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의 역사
(96,방수미)
I. 序    論

  제주.거제.진도.남해에 이어 우리 나라에서 다섯번째로 큰 섬 강화도는 11개 유인도
와 17개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293㎢이고 남북의 길이가 30㎞, 동서의 길이
가 12㎞이며, 해안선 길이가 99㎞이다. 강화도는 서울신촌시외버스터미널에서 오전 5
시경부터 5분 간격으로 버스가 있으며 강화 대교를 따라 강화읍까지 1시간 10분 정도
가 걸린다. 강화읍내는 숙식 시설이 많아 주로 하루씩 묵고 오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강화도는 김포 반도에 이어진 내륙이 오랜 세월 침강하면서 섬이 되었다. 옛
날에는 배로 왕래하였겠지만 최근에 완성된 강화대교를 이용하여 섬아닌 섬으로 사람
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강화도는 비록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백두산.한라산과 더불
어 민족의 성산이라 꼽히는 마니산이 있는데 매해 전국체전을 하노라면 체전주체지로
성화가 운송되어질때 이 마니산에서 성화가 처음 달리는 것이다. 낮은 저산성산지가
발달되어 있고 비교적 넓고 기름진 평지가 펼쳐져 있다. 옛날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강화도는 여전히 우리 나라의 첫손 꼽히는 성지이다. 단군이 하강하신 이후 마니산
참성단에서 제사 지내며 하늘의 뜻을 이어받아 왔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기본 정
서가 이곳에 있는 것이다.
 본론은 강화도의 아픈 과거를 대신하는 사건들 하나하나를 소개하면서 전체적인 강
화의 역사를  설명해 나가도록 하겠다.

II. 本    論

1. 선사.삼국시대의 강화도
 1) 선사시대
  강화도의 역사는 한반도의 태동과 함께 한다. 단군 이전으로 훨씬 거슬러 올라가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하점면 장정리, 화도면 사기리와 동막리 등지에서 채집되곤 한
다. 신석기 유물 또한 군내의 여러곳에서 채집되어 한반도에서 가장 일찍 사람이 살
았음을 암시한다.
 선사시대에 지배층을 형성했던 청동기인들의 고인돌 무덤이 하점면 부근리와 신삼리
등지에 산재된 점이나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내기 위해 쌓았다는 마니산에 있는 참성
단(塹城壇), 단군이 세아들에게 명하여 쌓게 하였다고 전하는 길상면의 삼랑성(三郞
城)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계속적인 인간의 거주가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단지 수백명이 들어야 할 정도의 수십톤에 이르는 거대한 돌들이 어디서 어떻게 옮겨
왔는지가 의문일 뿐이다.
 2) 고대시대
  중국으로 통하는 관문이기도 하고 삼국의 최대 쟁탈지인 한강의 어귀이기도 한 강
화도는 선사시대에 이어 삼국시대에도 끊임없이 주목받아 왔다. 고구려와 백제의 국
경으로 해전과 육전의 요충지였고, 고구려는 일찍이 이곳에 '혈구군'을 설치하였다. 중
국과 해상.육상 통로가 없었던 신라 역시 자주 이곳을 넘봤다. 삼국이 통일되면서 757
년에 통일신라가 강화를 점령하면서 '해구군'이라 개칭하였고 790년에 다시 '혈구진'이
라는 군진을 설치하였다.
 
