서 애국 계몽운동을 일으킨 석주 이상룡, 일송 김동삼, 동산 류인식이 혹은 상해로 혹은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벌였고, 일본 궁성에 폭탄을 투척 한 풍산 김씨 김지섭 열사와 항일시인 이육사를 비롯하여 일일이 열거 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것이 안동 양반의 자부심이고 자랑인 것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 몸바쳐 나라를 도운 사람들에게 물질적 보상보다 더 크게 돌아가는 것은 자긍이며, 그런 긍지 속에서 안동 양반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지켜나가는 것에 대해 당당하고 떳떳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전통고수에 대한 고집은 선조에 대한 자부심과 그들의 애국활동이 더욱 빛을 내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 북부지역에는 불 교문화의 유산과 민속놀이들의 유산, 양반 문화의 유산이 고스란히 보존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안동 일대의 경북 북부를 양반 문 화권으로 부르는 것은 조상들의 것을 소중히 여기는 이희승의 '딸각발이'를 연상시키는 외골수 양반들에 대한 댓가이다.
그러나 요즘 안동양반들은 예전처럼 큰 소리를 치지 못하고 있다. 해방이후 지금까지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서 그들의 조상들 처럼 의연히 나서지 못했기 때문인데, 그 댓가는 곧 그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안동 양반은 역사속에만 살아있다고....







의림지(義林池)와 장자못 설화

(97, 이하나)