2. 고려시대의 강화도
  강화는 940년에 현으로 승격되었고 고려시대에 와서야 강화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
었다. 그러나 강화는 고려역사에서 빠져서는 안되는 중요한 역사적 장소이다. 1231년
몽고의 대대적인 침입을 피해 고종과 최씨정권은 개경에서 가까운 섬 강화로 천도
(1232)하여 끈질긴 저항으로 39년간의 장기전을 치르게 된다. 고려 건국 이후에도 前
삼국간의 지역 갈등과 민족 갈등이 있었으나 강화 천도 이후 팔만대장경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단일민족으로의 민족주체성이 확립하게 되었다. 당시의 고려 궁터가 강화읍
관청리에 남아 있다.
 1) 몽고의 침략과 강화천도 1232
 고려는 1170년 정중부로 대표되는 무신의 반란으로 100여년간 무신 정권이 지속되었
다. 그 중에서도 최씨가문의 4대에 걸친 60여년의 집권기는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시기였고 반면에 사회적으로 몽고의 침입에 시달리는 시기이기도 한다. 초기의 무신
정권의 혼란은 최충헌의 등장에서 최우로 이어지는 독재체제속에서 점차 안정되어 간
다. 그러나 최우의 집권 10년만에 몽고의 침입이 시작되고 대제국 몽고의 무리한 요
구에 최우는 1232년 강화로 천도하고 몽고와의 장기전을 준비하였다.
 대륙민족인 몽고는 해상전에 약해 강화도가 섬이라는 이유로 접근하지 못하고 대신
에 전국으로 흩어져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이때 소실된 것이 초조 대장경이나 황
룡사9층목탑 등이 있다. 천도 이후 강도(江都)라 불리던 강화에서의 고려 조정은 전란
에 휩싸여 고통을 받고 있는 민심의 수습과 통일, 전쟁의 승리를 불력에 호소하기 위
하여 1236년부터 16년에 걸쳐 8만 1,137매의 대장경을 완성하였다. 이는 시련 속에 제
작된 문화재이니 만큼 고려 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몽고는 항전이 계속되는 동안
에도 무리한 요구를 동반한 화친을 간간이 요구하였고 최씨가문은 몽고의 철수만을
요구하였다. 40여년간 계속된 몽고와의 항전은 강토가 피폐되고 백성도 지쳐 갔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달리 생각되었던 한민족으로서 민족 주체성이 완성된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강화의 천도 역사는 최씨정권의 몰락으로 1270년에 몽고와 강화
가 성립되어 고려 조정은 다시 개경으로 옮겨지면서 막을 내린다.
 
2)삼별초의 난 1270
 삼별초는 최씨의 사병부대적인 성격이었으나 장기적인 몽고와의 항전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몽고와 강화가 성립되면서 삼별초는 몽고와의 강화에 반대하고
강화도에서 몽고와 고려 조정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고려조정의 탄압에
의해 삼별초는 1천여척의 배에 각종 재물과 함께 고려에 남아 있던 고관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고 진도로 남하하여 항쟁을 계속하였다. 삼별초의 난은 강화도, 진도를 거쳐
제주도에서 배중손이 전사한 가운데에서도 최후의 항전을 계속하다 4년만에 진압되었
다.