의림지는 충청북도 제천시 모산동에 있는 저수지이다. 우리 나라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저수지로 손꼽힌다. 제천의 옛이름인 내토(奈吐)· 대제(大堤)·내제(奈堤)가 모두 큰 둑이나 제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 이 제방의 역사가 서력기원전후의 시기까 지 오르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세종실록』에서는 의림지를 "낮은 산줄기 사이를 흐르는 작은 계곡을 막은 제방은 길이 가 530척(尺)이며, 수위는 제방 밖의 농경지보다 매우 높아서 관개면적이 400결(結)이나 되었다. 못의 둘레는 5,805척이나 되고 수심은 너무 깊어서 잴 수 없다"고 하였다. 상주의 공검지(恭儉池)나 밀양의 수산제(守山堤), 김제의 벽골제(碧骨堤)와 같 은 시기의 것이지만 제방의 크기에 비해 몽리 면적이 큰 것은 제방을 쌓은 위치의 수위가 높기 때문이다. 현재는 물의 주입부에 서부터 토사(土沙)가 쌓여 작아진 것이다. 제방은 산줄기사이의 낮은 위치에 자갈과 흙과 모래, 벌흙을 섞어서 층층으로 다지되 제방의 이면이 크게 단(段)을 이루도록 하였다. 단면이 이중의 사다리꼴을 이루고 외면은 석재로 보강하였다. 출수구는 본래의 자리가 원토인 석비레층으로 그 위에 축조되었던 것이나 지금은 원형(原形)이 사태로 말미암아 없어지고 패어나간 흔적만 남아있 다.
옛날부터 의림지의 생성에 관한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내려 오는데 간단히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
옛날 내토(奈吐)마을에 인색하기로 소문난 부자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한 노승이 시주차 들렀는데 부자주인은 늘 하던 대로 이 를 박절히 거절했다. 주인의 거절에도 노승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목탁을 두드리자 마침 외양간을 치고 있던 주인은 쇠똥을 가 득 퍼서 스님의 바랑에 쑤셔 넣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스님의 태도는 의연하였다. 한동안 목탁을 두드리던 스님은 쇠똥 보시면 어떠냐는 듯이 정중히 절하고 그 집을 나선다.
'아무리 구두쇠라고 하지만 노승에게 이렇게 대할 수가.' 부엌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그 집 며느리가 얼른 쌀을 퍼다가 스님 을 뒤쫓아가 시아버지 대신 사과하고 이를 시주한다. 이때 노승은 착한 며느리에게 이렇게 귀뜸한다.
" 당신이 살고 싶으면 지금 당장 산 속으로 들어가시오. 다만 가는 도중에 어떤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보지 마시오."
그러나 며느리는 스님의 이 당부를 지키지 못했다, 황급히 아이를 들춰 업고 용두산으로 향하던 중 갑작스런 천둥번개에 놀라 그만 뒤를 돌아보고 말았던 것이다. 순간 세찬 비바람과 함께 집은 순식간에 물에 잠기고 며느리와 아기는 그 자리에 선 채 돌로 굳어져 모자(母子)바위가 되고 말았다.
의림지 전설은 악덕 주인의 죽음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집이 못으로 변할 때 그 집주인은 이무기로 변신하여 물 속에서까지 계 속 심통을 부린다. 가끔 물위로 올라와 사람이나 가축을 해치기도 하고, 또 못에서 수영하는 사람을 물귀신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런 못된 횡포를 보다 못한 이 고을 어(魚)씨 집안의 다섯 형제가 나서서 교묘한 방법으로 이무기를 죽여버린다. 의림지 인근 마을에서 전해오는 어씨오장사(魚氏五長士)의 이야기이다.
흔히 '장자못 설화'라 일컫는 이런 류의 이야기는 우리 나라 지명 전설의 대표적인 유형이다. 장자못 설화란 앞에서 소개한 의림지 전설처럼 부자가 중(또는 도승, 거지)을 학대한 벌로 집이 함몰하였다는 장자못부분과 며느리(또는 딸, 아내, 하녀)가 금 기를 어겨 돌이 되었다는 화석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 증거물에 따라 때때로 어느 한 부분만이 따로 이야기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럴 경우 대체로 앞의 장자못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타난다. 장자못 설화는 단순한 악행응징(惡行膺懲)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은 초자연적인 세계의 절대선적(絶對善的)인 질서를 대변하는 존재이고, 장자는 세속적인 본능적 욕망의 표상이며, 며 느리는 초월적 질서와 본능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장자못 설화가 권선징악적 교훈이상 의 인간의 존재양상에 대한 철학적인 인식을 담은 설화임을 말해준다. 이 설화는 광범위하게 전승됨으로 향유층의 의식을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폭넓은 분포와 전승과정에서 파생된 변이는 설화변이 연구에도 기여하는 바가 크다. 비록 문 화적·종교적 배경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이런 장자못 설화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이야기와 너무나 흡사하다. 이 런 현상을 두고 혹자는 설화의 세계성을 운위하기도 한다.
의림지 아랫마을인 장락동에서도 장자못 설화를 닮은 전설이 있다. 이곳에는 옛날에 큰절이 있었는데, 그 절터에 남아있는 7 층 모전석탑(보물 제 457호)의 형성과 관련된 이야기가 그러하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시주승에게 쇠똥대신 모래를 퍼주었고, 벼 락을 맞아 못 속으로 가라앉은 집이 여기서는 탑으로 변했다는 것뿐이다.
제천(堤川)은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본시 냇가에 형성되었던 마을이었던 것 같다. 제천의 고구려 때의 지명 '奈吐'에서 이 를 추정해 볼 수 있다. 奈吐는 시냇가의 터전을 일컫는 말로서 '내토'정도로 읽었을 것이다. 고구려 지명 내토(奈吐)는 바로 奈 堤로 바뀌고, 다시 고려 때의 堤州를 거쳐 지금의 제천(堤川)에 이른다. 아마도 오랜 세월에 걸쳐 냇가에 방북(堤)를 쌓아 오늘 날처럼 이렇게 큰 저수지를 만들었던 모양이다. 수리관개 뿐만 아니라 유서 깊은 경승지로 이름 있으며, 충청도 지방에 대한 별 칭인 '호서(湖西)'라는 말이 바로 이 저수지의 서쪽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저수지의 본래 이름은 임지(林池)라고 했다. 지금도 400년 이상의 수령을 자랑하는 노송이 우거진 것을 보면 옛날에도 방 죽가에 숲이 무성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임지란 이름 앞에 '의(義)'자를 덧붙인 것은 이 고을 현감이었던 박의림(朴義林)의 이름 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박의림현감은 이 제방공사에 인근 단양과 청풍 주민들까지고 동원했다고 한다. 그런데 『세종실록 』에는 이 제방의 명칭을 의림제(義臨堤)라 적고 있어 이 설도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의림지 축조의 역사는 조선조 박의림보다 700여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때 우륵(于 勒)이 처음 이 둑을 쌓았다고 한다. 축조자의 이름으로 둑의 명칭을 삼는다면 의림지가 아니라 우륵지라고 해야 옳을 듯 하다. 우륵은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가야국의 가실왕과 신라 진흥왕때 악사로 이름을 떨친 가얏고의 명인이다. 우륵은 그의 조국 가야 국이 어려워지자 신라에 귀하 하면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이곳 임지(林池)에 이르러 가야금을 벗삼아 말년을 보낸다. 그 가 조석으로 가야금을 뜯었다는 우륵대와 우륵정이 있어 이 사실을 더욱 뒷받침해준다.
문헌에 기록된 바로는 세종때 충청도 관찰사였던 정인지(鄭麟趾)가 수축하고 다시 1457년(세조3) 체찰사가 된 정인지가 금성 대군(錦城大君)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의 단종 복위 운동에 대비하여 군사를 모으면서 호서·영남·관동지방의 병사 1,500명 을 동원해서 크게 보수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 뒤 1910년부터 5년 동안 3만여명의 부역에 의한 보수하였던 것이 1972년의 큰 장 마때 둑이 무너지자 1973년에 다시 복구한 것이 오늘날의 것이다. 현재의 의림지는 호반둘레가 약 2㎞, 호수의 면적은 15만 147 ㎡, 저수량은 661만 1891㎥, 수심은 8∼13m이다. 현재의 몽리면적은 약 300정보에 이른다.
또, 의림지의 특산물로는 붕어와 빙어가 유명하다. 고원분지인 제천지방은 일교차가 매우 심하여 옛부터 유난히 말라리아 환 자가 많았는데 의림지의 붕어 창자회를 약처럼 사용했다고 한다. 그 쓴맛이 키니네 같아서 '약붕어'라는 말이 의림지 붕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송학산을 좌청룡으로, 백운산을 우백호로 하는 천하명당 용두산이 얼싸안은 의림지 이 거대한 호수는 울창한 노송과 수양버들 에 파묻혀 있어 더욱 운치 있는 1807년(순조 7)에 세워진 영호정(暎湖亭)과 1948년에 건립된 경호루(鏡湖樓)의 두 정자와 함께 높이 40척에 달하는 용폭포를 갖추고 있어 분명히 제천의 자랑거리로 손색이 없다. 게다가 이 호수는 기호(畿湖)와 호서(湖西)를 가르는 분기점이 되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런 유서 깊은 호수에 악성(樂聖) 우륵의 전설을 좀더 부각시킨;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싶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곳 의림지 숲 속에 가야금 산조가 은은히 울려 퍼지게 하면 어떨까? 박달재 고갯마루의 그 유행가 가락보다 훨씬 더 운치가 있지 않을까?