3. 조선시대의 강화도
  강화도의 역사적 기능이 더해짐에 따라 고려 우왕때 강화부로 승격된 이후 조선 시
대에도 계속적인 승격이 이루어지고 부윤 등이 파견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효종은 호
란 당시 강화도에서 잡힌 것을 생각하여 북벌 계획의 일환으로 강화도에 진보를 설치
하는 등 방비를 강화하였다. 효종의 사업은 숙종 때까지 계속되어 내성.외성.12진보.53
도대 등이 축조.설치되어 이중, 삼중의 요새화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탄탄한 군사적
위치를 바탕으로 조선 후기의 잦은 외세의 침입에도 굳건히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
다. 근대에 파괴된 성곽중에서 현재 복원되었거나 상태가 양호한 전적지는 스물 여덟
곳이다.
 1)병자호란 1636
 광해군의 부윤파견이후 인조는 1626년 강화를 유수부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그 이듬
해 정묘호란을 겪으며 인조는 강화로 피난하여 당시의 후금과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에는 강화가 완전 함락되고 마는 치욕스런 사태에 이르른다.
 정묘호란을 피해 강화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보낸 인조는 이곳에 행궁을 짓게 했다.
대륙민족으로 해상전에 약한 청국의 또다른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피신처를 마련해
두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인조14년 12월 막상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상황이 판이
하게 달랐다. 인조는 우선 강화유수 장신에게 강화를 튼튼히 지키라고 명하고, 정묘호
란 때 유도대장이었던 김상용으로 하여금 종묘사직의 신주를 모시고 봉림대군등과 빈
궁과 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로 피신케 했다. 그러나 막상 한성을 빠져나가려던 인조는
남대문앞에서 청군에 의해 길이 막혀 소현세자와 함께 일단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으
나 전세는 불리하였다. 계획상 다음날 새벽 강화로 떠나려 하였으나 밤새내린 눈으로
길이 막히고 말았다. 청나라장수 용골대는 정묘호란때 인조가 강화도를 피신한 것을
상기하며 강화를 점령하기 위한 전략을 세웠다. 청군은 청군을 얕본 조선군의 허름한
방어를 틈타 뗏목으로 물길을 건너 갑곶에 상륙하여 강화를 함락시켰다. 강화가 함락
되자 김상용은 분신하고 군.민 할것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청군의 침략 한달여
만인 1637년 1월 30일 조선은 남한산성마저 함락되어 가장 치욕적인 역사인 삼전도의
굴욕을 하게 되었다.
4. 근대의 강화도
  근대에 들어서도 프랑스의 병인양요(1866), 미국의 신미양요(1871), 일본의 운요호사
건(1874)등 제국주의자들이 한성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호시탐탐 넘보는 게 강화도였
다. 고려나 조선의 강화천도에 따른 귀족적 문화재가 산재된 강화도의 일대의 고분들
은 파헤쳐 고려청자를 비롯해 최상급인 부장품들을 도굴하거나 민가를 약탈하고 외규
장각에 소장된 귀중한 도서들을 빼내갔다. 프랑스박물관에 소장된 규장각 도서들이나
직지심경 등은 이때 약탈해 간 것이다. 그들이 빼내 간 도서와 문화재는 현재 우리
나라에는 없는 희귀한 것들로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감히 헤아릴 방도가 없다.
 1)병인양요1866
  조선 후기 서양 선교사에 의해 전래된 천주교는 조상의 제사 거부로 인하여 전통적
인 유교와 마찰을 빚게 되었고 중국의 천주교 탄압에 이어 조선에서도 1866년 정월에
이른바 병인박해라 불리는 대대적인 사옥이 전개되어 프랑스신부 9명과 천주교신자 8
천명을 처형하게 되었다.
 피신한 프랑스신부의 연락으로 로즈(Roze)제독은 같은해 9월에 전함 7척과 2천여 명
의 군사를 거느리고 강화 갑곶진에 닻을 내리며 선교사 처벌책임자처단, 배상금지급,
통상조약체결등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강경책을 수립하였고 장기전에 돌입하
기 위하여 프랑스군은 강화성을 함락하고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겨울을 준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0월 3일 정탐에 나선 프랑스군에게 양헌수(梁憲洙)가 지휘하는 조선
의용군 부대가 매복해 있던 전등사 입구에서 일제히 포격을 가했다. 정족산성 전투에
서의 패배로 프랑스군은 갑곶진으로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들이 지
나간 자리는 전부다 폐허가 되어 있었고 행궁과 외규장각에서 서책 340여종과 은괴
19상자등을 약탈해 갔으며 운반하지 못한 남은 서책등과 외규장각을 불태워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2)신미양요1871
 일찍이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전부터 미국 이양선의 통상 요구가 꾸준히 전개되었으
나 번번히 실패하였고 병인양요 이후 고조된 위정척사운동으로 일체의 요구가 받아들
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무시한 채 미국의 상선인 제너럴 셔먼
(General Sherman)호가 평양의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문화재 도굴과 약탈을 일삼
았다. 평양감사 박규수는 식량을 대주며 조용히 돌아갈 것을 설득하였으나 만행이 계
속되자 평양 관민이 합세하여 대동강에서 셔먼호를 불태워 버리고 미국 선원을 살해
하였다.
 이에 미국은 그전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사건의 진상 확인, 관련자 처벌, 배상금을
요구하는 한편 극동 함대를 파견하여 강화 해협을 정찰했다. 1871년 4월에 미국은 로
저스(Rodgers)제독을 파견하여 5척의 군함과 1,2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강화 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던 중 광성보(廣城堡).덕진진(德津鎭)등에서 포격을 받아 인천 방면으로
퇴각하였다가 다시 북상하여 초지진(草芝鎭).덕진진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병인양요
이후 강화된 국방력과 병사들의 분전으로 어재연(魚在淵)장군이 이끄는 조선의 수비
대가 광성보와 갑곶 등지에서 미군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광성보전투에서 미군 뿐만
아니라 어재연장군과 조선 병사들이 모두 전사하게 되었고 강화는 또 한차례의 전란
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3) 운요호사건
 신미양요 이후 강화도 동쪽 해안에 포대를 설치하여 외침에 대비하고자 하였으나 이
듬해 일어난 운요호 사건으로 초지진과 포대가 일본군함의 포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
다. 1875년에는 일본군이 '마실물을 요구한다'는 핑계로 강화도에 운요호를 대고 개방
을 요구하며 살인.방화.약탈을 일삼기에 조선군은 이를 저지하였다. 그 이유로 일본은
강력한 군사력을 동원했다.
 1876년 2월 26일 8척의 일본군함의 무력시위속에서 강화진무영병사를 훈련시키던 연
무당에서 조선은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에 서명하고 말았다. 이 조약은 조일수호조
규.강화조약.병자수호조약이라는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주로 강화도조약이란 명
칭이 일반적으로 통용된다. 조약의 내용은 조선을 자주국으로 규정하여 청국의 간섭
을 배제하였으며 부산등 세항구를 개항하게 하였으며 과거 미국이나 영국이 자신의
나라에 그랬던 것처럼 치외법권, 해안측량권등을 요구하여 조선의 주권에 침해하였다.
강화도조약은 아시아의 식민지화를 겨냥하여 대만에 이어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의
도에서 체결되었고 이로 인해 조선의 자력에 의한 개방은 좌절되었다.