"힘은 샘물과 같이 안에서 부터 솟아나는 것이다. 힘을
얻으려면 자기 내부의 샘을 파야만 한다. 밖에서 힘을
구할수록 사람은 점점 약해질 뿐이다."


"친구를 칭찬할 때는 널리 알리도록 하고 친구를 책망
할 때는 남이 모르게 한다. - 독일 속담 -


"지식에 투자하는 것이 가장 이윤이 높다."
- 프랭크린 -






문경 새재 서낭신과 최명길 대감

(97, 김지현)

문경 새재는 영남 선비들의 유일한 한양으로서의 통로이자 과거길로, 각지의 한량과 시인 묵객이 노닐기도 하고 보부상이 넘 나들기도 하였으며 영남과 충청도를 경계하는 도계로 무인지경 사십 리 길이었으나, 지금은 드문드문 농가가 자리잡고 있고 관광 지 개발로 도로를 확장하고 위락시설도 갖추고 있다.
이러한 문경 새재를 한양 사대부 집의 젊은 선비 한 사람이 노비도 거느리지 않고 넘게 되었다. 이 이가 바로 후일 정사 공신 으로 영의정에 오른 최명길대감이다. 최명길은 조선 오백 년의 당파 싸움 중에서도 가장 당쟁이 치열했던 선조 19년부터 인조 25 년에 이르기까지 나라 안팎으로 어려운 사정에 처해 있을 때 명석한 판단과 능란한 정치 수완으로 외교 역량을 발휘하여 반대당 의 갖은 모함과 힐난을 극복하고 신생 대청국과의 화의를 주선, 국교를 강화함으로써 나라의 위기를 모면하고 국운을 바로 잡았 다. 이와 같은 친청 정책을 반대하는 정적들은 주관이 약하다는 혹평도 하였으나, 당시의 상황으로는 어쩔 수 없었고 후세 사람 들은 시운을 잘 탄 명재상이라고 찬양하기도 했다.
이러한 최명길이 백두의 젊은 선비로 있을 적에 안동 부사로 있는 외숙을 문안하기 위하여 안동으로 가는 길에 문경 새재를 넘게 되었다. 그 때에 한 굽이 길을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용모가 단정하고 자색이 아름다운 젊은 여자 하나가 나타나 최 명길의 뒤를 바짝 따라 오면서 애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선비님 이곳은 너무 험한 한길이라 연약한 여자가 혼자서는 무서 워서 갈 수가 없으니 선비님과 같이 동행을 하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원래 최명길은 인품이 원만하고 성격이 활달하여 호방하면서도 관대한 편이라 젊은 여인의 애원을 물리치지 않아 쾌히 동행해 줄 것을 승낙했다. 그러나, 최명길은 여인과 앞뒤에 서서 같이 걸어가면서도 그 여인의 동종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앞서 가 던 여인도 최명길의 눈치를 알아차렸는지 뒤를 돌아다보고 방긋 웃으면서 "선비님이 저를 의심하시는 모양이니 저의 정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사람이 아니고 문경 새재의 서낭신인데 얼마전 안동에 사는 모 좌수가 한양에 갔다가 안동으로 돌아가 는 길에 내 서낭당 앞을 지나면서 문경에 사는 이 모씨가 서낭신인 나에게 치성을 드리기 위해 바친 중국 비단으로 만든 저고리 를 보더니 '허황한 서낭당에 이렇게 귀하고 값진 비단옷을 바치다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로다.' 하면서 나의 치마저고리를 걷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 자기 딸에게 입혔으니 이 얼마나 분하고 원통한 일입니까? 이런 고약한 행동을 하는 자에게 저는 지금 벌 을 주기 위해 그 못된 좌수의 딸년을 죽이러 가는 길이온데 우연히 선비님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고 말을 하면서 최명길 의 눈치를 살펴본다. 최명길은 속으로는 놀라고 두렵기까지 하였으나 대장부의 의연한 자세로 태연자약하게, " 사람의 목숨 은 하늘에 있는 것(人命在天)인데 죽일 것까지야 없지 않소." 하면서 관대하게 깨우쳐 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자 그 여인 은 아무 말이 없더니 한참만에 겨우 입을 열었다. "선비님은 지금은 비록 백두 선비(벼슬을 하지 못한 사람)이나 미구에 과 거에 급제하여 정사 공신(인조 반정 때의 공신)으로 장래 영의정에 오를 위대한 어른이십니다. 하지만 명나라가 망하고 장차 청 나라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불원간 병자호란이 일어나면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피난하여 모든 정세를 파악하시고 강화를 주장하여 새로운 청나라와 화의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청나라와 화의를 하지 않으면 선비님은 말할 것도 없고 이 나라는 망하오리다. 나라의 운수가 불기하고 종묘사직(宗廟社稷)이 風前燈火같은 이 나라를 구할 사람은 오직 선비님 한 분뿐이오니, 아녀자의 하찮은 말이오나 깊이 명심하여 주시기 바라나이다. 제가 오늘 현신(見身)한 것은 선비님께 이 말을 전하기 위함이오니 소홀히 여기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그 여인은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최명길은 이상히 생각하고 급히 서둘러 길을 재촉하여 안동 좌수(安東座首)의 집을 찾아갔다. 예상한 바와 같이 과연 좌수의 딸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급사를 하여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혀 모두 경황이 없었다. 최명길은 처녀 아비인 좌수를 찾아 인사를 치 른 후 "나는 한양에 사는 의원인데 좌수 어른의 따님이 급사하였다기에 아까운 생명인지라 회생시키려 왔으니 따님의 방으 로 나를 인도하시오." 하였다. 최명길이 방에 들어가 보니 과연 문경 새재의 그 여인(서낭신)이 좌수의 딸의 목을 누르고 있다가 최명길을 보더니 살며시 일어서면서 "이제야 오시나이까?" 하고 얼굴을 붉히면서 인사를 하였지만 최명길 한 사람밖에는 아무에게도 보일 까닭이 만무하였다. 최명길은 주머니 속에서 미리 준비한 소합환(蘇合丸: 정신을 맑게 하는 약)을 꺼내어 병자의 입에 넣어주고 손발을 주물러 주니 좌수의 딸은 꾀병처럼 금방 소생하였다. 그리하여 최명길은 좌수에게 문경 새 재 서낭신에 대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문경 새재 서낭당에서 가져온 물건이 있는가 하고 물으니 좌수는 깜짝 놀라면서 서낭당 에서 비단 치마 저고리 한 벌을 가져와서 딸에게 입힌 사실이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그러면 그 치마 저고리를 깨끗한 곳 에서 불사르고 정결한 음식을 장만하여 치성을 드려야만 좌수 어른의 따님이 회생하여 후환이 없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이 말 을 들을 좌수는 백배 사례하고 최명길의 말에 따라 치성을 드리고 나니 좌수의 딸은 전과 같이 회생하였다.
이후 최명길은 닦아 온 학문을 더욱 높이 가꾸고 덕을 쌓아서 과거에 급제한 뒤 관직이 점차 높아져서 홍문관 대제학(弘文館 大提學)은 거쳐 삼상(우상, 좌상, 영상)에 올랐다. 병자호란을 당하여서는 중론을 물리치고 국내의 정세를 명석하게 분석, 파악 하여 북받치는 울화와 치욕을 꿋꿋이 참고 화청 정책(和淸政策)을 채택하여 국난을 극복한 사실은 최명길 대감이 소시(小時)에 문경 새재 서낭신의 계시와 예언을 좇아 허황하게 생각하지 않고 슬기와 인내로 나라를 구해낸 한 예라고 할 수있다.
영남 지방에는 서낭신에 얽힌 민간 설화가 도처에 무수히 산재되어 있고 또 이를 그 지방 서민들의 토속신앙으로 받들면서 윤 리 도덕에 어긋나는 일은 스스로 자제하고 급기하는 생활의 배경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설화를 절대적 사실로 믿기는 어려우나 설화속에서의 최명길대감은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이기에 사대부가의 명망 높 은 자제로서 무시해 버려도 무방할 한 여인의 간원을 경청하고 몸소 확인 실천한 것은 남자의 꿋꿋하고 변함없는 심중을 가히 헤 아릴 수 있다. 의리와 지조 따위를 아랑곳없이 목전의 이해 판계에 급급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우리의 고유한 전통 문화가 소멸되 어 가고 있는 오늘날 서낭당에 얽힌 설화(說話)야말로 우리 조상들의 얼이 담긴 이야기로서 지혜와 슬기로운 당시의 생활상을 엿 볼 수 있으며 서낭신의 계시(啓示)로 자신을 일으키고 나라를 구한 조그마한 전설이기는 하지만 우리 민족의 정신 문화면을 역력 히 엿볼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전설은 예전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로 역사연구방법에 있어서 사료를 연구· 분석하는 것 이외에도 전설, 설 화, 신화 그리고 발전도상에서 일정단계의 인간정신은 동일한 소산을 창조하므로 유추해 볼 수 있으므로, 역사연구방법의 범위가 확대되기는 하였으나 전설, 설화, 신화 등은 그 자체로서 허구성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거기에 숨 어 있는 뜻은 일정한 사실과 전승자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소재가 사실을 중심으로 수집· 연구· 분석한다면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은 역사적 사실들을 재구성해 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민중의식의 향상을 가늠할 수 있을 것 이다.