III. 結    論

  강화도는 한마디로 말해 반만년 한반도의 역사의 시작이며 또한 걸쭉한 사건들에
언제나 휩싸인 고통의 땅이다. 강화도는 한강.예성강.임진강등 3대 하천 어귀에 있으
면서 개경이나 한성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삼국 시대에는 한강을 차지하기 위한 쟁
탈과정으로 강화도에서 접전을 벌였고 고려 시대에는 동.서양에 할것없이 전란의 공
포에 휩싸이게 한 몽고족을 피해 강화 천도를 단행하였던 곳으로 38년간 고려의 수도
로써 기능을 하였고 이러한 역사적 가치는 현재 사적 제133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려
궁터가 작게나마 전한다. 또한 조선 시대의 강화도야말로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약탈당하고 불태워지고 하던 역사를 가졌다. 고려 몽고족에 이어 조선 시대에는 여진
족(만주족)에 의한 병자호란을 시작으로 하여 프랑스인에 의한 병인양요, 미국인에 의
한 신미양요 등이 있으며 최종적으로 일본의 배 운요호에 의하여 강화는 굴복하고 말
았다.
  강화는 전시대에 걸친 수난에 대항하면서 상처투성이의 땅이 되었다. 한마디로 피
에 물든 한국사의 축소판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수난 속에서도 일궈지고 지켜
진 문화-특히 팔만대장경,상감청자등은 저항속에서 일구고 승화시킨 것이어서 귀하고
각별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조선 시대의 외규장각에 비치된 중요한 서적들이 이민
족에 의해 약탈당하거나 방화로 인하여 소실되어 안타까울 뿐이다.
  삼국 시대의 혈구라는 이름에서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처음 강화라 칭해진이후 고
려 충렬왕때 인주(현재 인천)에 병합되었다가 우왕3년(1377)에 강화부로 승격되었다.
1973년에 강화면이 읍으로 승격된 이후 하나의 군으로 자리매김 하였으나 바로 3년전
인 1995년 1월 강화는 다시 인천광역시로 통합되어 고려 충렬왕때의 상황으로 돌아가
게 되었다.
  강화는 선사시대의 고인돌 유적으로 시작하여 단군의 유적으로 전해진 삼랑성과 참
성단등을 거쳐 고려 시대의 궁터, 조선 후기에 프랑스군인에 의해 전부 불에 탔으나
간신히 남아 증축한 용흥궁(철종의 집)이나 아니면 이민족의 침입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초지진이나 광성보등을 살펴볼 수가 있다. 강화는 아픈 역사의 흔적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관광지가 되었지만, 강화는 여전히 강화이고 강인한 땅이다. 그것이 해쳐서
는 안 될 강화의 정서이다.
 
 
 

☞참 고 문 헌☜
『경기남부와 남한강』, 한국문화유산답사회, 1996, 돌베개
『섬.섬.섬』, 최성민, 1996, 한겨레 신문사
『한국민속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웅진출판