불상의 일반적 형식

부처님의 존상을 보고 일견하여 어느 부처님이라고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은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절을 순례하여야 생기는 것이나 차후에 그러한 능력을 가지기 위하여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는 존상의 실제 모양에 의하여 구별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머리에 쓰는 보관과 그 깨달은 진리를 상징하는 손의 모양(수인 : 手印 또는 인상 : 印相) 그리고 소지한 물건의 종류에 따라 각 존상의 특징이 있으므로 이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비로자나불 : 삼신불(三身佛)이라하여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이라는 용어가 있다. 비로자나불은 법신불이기 때문 에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원래 모습인 진리 자체를 상징하는 부처님으로서 손의 모양은 그림과 같이 두 주 먹을 오른손이 위로 가도록 아래위로 포개고 밑의 왼손 검지를 위의 오른손 주먹으로 감싼 지권인의 모습이다.
또는 주먹쥔 왼손을 오른손 전체로 감싼 모습도 많이 보인다. 삼존불을 모시는 경우에 좌우의 협시불로 노사나불과 석가모니 불을 모시는데 두 부처님이 모두 보관을 쓴 보살의 모습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다.

(2)석가모니불 : 입상일 경우에는 오른손은 시무외인, 왼손은 여원인을 하고 계신데 그림과 같이 시무외인은 손바닥 이 앞을 향하도록 가지런히 펴서 어깨까지 올린 모양이며, 여원인은 손바닥이 앞을 향하도록 하여 손 전체를 밑으로 늘어뜨린 수 인이다.
이 시무외인은 중생의 우환과 고난을 해소시키는 수인이며 여원인을 중생의 소원을 이루게 하는 수인이다.
그리고 좌상(坐像)일 경우에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손모양을 한 것이 통례이다. 항마촉지인은 그림과 같으며 좌상의 모 양은 결가부좌한 좌석의 자세에서 오른손을 풀어 무릎을 얹고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모양이다. 협시하는 보살은 기본적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다.
따라서 삼존을 모시는 경우에 왼쪽에 문수 보살, 오른쪽에 보현보살을 모시는 것이 원칙이지만 변형으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 살을 협시보살로 모시는 경우도 있다.
(3)아미타불 : 아미타불은 대개 미타정인(彌陀定印)의 수인을 하고 있는데, 이 미타정인의 손모양은 좌선 자세에서 양손의 검지를 꼬부려 손가락 끝을 엄지손가락 끝에 붙이되 검지손가락 등이 서로 맞닿도록 하는 상품상생인(上品上生印)을 비롯 하여 아래의 그림과 같이 아홉가지의 모양이 있다.
이것은 구품(九品)이라 하여 극락정포에 왕생하는 아홉 가지의 차별을 의미하는데, 상품·중품·하품을 각각 상·중·하로 세 분한 아홉가지이다.
협시하는 보살로는 관세음보살과 대제지보살이므로 미타삼존을 모시는 경우에는 왼쪽에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오른쪽에 대세지 보살을 모시는 것이 통례이다.

(4)약사여래불 : 약사여래불은 다른 불상과 달리 손에 약그릇을 들고 계시기 때문에 쉽게 식별할 수가 있다. 입상과 좌상이 동일한 양식이며 협시 보살로 왼쪽에 일광보살, 오른쪽에 월광보살을 모신다.

(5)미륵존여래불 :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에 이 사바세계에 내려오시어 중생을 제도할 미래의 부처님으로서 보살상으 로도 모시어 미륵보살이라고 하며 보통 탑으로 된 보관을 쓰시거나 손에 탑을 가지고 있는 모습으로 모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